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 바이크’로 미국 횡단하다
‘시티 바이크’로 미국 횡단하다
맨해튼에서의 직장 생활에 권태를 느낀 태넌하우스는 출근하던 공용자전거로 5개월 간 19개 주를 약 4860㎞ 달려지난해 여름 어느 날 밤, 미국 뉴욕 맨해튼에 살고 있는 제프리 태넌하우스는 공용 자전거 보관소의 시티 바이크(공용 자전거) 자물쇠를 풀었다. 뉴욕 시민의 공용 자전거 이용 회수는 하루 약 3만5000회에 달한다. 보관소는 주로 맨해튼과 브루클린 주변에 300여 곳이 분산돼 있다. 시티 바이크는 뉴욕의 최신, 그리고 유행을 선도하는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적어도 하늘을 나는 호버보드가 등장할 때까지는 말이다.
태넌하우스는 연간 회원권을 구입했다. 한 번에 45분씩 시티 바이크를 이용할 수 있었다. 그는 방금 선택한 시티 바이크가 신제품처럼 보였기 때문에 몹시 들떠 있었다. 자신의 블로그에 ‘바퀴살이 반짝거리고 벨 소리는 천사들을 불러낼 듯했다’고 썼다.
천사를 불러내는 능력은 실상 시티 바이크가 자랑하는 기능은 아니다.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이 자전거 공유 시스템을 도입한 지난 2년 사이, 시티뱅크의 후원을 받아 은행 로고가 큼지막하게 새겨진 자전거가 무겁고(20㎏), 느리다(관광객·옐로캡과의 충돌 사고를 막기 위해 3단 기어가 최고)는 비아냥도 있었다. 태넌하우스가 찾아낸 최신 모델은 원래 모델보다 약간 더 빠르고 내구성이 뛰어나다는 설명이 있었다.
태넌하우스는 2번 대로를 따라 달렸다. 20번가에서 시티 바이크를 주차시키던 한 여성을 보고는 멈춰 섰다. “실례합니다.” 그는 그녀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내일 이 자전거로 미국 횡단여행을 할 계획인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녀는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려면 큰돈이 들 걸요.” 그녀가 태넌하우스에게 말했다. “자전거가 그렇게 멀리까지 가지도 못할 거구요.”
50점짜리 답이었다. 태넌하우스는 45분 사용 제한시간을 약 3600시간 넘긴 데 대해 1200달러의 과징금을 내야 했다. 그러나 자전거는 캘리포니아까지 탈 없이 달렸다. 오클라호마 주 클레어모어 근처에서 펑크 한 번 난 게 전부였다. 태넌하우스도 털사 외곽에서 얼굴을 한 번 얻어맞았지만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털사는 공교롭게도 태넌하우스가 다시는 맨해튼에서 살지 않겠다는 확신이 섰을 때 그가 미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 가장 살고 싶은 곳으로 점 찍은 도시였다. 경찰에 따르면 가해자인 프랭클린 버튼(37)은 같은 날 남녀 한 명씩이 관련된 또 다른 폭행사건 이후 체포됐다. 한편 태넌하우스는 얼굴에 약간 멍이 들었지만 의기소침하지 않고 계속 서쪽을 향해 전진했다.
그는 사건 후 인스타그램에 ‘의사가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하더라’며 ‘나는 웨버스 레스토랑의 냉동 루트 비어(탄산음료)가 필요하다고 대답했다’라는 글을 올렸다. 그리고 말한대로 했다. 달리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었다. 지난 1월의 어느 날 오후 태넌하우스는 자신이 컨트리 바이크로 개명한 자전거를 타고 캘리포니아 주 샌타모니카의 부두에 도착했다. 샌타모니카의 새 자전거 공유 프로그램 브리즈 회원들로 이뤄진 일단의 그룹이 그를 맞았다. 서던캘리포니아 주 공영 라디오 회원사인 KCRW의 프로그램 진행자 프랜시스 앤더튼도 그 자리에 있었다.
