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도시들이 조약(條約)을 맺기 시작했다[김현아의 시티라이프]
- [도시와 AI]⑤
기후가 앞서 걸은 길, 그 길의 한계
[김현아 가천대 사회정책대학원 초빙교수·정책평가연구원 연구위원] 대한민국이 시장(市長)을 뽑기 위한 선거 열기로 달아오르던 2026년 4월, 지구 반대편 마드리드에서 글로벌 주요 도시의 시장(Mayor)들은 전혀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4월 28일, 제12회 블룸버그 시티랩(Bloomberg CityLab 2026) 정상회의. 마이클 블룸버그가 ‘메이어스 AI 포럼’(Mayors AI Forum)의 출범을 알렸다.
이 포럼은 블룸버그 자선재단과 존스홉킨스대학이 함께 만든 국제 시장(市長) 연합이다. 창립 멤버는 ▲런던 ▲도쿄 ▲마드리드 ▲보고타 ▲나이로비 ▲보스턴 ▲부에노스아이레스 ▲키이우 ▲샌안토니오 ▲샌프란시스코 등 8개국의 시장들이다. 5개 대륙, 열 개 도시. 이들이 대표하는 인구만 1억명이 넘는다. AI가 어떻게 개발되고 배치될지, 도시가 직접 그 방향을 잡아가겠다는 것이다. 시장들은 AI 개발사 경영진과의 비공개 회의에 참석하고 AI가 지역 노동시장·에너지 체계·청소년의 삶에 미칠 영향을 공동 연구하며, 검증된 활용 사례를 도시에서 도시로 옮기겠다고 선언했다.
조달(調達)이라는 조용한 규칙
이 시리즈의 첫 글에서 필자는 AI가 골목의 신호등과 순찰 동선을 바꾸는 현장을 들여다봤고 지난 회에서는 데이터센터라는 ‘AI의 몸’이 특정 지역에 입지할 때 그 비용을 누가 치르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AI를 허용할 권한이 도시·중앙정부·기업 중 누구에게 있는가”를 물으며 글을 맺었다. 마드리드의 포럼은 그 질문에 도시들이 스스로 내놓은 대답처럼 보인다. 국가가 좀처럼 맺지 못하는 조약(條約)을, 도시들이 먼저 맺기 시작한 것이다.
국제정치학은 도시가 국가를 거치지 않고 국제 무대에서 직접 서로와, 그리고 기업·국제기구와 관계를 맺는 활동을 ‘도시 외교’(City Diplomacy)라고 부른다. 그 대표적인 선례가 C40이다. 국가 간 기후 협상이 교착에 빠져 있던 20년 동안, 도시들이 먼저 나섰다. 메이어스 AI 포럼은 기후에서 검증된 이 문법을 이번엔 AI로 옮겨온 것이다. C40 소속 도시의 탄소 배출량이 비소속 OECD 도시보다 유의미하게 줄었다는 통계적 근거는 아직 없다. 20년간 도시들이 선언에 서명하고 사례를 공유하고 목표를 선언했지만, 구속력 없는 자발적 서약은 서명하기 쉬운 만큼 어기기도 쉬웠다. AI 포럼이 같은 한계에 빠지지 않으려면, 선언 너머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서명란도 비준 절차도, 위반에 대한 강제력도 없는 시장(市長)들의 연합이 어떻게 규칙을 만든다는 것일까. 힘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뉴욕시는 2021년 자동화고용결정도구법(Local Law 144)을 제정해, 채용에 AI를 쓰는 기업에 연 1회 독립적 편향 감사(bias audit)를 의무화했다. 미국 최초의 도시 AI 규제법이다. 집행이 미진하다는 감사 결과가 나오기도 했지만, 이 법으로 말미암아 글로벌 HR 기업들이 자사의 AI 채용 도구를 '뉴욕 기준'에 맞춰 손보기 시작했다. 암스테르담과 헬싱키는 2020년 세계 최초로 AI 등록부(AI Register)를 개설해 시 행정에 쓰이는 알고리즘의 데이터셋·편향 평가·인간 감독 여부를 시민에게 공개하고 있다. 주차 단속, 불법 숙박 적발, 시민 민원 분류 등 도시가 AI를 쓰는 모든 곳에 유리벽을 세운 셈이다.
도시가 AI를 구매하는 고객이자 실증 현장인 한, 도시가 내거는 조달 조건(알고리즘 투명성, 데이터 보관과 이전 기준)은 사실상의 규칙으로 굳는다. 열 개 대도시가 같은 데이터 규격과 계약 문구를 요구하면, 시장(市場)은 그 규격에 맞춰 제품을 만든다. ‘조달의 조건’이 규칙이 되는 것이다.
빈 의자의 구조
블룸버그 시티랩은 한국에서 아직 생소한 이름이다. 2024년 10월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제11회 시티랩에 신상진 성남시장이 한국 지자체장 최초로 공식 초청돼 저출생 대응 사례를 발표한 것이 거의 유일한 접점이다. 알려지지 않은 테이블에 의자를 놓기란 쉽지 않다. 우리나라 서울도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규칙의 공동 설계자로서는 국제무대에 서지는 못하고 있다.
6월 지방선거라는 특수성도 있었겠지만 더 깊은 원인은 제도의 구조에 있다. 한국의 지방자치법은 지자체의 국제교류를 외국 지자체와의 교류·협력, 국제기구·행사 유치 정도로 좁게 허용한다.
독자적인 국제 규범 형성 활동에 대한 법적 근거는 불분명하다. ‘지방외교법’ 제정 논의가 학계와 시도지사협의회에서 거듭 제기되지만, 아직 없다. 중앙정부 역시 지자체의 국제활동을 국가외교의 자산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학계에서 반복된다. 1990년대 자매도시 결연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한 한국 도시외교의 오랜 한계가, AI라는 새 의제 앞에서 다시 드러난 셈이다.
이 시리즈를 쓰는 동안 필자는 AI가 도시의 신호등을 바꾸고 감시의 경계를 흐리며, 데이터센터라는 21세기의 굴뚝을 골목에 세우는 풍경을 따라왔다. 그 모든 현장에서 되풀이된 질문은 하나였다. ‘기술이 내려앉는 곳의 사람들은 그 기술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마드리드의 테이블은 그 말을 하는 자리였다. 표준을 지켜야 하는 처지와 표준을 정하는 자리는 다르다. 규칙은 정하는 자리에 참석한 자들이 쓴다. 이제 한국 도시들도 그 테이블에 의자를 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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