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이 보여준 유엔 무능력과 러시아 미래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유엔, 러시아 전쟁·학살 막을 힘도 중재능력도 없어
러시아, 세계 비난에 국제적 신뢰·위상 하락 불가피
유럽, 원자력으로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 중단 가속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글로벌 최대의 다자외교 무대인 유엔(UN·국제연합)이 요동치고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자 핵보유국인 러시아가 국경을 맞댄 주권국가를 침공하면서 유엔 체제에 대한 개혁 요구가 거세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국제 정치·경제적 위상도 급변하고 있다. 국제 규범과 질서도 재편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와 관련한 다양한 압박이 임계점을 향해 팽창하고 있다.
유엔, 러시아 비난 결의안 채택 실패, 규탄에 그쳐
유엔은 어떻게 될까. 1945년 6월 26일 마련된 유엔헌장에 따라 그해 10월 24일 창설된 유엔은 지난 76년 동안 국제사회의 평화와 규범, 질서를 지키는 보루 역할을 해왔다. 가장 중요한 임무가 바로 국제 평화와 안전의 유지다.
이는 유엔의 존재 이유다. 유엔이 제1차 세계대전 종전 뒤인 1920년 1월 10일 설립된 국제연맹(NL)이 제2차 세계대전을 막지 못했음을 반성하면서 설립한 국제기구이기 때문이다.
유엔헌장은 유엔의 주요 목적을 ‘국제 안전보장과 경제·사회·문화 분야의 국제협력’이라고 명시했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평화와 안전보장이다. 서문을 보면 구구절절 평화를 강조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우리 연합국 국민은 우리 일생 중에 두 번이나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인류에 가져온 전쟁의 불행에서 다음 세대를 구하고, 기본적 인권, 인간의 존엄 및 가치, 남녀 및 대소 각국의 평등권에 대한 신념을 재확인하며, 정의와 조약 및 기타 국제법의 연원으로부터 발생하는 의무에 대한 존중이 계속 유지될 수 있는 조건을 확립하며, 더 많은 자유 속에서 사회적 진보와 생활 수준의 향상을 촉진할 것을 결의했다. 이런 목적을 위해 관용을 실천하고 선량한 이웃으로서 상호 간 평화롭게 같이 생활하며, 국제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힘을 합하고, 공동 이익을 위한 경우 이외에는 무력을 사용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원칙의 수락과 방법의 설정 때문에, 보장하고, 모든 국민의 경제적 및 사회적 발전을 촉진하기 위하여 국제기관을 이용한다는 것을 결의하며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의 노력을 결집할 것을 결정했다.”
그 결과 유엔은 미국·러시아(소련을 승계)·영국·프랑스·중국(중화민국(대만)을 승계) 등 거부권을 가진 다섯 개 상임이사국(P5)을 포함한 안전보장이사회 등을 두고 국제 안보와 관련한 권한을 확보하고 있다. 유엔은 현재 193개 회원국과 표결권이 없는 2개 총회 옵서버 국가(바티칸·팔레스타인)을 둔 세계 최대 다자외교 기구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올해 2월 24일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주권국가로 유엔회원국인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국제사회의 규범과 질서의 축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P5 국가인 러시아가 침략했는데도 유엔은 사태에 실질적으로 사태 해결을 위해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는다.
유엔 안보리는 2월 27일 회의를 소집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비난하는 결의안 채택(안보리 결의안 제2623호)을 시도해 15개 이사국 중 11개국의 찬성을 얻었다. 하지만 인도·중국·아랍에미리트(UAE)가 반대했으며, 무엇보다 P5 국가인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채택이 무산됐다.
그러자 유엔총회가 나서서 선언적인 활동은 그나마 벌이고 있다. 유엔총회는 3월 2일 제11차 긴급총회를 열고 러시아의 침공을 규탄하는 11차 긴급총회 결의안 제1호(ES-11/1)를 통과했다. P5의 거부권은 유엔안보리에서만 적용될 뿐이며 유엔총회 결의안은 다수결(사안에 따라 과반이나 3분의 2)로 통과된다.
총회 표결에선 193개 유엔 회원국 중 12개국을 제외한 181개국이 참석해 141개국(출석 국가의 77.90%)이 찬성했으며, 35개국(19.34%)이 기권했고 반대는 러시아와 벨라루스·북한·시리아·에리트레아의 5개국(2.76%)에 그쳤다. 그야말로 러시아의 정치적인 대패다. 21세기에 주권국가를 침략한 나라에 대한 국제사회의 싸늘한 시선이다.
