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도시에서 만난 세 가지 여행

치앙마이는 방콕 북서쪽 약 700㎞ 거리에 있는 태국 북부의 고지대에 자리 잡은 도시다. 방콕은 인공의 즐거움을 빛의 속도로 쏟아내는 반면 치앙마이는 강물 흐르듯 조용하게 움직이는 슬로 시티다. 시골과 도시, 과일시장과 스타벅스, 툭툭(오토바이 택시)과 도요타가 공존하는 독특한 세계다. 해가 지면 거리는 태국 밤시장의 다채로운 풍경과 소리로 활기를 띤다. 좁은 도로에 수공예품과 행상이 늘어서고 신선한 과일, 닭튀김, 달콤한 간식들이 풍성할 뿐 아니라 값도 대단히 싸다. 그 속에서 순박한 태국인의 수줍은 미소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치앙마이는 고대왕국과 현대의 역동적인 도시, 두 정체성 사이에 절묘하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마치 서울역처럼 인종의 도가니 같고 거리는 시골 장터처럼 북적거린다. 인구 15만 명 정도의 도시에 외국인이 연간 100만 명 이상 다녀간다고 한다. 성벽과 해자로 둘러싸인 시가지를 거닐어도 좋고, 아름다운 산을 타며 자연과 폭포를 감상해도 좋고, 시장을 거닐며 ‘음식 포르노(food porno, 감각을 자극하는 음식의 배열)’를 즐겨도 좋다. 가이드를 했던 암나즈에 따르면 전에는 서방인이 많았지만 근년 들어 중국인이 88% 정도를 차지하며 한국인은 주로 10여 개 골프 코스를 찾는 관광객들이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이곳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 자극적으로 또는 경쟁적으로 소리치지 않고 소곤소곤 말을 걸어온다. TV를 틀든 마트에 가든 사람이 모이는 곳에선 예외없이 귀청을 때리던 고함소리가 어디서도 들리지 않는다. 사도 그만, 안 사도 그만인 듯 손님에게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미소의 나라’ 주민답게 수줍은 듯한 순박한 미소도 매력적이다. 태국에서 6년째 거주한다는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 기자 출신의 트리샤 윌리스 ‘아난타라 치앙마이’ PR 매니저는 “처음에는 서비스업이라서 그러려니 했는데 2년 뒤에도 미소가 변하지 않더라”며 “그것이 내가 치앙마이에 눌러앉은 한 가지 이유”라고 말했다.
요즘 같은 경쟁사회에선 치열하지 않으면 존재가치를 잃게 된다. 하지만 치열함을 더할수록 몸과 마음의 상처 또한 깊어진다. 그런 환경 속에선 아무리 혼자 애쓴들 상처가 치유될 리 없다. 그런 점에서 치앙마이는 여유를 갖고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갖는 힐링 여행에 제격인 듯하다. 그러나 치앙마이의 여유로운 삶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최근 이 도시의 급속한 도시화를 불안한 눈길로 바라본다. 치앙마이대학 건축과 춘라폰 눈타파니치 강사는 “근년 들어 관광객이 많이 몰리면서 방콕처럼 교통과 오염이 악화되고 고유색을 잃어가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치앙라이는 메콩강을 사이에 두고 태국·미얀마·라오스가 만나는 골든트라이앵글의 상업 중심지다. 한때 세계 마약 수요의 60% 이상을 공급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하지만 왕실이 아편 퇴치에 나서 마약을 단속하는 한편 수공업과 커피·차 등 다른 작물 재배를 적극 장려했다. 이 지역에서 가구·실크 등의 수공업이 발달한 것도 당시 왕실 정책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치앙라이에선 아난타라 치앙마이 리조트의 코끼리 캠프 책임자 존 로버츠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시골 농부처럼 선량한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곤 곧장 캠프 이야기를 시작했다. 캠프가 설립된 2003년께는 코끼리를 앞세운 마후트(코끼리를 키우고 조련하는 사람)의 길거리 구걸이 대단히 흔했다. 벌목에 동원되던 코끼리들이 동물 보호 운동 단체의 압력과 정부의 단속으로 거리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방콕이 가장 심했지만 파타야 등의 다른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로버츠 팀장은 “저녁 때 방콕 시내에 두 시간만 머물면 적어도 한 번은 아기 코끼리를 데리고 다니며 구걸하는 마후트를 만났다”고 말했다.

캠프에는 발목을 줄로 묶인 채 쉬지 않고 계속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는 코끼리들이 있다. 거리 생활에서 입은 충격이나 스트레스로 인한 후유증이다. 품푸이도 그중 하나였다. 품푸이는 길거리 생활을 하다가 차에 치여 뱃속에 있던 새끼를 잃었다. 그 뒤론 차를 무서워하고 사람을 경계하게 됐다. 캠프로 온 뒤로엔 다소 안정을 찾았지만 여전히 자동차와 트럭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로버츠 팀장은 곧 이런 식으로는 코끼리 보호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후트에게는 코끼리가 생계수단이어서 그들에게서 받은 돈으로 코끼리를 사들여와 다시 구걸행각에 나섰기 때문이다. “마후트에게는 4000년 동안 해오던 천직이기 때문에 수입과는 상관없이 다른 일은 생각할 수 없는 듯했다”고 로버츠 팀장은 말했다.
요즘엔 코끼리 관광이 어느 때보다 각광을 받고 당국의 단속이 엄격해 거리에서 코끼리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40여 마리의 코끼리가 길거리 생활을 벗어났다. 그중 25마리가 현재 코끼리 캠프에서 생활한다. 물론 주인인 마후트 가족과 함께다. 남다른 일을 한다는 자의식 없이 담담하게 설명하는 로버츠 팀장에게 오지 생활의 어려움 같은 사적인 질문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그는 현지인 부인과의 사이에 네 살배기 아들을 하나 두고 있다). 코끼리 등에 올라타는 것만 기대했던 인간은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가.
코끼리들은, 그리고 치앙마이와 치앙라이에서 만난 사람들은 메콩강처럼 자연이 끌어주는대로 유유히 흘러가는 듯했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워 즐거움을 찾는’ 안빈낙도의 삶이다. 지난 상처와 앞날의 욕심 모두 가슴 속 깊이 묻어두고 그들은 현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대도시와 달리 보여주려는 과시욕, 뭔가 이루고야 말겠다는 성취욕은 느껴지지 않는다. 돈과 성공을 향해 앞만 보고 뛰어가는 대신 사람과 자연이 서로를 마주 보고 마냥 노닥거린다.
캠프를 떠나 치앙라이 공항으로 향하는 길에 비가 한바탕 쏟아부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의 알듯 말듯한 냄새의 정체가 기억 저 깊숙한 곳에서 불현듯 떠올랐다. 오래 전 어린 시절 이후 까마득히 잊고 있던, 소나기 뒤의 흙냄새 그리고 인간미 넘치던 시절의 기억이었다.
- 차진우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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