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인택의 혁신을 일군 아시아의 기업인(6) 마윈(馬雲) 알리바바 창업자
채인택의 혁신을 일군 아시아의 기업인(6) 마윈(馬雲) 알리바바 창업자
중국 e-커머스 업체 알리바바의 창업자인 마윈(馬雲·53) 회장이 아시아 경영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 알리바바는 이미 지난해 전세계 주가총액 상위 10위에 랭크됐다. 마 회장은 올해 포브스가 발표한 ‘전세계의 50대 지도자’에서 2위를 차지했다. 뉴욕증시에서 알리바바의 주가는 지난 7월14일 금요일 151.83달러의 종가를 기록했다. 시가총액은 3948억 달러를 넘었다. 알리바바는 이미 지난해 전세계 주가총액 상위 10위 안에 들었으며 올해 이 순위를 더욱 높일 것으로 전망된다. 마 회장의 재산도 계속 불고 있다. 마 회장은 이미 지난 6월9일 블룸버그통신이 발표한 ‘블룸버그 억만장자 지수’에서 아시아 1위, 세계 4위의 부자로 기록됐다. 당시 그의 재산은 418억 달러에 이르렀다. 올해 들어서만 85억 달러가 불었다. 주가가 급등해 재산이 하루에만 28억 달러가 늘어난 적도 있었다. 2013년 5월 “IT 기업의 CEO를 하기에 나이가 많은 편”이라는 말을 뒤로 하고 알리바바의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70·80년대 태어난 세대에게 전권을 주겠다”고 밝혔다. 영향력에서도 세계적인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마 회장은 올해 포브스가 발표한 ‘전세계의 50대 지도자’에서 2위를 차지했다. 그는 지난 1월9일 미국 대통령 당선인 신분이던 도널드 트럼프를 뉴욕의 트럼프 타워에서 30분간 만나 알리바바를 통한 미국 소기업의 중국 진출을 논의하고 미국에서 100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기염을 통했다. 일본 소프트방크의 손마사요시 회장이 트럼프를 만나 500억달러 투자와 일자리 5만 개 창출을 이야기한 것과 스케일에서 차이가 난다.
마 회장은 올해 들어 글로벌 사업을 더욱 다각화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손마사요시 회장과 손잡고 동남아 판 우버인 ‘그랩’에 15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이 투자는 그랩이 동남아 시장에서 경쟁업체인 우버를 누르도록 하는 게 1차 목적이지만 동남아의 그랩 승객을 알리바바의 모바일 금융결제 서비스 애플리케이션인 알리페이의 고객으로 확대하려는 의도도 있다. 알리페이를 동남아에게 급속도로 확대하려는 목적이 크다. 알리페이는 현재 전 세계 제휴사가 12만 개에 이르며 지난해 진출한 유럽에서만 1만여 업체와 제휴 중이다. 알리페이는 조만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도 진출해 아프리카 대륙의 문도 두들긴다.
알리바바의 온라인 은행인 마이뱅크는 신용 부족으로 은행 대출을 받기 어려운 소기업 7000만~8000만 개를 대상으로 영업을 확대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특히 알리바바의 전자상거래 플랫폼을 활용하는 1000만 개에 이르는 소매상을 적극 활용할 예정이다. 알리바바의 물류 회사인 베스트(Best)는 지난 6월 미국에서 기업공개(IPO)를 신청했다. 베스트는 알리바바가 23.4%의 지분을 보유해 1대 주주이며 설립자인 조니 추가 14.7%를 보유하고 있다. 베스트의 특급배송 중 70%를 알리바바가 차지하고 있다. 알리바바는 인공지능 스피커 ‘티몰 지니(Tmall Genie) X1’을 8월부터 판매한다. 티몰 지니 X1은 음성을 통해 음악 스트리밍과 뉴스캐스트, 일정관리 등을 할 수 있다. 지난해 자신의 고향인 항저우(抗州)에서 열렸던 G20 정상회담에서 ‘eWTP(Electronic World Trade Platform: 전자세계무역 플랫폼)’ 개념을 공개했던 마 회장은 지난 3월 이를 처음으로 현실화했다. 알리바바는 말레이시아 정부와 손잡고 말레이시아에 해외 최초의 eWTP 디지털 센터를 설립하기로 했다. 말레이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소규모 업체와 젊은이들이 국제 무역에 참여하도록 지원하는 플랫폼이다. 마 회장의 알리바바는 이처럼 무서운 속도로 사업의 다각화에 힘쓰고 있다. 단순한 e-커머스 업체를 넘어 미래를 개척하는 첨단기업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앞으로 중국 경제의 미래는 임가공을 중심으로 하는 제조업보다 이러한 미래 주도 산업이 이끌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알리바바는 중국의 희망이고, 마 회장은 이러한 중국몽의 중심 인물이다.
