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로 억압받던 1984..위기 속에서 찾은 기회
[이코노미스트 40년, 이동통신산업 40년]
짜장면 500원·어렵지만 희망 품던 시절
반도체·자동차 발전...정보통신 태동기
[이코노미스트 이지완 기자]‘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라는 말이 있다. 10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걸 4번이나 반복했다. 긴 시간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을지 가늠되지 않는다. 1984년 ‘푸른 쥐의 해’ 갑자년(甲子年)에 창간돼 국내 경제의 방향성을 제시했던 ‘이코노미스트’의 시간도 벌써 40년이 흘렀다.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다시 그 시절로 되돌아간다. 위기와 기회가 공존했던 그 시절을 되짚어 보면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우리의 미래를 조금은 더 안정적으로 대비할 수 있지 않을까.
힘들고 어려웠던 그 시절
1980년대는 위기와 기회가 공존했던 시기다. 1979년 제2차 석유 파동 여파와 국내 정치 불안 등이 맞물리면서 위태로웠다. 19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저금리·저유가·저달러 등의 영향으로 경제 성장에 속도가 붙었다. 일례로 1986년부터 3년간 연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은 11%를 상회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84년은 침체기에서 회복 및 성장기로 가는 과도기였다. 경제 상황은 좋지 않았고, 서민들의 생활은 어려웠다. 기업들은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한 혁신을 준비하고 있었다. 2024년 현재 고물가·고금리·국내외 정세 불안 등의 영향으로 서민들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기업들은 새로운 변화를 통해 다가올 미래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40년이라는 세월의 격차가 있지만 1984년과 2024년은 어떤 점에서 닮은 부분이 있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낯익은 것들도 눈에 보인다. 그해 처음 출시돼 현재까지 판매 중인 식료품들이 그렇다. 대표적으로 ▲농심 ‘짜파게티’ ▲동양제과(현 오리온) ‘고래밥’ ▲한국야쿠르트유업(2012년 계열 분리 팔도에서 판매) ‘팔도 비빔면’ ▲롯데제과 ‘칸쵸’ 등이 있다.
당시 물가는 어땠을까. 시대별 물가 흐름을 볼 때 자주 거론되는 것이 짜장면 값이다. 이를 보면 그 시절 상황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때 고급 음식으로 분류됐던 짜장면 한 그릇의 가격(한국물가정보 집계 기준)은 572원이었다. 현재 짜장면 한 그릇의 평균 가격은 7069원 정도다. 금값은 g당 1만517원, 쌀값은 80kg 기준 6만1428원이었다.
1984년 어린 시절을 보낸 지금의 5060세대는 당시를 회상하며 “찢어지게 가난했다”라고 말한다. 물론 그 시절을 보내지 않은 사람들은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100%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그해 1인당 국민총소득(Gross National Income·GNI)은 2300달러(약 317만원)에 불과했다. 국민총소득은 국민이 국내외 생산활동에 참여하거나 자산 제공을 대가로 받은 소득의 합계를 말한다. 국민 소득을 보다 정확하게 반영하기 위해 만든 경제지표다. 당시 한국의 GDP 수준은 세계 상위 50위 내에도 포함되지 못했다. 한국은 1987년 이후부터 50위권에 포함됐다.
소득 수준이 높은 그룹에 속하는 현대·럭키금성·삼성 등 대기업 신입의 월급(대졸 기준)은 29만원에서 30만원 사이였다. 이들을 제외하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당시 일용직 노동자의 일급은 500원에서 800원 사이였다. 하루 일하면 짜장면 한 그릇을 겨우 사 먹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지난해 기준 1인당 국민총소득인 3만3745달러(약 4646만원)와 비교하면 격차가 상당하다. 현재 일용직 노동자의 일당은 14만~18만원 정도다.
사회적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제5공화국, 당시 군부정권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던 시절이다. 12.12 군사 반란, 5.17 내란 등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이었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작품 ‘1984’도 떠오른다. 독재 권력 아래 저항하다 처참하게 사라지는 개인의 모습을 매우 비관적으로 그려낸 디스토피아(유토피아의 반대말) 소설이다.
해당 소설은 작가 조지 오웰이 1948년에 집필한 미래 소설이다. 전체주의(개인의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을 강조해 모든 영역에서 통제하는 것) 체제를 비판한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작가는 사회주의자였다. 작가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통치하기 원했던 소련식 체제에 회의감을 갖고 1984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교롭게도 1984년 한국의 모습은 이 소설과 비슷하다. 한국은 독재 정권 하에 통제당했다.