앤더튼은 “하루 약 60~100㎞씩 5개월 간의 자전거 여행을 막 마친 사람치고는 아주 편안해 보였다”고 전하며 그가 19개 주 약 4860㎞를 달렸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또한 “영웅적인” 여행이라고 평한 중학교 교사도 인터뷰했다. 교사는 “그냥 시티 바이크 한 대를 잡아타고 계속 페달을 굴러 끝없이 전진하는 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며 탄성을 올렸다.
“아는 사람이야!” 내가 모닝 커피를 홀짝이다가 아내에게 소리쳤다. 사진 속 인물은 바로 태넌하우스였다. 뉴욕포스트 신문 지면에서 현대 문명의 가장 혈색 좋은 불평분자들의 자전거 라이더 행렬 속에서 그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태넌하우스와 나는 다트머스대학 동창이었다.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같은 사교모임(유대인, 희극배우, 아카펠라)에 가입했고, 맨해튼 거리에서 마주치면 상투적으로 ‘밥 한 번 먹자’는 약속을 하곤 했다.
졸업 후 연락이 끊긴 채 세월이 흘렀다. 서로 자기 일에 바빴다. 그는 아마도 센트럴 파크가 내다보이는 발코니를 가진 맨해튼 아파트에서 거주할 만한 직업을 갖고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실상 그는 눈 씻고 봐도 대도시의 화려함은 찾을 수 없는 소박한 브루클린 고층빌딩 밀집지역에서 거주했다. 그가 학교 졸업 후 괌에서 인명구조원으로 일하며 궁색하게 지냈다는 사실도 나는 전혀 몰랐다. 또 뉴욕으로 돌아온 뒤 모든 뉴요커가 화염병을 던지고 싶어 하는 빨간색 2층 버스의 여행 가이드가 됐다는 사실까지도.
포스트 기사에는 ‘계속 달려, 친구(Ride On, Man)’라는 제목 아래 웨스트 버지니아 주 경계에서 태넌하우스가 의기양양한 포즈를 취한 사진이 실렸다. 그는 이벤트 플래너로 일하던 중 권태를 느껴 아파트 임대 계약을 해지하고 소지품을 챙겨 시티 바이크에 작은 트레일러를 달고 서부로 향했다. 생면부지 이방인들의 친절에 의지해 숙소를 해결했다. 여행 시작 후 3주 동안은 만사형통인 듯했다. 하지만 포스트의 보도에 따르면 델라웨어를 지날 즈음 “뜨거운 햇빛을 막으려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달리는 그의 모습에 놀란 주민이 그를 테러범으로 신고했다.”
나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일어섰다. 마치 젖은 회색 담요처럼 열기가 뉴욕시 상공을 덮고 태양의 윤곽을 흐릿하게 하는 8월이었다. 갓난아기 얼굴을 들여다보고 아내에게 키스한 다음 여느 날처럼 아침 거리로 나섰다. 지하철 역에 도착할 무렵 제프리 태넌하우스의 이야기는 까마득히 잊고 말았다. 그러나 며칠 뒤 털사 폭행사건 이후의 기사가 다시 포스트에 실렸다. 우리는 그의 여정을 선망의 눈으로 따르며 태넌하우스가 영원히 벗어나고 있던 평범한 일상에서 짧은 순간이라도 탈피하고 싶었다.
피플·가디언·뉴욕 같은 매체에서 태넌하우스의 여행을 기사로 다뤘다. 그는 이젠 마음이 변해 뉴욕보다 털사를 더 좋아하게 됐지만 뉴욕 잡지는 그들이 이 도시를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로 그를 꼽았다. 태넌하우스에 관한 거의 모든 언론 보도가 그의 라이딩을 매력적이면서도 기이한, 칭송하면서도 따라 하지는 말아야 할 것으로 묘사했다. 끊임없이 미 대륙을 달리는 영화 속 ‘포레스트 검프’에도 많이 비유했다. 이런 기사들은 그를 지능보다는 지구력이 뛰어난 순진남 이미지로 비춘다. 인스타그램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야 할 매력적인 바보 말이다.
