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태의 호적수(2) 고구려 영류왕의 적수] 적수를 잘못 골라 비극적 죽음을 맞다
[김준태의 호적수(2) 고구려 영류왕의 적수] 적수를 잘못 골라 비극적 죽음을 맞다
당과 화친 앞세워 굴욕외교… ‘고구려 자긍심’ 내건 연개소문과 대립 642년 10월,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은 피로 물들었다. 고구려를 구성하는 5부 중 동부(東部)의 수장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천리장성 축조 감독에 임명된 연개소문은 마치 임지로 출발하는 듯 열병식을 열었고, 그 자리에 참석한 백여 명의 신하를 무참히 살해했다. 그리고는 궁궐로 달려가 임금 영류왕까지 시해했는데, 왕의 시신을 여러 토막으로 잘라내 도랑에 버렸다고 한다.
이 사건을 영류왕의 대당(對唐) 유화책이 빚어낸 참극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영류왕이 당나라에 지나치게 저자세를 취했고, 고구려의 자긍심이 훼손되는 일까지 방기하자 이에 반발한 연개소문이 정권을 전복했다는 것이다. 연개소문이 신하로서 왕을 시해하는 대역(大逆)을 저질렀음에도 그를 ‘영웅적 독재자’로 평가하고, 영류왕을 ‘유약한 사대주의자’로 기억하는 것도 이러한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지만 영류왕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우선 영류왕은 나약한 인물이 아니다. 618년, 이복형 영양왕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영류왕은 을지문덕과 더불어 고구려-수 전쟁의 원훈(元勳)이었다. 수군 총사령관으로서 대동강 어귀에 상륙한 수나라 수군을 격파하였고, 덕분에 을지문덕은 안심하고 수나라 육군과 일전을 벌일 수 있었다. 고구려에 이미 장자계승이 정착되었고, 영양왕의 아들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영류왕이 왕위를 승계한 데에는 이와 같은 눈부신 무공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영류왕이 즉위할 즈음, 국제정세가 급변했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빠른 속도로 그 자리를 채워간 것이다. 초강대국이 교체된 상황. 중원을 도모할 역량이 없는 이상, 고구려로서는 이 신생 제국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 현명했다. 경제적, 문화적 이득도 고려했을 것이다. 더구나 남쪽에서 백제와 신라가 호시탐탐 고구려의 영토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힘을 집중하기 위해서는 북쪽 국경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영류왕은 619년, 621년, 622년, 잇달아 사신을 파견하며 당과의 외교 관계 수립에 나섰다.
당나라의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619년 윤2월 당 고조는 수나라가 벌인 고구려 원정의 폐단을 거론하며 주변국의 독자성을 인정하겠다는 교서를 발표했다. 이어 622년, 당나라는 포로 교환을 제의하였는데 다만 고구려가 “대대로 중국의 역법(曆法)을 받들고, 멀리 있으면서도 조공의 직분을 거르지 않았으니 매우 가상하다”라고 전제한다. 형식적으로 조공-책봉관계를 맺으면 독자세력권을 존중해 주겠다는 의미였다. 영류왕은 이와 같은 당나라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624년 1월, 당은 영류왕을 ‘상주국요동군공고려왕(上柱國遼東郡公高麗王)으로 책봉했다.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된 것이다.
당나라가 고구려에 온건한 태도를 보인 것은 다분히 전략적인 선택이다. 수나라 양제가 벌인 무리한 고구려 원정에 대해 민심이 좋지 못했던 데다가 돌궐, 토욕혼, 고창국 등 여러 이민족 국가와 맞서고 있던 당나라로서는 나라의 기틀이 잡힐 때까지 동북방의 강자 고구려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 말인즉 당나라의 대내외 환경이 안정되기만 하면 언제고 당의 창끝이 고구려를 향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당 태종이 국력을 강화하고 돌궐, 고창국 등을 제압하고 나자 당은 고구려를 굴복시키겠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한데 영류왕은 유화 노선을 포기하지 않는다. 당에서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한 일을 문책하자 사과하였고, 629년에는 ‘봉역도(封域圖)’를 바쳤다. 나라의 영토가 그려진 봉역도를 헌상한다는 것은 신하가 되겠다는 의미다(고구려의 영역을 강조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하는 연구도 있다). 당이 고구려가 세운 전승기념물인 경관(京觀)을 일방적으로 파괴했을 때에도 항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640년 태자 환권을 당에 입조시켰고, 641년 당의 사신 진대덕이 고구려의 각지를 정탐하고 다녔을 때에도 방치하다시피 했다.
