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주년 맞은 제2차 세계대전의 교훈은] 동맹·외교문서의 가치는 힘으로만 뒷받침
[80주년 맞은 제2차 세계대전의 교훈은] 동맹·외교문서의 가치는 힘으로만 뒷받침
폴란드, 영국·프랑스 믿다가 독일에 유린당해 … 독소 불가침 조약도 휴지조각 9월 1일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8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나치 독일은 1939년 이날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전쟁을 일으켰다. 1914~1918년 벌어졌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불과 20년 남짓 지난 후 인류는 또 다시 세계대전의 참화를 재연했다.
연합군 4396만 명과 동맹군 2525만 명 등 모두 6921만의 병력이 격돌한 1차대전은 1657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살육극이었다. 군인 사망자 972만 명, 민간인 직접 사망자 95만 명, 간접사망자(아사·전염병 등) 590만 명 등이 희생됐다. 부상자는 별도다.
이런 희생의 교훈에도 인류는 전쟁을 막을 지혜를 얻지 못했다. 2차대전은 73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2400만 명의 군인과 4900만 명의 민간인이 숨졌다. 1937년 7월 7일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면서 시작된 중일전쟁을 포함한 숫자다. 인류 사상 최악의 참상이다.
유럽에서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본격적으로 2차대전의 막이 올랐다. 폴란드 침공은 나치 독일과 소련이 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지 불과 1주일 뒤에 발발했다. 협상을 맡았던 소련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1890~1986년) 외무장관과 독일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1893~1946년) 외무장관의 이름을 따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으로도 부른다. 이념적으로 철천지 원수 같은 것으로 보였던 공산국가 소련과 군국주의 국가 독일이 10년간 서로 적대행위를 하지 않고 모든 분쟁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기로 약속한 조약이다. 그 배경은 두 나라가 불가침 조약과 함께 맺은 비밀의정서에 있었다. 양국의 세력 범위를 확정한 비밀의정서에는 독일과 소련이 약소국들을 서로 나눠서 차지하는 내용을 담았다. 폴란드와 발트지역을 양국이 서로 나눠 차지하고, 소련이 루마니아 동북부 베사라비아 지역을 차지하는 것에 대해 독일이 정치적으로 완전한 무관심을 선언한다는 내용이다. 소련은 비밀의정서를 오랫동안 비밀에 붙여졌다가 스탈린 사망 후 격하운동이 벌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이를 공개하고 ‘스탈린의 모험주의적인 외교노선’이라고 비판했다. 이 조약을 맺은 1주일 뒤인 9월 1일 오전 4시 44분 독일은 폴란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9월 17일 폴란드 침공에 나섰다.
주목할 점은 폴란드와 동맹을 맺었던 서방 강대국이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음에도 개전을 머뭇거렸다는 사실이다. 폴란드는 1939년 5월 29일 프랑스와 군사협정을 체결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 프랑스는 독일의 배후에서 독일 방어선인 지그프리트 라인을 공격한다는 내용이다.
그해 4월부터 폴란드의 독일계 주민 거주 지역에서 소요사태가 계속되고 나치 독일이 폴란드에 ‘단치히 회랑(독일인과 폴란드인이 자치로 운영하는 단치히 자유시에서 독일 본토로 이어지는 폴란드 영토)’을 요구하는 등 노골적으로 영토와 침략 야욕을 보이면서다. 하지만 사실상 동맹협정인 이 군사협정은 양국이 정치협정을 체결해야 발효하도록 돼 있었는데 프랑스는 머뭇거리다 폴란드 침공 나흘째인 9월 4일에야 비로소 이를 체결했다.
폴란드는 영국과도 동맹 관계였다. 나치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 조약을 맺은 다음날인 8월 24일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는 폴란드 방위 약속을 지키겠다고 발표했다. 25일에는 폴란드와 또 다른 동맹조약을 맺고 두 나라 중 한 나라가 침략을 받거나 독립이 위협받는 경우 다른 나라는 자동 개입하기로 했다. 오늘날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나 한미 동맹과 다름없는 형태다.
이런 상황에서 나치 독일은 9월 1일 오전 4시 44분에 폴란드 침공에 나섰다. 영국의 체임벌린 총리는 3일 오전 11시 나치 독일에 즉각 철군을 요구하는 최후통첩 연설을 했으며 독일이 이를 거부하자 선전포고를 했다. 프랑스도 함께 나치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
문제는 선전포고 뒤의 일이다. 폴란드의 두 동맹국은 선전 포고만 했을 뿐 폴란드가 나치 독일에 유린당해도, 9월 17일 소련까지 폴란드를 침공해도 아무런 군사적 조치에 나서지 않았다. 나치 독일은 병력 150만 명과 9000문의 야포, 2750대의 전차, 2300대의 항공기를 동원해 폴란드를 공격했다. 독일군은 보병과 포병, 그리고 기갑부대가 지상에서 벌이는 보전포 합동작전에 공군력을 더해 가공할 속도로 진격했다. 전격전의 시작이다.