그 시절 지구촌엔 어떤 일이
1984년은 정치·사회·문화적으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굵직한 사건이 유독 많았다. 특히 군사정권 시절에 대항하기 위한 대학생들의 시위가 성행했다. 대표적인 사건은 ‘민정당사 농성 사건’이다. 1984년 11월 14일 전국민주화투쟁학생연합 소속 대학생 264명은 민주정의당 중앙당사를 기습 점거해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민주화를 외치며 노동악법 개정·선거법 개정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농성 약 12시간 만에 경찰병력 등의 투입으로 해산됐다.
대규모 인명 피해를 불러온 사상 최악의 자연재해도 있었다. ‘서울 대홍수’ 사건이다. 1984년 8월 31일 서울·경기·충청 일대에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태풍 준(June)의 영향으로 5일간 폭우가 계속된 것이다. 한강은 위험수위인 10.5m를 넘어섰다. 도로 곳곳이 침수됐고, 휴교령까지 떨어졌다. 이 사건은 사망자 189명·실종자 150여 명·재산 피해 1300억원·이재민 23만명이라는 최악의 결말을 불러왔다. 당시 인재의 요인이 많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 사건 직후 북한이 수재 복구를 위한 지원품을 보내겠다고 제의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보면 한일 관계 개선의 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4년 9월 6일부터 8일까지 2박 3일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합의 이후 대한민국 국가 원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일본을 공식 방문했다. 같은 해 7월 7일 한일 양국 외무장관들의 합의로 이뤄진 공식방문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총리가 1년 전 한국을 방문한 것에 대한 일종의 답방이었다.
외교부가 2015년 비밀 해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전두환 대통령과 일본에서 만난 히로히토 일왕은 “양국의 불행한 역사는 진심으로 유감이다.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식민지배의 상징인 일왕의 말이라 의미하는 바가 더욱 컸다.
이외에도 ▲88올림픽고속도로 개통(6월 2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5월 3~7일) ▲LA올림픽 종합순위 10위(7월 28일~8월 12일) ▲남북회담(11월 15일, 20일) ▲소련인 마투조크의 판문점 망명 사건(11월 23일) 등이 있었다.
그해 해외에서도 굵직한 사건·사고가 많았다. 16년간 인도를 이끌어온 인디라 간디 수상(66세)이 10월 31일 시크 교도 경호원들에 의해 암살됐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11월 6일 선거에서 압승하며 재선에 성공했다. 11월 12일에는 미국의 유인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가 세계 최초로 고장난 통신위성을 회수하는 데 성공하며 우주개발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12월 3일 인도 보팔시에서는 유니언 카바이드라는 다국적 기업의 살충제 공장에서 유독가스가 누출돼 2500여명이 사망했다.
글로벌 경제 강국으로 도약하는 첫걸음
경제적으로 보면 1984년은 대한민국의 성장을 위한 시동이 본격화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정부는 1981년 발표한 증권시장 국제화 계획을 차근차근 이행하고 있었다. 1984년 1월 재무부는 종합금융회사의 회사채 상장을 허용했다. 같은 해 8월에는 뉴욕 증권거래소에 코리아펀드가 상장됐다.
표류하던 부동산 신탁제도가 다시 기지개를 켠 것도 1984년이다. 당시 정부는 모든 시중은행에 신탁업 겸업을 처음 허용했다. 당시 전체 신탁 규모에서 부동산 신탁이 차지하는 비중은 0.0001%로 크지 않았다. 남에게 자신의 토지·자산을 관리 및 처분하게 하는 것이 생소했던 것이다.
