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산업의 탄생(2) | 반도호텔의 등장] 日 자본 결정체…해방 후 美 대사관으로
[호텔산업의 탄생(2) | 반도호텔의 등장] 日 자본 결정체…해방 후 美 대사관으로
1950년대 들어선 금수장호텔·사보이호텔 등 민영호텔 등장하며 호텔 업계 산업화 막 올라 1929년 기록에 따르면 서울에는 일본식 여관이 50곳, 조선식 여관이 345곳이 있었다. 그중에는 소규모 호텔도 포함돼 있었다. 임옥호텔(林屋Hotel)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경성관리국 출신인 고바야시 하루키가 1928년 건립한 것으로 경성역 우측의 고시정(古市町: 현 용산구 동자동)에 자리하고 있었다.
1931년에는 명동호텔(明東Hotel)이 문을 열었는데, 창업자는 명동(明東)으로만 알려져 있다. 영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에 이상적인 호텔이 적은 것을 한탄하며 자신의 집을 개조해 호텔로 만들었다고 한다. 한옥을 개조해 만든 호텔로 다옥정 25(현 중구 다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1934년에는 모리 다쯔오가 본정 2-100(현 중구 충무로)에 본정호텔(本町Hotel)을 열었다.
1936년에는 당시 천향원(天香園)이라는 최고급 요정의 주인인 김옥교가 사간정(司諫町: 현 종로구 삼청동)에 2000여 평의 부지를 사서 천향각(天香閣)이라는 조선식 호텔을 건립하려 했지만, 중·일전쟁으로 중단됐다. 그는 호텔을 짓는 목적이 “외국인이 조선에 와서 편히 머물 수 있고, 음식도 마음놓고 먹을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외국에 조선을 소개하기 위함”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후 언제 어떻게 완공되고 운영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윤치호 일기의 기록과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씨의 회고를 통해 광복 이후까지 호텔을 건립하고 영업을 계속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1938년 4월 1일 일본 질소비료주식회사의 사장인 노구치시다가후가 황금정 1정목(현 중구 을지로1가)에 건립한 반도호텔이 영업을 시작했다. 반도호텔은 8층 111실 규모의 호텔로 임대용 상가와 사무실, 호텔이 한 공간에 있는 오피스텔 형태의 상업호텔이었다. 조선호텔보다 규모가 큰 것은 물론이며 동양에서 4번째로 규모가 큰 호텔이기도 했다. 호텔 운영 면에서도 지난 회에서 언급한 근대호텔의 표준 서비스인 스타틀러호텔의 상용호텔 양식을 도입해 일반인을 상대로 한 영업을 시작했다. 손정목은 호텔의 건립과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를 전하고 있는데, 노구치 시다가후는 조선호텔을 방문했다가 허름한 차림탓에 종업원에게 쫓겨난 것을 계기로 반도호텔을 건설하고자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그는 이 일이 발생한 후 조선호텔 바로 뒤인 황금정 1정목 18번지의 2000여 평의 땅을 매입하기 시작했고, 결국 더 큰 규모의 호텔을 건설해 조선호텔과 같은 높이인 5층에 자신의 사무실을 두고 창 너머로 조선호텔을 내려 보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표면적으로 반도호텔은 조선호텔과 경쟁적인 관계를 형성한 것처럼 보였다. 국가와 기업이라는 설립 주체의 차이는 있었다. 다만 1939년 조선호텔은 고구마 밥을 이용해 절미운동에 적극 참여하지만 반도호텔은 쌀을 가장 많이 사용한 업체로 선정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만, 모두 식민지 지배의 상징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또 식민지 자본주의 발달로 인한 소비문화의 진작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일반인도 호텔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일본 기업과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던 호텔은 대부분 미군정에 귀속됐다. 그중 조선호텔과 반도호텔은 미군정 고위 간부들의 숙소와 사무실로 사용됨에 따라 호텔 본연의 역할과 달리 정치 중심지로 변모하게 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 조선호텔은 반환돼 교통부로 이관됐지만, 반도호텔은 한·미 두 정부의 공영과 협력을 상징하는 명분으로 미국에 증여돼 미 대사관으로 사용됐다.
