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부동산 투기꾼 1호…공주갑부 김갑순을 아시나요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⑬]
선행 베풀다 인생 역전…충청도 일대 최고 땅부자로 우뚝
‘유능한 화폐 제조기’이자 ‘당국자 환심 사기’ 달인
해방 후 친일행각으로 체포, 자손 재산다툼 속 쓸쓸한 최후
드라마 속 "민나 도로보데스(みんな泥棒です, 모두가 도둑놈들)"…지금은?
1930년 6월28일, 계몽사상가 윤치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사촌동생 치오의 둘째 아들 명선이가 공주의 김갑순씨의 둘째 딸과 결혼했다. 오후 4시부터 정동 감리교회에서 김영섭씨 주례로 결혼식이 거행됐다. 국일관에서 피로연이 열렸다. 공주 제일의 갑부인 김갑순씨는 유능한 ‘화폐 제조기’로 알려져 있다. 김씨는 당국자들의 환심을 사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윤치호 집안과 사돈을 맺은 김갑순(金甲淳·1872~1961)은 공주를 중심으로 충청남도 일대를 아울렀던 거부다. 윤치호의 일기에는 김갑순을 설명하는 두 가지 키워드가 모두 들어 있다. ‘유능한 화폐 제조기’와 ‘당국자들의 환심’이 그것이다. 그는 탁월한 감각과 치부술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는데, 그 배경에는 권력자들의 비호가 있었다.(1949년 출간된 [민족정기의 심판]이라는 책에도 “도지사, 군수, 서장, 판검사들 중 김갑순의 손아귀에서 놀아나지 않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선행으로 바뀐 인생…권력 결탁해 승승장구
여자는 김갑순에게 연신 고맙다며 의남매를 맺자고 제안했는데, 이 여성이 얼마 뒤 충청남도 관찰사의 첩이 돼 김갑순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덕분에 감영의 종에서 감영의 하급 관리로 신분도 상승했다. 김갑순의 인연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어느 날 관찰사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허름한 차림의 선비를 도와줬는데, 그 선비가 국가 재정을 총괄하는 탁지부의 고관이 된 것이다. 선비는 김갑순을 서울로 불러들여 중앙 관직에 나갈 수 있게 해줬다. 우연한 선행이 그의 운명을 달라지게 한 것이다.
관리가 된 김갑순은 돈에 대한 동물적인 감각과 꼼꼼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출세 가도를 달렸다.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장원(內藏院)에서 징세 담당 관리인 봉세관(捧稅官)을 맡았고 부여군수, 임천군수, 노성군수, 공주군수, 아산군수 등 충청남도 여러 고을의 군수를 두루 역임했다.
그러면서 충청남도 관찰사부의 봉쇄관을 겸임했는데, 세무 행정에 특히 밝았던 것으로 보인다. 헌데 세무에 밝으니 세금을 착복하는 능력도 뛰어났던 것 같다. 징세 과정에서 막대한 돈을 빼냈지만 단 한 번의 징계도 받지 않았다. 그의 세금 착복은 한일 강제병탄 때 정점에 달했는데, 나라가 망한 혼란을 틈타 엄청난 액수의 국고를 횡령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재산을 모은 김갑순은 본격적으로 재산 불리기에 나섰다. 토지를 사들이고 황무지를 개간했으며 극장사업, 자동차사업, 수리사업 등 유망 업종에 제일 먼저 뛰어들었다. 대전의 유성온천을 본격적으로 개발한 사람도 김갑순이다. 그는 1914년 ㈜대전온천과 ㈜유성온천을 설립하고 최대 주주이자 전무이사로서 경영을 맡았다. 두 회사는 온천장을 운영했을 뿐 아니라 토지·가옥 대부 사업과 자동차 영업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김갑순은 ㈜해동은행, ㈜조선미술품제작소 등에도 관여한다.
그런데 그의 재산 형성에 무엇보다 이바지한 것은 토지였다. 그는 임시토지조사국 충청남도지방 토지조사위원, 충청남도 참사, 공주읍 읍회의원, 충청남도 도평의회 의원, 우성 수리조합장, 중추원 참의를 지내며 알게 된 개발 정보를 활용하고 이때 형성한 인맥과 연줄을 통해 토지 관련 인허가를 얻어냈다.
총독부와 충청남도의 고위관리에게 전방위적인 로비를 펼쳐 저리 대출, 세금 감면 등의 특혜도 받아냈다. 대전에 철도가 놓인다는 정보를 입수해 땅을 사고, 이후 충남도청이 이전한다는 정보를 듣고 저리 대출을 받아 추가로 땅을 대거 매입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대전 땅의 40%가 김갑순의 소유였으며, 김갑순의 소유지에 충청남도 도청이 세워짐으로써 15전에 매입한 그의 토지는 천 배 가까이 폭등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김갑순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임원을 맡으며 총독부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공주 구제원장을 맡아 기민을 구호하고 사회기반시설 건설에 막대한 돈을 기부하기도 했는데, 좋은 뜻으로 했다기보다는 총독부 시책에 협력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통해 계속 이권과 특혜를 받고 재산을 불려 나갔으니, 권력과 결탁해 돈을 번 전형적인 행태다.
유명했던 사치스러움, 해방 후 ‘친일’로 체포
자, 그렇다면 해방이 된 후 김갑순은 어떻게 됐을까? 친일부역으로 돈을 벌었으니 단죄됐을까? 김갑순은 갑자기 ‘전재민(戰災民) 주택사업’을 벌인다. 주택 100호를 지어 전쟁 등으로 집을 잃고 떠도는 ‘전재민’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겠다는 것이다. 이미지 변신을 꾀한 것인데, 아까웠던 것일까? 100호를 지어 20호만 관계 당국에 제공하고, 80호는 자기와 관계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이에 당국은 “결국 허울 좋은 미명뿐이니 대단히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라고 비판한다. 하지 않은 것보다 못한 일이 되고 말았다.
이후 김갑순은 1948년 출범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됐지만, 반민특위가 와해되면서 흐지부지 넘어갔다. 당시 공주의 국회의원이자 항일독립운동가였던 김명동이 그를 잡아넣기 위해 애썼으나 실패한다. 김갑순은 김명동에게 당한 수모를 갚겠다며 2대 국회의원 선거에 아들을 공주 갑구에, 손자를 공주 을구에 출마시키고 막대한 선거자금을 투입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그 뒤 김갑순은 자손들의 재산 다툼을 보며 답답해하다가 1961년 죽는다. 쓸쓸한 최후였다.(그의 이름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됐다.)
한 가지 남은 이야기. 1982년 [거부실록] 시리즈의 두 번째로 ‘공주갑부 김갑순’이라는 드라마가 22부작으로 방영됐다. 그때 주인공 김갑순은 툭하면 ‘민나 도로보데스(みんな泥棒です)!’라고 내뱉었다고 한다. ‘모두가 도둑놈들’이라는 뜻이다. 부패한 권력자들, 자신의 재산을 노리는 사람들을 향한 말이겠으나 김갑순이 부자가 된 것도 그런 세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이 말은 부정부패가 횡횡했던 80년 초반 당대 대(大) 유행어가 됐는데, 요즘 다시 거론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김준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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