마 회장은 중국에서 독특한 경영 전통을 세운 인물이다. 아무런 배경도, 연줄도 없이 e-커머스라는 블루오션에 뛰어들어 신화를 창조했다. 젊어서 줄줄이 실패만 하며 실의에 빠졌던 청년 교사가 끈질긴 노력과 불굴의 의지를 통해 말 그대로 창업의 차이니즈 드림을 이뤘다. 마윈은 중국 저장성 항저우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영어를 배우려고 아침 일찍 일어나 자전거로 인근의 호텔에 가서 외국인에게 말을 걸었다. 이런 생활을 9년간 하다가 말이 통하는 외국인 여성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그 친구로부터 얻은 이름 ‘잭’은 지금 마 회장의 영어 이름이 됐다. 영어 실력은 괜찮았지만 수학 실력이 모자랐다. 대학입학시험인 가오카오에서 그의 수학 실력은 한번은 1점, 그 다음은 31점에 그쳤다. 그래서 대학 진학을 단념하고 삼륜 자전거의 운전수로 일하기도 했다. 그래도 삼수 끝에 1984년 항저우사범학원(현재 항저우 사범대학) 영어과에 들어가 1988년 졸업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신문도 배달하고 운전기사 노릇도 하고 심지어 막노동꾼으로 품도 팔면서 고학 생활을 했다. 대학을 마친 그는 항저우전자공업대(현재 항저우과기대학)의 영어와 국제무역 담당 교원으로 5년간 일하다 통역과 번역을 해주는 회사를 창업했다. 하지만 창업의 길은 녹록지 않았다. 첫 창업에서 그는 쓴맛을 보고 문을 닫아야 했다. 두 번째 창업 아이디어는 미국에 출장을 갔다가 얻었다. 1995년 처음으로 인터넷을 접한 그는 귀국하자마나 웹페이지 제작사를 창업했다. 하지만 중국의 인터넷 붐은 그의 예상보다 느리게 찾아왔다. 당시 중국 대외경제무역부 홈페이지 제작을 맡아 진행하던 중 야후 창업자인 제리 양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제리 양으로부터 야후 입사를 제안 받았지만 사양했다. 봉급생활자의 안정보다 창업의 꿈을 택한 이 결정은 지금의 마윈을 만드는 바탕이 됐다.
