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 “열려라! 금강산” -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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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 “열려라! 금강산”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 “열려라! 금강산”

재계에서 ‘승부사’로 불리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지난 1년간 결단과 실행은 매서웠다. 최근 구조조정을 통해 3조3000억원 규모의 자구계획을 성공적으로 이행하며 유동성 위기에서 탈출했다. 때마침 현대상선과 현대엘리베이터 등 주력 기업도 살아나고 있다. 대북사업에서 기지개를 펼 차례다.

“정주영 회장께서 온 몸으로 열어놓으신 금강산 관광이 7년째 답보 상태라 송구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길 바라는 의미에서 ‘열려라! 금강산’으로 건배사를 하겠습니다.”

지난 3월 18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제42회 상공의 날 기념 오찬에서 건배사를 하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목소리는 살짝 떨렸다. 그는 이날 국가경제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최고 영예인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금탑산업훈장은 태극무공훈장, 무궁화장 등과 같은 1등급으로 기업인이 기업 활동을 통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이다. “시아버지이신 정주영 명예회장과 남편인 정몽헌 회장이 받으신 그 상을 저도 받게 되어 영광”이라고 소감을 밝힌 그는 수상 직후 두 딸인 정지이 현대유엔아이 전무와 정영이 현대상선 대리, 사위, 손녀 등과 함께 다정하게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룹 계열사 사장들과도 사진촬영을 하며 축하 인사를 나눴다.

행사를 주최한 대한상의는 ‘현정은 회장이 한국을 대표하는 긍정과 창조의 여성 기업인으로 현대상선의 재도약, 현대엘리베이터 해외시장 개척 등을 이뤘다’고 소개했다. 금강산 관광 중단 등 어려운 여건에서도 남북 경제협력 확대를 위해 노력한 점도 높이 평가했다. 그룹 유동성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선제적 자구계획안을 마련해 1년여만에 100% 초과 이행한 점도 고려됐다. 긍정적 평가는 해외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포브스아시아는 현 회장을 ‘아시아 파워 여성 기업인 50인’에 선정했다.

이 같은 대내외 평가에 힘입어 현대그룹 내부는 ‘다시 뛰자’며 서로를 응원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지난 4월 중순 오랜 만에 찾은 서울 연지동 현대그룹 사옥엔 활기가 돌았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올 들어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다”며 “제 살 깎는 아픔이 있었지만 현실을 인정하자, 이젠 상승할 일만 남았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분쟁·구조조정 거치며 경영능력 입증

2014년은 현 회장에게 ‘고난의 시간’이었다. 2013년 12월 현대그룹은 주력 업종인 해운업의 장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현 회장은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과 협의해 3조3000억원의 선제적 자구안을 발표하며 위기탈출을 선언했다. 이후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오릭스에 현대로지스틱스를 매각해 6000억원을 조달했고, IMM인베스트먼트에 현대상선LNG운송사업부문을 매각해 9700억원을 확보했다. KB금융지주 지분과 부동산 등 자산 매각으로 4509억원를 확보했고, 현대엘리베이터와 현대상선의 자기자본 확충으로 2973억원을 더했다. 자구계획에 없던 물류계열사 현대로지스틱스 지분도 매각했다. 이로써 총 자구실적은 1년여 만에 100%를 훌쩍 넘겼다. <표 참조>

현재 현대증권·현대자산운용·현대저축은행 등 금융 3사 매각을 우선협상대상자인 오릭스PE와 진행 중이다. 5월까지 매각작업을 완료한다는 방침이다. 매각대상인 현대증권 지분 36.9%의 장부가는 6100억원 수준. 현대그룹은 자산유동화대출(ABL)로 받아온 2000억원을 빼더라도 최소 4000억원 이상의 자금유입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지난 1년 새 사실상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빠른 속도로 유동성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데는 현 회장의 강단 있는 결정과 실행이 크게 작용했다는 평가다. 그는 그룹 회생을 위해선 뼈를 깎는 구조조정이 필수라고 판단했고 속전속결로 진행했다. 비슷한 시기 각각 3조원대의 자구계획을 발표했던 동부, 한진의 현재 성적표와 비교하면 현 회장의 추진력이 잘 드러난다. 그룹 관계자는 “자구안을 발표한 2013년 말 행동에 옮기기 시작해 올해 초에 사실상 마무리할 만큼 빠르고 과감한 구조조정이었다”며 “금융권과 시장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신뢰를 회복한 것이 가장 큰 성과”라고 말했다.

