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크레타 섬의 소규모 와인업체들, 값싼 벌크 와인 대신 토착 품종 개발, 와인투어 등으로 이미지 쇄신에 나서 카라비타키스 와이너리는 현재 연간 생산량 12만 병 중 약 75%를 토착 품종의 포도로 만든다.그리스 크레타 섬의 마누사키스 와이너리는 포도밭이 산봉우리 위에 펼쳐져 있다. 그곳까지 가는 유일한 도로는 바위투성이 흙길인데 자동차 바퀴 자국이 하도 깊게 패여 튼튼한 4륜구동차도 변속기가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다. 이런 곳에 포도원이 있다니 놀랍다. 게다가 이 섬은 고급 와인으로 알려진 곳도 아닌데 이곳에서 생산되는 포도의 품질이 우수해 또 놀랐다.
이 포도원을 소유한 마누사키스 집안은 크레타 섬의 평판을 바꿔놓을 만한 와인을 만들겠다는 각오가 대단하다. 그들이 이 험난한 산악지대 13만㎡에 포도나무를 심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마누사키스 와이너리의 공동소유주 아프신 몰라비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온 전문가들이 질 좋은 와인을 원한다면 그곳에 포도밭을 만들라는 조언을 했다”고 말했다.
크레타 섬은 유럽에서 와인 제조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곳일지도 모른다. 고고학자들은 카토 자크로스에서 4000년 된 미노스 제국의 포도원 유적지를 발굴했다. 또 아르하네스에선 3500년 된 포도즙 짜는 기구가 발견됐다. 하지만 와인의 품질은 그 역사를 따라가지 못한다. 지난 100년 동안 크레타 섬은 값싸고 맛이 강하며 산화된 와인을 대량생산했다. 하지만 요즘은 소수의 와인업체들이 품질 좋은 와인 생산뿐 아니라 크레타 섬의 토착 포도 품종 개발에 적극 나선다. 게다가 그리스인과 그들의 사업에 큰 타격을 준 금융위기가 뜻밖에도 이들 와인업체엔 전화위복이 됐다.
그동안 크레타 섬은 부적합한 환경과 정부 정책이 맞물려 별 볼 일 없는 와인을 생산해 왔다. 20세기 초부터 소규모 업체보다는 공동사업체들이 와인업계를 지배하면서 값싼 벌크 와인(병에 담지 않고 대량으로 판매한다)을 만들었다. 요즘도 크레타 섬의 와인 공동사업체들은 그리스 와인의 20% 이상을 생산한다. 1970년대에 필록세라(포도나무의 뿌리를 먹는 해충)가 만연해 이 지역의 포도나무가 멸종되다시피 했고 1990년대 말부터 정부가 토착 품종 개발에 매달리면서 거의 모든 포도원이 다수확 화이트 품종인 빌라나만 심었다.“요즘 크레타 섬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역사가 20년밖에 안 됐다”고 몰라비는 말했다. 그의 장인 테드 마누사키스는 크레타 섬 토착 와인 개발에 앞장섰다.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 갔던 마누사키스는 고향 크레타 섬(바토라코스 마을)에 뭔가 좋은 일을 하고 싶어 귀향을 결심했다. 그는 수십 년 전 단돈 2달러를 들고 고향을 떠났다고 한다. 1993년 크레타 섬으로 돌아온 그는 포도나무를 기르기 시작했다. 마누사키스 와이너리는 그로부터 4년 후 첫 수확을 했고 ‘노스토스(Nostos)’라는 상표로 와인을 생산했다. 그리스어로 ‘귀향’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첫 수확한 와인은 거의 수입 품종(대체로 프랑스 론 지방의 품종)으로만 만들었다. 마누사키스는 그렇게 하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최근 크레타 섬의 소규모 와인업체들은 국제적인 품종의 질 좋은 와인 생산과 토착 포도 품종 개발에 노력을 기울인다.2007년 워싱턴 DC에 살던 마누사키스의 딸 알렉산드라가 크레타 섬으로 이주했다. 얼마 후 몰라비와 결혼한 그녀는 마누사키스 와이너리의 포도 품질을 높이기로 마음먹었다. 알렉산드라와 몰라비는 국제적인 와인 양조 전문가들에게 토양의 평가를 의뢰했다. 그 결과를 토대로 그들은 포도를 키우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 산꼭대기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곳에 포도밭을 만들었다. 그들은 테드 마누사키스가 재배하던 국제적인 품종(쉬라·그르나슈·루산느 등)뿐 아니라 토착 품종도 기르기 시작했다. 최첨단 와인제조 시설도 갖췄다. 그리고 테드처럼 수출이 아니라 크레타 섬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와인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나라면 이탈리아에 가서 프랑스 와인을 마시진 않겠다”고 몰라비는 말했다(그는 크레타 섬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하니아에서 레스토랑도 운영한다). “우리 레스토랑에 외국인 관광객이 오면 크레타 섬에서 생산된 와인을 권한다. 우리는 ‘고급 와인을 만들어 수출한다’에서 ‘고급 와인을 만들어 국내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판매한다’로 모토를 바꿨다.”