유엔총회 제11차 긴급총회는 3월 24일에는 유엔헌장에 따라 러시아의 철군과 우크라이나의 주권 지역 인정을 요구하는 11차 긴급총회 결의안 제2호(ES-11/2)를 통과했다. 193개 회원국 중 불참이 10개국, 기권이 38개국(참가국의 20.76%), 1호에 반대했던 러시아와 벨라루스·북한·시리아·에리트레아의 5개국(2.76%)이 반대했으며 140개국(76.50%)이 찬성표를 던졌다. 러시아는 국제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게다가 러시아는 개전 초인 2월 27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근교 도시 중 처음 점령한 부차에서 300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부차 외에도 인근 다른 도시에서도 비슷한 잔학 행위가 보고됐다. 3월 말~4월 초 이 지역에서 러시아군이 철수한 뒤 진입한 우크라이나 당국은 손이 묶인 채 살해된 사람을 포함한 남녀노소의 시신을 발견하고 국제사회에 공개했다.
러시아 막을 힘 없는 유엔, 개혁도 요원한 실정
이에 따라 유엔총회가 또 나섰다. 제11차 긴급총회는 4월 7일 11차 긴급총회 결의안 제3호(ES-11/3)를 통과하고 러시아를 유엔인권이사회에서 축출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동안 일으킨 인권 침해와 인도주의 위기에 책임을 따진 것이다.
이 표결에선 193개국 중 18개국이 불참했고, 58개국이 기권했다. 표결 참가국 중 찬성 93개국(79.49%), 반대 24개국(20.51%)이라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통과됐다. 인권이사회 축출은 투표국의 3분의 2 이상 찬성을 얻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도 유엔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중단시킬 현실적인 힘도 없으며 중재할 능력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유엔은 태생적인 한계 속에서, 2차대전 종전 뒤 탄생한 세계질서는 주도했지만 1991년 소련 몰락 뒤 열린 포스트 냉전 시대의 분쟁을 막지도, 터진 전쟁을 신속하게 중단시킬 수단도 없이 협상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유엔은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는 상태가 된 것일까.
실제로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확대해 유엔의 대응 능력과 지역별 대표성을 높이고 실질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추도록 하자는 개혁의 목소리는 2000년 이후 지속해서 있었다. 2005년 당시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은 안보리 이사국을 15개국에서 24개국으로 늘리자는 방안도 내놨다. P5의 비토권 때문에 파행을 거듭하는 안보리보다 총회에 힘을 실어주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하지만 비토권을 손댈 수 없는 상황이라 전반적인 개혁은 쉽지 않은 실정이다. P5가 비토권을 없애자는 안건부터 비토권을 행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토권 없이는 유엔이 존재하기 힘들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강대국이 빠져나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제연맹이 그런 방식으로 힘을 잃었다.
아울러 국력 확보와 제3세계 대표성 등을 바탕으로 독일·일본·인도·브라질이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겠다는 의도를 밝히면서 일이 더욱 복잡하게 됐다. 이들을 G4라고 부른다. 그러자 G4의 상임이사국 진출에 반대하는 나라들끼리 뭉치기 시작했다.
독일의 진출에 반대하는 이탈리아·스페인, 인도에 반발하는 숙적 파키스탄, 일본의 진출에 대항하는 한국, 브라질에 맞서는 아르헨티나·멕시코·콜롬비아, 그리고 중견국을 대표하는 터키와 인도네시아 등이 그들이다. 이들을 국제사회에선 커피 클럽이라고 부른다.
G4는 그동안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을 비롯한 유엔의 다양한 기구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쌓아왔다. 커피 클럽도 국제사회에서 경제력·영향력 등에서 역량을 키워온 게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기존 5개국의 지위가 국제적으로 많은 도전을 받아온 게 사실일 것이다.
푸틴 비난 수위 높이는 미국, 어정쩡한 입장의 중국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주권국가 침공이라는 행동을 하면서 국제적인 신뢰가 추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았다. 하지만 러시아를 인권이사회에서 축출하는 것은 총회의 표결로 3분의 2 이사의 찬성을 얻으면 되지만, 안보리 상임이사국에서 제외하는 것은 유엔 헌장과 시스템 전체를 고쳐야 한다.