이런 나치 독일의 침략에 맞서 폴란드는 95만 명의 병력과 4300문의 대포, 2480대의 전차, 600대의 항공기로 맞섰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소련군까지 46만 명의 병력으로 쳐들어와 폴란드 동부 지역을 합병했다. 당시 소련이 점령한 영토는 2차대전 이후 소련의 영토로 굳어졌다. 소련은 그 대신 독일의 동부 영토를 떼어 폴란드에 넘겼고 그 국경선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나치 독일과 소련의 운명은 결국 승전국과 패전국의 차이일 뿐이다. 도덕이나 명분에서 그 어떤 차이도 발견하기 어렵다. 국제사회는 결국 힘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나치 독일의 괴뢰 국가인 슬로바키아도 5만여 명의 병력을 보탰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19년 독립했지만, 1938년 9월 30일 뮌헨협정으로 독일계 거주지역인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빼앗겼다.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와 손잡고 영국과 프랑스를 압박해 뮌헨협정을 맺었다. 영국의 체임벌린 총리는 ‘우리 시대의 평화’를 외치며 히틀러의 요구를 들어줬다. 그 결과 얻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침략과 살육전이었다. 나치 독일은 1939년 3월 15일 남은 체코 지역을 합병하고 슬로바키아는 명목적인 독립국가로 만들었다. 사실상 괴뢰 국가다. 가톨릭 사제인 친나치 인사 요제프 티소가 1939~1945년 대통령을 맡았는데 전쟁이 끝난 뒤 1947년 4월 18일 나치에 협력한 반역죄와 국민봉기를 진압한 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나치 독일은 이렇게 체코슬로바키아를 유린한 다음 결국 그해 9월 1일 폴란드 침공으로 2차대전의 불길을 당겼다. 영국과 프랑스가 어떻게든 전쟁을 피하고자 침략자들에게 유화정책을 편 결과가 전쟁으로 돌아온 셈이다. 처칠은 1938년 [잉글랜드가 자는 동안(While England Slept)]이라는 책을 펴내 독일의 침략 야욕을 경고했다. 결국 유화정책으로 침략자에게 틈을 보이면서 야욕을 키우고 시간을 벌어준 게 2차대전을 막지 못한 이유라는 지적이다.
1940년 미국 하버드대 학생이던 존 F 케네디는 영국이 초기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해 나치 독일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내용의 [왜 영국은 잤던가(Why England Slept)]라는 책을 펴내 8만부를 팔았다. 케네디는 여기서 얻은 인세 4만 달러를 나치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영국의 플리머스에 기부했다. 케네디는 군국주의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지 미 해군에 입대했다, 그는 PT109 어뢰정 정장을 지내다 1943년 8월 솔로몬 군도 인근에서 일본 구축함과 충돌해 어뢰정은 침몰했지만 그는 부유물을 잡고 며칠을 표류하다 구출됐다. 1960년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바로 그 인물이다. 폴란드가 나치 독일의 군대에 유린당하는 동안 영국과 프랑스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양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폴란드 침공 이후 7개월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나치 독일은 폴란드를 공격하느라 병력의 대부분을 동부 전선에 보냈다. 서부의 프랑스와 국경지대에 있는 지그프리트선에는 소수의 병력만 남겼다. 그 건너편 프랑스 땅에는 거대하고 견고한 마지노선이 구축돼 있었다. 프랑스군과 영국군 대병력이 마지노선에 배치됐지만 지상 전투는 전무했다. 영국 공군기가 독일 상공으로 날아가 폭탄 대신 삐라를 뿌리고 돌아왔을 뿐 전선은 조용하기만 했다. 라인강 근처에서 프랑스 초병이 총을 어깨에 매고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 목격됐다. 일부 프랑스군이 독일 영토인 자를란트를 일시 점령했다가 상부의 명령을 받고 급히 후퇴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상층부’는 전쟁을 하지 않고 전쟁에 휘말리지 않고 전쟁을 막을 방법을 찾으려고 시도했다. 그 결과는 이런 황당한 상황이었다.