어떻게든 화친을 유지함으로써 당에게 고구려 침공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이처럼 영류왕이 당에게 저자세를 취하자 고구려 내부에서는 불만이 폭증했다. 특히 고구려인의 자긍심이었던 경관이 파괴되면서 민심이 격앙됐다. 야심차게 나선 신라 공략이라도 성공했으면 좋으련만. 신라에게 낭비성을 빼앗기고 칠중성 공략에 실패함으로써 남쪽 국경에서도 위기가 초래됐다.
영류왕은 조바심이 났을 것이다. 더욱이 당시 고구려 조정에는 영류왕을 위협하는 거대한 존재가 있었다. 4대에 걸쳐 막리지를 역임한 가문이자 동부를 대표하는 귀족,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연씨가의 가주 연개소문이다. 연개소문은 당나라가 반드시 쳐들어올 것이라며 유화책을 버리고 당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영류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지어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적으로 돌리고 연개소문을 제거하는 일에만 신경을 썼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영류왕과 집권 귀족세력이 먼저 연개소문을 제거하고자 모의했다고 한다. 이에 연개소문이 역공에 나섰다는 것이다. 연개소문에게 비판적인 김부식의 기록이니, 아마 사실일 것이다. 대당 강경파의 핵심인물인 연개소문을 없앤다면 당과의 우호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인데, 순진한 발상이다. 전쟁 여부는 연개소문의 대당노선이 아니라 당 태종의 전쟁 의지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당과의 관계와 상관없이 연개소문을 숙청하려 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국가적인 위기상황에서 내부역량을 모으기는커녕 정적 제거에 우선순위를 두었다는 뜻이니 말이다. 물론 연개소문이 왕권 강화에 방해물이었고, 외교정책의 최대 비판자였으니 영류왕의 심정이 이해는 간다. 하지만 영류왕이 온 힘을 기울이며 맞서야 할 적수는 당 태종이지 연개소문이 아니었다. 역사에서 가정은 의미 없는 행위라지만, 만약 영류왕이 연개소문이 아닌 당 태종과 승부를 벌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했으되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된 이상, 국가의 역량을 결집하여 당당하게 당과 일전을 준비했다면. 강경파를 포용하여 합의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면. 연개소문이라는 정적을 그저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을 긴장시키고 자신을 성장시켜 줄 계기라고 생각했다면. 영류왕은 보다 나은 선택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
연개소문에게 고구려의 자긍심이라는 명분을 넘겨주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키지도 못했을 것이다. 영류왕의 군사적 재능을 감안했을 때, 당과의 대결에서 연개소문 못지않은 성과를 거두었을 수 있다. 영류왕의 비극적 죽음은 적수를 잘못 설정한 탓이 크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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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을 영류왕의 대당(對唐) 유화책이 빚어낸 참극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영류왕이 당나라에 지나치게 저자세를 취했고, 고구려의 자긍심이 훼손되는 일까지 방기하자 이에 반발한 연개소문이 정권을 전복했다는 것이다. 연개소문이 신하로서 왕을 시해하는 대역(大逆)을 저질렀음에도 그를 ‘영웅적 독재자’로 평가하고, 영류왕을 ‘유약한 사대주의자’로 기억하는 것도 이러한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지만 영류왕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우선 영류왕은 나약한 인물이 아니다. 618년, 이복형 영양왕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영류왕은 을지문덕과 더불어 고구려-수 전쟁의 원훈(元勳)이었다. 수군 총사령관으로서 대동강 어귀에 상륙한 수나라 수군을 격파하였고, 덕분에 을지문덕은 안심하고 수나라 육군과 일전을 벌일 수 있었다. 고구려에 이미 장자계승이 정착되었고, 영양왕의 아들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영류왕이 왕위를 승계한 데에는 이와 같은 눈부신 무공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중원의 주인이 바뀐 상황에서 유화책 선택
당나라의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619년 윤2월 당 고조는 수나라가 벌인 고구려 원정의 폐단을 거론하며 주변국의 독자성을 인정하겠다는 교서를 발표했다. 이어 622년, 당나라는 포로 교환을 제의하였는데 다만 고구려가 “대대로 중국의 역법(曆法)을 받들고, 멀리 있으면서도 조공의 직분을 거르지 않았으니 매우 가상하다”라고 전제한다. 형식적으로 조공-책봉관계를 맺으면 독자세력권을 존중해 주겠다는 의미였다. 영류왕은 이와 같은 당나라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624년 1월, 당은 영류왕을 ‘상주국요동군공고려왕(上柱國遼東郡公高麗王)으로 책봉했다.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된 것이다.
