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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TCOIN STORY - 비트코인 창시자는 누구인가

BITCOIN STORY - 비트코인 창시자는 누구인가

‘사토시 나카모토’의 신원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 있지만 모든 단서는 남캘리포니아의 수수한 집으로 이어져
기자가 추적한 비트코인 창시자는 사토시 나카모토를 본명으로 사용하는 64세의 일본계 미국인이었다.



사토시 나카모토가 현관 문 앞에 서 있었다. 겁을 먹은 동시에 짜증이 난 듯했다. 쭈글쭈글한 T셔츠, 낡은 청바지, 하얀 운동양말 차림이었다. 황급히 뛰쳐나온 듯 신발도 신지 않았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다. 몇 주 동안 잠을 못 잔 사람처럼 멍해 보였다. 반항적인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 전투를 치른 뒤 마침내 중대한 패배에 직면한 듯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캘리포니아주 템플 시티 보안관실의 경관 두 명이 그를 양측에서 호위했다.

“이 사람에 관해 무슨 질문을 하고 싶다고요?” 한 경관이 내게 물었다. “이 사람이 당신과 이야기하면 큰일 난다는데요.” “그럴 일 없어요.” 내가 말했다. “그에게 비트코인에 관해 질문하려고 해요. 그가 사토시 나카모토라니까요.” “뭐라고요?” 경관이 멈칫했다. “비트코인을 만든 그 사람 말인가요? 상당히 어렵게 사는 것 같은데요.”

비트코인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가상통화로 전성기에 하루 약 5억 달러가 거래됐다. 그 비트코인을 발명했다고 믿어지는 사람이 로스앤젤레스 샌버나디노 언덕에 은거하며 그가 가졌다고 추정되는 약 4억 달러어치의 비트코인을 건드리지도 않고 내버려두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터무니없어 보였다.

사실 내가 나카모토의 현관문을 두드렸을 때 그가 경찰을 불렀다는 점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제 경관 두 명이 입회한 채 그와 대면하자 내 질문에 대한 그의 반응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의미심장했다. 그는 비트코인 프로젝트에서 자신이 한 역할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듯이 포장도로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내 질문의 답변을 거부했다.

“난 더는 거기에 관여하지 않고, 이야기할 수도 없어요”라며 그가 손사래를 쳤다. “다른 사람에게 다 넘겼어요. 지금은 그들이 맡고 있어요. 나는 더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나카모토는 더 말하려 하지 않았다. 경관들도 우리 대화가 끝났다고 판단하고 내게 이제 돌아가라고 말했다.

나는 두 달 동안 나카모토를 추적했다. 결국 그와 직접 대면하고, 그와 가까운 사람들, 또 그와 함께 일한 비트코인 개발자들을 인터뷰했다. 그 결과는 암호통화 비트코인을 둘러싼 수수께끼가 대부분 말 그대로 허구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아주 그럴 듯한 허구보다 훨씬 더 희한한 사실도 드러났다.

내가 추적한 결과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은 도쿄에서 활동하며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가명을 사용하는 천재가 아니었다. 대신 본명이 사토시 나카모토인 64세의 일본계 미국인이었다. 그는 모형기차를 수집하고 경력이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다. 그는 대기업과 미군을 위해 기밀에 속하는 업무를 맡은 적이 있다. 내 앞에서 눈을 내려깔고 있던 사람이 바로 비트코인의 아버지인 듯했다. 사실 그의 가족조차 모르는 일이었다.

사토시 나카모토는 생존자와 사망자를 포함해 여러 명이다. 한 명은 뉴욕의 랠프 로렌 디자이너이고, 미국 사회보장 색인의 사망자 명단(Social Security Index’s Death Master File)에 따르면 또 한 명은 2008년 호놀룰루에서 사망했다. 비즈니스 인맥 사이트 링크드인에도 한 명이 있다. 그는 실제로 일본에 살며 자신이 비트코인 창시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알려진 믿을 만한 정보와 맞지 않는 인물들이다.

캘리포니아주 템플 시티에 있는 도리언 S 나카모토의 집.


