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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의 ‘신뢰 디플레이션’ - 전망은 죄다 틀리고 정책 대응은 미적대고

한국은행의 ‘신뢰 디플레이션’ - 전망은 죄다 틀리고 정책 대응은 미적대고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경제 전망은 어렵다. 미래는 불확실하기 때문에 예측의 오차는 불가피하다. 따라서 나중에 ‘전망이 맞았다 틀렸다’를 비교 평가하는 것은 사실 의미 없는 일이다. 한국은행의 전망과 예측도 틀릴 수 있다. 하지만 오차의 범위가 너무 크고, 다른 기관에 비해 현저히 틀리고, 예측 능력이 갈수록 떨어지거나 잘못된 예측이 반복된다면 그것은 분명 비판 받아 마땅하다. 한은의 경제 전망이 갖는 사회·경제적 영향력과 책임을 감안하면 그렇다.
 물가 전망과 실제치 차이 1%P 넘어
자료: 한국은행·통계청
지난 3년 간의 물가 전망을 보면 한국은행은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은행은 1년에 네 차례 경제전망 보고서를 낸다. 1월(금년 경제 전망), 4월(금년 경제 전망 수정), 7월(하반기 경제 전망), 10월(금년~내년 경제 전망)이다. 본지는 지난 3년 간 한은의 연초 물가 전망과 실제치를 비교했다. 결과부터 말하면 낙제점이다.

올 1월 한은은 2014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연간 2.3%로 전망했다. 상반기 1.7%, 하반기 2.8%다. 실제는 어떨까. 올 1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1.1%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이후 6개월 평균 상승률은 1.4%다. 이러자 한은은 7월 하반기 경제 전망에서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1.9%로 하향조정했다. 기획재정부도 이에 맞춰 전망을 하향 조정했다. 하지만 하반기 전망은 더 엉망이었다. 8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4%, 9월은 1.1%, 10월은 1.2%에 그쳤다. 하반기로 갈수록 경기가 회복되면서 물가가 오를 것이라는 전망은 완전히 빗나갔다. 급기야 한은은 10월 ‘2014~2015 경제 전망’에서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1.4%로 내렸다. 연초 전망과 0.9% 포인트 차이다.

2013년에는 어땠을까. 연초 한은이 전망한 2013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5%였다. 결과적으로 최악의 전망이었다. 2013년에 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를 넘은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결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3% 증가에 그쳤다. 한은 전망과 무려 1.2%포인트 차이다. 이는 통계학적인 측면에서 전문가들이 양호한 예측이라는 인정하는 오차 범위를 훨씬 넘어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수치는 물론 방향성 예측도 완전히 틀렸다는 것이다.

한은은 2013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상저하고’를 보일 것으로 전망했다. 상반기 2.1%, 하반기 2.9%였다. 하지만 2013년 상반기 월 평균 상승률은 1.4%, 하반기는 1.2%였다. 한은 전망과 반대다. 한은 간부가 쓴 <경제 전망의 실제> 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경제 정책을 수행하는 입장에서 보면 경기 흐름의 상저하고 또는 상고하저, 연착륙 또는 경착륙 등 경기 변동의 방향성과 강도를 얼마나 정확히 판단해 낼 수 있는지가 정책 성공의 중요한 열쇠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한마디로 한은의 물가 전망은 정책을 수립하는 정책 당국에 맞지도 않은 엉뚱한 열쇠를 쥐여준 꼴이 됐다.

2011~2012년도 마찬가지였다. 2012년 한은 전망치는 3.3%였다. 실제치(2.2%)와 1.1%포인트 차이가 났다. 2011년에는 3.5%로 전망했는데 실제로는 4%였다. 이런 문제는 지난 국정감사에서도 지적된 바 있다. 당시 이한구 새누리당 의원은 “한국은행은 가장 부정확한 전망 기관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잘못된 전망으로 경제 망친 일본은행 전철 밟나
자료: 각 기관 취합
잘못된 전망은 심각한 정책 리스크를 초래할 수 있다. 과거 일본 사례를 보면 이해가 쉽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최근 내놓은 ‘일본의 90년대 통화정책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정부와 중앙은행은 1990년대 초반 일본의 경제 여건을 낙관적으로 판단했다. 수 년 간 일본은행(BOJ)의 경제 전망은 실제와 큰 차이를 보였다. 1992~1993년 일본은행의 국내총생산(GDP) 전망과 실제치 사이에는 무려 1.5~2.8%포인트 차이가 있었다.

물가 전망치 역시 1%포인트 이상 차이가 났다. 이는 일본 경제에 치명타가 됐다. 당시 일본 통화당국은 디플레이션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물가 안정이란 인플레이션도 디플레이션도 없는 상태’라는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이재준 KDI 연구위원은 “1990년대 일본 통화당국은 물가 안정에 대한 기준과 정책의지가 분명치 않았으며, 인플레이션 기대를 형성해 사전적 의미의 실질금리를 낮추는 데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했다. 잘못된 전망이 잘못된 정책 대응을 낳았다는 얘기다.

지난 3년 동안 한은은 1990년대 초반 일본 통화당국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다. 2011년 이후 우리나라는 경기 회복이 지연되면서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디스인플레이션 현상이 이어졌다. 지난 10월까지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4개월 연속 1%대다. 더욱이 소비자물가지수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여러 측정 오차로 인해 실제보다 1% 정도 높게 측정되는 경향이 있다. 이를 상향편의라고 하는데, 물가지수와 실제 체감지수가 다른 한 요인이다. 이를 감안하면 우리나라 물가는 사실상 디플레이션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한은은 ‘인플레 파이터’라는 명분만을 고집하며 기준금리를 뒤늦게, 소폭 낮추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저인플레이션은 실질금리를 올리기 때문에 기준금리를 내려 경기를 부양하는 효과를 반감시킨다. 이런 배경에 한은의 낙관적인 물가 전망이 자리 잡고 있다. 대다수 민간경제 기관은 내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1%대로 내다보는데, 한은의 전망치는 2.3%다.

