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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고 걸어다니는 예술작품

숨 쉬고 걸어다니는 예술작품

뉴욕 타임스 스퀘어의 보디페인팅 행사에서 한 모델이 도로변에서 포즈를 취하자 택시를 타고 지나가던 승객이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다. 뉴욕에서는 공공장소의 누드가 공연이나 전시, 쇼의 일부일 경우 합법이다.
미국 뉴욕 맨해튼의 소극장 진 프랭켈 시어터. 진바지에 복잡한 무늬의 푸른색 셔츠를 입은 앤디 골럽(49)이 무대 위에서 그림을 그린다. 1970년대에 유행하던 포크송이 배경음악으로 흐른다. 객석에서는 관객과 사진가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골럽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캔버스는 살아 숨쉬는 미술학도 딜런이다.

골럽은 뉴욕에서 작품 제작을 가장 많이 하는 보디페인터이며 딜런은 그가 제일 좋아하는 모델이다. “딜런의 몸에 보디페인팅할 때마다 좋은 그림이 나왔다”고 골럽이 무대에서 말한다. 알몸에 검은색 팬티만 입은 딜런은 표정 없이 조용하게 서 있다. 골럽은 그녀의 몸통 중앙에 노란색 단검을, 얼굴에는 검정색 나뭇가지들을, 양쪽 가슴 위에는 파란색 원들을 그린다.

PBS 방송의 ‘그림을 그립시다(Joy of Painting)’에서 화가 밥 로스가 캔버스 위에 눈 덮인 산을 완성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다만 골럽의 캔버스(딜런)는 가끔씩 숨을 내쉬어 인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는 점이 다르다. 그림이 완성돼 가면서 딜런은 완전히 알몸이 됐다. 1시간 30분 만에 그녀의 몸은 이리저리 엮인 선들과 다채로운 색상의 물감으로 뒤덮인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골럽은 뉴욕의 화가 가운데 작품 때문에 체포된 경험이 있는 극소수 중 1명이다. 문제는 그의 그림이 아니라 캔버스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성별과 체형을 막론한 알몸의 사람들. 게다가 골럽은 콜럼버스 서클, 타임스 스퀘어 등 공공장소를 포함해 어디서든 보디페인팅 작업을 한다. 사람들 앞에서 옷 벗을 용기만 있다면 골럽은 기꺼이 당신의 몸을 그림으로 뒤덮인 환각적인 캔버스로 탈바꿈시킬 것이다.

이렇게 기이한 광경으로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은 골럽은 뉴욕을 상징하는 인물로 자리 잡아간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모델이 샤워하는 순간 배수구로 씻겨 내려간다. 골럽은 “이런 일시성이 일반 미술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멋진 요소”라고 말했다.

보디페인팅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고대 종족(사람들이 진흙으로 신과 전쟁의 이미지를 몸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부터 1933년 시카고 세계박람회(발명가이자 화장품 재벌인 맥스 팩터 1세가 댄서 겸 배우 샐리 랜드의 알몸을 영화 분장용 화장품으로 장식한 혐의로 체포됐다)까지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예술 형태가 주류 대열에 올라선 건 1992년 데미 무어의 보디페인팅 이미지가 베니티페어 표지에 등장하면서부터다. 그녀의 알몸에 남성 정장과 넥타이를 그려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낸 보디페인팅이 큰 화제를 모았다. 2000년에는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 연례 수영복 특집호에 보디페인팅을 소개하는 코너가 생겼다.

골럽이 이전의 보디페인터들과 다른 점은 작품을 박람회에 전시하거나 비공개 장소에서 사진 찍어 보여주는데 만족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과 제작 과정을 공공장소에서 보여주기를 원한다. 지난 7월 중순 골럽은 제2회 뉴욕 보디페인팅 데이를 개최했다. 100명의 누드 모델과 75명의 화가가 맨해튼 중심가에 모였다. 작품 제작이 끝난 후 골럽은 나체 모델들과 함께 유엔 본부까지 행진을 벌였다. 베테랑 모델 애비 재스민 와트는 나체 옹호 운동가로서 그 행사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그림으로 뒤덮인 알몸에 신발만 신은 그녀는 “나체를 성적인 것과 연관시킬 필요는 없다”고 밝혔다.

“사람들은 타임스 스퀘어 같은 공공장소에서 보디페인팅 작업 광경을 보면 혼란스러워한다. 이런 광경에 익숙하지 않아 누군가가 무슨 일인지 설명하고 확인해줘야 한다. 사람들이 내게 다가와서 ‘이게 무슨 행사냐?’고 물으면 난 ‘공공예술’이라고 대답한다.”

골럽은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으로, 미술을 부전공으로 선택했다. 하지만 중요한 경제학 시험에서 낙제하고 난 뒤 미술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졸업 후 몇 년 동안 공공 교육기관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그는 바위, 신발, 테이블, 자동차 등 색다른 사물에 그림 그리는 일에 매료됐다. 골럽은 마네킹에 그림을 그리다가 인체가 훌륭한 캔버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2006년 뉴욕 아트엑스포에서 한 친구에게 그 아이디어를 말하고 모델 몇 명을 소개받았다. “내 작품이 걸어 다니는 걸 보면서 이상한 감흥에 사로잡혔다”고 골럽은 회상했다. “그래서 이 일을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보디페인팅을 계속했다. 그리고 곧 공공장소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델에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참여하는 모델 수도 갈수록 늘어났다.

