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서 드러난 현대 군사·정치·경제적 지형 변동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드론 비롯한 디지털·사이버전 등 새 전쟁 양상 대두
국제정치는 국가별 각자도생 시대로 변화
워싱턴포스트(WP)는 3월 23일 ‘우크라이나, 러시아군의 치열한 공격을 방어하면서 수도 키이우 외곽 소도시 탈환 주장’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같은 날 뉴욕타임스(NYT)는 ‘우크라이나, 자신들의 도시를 때리는 러시아군을 밀어내려고 시도’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한 달을 맞는 24일을 하루 앞두고 나온 뉴스다.
러시아 막아낸 우크라이나, 일부 지역에선 반격 시작해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유럽 정상들과 추가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넜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처음으로 유럽을 찾았다. 바이든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 유럽연합(EU), 주요 7개국(G7) 정상들을 만나 해결 방안을 논의했지만 뾰족한 수는 없어 보인다.
미군이나 나토 전력의 파병 없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와 물자, 자금 공급과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로만 전쟁을 멈출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푸틴은 아직 물러설 기미가 없다. 미국과 서방의 고민이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겐 피를 말리는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WP와 NYT 보도는 현재의 군사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두 기사를 종합하면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의 여러 도시를 계속 공격하고 있지만 뚜렷한 전과를 내기는커녕 일부에선 밀리기도 한다는 이야기다. 진격이 순조롭지 못한 러시아군이 무차별 포격과 폭격으로 시가지를 파괴하면서 민간인을 포함한 인명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눈여겨볼 점은 러시아군은 새로운 도시를 장악하기는커녕 일부에서 우크라이나군의 반격을 받아 물러나는 일도 줄을 잇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22일 우크라이나 국방부가 탈환을 발표한 키이우 서부 마카리우는 전략적 의미가 크다. 서부 지토미르와 리브네를 거쳐 서부의 거점 도시 리비우로 이어지는 E40 고속도로의 바로 북쪽에 있는 소도시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가 이 고속도로의 통행을 유지하면 수도 키이우와 서부 지역의 연결이 순조로워지며 이에 따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인 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로 지원한 연료·탄약·무기·식량 등 각종 물자가 서부 리비우를 거쳐 키이우의 수도 방위선으로 순조롭게 육상 전달될 수 있다.
병참선 유지에 중요한 고속도로와 인근 도시를 점령해 수도 방어전에서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가 가능한 상황이다. 미국 전쟁연구소(ISW)는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이 일시 점령했던 마카리우와 북서부의 다른 도시 모스천을 탈환했다고 전했다.
이 지역은 러시아의 동맹이나 다름없는 벨라루스로 이어지는 보급선이 지나는 곳이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점령 작전이 지지부진한 것은 물론 보급선을 위협받으면서 반격을 당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수도 키이우 주변뿐 아니라 지난 3월 3일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로는 처음으로 러시아군이 입성한 남서부 헤르손에서도 이런 징후가 발견되고 있다. 영국 일간지 더타임스는 인공위성 사진을 바탕으로 헤르손 공항에 배치됐던 러시아군 헬기가 모두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고 보도했다.
헤르손 서부의 미콜라이우 주는 서쪽으로 우크라이나 해상 물동량의 70%를 차지하는 오데사 항구가 있으며 서북부에는 원전 단지가 있다. 헤르손을 점령한 러시아군은 그동안 공세의 수위를 높여왔지만 우크라이나군이 이를 잘 방어했다는 평가다.
미국 국방부의 존 커비 대변인은 22일 CNN에 “우크라이나군이 곳곳에서 가끔씩, 특히 남부 지역에서 공세를 벌이고 있다”고 말했는데 이 지역의 전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CNN은 미 국방부 고위당국자를 인용해 우크라이나군이 동북부 하르키우 인근의 소도시인 이지움에서 반격에 나섰다고 전했다. AP통신은 현재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군이 1만 명 전후의 인명 피해와 보급 등 문제로 전력의 90% 이하만 가동할 수 있다는 평가를 전했다.