현 회장은 그동안 위기 때마다 특유의 승부사 기질을 보여 왔다. 2003년 10월 취임 직후 현 회장은 시숙부인 정상영 KCC 명예회장의 경영권 공격을 받았다. 당시 현 회장은 ‘국민주 발행’이라는 파격 카드를 꺼내들며 주주들의 지원을 받아 경영권 방어에 성공했다. 2006년 현대중공업이 현대상선의 지분 26.7%를 대거 인수했을 때도 큰 위기였다. 현 회장은 현대엘리베이터를 통해 현대상선 우호지분을 45%까지 확보하며 경영권을 또 한번 지켜냈다. ‘어금니가 빠질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후일담도 있다.
 현대상선·엘리베이터 실적 호조
▎1. 현대상선 컨테이너선이 세계 최대 해운동맹 ‘G6’의 서비스 항로인 아시아-구주 노선을 항해 중이다. / 2.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지난 2013년 7월 서울 연지동 그룹 본사에서 열린 고 정몽헌 회장 10주기 추모 사진전 개막식에서 임직원 1만여 명의 얼굴 사진으로 구성한 고인의 대형 모자이크 사진에 마지막 조각을 붙이고 있다.

▎1. 현대상선 컨테이너선이 세계 최대 해운동맹 ‘G6’의 서비스 항로인 아시아-구주 노선을 항해 중이다. / 2.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지난 2013년 7월 서울 연지동 그룹 본사에서 열린 고 정몽헌 회장 10주기 추모 사진전 개막식에서 임직원 1만여 명의 얼굴 사진으로 구성한 고인의 대형 모자이크 사진에 마지막 조각을 붙이고 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현 회장은 보란 듯이 기업 성장을 이뤄냈다. 2003년 8조원이던 그룹자산을 2013년 30조원으로 증가시켰고, 같은 기간 매출은 5조원에서 12조원으로 2배 이상 올려놓았다. 영업을 최우선시하고 전사적 비용 절감 캠페인을 전개하는 등 내실을 다진 게 주효했다. “정몽헌 회장의 죽음, 시댁과의 경영권 분쟁, 대북사업 중단 등을 겪으면서 그동안 현 회장을 바라보는 국민정서엔 안타까움이 있었다”는 기자의 말에 그룹 관계자는 “그런 시각도 있었지만 위기를 극복하면서 글로벌기업의 경영자, 여성리더로서의 평가가 최근 이뤄지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또 “이미 자구계획이 마무리된 만큼 이제 주력기업인 현대상선,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아산을 중심으로 그룹을 재건하는 일만 남았다”고 했다.

다행히 남아있는 주요 계열사의 최근 실적은 상승세를 나타내고 있다. 무엇보다 현대엘리베이터의 급성장이 돋보인다. 현대엘리베이터는 2014년 매출 1조2110억원, 영업이익 1288억원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전년 대비 매출액은 13.7%, 영업이익은 24.9% 성장한 수치다. 제조업 분야에선 드물게 영업이익률 10%를 기록했다. 부동산 경기 활황에 따른 신규설치 점유율 확대, 유지보수 이익 증대 덕분이다. 현대엘리베이터의 지난해 국내시장 점유율은 48.4%로 2007년 이후 8년 연속 1위에 올랐다.

글로벌 시장에서의 빠른 성장세도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 3월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 프로젝트 승강기 전량(1668대) 수주를 시작으로 브라질 공장 준공, 베트남 신규법인 설립, 4개 해외대리점 신설, 터키 이스탄불 지하철 승강기 수주 등 굵직굵직한 성과를 거뒀다. 지난해 1월 중국 현지법인 상해현대전제제조유한공사의 지분 100%를 확보한 후 중국에서만 승강기 7000여 대를 설치했다. 같은 해 4월엔 연 생산 3000대 규모의 브라질 공장을 완공해 남미 시장 진출의 거점을 마련했다. 올해 매출 목표는 1조3322억원이다.

현대상선도 1분기 흑자 전환이 확실해 보인다. 1분기는 보통 컨테이너 비수기로 꼽히지만 자구 노력과 함께 국제 유가까지 하락하면서 경영 상황이 빠르게 호전됐다는 설명이다. 현대상선 측에 따르면 현대상선의 유류비는 2013년 1조3000억원에서 지난해 1조원 안팎으로 줄었다. 최근에는 컨테이너 운임 상승 추세까지 겹치면서 현대상선 내부에선 ‘바닥을 쳤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현대상선의 올 1분기 영업이익은 407억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난해 1분기 617억원 영업 손실에서 흑자전환을 이뤄낸 수치다.

