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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원의 ‘CEO를 위한 생태학 산책’(10) 어슬렁거리는 능력] 어슬렁거려야 할 때와 으르렁거려야 할 때

[서광원의 ‘CEO를 위한 생태학 산책’(10) 어슬렁거리는 능력] 어슬렁거려야 할 때와 으르렁거려야 할 때

사자는 어슬렁거리며 사냥감을 포착 … ‘시작’보다 중요한 것은 ‘시작하기 이전’
아프리카 동부에 있는 세렝게티 초원은 광활하다. 아니 광활하다 못해 막막하다.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과 그 위를 아스라이 가로지르는 지평선, 그리고 이 공간을 움직이는 수백만 마리의 야생동물들…. 이 넓고도 역동적인 동물의 왕국을 보기 위해 매년 70만~80만 명이나 되는 관광객이 찾아 온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이 하나같이 찾는 존재가 있다. 초원의 제왕 사자다.
 다큐 속 사자는 없다
사람들은 마치 동물원에 온 아이들처럼 이곳에 오기만 하면 당연히 사자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발을 딛자마자 사자를 보러 가자고 현지 가이드들을 보챈다. 쉽게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입이 아프게 외쳐도 막무가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땐 시간이 약이다. 하루 이틀만 지나면 부푼 기대는 소금물에 젖은 배춧잎처럼 수그러든다. 개조한 랜드로버 차량으로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가젤 몇 마리 보는 게 전부인 날이 많은 까닭이다. 그 흔하다는 가젤 보는 게 이럴 정도니 ‘지엄한’ 사자를 보는 건 언감생심이고, 더구나 한 곳에 정착해 살지도 않으니 무작정 돌아다닐 수밖에 없다. 물론 오매불망 찾아다니다 보면 만날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섣부른 기대는 금물이다. 우리가 흔히 머릿속에 그리는 사자는 없기 때문이다. 산천초목을 부르르 떨게 하는 우렁찬 포효로 사냥감의 오금을 저리게 한 다음, 멋진 갈기를 바람에 휘날리며 바람처럼 쫓아가는 그런 사자는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없다. 오로지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구는 사자들만 있다.

하지만 먼 아프리카까지 온 사람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 저러다 일어나 뭔가 하겠지’ 라는 일말의 기대를 끝까지 고수하고 싶어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럴 때도 해결책은 시간이다. 몇 시간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려도 애니메이션 영화 ‘라이언 킹’에 나오는 그런 멋지고 폼 나는 사자는 없다. 이리 저리 뒹굴다 못해 이조차 지겨운지 또 잠에 빠져드는 사자들만 있다. 지켜 보다 보면 같이 하품하다 잠이 들 정도다. 아무리 제왕이라지만 ‘참 팔자 좋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며칠 머물다 가는 관광객이 아닌 이곳 초원에서 실제로 살아야 하는 사자 입장에서 보면 좀 다른 게 보인다. 적도 근처라 태양의 열기가 너무 뜨거워 적어도 낮 시간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걸 말이다.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사병이라도 걸리면 큰 일 아닌가. 어쨌든 사자의 다른 모습을 보려면 일단 해가 넘어가기를 기다려야 한다. 뜨겁게 작열하던 태양이 기울기 시작하면 사자 무리에 조용한 움직임이 생겨난다. 늘어져 있던 사자들, 그 중에서도 보스 역할을 하는 수컷 사자들과 무리를 이끄는 몇몇 암컷 사자들이 조용히 일어나 어디론가 걷기 시작한다. 수컷 사자들의 발걸음은 영역의 경계선을 따라 이어진다. 혹시 주변의 다른 사자들이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는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지는 않았는지를 점검하고 순찰하는 것이다.

