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의 고대 문명이 몰락하면서 정글 속에 버려졌다는 주장 뒤엎을 수 있는 고고학적 증거 나와 지금도 많은 관광객은 정글에서 발견된 ‘잃어버린 유적’이라는 낭만적인 생각을 떠올리며 앙코르 와트를 찾는다. / 사진:WIKIMEDIA COMMONS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는 매년 200만 명이 이상이 찾는 세계 최대의 종교 유적지 중 하나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자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기도 하다. 크메르어로 앙코르는 ‘왕도(王都)’, 와트는 ‘사원’을 의미한다. 앙코르 와트는 12세기 초에 건립됐다. 당시 크메르족은 왕이 사망하면 그가 믿던 신과 합일한다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왕은 자신과 합일하게 될 신의 사원을 건립했다. 앙코르 와트는 약 9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이어진 앙코르 문명에서 전성기를 이룬 수리아바르만 2세가 바라문교 주신의 하나인 비슈누와 합일하기 위해 건립한 사원이다. 이 유적지의 구조는 오늘날에도 캄보디아의 정체성과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돼 있어 국기에도 등장한다.
오랫동안 역사 전문가들은 앙코르 문명이 1431년 몰락했다고 믿었다. 당시 앙코르 왕국의 수도 앙코르 톰이 서쪽에 있던 아유타야 왕국(현재의 태국)의 침공과 약탈로 완전히 버려졌다는 가설이었다. 왕조가 붕괴하면서 모든 주민이 이곳을 떠났다는 이 가설은 캄보디아인이 과거의 찬란한 문명을 정글 속에서 썩어가도록 내버려 뒀다는 19세기 식민주의식 해석이 힘을 얻는 데도 일조했다. 지금도 많은 관광객은 신비로운 정글에서 발견된 ‘잃어버린 유적’이라는 낭만적인 생각을 떠올리며 앙코르 와트를 찾는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그 가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고고학적인 증거도 앙코르 문명의 쇠락과 관련된 더 많은 정보를 계속 제공한다. 그에 따르면 앙코르 문명의 쇠퇴 과정은 이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길고 복잡했다. 그 과정은 ‘몰락’이라기보다 ‘변화’로 묘사하는 것이 더 옳을지 모른다. 앙코르 와트라는 이 하나의 특정 사원과 관련된 역사를 세부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고고학자들은 앙코르 왕국 전체에서 진행된 더 폭넓은 변화의 단면을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앙코르 문명에 무슨 일이 있어났던 것일까?
고고학 연구자들은 앙코르 문명이 서기 802년 본격적으로 자리 잡았다고 믿는다. 그 중심부와 수도는 현재의 캄보디아 서북부에 위치한 톤레삽 호수 곁에 위치했다. 앙코르 왕국은 기후가 온화하고 강우량이 풍부했던 시절 세워져 눈부시게 발전했다. 전성기에 앙코르 왕국의 지도자들은 동남아의 넓은 지역을 다스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항공우주국 (NASA)이 제공한 앙코르 와트의 위성 사진. / 사진:NASA앙코르 문명은 앙코르 와트 사원의 건설이 시작된 1100년대 초 전성기에 이르렀다. 앙코르 와트는 힌두교의 우주를 재창조한 형태로 건설됐다. 그곳의 가장 빼어난 건축물은 웅대한 방추형 중앙 탑과 그 탑의 동서남북에 십자형으로 뻗은 익랑, 그것을 둘러싼 3중 회랑과 회랑의 네 모서리에 우뚝 솟은 거대한 탑으로 이뤄졌다. 이 중앙 탑과 주변의 보다 작은 탑들은 힌두교 우주의 중심인 메루(‘수미’라고도 한다) 산봉우리를 상징한다. 앙코르 와트는 영생불사약 ‘암리타’가 만들어지는 우유의 바다를 상징하는 거대한 해자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13세기 말이 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앙코르 왕조의 마지막 석조 사원은 1295년 건설됐다. 같은 해 사원 벽에 산스크리트 문자가 마지막으로 새겨졌다. 캄보디아 언어인 크메르어의 마지막 명문은 1327년 새겨졌다. 석조 사원을 건설하고 명문을 새기는 일은 문화 수준이 아주 높은 활동이다. 앙코르 왕국 수도에서 이런 마지막 사례는 소승 불교가 힌두교를 대체하던 시기에 나타났다.
이런 종교적인 변화가 힌두교 기반의 권력 구조를 무너뜨렸다. 국가 중심의 석조 사원과 왕족 중심의 문화가 공동체 기반의 불교 목조탑으로 변했다. 동시에 중국과의 해상 무역이 크게 늘었다. 수도를 남쪽(현재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 부근)으로 옮김으로써 지도자들은 그런 경제적 기회를 활용할 수 있었다.
