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수의 ‘돈이 되는 茶 이야기’] 물로 우려내 마시는 차 문화는 명나라 때부터
[서영수의 ‘돈이 되는 茶 이야기’] 물로 우려내 마시는 차 문화는 명나라 때부터
명 태조, 칙령 반포해 차 문화 개혁 … 당·송 시대의 복잡한 음용법 간소화 차 문화가 비약적으로 부흥한 당나라와 차가 국가 전매산업으로 발전한 송나라 시대는 중국 역사에서 최고 문화전성기였다. 중국의 4대 발명품 중 종이를 제외한 화약·나침반·인쇄술이 송나라 때 발명됐다. 문치주의 국가로 문화정치를 펼친 송나라는 세계 최초로 지폐를 발행해 사용했다. 중국 차 문화는 779년 당나라의 육우(陸羽)가 [차경(茶經)]을 완성해 다도의 초석을 세운 후 꽃 피우기 시작해 송나라 때 화려함의 극치에 달했다. 차는 당·송 시대를 거치며 황실과 귀족문화를 넘어 일반가정에서도 없으면 안 되는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이사를 하면 새로운 이웃과 차를 마시며 첫인사를 나누는 헌차(獻茶)라는 풍습이 유행했다. 당·송 시대의 차는 현대에 사는 우리가 마시는 차와 만드는 방법과 형태가 달라 차를 음용하는 방법도 전혀 다르고 복잡했다. 현대의 대표적인 차 마시는 방법인 포다법(泡茶法)은 명나라 초부터 법제화돼 오늘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차에 물을 부어 우려서 마시는 방법을 포다법이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지주와 스님의 차 심부름을 도맡아 하며 화려하고 복잡한 차 문화의 이면과 폐단을 깊이 체험했던 명 태조 주원장은 원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국가체제를 안정시키자마자 1391년 9월 칙령으로 차 문화에 대한 개혁을 단행했다. 송나라 시절부터 황실공차로 진상되며 제조과정이 더욱 복잡해지고 정교한 기술을 요구하는 용단차(龍團茶)제조를 폐지했다. 이유는 백성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용단차를 마시는 번거로운 절차인 점다법(點茶法)을 금지하고 채취한 차를 솥에서 간단히 덖어(roast) 만든 엽차(葉茶)를 요즘 흔히 보는 산차(散茶)형태로 만들어 포다법으로 차를 마시게 했다.
차를 물로 우려 마시는 포다법은 무더운 여름에 주로 하는 상투법(上投法)과 추운 겨울에 애용하는 하투법(下投法)이 있다. 상투법은 물을 먼저 다관에 붓고 차를 나중에 넣으며 하투법은 차를 먼저 넣고 물을 부어 차를 우려낸다. 선선한 봄가을에는 물을 절반가량 부은 후에 차를 집어넣고 물을 다시 첨가하는 중투법(中投法)을 선호했다. 780년 사천에서 발명된 뚜껑이 있는 개완(蓋碗)이라는 찻잔에 엽차를 우려 뚜껑 사이로 찻물만 따라 마시는 충다법(沖茶法)도 명나라 때부터 확산됐다. 명나라 이전의 중국 명차는 모두 녹차 종류였지만 청차와 홍차가 등장하며 현대인이 향유하는 다양한 형태의 차가 명나라시대부터 생산되기 시작했다.
차를 마시는 새로운 법을 명 태조가 만들었지만 송나라 때부터 내려오던 점다법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암암리에 지속됐다. 명 태조의 열 일곱번 째 아들 주권(朱權)은 법으로 금지된 용봉단차를 미세한 분말로 만들어 차완에 담아 뜨거운 물에 녹여 차선으로 휘저어 거품을 하얗게 일으켜 마시는 점다법을 즐겼다. 심지어 점다법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다. 일본 말차 문화에 영향을 끼친 점다법에 대한 글은 송나라 제8대 황제 휘종, 조길(徽宗, 趙佶)이 쓴 [대관다론(大觀茶論)]에도 자세히 묘사돼 있다. 차 전문서적으로 송나라 차와 문학의 결정판으로 평가받는 [대관다론]은 20편으로 구성돼 있다. 차를 쪄서 만든 단차보다 섬세한 기술이 필요한 연고차(硏膏茶)의 제조방법과 차를 부드럽게 마실 수 있는 점다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황제 이전에 차 전문가로서 휘종의 내공을 엿볼 수 있다. 도교에 심취해 국정을 소홀히 했던 휘종은 수금체(瘦金體)라는 독특한 서체를 만든 북송 최고의 예술가였다. 화조(花鳥)에 능한 화가로서 많은 국보급 명작을 남긴 휘종은 송나라 황제 중 가장 많은 자녀를 생산해 아들과 딸이 65명이나 있었다. 송나라는 차마교역과 조공무역을 통해 수익과 선린외교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차를 활용했다. 차로 얻는 수입은 송나라 국가재정의 25% 이상을 차지했다.