1984년은 한국과 글로벌 기업의 반도체 격차를 단축한 시기다. 이전까지 10년 이상 벌어졌던 국내외 반도체 산업의 격차가 4~5년 수준으로 좁혀졌다고 업계는 평가한다. 그해 3월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성전자)은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에 대단위 초대규모집적회로(VLSI) 생산 공장을 준공했다. 국내 최초, 세계에서는 미국과 일본 다음으로 한국에서 가동한 첨단 반도체 공장이었다. 삼성반도체통신은 직전 해(1983년) 개발에 성공한 64K D램 반도체를 월 600만 개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삼성반도체통신은 당시 화폐가치로 1000억원을 투자해 기흥 공장을 완성했다. 그해 말 럭키금성의 반도체 회사인 금성반도체는 64K D램 양산 및 판매를 개시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미 삼성반도체통신과 금성반도체가 안착한 반도체 산업에 뛰어든 현대전자산업(현 SK하이닉스)도 빼놓을 수 없다. 1983년 설립된 이 회사는 1년 뒤인 1984년 경기도 이천에 반도체 1공장을 세웠다. 그해 말에는 자체 개발한 16K S램을 시범생산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대표 제조업 중 하나인 자동차도 1984년에 한 단계 도약했다. 독자 기술이 없던 현대자동차는 자체 개발한 첫 번째 자동차 ‘포니’로 글로벌 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1976년 1월 시판된 현대차 포니는 단일 차종 기준 국내 최초로 생산 대수 50만대를 돌파했다. 8년간 포니는 국내 36만5207대, 수출 15만3281대 등 총 51만8488대가 생산·판매됐다. 한국의 포니가 세계의 포니로 발돋움한 해였다. 그해 현대차는 총 1억6600만 달러의 승용차를 수출했다. 자동차를 제작하기 위해 수입한 부품액(납품계열사 포함) 1억3200만 달러보다 3400만 달러를 더 수출한 것이다. 국내 자동차 제조사로서는 처음으로 무역 흑자를 달성했다.
한국이 정보통신기술(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Technology·ICT)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된 해가 1984년이기도 하다. 당시 통신 불모지였던 한국에 이동통신 시대가 열렸다. 포문을 연 것이 한국이동통신서비스(현 SK텔레콤)다. 이 회사는 1984년 처음으로 카폰(차량 내 설치된 전화) 서비스를 공식 개시했다.
물론 글로벌 시장에서는 일찍이 카폰이 판매되기 시작했다. 세계 최초 타이틀은 미국 벨시스템(AT&T)이 갖고 있다. 우리 정부는 1960년대 들어서면서 정부 각료(장관) 관용차에 카폰을 도입했다. 당시 가격은 1000만원을 웃돌았다. 그로부터 약 20년 뒤 한국이동통신서비스가 내놓은 카폰의 가격은 400만원 수준이었다. 이전보다 가격이 많이 낮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가격 부담은 컸다. 당시 현대차 포니의 가격과 비슷했으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다소 무모했던 이 도전은 성공했다. 오늘날 SK텔레콤을 국내 1위 이동통신사업자로 도약하게 한 원동력이 됐다.
1984년은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현실이 됐다. 정확히 40년이 흐른 지금, 경제 위축·정치 갈등·세계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운 2024년. 과거에도 그랬듯 지금의 위기도 우리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힘들고 어려웠던 그 시절
1980년대는 위기와 기회가 공존했던 시기다. 1979년 제2차 석유 파동 여파와 국내 정치 불안 등이 맞물리면서 위태로웠다. 19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저금리·저유가·저달러 등의 영향으로 경제 성장에 속도가 붙었다. 일례로 1986년부터 3년간 연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은 11%를 상회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84년은 침체기에서 회복 및 성장기로 가는 과도기였다. 경제 상황은 좋지 않았고, 서민들의 생활은 어려웠다. 기업들은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한 혁신을 준비하고 있었다. 2024년 현재 고물가·고금리·국내외 정세 불안 등의 영향으로 서민들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기업들은 새로운 변화를 통해 다가올 미래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40년이라는 세월의 격차가 있지만 1984년과 2024년은 어떤 점에서 닮은 부분이 있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낯익은 것들도 눈에 보인다. 그해 처음 출시돼 현재까지 판매 중인 식료품들이 그렇다. 대표적으로 ▲농심 ‘짜파게티’ ▲동양제과(현 오리온) ‘고래밥’ ▲한국야쿠르트유업(2012년 계열 분리 팔도에서 판매) ‘팔도 비빔면’ ▲롯데제과 ‘칸쵸’ 등이 있다.
당시 물가는 어땠을까. 시대별 물가 흐름을 볼 때 자주 거론되는 것이 짜장면 값이다. 이를 보면 그 시절 상황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때 고급 음식으로 분류됐던 짜장면 한 그릇의 가격(한국물가정보 집계 기준)은 572원이었다. 현재 짜장면 한 그릇의 평균 가격은 7069원 정도다. 금값은 g당 1만517원, 쌀값은 80kg 기준 6만1428원이었다.