비트코인 창시자를 찾아라귀화한 미국 시민의 기록이 담긴 데이터베이스를 샅샅이 뒤졌을 때야 잠재적으로 일치되는 프로필과 배경을 가진 사토시 나카모토가 떠올랐다. 추가적으로 국가문서 기록관에서 그에 관한 문서를 훑어보고 수 많은 인터뷰를 시도한 끝에 드디어 하나의 완성된 그림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템플 시티에서 그를 만나기 2주 전 모형 기차 제조사에서 이메일 주소를 입수해 사토시 나카모토에게 연락했다. 처음엔 주로 증기기관차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러다가 내가 비트코인에 관해 묻자 나카모토는 그 이메일에 회신하지 않았다.

그때가 2월 말이었다. 그 전에 그의 직업에 관해 물었다(공공 기록에는 거의 정보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얼버무렸다. 그도 나에 관해 물었다. 나는 전화로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다며 전화번호를 물었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의 장남 에릭 나카모토(31)에게 아버지가 비트코인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지 알아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메시지가 돌아왔다. 다른 가족을 통한 시도도 효과가 없었다.

나카모토는 그후로 계속 나의 통화 요청을 무시했다. 그래서 직접 찾아갔다. 남캘리포니아 템플 시티의 작고 수수한 집에 도착했을 때 그의 은색 도요타 코롤라 CE가 진입로에 주차돼 있었다. 문을 두드렸지만 그는 나오지 않았다. 한번은 그가 창문 가리개를 살짝 열어 내다봤다. 잠시 나와 눈이 마주친 뒤 그는 가리개를 내렸다. 경관 입회 없이 그를 본 것은 그때뿐이었다.

“뛰어난 물리학자인 우리 형에 관해 알고 싶다고요?” 사토시 나카모토의 막내 동생 아서 나카모토가 말했다. 그는 캘리포니아주 샌디마스 소재 웨이브스트림사에서 품질관리 책임자로 일한다. “형은 머리가 비상해요. … 수학, 공학, 컴퓨터에 뛰어나죠. 형은 못하는 게 없어요.” 그러면서 경고도 빼놓지 않았다.

“형은 성미가 고약해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형은 기밀 업무를 담당했어요. 그의 인생에서 얼마 동안이 완전히 백지죠. 형에게 접근할 수 없을 겁니다. 모든 걸 부인할 걸요. 자신이 비트코인 창시자라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나카모토의 동생은 그 말을 한 뒤 전화를 끊었다.

나카모토가 부인할 거라는 이야기는 내가 번지수를 잘못 짚지 않았다는 점을 시사했다. 하지만 그로써 충분하지 않았다. 나카모토의 동생이 그가 비트코인을 개발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했지만 확실한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형과 사이가 좋지 않아 자주 연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토시 나카모토와 직접 만나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비트코인의 부침비트코인은 컴퓨터 코드 속에 존재하는 통화다. 송금 수수료나 환전 수수료 없이 어디든 송금할 수 있으며 휴대전화나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에 저장된다.

“비트코인이 금융거래에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에 컴퓨터광들이 비트코인에 흥분한다”고 비트코인 재단의 최고기술책임자 개빈 앤드리슨(47)이 말했다. 그는 호주 출신이다. 앤드리슨은 비트코인이 사용하기 편리하기 때문에 도난당하기도 쉬우며, 인터넷에 연결되지 않은 하드드라이브나 안전금고에 저장하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말했다.

그래도 비트코인은 대규모 절도, 사기, 스캔들에 취약하며 불안정하다. 비트코인의 가치도 2013년 최고 1200달러 이상이었다가 지난 2월 말 130달러로 곤두박질쳤다. 미국 상원, 국토안보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미 국세청(IRS), 재무부 금융범죄단속반, 증권거래위원회(SEC), 연방수사국(FBI)도 비트코인에 비상한 관심을 갖는다. FBI는 2013년 10월 온라인 암시장 ‘실크로드’를 폐쇄하고 비트코인 350만 달러어치를 압류했다. “현재 FBI가 세계에서 비트코인을 가장 많이 보유한 기관 중 하나”라고 앤드리슨이 말했다.

