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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로가 만난 사람(1) 윤윤수 휠라코리아 회장] “좁은 한국에서 이기려 하지 마라”

[윤용로가 만난 사람(1) 윤윤수 휠라코리아 회장] “좁은 한국에서 이기려 하지 마라”

월급쟁이에서 글로벌 기업 CEO로 변신...“한국도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해야”



명사(名士).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이름 석 자만 알려졌다고 해서 모두 명사라고 하진 않는다. 다양한 경험과 학식을 두루 갖춰 혜안와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을 명사라 부른다. 그들의 삶에서 물씬 묻어나오는 인생철학은 누군가에겐 방향을 제시해주고, 또 누군가에겐 지침서가 된다. 저출산·고령화로 한국 경제는 침체에 빠지고, 로봇과 인공지능(AI)이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됐다. 이런 숨가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명사의 조언이 더욱 아쉽다. 이에 본지는 윤용로 전 외환은행장이 명사를 만나 그들의 생각과 경험들을 공유하는 ‘윤용로가 만난 사람’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윤윤수(72) 휠라코리아 회장에게 휠라는 자식이다. 그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지만 휠라를 자식만큼이나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솔직히 말하면 자식보다 휠라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그렇게 26년을 키웠다. 사람들은 ‘윤윤수’ 하면 평범한 회사원에서 글로벌 브랜드 휠라를 인수한 ‘샐러리맨의 신화’ 또는 ‘자수성가의 표본’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는 “먹고살기 위해 떠밀려 시작된 일이었다”고 회고한다.

윤 회장은 늘 자신이 살아온 삶의 절반은 실패담이라 말한다. 그의 나이 17세 때 폐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면서 의사가 되리라 결심했다. 서울대 의대에 세 번이나 지원했지만 모두 낙방했다. 외교관이 되기 위해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 입학이 늦어지고 군 복무까지 더해지면서 30세가 돼서야 대학을 졸업했다. 외교관 시험을 볼까 했지만 6~7년 후배들과 경쟁하는 것도 쉽지 않아 포기했다. 운 좋게 무역회사에 들어가 실력을 인정받아 37세에 신발제조 전문업체 화승의 이사로 스카우트됐다. 하지만 얼마 못 가 3년 만에 사표를 냈다. 그가 아이디어를 낸 수출 건이 저작권 문제에 발목 잡혀 당시 회사에 80만 달러 가량의 손해를 입혔기 때문이었다.

40대 가장은 오갈 곳 없는 신세가 됐다. 가족을 먹어 살려야 했다. 무작정 고등학교 1년 후배가 운영하는 예식장을 찾아갔다. 그 밑에서 일을 했지만 내 일이 아니었다. ‘뭘 할까’ 고민을 하다가 과거 미국 출장길에서 봤던 휠라가 떠올랐다. 당시 휠라는 의류로 인기가 높았다. 신발을 만들어 팔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휠라 라이선스를 보유한 호머 알티스를 설득해 한국에서 만든 신발에 휠라 상표를 붙여 미국에 판매했다. 신발이 휠라의 의류 매출을 뛰어넘을 정도가 장사가 잘 되자 1991년 휠라코리아 대표이사 제의가 들어왔다. 그 후 20년, 그는 휠라의 회장이 됐다. 윤 회장이 지분 15.08%(특수관계인 포함 20.12%)를 보유한 휠라코리아는 지난해 말에는 세계 1위 골프공 브랜드인 타이틀리스트 등을 운영하고 있는 아쿠쉬네트홀딩스의 대주주가 됐다. 그는 “나에게 휠라는 단순한 스포츠 브랜드가 아니라 46세에 얻은 늦둥이”라며 “늦게 만난 만큼 더 정을 쏟아 키운 결과 함께 성장했다”고 말했다. 그는 글로벌 기업 CEO답게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일년의 절반 가까이를 외국에서 보낸다. 윤용로 전 외환은행장은 대학 선배이자 인생 멘토인 윤 회장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가 생각하는 글로벌 경영의 혜안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3일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윤 회장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지난 3월 3일 윤용로 전 외환은행장(사진 왼쪽)과 윤윤수 회장이 서울 서초구에 있는 휠라코리아 본사에서 대담을 나누고 있다.