국내 해운업계 2위인 현대상선은 2010년 이후 5년 동안 적자행진을 해왔다. 지난해 연결기준 매출 6조7760억원, 영업 손실 2321억원을 냈다. 계속되는 적자경영으로 부채비율이 한때 1185.8%까지 올라갔고 신용등급은 투기등급으로 떨어졌다. 이 때문에 현 회장은 지난해부터 현대상선의 구조조정을 강하게 추진하고 있다.

현대상선 역시 해외공략에 적극적이다. 현 회장은 지난해 컨테이너 1만3100개를 실을 수 있는 초대형 컨테이너선 5척을 아시아-유럽 노선에 추가 도입했다. 이를 통해 원가경쟁력을 강화시키고 글로벌 네트워크를 대서양과 중미·남미까지 확장시켰다. 아울러 해외 물류단지와 터미널 투자에도 나서고 있다. 중국 훈춘 국제물류단지가 2019년 개장을 목표로 건설 중이며 네덜란드 로테르담 컨테이너터미널이 2015년 개장을 앞두고 있다. 그룹 관계자는 “해운 경기 불황 속에 국내 5대 해운사 중 한진해운, STX팬오션, 대한해운의 주인이 바뀌었다”며 “그 사이 부채율을 줄이며 살아남은 것 자체가 현대상선의 저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금탑산업훈장 수상시 건배사로 등장한 ‘열려라! 금강산’은 지난해 11월 금강산에서 열린 금강산 관광 16주년 기념 남북공동행사 오찬 자리에서 현 회장이 북측 관계자들과 함께 외쳤던 구호다. 현 회장은 대북사업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열려라 금강산’ 이뤄야 기업 활로
올해 신년사에서 “최근 금강산 관광 등 남북경제협력의 필요성이 논의되고 있다”며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이 만들어지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현대그룹이 만들어가고 있음을 한순간도 잊지 말라”며 대북사업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현대아산은 금강산 관광 재개가 결정되면 2개월 안에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내부적으로 준비해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아산의 조건식 사장은 통일부 차관 출신으로 남북관계 전문가다.

현 회장은 남북 우호 분위기 조성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해에만 세 번이나 북한을 다녀왔고 12월 북측의 요청으로 이뤄진 방북에서는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친서도 받아왔다. 공식석상에서도 조속한 금강산 관광 재개의 바람을 드러내고 있다. 현 회장은 지난 1월 전경련 주관으로 왕양 중국 국무원 부총리와 오찬 행사가 있을 때 참석해 왕 부총리에게 대북경제협력 사업에 대한 중국의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대통령 해외순방 동행 등 대외활동이 부쩍 늘어난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분석이다.

금강산 관광은 현대그룹에게는 돈 이상의 가치를 지닌 사업이다. 현대그룹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사업이다. 현 회장의 입장에선 정주영 명예회장의 유지이며, 정몽헌 회장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사업인만큼 큰 숙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여러 변수가 생기면서 대북사업의 실마리를 아직까지는 풀지 못하고 있다. 2008년 금강산 관광 중단에 따른 현대아산의 매출 손실은 지난해 말 기준 약 1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올 들어 분위기가 긍정적으로 바뀌는 흐름이다. 북한이 신년사를 통해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를 밝혔고, 박근혜 대통령도 올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남북관계의 전기를 만들자고 화답했다. 그룹 관계자는 “정몽헌 회장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합의한 남북경협 사항 중 그동안 금강산관광만 실행됐다”며 “유훈을 중시하는 북의 정서상 합의사항은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아산의 대북 경협사업 독점권을 북측에서 보장할 것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현정은 회장에겐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남은 계열사인 현대상선과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아산을 중심으로 그룹을 재정비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고 있다. 현대상선의 실적 회복과 현대아산의 대북 사업 활성화는 현 회장 리더십의 성공을 결정하는 중요한 열쇠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해운경기는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남북관계는 정치 상황에 따라 하루아침에 경색될 수 있다.

재계 안팎에선 현대상선과 현대아산 등 현대그룹의 사업이 외부 환경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기업의 자체 역량과 관계없이 외부의 파고에 휘둘릴 수 있다는 것이다. 재계단체 한 관계자는 “현대그룹의 구조조정이 완전히 마무리되면 향후 경쟁력을 갖춰 나갈 수 있는 새로운 사업을 찾아나서야 할 것”이라며 “구조조정 과정에서 경영 능력을 보여준 현 회장에게 신성장동력 창출이라는 또 다른 시험대가 펼쳐진 셈”이라고 말했다.

- 조득진 포브스코리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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