고기후 연구에 따르면 당시 이 지역 전체에서 환경적인 변화도 일어났다. 수십 년에 이르는 가뭄과 갑작스러운 홍수가 반복되면서 앙코르 왕국의 물 관리 체계가 무너졌다. 성벽에 둘러싸인 수도 앙코르 톰 주변의 해자를 조사한 한 연구는 엘리트 층이 14세기가 되면서 그곳을 떠나기 시작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아유타야 왕국의 침입과 약탈이 있기 거의 100년 전인 시점이다. 고고학자들은 앙코르 와트 사원을 둘러싼 둔덕을 발굴함으로써 언제 그곳에 주민이 정착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 사진:ALISON CARTER동료들과 나는 2010년 앙코르 고고학 공원을 감독하는 캄보디아 앙코르유적관리청(APSARA)과 공동으로 앙코르 와트 사원과 해자 사이의 구역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사원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해자 안쪽에서 사원을 둘러싼 정착촌 둔덕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과거 사람들은 주로 이런 둔덕 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 레이저 빔을 사용한 측량 결과 앙코르 와트와 인근 타프롬 등지의 여러 사원이 격자 형태로 구성된 둔덕으로 둘러싸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료들과 나는 3차례에 걸쳐 이 둔덕을 발굴하면서 도자기 더미와 아궁이, 불에 탄 음식 잔해, 기둥을 세우는 구멍, 그리고 가옥의 바닥이나 도로의 일부였을 수 있는 평평하게 누운 돌들을 발견했다.
그곳 정착민의 직업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될 만한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아 어떤 사람들이 그곳에 살았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사원 벽에 새겨진 명문은 사원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일에 수천 명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둔덕에 살았던 주민 중 다수가 앙코르 와트 사원 내부의 활동 중 특정 분야를 맡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종교의식 전문가, 사원 무용수, 음악가, 일꾼 등이 그 예다.
우리는 불에 탄 유기물 잔해도 발견했다. 주로 아궁이와 관련된 목탄 조각이었다. 우리는 방사성탄소를 사용해 목탄 조각 16개의 연대를 측정했다. 그 연대를 사용해 주민이 사원을 둘러싼 공간에 언제 정착했는지 좀 더 자세한 연대기를 만들 수 있었다. 앙코르 와트에 사람들이 거주한 시기를 좀 더 상세하게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앙코르 와트는 ‘힌두 신화에 나오는 영생불사약 ‘암리타’가 만들어지는 우유의 바다를 상징하는 거대한 해자에 둘러싸여 있다. / 사진:WIKIMEDIA COMMONS그 결과에 따르면 앙코르 와트를 둘러싼 주변 지역은 11세기에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됐다. 12세기 초 사원을 건설하기 전을 의미한다. 그 다음 둔덕과 격자 형태를 포함해 해자 안쪽에서 앙코르 와트 사원을 둘러싼 구역이 건설됐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그 둔덕에 거주했다.
하지만 우리의 방사성탄소 측정 연대에 따르면 그 다음 일정 기간 공백이 생겼다. 실제 연도와 일치시키기는 어렵지만 대략 12세기 말이나 13세기 초부터 14세기 말 이나 15세기 초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공백 기간은 앙코르 왕국 전체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와 일치한다. 우리의 발굴 결과를 바탕으로 판단하자면 둔덕 정착지도 이 시기에 버려졌든지 아니면 용도가 바뀌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시기에도 앙코르와트 사원은 결코 버려지지 않았다. 사원 주변의 넓은 지역은 14세기 말이나 15세기 초에 다시 정착지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아유타야 왕국이 침입해 그곳을 약탈한 뒤 폐허로 버려뒀다고 알려진 바로 그 시기다. 그 정착지는 17~18세기까지 사용됐다는 증거가 있다.
앙코르 왕국의 가장 중요한 유적지인 앙코르 와트 사원은 이 문명의 광범위한 변화를 시사하는 일종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그 사원은 앙코르 왕국의 사회가 재편되는 시기에 큰 변화를 겪었다는 확실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앙코르 와트가 완전히 버려진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외국 탐험가들이 정글 속에서 ‘잃어버린 고대 도시’를 발견했다는 진부하고 상투적인 이야기가 그런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 강조하고 싶다. 그곳이 인구 측면에서 큰 변화를 겪은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주민이 그곳의 주요 부분을 버리고 떠난 적은 없다. 역사적인 연대기에서 그곳이 약탈된 뒤 버려졌다는 바로 그 시기에 사람들은 앙코르 와트와 주변 지역에 다시 정착했다.
앙코르 문명의 쇠퇴를 ‘몰락’으로 부르는 것은 부적절한 묘사다. 현재 진행 중인 고고학적 연구는 앙코르 주민이 재편성을 통해 다양한 격동적인 변화에 적응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앨리슨 카이러 카터
※ [필자는 미국 오리건대학 인류학 부교수다. 이 글은 온라인 매체 컨버세이션에 먼저 실렸다. 이 글에 담긴 내용은 필자 개인의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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