1984년 어린 시절을 보낸 지금의 5060세대는 당시를 회상하며 “찢어지게 가난했다”라고 말한다. 물론 그 시절을 보내지 않은 사람들은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100%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그해 1인당 국민총소득(Gross National Income·GNI)은 2300달러(약 317만원)에 불과했다. 국민총소득은 국민이 국내외 생산활동에 참여하거나 자산 제공을 대가로 받은 소득의 합계를 말한다. 국민 소득을 보다 정확하게 반영하기 위해 만든 경제지표다. 당시 한국의 GDP 수준은 세계 상위 50위 내에도 포함되지 못했다. 한국은 1987년 이후부터 50위권에 포함됐다.
소득 수준이 높은 그룹에 속하는 현대·럭키금성·삼성 등 대기업 신입의 월급(대졸 기준)은 29만원에서 30만원 사이였다. 이들을 제외하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당시 일용직 노동자의 일급은 500원에서 800원 사이였다. 하루 일하면 짜장면 한 그릇을 겨우 사 먹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지난해 기준 1인당 국민총소득인 3만3745달러(약 4646만원)와 비교하면 격차가 상당하다. 현재 일용직 노동자의 일당은 14만~18만원 정도다.
사회적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제5공화국, 당시 군부정권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던 시절이다. 12.12 군사 반란, 5.17 내란 등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이었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작품 ‘1984’도 떠오른다. 독재 권력 아래 저항하다 처참하게 사라지는 개인의 모습을 매우 비관적으로 그려낸 디스토피아(유토피아의 반대말) 소설이다.
해당 소설은 작가 조지 오웰이 1948년에 집필한 미래 소설이다. 전체주의(개인의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을 강조해 모든 영역에서 통제하는 것) 체제를 비판한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작가는 사회주의자였다. 작가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통치하기 원했던 소련식 체제에 회의감을 갖고 1984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교롭게도 1984년 한국의 모습은 이 소설과 비슷하다. 한국은 독재 정권 하에 통제당했다.
그 시절 지구촌엔 어떤 일이
1984년은 정치·사회·문화적으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굵직한 사건이 유독 많았다. 특히 군사정권 시절에 대항하기 위한 대학생들의 시위가 성행했다. 대표적인 사건은 ‘민정당사 농성 사건’이다. 1984년 11월 14일 전국민주화투쟁학생연합 소속 대학생 264명은 민주정의당 중앙당사를 기습 점거해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민주화를 외치며 노동악법 개정·선거법 개정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농성 약 12시간 만에 경찰병력 등의 투입으로 해산됐다.
대규모 인명 피해를 불러온 사상 최악의 자연재해도 있었다. ‘서울 대홍수’ 사건이다. 1984년 8월 31일 서울·경기·충청 일대에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태풍 준(June)의 영향으로 5일간 폭우가 계속된 것이다. 한강은 위험수위인 10.5m를 넘어섰다. 도로 곳곳이 침수됐고, 휴교령까지 떨어졌다. 이 사건은 사망자 189명·실종자 150여 명·재산 피해 1300억원·이재민 23만명이라는 최악의 결말을 불러왔다. 당시 인재의 요인이 많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 사건 직후 북한이 수재 복구를 위한 지원품을 보내겠다고 제의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보면 한일 관계 개선의 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4년 9월 6일부터 8일까지 2박 3일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합의 이후 대한민국 국가 원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일본을 공식 방문했다. 같은 해 7월 7일 한일 양국 외무장관들의 합의로 이뤄진 공식방문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총리가 1년 전 한국을 방문한 것에 대한 일종의 답방이었다.
외교부가 2015년 비밀 해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전두환 대통령과 일본에서 만난 히로히토 일왕은 “양국의 불행한 역사는 진심으로 유감이다.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식민지배의 상징인 일왕의 말이라 의미하는 바가 더욱 컸다.
이외에도 ▲88올림픽고속도로 개통(6월 2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5월 3~7일) ▲LA올림픽 종합순위 10위(7월 28일~8월 12일) ▲남북회담(11월 15일, 20일) ▲소련인 마투조크의 판문점 망명 사건(11월 23일) 등이 있었다.
그해 해외에서도 굵직한 사건·사고가 많았다. 16년간 인도를 이끌어온 인디라 간디 수상(66세)이 10월 31일 시크 교도 경호원들에 의해 암살됐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11월 6일 선거에서 압승하며 재선에 성공했다. 11월 12일에는 미국의 유인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가 세계 최초로 고장난 통신위성을 회수하는 데 성공하며 우주개발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12월 3일 인도 보팔시에서는 유니언 카바이드라는 다국적 기업의 살충제 공장에서 유독가스가 누출돼 2500여명이 사망했다.
