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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자산기본법, 그릇과 음식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스페셜리스트 뷰]
- 글로벌은 ‘자산 본질’로 나누는데 韓은 ‘금융’으로 묶어
사권 빠진 입법…소유·담보·도산 정립 없으면 시장 신뢰 흔들린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질문은 빠져 있다. 이 법은 무엇에 관한 ‘기본법’이어야 하는가. 스테이블코인 발행 자격, 거래소 대주주 지분율 한도, 은행 컨소시엄 51% 룰 같은 세부 규제 논쟁의 그늘에 가려, 디지털자산의 법적 본질과 그에 부합하는 규율 구조에 대한 근본적 진단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기본법은 본래 한 영역의 정의·분류·기본 원칙·관할 분담을 정리하는 법이다. 한국의 「디지털자산기본법」은 그 본래 역할을 하고 있는가.
먼저 명확히 해야 할 것이 있다. 디지털자산은 그 자체로 금융상품이 아니다. 분산원장에 전자적 형태로 표상된 가치 또는 권리일 뿐이다. 무엇을 기반으로 하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진다. 법정통화에 연동되면 결제 수단이 되고, 증권을 기초로 하면 투자상품이 되며, 부동산이나 미술품을 기반으로 하면 실물자산의 성격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토큰화는 자산의 형식을 바꾸는 기술이지, 본질을 바꾸는 기술이 아니다.
이 원칙은 이미 국내 정책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금융당국이 토큰증권 가이드라인에서 제시한 “그릇이 바뀌어도 음식은 바뀌지 않는다”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그 이후다. 비증권 자산까지 금융 규제 틀 안에 일괄 편입하려는 현재 입법 방향은 이러한 원칙과 충돌한다는 점에서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다.
같은 디지털자산이라 하더라도 사용 목적에 따라 법적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결제에 사용되는 비트코인과 투자 대상으로 보유되는 비트코인은 동일한 자산이지만 규율 방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를 하나의 법 체계로 묶는 것은 기술 기반 자산의 다양성을 과도하게 단순화하는 접근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결국 출발선에서부터 잘못된 전제를 놓고 설계를 시작한 셈이다.
글로벌은 이미 결론 냈다…‘본질별 분리 규율’
해외 주요국의 디지털자산 입법 공통 기조는 ‘자산 본질에 따른 분리 규율’이다. 미국은 지난해 7월 「GENIUS법」으로 결제용 스테이블코인의 연방 규제 체계를 처음 마련했다. 그러나 이 법의 핵심은 발행인 인가나 100% 준비자산 의무가 아니다. 결제 스테이블코인을 연방 증권법상 ‘증권’ 정의와 상품거래법상 ‘상품’ 정의에서 명시적으로 제외시킨 점이다. 결제 기능을 수행하는 토큰은 SEC가 아니라 재무부와 OCC가 감독한다. 자산의 경제적 실질에 따라 주관 부처를 달리한 것이다.
시장구조 입법인 「CLARITY법」 역시 같은 사고방식 위에 서 있다. 이 법은 SEC와 CFTC의 관할을 자산 성격별로 명확히 나누어, 디지털 상품 현물시장은 CFTC가, 투자계약자산은 SEC가 관할하도록 한다. 같은 시기 SEC 의장 폴 앳킨스는 ‘Project Crypto’를 선언하며 “과거 SEC가 무어라 말했건, 대다수 암호자산은 증권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토큰을 ▲디지털 상품(network token) ▲디지털 수집품(NFT 등) ▲디지털 도구(회원권·티켓·신분증 등 실용 토큰) ▲토큰화된 증권 등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며, 이 중 마지막만이 증권법 적용 대상이라고 못 박았다. 핵심 원리는 “경제적 실질이 형식적 명칭에 우선한다(Economic reality trumps labels)”는 것이다. 같은 분산원장 위의 토큰이라도 그것이 무엇을 표상하느냐에 따라 적용 법률을 달리해야 한다는 사고가 이제 미국 증권 규제 당국의 공식 입장이 됐다.