최근 몇 주 동안 다시 개설된 ‘실크로드 2.0’만이 아니라 도쿄에 있는 비트코인 최대 거래소 마운트 곡스도 문을 닫고 파산 신청을 했다. 해커들에게 수백만에서 수억 달러어치를 도난당했기 때문이다.

실리콘 밸리에서 활동하다가 현재 매사추세츠주 앰허스트에 사는 앤드리슨은 2010년 6월부터 2011년 4월까지 ‘사토시 나카모토’와 비트코인 개발 프로젝트에서 긴밀하게 협력했다고 말했다. 지금 같은 수십억 달러 규모의 비트코인 경제가 부상하기 전의 일이다. 벤 버냉키 전 FRB 의장이 2013년 11월 가상통화가 “장기적인 가능성이 있을지 모른다”며 신중한 지지 의사를 밝히면서 비트코인 가치가 급등했다.

그 이후 비트코인 ATM(자동입출금기)이 도처에 생겨났고 인터넷 쇼핑몰 오버스톡(Overstock.com)부터 우주여행 벤처기업 버진 갤랙틱까지 다양한 업체가 비트코인을 결제수단으로 허용했다.
2월 26일 도쿄의 비트코인 거래소 마운트 곡스 앞에서 한 미국인이 부실운영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정치적인 의도?“비트코인의 핵심 코드를 만드는 것은 사실 아주 무시무시한 일”이라고 앤드리슨이 말했다. “약간만 실수하면 이 어마어마한 80억 달러짜리 프로젝트를 완전히 망칠 수 있다. 과거에도 망친 적이 있다.”

앤드리슨은 거의 1년 동안 비트코인 설계자 나카모토와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일했다. 비트코인 코드를 개선하느라 한 주에 40시간이나 매달린 적도 많았다. 나카모토의 회피적인 태도가 그의 특징이라고 앤드리슨은 말했다. 사실 그는 나카모토의 목소리를 들은 적도 없다. 전화 통화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의사전달은 늘 “이메일이나 비트코인 토크 포럼(열성팬들의 온라인 모임)의 개인 메시지”를 통해 이뤄졌다고 앤드리슨이 말했다. “다른 사람이 본의 아닌 실수 하나라도 하면 그는 그를 보고 멍청하다며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다. 당시엔 비트코인 개발이 합법적인 일인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익명성을 보호하려고 무진 애썼다.”

앤드리슨이 그에게 어디 출신인지, 경력이 무엇인지, 어떤 다른 프로젝트에서 일했는지, 본명이 뭔지 물어도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우리는 코드에 관해서만 이야기했다”고 앤드리슨이 말했다.

비트코인은 2009년 1월 문제가 많은 상태에서 출범했다. 나카모토는 그 코드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자원봉사 프로그래머들을 끌어모았다. 프린스턴대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앤드리슨은 다음해 블로그를 통해 비트코인에 관해 알게 됐다. 그는 나카모토의 추적 불가능한 이메일 주소 중 하나를 통해 그에게 연락했다. 앤드리슨이 보낸 첫 메시지는 이랬다. “비트코인은 아주 멋진 아이디어입니다. 나도 돕고 싶습니다. 필요한 게 뭔가요?”

비트코인의 공식 출범 직전인 2008년 인터넷에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이름과 이메일 주소가 들어 있는 제안서 하나가 올랐다. “금융기관을 거치지 않고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온라인 직접 송금이 가능한 전자 현금”을 제안한 글이었다. 절묘한 점은 은행을 비트코인 사용자로 대체한다는 것이었다. 그 사용자들이 시스템 관리자 역할을 맡아 비트코인 거래를 컴퓨터로 인증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비트코인 생산은 가치와 희소성을 제고하고 인플레이션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신중한 계산을 통해 이뤄졌다. 4년마다 생산 수량을 반으로 줄이며, 2140년 2100만 개에 도달하면 생산을 멈추도록 설계됐다. 또 소수 8자리까지만 나눠지고 가장 작은 단위가 ‘사토시’로 불린다.