한국전쟁 기간 중 피해가 적었던 조선호텔은 다시 유엔군과 미군 장교의 숙소로 사용됐고 이후에도 주한 미 경제조정관실, 미 8군 숙소 등으로 사용되다가 1961년이 되어서야 한국 정부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한편, 반도호텔은 폭격으로 인한 피해가 컸는데, 1953년 휴전 이후 다시 한국 정부에서 매입해 1년에 가까운 수리를 거쳐 1954년 외국인 전용 호텔로 개장했다.
이 시기 조선호텔과 반도호텔의 명칭 변경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이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식민통치기의 대한민국을 지칭하는 ‘조선’이라는 명칭을 변경하려 했다. 하지만, 40년 간 사용해온 명칭으로 지금까지 명성을 쌓아온 자부심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명칭을 전면 수정할 수 없다는 조선호텔 총지배인의 반대로 영문 표기만을 ‘CHOSEN’에서 ‘CHOSUN’으로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955년에는 ‘반도’와 ‘조선’이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한국을 칭하는 말이었고, 특히 ‘조선’은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을 부르는 말이기도 해두 호텔이 일본인과 공산당을 위한 호텔이 아닌 이상 명칭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호텔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으며 반도호텔도 1974년 폐업할 때까지 사용됐다. 1952년 4월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시기, 정부는 종전 이후 재건과 관련한 관광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교통부 관리국 내에 관광계를 신설했고, 1954년에는 관광과로 승격했다. 호텔은 외자확보가 용이해 관광산업의 중요한 시설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조선호텔과 반도호텔 그리고 지방의 불국사 호텔, 해운대 호텔, 몇몇 철도호텔을 수리하는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진척은 없었다. 1958년 교통부 직영호텔에서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3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전쟁 이후 재건 등을 위해 서울에 머물고 있는 외국인들을 위한 숙소는 부족한 상태였다. 이들을 주 대상으로 한 민영호텔이 건립되기 시작했는데, 1952년 8월 15일 거행될 정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서울시가 작성한 고관 영접 숙소 리스트를 살펴보면 동아호텔·제일호텔·대원호텔·남문호텔·경동호텔·동명호텔·협동호텔 등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955년에는 현 앰배서더 그랜드 호텔의 전신인 금수장호텔이 문을 열었으며, 1957년에는 명동의 사보이 호텔 등이 건립돼 1960년 한국의 호텔 객실 수는 1207실, 수용할 수 있는 투숙객은 2363명이 됐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1931년에는 명동호텔(明東Hotel)이 문을 열었는데, 창업자는 명동(明東)으로만 알려져 있다. 영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에 이상적인 호텔이 적은 것을 한탄하며 자신의 집을 개조해 호텔로 만들었다고 한다. 한옥을 개조해 만든 호텔로 다옥정 25(현 중구 다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1934년에는 모리 다쯔오가 본정 2-100(현 중구 충무로)에 본정호텔(本町Hotel)을 열었다.
1936년에는 당시 천향원(天香園)이라는 최고급 요정의 주인인 김옥교가 사간정(司諫町: 현 종로구 삼청동)에 2000여 평의 부지를 사서 천향각(天香閣)이라는 조선식 호텔을 건립하려 했지만, 중·일전쟁으로 중단됐다. 그는 호텔을 짓는 목적이 “외국인이 조선에 와서 편히 머물 수 있고, 음식도 마음놓고 먹을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외국에 조선을 소개하기 위함”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후 언제 어떻게 완공되고 운영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윤치호 일기의 기록과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씨의 회고를 통해 광복 이후까지 호텔을 건립하고 영업을 계속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1938년 4월 1일 일본 질소비료주식회사의 사장인 노구치시다가후가 황금정 1정목(현 중구 을지로1가)에 건립한 반도호텔이 영업을 시작했다. 반도호텔은 8층 111실 규모의 호텔로 임대용 상가와 사무실, 호텔이 한 공간에 있는 오피스텔 형태의 상업호텔이었다. 조선호텔보다 규모가 큰 것은 물론이며 동양에서 4번째로 규모가 큰 호텔이기도 했다. 호텔 운영 면에서도 지난 회에서 언급한 근대호텔의 표준 서비스인 스타틀러호텔의 상용호텔 양식을 도입해 일반인을 상대로 한 영업을 시작했다.
