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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AI 기술 규제’ 강화…이면엔 ‘종속 우려’

[디지털 장벽 쌓는 세계]④
글로벌 기업 없는 유럽, 이용자 보호 필요성↑
英·美 표준 선점 위해 '따로 또 같이'

지난 5월 22일 열린 AI 정상회의서 공동 브리핑하는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장관과 미셸 도넬란 영국 과학혁신기술부 장관 모습. [사진 연합뉴스]

[이코노미스트 이병희 기자] “AI 규제법 이면에는 헤게모니 싸움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유럽연합(EU)이 지난 5월 21일(현지시간) 세계 최초로 인공지능(AI) 규제법인 ‘AI법(AI Act)’을 최종 승인했다. 이 법의 통과 의미를 묻는 질문에 김명주 서울여자대학교 정보보호학부 교수는 ‘헤게모니’를 강조했다. 김 교수는 “나라마다 자국 AI 이용자를 보호하고 데이터 주권을 강화하는 것을 중요한 이유로 내세우고 있다”며 “앞으로 AI 산업이 발전하는 상황에서 주도권을 누가 쥘 것인지를 두고 경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내로라하는 AI 기업은 없지만 이 산업을 컨트롤하는 패권 싸움에서 우위를 선점하고 특정 국가나 기업에 종속되지 않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AI법은 해당 법은 AI 활용 위험도를 크게 네 단계로 나눠 규제 정도를 달리한다. ▲수용 불가능한 위험 ▲고위험 ▲제한된 위험 ▲최소 위험 등이 있다. 경찰 등 법 집행기관이 실시간 원격 생체인식 시스템을 사용하는 행위는 ‘수용 불가능한 위험’ 등급으로 분류한다. 테러나 납치·강간 등 심각하고 긴급한 범죄에만 예외적으로 허용한다. 안면 인식처럼 인터넷이나 폐쇄회로(CC)TV로 얼굴 이미지를 수집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행위도 금지된다.

의료나 교육, 채용, 선거, 핵심 인프라, 자율주행 등에 사용되는 AI는 ‘고위험 등급’에 해당한다. 이 분야에서 AI 기술을 활용하려면 반드시 사람이 감독해야 한다. 또 위험 관리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제한된 위험’과 ‘최소 위험’ 등급을 받은 분야에서는 기업에 ‘투명성 의무’를 부여했다. AI 학습에 투입한 데이터 출처를 명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AI가 만든 영상이나 이미지, 소리에도 AI가 만들었다는 ‘표시’를 분명히 해야 한다.

마티유 미셸 벨기에 디지털 장관은 “EU에 중요한 이정표”라며 말했다. 그는 “이 법을 통해 유럽은 신기술을 다룰 때 신뢰와 투명성, 책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며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이 더욱 발전하고 유럽의 혁신을 촉진할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이라고 했다.

눈여겨 볼 점은 현재 전 세계 AI 주도권을 쥔 기업들 대부분이 미국 기업이라는 점이다. 유럽에 뿌리를 둔 AI 기업 가운데서는 두각을 나타내는 곳이 많지 않다. 그런데도 27개국이 회원국으로 있는 EU는 어느 나라보다 빨리, 그리고 세세한 규제를 담은 AI법을 내놓은 셈이다. AI법을 어길 경우 글로벌 매출의 7%에 해당하는 벌금(상한 3500만 유로)을 낼 수 있도록 했고, 집행위 연결총국 산하에 ‘AI 사무소’를 신설해 AI법 집행을 총괄하도록 하고 있다.

AI법이 다음 달 EU 27개 회원국에서 정식 발효되면 6개월 뒤부터 금지 대상 AI 규정이 우선 시행된다. 1년 뒤에는 범용인공지능(AGI)에 대한 규제가 시행된다. 2026년 중반부터는 전면 시행될 예정이다.
오픈AI의 첫 개발자 회의에 함께 무대에 오른 오픈AI의 CEO 샘 올트먼(왼쪽)과 MS CEO 사티아 나델라 모습.[사진 AP=연합뉴스]

英 ‘블레츨리 선언’‧美 ‘AI 행정명령’…표준 선점 위해 맞손

EU를 탈퇴한 영국은 독자적으로 AI에 대한 관리‧규제를 주도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지난해 11월 영국에서는 ‘AI 안전 정상회의’를 열었다. 전 세계 28개국 대표를 비롯해 MS, 메타 등 글로벌 기업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는 ‘블레츨리 선언’이 발표돼 눈길을 끌었다. AI 위험성을 평가하고 관리하기로 합의한 이 선언에서는 AI가 생화학 무기처럼 위험한 기술을 개발하는 데 쓰이지 않도록 안전성 관리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이 밖에 AI의 편향성이나 생성형 AI가 만든 가짜 이미지‧영상 등이 문제가 되는 부분도 지적했다.

2023년 10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AI 행정명령’을 내렸다. 각 연방기관이 AI 사용을 지도하고 기술에 대한 보호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이를 통해 미국은 AI 전문 지식을 갖춘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일할 수 있도록 연방기관들이 지원하는 방안도 권장하고 있다.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의 자금 지원을 받는 국가 AI 연구소 25곳 외에도 추가로 4곳을 설립할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영국과 미국 양국은 한발 더 나아가 AI 기술의 안전성을 시험하는 방안을 개발하는 데 협력하기로 했다. 지난 4월 미국 상무부와 영국 과학혁신기술부는 AI 기술의 안전성, 위험성 등을 평가하고 시험하기 위한 방안을 개발하는 데 협력한다는 내용의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향후 양국은 연구원을 파견해 AI 기술 및 지식 등을 교류할 방침이다. 또 민간 AI 모델을 자체적으로 평가하는 방법 등에 대해서도 협력할 예정이다.

일각에서는 세계 각국이 AI 규제 깃발을 들고 나선 것도, 미국과 영국이 손을 맞잡은 것도 ‘표준’을 선점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한다. 특정 국가가 AI에 관한 국제 표준을 만들 수 있다면 자국에 유리한 규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미래에 AI가 단순한 일상생활을 벗어나 국가 안보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움직임은 당연한 결과라는 해석이다. 김명주 교수는 “미국과 영국의 이런 AI 관련 규제가 큰 틀에서 EU와 마찬가지로 AI 산업의 주도권을 가지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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