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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사막, 스토리 대신 탐험으로 증명한 ‘주객전도의 묘미’[해봤어요]
[이코노미스트 원태영 기자]출시 전까지만 해도 ‘K-게임의 자존심’이자 글로벌 기대작으로 손꼽혔던 펄어비스의 ‘붉은사막’.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었을 때 돌아온 초기 반응은 냉담했다. 난해한 스토리 전개와 손에 익지 않는 복잡한 조작 체계는 유저들에게 거대한 장벽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출시 후 시간이 흐르며 기류가 변하고 있다. 메인 퀘스트의 압박에서 벗어나 광활한 ‘파이웰’ 대륙을 제멋대로 누비기 시작한 유저들 사이에서 “진정한 재미는 이제부터”라는 호평이 터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주객이 전도된 듯한 이 묘한 매력의 실체를 직접 체험해 봤다.
기대와 실망 사이, 차가웠던 첫인상
붉은사막의 시작은 다소 불친절했다. 펄어비스가 공들여 만든 독자 엔진 ‘블랙스페이스 엔진’의 압도적 그래픽은 눈을 즐겁게 했지만, 서사는 파편화돼 있었다. 주인공 ‘클리프’와 용병단의 이야기는 유저들을 단숨에 몰입시키기에 다소 무거웠고, 연출의 템포 역시 기존 선형적 RPG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이었다.
특히 각각의 스토리는 이어진다는 느낌보다는 따로 논다는 느낌이 강했다. 후반에 가면 스토리가 어느정도 연결고리를 보이지만, 이른바 트리플A 게임에 익숙해진 유저들의 눈높이를 만족시키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다.
더 큰 문제는 조작이다. 버튼 조합에 따라 수십 가지 액션이 파생되는 시스템은 액션의 깊이를 더해주지만 초보자들에게는 ‘손가락 꼬임’을 유발하는 고역이었다. 초반 튜토리얼 구간에서 적응하지 못한 유저들이 “피로감이 너무 높다”며 이탈하는 현상도 적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붉은사막은 화려한 겉모습에 비해 내실이 부족하다는 혹평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반전은 ‘적응’에서 시작됐다. 조작의 벽을 넘어서자, 펄어비스 특유의 타격감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단순히 타이밍에 맞춰 버튼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지형지물을 이용하고 적의 빈틈을 파고드는 감각이 몸에 익으면서 게임의 인상이 180도 달라졌다.
유저들은 더 이상 메인 스토리의 개연성을 따지며 골몰하지 않게 됐다. 대신 고도로 설계된 물리 엔진이 만들어내는 우연한 상황들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각종 레슬링 기술로 적을 농락하고 여러 기어를 조합한 화려한 전투 등 자유도 높은 액션이 자리를 잡으며 ‘조작의 불편함’은 어느덧 ‘숙련의 재미’로 치환됐다.
메인 퀘스트는 거들 뿐, 탐험이 곧 콘텐츠
붉은사막의 진가는 메인 시나리오라는 궤도를 이탈했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파이웰 대륙은 단순히 넓은 공간이 아니라, 유저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수만 가지 요소로 가득 찬 거대한 놀이터다.
길을 가다 우연히 발견한 비밀통로가 거대한 지하 던전 탐험으로 이어지고, 낡은 유적에서 희귀한 보물을 발견하는 과정은 메인 스토리 이상의 성취감을 준다. 유저들은 “메인 스토리를 진행하는 것보다, 오늘 내가 우연히 발견한 비밀 상자가 더 즐겁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오픈월드 곳곳에 숨겨진 환경 요소들은 탐험의 맛을 더한다. 날씨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생태계,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물리 효과는 유저가 그 세계의 일부가 된 듯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억지로 부여된 목적지가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저 산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서 발걸음을 옮기게 만드는 힘. 이것이 붉은사막이 보여주는 진정한 오픈월드의 정수다.
현재 붉은사막은 출시 초기보다 더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스토리가 주는 감동은 덜할지언정, ‘모험’ 그 자체에서 오는 원초적인 재미가 유저들을 다시 불러모으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게임이 반드시 탄탄한 서사를 갖춰야만 성공한다는 공식을 깨는 이른바 ‘주객전도의 성공 사례’라 할 만하다.
펄어비스는 유저들의 피드백을 수용하며 조작감을 개선하고, 탐험의 깊이를 더하는 업데이트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스토리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하지만, 그 빈자리를 압도적인 탐험의 재미로 채워낸 붉은사막은 이제 단순한 게임을 넘어 하나의 ‘세계’로 인정받고 있다.
누군가는 여전히 불친절한 게임이라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목적지 없는 여행을 즐기는 모험가들에게 붉은사막은 현재 가장 완벽한 목적지다. 메인 스토리가 거드는 수준이라면 어떠한가. 그 너머에 펼쳐진 파이웰의 대륙이 이토록 눈부시게 살아 숨 쉬고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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