내 생각은 많이 다르다. 반복적인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색적이긴 해도 태넌하우스의 선택은 모아 놓은 돈을 몽땅 털어 텍사스 주 오스틴에 베이컨 시식 센터를 여는 것만큼 이색적이진 않지 싶다. 그의 선택은 일상성을 상당히 간직한 일상 탈출이었다.
최근 태넌하우스가 뉴욕으로 돌아가기 전(이번에는 비행기편으로) 친구들을 만나러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를 방문했을 때 그를 만났다. 그는 주말 자전거 동호인을 금방 투르 드 프랑스(프랑스 일주 사이클 대회) 출전선수로 변신시키는 고가의 장비나 명품 로드 바이크(포장도로용 자전거)를 구입하는 건 아예 꿈도 꾸지 않았다고 내게 말했다. 시티 바이크를 타고 맨해튼 다리 건너 출퇴근할 때가 그의 하루 일과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자극이나 보람 없는 일상에서의 휴식시간이었다. 그래서 가장 즐거운 일로 자신의 하루를 채우기로 했다. 이는 대담할 뿐 아니라 타당한 결정이었다. 중학교 선생님들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중학교 선생님들 말씀이 우리 대다수가 인정하려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들어맞지 않던가?
불행했던 괌에서의 생활 외에도 태넌하우스는 세계를 상당히 많이 돌아다녔다(중동·동남아·남미 등). 그러나 부모님들은 그가 미국 횡단 여행 계획을 밝혔을 때 펄쩍 뛰며 말렸다고 한다. 털사 기습공격 사건 말고는 부모님들의 우려는 실현되지 않았다. 도로 위에서 두어 차례 자동차에 위협을 받기는 했지만 맨해튼 브로드웨이를 자전거로 달린 사람에겐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태넌하우스는 도중에 WarmShowers.org를 통해 만난 사람들의 무한한 듯한 친절에 의지했다. 자전거 여행자들을 무료로 숙소를 제공하려는 사람들과 연결시켜주는 단체다. 한번은 뉴저지 주 해안에선 해변 별장을 독차지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주 블라이드에선 낚시용품점 앞의 ‘매리어트’라는 별명을 가진 트레일러 신세를 졌다. 그의 여행에는 놀라울 정도로 미국 중부의 색깔이 강하다. 하루 약 100㎞를 자전거로 달리는 건 물론 힘든 일이지만 태넌하우스가 먹고 마신 햄버거와 수제 맥주를 보고 있으면 힘들겠다는 생각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그 두 가지에 관한 기록을 유별나게 많이 올렸다.
그는 백수 생활을 만끽하는 아이비리그 출신 실업자였다. 미국 초기 개척자들처럼 불굴의 정신으로 서부를 향해 꾸준히 페달을 밟는 진정한 미국인이었다.
태넌하우스가 뉴멕시코 주를 통과할 즈음 나는 도시 기획자 팀 설리번의 신저 ‘서부로 가는 길들(Ways to the West)’을 읽고 있었다. 설리번은 4년 전 오클랜드에서 살 때 서부와 갈수록 멀어진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자동차 창문을 통해서만 서부를 바라봤기 때문이라는 판단이었다. 그에 따라 “자동차 없이 서부를 관통하는 도로 여행”에 착수했다. 주로 자전거로 이동하고 일부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그는 태넌하우스와 비슷하게 지루함, 방향감각 상실, 그리고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나지 않았으면 몰랐을 곳을 직접 돌아볼 수 있었다.
