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태 호적수(11) 왕건과 견훤] 라이벌이었던 견훤, 왕건의 킹메이커가 된 이유는 ?
[김준태 호적수(11) 왕건과 견훤] 라이벌이었던 견훤, 왕건의 킹메이커가 된 이유는 ?
벼랑 끝까지 내몬 견훤 덕분에 자신을 채찍질하고 강하게 단련시킨 왕건 창업군주로서 평탄하게 그 자리에 오르는 사람은 드물다. 앞선 왕조를 무너뜨리기까지 수많은 시험을 통과해야 하고, 오로지 ‘실력’으로 혼란을 극복해야 한다. 강력한 적도 기다리고 있다. 기득권이든, 전 왕조의 충신이든, 그도 아니면 대권 경쟁자이든 간에 이들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어떤 꿈도 이룰 수가 없다. 유방에게 항우, 조조에게 원소, 이성계에게 최영이 있었듯이 말이다.
이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 877~943)도 마찬가지였다. 왕건의 라이벌 하면 흔히 궁예(弓裔, ?~918)를 떠올린다. 궁예는 왕건을 총애하여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시켜 준 은인이자 동시에 넘어서야 할 장벽이었다. 왕건이 궁예의 의심과 견제를 뚫고 기회를 잡지 못했다면 우리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왕건의 호적수는 견훤(甄萱, 867~936)이다. 왕건이 아직 궁예 휘하의 장수일 때부터 후삼국을 통일할 때까지 그의 성공과 실패는 모두 견훤과 관련 있었다.
경상도 상주에서 태어난 견훤은 ‘자라면서 체격과 용모가 웅대하고 빼어났으며 뜻과 기개가 활달하여 범상치 않았다’라고 한다.(견훤의 모친이 아이를 잠시 숲속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물렸다는 기록도 있다) 견훤을 부정적으로 보는 [삼국사기]의 기술이니, 최소한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당시 신라는 왕의 무능과 간신들의 전횡, 도둑의 창궐과 연이은 기근 등으로 나라가 뿌리 채 흔들렸다. 이를 틈탄 견훤은 진성왕 6년 무진주(武珍州, 광주)에서 무리들을 모아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점점 영역을 넓혀 오늘의 전라 지역을 대부분 점거하고 ‘후백제(後百濟)’를 건국했다. “백제의 600년 기업을 당과 신라가 무너뜨렸으니, 이제 내가 완산(完山, 전주)에 도읍하여 의자왕의 오랜 분노를 갚을 것이다.” 견훤의 즉위 일성이다.
그런데 이때 후백제의 북쪽에는 궁예의 후고구려가 자리하고 있었다. 영토 확장을 꾀하는 두 신흥국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는데, 궁예의 군대를 거느리며 호남을 공략한 인물이 바로 왕건이다. 왕건은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핵심 요충지 나주를 점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를 개국하고 왕위에 오른 뒤에는 왕건이 수세에 몰린다. 궁예를 지지했던 일부 호족과 태수들이 후백제에 항복하면서 내부가 요동쳤고, 견훤과의 무력충돌에서도 연이은 패배를 당했다. 특히, 927년 경상북도 팔공산에서 벌어진 ‘공산 전투’에서는 1만명이 넘는(삼국사기에는 5000명) 고려군이 전사하고 왕건의 최측근이자 개국공신 신숭겸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한다. 왕건은 장수들의 희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져 탈출했다. 전투 직후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서신을 보자.
“그대는 온갖 계략으로 기회를 엿보고 여러 방면으로 침노하였으나, 아직 나의 말머리도 보지 못하였고 쇠털 하나 뽑지 못하였다. 겨울 초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진(星山陣) 아래에서 손이 묶이더니,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좌장(左將) 김락(金樂)이 미리사(美理寺) 앞에서 해골을 드러냈으며, 죽고 잡힌 자가 많았고 쫓겨 사로잡힌 자가 적지 않았다. 나의 강하고 그대의 약함이 이와 같으니 누가 이기고 질지는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평양성 문루에 활을 걸어 두고 패강(대동강)의 물을 말에게 먹이리라.”
한마디로 ‘너는 나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고려를 멸망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왕건은 발끈했겠지만 현실은 여의치 않았다. 견훤에 의해 강주와 부곡성, 나주가 함락되고, 수비군이 전멸하였으며, 여러 장수들이 견훤에게 투항했다. 929년 7월에는 견훤이 의성부를 공격하여 왕건이 아끼던 장군 홍술(洪術)이 전사하기도 한다.
