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5000억 쏟아붓고 84억에 손절” 차석용의 ‘에이본 꿈’ 결국 실패…LG생건이 얻은 것은?
- 매출 2692억에도 순손실 301억
자본총계 -1361억 ‘완전자본잠식’
차석용 M&A 시대 막 내리고
이선주, ‘K-헤어케어·네오뷰티’ 승부수
닥터그루트 북미 세포라 424개 매장 진출
이선주 대표, 새 성장축 키울까
[이코노미스트 서지영 기자] LG생활건강이 5000억원을 쏟아부은 미국 에이본 사업을 84억원에 정리한다. 2019년 1450억원을 들여 인수한 지 7년 만이다. 그동안 LG생건이 유상증자와 대여금 출자전환까지 합쳐 투입한 금액은 5000억원을 웃돈다. 숫자만 놓고 보면 뼈아픈 실패다. 공격적인 글로벌 확장 전략을 상징했던 차석용 전 부회장의 에이본 사업 역시 사실상 종식됐다. 뷰티업계 시선은 이선주 대표에게 쏠려있다. 막대한 손해를 보고 끝낸 에이본 매각을 시작으로 LG생건의 화려한 과거를 걷어내고 경쟁력을 되살릴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차석용은 실패한 유산일까
차 전 부회장이 이끌던 LG생건은 2019년 미국·캐나다·푸에르토리코에서 사업하던 뉴에이본을 인수하며 북미 시장 공략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현지 판매망과 물류 인프라를 확보해 LG생건 브랜드를 해외에 확장한다는 구상이었다. 에이본의 강점인 현지 방문판매 네트워크에 LG생건의 럭셔리 뷰티를 얹겠다는 복안이 깔려 있었다.
결과는 기대와 달랐다. 사업의 구심점이던 차 전 부회장이 갑작스럽게 물러나면서 계획을 끌고 갈 동력도 약해졌다. 인수 이후 실적 부진을 이어간 에이본은 2022년 대규모 손상차손까지 발생했다. 미국 법인은 자본잠식 상태에 빠졌고 공급업체와의 갈등으로 생산 차질도 겪었다.
에이본을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수 당시 에이본은 북미 시장에서 오랜 기간 구축한 대면 판매망이라는 분명한 자산을 갖고 있었다. 온라인 중심으로 유통구조가 바뀌는 가운데서도 뷰티 제품을 직접 추천하고 판매하는 방식은 북미 시장에서 여전히 일정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 문제는 이 유통망을 LG생건의 브랜드 경쟁력과 연결해 실제 성장으로 전환하는 일이었다.
회사를 사는 것과 회사를 성장시키는 것은 다르다. LG생건은 에이본의 현지 인프라를 확보했지만 새로운 성장축으로 키우지 못했다. 지속적으로 자금을 투입했지만 사업 정상화는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해 에이본의 매출은 2692억원에 달했지만 순손실은 301억원이었다. 연말 기준 자본총계는 마이너스 1361억원으로 완전자본잠식 상태였다.
LG생건이 결국 선택한 것은 추가 투자가 아닌 매각이었다. 미국 법인 지분 100%를 약 84억원에 처분하고 캐나다 법인은 1달러에 넘겼다. 2019년 1450억원을 들여 인수한 사업에 유상증자와 대여금 출자전환 등을 포함해 5000억원 넘게 투입했지만, 손에 쥔 것은 84억원의 매각 대금뿐이다. 북미 시장을 뚫기 위한 교두보로 평가받던 에이본이 LG생건의 글로벌 사업에서 빠지게 된 셈이다.
일각에서는 에이본의 실패를 차 전 부회장 개인의 판단 미스로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에이본은 북미 시장에서 오랜 기간 구축한 대면 판매망이라는 분명한 강점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미국을 비롯한 북미 뷰티 시장은 여전히 방문 판매 방식이 굳건하게 작동 중이다. 사업의 구심점이던 차 전 부회장이 갑작스럽게 물러난 이후 에이본을 LG생건의 글로벌 성장축으로 키우는 작업도 힘을 받지 못했다. 결국 좋은 자산을 사들이는 것과 그 자산을 성장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이 에이본에서 드러난 셈이다.
에이본을 털어내면서 이선주 대표 앞에 놓인 과제도 더욱 선명해졌다. 단순히 ‘차석용 흔적 지우기’로 끝낼 일이 아니다. 5000억원을 투입하고도 84억원에 팔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복기하고, 에이본이 빠진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지 보여줘야 한다. K뷰티업계 관계자는 “에이본이 정리된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지, 나아가 LG생활건강의 다음 글로벌 성장축을 어디에서 만들지 이선주 대표가 성과로 보여줘야 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
과거와 단절, 이제는 성과 보여줘야
이선주 대표가 이끄는 LG생건은 과거와 다른 길을 택하고 있다. 현지 회사를 인수해 유통망과 사업 기반을 한꺼번에 확보했던 과거와 달리, 자체 브랜드를 키워 해외 시장에서 직접 경쟁하는 방식이다.
닥터그루트가 대표적이다. LG생건은 닥터그루트를 앞세워 북미에서 상대적으로 경쟁이 덜한 ‘K-헤어케어’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북미 600여개 코스트코 매장에 입점한 데 이어 올해 3월 미국 세포라 온라인몰에 진출했다. 5월에는 주요 매장 90여곳에서 판매를 시작했고, 이달에는 미국 세포라 424개 전 매장으로 판매처를 확대했다. 아마존에서도 올해 상반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153% 증가했다.
현지 사업체를 통째로 인수하는 대신 브랜드를 먼저 시장에 선보이고 소비자 반응을 확인한 뒤 유통망을 넓히는 방식이다. 닥터그루트도 아마존과 틱톡 등 온라인 채널에서 소비자 접점을 확보한 뒤 코스트코와 세포라로 오프라인 판매처를 넓혀왔다. 에이본 인수와는 시장에 진입하는 방식부터 다르다.
조직도 이에 맞춰 바꿨다. LG생건은 지난해 이 대표 취임 이후 전략센터를 신설해 해외사업과 M&A, 디지털 전략을 총괄하도록 했다. 생활용품 브랜드로 분류됐던 닥터그루트와 유시몰도 별도 조직으로 떼어내 글로벌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기존 사업의 틀에 브랜드를 묶어두기보다 성장 가능성이 높은 브랜드에 힘을 싣겠다는 취지다.
이 전략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네오뷰티’다. LG생건은 스킨케어를 중심으로 K-뷰티 경쟁이 치열해진 상황에서 헤어·두피 등 상대적으로 경쟁이 덜한 기능성 뷰티 영역을 새로운 성장 분야로 보고 있다. 올해 2분기 북미 매출은 2058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7.3% 증가해 처음으로 중국 매출(1760억원)을 넘어섰다.
아직 성패를 판단하기에는 이르다. 닥터그루트와 네오뷰티의 성장세가 LG생건 전체 실적을 바꿀 만큼 커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중국 사업 부진과 국내외 경쟁 심화도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다. 현지 사업 기반을 사들이는 대신 자체 브랜드를 글로벌 시장에서 키워 지속적인 성장으로 연결할 수 있을지 보여줘야 한다.
업계 관계자는 “차석용 전 부회장에게 M&A가 성장의 중요한 수단이었다면 이선주 대표는 브랜드 자체의 경쟁력을 키워 해외 시장에서 검증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며 “닥터그루트와 네오뷰티가 단기적인 북미 매출 증가를 넘어 LG생건의 새로운 성장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가 이 대표의 경영 능력을 가늠하는 기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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