당나라가 고구려에 온건한 태도를 보인 것은 다분히 전략적인 선택이다. 수나라 양제가 벌인 무리한 고구려 원정에 대해 민심이 좋지 못했던 데다가 돌궐, 토욕혼, 고창국 등 여러 이민족 국가와 맞서고 있던 당나라로서는 나라의 기틀이 잡힐 때까지 동북방의 강자 고구려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 말인즉 당나라의 대내외 환경이 안정되기만 하면 언제고 당의 창끝이 고구려를 향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당 태종이 국력을 강화하고 돌궐, 고창국 등을 제압하고 나자 당은 고구려를 굴복시키겠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한데 영류왕은 유화 노선을 포기하지 않는다. 당에서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한 일을 문책하자 사과하였고, 629년에는 ‘봉역도(封域圖)’를 바쳤다. 나라의 영토가 그려진 봉역도를 헌상한다는 것은 신하가 되겠다는 의미다(고구려의 영역을 강조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하는 연구도 있다). 당이 고구려가 세운 전승기념물인 경관(京觀)을 일방적으로 파괴했을 때에도 항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640년 태자 환권을 당에 입조시켰고, 641년 당의 사신 진대덕이 고구려의 각지를 정탐하고 다녔을 때에도 방치하다시피 했다.
어떻게든 화친을 유지함으로써 당에게 고구려 침공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이처럼 영류왕이 당에게 저자세를 취하자 고구려 내부에서는 불만이 폭증했다. 특히 고구려인의 자긍심이었던 경관이 파괴되면서 민심이 격앙됐다. 야심차게 나선 신라 공략이라도 성공했으면 좋으련만. 신라에게 낭비성을 빼앗기고 칠중성 공략에 실패함으로써 남쪽 국경에서도 위기가 초래됐다.
영류왕은 조바심이 났을 것이다. 더욱이 당시 고구려 조정에는 영류왕을 위협하는 거대한 존재가 있었다. 4대에 걸쳐 막리지를 역임한 가문이자 동부를 대표하는 귀족,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연씨가의 가주 연개소문이다. 연개소문은 당나라가 반드시 쳐들어올 것이라며 유화책을 버리고 당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영류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지어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적으로 돌리고 연개소문을 제거하는 일에만 신경을 썼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영류왕과 집권 귀족세력이 먼저 연개소문을 제거하고자 모의했다고 한다. 이에 연개소문이 역공에 나섰다는 것이다. 연개소문에게 비판적인 김부식의 기록이니, 아마 사실일 것이다. 대당 강경파의 핵심인물인 연개소문을 없앤다면 당과의 우호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인데, 순진한 발상이다. 전쟁 여부는 연개소문의 대당노선이 아니라 당 태종의 전쟁 의지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당과의 관계와 상관없이 연개소문을 숙청하려 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국가적인 위기상황에서 내부역량을 모으기는커녕 정적 제거에 우선순위를 두었다는 뜻이니 말이다. 물론 연개소문이 왕권 강화에 방해물이었고, 외교정책의 최대 비판자였으니 영류왕의 심정이 이해는 간다. 하지만 영류왕이 온 힘을 기울이며 맞서야 할 적수는 당 태종이지 연개소문이 아니었다.
강경파 포용해 합의점 찾았더라면…
연개소문에게 고구려의 자긍심이라는 명분을 넘겨주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키지도 못했을 것이다. 영류왕의 군사적 재능을 감안했을 때, 당과의 대결에서 연개소문 못지않은 성과를 거두었을 수 있다. 영류왕의 비극적 죽음은 적수를 잘못 설정한 탓이 크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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