안보리 비토권 때문에 정상적인 표결로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유엔을 깨고 새로운 유엔을 만들지 않으면 불가능한 셈이다. 게다가 러시아는 핵보유국이다. 이를 무시하고 국제 안보 시스템을 새로 짤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러시아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이 이어지고 이들이 점점 더 고립무원의 상황에 빠지는 것은 사실이다. 부차 학살이 공개된 4월 4일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은 “재판을 위해 모든 구체적 사항들을 수집해야 한다”며 푸틴 대통령을 “전범”이라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미 3월 16일 푸틴을 처음으로 “전범”이라고 규정한 데 이어 연일 “살인 독재자” “도살자” “폭력배” 등으로 부르면서 비난하고 있다. 4월 12일에는 아이오와 주에서 연설하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군이 벌인 잔학 행위를 두고 “제노사이드(집단 학살)”라고 표현했다. 바이든은 취재진에게 “푸틴이 우크라이나인의 생각마저 말살하려는 시도가 점점 분명해지고 있어 ‘집단 학살’이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주목할 점은 중국의 어정쩡한 입장이다. 중국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 유엔총회의 결의안 표결과 러시아의 인권침해 조사위원회를 설치하는 유엔 인권위원회 표결에 모두 기권했다.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중국은 시종일관 사안 자체의 시비곡직에 따라 입장과 정책을 결정해 왔다”고 주장했다. 이웃 나라 침략에 나선 러시아를 편 들 수도, 비난의 대열에 동참할 수도 없이 담장 위를 걷는 중국의 모습이다. 국제사회에 덩치에 걸맞은 책임을 보여주지 못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러시아를 유엔 인권위원회 이사국에서 퇴출하기 위한 유엔 긴급 총회에서 안건이 가결되자 러시아는 정치적인 투표라며 스스로 탈퇴를 선언했다. 축출이든, 탈퇴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로선 체면을 구긴 일임이 분명하다. 특정 국가가 인권 문제로 이렇게 유엔 인권 이사회에서 쫓겨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시리아도 미얀마도 당하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러시아 고위층이 학살을 명령했다는 증거 확보를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도 진행 중이다. 우크라이나 검찰총장이 러시아 전쟁범죄 증거 수집을 진행 중이며, 유엔 인권이사회 조사위원회도 같은 활동을 하고 있다.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는 유럽연합(EU) 및 주요 7개국(G7) 국가들과 함께 러시아에 대한 추가 제재에 들어갔다.
에너지 독립으로 러시아에 경제적 압박나선 유럽 각국
정치적인 압박이 귀를 시끄럽게 한다면, 경제적인 압박은 배를 고프게 한다. 엄청난 양의 석유와 가스 매장량과 생산량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 에너지 차르로 행세해왔던 러시아의 위상과 경제력도 이번 사태로 타격이 불가피하다. 어느 나라든 에너지 안보 문제는 경제는 물론 정권의 사활과도 직결되는 주요 사안이다.
그런데도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이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는 물론 에너지 수입까지 중단할 움직임이 가속하고 있다. 대선을 치르고 있는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이미 대선 공약 1호로 소형모듈원자로(SMR)의 개발을 선정하는 등 지금도 전체 전기의 70%를 원자력에서 얻는 프랑스 에너지 구조를 더욱 자립하는 방향으로 잡고 있다. 원전 강국답게 원자력을 일자리와 에너지 확보와 자립 정책의 핵심으로 내세운 셈이다.
지난해 10월 31일~11월 23일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제26차 유엔기후변화 당사국총회(COP26)를 열었던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는 지난 3월 21일 원자력 비중을 기존 14.5%에서 25%로 높이겠다고 밝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불안해진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선 원자력 확대를 더는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재생에너지 비중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간헐성(날씨에 발전량이 좌우되는 특성)을 극복하고 안정적으로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선 백업 발전이 필수적인데 러시아 의존도가 높은 가스 대신 원자력으로 이를 대체하겠다는 의도도 보인다.
러시아가 일으킨 우크라이나 전쟁이 러시아의 국제사회에서의 지위는 물론 에너지 지배국으로서의 위상마저 추락시키고 있는 셈이다. 러시아에서 파이프로 가스를 공급하는 유럽 각국이 청정에너지인 원자력을 확대하고 석유·가스 대체 수입지를 찾아 나서면서 러시아 국가 예산의 40%를 차지하는 에너지 부분은 축소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만큼 러시아 국가재정과 경제가 힘들어진다는 이야기다.
러시아산 가스에 중독됐다는 평가를 받아온 독일도 의존도 탈피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현재 러시아와 전통적으로 가까웠던 사민당과 녹색당이 자민당과 함께 연정을 이루고 있지만, 올라프 숄츠 총리로선 자신의 정치적 명운을 걸고 우크라이나 침공 앞에 단호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 숄츠 총리는 침공 직전 모스크바를 찾아 푸틴을 만나 중재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 뒤 눈앞에서 주권국가가 침략당하는 사태를 당한 숄츠는 독일 연방의사당에서 군사력을 강화하고 기존 국내총생산(GDP)의 1.35~1.5% 정도였던 방위비 비율을 나토 가이드라인에 맞춰 2%로 높이겠다고 선언했다.
분쟁 지역에 무기를 넘기지 않는다는 오랜 원칙을 포기하고, 우크라이나에 다량의 무기를 공급하겠다고 선언하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1990년 통일 이후 보관해온 옛 동독군의 옛 소련산 무기부터 공급에 들어갔다.
독일로선 무엇보다 러시아 가스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게 급선무일 것이다. 이는 결국 러시아 경제의 근간인 에너지 경제의 동맥경화를 유발할 수밖에 없다. 푸틴의 오판은 국제사회의 변화를 부르고, 러시아를 더욱 수렁에 빠뜨리고 있다. 그 끝이 어디인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도 크다. 러시아도 다른 나라도 불안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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