1999년 5월 그가 세 번째로 창업한 것이 오늘날의 알리바바다. 고향 항저우의 20평 남짓한 작은 아파트에 18명이 우굴우글 모여 창업에 나섰다. 끼니만 근근이 때우며 사이트를 개설했다. 여기까지는 창업 시도자들은 누구나 경험하는 고생일 수 있다. 마윈은 남들과 달랐다. 마윈은 알리바바를 건설하면서 중국형 비즈니스 모델을 추구했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e-커머스 모델을 베끼지 않았다. 인터넷 비즈니스 후발주자들이 해외 인터넷 비즈니스 모델을 들여와 ‘중국의 이베이’, ‘중국의 아마존’이라고 내세워도 마윈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마윈의 알리바바는 철저히 중국의 필요에 맞춰 중국 고객의 눈높이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해외 인터넷 업체나 이와 유사한 중국내 후발업체와는 부딪힐 이유가 애초에 없었다. 알리바바는 중국의 수요와 실정에 맞춰 새롭게 창안한 맞춤형 e-커머스다. 통상적인 e-커머스가 생산자의 상품을 소비자에게 연결하는 B2C방식인데 비해 알리바바는 중국의 중소업자를 위한 B2B에 주력했다. 알리바바는 다분히 중국 비즈니스적인 환경에 맞춰 개발한 e-비즈니스 플랫폼이다. 납품업자나 도소매업자는 알리바바 사이트에 접속해 원하는 물건을 원하는 소재와 디자인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제조사와 접촉해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는다. 연락과 조율을 통해 주문을 하고 시제품을 받아본 다음 마음에 들면 이를 대량 주문해 사가는 방식이다. 제조업자가 다량으로 만들어 파는 셀러스 마켓이 아니라 바이어와 셀러가 서로 소통하고 절충해서 제품을 확정하고 가격을 흥정하는 방식이다. 제조자도 소매상도 서로 부담이 적은 거래 방식이고 비즈니스 환경이다. 소자본·소량생산으로 누구라도 창업할 수 있게 해주는 인터넷 플랫폼이라는 특징도 있다. 중국뿐 아니라 전세계 240여 개국 수출입업체가 알리바바를 이용한다. 굳이 무역박람회를 찾거나 제조사를 직접 방문할 필요 없이 마음에 맞는 상품의 생산 의뢰를 인터넷에서 가능하게 해준 것이다. 이를 통해 절감할 수 있는 비용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시너지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e-커머스 비즈니스 모델은 그야말로 중국의 토착 모델이다. 그 배경이 그의 고향인 저장성에 있는 이우(義烏)라는 유통 도시다. ‘소상품(잡화)왕국’으로 불리는 이 도시의 도심에는 여의도 면적(840만㎡)의 두 배쯤 되는 1500만㎡ 면적의 초대형 도매시장이 있는데 모두 도매상인 점포가 7만을 넘어선다. 소매상이 아닌 도매상이 이 정도 규모로 밀집해 있다면 그 몇 배나 되는 중소 제조업체가 배후에 있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한 가게에 장갑이 2000여 개 진열돼 있으면 이는 상품의 숫자가 아니라 도매나 주문배수로 제작해 판매할 상품의 샘플이 그 정도 된다는 의미다. 도매상의 진열대이기 때문이다. ‘상품의 바다, 구매자의 천국’으로 불리는 이곳에선 구매자가 상품과 샘플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거래하는 것은 물론 서로 협의해 원단과 디자인, 색상을 바꿔 주문할 수 있다. 융통성이 있는 잡화 도매상이라는 이야기다.
1982년 개발이 시작된 이우 시장은 중국에서는 물론 전세계에서 가장 큰 도매시장으로 평가 받는다. 취급 상품이 40만 종을 넘는다. 불교 사찰에서 필요한 동종과 불상, 천정의 장엄부터 기독교 성탄절에 쓰이는 성탄절 트리와 루돌프 사슴상, 유대교에 사용하는 가지가 일곱 개 달린 거룩한 촛대인 메노라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상품이 다 거래된다. 양말은 숫제 시장이 하나 따로 있을 정도다. 이곳에서 주문 받아 컨테이너 단위로 선적된 양말이 도착한 나라는 그때부터 양말값이 절반 이하로 내려가기 십상일 정도다. 돈냄새를 맡고 모여든 인도인과 아랍인 상인들이 모여 들어 커다랗게 ‘할랄(종교적으로 허용된 음식)’이라고 아랍문자로 적혀 있는 아랍 음식점이 시내에 즐비하다. 알리바바는 이런 구매방식을 인터넷으로 옮겨왔다. 중국식 상거래 방식을 글로벌 e-커머스로 진화시킨 셈이다. 중국의 토착 비즈니스를 e-비즈니스로 진화시킨 셈이다.
