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탕감과 방어 사이…‘질서 있는 퇴로’ 만들어 금융 혼란 막는다
- [연체율의 역습]②
4대 은행 대손충당금 전년 比 35% 증가…부실 방어막 구축
기업 신용평가 25년 만에 개편, 370만명 신용사면 두고 ‘역차별’ 논란도
[이코노미스트 이병희 기자] 연체율이 16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으면서 서민 경제와 금융권에도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단순히 대출금이 밀리는 수준을 넘어 자칫 금융 시스템에 충격을 주는 상황까지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정부와 은행권은 서민 경제의 붕괴를 막기 위한 ‘지원’과 금융사의 건전성을 지키는 ‘방어’ 두 갈래 전략을 동시에 가동했다. 이른바 ‘질서 있는 퇴로’를 만들고 있다는 뜻이다.
은행권 사상 최고 수준 이익에 ‘비상금’ 방어막 구축
은행권은 최근 몇 년간 이어온 사상 최고 수준의 이익을 향후 발생할지 모를 부실채권에 대비하기 위해 대손충당금을 확보했다. 대손충당금이란 대출금을 돌려받지 못할 것에 대비해 미리 쌓아두는 준비금을 말한다. 최악의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예금 대량 인출 사태(뱅크런)나 금융 마비를 막기 위한 선제적인 방어막으로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 4대 은행(KB국민·신한·우리·하나)의 지난해 3분기 누적 충당금 전입액은 2조3899억원으로 집계됐다. 2024년 같은 기간 누적 충당금 전입액이 1조7674억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35.2% 늘어난 수준이다.
하나은행(64.9%)과 신한은행(62.3%)은 전년 대비 60%가 넘는 증가율을 보였다. 하나은행의 충당금 전입액은 3620억원으로 1년 전보다 1425억원 늘었고, 신한은행 누적 충당금 전입액은 같은 기간 3157억원에서 5124억원으로 증가했다. 우리은행과 KB국민은행도 충당금 적립 규모를 확대했다. 우리은행은 8090억원으로 전년 동기(6420억원) 대비 26.0%, 국민은행은 5902억원에서 7065억원으로 19.7% 늘렸다.
이는 정부가 지난해 가계대출 총량 규제를 강화하면서 은행들이 기업대출을 확대한 데 따른 영향이라는 분석이다. 가계대출의 경우 대부분 주택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신용위험 관리가 수월한 반면, 기업의 경우 상대적으로 관리가 까다롭다. 이 때문에 은행권이 먼저 나서 충당금을 적립했다는 분석이다. 금융감독원은 “건설업과 지방 부동산을 중심으로 부실이 확대될 우려가 있다”며 은행권에 적극적인 관리를 주문하고 있다.
정부도 제도 개선에 속도를 내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기업 구조조정의 잣대인 신용위험평가(금융사가 기업의 부실 위험을 미리 파악하기 위해 실시하는 평가) 체계를 25년 만에 개편하기로 했다. 기존에는 ▲A(정상) ▲B(부실 징후 가능성) ▲C(워크아웃) ▲D(기업회생) 4단계였는데, 이 가운데 B등급을 세분화해 ‘B’와 ‘B-’로 나누는 5단계 체계를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평가 체계를 5단계로 세분화한 것은 부실 징후가 보이기 시작하는 B등급 기업 중에서도 특히 위험한 ‘B-’군을 따로 관리해, 이들이 워크아웃이나 회생 절차로 넘어가기 전에 선제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다. 정부는 기업구조조정촉진법(기촉법)의 상시법 전환도 염두에 두면서 부실이 더 커지기 전에 ‘사전 구조조정’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려 하고 있다.
정부는 민생 경제를 살리기 위해 ‘신용 사면’도 추진했다. 통상 연체 이력이 있는 차주들은 신용도가 떨어져 다시 은행에서 자금을 빌릴 때 높은 금리를 적용받는데, 5000만원이하 소액 연체 채무를 전액 상환한 최대 370만명에 대해 연체 기록을 삭제해 주는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이를 통해 약 29만명의 신용카드가 새로 발급되고, 23만명이 은행권 신규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됐다는 평가다.
취약 계층과 소상공인 빚 탕감을 위해 배드뱅크(장기 연체 채권 처리 기구) ‘새도약기금’도 출범시켰다. 7년 이상 연체된 5000만원 이하의 무담보 빚을 진 금융 취약층과 개인 자영업자의 대출을 탕감해 주는 게 핵심이다. 채무조정 대상 연체채권 규모는 약 16조4000억원, 수혜자는 113만4000명으로 추정된다.
새도약기금이 매입한 채권은 즉시 추심이 중단된다. 새도약기금은 채권 매입 후 관계 부채 행정 데이터를 활용해 소득·재산 심사를 실시하고 이를 기반으로 소각 또는 채무조정을 결정한다. 채무에 비해 상환 능력이 현저히 부족한 경우에는 원금을 최대 80% 감면하고, 10년간 분할 상환할 수 있게 해주는 등 파격적 채무조정을 해준다.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지난해 9월 취임 후 첫 은행장들과의 간담회에서 “장기 연체 채권 채무조정 프로그램에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또 “금융권 입장에서도 경제 활동 인구가 늘고, 그런 기반을 통해 건전성 제고의 길로 갈 수 있다”며 “선순환이 이뤄지는 방향으로 방법론을 고민하며 유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용사면‧부채 탕감에 포퓰리즘 논란도
다만 일각에서는 정부 정책이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 성격을 띠는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무조건적인 부채 탕감 정책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꼬박꼬박 빚을 갚아온 성실 상환자들에게 허탈감을 주고, 실제 신용 리스크가 반영되지 않는 ‘신용점수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해 7월 충청 타운홀 미팅에서 “7년 동안 신용불량자로 살며 경제 활동을 못 하는 것을 방치하는 것이 국가에 더 손해”라며 “차라리 못 갚는 게 확실한 채권은 탕감해 정상적 경제 주체로 복귀시키는 것이 사회 전체로 보면 타당하다”고 말했다.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은행권은 정보통신(IT)과 인공지능(AI)을 동원한 정밀한 ‘옥석 가리기’에 돌입했다. 과거에는 일률적인 기준으로 지원 대상을 정했다면, 이제는 데이터를 분석해 ▲일시적 자금난을 겪고 있어 지원 시 회생 가능한 차주 ▲지속 가능성이 없어 냉정하게 정리해야 할 부실 차주를 선별해 지원에 차등을 둔다는 것이다.
은행권 관계자는 “상생 금융 등 정부 정책에 발맞추기 위해 부채 일부를 탕감하고 금리를 낮추고 있지만, 성실한 차주들이 박탈감을 느끼지 않도록 ‘핀셋 정책’(특정 대상을 정밀하게 겨냥한 정책)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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