암사자들의 발길은 다른 곳으로 향한다. 대개는 근처 어딘가에 있는 사냥감 무리 근처로 간다. 이 녀석들을 따라가다 보면 ‘이번에야 말로 혹시’ 하는 기대가 생긴다. 혹시 그 멋진 사냥 장면을 눈앞에서 보게 되는 건 아닐까?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일단 태도가 영 아니다. 갈수록 걸음이 느려지다 못해 가다 말다 하는 건 기본이고 어디로 가야 할지 잊어버린 것 같은 녀석들이 태반이다. 너무 뒹굴어서 힘이 다 빠진 듯, 심심풀이로 나온 산책인 듯 그렇게 어기적어기적 걷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자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물론 정말 사자답게 힘 있게 걷는, 한눈에 봐도 ‘정말 사자다운’ 사자들도 있다. 상대를 압도하는 눈빛과 멋진 갈기를 휘날리며 당당하게 걷는 그들의 몸에는 힘이 넘치고 위엄이 가득하다. 마치 실연을 당한 사람이 그렇듯 힘이 쭉 빠진 채 움직이기도 귀찮다는 듯 걷는 사자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둘 중 어떤 사자가 더 잘 살아갈까.
 응립여수 호행사병(鷹立如睡 虎行似病)
사자에게 어슬렁거림은 빈둥거림이나 굼뜬 게 아니다. 에너지 소모가 아니라 의미 있는 투자다. 사냥에 성공하기 위한 필수적인 탐색 과정이다.
우리가 보통 머릿속에 그리는(자연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사자에게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배가 출출해진다 ▶먹잇감을 찾아 나선다 ▶마침 저 앞에 사냥감이 보인다 ▶그래, 오늘은 너다, 이렇게 생각을 굳히고 맹렬하게 추격해 사냥에 성공한다.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이 과정은 사자가 어떤 존재인지 단박에 알려준다. 하지만 방송 출연이 아니라 야생의 초원에서 이렇게 살아가려 했다가는 굶어 죽기 십상이다. 이 과정에 왜곡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보이는 과정’ 사이사이에 있는 ‘보이지 않는 노고’들이 사냥의 성패를 결정 짓는 까닭이다. 앞에서 얘기했듯 세렝게티는 광활하다 못해 막막할 정도로 넓다. 차를 타고 시속 60~70km로 달려도 하루에 가젤 몇 마리밖에 볼 수 없을 정도이니 걸어다녀야 하는 사자에게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당연히 배고픔을 느낀 후에 사냥감을 찾아다녔다가는 정작 사냥을 하기도 전에 기진맥진하기 일쑤다. 온 힘을 쏟아도 될까 말까 한 게 사냥인데 이렇게 되면 뒷일은 보나마나다. 그래서 경험 많은 사자들은 이 초원에서 살아가기 위한 첫 번째 원칙을 알고 있다. 말 그대로 ‘등 따습고 배 부를 때’ 미리미리 다음 타깃을 찾아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눈에는 하는 일 없이 뒹구는 것 같지만 노련한 사자들은 틈틈이 봐 둔다. 어떤 먹잇감이 어디쯤, 얼마나 있는지, 그리고 그 중에서 목표로 할만한 녀석들이 있는지 조용히 눈에 넣어 둔다. 하지만 멀리서, 그리고 뒹굴면서 보아 둔 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좀더 가까이 가서 구체적으로 보고 확인해야 성공률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사냥감들이 어떤 녀석들인가. 그들은 지난 수백만 년 동안 최대의 위기가 어디서 오는지 본능적으로 알도록 진화했다. 위기를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뼛속 깊이 새겨두고 있다. 항상 예민한 경계심을 발동시키면서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일단, 그리고 무조건 바람처럼 그 자리를 피하고 볼 것! 이런 행동수칙에 철저하다. 가능한 가까이, 그리고 자세히 관찰해야 최적의 타깃을 설정할 수 있고 타깃의 패턴 또한 알 수 있는데 가까이 가는 것 자체가 힘든 것이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경험 많은 사자들은 하나같이 힘을 쭉 빼고 걷는다. 지금은 사냥 모드가 아니라는 걸 온몸으로 표현한다. 가장 오래된 언어인, 그래서 모두에게 통하는 몸짓 신호를 통해 ‘나는 한가하게 산책 중’이라는 걸 어슬렁거리는 모습으로 알린다. 물론 이건 보여주는 모습일 뿐이고 내부 감각은 360도 카메라처럼 주변의 모든 상황을 스캔하듯 살핀다. 그렇게 사냥에 필요한 것들을 확보한 후, 필요한 순간 자신이 가진 모든 에너지를 폭발시켜 목표를 달성한다.