윤용로 전 외환은행장(이하 윤용로):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출장은 잘 다녀오셨는지요?



윤윤수 휠라코리아 회장(이하 윤윤수):
유럽에서 엊그제 돌아왔어요. 이사회 미팅을 위해 미국 휠라USA와 아쿠쉬네트홀딩스 본사에 들렸다가 네덜란드 올림픽위원회(NOC)와 스포츠 의류 후원 협약식을 위해 네덜란드에도 갔다 왔어요.



윤용로:
제가 선배님보다 10살이나 어려도 장거리 출장은 힘들더라고요. 지금도 활동하시는 것을 보면 감탄스러워요.



윤윤수:
고혈압도 있고 심장 수술도 받았지만 활동할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에요. 운동~!. 보약도 안 먹어요. 9년째 매일 집에서 헬스트레이너에게 퍼스널트레이닝(PT)을 받아요. 해외에 나가 있을 때는 못하지만 한국에 있을 때는 아침마다 꼭 받아요. 돈은 좀 들지만(웃음). 난 장거리 출장을 많이 다니니까 비행기 탈 때 나만의 노하우가 있어요. 우선 공복에 비행기를 타고 수면유도제 반을 먹고 무조건 자요. 미국의 경우 도착하기 전 3시간 전에 깨서 밥을 먹어요. 그러면 비행기에서 내려서 바로 일정을 소화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아요. 비행기를 타면 바로 잠을 자야하기 때문에 일부러 밤 비행기만 찾아다녀요. 후배님도 한번 해보세요.



윤용로:
2월 초 인터뷰 요청 때문에 전화드렸을 때도 다음날 해외 출장 일정이 있으시던데. 해외에 얼마나 나가 계시나요?



윤윤수:
한 달에 열흘 이상은 해외에 나가 있는 것 같아요. 지난해에는 아쿠쉬네트홀딩스를 미국 뉴욕증시에 상장시키는 작업 때문에 더 체류했죠. 지난달에는 보름 이상 해외에 있었네요. 자주 나가다 보니 마일리지도 많이 쌓였어요. 오늘 확인해보니까 대한항공 마일리지는 650만 마일, 타 항공사들 마일리지까지 포함하면 1000만 마일이 넘더라고요(인천-미국의 태평양 구간을 1500번 탑승해야 쌓을 수 있는 마일리지다).



윤용로:
사업 얘기를 좀 묻겠습니다. 휠라코리아 대표시절 연봉 18억원을 받을 정도로 인정받은 CEO였는데 갑자기 본사를 인수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윤윤수:
휠라 본사가 1990년대 후반에 제품개발에 과도하게 투자하고 마케팅에 실패하면서 적자에 빠졌어요. 본사를 매각한다는 소식에 마치 15년 동안 키운 내 자식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머리 속엔 ‘내가 가지고 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죠. 고민은 자금 마련이었어요. 그땐 휠라코리아 매출이 3000억원 정도였어요. 그런데 본사 가격은 우리나라 돈으로 약 5000억원이 넘었죠. 매출의 두 배 가까이 되는 돈을 지불할 능력이 있겠어요? 결국 집을 포함한 내 전 재산과 주변 사람들의 돈을 다 긁어모았지요. 그것도 부족해서 당시 200여 명의 직원들을 설득해 퇴직금을 정산하고 우리 사주를 구입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2007년 본사를 인수할 수 있었어요. 그때 엄청 힘들었어요.



윤용로:
휠라 하나도 부족해 두 번째 도전을 하셨더라구요.



윤윤수:
휠라가 안정화 단계에 들어섰을 쯤이에요. 어느 날 유정헌 미래에셋자산운용 PEF 대표가 사무실로 찾아왔어요. 좋은 사업이 있다면서. 뭔가 들어봤더니 미래에셋이 재무적 투자자(FI)로 참여할 테니 아쿠쉬네트 인수 후 경영을 맡아달라는 거에요. 듣자마자 거절했지요. 휠라 인수 때 생각이 나면서 겁부터 나더라구요. 근데 그 뒤에 몇 번을 찾아와서 나밖에 할 사람이 없다고 자꾸 나를 설득하는 거에요. 안 하겠다고 몇 차례 거절했는데 결국 설득을 당했지 뭐에요(웃음). 머릿속엔 아쿠쉬네트는 타이틀리스트나 풋조이로 이미 기업가치가 높기 때문에 투자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죠.