역사는 이를 ‘가짜전쟁(Phoney War)’으로 부른다. 윈스턴 처칠은 이를 ‘여명 전쟁(Twilight War)’으로, 프랑스는 기묘한 전쟁(Drôle de guerre)으로 불렀다. 영국 언론은 ‘전격전(Blitzkrieg)’이라는 독일어 단어를 살짝 비틀어 ‘앉아서 하는 전쟁(Sitzkrieg)’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서쪽의 나치 독일과 동쪽의 소련을 동시에 상대하던 폴란드는 불과 1개월 남짓 버틴 후 무너졌다. 남은 병력은 중립국이던 루마니아를 거쳐 영국 등 서방으로 옮겨가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쟁을 계속했다. 나치 독일군과 소련군은 10월 6일 폴란드 전역을 점령하고 땅을 나눠 가졌다. 양국의 무력 점령 기간 중 폴란드는 1350만 명이 목숨을 잃는 혹독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영국과 프랑스라는 강대국 동맹을 믿었던 폴란드는 결국 쓰디쓴 배신을 당했다. 역사는 이를 ‘서구의 배신’으로 부른다. 영국과 프랑스의 배신으로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았던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는 2차대전 뒤에는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는 경험을 했다. 역사를 통해 살펴보는 동맹의 의미다. 당시 프랑스에선 좌파 평화주의자를 중심으로 ‘왜 단치히를 위해 죽어야 하나?(Pourquoi mourir pour Danzig?)’라는 정치 구호와 표어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약소국 국민이야 죽건 말건 내 알 바가 아니라는 강대국 국민의 자국 중심주의적 생각은 좌와 우가 다를 바 없었다. 자국중심주의는 21세기에도 다시 활개치고 있다.
소련은 영토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939년 11월 30일 핀란드를 침공해 ‘겨울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약소국을 얕잡아봤던 소련군은 핀란드 땅에서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나치 독일은 1940년 4월 9일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한데 이어 1940년 5월 7일 프랑스를 전면 침공했다. 5월 10일에는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를 공격했다. 프랑스는 독일과의 국경 지대에 튼튼하기 이를 데 없는 마지노선을 구축해놓았다. 콘크리트로 만든 요새와 참호 안에 거대한 병력이 주둔하고 야포와 기관총, 그리고 지뢰로 적의 진격을 막으려고 했다. 지리한 참호전으로 이어진 1차대전의 교훈을 그대로 따랐다. 마지노선을 넘을 수 있는 군대는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독일은 프랑스와의 국경 북부에 위치한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침공하며 마지노선을 우회했다. 그것도 전차를 비롯한 기동부대를 앞세워 놀라울 속도로 진격했다. 보병과 포병, 그리고 전차가 결합한 나치 독일군의 보전포 합동작전은 프랑스를 압도했다. 독일의 전격전이었다. 파리는 순식간에 나치 독일에 점령됐으며 그 사이에 낀 군대와 주민은 길을 잃고 우왕좌왕 헤매다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소련도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다. 독일-소련 전쟁, 독소전의 시작이다.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불리는 독일군의 침략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 스탈린은 나치 독일의 침략 의도를 믿지 않았다. 수많은 징후가 나타났고 정보가 올라와도 스탈린은 듣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믿는 것만 믿었다. 그 결과는 국민의 희생이었다. 소련은 2차대전 중 군인 1060만 명, 민간인 직접 사망자 1000만 명, 간접사망자(기아·질병 등) 600만 명 등 전체 인구 1억9400만 명의 13.7%인 2660만 명이 희생됐다. 나치의 잔혹성과 스탈린의 아집이 결합한 결과일 것이다.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독소 불가침 조약은 그야말로 휴지조각이 됐다. 2차대전은 외교 문서가 강력한 군사력, 대비 태세, 국력, 생산력, 정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80년 전에 벌어진 2차대전의 교훈이다. 오늘날 우리는 여기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연합군 4396만 명과 동맹군 2525만 명 등 모두 6921만의 병력이 격돌한 1차대전은 1657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살육극이었다. 군인 사망자 972만 명, 민간인 직접 사망자 95만 명, 간접사망자(아사·전염병 등) 590만 명 등이 희생됐다. 부상자는 별도다.
이런 희생의 교훈에도 인류는 전쟁을 막을 지혜를 얻지 못했다. 2차대전은 73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2400만 명의 군인과 4900만 명의 민간인이 숨졌다. 1937년 7월 7일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면서 시작된 중일전쟁을 포함한 숫자다. 인류 사상 최악의 참상이다.