차와 예술과 종교가 융합 발전했던 송나라 차 문화와 산업의 뿌리는 당나라에 있다. 당나라 사람 육우의 [차경] 덕분에 차 문화가 대중에게 다가왔다. 황실에 차를 바치는 황실공차도 육우가 시작해 당나라때부터 제도화됐다. 황실공차를 위해 차 재배기술과 차 제조공법은 점점 더 상향조정됐다. 차를 한 번 끓여 마시려면 무려 24가지의 도구가 필요했다. 육우는 이러한 허례허식을 비판하며 간소하게 차를 마실 수 있는 방법을 [차경]을 통해 알려줬다.
차의 약리적 효능을 기대하며 차를 진하게 마시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당나라에서 공차로 바쳐지던 병차(餠茶)는 송나라를 주도하던 단차보다 훨씬 커다랗고 둥그렇게 생긴 차였다. 커다란 병차를 약연(藥硏)으로 갈아 더운 물에 타서 마시거나 큰 솥에 차를 끓여 마시는 자다법(煮茶法)과 전다법(煎茶法)이 주류였다. 차를 끓일 때 다양한 약재를 넣어 걸쭉한 죽 형태로 만들어 마시는 백불차(百沸茶)도 유행했다. 요즘 흔히 보는 엽차형의 산차(散茶)도 있었지만 고급차로 인정받지 못한 당나라 서민의 차였다.
“차 마셨어요?”가 아침인사를 대신했을 정도로 차 마시는 풍속이 일상화된 계기는 당나라 숙종(756·762년)이 금주령을 반포하면서부터다. 술 대신 차를 강제로 선택하게 된 당나라 문인들은 차 문화 발전과 확산에 기여하게 됐다. 당나라 차 문화를 승계한 송나라는 차와 다기를 세련되고 화려한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당·송 시대는 정신적 쾌락을 위해 투차(鬪茶)가 황실과 문인을 중심으로 유행하며 전국적인 풍속으로 발전했다. 차와 다과를 함께하는 연회에서 자신이 보유한 명차와 금과 은으로 만든 차 도구를 사용해 차 끓여내는 기교와 차 맛으로 우열을 가렸다. 요즘과 달리 그 당시 ‘먹방’ 대결의 주제는 요리대신 차였다.
서영수 - 1956년생으로 1984년에 데뷔한 대한민국 최연소 감독 출신. 미국 시나리오 작가조합 정회원. 1980년 무렵 보이차에 입문해 중국 윈난성 보이차 산지를 탐방하는 등 차 문화에 조예가 깊다. 중국 CCTV의 특집 다큐멘터리 [하늘이 내린 선물 보이차]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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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차·홍차, 명나라 때부터 생산
차에 물을 부어 우려서 마시는 방법을 포다법이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지주와 스님의 차 심부름을 도맡아 하며 화려하고 복잡한 차 문화의 이면과 폐단을 깊이 체험했던 명 태조 주원장은 원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국가체제를 안정시키자마자 1391년 9월 칙령으로 차 문화에 대한 개혁을 단행했다. 송나라 시절부터 황실공차로 진상되며 제조과정이 더욱 복잡해지고 정교한 기술을 요구하는 용단차(龍團茶)제조를 폐지했다. 이유는 백성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용단차를 마시는 번거로운 절차인 점다법(點茶法)을 금지하고 채취한 차를 솥에서 간단히 덖어(roast) 만든 엽차(葉茶)를 요즘 흔히 보는 산차(散茶)형태로 만들어 포다법으로 차를 마시게 했다.
