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 1955~2011] 스스로 미래를 만든 ‘21세기 다빈치’ -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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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1955~2011] 스스로 미래를 만든 ‘21세기 다빈치’

[스티브 잡스 1955~2011] 스스로 미래를 만든 ‘21세기 다빈치’

▎장우석 스티브 잡스. 2009, 디지털드로잉, 178×120cm, 109×79cm

▎장우석 스티브 잡스. 2009, 디지털드로잉, 178×120cm, 109×79cm

“쉰 살이 된다는 건 조금 더 멀리 내다볼 줄 안다는 것이다. 어떤 질문을 받을지 알게 되고 어떤 일을 시켜야 하는지 안다.” 스티브 잡스는 50세가 됐을 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삶을 관조하는 듯한 그의 말에는 여유가 배어 있었다. 그가 지난 8월 25일 팀 쿡에게 애플의 CEO 자리를 넘길 때 주변에서는 그의 건강을 걱정했다. 한 달여가 지난 10월 6일 잡스가 가족들 사이에서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내 로런과 네 명의 자녀를 남긴 채 그를 괴롭히던 병마의 고통에서 해방됐다.

잡스의 사망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낯선 허전함을 느꼈다. 본 적도 없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느낌으로는 생소한 것이었다. 그는 그만큼 우리의 삶에 깊이 들어와 있었던 거다. 애플 이사회는 “스티브 잡스의 명석함과 열정, 에너지는 우리 모두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향상시키는 끊임없는 혁신의 원천이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잡스를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가 특히 탁월했던 점은 IT기술과 비즈니스를 예술가적인 관점으로 다룬 것이다. 30년 동안 감각적인 소프트웨어 디자인과 컴퓨터 설계 기술을 기반으로 모바일과 콘텐트 산업을 이끌었다. 잡스는 기술력보다 디자인 마케터이자 소비자의 관점으로 애플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그는 애플의 제품 철학을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점에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품 내부의 회로 기판, 패키지 기술, 소프트웨어의 버튼, 전력을 공급하는 케이블에도 일관성과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부여했다. 애플은 제품만을 판매하는 회사가 아닌 문화와 경제가 공존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기업이 됐다. 애플의 매출은 스티브 잡스의 매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잡스가 복귀하기 직전인 1997년 9월 애플의 매출은 71억 달러였다. 그가 복귀 후 652억 달러로 약 9배 늘었다.



위대한 예술가는 남의 아이디어 훔친다지난 10년간 콘텐트 생태계에 기반을 둔 아이팟과 아이폰을 세상에 선보이자 사용자들은 잡스식의 디지털 라이프를 즐기기 시작했다. 손끝으로 이미지를 넘기며 음악을 플레이하고 사진과 영상을 촬영해 손쉽게 인터넷으로 업로드한다. 사용자 스스로도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앱시장에 참여해 애플의 생태계를 살찌웠다. 2004년 췌장암 발병과 2009년 간이식 수술 등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에도 잡스는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발표하는 등 혁신을 멈추지 않았다.

불과 2년 전에 선보인 아이패드는 마우스와 MS 윈도가 없어도 되는 컴퓨팅 환경을 제시했다. 사라졌던 태블릿 컴퓨터를 부활시켜 ‘위대한 예술가는 남의 아이디어를 베끼는 게 아니라 훔친다’는 파블로 피카소의 명언을 스스로 증명했다. 잡스와 애플이 새로운 상품을 내놓으면 경쟁사와 분석가는 대개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그러나 애플의 신제품은 보란 듯 시장을 선점한다. 최근 몇 년 사이의 패턴은 ‘애플의 법칙’처럼 보여졌다. 경쟁사는 미투(Me To) 전략이 전부였다.

그의 성공담이 극적인 이유는 태어나자마자 입양된 사연이나 공식적인 엔지니어링 배경 없이 대학을 중퇴한 이력 때문만은 아니다. 잡스는 청년시절 인도 여행 후 스티븐 워즈니악과 합세해 전자제품 개발을 취미로 사업을 시작했다. 워즈니악은 기술을 알고 있었고 잡스는 두둑한 배짱으로 세상을 상대했다. 디지털이라는 용어도 낯선 1970년대부터다. ‘내면의 보상’에 의해 빨려들 듯 모든 걸 내건 개척정신이 그들의 유일한 자산이었다.

잡스가 존경하는 엔지니어 앨런 케이는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새로운 걸 만들 때 뭐가 좋은지 대중에게 물어봐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1984년 마우스를 채용한 일체형 컴퓨터인 매킨토시를 개발할 때 잡스는 이런 모순을 지적했다. 성공을 아끼며 주저하기보다는 스스로 미래를 설계했다. 선명한 형태로 제시한 건 아니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모든 제품을 기획했다. 이미 1985년에 플레이보이지 인터뷰에서 “컴퓨터는 국가적 통신망을 연결하기 위한 기기이며 전화기처럼 삶의 변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예견했다. 인터넷과 아이폰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결국 잡스는 생애 마지막 순간에 그 꿈을 실현했고, 피카소와 에디슨이 결합된 21세기의 혁명가 이미지로 남았다. ‘21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죽음’이란 표현까지 나왔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미국인 인생에 2막은 없다”고 했다. 잡스의 경우는 달랐다. IT세계의 황무지에서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애플의 새로운 도약을 이뤘다. 2005년 스탠퍼드 대학의 졸업 축사에서 자신의 출생과 학업, 사랑과 상실, 죽음 등 3개의 변곡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연설이 대중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단순히 기업가의 인생역전 성공담이라서가 아니다. 현재의 모든 시도는 미래의 축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인과응보의 키워드를 통해 대중에게 고백한 최초의 개인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점과 점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10년 후에 뒤돌아보니 깨닫게 되었다”고 얘기하며 불교에서 말하는 카르마(업·業)를 강조하기도 했다.