반대로 어디서나 기세 좋게 힘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자는 바로 이 때문에 사라져간다. 그렇지 않아도 경계심 가득한 사냥감에게 ‘내가 곧 쫓아갈 것’이라는 몸짓 신호를 보내 다 도망가게 하니 정작 배고플 때 쫓아갈 사냥감이 없다. 멋진 위엄을 부리는 대가는 생각보다 크다. 물론 압도하는 눈빛과 힘이 넘치는 몸짓이 필요 없는 건 아니다. 경쟁자들인 이웃 사자들이나 하이에나들과 싸워야 할 때 이런 능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야말로 산천초목을 뒤흔들 듯한 으르렁거리는 포효가 필요하다. 누가 봐도 힘 있는 모습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냥감에게 다가갈 때는 달라야 한다.
 당신은 서성대고 있나, 어슬렁거리고 있나?
그렇다. 이 초원에서 사자로 살아가려면 힘을 써야 할 때와 힘을 빼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 문제는 이 쉬워 보이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일단 이제 막 어른이 된 ‘사자답게 보이는’ 사자들은 차고 넘치는 힘을 빼는데 녹록지 않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많은 실패와 배고픔을 경험하면서 허허실실의 이치를 체득해야 한다. 사자답다는 건 누구한테 보이는 게 아니라 본질에 충실한 것, 그러니까 사냥을 잘하고 이웃 사자들의 침범을 잘 막아내는 데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으르렁거려야 할 때 으르렁거리고, 어슬렁거려야 할 때는 어슬렁거리는 것, 이것이 사자다운 행동이라는 걸 알게 된다. 언제 힘을 쏟아야 할지 알게 되는 것이다.

사자만이 아니다. 숲에 사는 밀림의 왕 호랑이에게도 어슬렁어슬렁 전략은 생존의 기술이다. 30년 가까이 호랑이를 연구한 스티븐 밀스에 의하면 “호랑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졸졸 따라다니는 능력’”이다. 들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슬렁거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늘의 제왕인 독수리와 매들이 틈날 때마다 저 높은 하늘을 빙글빙글 날아다니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어슬렁은 여차하면 바람처럼 사라져버리는 목표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사냥꾼들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능력이다. 채근담에 나오는 매는 조는 듯이 앉아 있고 호랑이는 병든 듯이 걷는다(응립여수 호행사병(鷹立如睡 虎行似病))는 말 또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어디 이들뿐인가? 이 자연의 원리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능력이다. 예를 어느 순간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거나 친해지고 싶을 때 우리는 그 사람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우연을 가장해 접촉을 시도한다.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알고 싶고 그 마음을 ‘사냥’하고 싶기 때문이다. 적당한 물건을 사냥하려는 이들은 상점이나 백화점 안을 어슬렁거린다. 쇼핑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어슬렁거릴 때와 으르렁거릴 때를 잘 분별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경쟁자에게 으르렁거려야 하는데 반대로 고객과 직원에게 그렇게 하는 이들은 오래 못 간다! 우리에게도 어슬렁은 중요한 능력이다.