3주 동안 이어진 설리번의 여행은 태넌하우스와는 여러 모로 달랐다. 설리번의 여행은 서부의 변화하는 인프라를 탐구한다는 명확하게 규정된 목적에 따라 용의주도하게 계획됐다(콜로라도 주 덴버의 경전철, 아이다호 주 보이시의 자전거 길 등). 자전거도 썩 튼튼하지 않았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기본적인 유사성이 있다. 끊임없는 행동을 통해서만 땅의 근본적인 혼을 발견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윌리엄 리스트 히트문은 포드 이코노라인 밴을 이용한 미국의 뒷길 탐사에 관한 그의 고전 ‘블루 하이웨이(Blue Highways)’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여행자가 얻는 것은 통찰이 아니라 한동안 돌아다닐 힘뿐인지도 모른다.” 잭 케루악도 소설 ‘길 위에서’(민음사 펴냄, 2009년)에서 ‘갈 곳은 없지만 어디든 발길 향하는 곳이 곧 목적지’라고 설파했다. 부단한 이동보다 더 미국적인 특성은 없을지 모른다.
자전거 애호가들이 완전 채식주의자들처럼 멋없는 무리라는 시각도 있다. 몇몇 사람들은 그런 고정관념에 집착해 태넌하우스의 행동이 철면피한 시티 바이크 절도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며 그를 비난한다. 어떤 위선적인 블로거는 “캘리포니아 주 경계에서 그를 맞이해야 할 사람들은 뉴욕 주 경찰이었다”고 호통을 쳤다. 그를 중절도죄로 잡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시티 바이크 측도 그의 여행을 썩 반기지 않는 듯하다. 그들은 이 기사를 포함해 태넌하우스에 관한 논평 요구에 대부분 응하지 않았다.
비영리단체 트랜스포테이션 올터너티브스의 폴 스틸리 화이트 대표는 이런 비판을 일소에 부치며 태넌하우스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핵심적인 문제를 간과한다”고 말한다. 화이트 대표는 “그는 영웅”이라며 도시의 잔소리꾼들과 자전거 공유 이상주의자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태넌하우스가 캘리포니아에서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만났다. CBS 방송 대담 프로 ‘스티븐 콜베어의 레이트 쇼’의 게스트로 출연해 녹화를 마친 참이었다. 하지만 다른 게스트에게 밀려 그의 녹화분이 언제 방송될지는 몰랐다. 미국 횡단여행에 사용했던 자전거를 아직 갖고 있었다. 어쨌든 과징금은 치렀으니까 문제는 없다. 시티 바이크 보관소에 세워둘 수 있지만 그럴 경우 맨해튼 동부에서 서부 사이를 단조롭게 왕복하는 여느 두 바퀴 자전거와 다름없어진다. 과거의 영광은 반복적인 일상 속으로 가라앉고 만다. 아니다, 너무 많은 길을 달려 왔고 아직 갈 길이 너무 많다. 그리고 아직 털사가 있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태넌하우스는 연간 회원권을 구입했다. 한 번에 45분씩 시티 바이크를 이용할 수 있었다. 그는 방금 선택한 시티 바이크가 신제품처럼 보였기 때문에 몹시 들떠 있었다. 자신의 블로그에 ‘바퀴살이 반짝거리고 벨 소리는 천사들을 불러낼 듯했다’고 썼다.
천사를 불러내는 능력은 실상 시티 바이크가 자랑하는 기능은 아니다.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이 자전거 공유 시스템을 도입한 지난 2년 사이, 시티뱅크의 후원을 받아 은행 로고가 큼지막하게 새겨진 자전거가 무겁고(20㎏), 느리다(관광객·옐로캡과의 충돌 사고를 막기 위해 3단 기어가 최고)는 비아냥도 있었다. 태넌하우스가 찾아낸 최신 모델은 원래 모델보다 약간 더 빠르고 내구성이 뛰어나다는 설명이 있었다.
태넌하우스는 2번 대로를 따라 달렸다. 20번가에서 시티 바이크를 주차시키던 한 여성을 보고는 멈춰 섰다. “실례합니다.” 그는 그녀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내일 이 자전거로 미국 횡단여행을 할 계획인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녀는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려면 큰돈이 들 걸요.” 그녀가 태넌하우스에게 말했다. “자전거가 그렇게 멀리까지 가지도 못할 거구요.”
