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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일의 혁신우혁신] 피보팅의 귀재, 파란 머리카락의 CEO가 만든 ‘한국판 줌’

[Interview] 이랑혁 구루미 대표
웹RTC 기술 적용…시제품 개발해 온라인 독서실로 진화
B2B 전용 구루미비즈, 국내 대표 온택트 플랫폼으로 성장

 
 
 
김홍일 대표(왼쪽)와 이랑혁 구루미 대표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랑혁 대표는 그의 파란 머리만큼 번뜩이는 입담을 선보였다.[정준희 기자]
“몇 년 만에 연매출 수백억 신화”, “고졸이 대박집 사장이 되기까지”, “유명 대기업에 수백억 투자 받은 비결”, “스타트업, 나처럼 하면 성공한다”…. 창업 관련 기사를 수놓는 미디어의 헤드라인이다. 가시밭길을 밟아온 창업가의 역경 드라마를 소개하고,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지 장밋빛 전망을 늘어놓는 식이다. 스타트업의 숱한 곡절을 생생하게 목격한 김홍일 케이유니콘인베스트먼트 대표(전 디캠프 센터장)는 창업 시장이 일률적으로만 묘사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창업가의 성공에 손뼉만 치고 끝낼 게 아니라, 그들의 혁신 비법을 우리 사회가 함께 공유하자.” [이코노미스트]가 ‘김홍일의 혁신우혁신’을 연재하는 이유다. 창업 요람의 리더 역할을 하던 VC 대표와 현직 기자가 스타트업 CEO를 만나 진중한 질문부터 가볍고 짓궂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침체에 빠진 한국 경제를 살릴 새 성장 동력을 찾을지도 모를 일이라서다. 네 번째 시간은 이랑혁 구루미 대표와 얘기를 나눴다.[편집자]
 
이랑혁 구루미 대표는 괴짜 창업가로 통한다. 외견부터 톡톡 튄다. 그의 머리칼은 구름사탕을 닮은 파란색으로 염색돼 있다. 마주치는 일부는 분명 눈을 힐끔거릴 텐데, 이 대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의 머리색은 의도된 전략이다. 파랗게 염색된 머리를 통해 구루미의 아이덴티티 컬러를 연상할 수 있게끔 유도하는 거다. 별나게 보일 순 있지만 창업가가 기업의 브랜드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합리적인 행동인 셈이다.  
 
구루미는 원격수업, 화상회의 등 비대면 솔루션을 클라우드 기반 서비스형소프트웨어(SaaS)로 제공하고 있다. 2015년 이랑혁 대표가 회사 문을 열었고, 팬데믹 사태를 기점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지난해엔 20억원 규모의 프리시리즈A 투자를 유치했다. 지난 7월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2021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 2021)’에도 참가했다. 여기서 해외 판로를 개척했는데, 흥미로운 반응이 많았다. 코로나19 시대를 통과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히트한 상품으로 꼽히는 ‘줌’에 빗대 구루미를 설명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다.  
 
‘한국판 줌’ 구루미 본사에서 김홍일 대표를 마주한 이랑혁 대표는 대뜸 마스크를 선물로 건넸다. 구루미의 로고를 새긴 ‘구루미 굿즈’ 중 하나였다. “MWC 2021에 참가해서 굿즈를 배포했는데 외국 바이어에게 아주 인기가 많았습니다. 구루미의 로고가 귀엽고, 또 금세 눈에 띄잖아요.” 구루미는 마스크 스트랩, 펜과 노트 등 부지런히 굿즈를 만들어 기업 이미지를 확장하고 있었다. 청발(靑髮)의 외모만큼이나 남다른 경영 원리를 설파하는 구루미의 CEO, 이랑혁 대표를 만났다.  
 