한마디로 어슬렁거림은 빈둥거림이나 굼뜬 게 아니다. 에너지 소모가 아니라 의미 있는 투자다. 목표 달성에 필수적인 탐색이다. 보이는 걸 보는 게 아니라 보아야 할 것을 좀더 가까이에서, 좀더 자세히 보고 파악하려는 느린 걸음이다. 그래서 어슬렁거림은 서성거림이 아니다. 서성거림은 조급함과 불안에서 나온다. 반면에 어슬렁거림은 여유에서 나온다. 몸의 힘을 빼야 웃을 수 있듯 힘을 뺀 여유에서 어슬렁이 나온다. 눈앞에 있는 저걸 단박에 해치우고 싶은 섣부른 마음을 다잡고 견디는 마음이다. 불안에 쫓기거나 도망치는 게 아니라 불안을 응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슬렁은 또 끈기다. 끈질기게 최고의 기회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조급함과 불안, 그리고 쓸데없는 힘을 뺀 자리에 채워 넣은 여유다.

마지막으로 어슬렁거림은 일을 어떻게 시작해야 한다는 걸 아는 것이다. 일찍이 장자는 “시작이 있으면 ‘시작하기 이전’이 있게 마련”이라고 했다. 우리는 사자가 사냥감을 향해 박차고 나가는 ‘보이는 시작’이 처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공하는 사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 이전’이 있다. 시작부터 하는 사자와 시작 이전부터 하는 사자, 누가 더 절호의 찬스를 잡게 될까. 어느 쪽이 성공할까.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승리의 순간은 쉽게 찾아오지 않으며 그 과정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한 순간의 일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기업이건 개인이건 전쟁을 방불케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다들 조급함에 서성거린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중요한 게 뭔지 조용히 포착하는 움직임이 필요한데 불안을 들키지 않으려 떠들썩하다. 전전긍긍을 감추기 위해 바쁜 척한다. 지금 우리는 서성대고 있을까, 어슬렁거리고 있을까. 어디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을까. 아니 어디에서 어슬렁거려야 하는지 알고는 있는 걸까.



- 필자는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이다. 조직과 리더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콘텐트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사장으로 산다는 것] [사장의 길] [사자도 굶어 죽는다] 등이 있다.
 [박스기사] 어슬렁거림의 경영학 - 틈만나면 어슬렁거렸던 콜먼 모클러(질레트의 CEO)
짐 콜린스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에는 면도기 회사 질레트를 ‘좋은 회사’에서 ‘위대한 회사’로 업그레이드 시킨 전설적인 최고경영자(CEO) 콜먼 모클러의 이야기가 나온다. 콜린스가 이 회사를 방문해 모클러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해냈는지 한 임원에게 묻자 이런 얘기를 한다.

“그는 (시간만 나면) 제품을 수리하는 곳이나 창고 같은 곳을 어슬렁거리는 것을 정말 즐겼어요. 그는 늘 그런 식으로 긴장을 푸는 것 같더군요.” 이 임원의 부인 또한 이야기를 하나 더 보탠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엔 생전에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로 넘쳐났어요.”

무엇이 이런 해피엔딩을 만들었을까. 틈나는 대로 어슬렁거리면서 회사 내의 다양한, 특히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만났던 덕분일 것이다. ‘저 높은 곳’이나 책상 앞, 그리고 보고서 속에만 있지 않았던 것이다. 덕분에 바쁜 일상 속에서 놓치기 쉬운 것들을 보고, 현장의 살아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칫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기 쉬운 마음의 균형을 가다듬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도 알게 모르게 어슬렁거리는 CEO들이 꽤 있다. 차 트렁크에 운동화를 갖고 다니며 시간만 나면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고, 홍대 앞 같은 곳에서 약속을 잡은 후, 한 시간 정도 미리 가 어슬렁거리는 이들이 있다. 왜 어슬렁거릴까. 한 CEO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여기저기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 순간 ‘아!’ 하는 번득임이 생겨요.”

우리 주변에도 ‘맹수’들이 산다. 뭔가 다른 걸 보고 다르게 행동하기에 남다른 걸 이루는 그런 맹수들이 있다. 그들은 모두 힘을 뺀 채 조용히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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