유럽에서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본격적으로 2차대전의 막이 올랐다. 폴란드 침공은 나치 독일과 소련이 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지 불과 1주일 뒤에 발발했다. 협상을 맡았던 소련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1890~1986년) 외무장관과 독일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1893~1946년) 외무장관의 이름을 따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으로도 부른다. 이념적으로 철천지 원수 같은 것으로 보였던 공산국가 소련과 군국주의 국가 독일이 10년간 서로 적대행위를 하지 않고 모든 분쟁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기로 약속한 조약이다.
나치와 소련, 이념 달라도 영토 야욕으로 손잡아
주목할 점은 폴란드와 동맹을 맺었던 서방 강대국이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음에도 개전을 머뭇거렸다는 사실이다. 폴란드는 1939년 5월 29일 프랑스와 군사협정을 체결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 프랑스는 독일의 배후에서 독일 방어선인 지그프리트 라인을 공격한다는 내용이다.
그해 4월부터 폴란드의 독일계 주민 거주 지역에서 소요사태가 계속되고 나치 독일이 폴란드에 ‘단치히 회랑(독일인과 폴란드인이 자치로 운영하는 단치히 자유시에서 독일 본토로 이어지는 폴란드 영토)’을 요구하는 등 노골적으로 영토와 침략 야욕을 보이면서다. 하지만 사실상 동맹협정인 이 군사협정은 양국이 정치협정을 체결해야 발효하도록 돼 있었는데 프랑스는 머뭇거리다 폴란드 침공 나흘째인 9월 4일에야 비로소 이를 체결했다.
폴란드는 영국과도 동맹 관계였다. 나치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 조약을 맺은 다음날인 8월 24일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는 폴란드 방위 약속을 지키겠다고 발표했다. 25일에는 폴란드와 또 다른 동맹조약을 맺고 두 나라 중 한 나라가 침략을 받거나 독립이 위협받는 경우 다른 나라는 자동 개입하기로 했다. 오늘날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나 한미 동맹과 다름없는 형태다.
이런 상황에서 나치 독일은 9월 1일 오전 4시 44분에 폴란드 침공에 나섰다. 영국의 체임벌린 총리는 3일 오전 11시 나치 독일에 즉각 철군을 요구하는 최후통첩 연설을 했으며 독일이 이를 거부하자 선전포고를 했다. 프랑스도 함께 나치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
문제는 선전포고 뒤의 일이다. 폴란드의 두 동맹국은 선전 포고만 했을 뿐 폴란드가 나치 독일에 유린당해도, 9월 17일 소련까지 폴란드를 침공해도 아무런 군사적 조치에 나서지 않았다. 나치 독일은 병력 150만 명과 9000문의 야포, 2750대의 전차, 2300대의 항공기를 동원해 폴란드를 공격했다. 독일군은 보병과 포병, 그리고 기갑부대가 지상에서 벌이는 보전포 합동작전에 공군력을 더해 가공할 속도로 진격했다. 전격전의 시작이다.
이런 나치 독일의 침략에 맞서 폴란드는 95만 명의 병력과 4300문의 대포, 2480대의 전차, 600대의 항공기로 맞섰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소련군까지 46만 명의 병력으로 쳐들어와 폴란드 동부 지역을 합병했다. 당시 소련이 점령한 영토는 2차대전 이후 소련의 영토로 굳어졌다. 소련은 그 대신 독일의 동부 영토를 떼어 폴란드에 넘겼고 그 국경선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나치 독일과 소련의 운명은 결국 승전국과 패전국의 차이일 뿐이다. 도덕이나 명분에서 그 어떤 차이도 발견하기 어렵다. 국제사회는 결국 힘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나치 독일의 괴뢰 국가인 슬로바키아도 5만여 명의 병력을 보탰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19년 독립했지만, 1938년 9월 30일 뮌헨협정으로 독일계 거주지역인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빼앗겼다.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와 손잡고 영국과 프랑스를 압박해 뮌헨협정을 맺었다. 영국의 체임벌린 총리는 ‘우리 시대의 평화’를 외치며 히틀러의 요구를 들어줬다. 그 결과 얻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침략과 살육전이었다. 나치 독일은 1939년 3월 15일 남은 체코 지역을 합병하고 슬로바키아는 명목적인 독립국가로 만들었다. 사실상 괴뢰 국가다. 가톨릭 사제인 친나치 인사 요제프 티소가 1939~1945년 대통령을 맡았는데 전쟁이 끝난 뒤 1947년 4월 18일 나치에 협력한 반역죄와 국민봉기를 진압한 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영국, 유화정책으로 히틀러와 뮌헨협정
1940년 미국 하버드대 학생이던 존 F 케네디는 영국이 초기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해 나치 독일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내용의 [왜 영국은 잤던가(Why England Slept)]라는 책을 펴내 8만부를 팔았다. 케네디는 여기서 얻은 인세 4만 달러를 나치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영국의 플리머스에 기부했다. 케네디는 군국주의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지 미 해군에 입대했다, 그는 PT109 어뢰정 정장을 지내다 1943년 8월 솔로몬 군도 인근에서 일본 구축함과 충돌해 어뢰정은 침몰했지만 그는 부유물을 잡고 며칠을 표류하다 구출됐다. 1960년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바로 그 인물이다.