김홍일 케이유니콘인베스트먼트 대표(이하 김홍일 대표) : 3년 전, 디캠프의 데모데이 행사인 디데이에서 우승했었죠. 그때 서비스 모델이 ‘세계에서 가장 큰 온라인 독서실’이었어요. 지금은 또 한국판 줌으로 불립니다. 사업 모델이 계속 바뀌는 것 같아요.  
이랑혁 구루미 대표(이하 이랑혁 대표) : 그냥 바뀐 건 아닙니다. 더 나은 방향으로 진화하려고 발버둥을 쳤죠.  
김홍일 대표 : 변화무쌍한 구루미와 이랑혁 대표가 진짜 추구하는 게 뭡니까. 요새 스타트업 보면 사업방향을 전환하더라도 반드시 중심에 두는 가치가 있던데요. 흔들리지 않는 철학이나 뿌리 같은 거요.
이랑혁 대표 : 저는 그런 거창한 게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번뜩이는 혁신 아이디어를 단박에 떠올릴 만큼 창의적인 타입의 사람이 아니에요.
김홍일 대표 : 밋밋한 답변이군요.
이랑혁 대표 : 없는 걸 있다고 꾸며낼 순 없으니까요. 어쩌면 미디어가 조명하는 성공한 CEO가 꼭 갖춰야 할 자질과는 연관이 없는지 도요. 아이비리그 출신도 아니고, 대단한 경력을 갖춘 것도 아닙니다. 그저 직장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개인적인 불편함을 기술로 풀어내고 싶었습니다.  
김홍일 대표 : 어떤 불편함이길래 회사까지 차렸습니까.  
이랑혁 대표 : 따지고 보면 사소한 일이었죠. 회의하러 갈 때, 길에서 버려지는 시간이 너무 싫었습니다. 2~3시간 이동해서 30분 대화 나누는 식이요. 처음엔 이 시간을 절약하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컸습니다. 그래서 멀리 떨어져서도 쉽게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툴을 만들어보자, 그게 구루미의 시작점이었습니다.
김홍일 대표 : 화상회의, 사실 십 수년 전에도 충분히 구현되던 기술이었습니다.  
이랑혁 대표 : 그런데 그땐 잘 안 썼잖아요. 이것저것 설치해야 하는 게 번거로웠는데, 웹RTC 기술을 쓰면 이 번거로움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김홍일 대표 : 웹RTC요?
이랑혁 대표 : 웹 실시간통신기술(Real Time Communication)의 약자입니다. 창업 당시(2017년)엔 표준도 없던 기술이었는데, 확산 기미가 보였죠. 화상 채팅을 하기 위해선 액티브엑스나 플래시 도구를 사용해야 했는데, 굉장히 불편한 방식이었습니다. 반면 웹RTC는 프로그램을 따로 설치할 필요도 없었고, 운영체제에 부담을 주지도 않았죠.
 

가벼움 장점인 웹RTC 적용한 비대면 플랫폼 출시

김홍일 대표 : 까다로운 기술 얘긴 그만해도 될 것 같고, 어찌 됐든 화상 솔루션에 유용한 기술이란 거죠. 그래서 언제 한국판 줌이 됐습니까. 아직 온라인 독서실의 ‘ㄷ’자도 나오지 않았는데요.
이랑혁 대표 : 앞서 언급했듯, 전 천재 CEO가 아닙니다. 그래서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이런 화상회의 툴로 사용자들이 뭘 하는지를요. 혹시 그 안에서 비즈니스를 찾을 순 없을까. 그랬더니 희한한 장면을 목격하게 됐습니다.
김홍일 대표 : 모니터링을 했군요. 희한한 장면은 무엇이었습니까.
이랑혁 대표 : 자신의 손만 띄어놓고 공부하는 영상을 송출하고 있더라고요. 여러 명이 동시에 말입니다. 대화하는 것도 아니고, 교류도 없어요.  
김홍일 대표 : 보기 드문 일입니다. 보통 화상 스터디는 하나의 교재를 두고 같이 학습하잖아요.  
이랑혁 대표 : 더 신기한 건, 그런 방들이 점차 늘어났습니다. 결국 방을 연 사용자에게 메일을 보내 물어봤죠. 대체 뭘 하는 겁니까.
김홍일 대표 : 답변이 왔나요.  
이랑혁 대표 : 심플했습니다. 외로워서 그랬다고요.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분들, 하루 10시간씩 앉아있어야 하거든요. 함께 공부하는 기분이 드는 게 좋다는 겁니다. 서로 경쟁심을 유발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고요. 어찌 됐든 영상으로 찍고 있으니 손을 계속 놀려야 하니까요.  
김홍일 대표 : 이 대표는 예상하지 못했던 현상이었겠군요.  
이랑혁 대표 : 물론입니다. 구루미는 여기서 ‘페인 포인트(불편함을 느끼는 지점)’를 찾았습니다. 외로울 땐 함께 공부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디데이, 누적 공부시간, 시계 툴 등 공부에 필요한 툴을 제공하기 시작하니까 방이 100개가량 늘어났습니다. 순전히 입소문 만으로요. 그렇게 온라인 독서실 플랫폼 ‘구루미 캠스터디’가 탄생했죠.
  