알리바바는 한창 성장할 무렵 외국 e-비즈니스 업체의 집중 견제를 당했다. 2003년 중국에 진출한 미국의 이베이는 중국의 대표적인 포털사이트인 바이두 등과 독점 광고게재 계약을 맺고 공세적으로 중국 시장 개척에 나섰다. 마윈의 알리바바는 이베이와 독점계약을 맺은 포털에는 광고를 낼 수도 없을 정도로 심하게 견제 받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고사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윈은 집요했다. 더 질겼다. 그는 포털이 아닌 다른 사이트에 적극적으로 광고를 게재하고 유료회원제를 무료로 바꿔 중국의 e-커머스 시장 판도를 뒤흔들었다. 결국 e-베이는 2005년 중국시장에서 철수했다. 마윈의 집요함과 비즈니스 감각이 드러나는 사례다. 중국 e-커머스 시장을 알리바바가 독주하고 있는 것은 이 같이 냉혹한 진검승부의 결과다. 경쟁이 결과 다른 업체는 도태되고 알리바바가 살아남은 셈이다. 이런 중국 맞춤형 인터넷 B2B 비즈니스는 마침 일기 시작한 중국의 인터넷 붐과 맞물려 언론과 업계의 관심을 모았다. 1999년 9월 골드만삭스로부터 500만 달러를 투자 받은데 이어 한 달 뒤 일본 소프트방크의 손마사요시 회장을 만났다. 마윈을 만난 손 회장은 사업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2000만 달러 투자를 결정했다. 손 회장은 이후 인터넷 비즈니스에서 마윈의 멘토 역할을 했다. 마윈이 오픈 마켓 사이트인 타오바오를 개설한 것도 손 회장의 조언에 따른 것이다. 마윈을 통해 중국에 진출한 셈이다. 손마사요시는 이듬해에는 8200만 달러를 투자해 현재도 알리바바닷컴 지분 32%를 보유한 최대 주주다. 한때 그를 고용하려 했던 야후 창업자 제리 양은 2006년 알리바바에 17억 달러를 투자했다. 알리바바가 창업과 상거래, 특히 수출을 북돋는 인터넷 플랫폼이니만큼 중국 정부도 반가워할 수밖에 없는 사업모델이다. 그런 알리바바는 홍콩증시에 상장이 좌절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2014년 9월 뉴욕시장에 무사히 상장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엄청난 성공이다.
마윈은 2003년 이베이가 중국에 진출하자 “우리는 양쯔강 악어이고 이베이는 바다 속 상어다. 바다에서라면 몰라도 강에서라면 우리가 이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마윈이 자신을 가진 것은 중국에서 중국의 모델이 이긴다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153cm의 작은 키에 깡마른 그 몸매에서 나오는 마윈이지만 기개는 하늘을 찔렀다. 2013년 말 ‘한·중인터넷 원탁회의’ 참석차 서울을 찾았던 마윈은 서울대 강연에서 “내가 성공한 것은 돈도, 기술도, 계획도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돈이 없어 투자금을 아껴 쓰고, 기술 지식이 부족해 오히려 일반 고객도 편안하게 쓸 수 있는 쉽고 간편한 인터넷 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었으며, 거창한 계획을 세우지 않아 시장 환경 변화에 재빨리 대응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가진 자가 가질 것을 더 많이 만들 수 있는 세상에서 마윈은 부족한 자신을 성공의 자산으로 삼았던 것이다. 마윈이 수많은 젊은 청년 창업인에게 영감을 주고 자극하는 이유다.
