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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따라잡기① 강남도 처음엔 신도시였다[김현아의 시티라이브]

경부고속도로 지으려 개발한 강남, 각종 지원책에 강북 추월

1950년대 압구정동 주변 전경 [사진 강남구청]

[김현아 가천대학교 초빙교수] ‘강남’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는가. 아파트, 학군, 부자 동네 등등이 있을 것이다.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강남은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기도 했다. 즉 강남만이 보유한 묘한 특성과 브랜드 가치가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의 강남이 단지 ‘각본도 없던 드라마’로부터 시작돼 개발됐다면 사람들이 믿을까? 이 같은 선택이 종국적으로 기존의 강북을 죽이면서 강남을 새로운 서울의 중심으로 부각시키게 됐는데 말이다. 

그 시발은 경부고속도로 건설로부터였다. 엄격히 말하면 고속도로의 도로용지 확보가 강남 개발의 목적이었다. 서울은 당초 여의도를 거점으로 서울-인천 축으로 성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경부고속도로 사업 때문에 기존의 ‘서울-인천 각본’이 폐기처분되었고, 당시에는 수요가 없던 강남에 아주 특별한 개발이 시작됐다. 

강남 개발, 도로부지 확보 위해 시작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강남 일대에선 세계에서 전무후무한 규모의 구획정리사업이 시작된다. 처음부터 사업은 대규모였다. 최근 수도권 신도시 규모만한 1034만㎡(313만평)으로 시작된 개발 면적은 그 후 1719만㎡(520만평)으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게다가 애초에 계획된 개발이 아니었기에 청사진이 있을 리 만무했고 강남 개발은 머릿속에 그린 그림을 맞추어가는 그야말로 ‘숨은 그림찾기’였다고 할 수 있다.

사업은 급박하게 진행됐다. 정부는 현재의 강남구와 서초구를 도시지역으로 개발하기 위해 1966년 도시기본계획에 이 지역을 부도심으로 계획한다. 부도심 지정 배경에는 같은 해인 1966년 1월에 착공되어 1969년 2월에 준공된 제3 한강교(현재의 한남대교) 건설과 앞서 설명했듯 1968년 2월에 착공되어 1970년 7월에 개통된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있었다. 이는 경부고속도로의 기점이 바로 현재의 한남대교 남단으로부터 시작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대통령 지시사항으로 서울시는 도로주변 용지 1686만㎡(510만평)을 ‘영동 제1지구 구획정리사업(1968년 2월 1일에 실시・인가)’으로 신속히 개발한다. 사업비는 저가에 매수한 토지를 구획정리한 후 체비지를 매각하는 방식으로 조달됐다. 서울시는 1970년 6월 16일 한수이남계획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강남 신시가지개발을 시작한다. 이 계획은 영동 제2지구 1207만㎡(365만평)과 잠실지구 582만㎡(176만평)에 새로운 계획도시 개발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재 강남의 모습은 이 때 갖춰졌다.

1960년대 압구정동 양지마을 [사진 강남구청]

한강 이남 건너 간 건 제비뿐, ‘특단의 조치’ 나와

전 방위적인 개발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중반까지는 강남 지역에 주택 건설이나 주거이동이 극히 부진했다. 아무 것도 없는 강남에 사람을 모으기란 쉽지 않았다. 지금은 상상하긴 어렵지만 당시는 아무리 강남에 가라고 해도 가지 않던 때였다. 강남은 기존 도심에서 너무 멀었고, 가봐야 허허벌판에 아파트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는 힘없는 공무원부터 강남으로 보냈다. 학교도 보냈다. 강남 8학군은 그렇게 탄생했다. 교통체증을 이유로 고속버스 터미널도 강남으로 옮긴다. 정부의 강남개발을 위한 개입은 억지에 가까웠다. 기존의 강북을 죽이면서 강남은 그렇게 생명력을 얻고 있었다. 

‘강남 완성’의 과정은 흥미롭다. 정리해보면, 대부분의 신도시가 아파트 먼저 짓고 그 나머지 기능들을 채워갔던 것에 비해 강남은 한남대교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결정하고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주거지를 채워 넣었다. 또한 연접개발을 유도하기 위한 특단의 지원책이 있었다. ‘베드타운’과 ‘비(非)베드타운’의 차이는 도시완성의 순서가 결정한 셈이다.

그럼 여기서 강남 이전을 유도한 ‘특정지구 개발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좀 살펴보자. 도대체 어떤 당근이 있었기에 강남으로 사람과 자본을 이동시켰을까.

1972년 12월 30일 법률 제2436호로 제정・공포된 ‘특정지구 개발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은 강남지구를 특정지구로 고시함과 동시에 1975년까지 해당지역에 영업세·등록세·취득세·재산세·면허세 등 세제상의 혜택을 주었다. 

민간 아파트 단지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우선 공공부분이 먼저 총대를 멨다. 1972년 거점개발전략으로써 서울시 공무원 아파트와 시영주택단지가 개발되는데 이는 민간개발을 유도하기 위한 마중물 사업이었다. 지금은 대부분 재건축으로 그때의 모습이 사라지거나 사라지고 있는 개포・압구정・청담・도곡・이수지구 아파트 단지가 모두 이때 건설됐다. 그러고 보면 강남은 신도시개발 이후 30년 만에 재건축으로 이미 다시 태어나고 있는 셈이다. 

1970년대 현대아파트 25동 앞의 모습 [사진 강남구청]

그리고 이 같은 강남의 급성장 배경에는 강북의 상대적 희생이 있었다. 이 당시는 남북관계가 적대적 대립관계였기 때문에 한강 이북지역은 ‘한수이북’이라고 부르면서 특별관리를 받게 된다.

그러던 차에 강북의 주요 학교, 기관들을 대거 강남으로 이전시키면서 대규모 주거단지개발까지 병행되자 강북지역은 상대적인 열세를 띨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아파트 위주의 대단위개발은 동질적인 중산층의 집단거주지로 인식되었고 강남지역의 개발과 성장을 위한 재정적 투자와 정책적 배려는 강북과의 뚜렷한 차이를 촉발시켰다.

강남이 격자형의 신세계로 변모하는 동안 강북의 도심 낙후지역과 사대문 밖 불량주택 밀집지역에는 도시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부족하게 됐고 이로 인해 도시기능의 쇠락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서울시 도시공간의 불균형은 이전보다 심화됐고 특히 주거지의 공간분화는 강남으로 무게중심을 보다 빨리 옮기는데 기여했다. 

주거지 분화와 관련해 동질적인 중산층의 집단 이주는 향후 해당 지역을 특별한 근린으로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강남이 신흥 주거지로 자리 잡아갈 때쯤 나온 유행어가 바로 “아직도 강북에 사십니까?”이다. 600년 도읍지로서의 강북 서울이 개발에 착수한지 불과 10여년도 지나지 않은 강남에 패권을 넘겨줄 때 만들어진 냉소적인 농담인 셈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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