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URES VIEWPOINT - 이스라엘-미국의 애증 관계 - 이코노미스트

Home > >

print

FEATURES VIEWPOINT - 이스라엘-미국의 애증 관계

FEATURES VIEWPOINT - 이스라엘-미국의 애증 관계

티격태격하면서도 아주 각별한 사이…돈과 무기가 바탕이지만 서로간 더 깊은 이끌림도 있어



“미국 친구들은 우리에게 돈, 무기, 조언을 주려고 한다. 우리는 돈과 무기는 받지만 조언은 사양한다.” 이스라엘 ‘건국 영웅’으로 군사령관이자 정치가였던 고 모셰 다얀의 재담이다. 지금도 이스라엘과 미국의 관계를 가장 잘 요약해주는 말로 통한다. 다얀이 아직 살아 있다면 멋진 투윗을 날릴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너무 쉽게 생각해선 안 된다.

미국-이스라엘의 유대는 매우 독특하다. 한마디로 요약될 수도, 일반화될 수도 없다. 두 나라의 관계는 국가이성(reason of state, 국가가 국가를 유지·강화하기 위해 지켜야 할 법칙이나 행동기준)에만 기초한 적이 없다. 미국인과 이스라엘인은 정치학이나 국제관계의 자명한 이치를 뒤엎는다. 물론 그들의 우정은 돈, 무기, 조언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거기엔 좀 더 미묘한 무엇도 있다.

그 무엇을 이해하려면 장기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 해리 S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선 단기 기억으로 시작해 보자. 요즘 이스라엘 젊은이 대다수는 몇 가지 기본 픽셀로 미국을 그린다. 인터넷, 9·11, 스마트폰, CSI(과학수사대), 배트맨, 오바마가 그 기본 요소다.

이스라엘인은 언제나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리메이크부터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는 시위 문구가 인쇄된 T셔츠까지 미국적인 것에 푹 젖을 때는 여타 세계와 같았다. 물론 유럽인이나 무슬림 같은 냉혹한 반미감정은 갖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미국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그런 의존을 어느 정도 좋아했다.

하지만 미국의 모든 면을 좋아하진 않았다. 또 이스라엘인 전부가 미국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이스라엘의 유대인은 뉴욕 맨해튼 다운타운의 훈제연어 베이글을 즐기는 유대인이 아니다. 그보단 유럽과 중동식을 혼합한 슈니첼(송아지 커틀렛)과 후무스(병아리콩 으깬 것과 오일, 마늘을 섞은 중동 지방 음식)를 즐기는 유대인이다. 미국인의 노골적인 성향과 이스라엘의 직설적인 성향이 반드시 잘 어울리지도 않는다. 정통파부터 사회주의파까지 이상주의를 지향하는 이스라엘인은 미국인의 쾌락주의를 곧잘 개탄한다. 반면 미국인은 이스라엘인을 약간 교양 없다고 생각한다.

과거엔 거리가 문제가 됐다. 텔아비브에서 뉴욕으로 가려면 바다를 두 개나 건너야했다. 그러나 지금은 온라인으로 모든 소식을 실시간 추적할 수 있다. 이스라엘인이 ‘사우스 파크’ 새 시즌이 두 주 늦게 이스라엘에서 방영된다는 사실에 불만을 표하는 시대다. 구식 문화층이 새로운 문화층과 뒤섞인다. ‘모비딕’부터 ‘매드멘’까지 이스라엘인은 미국 문화를 시대 구분 없이 즐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미국의 식민지가 된 적은 없다. 이스라엘인은 예루살렘에 들어선 맥도날드 매장 1호 앞에서 시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대신 이스라엘인은 미국적인 모든 것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해서 변형하고 개조했다. 이스라엘의 IT 거점인 ‘실리콘 와디(wadi·히브리어로 계곡이란 뜻으로 텔아비브 인근 헤르츨리야를 가리킨다)’는 규모는 작지만 대담하게 미국 실리콘 밸리와 겨룬다. 최근에는 이스라엘 TV도 도약했다. 자그마한 문화가 글로벌 문화에 창의적으로, 그리고 불손하게 대응할 수 있으면 견실하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창의적인 불손함을 수출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내기를 기대한다.

더 어려운 문제를 생각해 보자. 2011년 여름 이스라엘인의 시위는 미국의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보다 앞섰고 어느 정도는 그 시위에 영감을 줬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거리 시위는 더 평화롭고 대다수 국민이 참여하며 더 효과적이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인은 미국의 첨단기술을 좋아하지만 미국 사회제도는 ‘시대에 뒤졌다’고 생각한다.

미국 TV 만화 시리즈 ‘심슨네 가족들’에서 미스터 번스가 “이게 미국이야! 미국에선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정의야”라고 말하면 이스라엘 시청자는 무릎을 친다. 이스라엘인 대다수는 미국의 정치 풍자는 물론 안정된 헌법과 시민권을 높이 사지만 이스라엘 자체의 사회정의를 세우는 바탕은 다른 곳에서 찾으려 한다.

이스라엘인이 미국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은밀하게 꿀까? 사실 이미 많은 이스라엘인이 그 꿈을 실현했다. 그러나 대다수 이스라엘인은 유명한 현지 음악밴드 에스닉스(Ethnix)의 노랫말에 박수를 친다. “우리의 현실은 미국이 아니야 / 미국은 세계의 다른한 곳에 불과해 / 생각하기 나름이야 / 아메리칸 드림을 원한다면 이곳에도 꿈이 있지.”

