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선택에는 늘 ‘계산’이 있습니다. 투자와 인사, 지배구조 개편부터 신사업과 정책 대응까지, 겉으로 드러난 숫자와 발표만으로는 재계의 속사정을 모두 알기 어렵습니다. ‘김정훈의 재계:산’은 기업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 결정 뒤에 숨은 셈법과 이해관계를 하나씩 풀어봅니다. [편집자주]
지난 10월 1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제28회 반도체대전(SEDEX 2026) 전시장을 둘러보는 관람객들. [사진 연합뉴스] [이코노미스트 김정훈 기자] 국내 주요 상장사 1000곳 가운데 올해 인공지능(AI)·로봇·에너지 등 신산업을 정관상 사업목적에 새로 추가한 기업은 61곳에 그쳤다. 미래 먹거리 발굴을 내세운 기업들의 행보와는 온도 차가 느껴지는 수치다.
한국경제인협회가 2025년 말 자산 기준 상위 1000대 상장사(금융업·공공기관 제외)의 2026년 정관 변경 사항을 분석한 결과, 자산 상위 500개사 중 32곳, 하위 500개사 중 29곳이 신산업 사업목적을 추가했다. 전체의 6.1%로, 약 16곳 중 1곳꼴이다.
새로 추가된 신산업 사업목적은 에너지(31.1%)가 가장 많았다. 제조·모빌리티(19.8%), AI(12.3%), ICT·디지털(12.3%)이 뒤를 이었다. 이들 4개 분야의 비중은 75.5%로, 에너지와 첨단기술 분야에 집중됐다.
정관에 신산업을 새로 명시한 기업은 소수지만, 나머지 939개사가 신사업을 추진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마다 정관을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관 변경은 기업의 사업 확장 방향을 보여주는 단서지만, 그 자체가 신사업 추진 여부나 성과를 가르는 기준은 아닌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관련 사업목적을 이미 포함하고 있거나 기존 사업목적을 폭넓게 설정해 놓았다면 정관 변경 없이도 새로운 사업을 추진할 수 있다”며 “반대로 사업목적을 추가했다고 실제 투자나 사업화가 반드시 뒤따르는 것도 아니다. 향후 진출 가능성에 대비해 추가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6.1%는 신사업 추진 기업이 아닌, 올해 정관에 신산업 사업목적을 새로 추가한 기업의 비중이다. 실제 추진 현황은 기존 정관의 사업 범위와 투자·사업화 여부를 함께 살펴야 한다.
기업에는 신사업을 정관에 언제, 얼마나 구체적으로 담을지도 고민거리다. 사업성이 검증되지 않은 단계에서 지나치게 구체화하면 방향이 달라졌을 때 정관을 다시 손봐야 할 수 있다. 기존 사업목적 안에서 추진할 수 있다면 추가적인 정관 변경의 필요성도 낮아진다.
사업목적을 추가한 뒤에는 시장의 검증도 따라붙는다. AI·로봇처럼 투자자의 관심이 높은 분야는 투자나 사업화가 뒤따르지 않으면 선언에 그쳤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투자자 역시 정관에 담긴 사업명뿐 아니라 투자 규모와 실행 일정, 매출 발생 여부 등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신사업을 검토한다고 무조건 정관부터 변경하는 것은 아니고 기존 사업목적으로 가능한지, 실제 사업화 가능성이 어느 정도인지 등을 먼저 검토한다”며 “정관 변경은 주주들에게 진출 의지를 공식적으로 보여주는 의미도 있어 사업이 구체화되지 않은 단계에서 무작정 추가하기는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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