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무조건 팔라는 게 아니다"…저평가 기업 살린 일본식 M&A 가이드라인
- 거버넌스포럼, 일본 M&A 제도 집중 조명
금융당국도 의무공개매수·저PBR 기업 공개 추진
[이코노미스트 이승훈 기자] 저평가 기업 해소와 일반주주 보호가 국내 자본시장의 핵심 과제로 떠오른 가운데 일본의 인수·합병(M&A) 가이드라인이 참고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일본은 인수 제안을 무조건 방어하기보다 기업가치와 주주 공동이익을 기준으로 이사회가 판단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상법 개정에 이어 의무공개매수제도와 저PBR(주가순자산비율) 기업 공개 등이 추진되며 M&A 제도 개선 논의가 속도를 내고 있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지난 6월 25일 서울 여의도 한경협회관에서 ‘코스피 9000에도 남아 있는 저평가의 숙제-일본 M&A 가이드라인 개정의 시사점과 벤치마크 가능성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제53차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일본 경제산업성(METI)의 기업 M&A 가이드라인 운영 현황과 최근 개정 논의, 한국 자본시장에 주는 시사점이 집중적으로 소개됐다.
일본 “이사회가 기업가치 판단”...M&A 시장 변화
발표를 맡은 고다이라 류시로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 수석기자는 일본 M&A 가이드라인의 핵심은 단순히 인수 거래를 활성화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가치와 주주 공동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있다고 설명했다. 과거처럼 경영진의 경영권 방어를 우선하기보다 이사회가 인수 제안을 객관적으로 검토하고 그 판단 근거를 시장에 설명하는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목표라는 것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2023년 기업 인수 가이드라인을 제정하면서 이사회가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인수 제안을 받으면 반드시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다만 진지한 검토가 곧 인수를 수용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사회는 기업의 장기 전략과 ▲지속가능성 ▲기업가치 ▲주주 공동이익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그 과정과 근거를 주주에게 투명하게 설명하는 것이라고 발표자는 강조했다.
가이드라인 도입 이후 일본 기업들의 이사회 역할도 달라졌다는 평가다. 과거에는 경영진이 인수 제안을 묵살하거나 정식 안건으로 올리지 않는 사례가 적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독립적인 가치평가를 실시하고 필요하면 경쟁 입찰을 유도하거나 다른 인수자를 찾는 절차까지 진행하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다.
인수 여부와 관계없이 그 판단 과정을 공시하고 설명하는 문화도 자리 잡고 있다. 발표에서는 다키사와(TAKISAWA), 후지소프트 등 경쟁입찰을 통해 기업가치를 높인 사례도 소개됐다.
일본 정부가 최근 가이드라인 해석을 다시 보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시장에서 “가격만 높으면 무조건 회사를 팔아야 한다”는 식으로 오해하는 사례가 나타나자, 가격뿐 아니라 기업가치와 주주 공동이익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 즉 이사회는 인수 제안을 성실히 검토해야 하지만 기업가치와 장기 전략을 근거로 거절할 재량도 충분히 보장받는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이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일본 사례가 한국 자본시장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주가가 올랐어도 국내 상장사 중 PBR 1배 미만 기업이 여전히 많다”며 “일본은 저평가 기업에 대한 M&A가 활성화되면서 상당수 기업의 저평가 문제가 해소됐다”고 말했다.
이어 “PBR 0.5배 기업에 외부 투자자가 장부가 수준의 인수 제안을 할 경우 이사회는 이를 검토하고 모든 주주 입장에서 무엇이 최선인지 설명해야 한다”며 “한국도 상법 개정 이후 가장 큰 변화는 M&A 시장에서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가이드라인의 핵심은 M&A를 무조건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이사회가 기업가치와 주주 공동이익을 중심으로 판단하도록 하는 데 있다. 이는 인수 제안을 단순히 경영권 방어 논리로 거부하거나, 높은 가격만 보고 수용하는 방식 모두를 경계하는 접근이다.
다만 한국은 일본과 지배구조가 다른 만큼 동일한 방식의 접근은 어렵다는 분석도 나왔다. 발표에서는 일본은 전문경영인 체제와 분산된 소유구조를 기반으로 가이드라인과 판례 등 '소프트룰'(Soft Law)이 시장에서 작동하지만, 한국은 지배주주 중심 구조가 강한 만큼 일반주주 보호를 위한 '하드룰'(Hard Law)이 먼저 마련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의무공개매수제도와 일반주주 보호장치가 선행된 이후 시장 자율규율이 자리 잡는 것이 현실적인 접근이라는 것이다.
금융당국 제도 정비 속도…“10월 저PBR 기업 공개”
이 같은 문제의식은 금융당국이 추진 중인 자본시장 제도 개선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
권대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지난 6월 17일 자본시장연구원과 한국증권학회가 공동 개최한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M&A 제도 개선 방향' 세미나에서 “M&A를 통해 비효율적인 사업이 새로운 주인을 만나 재배치될 때 산업 전체의 효율성이 높아질 수 있다”며 “저PBR 기업이 스스로 가치 제고 노력을 할 수 있도록 기업 리스트를 공표하는 절차를 10월을 목표로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권 부위원장은 이어 “주식 양수도 방식의 M&A에서 발생하는 경영권 프리미엄에 일반주주도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의무공개매수제도를 개선하거나 조속히 도입해야 한다”며 “M&A 제안을 무조건 적대시하기보다 이사회 검토 의견을 공시하도록 해 일반주주에 대한 정보 제공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추진 중인 자본시장법 개정안도 같은 방향이다. 합병가액 산정 방식을 기업의 실질가치 중심으로 개선하고 이사회 의견 공시를 의무화하는 한편 특수관계인 거래와 이해관계 공시를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주식매수청구권 제도 개선을 통해 M&A 과정에서 일반주주의 권익을 보다 두텁게 보호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기업지배구조 한 전문가는 “상법 개정으로 이사회 책임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졌다면, 앞으로는 M&A 과정에서 이를 어떻게 구현할지가 핵심 과제가 될 것”이라며 “의무공개매수제도와 이사회 의견 공시 등이 정착되면 일반주주 보호와 기업가치 제고 논의도 한 단계 구체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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