유럽연합(EU)의 「MiCA」도 같은 사고방식이다. 흔히 EU의 단일 규제로 알려져 있지만, MiCA는 자산을 ▲전자화폐토큰(EMT) ▲자산준거토큰(ART) ▲기타 암호자산의 세 유형으로 나누어 차등 규율한다. EMT는 신용기관·전자화폐기관만 발행할 수 있고, ART는 별도 인가를 거치며, 기타 암호자산은 백서 발행 등 비교적 완화된 규율을 받는다. 게다가 금융상품에 해당하는 토큰은 아예 MiCA 적용 대상이 아니며, 기존 MiFID II 등으로 별도 규율된다. EU 역시 “디지털자산은 곧 금융상품”이라는 일원적 접근을 명시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일본은 더 분명하다. 다카이치 내각은 2026년 4월 가상자산을 결제서비스법에서 금융상품거래법으로 이관하는 안을 의결했다. 가격 변동 수익을 기대하는 투자성 암호자산을 증권법에 준해 규율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NFT는 금융 규제에서 제외했고, 결제용 스테이블코인은 결제서비스법에 잔존시켰다. 일본 금융청은 “NFT의 성격은 다양하므로 일률적으로 금융 규제 대상으로 삼는 데에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송금·결제 목적 자산은 결제서비스법 체제로 규율함이 더 적합하다”고 했다. 같은 디지털자산이라도 사용 목적과 경제적 실질에 따라 적용 법률을 달리한 것이다.
요컨대 미국·EU·일본은 모두 같은 결론에 이른다. 디지털자산은 본질에 따라 분류돼야 하고, 분류에 따라 적용 법률과 주관 기관이 달라야 한다. 이것이 글로벌 표준이다.
가장 중요한 누락 — 사권(私權)의 정립
여기까지 오면 한국 입법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누락이 드러난다. 디지털자산의 사권(私權), 즉 소유·이전·담보·도산·선의취득 등의 민사법적 정립이다. 이 문제는 자본시장법으로 풀 수 없고, 풀어서도 안 된다. 거래소 인가, 발행 공시, 시세조종 금지 같은 규율을 아무리 촘촘히 짜더라도 디지털자산이 도난·횡령·압류·도산 절차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는지가 정해지지 않으면 시장 신뢰는 결코 안정되지 않는다.
이 영역의 가장 권위 있는 국제 기준은 사법(私法) 통일을 위한 국제기구 UNIDROIT가 2023년 5월 채택한 「디지털자산과 사법(私法)에 관한 원칙」이다. 19개 원칙으로 구성된 이 문서는 디지털자산을 재산권의 객체로 인정하고, 점유와 유사하지만 동일하지 않은 ‘지배(control)’ 개념을 도입했다. 비밀 키 보유자의 배타적 통제력에 법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 원칙 위에서 선의취득, 담보권 설정과 우선순위, 수탁자의 의무, 도산 시 처리 등 사권의 기본 구조가 제시된다. 분명한 점은 이것이 금융 규제법이 아니라 사법(私法) 영역의 가이드라인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자산을 ‘재산권의 객체’로 인정할지는 본래 그 나라 민법의 영역이지, 금융감독기관이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UNIDROIT 원칙을 가장 먼저 입법화한 나라가 영국이다. 영국 의회는 2025년 12월 「Property (Digital Assets etc) Act 2025」를 제정하여, 전통적 재산권 분류인 점유물(things in possession)·권리물(things in action)에 더해 디지털자산을 위한 ‘제3의 인격적 재산권 카테고리’를 신설했다. 짧은 단일 조문으로 “디지털 또는 전자적 성질의 물건이 점유물도 권리물도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인격적 재산권의 객체에서 배제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로써 디지털자산 보유자는 도난 시 회복 청구권을 분명히 가지게 되었고, 담보 활용과 도산 처리의 기초도 마련됐다. 주목할 점은 이 입법을 법무부와 법률위원회가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시장이 가장 우려하던 디지털자산의 소유권 문제를, 영국은 금융 규제가 아니라 사법(私法) 개혁으로 풀어냈다.
우리 대법원도 이미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비트코인을 “경제적 가치를 지닌 전자적 증표”로 규정하고, 보유자가 “개인 키를 통해 독점적·배타적으로 통제력을 행사한다”고 판시한 일련의 판결은 사실상 UNIDROIT의 ‘지배’ 개념을 실무에서 수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판례적 정착이 민법의 명문 규정으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RWA(실물연계자산) 시대에 등기·물권변동·공시제도와 블록체인 기록의 관계, 디지털자산에 대한 선의취득과 담보 설정의 효력, 강제집행 절차에서의 처리 방식 같은 핵심 쟁점은 여전히 회색지대에 머물러 있다. 학계에서는 민법상 공시 원칙과 등기제도의 전면적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정작 법무부의 움직임은 더디다.
한국 입법안의 구조적 모순
이제 한국 입법안으로 돌아와 보자. 현재 발의된 디지털자산기본법안과 정부 검토안은 모두 금융위를 단일 주관 부처로 한다. 발행공시·유통공시·인가·거래 지원이 모두 금융위 창구다. 가상자산위원회 회의에 법무부도 참석하지만, 그 역할은 부수적이다. 정작 민법을 주관하는 법무부는 디지털자산의 사권 정립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과제에서 주도권을 갖지 못한다.