아시아 4번째로 큰 규모였던 반도호텔
표면적으로 반도호텔은 조선호텔과 경쟁적인 관계를 형성한 것처럼 보였다. 국가와 기업이라는 설립 주체의 차이는 있었다. 다만 1939년 조선호텔은 고구마 밥을 이용해 절미운동에 적극 참여하지만 반도호텔은 쌀을 가장 많이 사용한 업체로 선정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만, 모두 식민지 지배의 상징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또 식민지 자본주의 발달로 인한 소비문화의 진작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일반인도 호텔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일본 기업과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던 호텔은 대부분 미군정에 귀속됐다. 그중 조선호텔과 반도호텔은 미군정 고위 간부들의 숙소와 사무실로 사용됨에 따라 호텔 본연의 역할과 달리 정치 중심지로 변모하게 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 조선호텔은 반환돼 교통부로 이관됐지만, 반도호텔은 한·미 두 정부의 공영과 협력을 상징하는 명분으로 미국에 증여돼 미 대사관으로 사용됐다.
한국전쟁 기간 중 피해가 적었던 조선호텔은 다시 유엔군과 미군 장교의 숙소로 사용됐고 이후에도 주한 미 경제조정관실, 미 8군 숙소 등으로 사용되다가 1961년이 되어서야 한국 정부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한편, 반도호텔은 폭격으로 인한 피해가 컸는데, 1953년 휴전 이후 다시 한국 정부에서 매입해 1년에 가까운 수리를 거쳐 1954년 외국인 전용 호텔로 개장했다.
이 시기 조선호텔과 반도호텔의 명칭 변경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이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식민통치기의 대한민국을 지칭하는 ‘조선’이라는 명칭을 변경하려 했다. 하지만, 40년 간 사용해온 명칭으로 지금까지 명성을 쌓아온 자부심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명칭을 전면 수정할 수 없다는 조선호텔 총지배인의 반대로 영문 표기만을 ‘CHOSEN’에서 ‘CHOSUN’으로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955년에는 ‘반도’와 ‘조선’이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한국을 칭하는 말이었고, 특히 ‘조선’은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을 부르는 말이기도 해두 호텔이 일본인과 공산당을 위한 호텔이 아닌 이상 명칭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호텔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으며 반도호텔도 1974년 폐업할 때까지 사용됐다.
일본·미국 등 외국 군대 숙소로 쓰여
전쟁 이후 재건 등을 위해 서울에 머물고 있는 외국인들을 위한 숙소는 부족한 상태였다. 이들을 주 대상으로 한 민영호텔이 건립되기 시작했는데, 1952년 8월 15일 거행될 정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서울시가 작성한 고관 영접 숙소 리스트를 살펴보면 동아호텔·제일호텔·대원호텔·남문호텔·경동호텔·동명호텔·협동호텔 등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955년에는 현 앰배서더 그랜드 호텔의 전신인 금수장호텔이 문을 열었으며, 1957년에는 명동의 사보이 호텔 등이 건립돼 1960년 한국의 호텔 객실 수는 1207실, 수용할 수 있는 투숙객은 2363명이 됐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탄핵 위기' 의협 회장 "과오 만회할 기회 달라"
2‘어떻게 색출하지?’ 나솔 23기 '정숙' 범죄 논란에...제작사 섭외 부담 커졌다
3“母 수감으로 학업중단”...한소희, 나이 줄인 사정 있었다
4 미국 9월 PCE 물가 전년비 2.1%↑...전월비 0.2%↑
5약속 지키는 정의선...내년에 넥쏘 후속 나온다
6물리치료 342회 받더니...실손보험금 8500만원 청구
7기준금리 내렸는데...은행 주담대 금리 최대폭 상승
8석달 만에 풀려난 카카오 김범수..."성실히 조사받을 것"
9이준석 "명태균이 김영선 공천 부탁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