글로벌 경제 강국으로 도약하는 첫걸음
경제적으로 보면 1984년은 대한민국의 성장을 위한 시동이 본격화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정부는 1981년 발표한 증권시장 국제화 계획을 차근차근 이행하고 있었다. 1984년 1월 재무부는 종합금융회사의 회사채 상장을 허용했다. 같은 해 8월에는 뉴욕 증권거래소에 코리아펀드가 상장됐다.
표류하던 부동산 신탁제도가 다시 기지개를 켠 것도 1984년이다. 당시 정부는 모든 시중은행에 신탁업 겸업을 처음 허용했다. 당시 전체 신탁 규모에서 부동산 신탁이 차지하는 비중은 0.0001%로 크지 않았다. 남에게 자신의 토지·자산을 관리 및 처분하게 하는 것이 생소했던 것이다.
1984년은 한국과 글로벌 기업의 반도체 격차를 단축한 시기다. 이전까지 10년 이상 벌어졌던 국내외 반도체 산업의 격차가 4~5년 수준으로 좁혀졌다고 업계는 평가한다. 그해 3월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성전자)은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에 대단위 초대규모집적회로(VLSI) 생산 공장을 준공했다. 국내 최초, 세계에서는 미국과 일본 다음으로 한국에서 가동한 첨단 반도체 공장이었다. 삼성반도체통신은 직전 해(1983년) 개발에 성공한 64K D램 반도체를 월 600만 개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삼성반도체통신은 당시 화폐가치로 1000억원을 투자해 기흥 공장을 완성했다. 그해 말 럭키금성의 반도체 회사인 금성반도체는 64K D램 양산 및 판매를 개시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미 삼성반도체통신과 금성반도체가 안착한 반도체 산업에 뛰어든 현대전자산업(현 SK하이닉스)도 빼놓을 수 없다. 1983년 설립된 이 회사는 1년 뒤인 1984년 경기도 이천에 반도체 1공장을 세웠다. 그해 말에는 자체 개발한 16K S램을 시범생산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대표 제조업 중 하나인 자동차도 1984년에 한 단계 도약했다. 독자 기술이 없던 현대자동차는 자체 개발한 첫 번째 자동차 ‘포니’로 글로벌 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1976년 1월 시판된 현대차 포니는 단일 차종 기준 국내 최초로 생산 대수 50만대를 돌파했다. 8년간 포니는 국내 36만5207대, 수출 15만3281대 등 총 51만8488대가 생산·판매됐다. 한국의 포니가 세계의 포니로 발돋움한 해였다. 그해 현대차는 총 1억6600만 달러의 승용차를 수출했다. 자동차를 제작하기 위해 수입한 부품액(납품계열사 포함) 1억3200만 달러보다 3400만 달러를 더 수출한 것이다. 국내 자동차 제조사로서는 처음으로 무역 흑자를 달성했다.
한국이 정보통신기술(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Technology·ICT)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된 해가 1984년이기도 하다. 당시 통신 불모지였던 한국에 이동통신 시대가 열렸다. 포문을 연 것이 한국이동통신서비스(현 SK텔레콤)다. 이 회사는 1984년 처음으로 카폰(차량 내 설치된 전화) 서비스를 공식 개시했다.
물론 글로벌 시장에서는 일찍이 카폰이 판매되기 시작했다. 세계 최초 타이틀은 미국 벨시스템(AT&T)이 갖고 있다. 우리 정부는 1960년대 들어서면서 정부 각료(장관) 관용차에 카폰을 도입했다. 당시 가격은 1000만원을 웃돌았다. 그로부터 약 20년 뒤 한국이동통신서비스가 내놓은 카폰의 가격은 400만원 수준이었다. 이전보다 가격이 많이 낮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가격 부담은 컸다. 당시 현대차 포니의 가격과 비슷했으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다소 무모했던 이 도전은 성공했다. 오늘날 SK텔레콤을 국내 1위 이동통신사업자로 도약하게 한 원동력이 됐다.
1984년은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현실이 됐다. 정확히 40년이 흐른 지금, 경제 위축·정치 갈등·세계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운 2024년. 과거에도 그랬듯 지금의 위기도 우리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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