기동력 키웠던 러시아군, 보급문제·전력분산으로 힘 빠져
이에 따라 전쟁의 양상이 변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중요한 것은 이를 계기로 우크라이나군이 반격에 나설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부에선 러시아군이 공세종말점(Culminating Point of the Offensive)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하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공세종말점은 카를 폰 크라우제비츠가 1832년 출간한 [전쟁론]에서 제창한 개념으로 군대가 보급 문제, 적의 저항, 휴식과 정비의 필요성 등으로 인해 더 이상 작전을 수행할 수 없는 상대를 가리키는 군사전략 용어다.
공격군은 공세종말점에 이르기 전에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임무이며, 반대로 방어군에는 적이 목표를 달성하기 전에 공세종말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임무가 된다. 이는 공격을 할 경우 물적·심리적 소모로 인해 전과가 갈수록 줄어들기 때문이다.
공격자의 전투력은 전투에 따른 병력과 장비의 소모, 병참선 유지와 방어에 대한 부담, 병참기지와 전투지역과의 거리 증가 등으로 인해 공격자의 유세가 정점에 이른 다음 차차 감소한다는 이야기다.
공세종말점이 지나면 방어 측이 우세해지면서 전세가 역전될 수 있다. 지휘관이나 지도자가 이런 상황을 인지하면 협상 등 방식을 바꿔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거나 애초 목표를 수정하거나 타협할 수 있다.
러시아가 기세등등하게 시작한 우크라이나 침공이 원래 의도와 상당히 벗어나는 상황으로 전개되면서 전 세계가 군사적·경제적·국제정치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다. 군사적으론 국가 대 국가의 전면전·정규전이 아닌 COIN(대반란전) 중심으로 진행돼온 기존의 군 개혁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다량의 연료·탄약·식량의 지속적인 보급과 장비의 수리·정비가 필수적인 현재의 기갑·기계화 기동부대 중심의 편성이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체첸 전쟁의 교훈에 맞춰 대대적인 군 개혁으로 소규모 대대전술단(BTG) 중심으로 재편성한 러시아 지상군이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러시아 특유의 기동 위주 지상군 전술이 보급이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면서 무용지물이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러시아 지상군이 엄청난 연료가 들 수밖에 없는 기갑·기계화 부대에 의존하면서도 보급을 경시한 게 과거 단기전, 소규모 전쟁 당시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이번에 전쟁의 규모가 커지고 기간이 길어지면서 문제를 일으켰다는 평가도 있다.
침공에 나선 러시아군이 전력을 수도 키이우든, 서북부 하리키우든, 남부해안이든 한곳에 전력을 집중하고 상대를 이중·삼중으로 포위해 섬멸하는 전통적인 작전을 벌이지 않고 전력을 분산한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지나친 자신감으로 전력을 분산하는 바람에 어느 한 군데에서도 시원하게 진격하거나 우크라이나군의 전력을 무력화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대전차 미사일·드론 위력에 저무는 전차의 시대
사실 러시아군은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당시 막강한 기갑전력을 키웠다. 2차대전 당시 초기엔 나치 독일에 밀렸던 소련군은 독일군의 전술을 보면서 그 교리를 상당히 흡수했다. 당시 독일군은 기갑부대·기계화보병·포병·공수부대에 지상근접지원 항공 전력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기동성을 최대한 추구한 전격전을 실전에 적용했다.
특히 보병·전차·포병 전력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시너지를 높이면서 벌이는 보전포 합동 작전은 기동성과 화력의 극대화했다. 초기에 패주한 소련군은 이를 눈여겨보면서 실전에서 흡수했다.
소련군 특유의 종심작전이론을 발전시켜 전선의 적을 집중 공격해 돌파한 뒤 돌파부위를 늘리면서 적을 포위 섬멸하는 대규모 작전을 구사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공업력을 바탕으로 하는 기갑전력이 지상군의 중심이 됐다.
냉전 당시에도 소련을 비롯한 바르샤바 동맹의 군대는 대규모 기갑전력을 바탕으로 서방을 위협했다. 나토는 동독의 서남부 돌출부에서 주요 도시인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을 잇는 이른바 ‘풀다 간격’을 방어하기 위해 대규모 기갑전력을 배치해야 했다. 소련군도 만일에 있을 서구 공격을 위해 동독 서남부에 대규모 기갑부대를 배치했다.