그러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골럽은 뉴욕 시내에서 누드 모델의 몸에 그림 그릴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데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은 시간을 바쳤다. 뉴욕에서는 공공장소의 누드가 ‘공연이나 전시, 쇼의 일부일 경우’ 합법이다. 하지만 2011년 초 골럽과 모델 2명이 체포됐다. 그해 여름 또 다른 모델 조 웨스트도 체포됐다. 시민자유 전문 변호사 론 큐비가 골럽 사건을 무료로 맡아 재판에서 승소했다. “난 내가 옳다는 걸 알았다”고 골럽은 말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공소 기각 판결을 내릴 때 골럽이 낮 시간 동안 공공장소에서 나체 모델의 몸에 그림을 그릴 경우 다시 체포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의 작품이 어린이들이 보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처사다.
 “물감은 내 몸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킨다”
2011년 6월 뉴욕 유니언 스퀘어에서 골럽이 상의를 벗은 여자 모델의 몸에 그림 그리는 모습을 한 소년이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골럽은 뉴욕시민자유연합(NYCLU)을 통해 시 당국에 호소했다. 시 관리들은 골럽이 하루 중 어느 때라도 합법적으로 공공장소에서 나체의 남녀 몸에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3가지 조건이 붙었다. 어린이 장난감 업체인 토이저러스 매장 앞에서 보디페인팅 행사를 벌여서는 안 되고, 행사 장소와 시간을 미리 공지해야 하며, 모델은 속옷 부위에 그림을 그리기 직전까지는 속옷을 착용해야 한다.

골럽은 지난해 처음으로 시 공원관리부로부터 뉴욕시 보디페인팅 데이 개최를 승인 받았다. 그는 요즘도 가끔 경찰의 제지를 받을 때가 있지만 타임스 스퀘어의 경찰관들은 그를 알아본다. 골럽은 그냥 그림을 그리고 싶을 뿐인데 이런 싸움을 치러야 한다는 데 싫증이 났다.

그렇다면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고 몸이 그림으로 뒤덮이는 기분은 어떨까? 그리고 골럽의 보디페인팅 작업에 참여하려는 모델 자원자가 왜 그렇게 많을까? 모델마다 생각이 다르다. “긍정과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쪽, 두 부류로 나뉜다”고 골럽은 말했다. 그는 모델이 보디페인팅에 적합한 정신 상태가 아닐 때는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일부 모델은 예술적 체험보다는 성적 체험에 더 관심이 있고, 일부는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데 집착한다.

모델의 입장에서 볼 때 보디페인팅의 효과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 경험이 자신의 신체에 자신감을 갖게 되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새로운 취미가 될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부모가 이 사실을 알고 화를 내거나 새 침대 시트에 물감을 묻히거나 벌거벗은 채로 경찰서에 잡혀갈 수도 있다.

조 웨스트가 그런 경우였다. 그녀는 과감한 누드 포즈를 취한 경험이 많은 직업 모델이다. 2011년 맨해튼 한복판에서 골럽이 그녀의 몸에 그림을 그리는 내내 경찰관들이 현장에 있었다. 그들은 웨스트가 검정색 끈 팬티를 벗을 때도 옆에 가만히 버티고 서 있다가 골럽의 보디페인팅 작업이 끝나자 벌거벗은 그녀를 붙잡아 경찰차에 태웠다.

웨스트는 경찰서 청소년 범죄과에서 수갑을 차고 20분 동안이나 의자에 묶여 있다가 옷을 건네 받았다고 회상했다. 그때 그녀는 ‘내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됐지? 내 인생이 어떻게 된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웃으면서 말하지만 당시에는 “매우 괴로웠다”고 그녀는 돌이켰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골럽은 작업에 들어가기 전 그녀에게 체포될 수도 있다고 알려주면서 그렇더라도 공소는 기각될 거라고 안심시켰다. 결국 그의 말대로 됐다. 게다가 웨스트가 겪은 일이 타블로이드판 신문에 대서특필됐고 그녀는 시 당국으로부터 보상금도 두둑하게 받았다. 만약 웨스트가 투자금융업계에서 일했다면 그런 경험이 문제가 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전업 모델을 꿈꾸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홍보 효과가 필요했다.

다른 모델들의 경우 직업적 측면보다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상을 얻었다. 골럽은 체형과 건강 상태가 매우 다양한 모델들과 함께 일한다. 몇 년 전 그는 한 병원에 찾아가 전이성 유방암 4기인 여성 환자 프레디 그리셰이버(65)의 몸에 보디페인팅을 했다. 그녀는 그 후 2개월 만에 사망했다. 작업 과정을 담은 비디오에서 그리셰이버는 울면서 “난 멋지게 이곳에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골럽의 그림이 병원의 우중충한 배경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스태튼 아일랜드에서 온 키키 앨스턴-오웬스(41)는 보디페인팅 모델 작업이 9명의 자녀를 잃은 후 얻게 된 우울증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의사들은 임신 중이나 출산 후 어떤 원인으로 그녀의 아기들이 죽었는지 아직도 밝혀내지 못했다). “보디페인팅할 때 물감은 나를 상처와 고통, 슬픔, 스트레스 등 내 인생을 짓누르는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장벽이 된다”고 그녀는 말했다. “보디페인팅을 하고 나면 완전히 새로 태어난 기분이 든다. 모든 게 물감 속에 흡수된 듯한 느낌이다.”

앨스턴-오웬스는 아이들을 잃은 뒤 체중이 불어 현재 114㎏이다. 공공장소에서 플러스 사이즈 모델로 작업하는 것이 자신에게 힘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디페인팅 덕분에 내 아이들이 죽고 없어도 내 안에 여전히 아름다움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뚱뚱한 몸과 늘어진 가슴을 보고 사람들은 ‘비만이다, 징그럽다’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내 생존 스토리다. 이 흘러넘치는 지방 뒤에는 생존을 위한 투쟁을 말해주는 메시지가 있다.”

- ZACH SCHONFELD NEWSWEEK 기자 / 번역 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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