중고교와 대학에서 열등생이던 그는 펜실베이니아대 워튼스쿨, MIT, 하버드대 등에서 강연활동을 하며 마윈식, 아시아식, 중국식 e-커머스에 대한 철학을 정립하고 있다. 그의 좌우명은 ‘영원불방기(永遠不放棄)’라고 하는데 이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중국식 표현이라고 한다. ‘순간적인 정열은 무의미하다. 지속되는 열정만이 비즈니스가 된다’는 말도 남겼다. 그의 경영 철학을 함축하는 말들이다. 마 회장이 아시아의 특출한 경영인으로 평가받고 수많은 사람이 그의 말 하나, 행동 하나에 귀를 기울이고 주목하는 이유다. 마윈은 아시아 경영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
채인택 - 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 논설위원을 거쳐 국제전문기자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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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사업 다각화 하는 알라바바 그룹
마 회장은 올해 들어 글로벌 사업을 더욱 다각화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손마사요시 회장과 손잡고 동남아 판 우버인 ‘그랩’에 15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이 투자는 그랩이 동남아 시장에서 경쟁업체인 우버를 누르도록 하는 게 1차 목적이지만 동남아의 그랩 승객을 알리바바의 모바일 금융결제 서비스 애플리케이션인 알리페이의 고객으로 확대하려는 의도도 있다. 알리페이를 동남아에게 급속도로 확대하려는 목적이 크다. 알리페이는 현재 전 세계 제휴사가 12만 개에 이르며 지난해 진출한 유럽에서만 1만여 업체와 제휴 중이다. 알리페이는 조만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도 진출해 아프리카 대륙의 문도 두들긴다.
알리바바의 온라인 은행인 마이뱅크는 신용 부족으로 은행 대출을 받기 어려운 소기업 7000만~8000만 개를 대상으로 영업을 확대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특히 알리바바의 전자상거래 플랫폼을 활용하는 1000만 개에 이르는 소매상을 적극 활용할 예정이다. 알리바바의 물류 회사인 베스트(Best)는 지난 6월 미국에서 기업공개(IPO)를 신청했다. 베스트는 알리바바가 23.4%의 지분을 보유해 1대 주주이며 설립자인 조니 추가 14.7%를 보유하고 있다. 베스트의 특급배송 중 70%를 알리바바가 차지하고 있다. 알리바바는 인공지능 스피커 ‘티몰 지니(Tmall Genie) X1’을 8월부터 판매한다. 티몰 지니 X1은 음성을 통해 음악 스트리밍과 뉴스캐스트, 일정관리 등을 할 수 있다.
e-커머스라는 블루오션에 뛰어들어 신화 창조
마 회장은 중국에서 독특한 경영 전통을 세운 인물이다. 아무런 배경도, 연줄도 없이 e-커머스라는 블루오션에 뛰어들어 신화를 창조했다. 젊어서 줄줄이 실패만 하며 실의에 빠졌던 청년 교사가 끈질긴 노력과 불굴의 의지를 통해 말 그대로 창업의 차이니즈 드림을 이뤘다. 마윈은 중국 저장성 항저우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영어를 배우려고 아침 일찍 일어나 자전거로 인근의 호텔에 가서 외국인에게 말을 걸었다. 이런 생활을 9년간 하다가 말이 통하는 외국인 여성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그 친구로부터 얻은 이름 ‘잭’은 지금 마 회장의 영어 이름이 됐다. 영어 실력은 괜찮았지만 수학 실력이 모자랐다. 대학입학시험인 가오카오에서 그의 수학 실력은 한번은 1점, 그 다음은 31점에 그쳤다. 그래서 대학 진학을 단념하고 삼륜 자전거의 운전수로 일하기도 했다. 그래도 삼수 끝에 1984년 항저우사범학원(현재 항저우 사범대학) 영어과에 들어가 1988년 졸업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신문도 배달하고 운전기사 노릇도 하고 심지어 막노동꾼으로 품도 팔면서 고학 생활을 했다. 대학을 마친 그는 항저우전자공업대(현재 항저우과기대학)의 영어와 국제무역 담당 교원으로 5년간 일하다 통역과 번역을 해주는 회사를 창업했다. 하지만 창업의 길은 녹록지 않았다. 첫 창업에서 그는 쓴맛을 보고 문을 닫아야 했다. 두 번째 창업 아이디어는 미국에 출장을 갔다가 얻었다. 1995년 처음으로 인터넷을 접한 그는 귀국하자마나 웹페이지 제작사를 창업했다. 하지만 중국의 인터넷 붐은 그의 예상보다 느리게 찾아왔다. 당시 중국 대외경제무역부 홈페이지 제작을 맡아 진행하던 중 야후 창업자인 제리 양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제리 양으로부터 야후 입사를 제안 받았지만 사양했다. 봉급생활자의 안정보다 창업의 꿈을 택한 이 결정은 지금의 마윈을 만드는 바탕이 됐다.