“사토시가 정치적인 이유에서 이 일을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앤드리슨이 말했다. 그는 비트코인의 표준화를 목표로 하는 비영리 비트코인 재단에서 비트코인으로 급여를 받는다. “그는 지금 우리의 금융 시스템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평등을 지향하는 다른 시스템을 원했다. 은행과 은행가들이 열쇠를 가진 덕분에 부자가 되는 것을 혐오했다. 나도 비트코인에 약간 투자했는데 내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은퇴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수익을 올렸다. 내가 투자한 1센트 당 약 800달러를 벌었다. 사실 말도 안 된다.”

2011년 초가 되자 앤드리슨과 나카모토 사이의 연락이 뜸해졌다. 나카모토는 코드 수정안을 더는 올리지 않았고 포럼의 대화도 무시했다. 그러다가 앤드리슨은 2011년 4월 나카모토로부터 놀라운 이메일을 받았다. “나를 수수께끼의 인물로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나카모토는 이메일에 썼다. “정체가 가려 있는 인물이라고 하면 언론은 해적화폐라는 시각으로 비트코인을 보게 된다.” 앤드리슨은 이렇게 회신을 보냈다. “동감이다. 나도 ‘괴상한 해적 돈’이라는 개념이 싫다.”

그러면서 앤드리슨은 나카모토에게 미중앙정보국(CIA)의 강연 초청을 수락했다고 말했다. 그 순간부터 사토시 나카모토는 이메일을 끊고 완전히 사라졌다.

도리언 S 나카모토는 뉴스위크 기사가 나간 후 AP 기자에게 자신은 비트코인을 전혀 모른다고 말했다.


돈과 비밀, 그리고 정부에 대한 불신내가 인터뷰한 나카모토의 가족은 그를 머리 좋고 침울하며 사생활 보호에 집착하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말수가 적고 전화를 가려 받으며 이메일을 익명으로 사용하고, 현재 비트코인의 특징으로 알려진 두 가지 사실인 돈‘ ’과 비‘ 밀’에 집착한다는 것이었다. 지난 40년 동안 그는 자신의 본명을 사용하지 않았다. 23세에 캘리포니아 주립공대(California State Polytechnic University)를 졸업한 그는 ‘도리언 프렌티스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이름을 사용했다(1973년 LA 지방법원 기록).

나카모토는 1949년 7월 일본 벳푸에서 불교 승려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 아키코 아래서 자랐다. 아키코는 이혼하고 재혼한 후 세 아들을 데리고 1959년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민했고, 현재 93세로 템플 시티에서 나카모토와 함께 산다. 동생 아서에 따르면 나카모토는 어려서부터 수학에 소질을 보였다. 형은 변덕스럽고 취미도 괴상했다”고 아서는 말했다. 세 아들 중 맏이인 나카모토는 캘리포니아주 포모나의 캘리포니아 주립공대에서 물리학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나카모토는 남캘리포니아의 휴스 에어크래프트사에서 일했다. “그후로 직장을 수시로 바꿨다”고 아서가 말했다. “형은 취직하려고 면접 보러 가서 면접관에게 멍청이라고 말하고 실제로 그렇다는 점을 입증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카모토는 여섯 자녀를 뒀다. 첫째는 에릭(31)으로 1980년 첫 결혼에서 얻은 아들이다. 현재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한다. 그 다음 다섯 자녀는 둘째 아내 그레이스 미첼(56)에게서 얻었다. 현재 미첼은 뉴저지주 오듀본에 산다. 그녀는 1980년대 중반 뉴저지 체리힐의 유니테리언(기독교의 한 교파) 교회 친목회에서 나카모토를 만났다고 말했다. 나카모토는 20대에 휴스 에어크래프트사를 그만두고 동부로 가서 뉴저지주 캠든에 있는 전자업체 RCA의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했다.

RCA 후속 회사인 L-3 커뮤니케이션스의 데이비드 미차 사장은 “당시 우리는 군과 정부의 항공기, 전함에 필요한 벙어용 전자·통신 관련 일을 했다”고 말했다. “기밀 사항이라 자세히 이야기할 수 없다.”