이 구조에는 두 가지 모순이 있다. 첫째, 입법 관계자 스스로 RWA와 NFT를 법안에서 제외했다는 점이다. “NFT는 자산이라기보다 다양한 목적에 활용된다”, “RWA는 증권법 및 신탁 규제와의 연계성을 고려해 별도 입법으로 보완한다”는 것이 이유다.
그렇다면 디지털자산이 곧 금융상품이라는 전제 자체가 흔들린다. 본질에 따른 분리 규율이 필요함을 입법자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정작 법체계는 금융위 일원화로 가는 자기모순이다.
둘째, 세부 규제가 글로벌 추세와 정반대로 흐른다는 점이다. 거래소 대주주 지분 15~20% 한도, 은행 51% 컨소시엄 스테이블코인 발행 독점, 무과실 손해배상까지. 미국·EU·일본이 자산 본질에 따른 차등 규율로 향하는 동안, 한국은 일률적이고 강도 높은 금융 규제로 향한다.
한 전문가는 이를 “갈라파고스 규제”라 경고하며 “글로벌 경쟁력과 혁신을 제약하는 결과로 귀결돼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국만이 본질에 어긋난 일원적 규율을 고집한다면 자본은 해외로 이탈하고, 시장은 고립될 것이다. 이미 한국은 미국·EU·일본에 비해 입법의 시기마저 늦다. 늦은 입법이 잘못된 방향이라면 그 비용은 산업 전체와 이용자가 부담하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잘못된 구조가 한 번 굳어지면 되돌리기 어렵다는 점이다. 자본시장법이 만들어진 이후 자본시장의 지형이 그 법의 틀에 맞춰 형성되어 온 것처럼, 디지털자산기본법 역시 한 번 제정되면 향후 수십 년의 시장 구조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무엇이 진정한 ‘기본법’인가
「디지털자산기본법」은 이름 그대로 ‘기본법’이어야 한다. 세부 규제법이 아니다. 기본법이 담아야 할 핵심은 세 가지다.
첫째, 자산의 본질에 따른 분류와 부처 분담의 명문화다. 토큰증권은 자본시장법으로, 결제 스테이블코인은 별도 결제 법체계로, 그 외 일반 디지털자산은 디지털자산기본법으로, 그리고 RWA는 해당 실물자산 소관 부처(부동산은 국토부·미술품은 문체부 등)가 토큰화 부분도 함께 규율하도록 명시해야 한다. 금융위는 ‘디지털금융자산’을 규율할 뿐, ‘디지털자산 일반’의 주관자가 될 수는 없다. 모든 디지털자산을 금융 규제로 묶는 발상은 분류부터 잘못된 것이다.
둘째, 사권 영역의 입법은 법무부 주도로 민법 체계 안에서 정립되어야 한다. UNIDROIT 원칙에 따른 ‘지배’ 개념을 수용하고, 선의취득·담보 설정·도산 처리·강제집행 규정을 정비해야 한다. 영국이 한 일을 한국도 해야 한다. 디지털자산 시대의 진정한 인프라는 거래소가 아니라 민법이다. 이 작업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RWA 토큰화도, 기관투자자의 본격 진입도, 디지털자산 담보대출 시장의 활성화도 모두 모래 위의 성에 불과하다.
셋째, 입법 과정에 법무부가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가상자산위원회는 금융위 산하 자문기구일 뿐, 디지털자산 전반의 사권·과세·실물자산 토큰화를 통합 조율할 권한도 역량도 없다. 국무총리실 또는 별도 범부처 협의체에서 영역별 소관을 정리하는 구조가 마땅하다.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자가 누구인가도, 거래소 지분이 몇 퍼센트인가도 아니다. 이 법이 무엇에 관한 법이며, 누가 무엇을 규율하는가라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는 일이다. 그 답을 먼저 찾지 않은 채 세부 규제로 직행하는 것은 음식의 종류를 묻지도 않고 그릇부터 정하는 것과 같다. 기본법이라는 이름값을 하려면 적어도 음식의 종류부터 정직하게 분류해야 한다. 그리고 각각의 음식에 어울리는 그릇과, 그 그릇을 책임질 사람을 함께 정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기본법’이라는 이름의 무게다.
구태언 법무법인 린 AI전문그룹 총괄변호사
필자는 디지털자산·AI·핀테크 분야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법률 전문가다. 가상자산 규제, 데이터·플랫폼 법제, 신기술 관련 정책 자문과 입법 논의에 참여해왔으며, 국회·정부 자문 및 학계 토론에도 활발히 관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디지털자산·블록체인 법제를 다룬 전문서와 칼럼 기고가 있으며, 특히 디지털자산의 사권(私權) 정립과 민법 체계 내 재편 필요성을 강조하는 연구와 발언으로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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