1999년 5월 그가 세 번째로 창업한 것이 오늘날의 알리바바다. 고향 항저우의 20평 남짓한 작은 아파트에 18명이 우굴우글 모여 창업에 나섰다. 끼니만 근근이 때우며 사이트를 개설했다. 여기까지는 창업 시도자들은 누구나 경험하는 고생일 수 있다. 마윈은 남들과 달랐다. 마윈은 알리바바를 건설하면서 중국형 비즈니스 모델을 추구했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e-커머스 모델을 베끼지 않았다. 인터넷 비즈니스 후발주자들이 해외 인터넷 비즈니스 모델을 들여와 ‘중국의 이베이’, ‘중국의 아마존’이라고 내세워도 마윈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마윈의 알리바바는 철저히 중국의 필요에 맞춰 중국 고객의 눈높이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해외 인터넷 업체나 이와 유사한 중국내 후발업체와는 부딪힐 이유가 애초에 없었다. 알리바바는 중국의 수요와 실정에 맞춰 새롭게 창안한 맞춤형 e-커머스다. 통상적인 e-커머스가 생산자의 상품을 소비자에게 연결하는 B2C방식인데 비해 알리바바는 중국의 중소업자를 위한 B2B에 주력했다.
중국의 토착 비즈니스를 e-비즈니스로 진화시켜
이러한 e-커머스 비즈니스 모델은 그야말로 중국의 토착 모델이다. 그 배경이 그의 고향인 저장성에 있는 이우(義烏)라는 유통 도시다. ‘소상품(잡화)왕국’으로 불리는 이 도시의 도심에는 여의도 면적(840만㎡)의 두 배쯤 되는 1500만㎡ 면적의 초대형 도매시장이 있는데 모두 도매상인 점포가 7만을 넘어선다. 소매상이 아닌 도매상이 이 정도 규모로 밀집해 있다면 그 몇 배나 되는 중소 제조업체가 배후에 있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한 가게에 장갑이 2000여 개 진열돼 있으면 이는 상품의 숫자가 아니라 도매나 주문배수로 제작해 판매할 상품의 샘플이 그 정도 된다는 의미다. 도매상의 진열대이기 때문이다. ‘상품의 바다, 구매자의 천국’으로 불리는 이곳에선 구매자가 상품과 샘플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거래하는 것은 물론 서로 협의해 원단과 디자인, 색상을 바꿔 주문할 수 있다. 융통성이 있는 잡화 도매상이라는 이야기다.