1987년 나카모토 부부는 캘리포니아로 돌아갔다. 나카모토는 LA 지역에서 컴퓨터 엔지니어로 일했다. 미첼에 따르면 나카모토는 1990년대에 두 번 정리해고됐다. 주택담보 대출 상환금과 세금을 못내 집도 압류됐다. 장녀 아일린 미첼(26)은 그 경험 때문에 아버지가 은행과 정부에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의 간섭을 싫어하는 자유주의자인 나카모토는 딸에게 “정부의 힘에 휘둘리지 말고” 자영업을 하라고 독려했다. “아버지는 정부, 세금, 관리들을 아주 불신했다.” 아일린은 아버지가 하루종일 일만 했다고 말했다. “아빠는 자기가 일하는 방을 늘 잠가 뒀고 우리가 컴퓨터라도 만지면 혼을 냈다”고 아일린은 돌이켰다. “아빠는 늘 정치와 시사문제를 이야기했다. 또 첨단 기술과 옛 기술도 좋아했다. 컴퓨터를 직접 만들고는 아주 자랑스러워했다.”

2000년께 나카모토와 그레이스는 별거했다. 하지만 이혼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뉴저지주로 돌아갔고 9·11 테러 후 나카모토는 연방항공국(FAA)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했다고 미첼이 말했다. “그는 비밀이 아주 많았다. 2001년 어느 때 그 일도 그만뒀다. 그 이후로 일정한 직장을 갖지 않았다.” FAA 계약이 끝나자 나카모토는 템플 시티로 돌아갔다. 그 다음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비트코인은 거래하기가 편리하기 때문에 그만큼 도난당할 위험도 크며, 사기나 스캔들에도 취약하다.





사토시 나카모토 vs 도리언 S 나카모토비트코인이 유명해지자 진짜 사토시 나카모토가 누군지 추적이 시작됐다. 그가 혼자 행동했을까 정부를 위해 일했을까? 중요한 실리콘 밸리 혁신이라면 대개 누가 진짜 창시자인지를 두고 법정 투쟁이 벌어지지만 비트코인 창시자는 너무도 조용했다. 현재 오리건주 비버턴의 교육업체에서 일하는 아일린 미첼은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뭔가 기발한 일을 하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난리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보통 사람이 결코 아니다.”

나카모토의 바로 아래 동생 도쿠오 나카모토도 공감하는 이야기다. 캘리포니아주 듀어트에 사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형은 매사에 아주 꼼꼼하다.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린다. 그러니 이해해줘야 한다.”

비트코인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토와 컴퓨터 엔지니어 도리언 S 나카모토의 공통된 특징은 여러 가지다. 비트코인 창시자와 긴밀하게 일한 사람들은 그가 다른 프로그래머보다 나이가 많은 듯하다고 말했다. 또 그는 혼자 일했다.

“그는 젊은 사람 같지 않았고 실리콘 밸리에 있는 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 듯했다”고 나카모토를 위해 일한 핀란드인 마르티 말미가 말했다. 앤드리슨도 동의했다. “코드를 만드는 사토시의 방식은 구식이었다. 그는 후위 표기법(역폴란드 표기법이라고도 하며 연산자를 연산 대상의 뒤에 쓰는 연산 표기법을 말한다) 같은 것을 사용했다. 그의 코드를 본 사람들에겐 그가 혼자 일하는 사람이라는 게 거의 분명했다.”

사토시 나카모토의 2008년 비트코인 제안서도 그의 나이를 시사한다. 거기서 그는 지난 20년 동안 문제가 된 적이 없는 ‘디스크 공간’이라는 컴퓨터 용량 용어를 사용했다. 또 195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옛 연구 결과를 인용했다. 그 제안서의 구두법도 도리언 S 나카모토의 글쓰는 방식과 일치한다. 마침표를 찍은 뒤 두 칸을 띄우는 등 서식의 별난 특징이 같다. 또 대문자와 소문자를 마음대로 섞어 쓰고, 어떤 때는 약어를 썼다가 어떤 때는 철자를 전부 다 쓰고, 정식 영어와 은어를 섞어 쓰는 특징도 같다.