냉전 시절 동독에 소련군의 최정예 기갑부대가 배치됐다. 기갑부대의 전력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다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1991년 소련이 무너지고 냉전이 끝나면서 서방은 국방비를 줄이면서 전차를 대거 퇴역시켜 현재 영국·프랑스·독일 모두 각각 200대 남짓한 전차만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는 3000여 대의 전차를 현역으로 운용하고 1만 대를 예비로 준비하고 있다. 러시아에선 큰 비용이 드는 기갑전의 신화가 여전히 현실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에선 미국산 재벌린, 영국산 NLAW 등 경대전차무기(LAW)가 중장갑 기갑·기계화 부대를 저지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대규모 강철 군단이 굉음을 내면서 벌판을 가로지르며 진격하는 기갑전의 시대는 이제 강력한 대전차 미사일에 밀리고 있는 것이다. 전차를 위한 대규모 보급도 문제다. 죽기 살기로 병참에 매달렸던 대전 때가 아닌 평시에 이를 준비하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드론 등 작은 디지털 기기가 대형·장갑·화력 무기를 제압하는 시대로 상황이 바뀌는 것도 사실이다. 2020년 9월~11월에 벌어졌던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당시 전력이 비교적 약했던 아제르바이잔은 터키와 이스라엘에서 들여온 드론을 바탕으로 아르메니아 기갑전력을 무너뜨리고 진격을 거듭했다. 당시 기존 전차에 대한 방호 강화 등 다양한 준비 필요성이 대두됐지만 이번 우크라이나 상황으로 보면 충분히 대비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터키·이스라엘 등 드론 등 소형 전술 무기 강국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아울러 디지털전·사이버전·역선전전 등 다양한 전쟁 양상이 새롭게. 또는 강화돼 전개되고 있다. 이 때문에 강대국과 중간국가가 어느 정도 균형 유지하던 시대에서 백가제방의 각자도생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서유럽 ‘재무장’에 러시아, 에너지 대국 지위도 ‘흔들’
냉전이 끝나고 군사비를 줄여온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이 새롭게 전력을 강화하는 것도 주목거리다. 냉전 당시의 강력한 군대로 돌아가느냐가 관건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독일이 나토 가이드라인대로 매년 국내총생산(GDP)의 2%를 방위비로 지출하기로 한 것도 주목받을 수 밖에 없다.
서유럽 국가들은 GDP가 많기 때문에 여기에 맞추면 방위비는 크게 늘 수밖에 없다. 독일(4조2301억 달러), 영국(3조1084억), 프랑스(2조9403억), 이탈리아(2조1203억) 등이 GDP의 2%를 계속 군사비로 지출하면 새로운 군비경쟁 촉발이 명약관화하다.
나토 회원국들은 F-35·F-22 등 초고가 전투기에 AI·로봇·극초음속·우주·안면인식 신기술을 군사에 적용하면서 대대적인 전력 업그레이드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이럴 경우 GDP가 1조6475억 수준인 러시아는 유럽은 물론 전 세계에서 군사대국 지위를 상실할 위기에 처할 수 있다.
게다라 이번 전쟁으로 러시아는 기존 에너지 대국의 지위도 위협받게 됐다. 유럽이 청정에너지인 원자력을 확대하고 석유·가스 대체 수입지를 찾아 나서면서 러시아 국가 예산의 40%를 차지하는 에너지 부분은 축소될 위기에 처했다.
에너지 외에 별다른 수출 상품이 없는 내수 국가 러시아는 경제적으로 근본적인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는 대외 의존도가 비교적 높은 중국에도 부담이다. 중국의 시장은 서방에 있지, 러시아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전 세계의 흐름을 바꿀 기세다. 문제는 그런 변화가 러시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푸틴은 국가 전략적으로 자해한 셈이다. 군사·국제정치·경제 모든 면에서 세계는 새로운 변화를 목전에 두고 있다.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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