따라서 미 국무부가 까다로운 비자 요건을 없애고 이스라엘 이학사 학위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영주권을 준다고 해도 이스라엘인 모두가 미국으로 건너가지는 않는다. 이스라엘의 의료 시스템은 미국보다 훨씬 낫다. 또 이스라엘의 애국주의가 다소간 손상됐다고 해도 여전히 건재하다.

그렇다면 팔레스타인 문제는 어떤가? 이스라엘을 가장 좋아하는 미국인이라고 해도 이스라엘의 46년 간 팔레스타인 점령을 잘못된 일로 생각한다. 미국 서부개척 시대에는 이런 슬로건이 유명했다. “쏴야 한다면 쏴라. 하지만 말은 하지 마라.” 이스라엘은 그말 그대로 지금까지 계속 쏘기만 하고 적과 대화는 거의 하지 않았다.

오슬로 평화협정을 파기한 쪽이 마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인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인지 아직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이스라엘인은 지도자들이 종종 미국에서 돈과 무기를 받고 조언은 거절한다는 사실을 잘 알며 이 게임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궁금해한다.

이스라엘 정부가 미국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가?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미국은 급속히 변하고 있다. 중동은 불타고 있다. 미래를 내다보는 이스라엘인은 현재의 별자리가 크게 달라지리라는 사실을 잘안다. 그러나 오바마가 예루살렘을 방문했고, 네타냐후도 여러 차례 미국을 방문했다. 현재로선 이스라엘과 미국의 특별한 관계가 난공불락인 듯하다. 한계점이 있다고 해도 아직은 아니다.

미국인이 이스라엘을 보고 자신과 비슷한 게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미국인은 이스라엘의 다른 속성도 인정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방식을 짜증날 정도로 고집하는 것이 미국인의 눈에는 이상하게도 매력적으로 비친다. 그런 매력은 기독교인의 이스라엘 사랑, 민주적 친밀감(때로는 민주적 결손), 유대계 미국인이 얻어낸 지위로 구성된다.

이란의 마무드 아마디네자드와 그의 수하들이 잘못 생각하듯 이스라엘이 미국의 꼭두각시라고 생각하는 미국인이 있다면 생각을 고쳐 먹어야 한다. 이스라엘의 뻔뻔한 대담함, 모방하거나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마음가짐이 미국인에게 자신의 내면을 상기시킨다. 이스라엘은 꼭두각시 나라가 될 능력이 아예 없다. 그러기엔 너무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옹고집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건 너무 요령 없는 은유다.

유대계 미국인이 양국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우리 세대는 ‘멀리 미국에 있는 삼촌’의 무릎 위에서 자랐다. ‘엉클 샘’이 아니라 ‘엉클 슈무엘’을 말한다. 우리는 슈무엘이 샘의 일부가 되기를 얼마나 원했는지 몰랐다. 요즘 슈무엘의 손주가 전통에 따라 성서에 나오는 이름을 취하기도 한다. 자신 만만한 그들 세대는 앞으로 새로운 시각으로 이스라엘에 회의를 품을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인은 미국에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하지 않고 건전한 비판을 하는 친이스라엘 로비단체 제이 스트리트 같은 새로운 목소리와 자칭 ‘친 이스라엘’ 전통주의자 사이에서 날로 증폭되는 갈등을 잘 안다. 이스라엘인 일부는 그런 점을 불안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머지는 이스라엘의 내부 논란이 마침내 미국의 여론에 반영된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이스라엘인이 ‘반이스라엘’로 간주되지않고 정부를 비판할 수 있다면 해외의 친구들도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다. 훨씬 더 흥미로운 점은 이스라엘에 매료되는 비유대계 미국인이 많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이스라엘 정책을 이기심과 유대계의 로비로만 설명하는 것은 반유대주의자들이 유대인을 두고 돈만 긁어모으는 사람들로 설명하는 것과 다름 없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이스라엘-미국 관계는 현대사에서 재래적인 국익만이 아니라 담백한 가치의 측면에서도 강렬한 정서의 역할을 연구하는 최고의 실험실 중 하나다.

그래서 장기 기억이 필요하다. 오바마 대통령의 예루살렘 연설을 들은 이스라엘 학생들은 토머스 제퍼슨이나 테디 루스벨트에 관해서는 거의 모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역사관은 획득형질이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궁극적으로 최근의 사건들보다 우선한다.

이스라엘-미국 관계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많았다.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지금 우리가 말하는 ‘엄한 사랑(tough love)’의 모범을 보였다. 그는 1973년 아랍국들의 이스라엘 습격으로 촉발된 욤키푸르 전쟁 후 이스라엘-이집트 정전을 인내심 있고 다소간 고압적인 자세로 중재했다.

지미카터 전 대통령은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를 사랑스럽게 감독하다가 매정하게 이스라엘을 비판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오슬로 평화협정의 전성기부터 암살된 이츠하크 라빈 전 총리의 장례식까지 이스라엘과 함께 했다. 클린턴은 추도사를 ‘샬롬차베르”라는 두 마디로 끝냈다. ‘안녕! 친구여’라는 뜻이다. 그 말이 유행어가 됐을 정도로 그는 이스라엘을 사랑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면서 가자 지구 철수를 지지해 이스라엘에서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그러나 카터,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