사토시 나카모토는 단어를 영국식과 미국식으로 섞어 사용한다는 점도 드러났다. 그레이스 미첼은 남편도 그런 습관이 있다고 말했다. 그레이스 미첼은 남편의 영어가 모형기차 수집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영어를 한창 배우던 10대 시절 영국산 모형기차를 여러 개 구입했다.

미첼은 나카모토가 디지털 통화 개발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이 모형기차를 구입하려고 영국에 송금할 때 발생하는 수수료 때문이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남편은 늘 송금과 환전 수수료에 불만이 많았다.”

아들 에릭은 아버지가 비트코인 창시자인지 확실히 모르겠다고 말했다. 비트코인 창시자의 메시지는 “아버지의 글보다 좀더 간결하고 세련됐다. … 아버지는 글을 쓸 때 불필요한 말을 많이 넣고 옆길로 새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두 나카모토 사이에서 가장 유사한 점은 전문기술과 경력 기간이다. 앤드리슨에 따르면 사토시 나카모토는 비트코인 개발에 오랜 세월이 걸렸다고 말했다. 그 기간은 도리언 S 나카모토가 일정한 직장이 없던 때와 맞아 떨어진다(그런 상황이 2001년부터 시작됐다). “사토시는 비트코인을 출범시킬 때까지 수년이 걸렸다고 말했다”고 앤드리슨이 돌이켰다. “원래 코드를 만드는 데만 최소한 2년은 걸렸을 것 같다.”

또 최근 사토시 나카모토의 3년에 걸친 침묵은 도리언 S 나카모토의 건강 문제와도 맞아 떨어진다. “몇 달 전 남편에게 뇌졸중이 왔고 그 전에는 전립선암에 걸렸기 때문에 매우 힘들었다”고 아내 미첼이 말했다. 미첼은 남편에게 자신이 비트코인 창시자인지 밝히라고 했지만 그를 설득할 수 없었다. 아들 에릭은 아버지가 자기 말로 부인했다고 말했다. 동생 도쿠오 나카모토와 아서 나카모토는 형이 절대로 진실을 밝히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형은 편집광적”이라고 도쿠오는 말했다. “난 정말 이해할 수 없다. 형은 가족에게도 솔직하게 답해주지 않을 게 분명하다.” 물론 이런 상황은 가장 중요한 의문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나카모토는 왜 비트코인 재산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그와 가족은 그 돈이 절실히 필요했는데도 말이다.



그림조각 맞추기앤드리슨은 그 답이 간단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나카모토는 비트코인 열풍에 뛰어들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비트코인 창시자로 드러나면 공식 석상에 참석하고 설명을 하고 언론에 논평을 해야 한다. 사토시의 성격에 절대 맞지 않는 일이다. 그는 이제 진심으로 비트코인을 이끌고 싶어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

어쩌면 나카모토가 비트코인 재산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보안열쇠를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앤드리슨은 그럴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는 아주 철저한 사람이다.”

나카모토가 자신이 보유한 비트코인을 판매한다면 합법적인 비트코인 은행이나 거래소를 이용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수밖에 없고, IRS부터 FBI까지 모두가 그에게 달려들 것이다. 앤드리슨은 그가 비트코인을 사용하는지 확인하려고 모두가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앤드리슨은 나카모토의 익명성을 존중하고 싶다고 말했다. “프로그래머들이 모일 때면 우리는 사토시 나카모토의 정체를 두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더 많은 비트코인에 투자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이야기만 한다. 물론 우리도 그의 정체가 궁금하지만 솔직히 말해 파고들 정도로 관심은 없다.”

딸 아일린 미첼은 부친이 비트코인의 아버지일 가능성을 두고 “기절초풍할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만약 아버지가 비트코인 창시자라고 해도 그가 정체를 감추는 게 놀랄 일이 아니다. “아버지는 무슨 일에서든 정부의 간섭을 아주 싫어했다. 내가 어렸을 때 아빠와 함께 이런 놀이를 했다. 아빠가 ‘정부 요원들이 너를 잡으러 왔다’고 말하면 내가 옷장 속에 숨는 게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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