하지만 진정한 현지 와인이 되려면 토착 포도품종을 사용해야 하는데 거기엔 어려움이 따른다. 4대째 와인 사업을 하는 니코스 카라비타키스는 크레타 섬의 토착 품종은 재배하기가 까다롭다고 말한다. “토양과 기후조건, 재배방식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수입 품종을 재배해 오던 카라비타키스 와이너리는 현재 연간 생산량 12만 병 중 약 75%를 토착 품종으로 만든다. 이 업체는 와인을 만들 때 크레타 전통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우리 레드 와인은 탄닌 맛이나 오크향이 강하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화이트 와인은 산뜻한 맛이 나며 일반 크레타 와인보다 알코올 함량이 낮다.”
보잘것없는 벌크 와인 생산지라는 크레타 섬의 이미지가 일을 어렵게 만들지만 카라비타키스는 이런 이미지에 변화가 일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는 이 섬에서 벌크 와인 생산을 거부한 최초의 와이너리 중 하나였다. 하지만 요즘은 많은 레스토랑과 바에서 와인을 잔으로 내놓으며 상당수가 벌크 와인 판매를 중단했다.” 카라비타키스 와이너리는 향후 몇 년 동안 연간 생산량을 5~10% 늘릴 계획이다.이런 성장에는 와인 맛을 아는 소비자의 증가와 금융위기가 한몫했다. 치솟는 국가 부채와 엄격한 긴축정책은 그리스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혀 2010년 이후 국내총생산(GDP)이 25% 감소했다. 하지만 이 위기로 살아남기 위한 혁신이 일어났다. 크레타 섬의 소규모 와인업체들은 ‘와인스 오브 크레타(Wins of Crete)’라는 기구를 조직해 와인 투어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금융위기 이후 크레타 섬의 소규모 와인업체들은 자구책으로 와인 투어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와인 시음이 포함된 1인당 비용이 6유로 정도로 저렴하다.와인스 오브 크레타는 정부의 자금지원을 받지 않지만(이 기구는 관광객의 길 안내를 위한 도로변 표지판 등 모든 비용을 부담한다) 와인 시음이 포함된 투어 요금이 1인당 6유로 정도밖에 안 된다. 지난해에는 32만 명이 이 와인 투어에 참가했다.
금융위기는 또 지역의 자부심을 한층 더 높였다. 크레타 섬의 일부 주민들은 타지역 제품이나 수입품은 사지 않고 현지 생산품만 구매한다. “다양한 상품에서 그런 경향이 나타난다”고 몰라비는 말했다. 사람들은 이 지역에서 만든 상품을 원한다. 일종의 애향심이다.”
이 애향심은 여러 형태를 띤다. 크레타 섬의 주민과 레스토랑 대다수가 아직도 전통 방식으로 와인을 직접 만들어 마시거나 손님에게 내놓는다. 포도를 발로 밟아 으깬 다음 즙을 유리 항아리에 담는다. 이런 방식을 이용해 로메이코(가장 보편적인 토착 레드 품종)로 만든 와인은 투명한 갈색을 띠며 산화돼 톡 쏘는 맛이 강하다. 크레타 섬 출신이 아니라면 그 술이 와인인지조차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다.
몰라비는 자신이 만든 루비색 레드 와인을 잔에 따르면서 “이 지역 사람들은 와인에서 자연스럽게 이런 색이 난다는 걸 믿지 못한다”고 말했다. ‘알렉산드라’라는 이름의 그 와인은 쉬라와 그르나슈, 무르베드르를 혼합해 만들었으며 블랙체리와 담배 맛이 난다. “그들은 우리가 화학물질을 첨가해 색을 낸다고 생각한다.”
와인스 오브 크레타에 가입한 30개의 소규모 와인업체는 토착 품종으로 세계 수준의 와인을 만든다는 꿈을 곧 이룰 듯하다. 하지만 아직 현지 주민들을 설득하진 못했다. 콜레니 마을에서 ‘마라카이보’라는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라이사키스 집안은 직접 만든 와인만 손님 테이블에 내놓는다(치즈와 올리브유 등도 마찬가지다).
자니스 라이사키스는 레스토랑에서 약 1.5㎞ 떨어진 곳에 있는 포도원 쪽을 가리키면서 “뭣 때문에 공장에서 만든 와인을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그 포도원에는 포도 수확용 바구니들과 마을의 포도 수확 장면을 묘사한 민속 벽화로 이뤄진 ‘미니 박물관’도 있다. 그는 바 뒤쪽에서 디캔터를 하나 가져오더니 작은 잔에 녹물 같은 액체를 따라줬다. 슈퍼마켓에서 파는 셰리주 같은 맛이 났다. “그게 바로 크레타의 맛”이라고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 리사 어벤드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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