우리 경제를 다른 나라와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주요국 중앙은행은 달라진 경제 패러다임에 발 빠르게 대처하고 있다. 세계 각국 중앙은행들은 인플레이션 타깃팅을 통한 통화정책 운용 방식을 버리고 ‘디플레이션 파이터’로 역할을 바꿨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저성장·저물가 기조가 고착되면서 물가·금융시장 안정에서 경제성장 동력을 키우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미국과 일본의 양적완화는 말할 것도 없고, 최근 중국·유럽 등도 기준금리 인하 경쟁을 벌이고 있다.

중국 인민은행은 11월 21일 1년 만기 예금금리를 3.0%에서 2.75%로, 대출금리를 6.0%에서 5.6%로 각각 내렸다. 2012년 7월 이후 2년 4개월 만의 금리 인하다. 유럽중앙은행(ECB)도 돈풀기 경쟁에 참전했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11월 21일 유럽금융회의에 참석해 “ECB가 목표로 하는 인플레이션율 달성을 지체 없이 이루도록 자산 매입 규모와 속도, 종류를 그에 맞춰 바꿔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이는 ECB가 앞으로 국채 매입에 속도를 낼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전통적 매파로 분류되는 드라기 총재가 이처럼 ‘화끈한’ 발언을 한 것은 이례적이다.

현재 같은 상황이라면 미 연방준비제도(Fed)도 쉽사리 통화완화를 갈무리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지난 200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가 최근 미국의 ‘완전고용실질이 자율’을 추산한 결과 -1%까지 떨어졌다. 완전고용실질이자율이란 기업의 투자회복이 이뤄져 완전고용이 달성되는 실질적인 금리 수준을 뜻한다. 최근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목표가 물가 안정에서 경기 부양으로 변화하며, 미국에서는 새로 대두되는 개념이다. 이 지표가 마이너스로 떨어졌다는 것은 현재 미국의 통화정책으로 고용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으며, 저금리 기조가 앞으로 장기적으로 필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금융통화위원을 지낸 강명헌 단국대학교 교수는 “미국의 경기가 개선돼 조만간 금리를 올릴 것이란 평가가 많고, 그 전망에 따라 달러화 자금을 흡수하겠지만 섣불리 금리를 올릴 호락호락한 상황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기준금리 ‘2%’는 한은의 마지노선?
한은도 올해 8월과 10월 두 차례 기준금리를 내리면서 이 같은 글로벌 흐름에 동참하는 듯했다. 하지만 두 차례 인하 모두 정부의 압박에 못 견딘 타의적 결정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무엇보다 한은이 여전히 물가상승률 전망에 의존한 인플레이션 타깃팅에만 목매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인플레이션 타깃팅은미리 설정한 범주 안에서 물가상승률이 벗어나지 않도록 통화량을 조절하는 전통적인 통화정책 방법이다. 1980년대 물가 안정이 중요하던 시대에 쓰이던 기법이다.

한국은행이 국내외 경제환경 변화에 눈 감고 있고 ‘물가 안정’이란 법적 테두리 안에서 안주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한국은행은 인플레이션 타깃팅만 신경을 쓰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기 직전인 2008년 8월 기준금리를 인상하는 우를 범하며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오정근 아시아금융학회 회장은 “경기 반전을 위해서는 물가상승률이 명목금리를 앞서야 하는데 계속 마이너스”라며 “특히 엔화·위안화 약세 등 환율 위협을 받고 있는 한국의 경우 통화정책의 전향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한은은 사상 최저 수준인 기준금리(2%)를 더 내릴 수 있을까. ‘2%’는 한국은행 입장에서 다소 특별한 경험을 담은 수치다.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긴급상황 에 처음으로 내려가 봤던 지점이다. 인플레 파이터라는 성향을 처음 깨부수고 기준금리란 ‘큰 칼’을 휘두른 일종의 사건이었다. 물론 금융 안정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동적 대처였다. 더 아래로 내려가 본 적은 없지만, 사상 초유의 위기 상황에 대처하며 자신의 행동반경을 2%로 정한 계기이기도 했다. 강명헌 교수는 “한국은행은 물론 금융통화위원회, 일부 시장 관계자들도 2%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며 “일종의 금리 마지노선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고 지적했다. 결국 2%의 하한선을 그려놓고 통화정책을 운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한국은행 관계자는 “2%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더 나빠질 수 있는 경제환경에 대비해 정책적 여력을 남겨두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시장 일각에서는 한국은행이 금융시장에서 존재감을 지키기 위해 2%를 고수한다는 분석도 제기한다. 기준금리란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환매조건부채권(RP) 7일물 목표 금리를 뜻하는데, 한국은행은 RP 7일물 금리가 금융통화위원회가 정한 기준금리에 부합하도록 발행 물량을 조절한다. 금융회사들은 단기자금을 RP 거래에 활용한다. 한국은행은 RP 물량 조절을 통해 자연스럽게 금융회사의 지급준비율은 물론 장기채 금리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기준금리가 1%대로 내려오면 RP거래가 줄게 되고 자연스럽게 한국은행의 통화정책 영향력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오정근 아시아금융학회 회장은 “기술적으로 채권이 안 팔린다는 이야기로 공개시장조작이 영향력을 잃게 되고 역설적으로 시장에 돈이 공급이 되지 않을 수 있다”며 “한국은행이 시장의 불확실성을 해소해주는 확고한 정책적 의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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