50점짜리 답이었다. 태넌하우스는 45분 사용 제한시간을 약 3600시간 넘긴 데 대해 1200달러의 과징금을 내야 했다. 그러나 자전거는 캘리포니아까지 탈 없이 달렸다. 오클라호마 주 클레어모어 근처에서 펑크 한 번 난 게 전부였다. 태넌하우스도 털사 외곽에서 얼굴을 한 번 얻어맞았지만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털사는 공교롭게도 태넌하우스가 다시는 맨해튼에서 살지 않겠다는 확신이 섰을 때 그가 미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 가장 살고 싶은 곳으로 점 찍은 도시였다. 경찰에 따르면 가해자인 프랭클린 버튼(37)은 같은 날 남녀 한 명씩이 관련된 또 다른 폭행사건 이후 체포됐다. 한편 태넌하우스는 얼굴에 약간 멍이 들었지만 의기소침하지 않고 계속 서쪽을 향해 전진했다.
그는 사건 후 인스타그램에 ‘의사가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하더라’며 ‘나는 웨버스 레스토랑의 냉동 루트 비어(탄산음료)가 필요하다고 대답했다’라는 글을 올렸다. 그리고 말한대로 했다. 달리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었다. 지난 1월의 어느 날 오후 태넌하우스는 자신이 컨트리 바이크로 개명한 자전거를 타고 캘리포니아 주 샌타모니카의 부두에 도착했다. 샌타모니카의 새 자전거 공유 프로그램 브리즈 회원들로 이뤄진 일단의 그룹이 그를 맞았다. 서던캘리포니아 주 공영 라디오 회원사인 KCRW의 프로그램 진행자 프랜시스 앤더튼도 그 자리에 있었다.
앤더튼은 “하루 약 60~100㎞씩 5개월 간의 자전거 여행을 막 마친 사람치고는 아주 편안해 보였다”고 전하며 그가 19개 주 약 4860㎞를 달렸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또한 “영웅적인” 여행이라고 평한 중학교 교사도 인터뷰했다. 교사는 “그냥 시티 바이크 한 대를 잡아타고 계속 페달을 굴러 끝없이 전진하는 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며 탄성을 올렸다.
“아는 사람이야!” 내가 모닝 커피를 홀짝이다가 아내에게 소리쳤다. 사진 속 인물은 바로 태넌하우스였다. 뉴욕포스트 신문 지면에서 현대 문명의 가장 혈색 좋은 불평분자들의 자전거 라이더 행렬 속에서 그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태넌하우스와 나는 다트머스대학 동창이었다.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같은 사교모임(유대인, 희극배우, 아카펠라)에 가입했고, 맨해튼 거리에서 마주치면 상투적으로 ‘밥 한 번 먹자’는 약속을 하곤 했다.
졸업 후 연락이 끊긴 채 세월이 흘렀다. 서로 자기 일에 바빴다. 그는 아마도 센트럴 파크가 내다보이는 발코니를 가진 맨해튼 아파트에서 거주할 만한 직업을 갖고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실상 그는 눈 씻고 봐도 대도시의 화려함은 찾을 수 없는 소박한 브루클린 고층빌딩 밀집지역에서 거주했다. 그가 학교 졸업 후 괌에서 인명구조원으로 일하며 궁색하게 지냈다는 사실도 나는 전혀 몰랐다. 또 뉴욕으로 돌아온 뒤 모든 뉴요커가 화염병을 던지고 싶어 하는 빨간색 2층 버스의 여행 가이드가 됐다는 사실까지도.
포스트 기사에는 ‘계속 달려, 친구(Ride On, Man)’라는 제목 아래 웨스트 버지니아 주 경계에서 태넌하우스가 의기양양한 포즈를 취한 사진이 실렸다. 그는 이벤트 플래너로 일하던 중 권태를 느껴 아파트 임대 계약을 해지하고 소지품을 챙겨 시티 바이크에 작은 트레일러를 달고 서부로 향했다. 생면부지 이방인들의 친절에 의지해 숙소를 해결했다. 여행 시작 후 3주 동안은 만사형통인 듯했다. 하지만 포스트의 보도에 따르면 델라웨어를 지날 즈음 “뜨거운 햇빛을 막으려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달리는 그의 모습에 놀란 주민이 그를 테러범으로 신고했다.”