1982년 개발이 시작된 이우 시장은 중국에서는 물론 전세계에서 가장 큰 도매시장으로 평가 받는다. 취급 상품이 40만 종을 넘는다. 불교 사찰에서 필요한 동종과 불상, 천정의 장엄부터 기독교 성탄절에 쓰이는 성탄절 트리와 루돌프 사슴상, 유대교에 사용하는 가지가 일곱 개 달린 거룩한 촛대인 메노라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상품이 다 거래된다. 양말은 숫제 시장이 하나 따로 있을 정도다. 이곳에서 주문 받아 컨테이너 단위로 선적된 양말이 도착한 나라는 그때부터 양말값이 절반 이하로 내려가기 십상일 정도다. 돈냄새를 맡고 모여든 인도인과 아랍인 상인들이 모여 들어 커다랗게 ‘할랄(종교적으로 허용된 음식)’이라고 아랍문자로 적혀 있는 아랍 음식점이 시내에 즐비하다. 알리바바는 이런 구매방식을 인터넷으로 옮겨왔다. 중국식 상거래 방식을 글로벌 e-커머스로 진화시킨 셈이다. 중국의 토착 비즈니스를 e-비즈니스로 진화시킨 셈이다.
알리바바는 한창 성장할 무렵 외국 e-비즈니스 업체의 집중 견제를 당했다. 2003년 중국에 진출한 미국의 이베이는 중국의 대표적인 포털사이트인 바이두 등과 독점 광고게재 계약을 맺고 공세적으로 중국 시장 개척에 나섰다. 마윈의 알리바바는 이베이와 독점계약을 맺은 포털에는 광고를 낼 수도 없을 정도로 심하게 견제 받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고사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윈은 집요했다. 더 질겼다. 그는 포털이 아닌 다른 사이트에 적극적으로 광고를 게재하고 유료회원제를 무료로 바꿔 중국의 e-커머스 시장 판도를 뒤흔들었다. 결국 e-베이는 2005년 중국시장에서 철수했다. 마윈의 집요함과 비즈니스 감각이 드러나는 사례다. 중국 e-커머스 시장을 알리바바가 독주하고 있는 것은 이 같이 냉혹한 진검승부의 결과다. 경쟁이 결과 다른 업체는 도태되고 알리바바가 살아남은 셈이다.
손마사요시 회장과 제리 양의 투자로 도약
마윈은 2003년 이베이가 중국에 진출하자 “우리는 양쯔강 악어이고 이베이는 바다 속 상어다. 바다에서라면 몰라도 강에서라면 우리가 이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마윈이 자신을 가진 것은 중국에서 중국의 모델이 이긴다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153cm의 작은 키에 깡마른 그 몸매에서 나오는 마윈이지만 기개는 하늘을 찔렀다. 2013년 말 ‘한·중인터넷 원탁회의’ 참석차 서울을 찾았던 마윈은 서울대 강연에서 “내가 성공한 것은 돈도, 기술도, 계획도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돈이 없어 투자금을 아껴 쓰고, 기술 지식이 부족해 오히려 일반 고객도 편안하게 쓸 수 있는 쉽고 간편한 인터넷 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었으며, 거창한 계획을 세우지 않아 시장 환경 변화에 재빨리 대응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가진 자가 가질 것을 더 많이 만들 수 있는 세상에서 마윈은 부족한 자신을 성공의 자산으로 삼았던 것이다. 마윈이 수많은 젊은 청년 창업인에게 영감을 주고 자극하는 이유다.
중고교와 대학에서 열등생이던 그는 펜실베이니아대 워튼스쿨, MIT, 하버드대 등에서 강연활동을 하며 마윈식, 아시아식, 중국식 e-커머스에 대한 철학을 정립하고 있다. 그의 좌우명은 ‘영원불방기(永遠不放棄)’라고 하는데 이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중국식 표현이라고 한다. ‘순간적인 정열은 무의미하다. 지속되는 열정만이 비즈니스가 된다’는 말도 남겼다. 그의 경영 철학을 함축하는 말들이다. 마 회장이 아시아의 특출한 경영인으로 평가받고 수많은 사람이 그의 말 하나, 행동 하나에 귀를 기울이고 주목하는 이유다. 마윈은 아시아 경영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
채인택 - 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 논설위원을 거쳐 국제전문기자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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