연설은 출생에 관련된 이야기로 시작됐다. 이어 1985년 애플을 떠나 넥스트(NeXT)와 픽사(Pixer)의 창업을 이야기하며 잡스는 “굉장히 쓴맛이었으나 자신에게 꼭 필요했던 약”이라고 표현했다. 사내 정치에서 패배해 애플을 떠났지만 그 시기를 새로운 도전의 발판으로 삼았다. 잡스는 IT일을 포기할 수 있는 순간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컴퓨터 운영체제를 들고 1997년 애플로 돌아 왔다. “소비자용 기기의 핵심은 소프트웨어다. 그것은 점차 소프트웨어를 담은 박스가 될 것이다. 전통적인 업체는 이런 인식이 부족하다”며 소프트웨어와 콘텐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애플로 복귀하면서 가져온 운영체제(NeXT OS)를 발전시켜 매킨토시의 운영체제로 승화시켰고 아이폰과 아이패드의 운영체제(iOS)로 정착시켜 특별한 경쟁력을 나타냈다.



생명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은 죽음잡스는 애플을 떠나있던 시기인 1991년 38세의 나이에 부인 로런과 가정을 꾸리며 행운을 잡는다. 이후 잡스는 유연해진다. 가정적으로는 3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친딸이 아니라고 부인하던 리사를 데려와 키운다. 점차 자신의 인생에서 가정을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학부모로서 학교 행사에 참여해 아버지의 역할에 충실했다. 심지어 핼러윈 복장으로 이웃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수행원 없이 아내가 직접 차를 몰고 병원 검진을 가는 모습이 포착되는 등 최대한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회사에서는 애플의 성장과 함께 독재자의 이미지를 바꾸기 시작한다. 풍부한 경험을 갖춘 이들을 임원진으로 구성했다. 팀 쿡을 1990년대 후반 컴팩에서 스카우트했다. 그가 경영관리에 공을 세우자 최고운영책임자로 승진시켰다. 애플 스토어를 론칭한 론 존슨에게 리테일 수석부사장직을 맡겼다. 애플의 제품 디자인 책임자인 조너선 아이브를 일찌감치 발탁했다. 잡스는 좋은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과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 이외에도 ‘잡스만의 애플’이라는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제품 발표회에서 실무자들에게 각각의 분야를 나눠 발표하도록 권한을 부여했다. 관대함의 덕목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최초로 개인용 컴퓨터 산업을 일으켰고 3D애니메이션의 부흥과 온라인 음악시장을 개척했다. 새로운 모바일 시대를 열어 앱스토어 같은 개인 소프트웨어 시장을 활성화시켰다. 그리고 아이패드로 포스트PC 시장을 열었다. 애플이 등록한 특허 중 313개가 잡스의 이름으로 참여한 것들이다.

그는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 연설의 마지막을 죽음이라는 이야기를 꺼내며 마무리했다. “생명(Life)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 죽음”이라고 이야기한 뒤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고 한다. 잡스의 도전과 혁신은 생명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으로 마무리됐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애플이라는 브랜드를 가진 회사 그 자체다. 30년 전 자신의 차고에서 가내수공업으로 시작한 애플은 현대사에 남을 만한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유지하고 있다. 애플의 CEO인 팀 쿡이 잡스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메일에서 “잡스는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회사를 남기고 떠났고, 그의 정신은 애플의 기반으로서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애플의 선지자이며 창의적인 천재’로 표현했다. 그의 죽음은 자신이 발명한 아이폰과 아이패드 등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평생의 라이벌로 여겨졌던 MS 창립자 빌 게이츠는 “30여 년 친구로 만났고 잡스만큼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을 찾기 어렵다”고 했다.

스티브 잡스 전기를 담당한 월터 아이잭슨은 투병 중 2년에 걸쳐 50회에 가까운 인터뷰를 진행했다. 잡스는 마지막에 몹시 괴로워했지만 정신은 또렷했고 유머감각도 살아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 작별의 순간에 작가는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사생활을 감춰왔는데 이렇게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잡스는 “내 아이들이 나에 대해 알기를 원한다. 내가 아이들과 늘 함께하지 못했던 이유를 알아주길 바라며, 내가 했던 일들이 무엇인지 이해해주길 바라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위대한 혁명가이며 예술가였던 스티브 잡스도 마지막 순간은 한 가정의 남편과 아버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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