절치부심하던 왕건이 상황을 반전시킨 것은 고려의 역량을 총 집중한 고창 전투에서였다. 왕건은 명장 유금필의 활약과 고창 지역 신라 호족들의 지원에 힘입어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견훤을 격퇴한다. 후백제군 8000여 명이 전사했고, 이 전투로 인해 견훤은 후삼국 통일전쟁의 주도권을 왕건에게 넘겨주고 만다. 그러나 이후에도 후백제의 수군이 경기도와 황해도를 공격하여 고려의 선박 1000여척을 불사르는 등, 견훤은 계속 왕건을 긴장시켰다. 승패가 기울게 된 것은 934년 운주전투에서였다.
그런데 왕건과 견훤의 이 라이벌전은 다소 허탈하게 막을 내린다.(비장한 마지막 일전 같은 것은 없었다) 후백제에서 정변이 일어난 것이다. 평소 넷째 아들 금강을 총애했던 견훤은 그를 후계자로 삼고자 하였는데, 이에 반발한 둘째 아들 양검과 셋째 아들 용검이 맏형 신검을 충동질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연금한다.
권력을 노린 아들이 아버지를 공격한 패륜임에는 분명하지만, 의아한 부분이 있다. 견훤과 같이 카리스마 넘치는 창업군주가 어떻게 그리 쉽게 무력화되었을까? 이찬 능환, 파진찬 신덕 등 후백제의 주요 대신들도 신검의 반란에 동참하였는데, 이는 견훤의 권위가 많이 손상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금강에게 왕위를 넘기려고 했던 시도도 여론의 동의를 받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견훤은 분노했다. 화가 솟구치다 못해 이 분노는 급기야 자신이 세운 나라를 버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자식들에게 복수할 수 있다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견훤은 후백제를 탈출하여 왕건에게 귀부한다. 견훤은 말했다. “노신이 전하께 몸을 의탁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어 반역을 저지른 자식을 주살하고자 함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왕께서 신병(神兵)을 빌려 주시어 나라를 어지럽힌 자들을 섬멸케 해주시옵소서. 그리 된다면 신은 비록 죽어도 유감이 없겠나이다.” 얼마 후, 왕건과 견훤이 함께 후백제로 진군하니 견훤을 따르던 사위 왕규 등이 내응하였고, 신검 일파는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비록 종장(終章)까지 치열하게 마무리되진 못했지만, 견훤은 왕건의 훌륭한 호적수였다. 무릇 외부에 강력한 적이 있어야 더욱 긴장하고 치밀하게 준비하는 법이다. 견훤이 왕건을 벼랑 끝까지 내몬 덕분에 왕건은 자신을 채찍질하고 강하게 단련할 수 있었다. [삼국사기]는 궁예와 더불어 견훤을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준 자”라고 규정한다. 본인이야 의도치 않았겠지만, 왕건에게 시련을 주고 장애물이 되어 줌으로써 왕건을 제왕의 길로 나아가게 한 사람이 바로 견훤이다. 그러니 지금 강한 적과 마주하고 있다면 불행하다고 한탄만 할 일이 아니다. 그 적이 나의 킹메이커가 되어 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 877~943)도 마찬가지였다. 왕건의 라이벌 하면 흔히 궁예(弓裔, ?~918)를 떠올린다. 궁예는 왕건을 총애하여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시켜 준 은인이자 동시에 넘어서야 할 장벽이었다. 왕건이 궁예의 의심과 견제를 뚫고 기회를 잡지 못했다면 우리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왕건의 호적수는 견훤(甄萱, 867~936)이다. 왕건이 아직 궁예 휘하의 장수일 때부터 후삼국을 통일할 때까지 그의 성공과 실패는 모두 견훤과 관련 있었다.
경상도 상주에서 태어난 견훤은 ‘자라면서 체격과 용모가 웅대하고 빼어났으며 뜻과 기개가 활달하여 범상치 않았다’라고 한다.(견훤의 모친이 아이를 잠시 숲속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물렸다는 기록도 있다) 견훤을 부정적으로 보는 [삼국사기]의 기술이니, 최소한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절치부심 왕건, 고창 전투에서 전세 뒤집어
그런데 이때 후백제의 북쪽에는 궁예의 후고구려가 자리하고 있었다. 영토 확장을 꾀하는 두 신흥국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는데, 궁예의 군대를 거느리며 호남을 공략한 인물이 바로 왕건이다. 왕건은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핵심 요충지 나주를 점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를 개국하고 왕위에 오른 뒤에는 왕건이 수세에 몰린다. 궁예를 지지했던 일부 호족과 태수들이 후백제에 항복하면서 내부가 요동쳤고, 견훤과의 무력충돌에서도 연이은 패배를 당했다. 특히, 927년 경상북도 팔공산에서 벌어진 ‘공산 전투’에서는 1만명이 넘는(삼국사기에는 5000명) 고려군이 전사하고 왕건의 최측근이자 개국공신 신숭겸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한다. 왕건은 장수들의 희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져 탈출했다. 전투 직후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서신을 보자.
