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이래서는 ‘기록의 민족’도, ‘IT 강국’도 없다 [EDITOR’S LETTER]

[이코노미스트 권오용 기자] 우리는 세계가 인정한 ‘기록의 민족’입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팔만대장경’(2007년)과 ‘조선왕조실록’(1997년)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은 고려가 거란과 몽골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내자는 뜻에서 만들어졌는데요, 불경을 새긴 목판 8만1258판(280톤)이 7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있습니다. 불가사의한 일이 가능한 데는 선조들의 지혜와 노력이 있었는데요, 목판을 바닷물에 1~2년 담가 뒀다가 소금물에 삶고 건조해 갈라지고 비틀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옻칠로 방충까지 신경을 썼습니다. 보관 장소인 해인사 장경판전도 햇빛·바람·습기 등이 목판 보존에 최적의 환경이 되도록 설계했는데 지금의 과학자들도 놀라워합니다. 해인사가 가야산의 깊은 산속에 있어 임진왜란·한국전쟁 등 숱한 전쟁을 피할 수 있었던 것도 팔만대장경을 지금도 볼 수 있는 이유입니다.
조선왕조실록도 우리 민족의 기록과 보존의 세계적인 역량을 보여줍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제1대 태조부터 제25대 철종까지 472년(1392~1863)간 정치·경제·외교·군사·법률·산업·예술·종교 등을 연대기 순으로 정리해 편찬한 공식 국가 기록이라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전란·화재 등에도 600년 넘게 보존·관리돼 왔다는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선조들이 혹시 모를 불의의 사고에 대비한 자세가 빛났는데요, 실록을 한양의 춘추관 사고와 함께 지방 여러 외사고에 분산해서 보관해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특히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사고가 불탄 상황에서 전주사고본이 유일하게 남았던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이후에는 또다시 실록이 소실되는 일이 없도록 접근이 어려운 오대산·태백산·묘향산·마니산 등에 외사고를 마련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습니다.
선조들은 종이와 나무로 만든 기록조차 수백 년 지켜냈는데, 우리는 첨단 기술로 만든 디지털 기록조차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 국가정보자원관리원(국정자원) 대전 본원 화재로 인해 정부 전산망이 마비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디지털 정부’ ‘IT 강국’이라는 자부심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배터리 1개에서 튄 불똥으로 인터넷우체국·정부24·국민비서·모바일 신분증 등 정부의 전산 시스템 674개가 먹통이 돼 추석 연휴를 앞둔 국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습니다. 이런 불상사에 대비해 서버 이중화가 이뤄져 바로 재가동이 돼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은 이른바 ‘디지털 외사고’를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록의 민족, IT 강국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인데요, 문제는 또 있습니다. SK텔레콤·KT·롯데카드 등 주요 기업들이 연이어 해킹을 당하며 대규모 고객 정보가 털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이 해커들의 놀이터로 전락했다는 우려까지 나옵니다.
국가의 전산망은 불타고 기업의 보안은 뚫리는 지금의 상황으로는 기록의 민족, IT 강국이라는 명성을 지킬 수 없으며, AI 시대를 선도하기는커녕 생존도 힘들 것입니다. 앞으로 더 복잡해지고 고도화될 디지털 시대에 대비해 근본적이고 체계적인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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