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철 투자대표 “투자업계 힘들지만, 색깔 있는 투자사는 살아남는다” [이코노 인터뷰]
포스텍 1기 졸업생, 심사역 활동 20여 년 만에 포스텍 홀딩스 합류
“창업자에게 도움 줄 수 있는 심사역 되는 게 중요”
[이코노미스트 최영진 산업·ICT부 부장] 돌고 돌아 고향에 돌아왔다. 포스텍 산업공학과 1기 학사, 석사 졸업생은 1세대 스타트업 투자심사역으로 일하다가 지난해 5월 고향 같은 초기 전문투자기관 포스텍 홀딩스(포항공과대학교기술지주)에 합류했다. “마음이 편하다”고 말할 정도로 고향에 돌아온 그의 표정은 밝기만 하다. 고병철 포스텍 홀딩스 투자대표는 “2012년 포스텍 홀딩스가 설립될 때부터 투자심사위나 행사에 참여하면서 조금씩 도움을 줬던 곳이다”며 “합류할 때만 해도 익숙하다고 자신했는데, 실제 와보니 내 생각과 다른 게 많지만 다른 곳보다 훨씬 재미있게 일하고 있다”며 웃었다.
2012년 6월 설립된 포스텍 홀딩스는 초기 스타트업 투자사, 흔히 말하는 액셀러레이터다. 설립 후 4년 만에 중소벤처기업부 ‘팁스(TIPS) 프로그램’ 운영사로 선정되면서 업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민간투자주도형 기술창업지원(TIPS)’ 프로그램의 가장 큰 특징은 민간투자사의 투자금에 정부 모태펀드가 매칭된다는 것이다. 초기 스타트업엔 팁스에 선정되느냐 여부가 후속 투자 유치에 큰 영향을 끼친다. 액셀러레이터 또한 팁스 운영사로 선정되느냐 여부가 투자사로 성장을 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으로 꼽힌다. 포스텍 홀딩스는 4월 현재 129곳의 스타트업에 투자를 했고, 721억원의 투자금을 운용하는 투자사로 성장했다.
포스텍 홀딩스가 업계의 주목을 받는 이유가 있다. ‘포스텍’ 때문이다. 공대는 흔히 말하는 ‘랩’(연구실)을 중심으로 기술 개발이 이뤄진다. 교수와 소수의 학생이 하나의 프로젝트(목표)를 완성해 가는 모습은 흡사 스타트업과 비슷하다. 카이스트 출신 창업자들이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많은 역할을 하는 것처럼, 포스텍 역시 랩을 중심으로 창업 분위기가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고 투자대표도 포스텍의 랩을 주목하고 있다. 그는 “포스텍 홀딩스의 역할 중의 하나가 학교 발전에 기여하는 것인데, 포스텍에 있는 300여 개의 랩을 자세하게 살펴보고 있다”면서 “포스텍이 설립된 지 40년 가까이 되니까 랩에서도 수십년 동안 연구한 결과물들이 있고, 교수의 세대 교체도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다. 포스텍의 창업 활성화가 가능한 시기고, 포스텍 홀딩스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스타트업 투자 1세대로 꼽히는 그는 포스텍에서 학사와 석사를 딴 후 1993년 포스코ICT(현 포스코 DX)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다 2000년 투자 업계에 뛰어들었다. “기술이 너무 빠르게 변하고, 그 속도에 맞추는 게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평생 해볼 만한 일을 찾은 게 스타트업 투자 심사역이다.
2000년대 초반쯤 투자업계의 분위기도 변했다. 과거에 투자 심사역은 수치에 강한 경영학 전공자나 회계사 등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소재·부품·장비 분야와 ICT 분야에 대한 투자가 늘면서 기술을 이해하는 전공자를 필요로 하기 시작했다. 고 투자대표는 “투자업계는 내가 아는 지식을 가지고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닷컴 버블 꺼졌을 때보다 현 상황 좋아”
그가 심사역으로 활동을 처음 시작한 곳은 당시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투자사 KTB네트워크다. 280여 명의 사람들이 KTB네트워크에서 일하고 있을 정도였다. 고 투자대표는 “내가 심사역으로 일하기 시작할 때만 해도 투자사가 100여 곳이나 됐다. 그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곳이 KTB네트워크였다”면서 “규모가 큰 투자사니까 나의 핸디캡을 채워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포스텍 1기 졸업생이기 때문에 학교 선배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고, 심사역 경력도 없는 약점을 채우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변변한 투자 매뉴얼도 없는 상황에서 술자리에서 선배 심사역의 한마디 한마디를 기억해야 했고, 계약서 한번 써본 적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물어보고 해결해야 했다.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심지어 2001년 닷컴 버블이 꺼지면서 투자업계는 긴 침묵에 들어갔다. ‘심사역은 사기꾼’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업계는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고 투자대표는 그 시간을 버티면서 오히려 단단해졌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버티면서 18년을 KTB네트워크에서 심사역으로 일했다. 펀드 레이징을 직접 해봤고, 대표 펀드매니저 역할로 펀드를 직접 운용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를 믿어준 수많은 창업가가 그의 이력에 새겨졌다. “지금까지 몇 개의 스타트업에 투자했는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여전히 안부를 전하는 창업가들은 많다”면서 “심사역으로 오래 활동하려면 창업가에 대한 서운함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 창업가는 스타트업의 성장에 맞게 필요한 사람들이 달라질 수밖에 없고, 창업가가 만나는 심사역도 성장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스타트업 투자업계가 어렵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정부의 스타트업 지원 규모도 줄었다. 성장을 유지해야 하는 스타트업들도 투자 유치가 어려워지면서 힘들어하고 있다. 고 투자대표는 “투자업계가 힘들지만 닷컴 버블이 꺼지면서 닥친 상황과 비교하면 오히려 지금이 좋은 상황이다”라며 “이런 때일수록 심사역도 마찬가지고 투자사도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어야 한다. 자신이 색깔이 없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조언했다.
고 투자대표가 올해 주목하는 분야는 역시 인공지능(AI)이다. 포스텍 홀딩스의 포트폴리오 중에서도 AI 분야가 많은 편이다.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AI 시대에 대응을 하는 스타트업을 적극 발굴하고 이를 성장시키는 게 고 대표의 관심사다. 포스텍 홀딩스의 투자대표로서 해야 할 역할은 펀드 레이징이다. 고 투자대표는 “1년에 30여 곳의 스타트업에 투자할 수 있는 투자조합을 결성하는 게 내 역할”이라고 웃는다.
“요즘 심사역에 대한 관심이 높다. 수백억원의 인센티브를 받는 심사역들이 나오기 때문인 것 같다”라고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건넸다.
고 대표의 답변이다. 심사역이 되고 싶은 이에게 건네는 조언이기도 하다. “물론 그런 뉴스를 보면 부럽기는 한데, 내가 현장에서 심사역으로 일할 때는 인센티브 제도가 그렇게 많이 없었다. 그런 길을 가는 심사역이 있고, 나만의 스타일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일희일비하면 심사역을 하지 못한다. 심사역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 1~2시간 동안 창업자와 대화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창업가들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을 만나려고 한다. 창업가가 만나고 싶은 심사역이 되어야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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