나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일어섰다. 마치 젖은 회색 담요처럼 열기가 뉴욕시 상공을 덮고 태양의 윤곽을 흐릿하게 하는 8월이었다. 갓난아기 얼굴을 들여다보고 아내에게 키스한 다음 여느 날처럼 아침 거리로 나섰다. 지하철 역에 도착할 무렵 제프리 태넌하우스의 이야기는 까마득히 잊고 말았다. 그러나 며칠 뒤 털사 폭행사건 이후의 기사가 다시 포스트에 실렸다. 우리는 그의 여정을 선망의 눈으로 따르며 태넌하우스가 영원히 벗어나고 있던 평범한 일상에서 짧은 순간이라도 탈피하고 싶었다.
피플·가디언·뉴욕 같은 매체에서 태넌하우스의 여행을 기사로 다뤘다. 그는 이젠 마음이 변해 뉴욕보다 털사를 더 좋아하게 됐지만 뉴욕 잡지는 그들이 이 도시를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로 그를 꼽았다. 태넌하우스에 관한 거의 모든 언론 보도가 그의 라이딩을 매력적이면서도 기이한, 칭송하면서도 따라 하지는 말아야 할 것으로 묘사했다. 끊임없이 미 대륙을 달리는 영화 속 ‘포레스트 검프’에도 많이 비유했다. 이런 기사들은 그를 지능보다는 지구력이 뛰어난 순진남 이미지로 비춘다. 인스타그램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야 할 매력적인 바보 말이다.
내 생각은 많이 다르다. 반복적인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색적이긴 해도 태넌하우스의 선택은 모아 놓은 돈을 몽땅 털어 텍사스 주 오스틴에 베이컨 시식 센터를 여는 것만큼 이색적이진 않지 싶다. 그의 선택은 일상성을 상당히 간직한 일상 탈출이었다.
최근 태넌하우스가 뉴욕으로 돌아가기 전(이번에는 비행기편으로) 친구들을 만나러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를 방문했을 때 그를 만났다. 그는 주말 자전거 동호인을 금방 투르 드 프랑스(프랑스 일주 사이클 대회) 출전선수로 변신시키는 고가의 장비나 명품 로드 바이크(포장도로용 자전거)를 구입하는 건 아예 꿈도 꾸지 않았다고 내게 말했다. 시티 바이크를 타고 맨해튼 다리 건너 출퇴근할 때가 그의 하루 일과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자극이나 보람 없는 일상에서의 휴식시간이었다. 그래서 가장 즐거운 일로 자신의 하루를 채우기로 했다. 이는 대담할 뿐 아니라 타당한 결정이었다. 중학교 선생님들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중학교 선생님들 말씀이 우리 대다수가 인정하려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들어맞지 않던가?
불행했던 괌에서의 생활 외에도 태넌하우스는 세계를 상당히 많이 돌아다녔다(중동·동남아·남미 등). 그러나 부모님들은 그가 미국 횡단 여행 계획을 밝혔을 때 펄쩍 뛰며 말렸다고 한다. 털사 기습공격 사건 말고는 부모님들의 우려는 실현되지 않았다. 도로 위에서 두어 차례 자동차에 위협을 받기는 했지만 맨해튼 브로드웨이를 자전거로 달린 사람에겐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태넌하우스는 도중에 WarmShowers.org를 통해 만난 사람들의 무한한 듯한 친절에 의지했다. 자전거 여행자들을 무료로 숙소를 제공하려는 사람들과 연결시켜주는 단체다. 한번은 뉴저지 주 해안에선 해변 별장을 독차지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주 블라이드에선 낚시용품점 앞의 ‘매리어트’라는 별명을 가진 트레일러 신세를 졌다. 그의 여행에는 놀라울 정도로 미국 중부의 색깔이 강하다. 하루 약 100㎞를 자전거로 달리는 건 물론 힘든 일이지만 태넌하우스가 먹고 마신 햄버거와 수제 맥주를 보고 있으면 힘들겠다는 생각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그 두 가지에 관한 기록을 유별나게 많이 올렸다.