이랑혁 대표가 창업한 구루미는 ‘한국판 줌’으로 불리는 화상회의 솔루션 기업이다.[정준희 기자]
김홍일 대표 : 그렇게 이용자를 늘리는 데까진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스타트업에 중요한 건 비즈니스 모델 아닙니까. 독서실 플랫폼으론 돈 버는 게 쉽지 않을 텐데요.  
이랑혁 대표 : 사실 캠스터디를 운영할 땐 BM을 깊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개발자고, 일반 대중의 지갑을 열게 하는 건 천재 CEO나 고안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었거든요. 캠스터디로 사람을 끌어모으고, 또 그 속에서 고객이 원하는 기능을 눈여겨보려고 했습니다.
 

국내 화상교육·회의 시장 장악하는 구루미비즈

이랑혁 대표와 구루미의 성장 방식은 ‘린스타트업’을 연상케 한다. 엄밀한 시장조사를 거쳐 완성도 높은 제품을 개발해 내놓는 일반 기업의 방식과 달리, 제품을 먼저 개발해 시장에 내놓고 피드백을 얻어가며 실패와 성공을 빠르게 반복하는 방법론이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험하고 다시 학습하는 식인데, 구루미가 2019년 말 출시한 ‘구루미비즈’는 이런 과정의 결과물이다.
 
구루미비즈는 B2B를 타깃으로 하는 화상 플랫폼 서비스다. 실시간 화상 회의뿐만 아니라 온라인 콘퍼런스, 화상면접도 가능하다. 캠스터디를 운영하며 얻은 노하우로 교육 기능도 추가했다. 코로나19가 확산하고 각종 공공기관과 기업이 구루미비즈를 구독하고 쓰기 시작하면서 수익 기반을 마련했다. 행정안전부, 산업통상자원부, 법무부, 국세청, 병무청, 경찰청, 국회사무처 등 굵직한 공공기관이 구루미의 고객사가 됐다. 이 플랫폼 위에선 한 극단의 유명 연극도 상연된 적도 있다. 화상 솔루션이란 큰 틀 안에서 ‘피보팅(기존 사업 전환·Pivoting)’을 꾀한 셈이다.  
 