차를 물로 우려 마시는 포다법은 무더운 여름에 주로 하는 상투법(上投法)과 추운 겨울에 애용하는 하투법(下投法)이 있다. 상투법은 물을 먼저 다관에 붓고 차를 나중에 넣으며 하투법은 차를 먼저 넣고 물을 부어 차를 우려낸다. 선선한 봄가을에는 물을 절반가량 부은 후에 차를 집어넣고 물을 다시 첨가하는 중투법(中投法)을 선호했다. 780년 사천에서 발명된 뚜껑이 있는 개완(蓋碗)이라는 찻잔에 엽차를 우려 뚜껑 사이로 찻물만 따라 마시는 충다법(沖茶法)도 명나라 때부터 확산됐다. 명나라 이전의 중국 명차는 모두 녹차 종류였지만 청차와 홍차가 등장하며 현대인이 향유하는 다양한 형태의 차가 명나라시대부터 생산되기 시작했다.
차를 마시는 새로운 법을 명 태조가 만들었지만 송나라 때부터 내려오던 점다법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암암리에 지속됐다. 명 태조의 열 일곱번 째 아들 주권(朱權)은 법으로 금지된 용봉단차를 미세한 분말로 만들어 차완에 담아 뜨거운 물에 녹여 차선으로 휘저어 거품을 하얗게 일으켜 마시는 점다법을 즐겼다. 심지어 점다법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다. 일본 말차 문화에 영향을 끼친 점다법에 대한 글은 송나라 제8대 황제 휘종, 조길(徽宗, 趙佶)이 쓴 [대관다론(大觀茶論)]에도 자세히 묘사돼 있다.
당나라, 다양한 약재 섞은 차 유행
차와 예술과 종교가 융합 발전했던 송나라 차 문화와 산업의 뿌리는 당나라에 있다. 당나라 사람 육우의 [차경] 덕분에 차 문화가 대중에게 다가왔다. 황실에 차를 바치는 황실공차도 육우가 시작해 당나라때부터 제도화됐다. 황실공차를 위해 차 재배기술과 차 제조공법은 점점 더 상향조정됐다. 차를 한 번 끓여 마시려면 무려 24가지의 도구가 필요했다. 육우는 이러한 허례허식을 비판하며 간소하게 차를 마실 수 있는 방법을 [차경]을 통해 알려줬다.
차의 약리적 효능을 기대하며 차를 진하게 마시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당나라에서 공차로 바쳐지던 병차(餠茶)는 송나라를 주도하던 단차보다 훨씬 커다랗고 둥그렇게 생긴 차였다. 커다란 병차를 약연(藥硏)으로 갈아 더운 물에 타서 마시거나 큰 솥에 차를 끓여 마시는 자다법(煮茶法)과 전다법(煎茶法)이 주류였다. 차를 끓일 때 다양한 약재를 넣어 걸쭉한 죽 형태로 만들어 마시는 백불차(百沸茶)도 유행했다. 요즘 흔히 보는 엽차형의 산차(散茶)도 있었지만 고급차로 인정받지 못한 당나라 서민의 차였다.
“차 마셨어요?”가 아침인사를 대신했을 정도로 차 마시는 풍속이 일상화된 계기는 당나라 숙종(756·762년)이 금주령을 반포하면서부터다. 술 대신 차를 강제로 선택하게 된 당나라 문인들은 차 문화 발전과 확산에 기여하게 됐다. 당나라 차 문화를 승계한 송나라는 차와 다기를 세련되고 화려한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당·송 시대는 정신적 쾌락을 위해 투차(鬪茶)가 황실과 문인을 중심으로 유행하며 전국적인 풍속으로 발전했다. 차와 다과를 함께하는 연회에서 자신이 보유한 명차와 금과 은으로 만든 차 도구를 사용해 차 끓여내는 기교와 차 맛으로 우열을 가렸다. 요즘과 달리 그 당시 ‘먹방’ 대결의 주제는 요리대신 차였다.
서영수 - 1956년생으로 1984년에 데뷔한 대한민국 최연소 감독 출신. 미국 시나리오 작가조합 정회원. 1980년 무렵 보이차에 입문해 중국 윈난성 보이차 산지를 탐방하는 등 차 문화에 조예가 깊다. 중국 CCTV의 특집 다큐멘터리 [하늘이 내린 선물 보이차]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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