그는 백수 생활을 만끽하는 아이비리그 출신 실업자였다. 미국 초기 개척자들처럼 불굴의 정신으로 서부를 향해 꾸준히 페달을 밟는 진정한 미국인이었다.
태넌하우스가 뉴멕시코 주를 통과할 즈음 나는 도시 기획자 팀 설리번의 신저 ‘서부로 가는 길들(Ways to the West)’을 읽고 있었다. 설리번은 4년 전 오클랜드에서 살 때 서부와 갈수록 멀어진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자동차 창문을 통해서만 서부를 바라봤기 때문이라는 판단이었다. 그에 따라 “자동차 없이 서부를 관통하는 도로 여행”에 착수했다. 주로 자전거로 이동하고 일부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그는 태넌하우스와 비슷하게 지루함, 방향감각 상실, 그리고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나지 않았으면 몰랐을 곳을 직접 돌아볼 수 있었다.
3주 동안 이어진 설리번의 여행은 태넌하우스와는 여러 모로 달랐다. 설리번의 여행은 서부의 변화하는 인프라를 탐구한다는 명확하게 규정된 목적에 따라 용의주도하게 계획됐다(콜로라도 주 덴버의 경전철, 아이다호 주 보이시의 자전거 길 등). 자전거도 썩 튼튼하지 않았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기본적인 유사성이 있다. 끊임없는 행동을 통해서만 땅의 근본적인 혼을 발견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윌리엄 리스트 히트문은 포드 이코노라인 밴을 이용한 미국의 뒷길 탐사에 관한 그의 고전 ‘블루 하이웨이(Blue Highways)’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여행자가 얻는 것은 통찰이 아니라 한동안 돌아다닐 힘뿐인지도 모른다.” 잭 케루악도 소설 ‘길 위에서’(민음사 펴냄, 2009년)에서 ‘갈 곳은 없지만 어디든 발길 향하는 곳이 곧 목적지’라고 설파했다. 부단한 이동보다 더 미국적인 특성은 없을지 모른다.
자전거 애호가들이 완전 채식주의자들처럼 멋없는 무리라는 시각도 있다. 몇몇 사람들은 그런 고정관념에 집착해 태넌하우스의 행동이 철면피한 시티 바이크 절도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며 그를 비난한다. 어떤 위선적인 블로거는 “캘리포니아 주 경계에서 그를 맞이해야 할 사람들은 뉴욕 주 경찰이었다”고 호통을 쳤다. 그를 중절도죄로 잡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시티 바이크 측도 그의 여행을 썩 반기지 않는 듯하다. 그들은 이 기사를 포함해 태넌하우스에 관한 논평 요구에 대부분 응하지 않았다.
비영리단체 트랜스포테이션 올터너티브스의 폴 스틸리 화이트 대표는 이런 비판을 일소에 부치며 태넌하우스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핵심적인 문제를 간과한다”고 말한다. 화이트 대표는 “그는 영웅”이라며 도시의 잔소리꾼들과 자전거 공유 이상주의자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태넌하우스가 캘리포니아에서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만났다. CBS 방송 대담 프로 ‘스티븐 콜베어의 레이트 쇼’의 게스트로 출연해 녹화를 마친 참이었다. 하지만 다른 게스트에게 밀려 그의 녹화분이 언제 방송될지는 몰랐다. 미국 횡단여행에 사용했던 자전거를 아직 갖고 있었다. 어쨌든 과징금은 치렀으니까 문제는 없다. 시티 바이크 보관소에 세워둘 수 있지만 그럴 경우 맨해튼 동부에서 서부 사이를 단조롭게 왕복하는 여느 두 바퀴 자전거와 다름없어진다. 과거의 영광은 반복적인 일상 속으로 가라앉고 만다. 아니다, 너무 많은 길을 달려 왔고 아직 갈 길이 너무 많다. 그리고 아직 털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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