그해 7월 휠라코리아는 미래에셋, 우리블랙스톤PEF, 네오플럭스 등 FI들과 함께 포천브랜드가 보유한 아쿠쉬네트 지분 100%를 13억 달러(약 1조5000억원)에 인수했다. 당시 휠라코리아는 투자금 1억 달러를 들여 지분 12.5%를 확보했다.



윤용로:
아쿠쉬네트홀딩스 인수 때 많이 힘들었다고 들었어요.



윤윤수:
처음엔 아쿠쉬네트홀딩스 현지 경영진과의 소통이 안됐어요. 우리가 경영을 하는데 투자지분율이 낮다 보니 우리 말을 잘 안 따르는 거죠. 2011년 당시 미래에셋자산운용 등 공동 투자자와 영업이익을 5년 안에 두 배 이상 늘리기로 약속했거든요. 근데 이런 사업 진행으로는 약속을 못 지키겠더라고요. 돌파구는 지분율을 높여 우리 말을 듣게 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매년 4.15%씩 5년간 총 20.6% 지분을 FI에서 추가로 인수해 지분율을 33.1%까지 늘렸어요. 지난해 10월 아쿠쉬네트홀딩스 상장 후 추가 지분 20%를 사들였죠.

지난해 12월 아쿠쉬네트홀딩스를 자회사로 편입시키면서 휠라코리아는 매출 2조5000억원대로 몸집이 커졌다. 2015년 기준으로 휠라코리아의 매출은 8000억원, 아쿠쉬네트는 1조 7000억원이다. 외형 기준으로 국내 스포츠 패션그룹에서 이랜드 다음으로 매출이 많다. 그런 윤 회장에게 요즘 언론사들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한다. 휠라코리아가 시장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어서다. 그는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절하고 있다. 사업이 조금 더 안정권에 들어서면 그때 하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이번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인 것에 대해 “강원도 평창에 내려가는 차 안에서 전화를 받았다. 학교 후배이자 동생이 직접 전화했는데 어떻게 거절하겠느냐. 차 앞자리에 앉아있던 홍보 상무에게 인터뷰하기로 했다고 말하니 매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라(웃음)”고 말했다.

윤 회장과 윤 전 행장은 한국외대 선후배 사이다. 윤 회장은 정치외교학과 74학번, 윤 전 행장은 영문학과 78학번이다. 둘은 11년 전인 2006년 동문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윤 전 행장이 금융감독위원회(현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시절이었다. 이듬해 윤 전 행장이 기업은행장 자리로 옮기면서 그들의 관계는 돈독해졌다. 당시 기업들과 마주할 일이 많았던 윤 전 행장이 선배인 윤 회장에게 현장 얘기를 많이 물어봤고 윤 회장 역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시간이 날 때 함께 식사하고 서로 인생상담도 하는 좋은 멘티·멘토로 발전했다.



윤용로:
제가 지금 LF(옛 LG패션)의 사외이사를 맡고 있어요. 업계에서는 국내시장은 작고 해외 나가기는 어렵다고 고충을 토로합니다.



윤윤수:
이제는 한국에서 옷을 팔아 돈 버는 일은 쉽지 않아요. 내가 만약 한국 패션 브랜드로 승부 봤다면 성공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다행이 해외에서 답을 찾았던 것이 지금껏 사업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이런 면에서 국내 패션기업보다 경쟁력을 가진 건 사실이죠. 당시 전문경영인으로 수십억원의 연봉을 받으며 지내고 있었는데 내가 직원 돈까지 다 끌어서 휠라 본사를 왜 인수했을까요? 휠라 브랜드에 대한 애착도 있었지만 해외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내 옷과 신발을 전 세계에 팔고 싶었어요. 세계 인구는 70억 명이 넘는데 상황이 어렵다고 베팅 못하면 진정한 사업가라 볼 수 없어요.



윤용로:
최근 골프시장이 좋지 않은데 이를 타개할 방안이 있으신지요?