김홍일 대표 : 그러다 코로나19와 조우하게 됐습니다.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화상회의 솔루션이 일상 곳곳으로 확산 중입니다. 구루미가 ‘한국의 줌’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이랑혁 대표 : 팬데믹은 비극이었습니다. 전 세계인의 생활 방식을 뒤틀었죠. 어찌 됐든 구루미엔 큰 기회 요소가 된 건 맞습니다. 덕분에 회사도 크게 성장했습니다.  
김홍일 대표 : 이런 상황을 예측하였는지 궁금합니다.  
이랑혁 대표 : 못 했습니다. 제가 화상 플랫폼을 두고 뭘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유저가 뭘 하는지에 더 관심을 두고 있었으니까요.  
김홍일 대표 : 이제 거리두기가 단계적으로 풀립니다. 구루미엔 위기일까요.  
이랑혁 대표 : 기술 발달 덕에 화상 솔루션도 이제 생생한 현장감을 갖췄습니다. 그저 화면만 띄우고 대화하던 과거와는 다르죠. 위드 코로나 시대가 와도 비대면 솔루션을 찾는 수요는 점차 늘어날 겁니다. 물론 위기가 올 수도 있죠. 이 역시 예측할 수 있지 않을 겁니다. 그때도 조급해하진 않을 겁니다. 구루미 캠스터디를 만들 때처럼 차분히 위기를 관찰하고, 그 상황을 돌파할 겁니다.  
김홍일 대표 : 일부 독자 입장에선 ‘화상 솔루션은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는 의문도 들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독자들도 줌이 조 단위 매출을 올리는 대단한 글로벌 기업이란 건 알 텐데요. 어떻습니까. 한국판 줌으로 불리는 구루미는 정말 줌처럼 성장할 수 있나요.
이랑혁 대표 : 줌은 안정적인 화상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서버 규모로 보면 우리 같은 스타트업을 압도하죠. 그럼에도 기능적인 면에선 구루미가 줌의 95%까진 뒤쫓았다고 생각합니다. 줌과 견줘보면 구루미만의 특장점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용자가 원하는 편의기능을 줌보다 더 민첩하게 제공할 수 있습니다.  
김홍일 대표 : 천재 CEO가 아니라더니, 굉장한 자신감입니다.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와 창의성을 서비스에 덧붙여왔으니, 이랑혁 대표 역시 번뜩이는 CEO가 맞습니다. 그만큼 대단한 다양성과 유연성을 지녔다는 뜻입니다. 파란색 머리부터 이미 눈에 띄는걸요. 그래서 말인데, 그 머리카락 색은 언제까지 유지할 겁니까.  
이랑혁 대표 : 검은색 머리를 한 옛날 사진을 보고 자식들이 오히려 놀라더라고요. 아내는 머리가 검은색인 남편은 내 남편이 아닌 것 같다고 평가했습니다. 구루미의 아이덴티티를 넘어 저를 대표하는 색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도 언젠간 다른 직원이 파란색 머리를 물려받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은 있습니다.
 
끝으로 김홍일 대표는 인터뷰를 잘 마친 이랑혁 대표를 두고 ‘업계의 공공의 적’이라고 쏘아붙였다. 이 대표가 토요일마다 자신이 정성스레 만든 요리를 SNS에 올리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김홍일 대표는 “많은 창업가가 사업 때문에 가정에 힘을 쏟기가 어려운데, 이랑혁 대표 때문에 가족의 원성을 듣는 CEO가 적지 않다”며 놀렸다.
 
이랑혁 대표가 웃으면서 받아쳤다. “가시밭길이 뻔히 예상되는 창업이었습니다. 평일엔 집에도 제대로 못 들어갈 것 같았고, 실제로 그랬죠. 그래서 회사를 만들 때 아내에게 약속했습니다. ‘토요일과 일요일 아침은 내가 해주겠다.’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요리 약속만큼은 지키려고 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 때문에 가족들이 마냥 희생할 순 없잖아요.”
구루미 플랫폼 사용 화면 [사진 구루미]
 

기자가 본 이랑혁 대표

이랑혁 대표에게 창업 이후 가장 힘들었던 때를 회고해달라고 부탁했다. 피눈물 나는 실패담을 기사에 녹여내려는 심산이었다. 제대로 된 서비스를 내놓지 못한 채 돈이 안 벌려 고군분투하던 과거를 한탄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답변이 나왔다. 바로 지금이 가장 힘들다는 거다.  
 
“많은 곳에서 주목을 받고 있고, 회사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책임져야 할 직원도 숱하게 늘어났고요. 사실 매 순간의 경영 결정이 짓눌러요. 저는 그 무게감을 호기롭게 받아칠 만큼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거나 확고한 경영 철학으로 무장한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견뎌 내는 거죠.”  
 
그렇게 억눌려 있으면 지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그럴 리가요. 구루미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이잖아요.” 이랑혁 대표는 꿈을 목표로 하는 다른 창업가 역시 마찬가질 거라고 덧붙였다. 힘들긴 해도 지치진 않을 거라는 거다. 이랑혁 대표를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은 꿈이었다.

김다린 기자 kim.dar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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