“그대는 온갖 계략으로 기회를 엿보고 여러 방면으로 침노하였으나, 아직 나의 말머리도 보지 못하였고 쇠털 하나 뽑지 못하였다. 겨울 초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진(星山陣) 아래에서 손이 묶이더니,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좌장(左將) 김락(金樂)이 미리사(美理寺) 앞에서 해골을 드러냈으며, 죽고 잡힌 자가 많았고 쫓겨 사로잡힌 자가 적지 않았다. 나의 강하고 그대의 약함이 이와 같으니 누가 이기고 질지는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평양성 문루에 활을 걸어 두고 패강(대동강)의 물을 말에게 먹이리라.”
한마디로 ‘너는 나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고려를 멸망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왕건은 발끈했겠지만 현실은 여의치 않았다. 견훤에 의해 강주와 부곡성, 나주가 함락되고, 수비군이 전멸하였으며, 여러 장수들이 견훤에게 투항했다. 929년 7월에는 견훤이 의성부를 공격하여 왕건이 아끼던 장군 홍술(洪術)이 전사하기도 한다.
절치부심하던 왕건이 상황을 반전시킨 것은 고려의 역량을 총 집중한 고창 전투에서였다. 왕건은 명장 유금필의 활약과 고창 지역 신라 호족들의 지원에 힘입어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견훤을 격퇴한다. 후백제군 8000여 명이 전사했고, 이 전투로 인해 견훤은 후삼국 통일전쟁의 주도권을 왕건에게 넘겨주고 만다. 그러나 이후에도 후백제의 수군이 경기도와 황해도를 공격하여 고려의 선박 1000여척을 불사르는 등, 견훤은 계속 왕건을 긴장시켰다. 승패가 기울게 된 것은 934년 운주전투에서였다.
그런데 왕건과 견훤의 이 라이벌전은 다소 허탈하게 막을 내린다.(비장한 마지막 일전 같은 것은 없었다) 후백제에서 정변이 일어난 것이다. 평소 넷째 아들 금강을 총애했던 견훤은 그를 후계자로 삼고자 하였는데, 이에 반발한 둘째 아들 양검과 셋째 아들 용검이 맏형 신검을 충동질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연금한다.
권력을 노린 아들이 아버지를 공격한 패륜임에는 분명하지만, 의아한 부분이 있다. 견훤과 같이 카리스마 넘치는 창업군주가 어떻게 그리 쉽게 무력화되었을까? 이찬 능환, 파진찬 신덕 등 후백제의 주요 대신들도 신검의 반란에 동참하였는데, 이는 견훤의 권위가 많이 손상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금강에게 왕위를 넘기려고 했던 시도도 여론의 동의를 받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견훤은 분노했다. 화가 솟구치다 못해 이 분노는 급기야 자신이 세운 나라를 버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자식들에게 복수할 수 있다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견훤은 후백제를 탈출하여 왕건에게 귀부한다. 견훤은 말했다. “노신이 전하께 몸을 의탁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어 반역을 저지른 자식을 주살하고자 함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왕께서 신병(神兵)을 빌려 주시어 나라를 어지럽힌 자들을 섬멸케 해주시옵소서. 그리 된다면 신은 비록 죽어도 유감이 없겠나이다.” 얼마 후, 왕건과 견훤이 함께 후백제로 진군하니 견훤을 따르던 사위 왕규 등이 내응하였고, 신검 일파는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비록 종장(終章)까지 치열하게 마무리되진 못했지만, 견훤은 왕건의 훌륭한 호적수였다. 무릇 외부에 강력한 적이 있어야 더욱 긴장하고 치밀하게 준비하는 법이다. 견훤이 왕건을 벼랑 끝까지 내몬 덕분에 왕건은 자신을 채찍질하고 강하게 단련할 수 있었다. [삼국사기]는 궁예와 더불어 견훤을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준 자”라고 규정한다. 본인이야 의도치 않았겠지만, 왕건에게 시련을 주고 장애물이 되어 줌으로써 왕건을 제왕의 길로 나아가게 한 사람이 바로 견훤이다. 그러니 지금 강한 적과 마주하고 있다면 불행하다고 한탄만 할 일이 아니다. 그 적이 나의 킹메이커가 되어 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28일 서울 지하철 9호선 일부구간 '경고 파업' 철회
2‘하늘길도 꽁꽁’ 대설에 항공기 150편 결항
3‘이재명 아파트’도 재건축된다…1기 선도지구 발표
4코스피로 이사준비…에코프로비엠, 이전상장 예비심사 신청
5‘3000억원대 횡령’ 경남은행 중징계….“기존 고객 피해 없어”
6수능 2개 틀려도 서울대 의대 어려워…만점자 10명 안팎 예상
7중부내륙철도 충주-문경 구간 개통..."문경서 수도권까지 90분 걸려"
8경북 서남권에 초대형 복합레저형 관광단지 들어서
9LIG넥스원, 경북 구미에 최첨단 소나 시험시설 준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