윤윤수:
앞으로 골프는 1970년 후반에 태어난 밀레니엄 세대가 쳐야 하는데 그들은 스마트폰 게임에 빠져있어요. 기성세대만 치고 있으니 골프 인구가 늘지를 않아요. 지난해 8월 나이키골프도 골프클럽 사업을 접었고, 테일러메이드도 시장에 매물로 나왔어요. 이런 현상은 골프산업에 절대 좋지 않은 신호지요. 그런데 반대로 보면 우리에겐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봐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제품을 잘 만들고 있어서에요. 공이나 골프클럽 모두 우리 공장에서 100% 생산·납품해요. 미국에서 팔리는 골프공은 미주와 캐나다 공장에서, 동남아시아는 태국 파타야 공장에서 만들어요. 제품 개발에도 투자를 많이 하죠. 1~2월은 골프 비수기지만 실적은 썩 나쁘지 않아요. 지금까지는 골프업체들이 작은 시장에서 나눠먹었지만 경쟁자들이 줄어든 만큼 그 틈새를 우리가 차지하면 돼요.



윤용로:
글로벌 기업을 운영하려면 경영철학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윤윤수:
경영철학이란 게 별거 없어요. 그냥 경험이에요. 예컨대 나처럼 뉴욕 증시에 기업상장(IPO)을 해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리고 난 자신감이 있습니다. 젊었을 때 힘든 일들을 겪으면서 맷집이 생겼어요. 그 맷집이 내가 지금 사업에 베팅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 같아요. 사업하다 보면 책으로 배우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현장에서 배운 것만큼 좋은 건 없지요.



윤용로: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 살기가 어렵다고 호소합니다.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까요?



윤윤수:
한국 젊은이들에게 물어보고 싶어요. 진짜 절박함을 느껴봤느냐고. 내가 졸업했을 때도 좋은 직업 찾기는 어려웠어요. 한국은 본래 조그만한 나라에요. 나라는 작은데 자원은 없고 사람 숫자만 많아요. 해결책을 밖에서 찾아야 해요. 그냥 어렵다고 한국에 주저앉아 있으니 불평 불만만 늘어요. 나는 어릴수록 외국어를 배우라고 말해요(윤 회장은 아들이 중학생 때 ‘세계화 시대에 영어는 필수’라며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내가 3년간 카투사 의무병으로 군에서 생활하면서 배운 영어가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에요. 이럴 때일수록 정부가 노력해야 합니다. 한국도 청년들 취업난을 해소하려면 영어를 한국어와 함께 공용어로 채택해야 해요.



윤용로:
외국어를 잘하면 취업난이 줄어들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윤윤수:
네덜란드나 스위스는 한국보다 면적은 작지만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4만 달러가 넘어요. 왜 그럴까요. 해외에서 나가서 벌어들이는 소득이 많아서에요. 이들의 경쟁력은 외국어에요. 네덜란드는 네덜란드어를 포함해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까지 4개 국어를 구사해요. 언어 구사능력이 되니까 현지 채용이 되고 자신감 있게 일할 수 있어요.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에 따르면 글로벌 500대 기업 CEO 30%가 네덜란드 출신이에요. 말도 통하고 실력도 있으니까 CEO자리까지 오를 수 있는 거죠. 이제는 밖으로 나가야해요. 외국어를 구사한다면 지금보다 젊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선택권이 주어질 것이라 봐요. 공용어가 하나씩 늘수록 우리나라 국민총소득도 늘어날 겁니다.

윤윤수 회장 이력1945년 경기 화성 출생
서울고, 한국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1973~1975년 해운공사(현 한진해운) 입사
1975~1981년 미국 유통업체 JC페니 한국지사
1981~1984년 화승 수출 담당 이사
1984년 대운무역 사장
1991년 휠라코리아 회장
2011년 아큐시네트홀딩스 회장

윤용로 전 외환은행장 - 1977년 행정고시 21회에 수석 합격해 관직을 시작했다. 그 후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외화자금과장·은행제도과장과 금융감독위원회(현금융위원회) 공보관·감독정책2국장·증권선물위원회 상임위원·부위원장까지 지낸 후 금융인으로 변신했다. 국책은행인 기업은행장(2007~10년)을 거쳐 시중은행인 외환은행장(2012~14년)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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