동맹국 침략 받아도 보기만 한 영불의 ‘가짜 전쟁’
역사는 이를 ‘가짜전쟁(Phoney War)’으로 부른다. 윈스턴 처칠은 이를 ‘여명 전쟁(Twilight War)’으로, 프랑스는 기묘한 전쟁(Drôle de guerre)으로 불렀다. 영국 언론은 ‘전격전(Blitzkrieg)’이라는 독일어 단어를 살짝 비틀어 ‘앉아서 하는 전쟁(Sitzkrieg)’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서쪽의 나치 독일과 동쪽의 소련을 동시에 상대하던 폴란드는 불과 1개월 남짓 버틴 후 무너졌다. 남은 병력은 중립국이던 루마니아를 거쳐 영국 등 서방으로 옮겨가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쟁을 계속했다. 나치 독일군과 소련군은 10월 6일 폴란드 전역을 점령하고 땅을 나눠 가졌다. 양국의 무력 점령 기간 중 폴란드는 1350만 명이 목숨을 잃는 혹독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공산국가 소련의 영토 야심
소련은 영토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939년 11월 30일 핀란드를 침공해 ‘겨울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약소국을 얕잡아봤던 소련군은 핀란드 땅에서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나치 독일은 1940년 4월 9일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한데 이어 1940년 5월 7일 프랑스를 전면 침공했다. 5월 10일에는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를 공격했다. 프랑스는 독일과의 국경 지대에 튼튼하기 이를 데 없는 마지노선을 구축해놓았다. 콘크리트로 만든 요새와 참호 안에 거대한 병력이 주둔하고 야포와 기관총, 그리고 지뢰로 적의 진격을 막으려고 했다. 지리한 참호전으로 이어진 1차대전의 교훈을 그대로 따랐다. 마지노선을 넘을 수 있는 군대는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독일은 프랑스와의 국경 북부에 위치한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침공하며 마지노선을 우회했다. 그것도 전차를 비롯한 기동부대를 앞세워 놀라울 속도로 진격했다. 보병과 포병, 그리고 전차가 결합한 나치 독일군의 보전포 합동작전은 프랑스를 압도했다. 독일의 전격전이었다. 파리는 순식간에 나치 독일에 점령됐으며 그 사이에 낀 군대와 주민은 길을 잃고 우왕좌왕 헤매다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소련도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다. 독일-소련 전쟁, 독소전의 시작이다.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불리는 독일군의 침략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 스탈린은 나치 독일의 침략 의도를 믿지 않았다. 수많은 징후가 나타났고 정보가 올라와도 스탈린은 듣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믿는 것만 믿었다. 그 결과는 국민의 희생이었다. 소련은 2차대전 중 군인 1060만 명, 민간인 직접 사망자 1000만 명, 간접사망자(기아·질병 등) 600만 명 등 전체 인구 1억9400만 명의 13.7%인 2660만 명이 희생됐다. 나치의 잔혹성과 스탈린의 아집이 결합한 결과일 것이다.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독소 불가침 조약은 그야말로 휴지조각이 됐다. 2차대전은 외교 문서가 강력한 군사력, 대비 태세, 국력, 생산력, 정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80년 전에 벌어진 2차대전의 교훈이다. 오늘날 우리는 여기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iM뱅크, 은행업무 특화 대화형 AI ‘iM GPT’ 개발 완료
2머스크 '원픽' 사격 김예지, "악플에 잠시 총 내려놓는다"
3우리은행, 일본 부동산 투자 원스톱서비스 제공
4KB금융, 싱가포르서 ‘K-스타트업’ 알려
5크리테오, ‘연말 쇼핑 시즌 보고서’ 발표...“건강·뷰티·애완용품 주목”
6국민은행, ‘NEW아파트뱅크’ 자금 관리 서비스 고도화
7"홍보대사는 명예직 아니야?"...서울시, '뉴진스'에 2.4억원 보수 지급
8"신뢰 잃었고 바뀌지 않을 것"...'해버지' 박지성, 축구협회 작심 비판
9다시 찾아온 트럼프 시대, 미국투자이민 향방은? 국민이주㈜ 미 대선 이후 첫 미국영주권 세미나 개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