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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청년 창업가, 그들은 누구인가 (上)] 창업 동기는 생존 추구, 기회 포착, 자아 완성

[중국 청년 창업가, 그들은 누구인가 (上)] 창업 동기는 생존 추구, 기회 포착, 자아 완성

중국 청년 창업가 89명 심층 분석 … 기업가정신으로 똘똘 뭉친 창업형 리더



청년이 꿈꾸는 나라의 미래가 어두울 리 없다. 그런 면에서 중국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중국 관영 [환구시보]에 따르면 중국 청년 5명 중 2명은 창업을 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엇이 그들을 꿈꾸게 할까. ‘차이나 드림(中國夢)’을 향해 가는 그들은 누구일까. 중앙일보 중국연구소가 발행하는 [칭화 비즈니스 리뷰]는 1962년 이후 출생한 89명의 중국 청년 창업가를 심층 분석한 칭화대 산하 칭화비즈니스리더십연구소의 결과물을 소개했다. 무엇이 그들을 꿈꾸게 했는지, 어떻게 그 꿈을 실현해 나가는지 2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주]
중국 베이징에 있는 창업형 카페 ‘처쿠카페’. / 사진:중앙포토
중국에서는 누구나 다 꿈을 하나씩 품고 있다. 개혁 개방을 통해 일부 사람들을 먼저 부유하게 한다는 ‘선부론(先富論)’이 등장한 이후, 창업을 하거나 규모가 작더라도 자신의 사업체를 꾸리는 것을 일생의 꿈으로 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오피니언 리더들이 나서서 ‘차이나 드림(中國夢)’은 곧 ‘스타트업 드림(創業夢)’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는 저서 [혁신과 기업가 정신]에서 “모든 소기업들이 모두 ‘기업가 행위’를 하거나 ‘기업 정신’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드러커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라고 권장하지 않는다. 대신 창업이나 혁신 행위를 통해 인류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더 나은 품성을 함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경제와 사회, 문명이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는 것이다.

중국 경제가 개혁개방과 고속성장을 겪는 과정에서 창업가들과 혁신적인 경영자들이 다수 등장했다. 현실적인 의미에서 보면 이들이 곧 차이나 드림을 실행에 옮기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실행 과정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 있는 창업과 혁신적 가치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 칭화비즈니스리더십연구소(Tsinghua CLDR)와 글로벌 중국인(華人)기업자문센터(GCEC)는 2011년 5월부터 시작한 ‘중국기업 고위관리자 리더십 연구’를 통해 지금까지 1962년 이후 출생한 89명의 중국 기업가들과 고위관리자를 인터뷰했다. 이들이 속한 기업 규모는 3억 위안에서 수백 억 위안에 이르고, 일부 문화사업이나 비영리단체를 제외하고는 모두 빠르게 성장하는 중소기업이다. 기업 운영 햇수는 10년에서 25년 사이다.

이들은 모두 기업의 설립자이거나 관리자들이다. 직접 창업을 하든, 고위관리직에 있든 넘치는 기업가 정신으로 중국의 ‘중간 세대’ 리더를 대표한다. 드러커가 정의한 ‘창업형 리더십’에 걸맞은 인물들이었고 우리는 이들을 ‘창업형 리더’라 불렀다. ‘중간 세대의 기업 리더’를 대표하는 인물들이기도 했다. 이 글 속에 등장하는 인터뷰 응답자는 모두 알파벳과 숫자의 조합으로 표현된다. 알파벳 G는 창업형 기업가, M은 창업형 전문경영인, E는 기업 후계자, I는 사회단체 창립자다. 알파벳 뒤의 숫자는 인터뷰를 진행한 순서다.

우리가 연구한 집단은 스스로 ‘분열의 세대’라고 부르는 이도 있고 ‘실의에 빠진 세대’라고 부르는 이도 있었다. 이들은 중국사회에서 일어난 모든 변혁의 단계를 거쳤다. 그러나 학업을 중단할 상황까지는 아니었다. 공부에 대한 열정만 있으면 누구나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으며, 무난하게 상급 학교로 진학하며 대학도(심지어 석·박사까지) 갈 수 있었다. 이들은 개혁 개방이 만고불변의 진리라 굳게 믿었다. 또한 독립적인 경영 실체로서 기업들에게 주어진 ‘경영책임’이라는 개념을 자연스럽게 습득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개인 사업자(個體)’ ‘재산(財富)’ ‘자기설계(自我設計)’와 같은 개념을 어느 정도 이해했으며, 스스로 진로를 설계할 수 있는 일정한 기회를 얻었고 또 이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이들은 혁신을 시도하고 변화에 도전하며 중국의 미래에 대해서도 각자 나름의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중국이 더욱 개방되고 다원화된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들의 마음속에는 자신과 미래 세대를 위한 꿈이 자라났다. 우리는 이것을 ‘기업가들의 차이나 드림’이라 이름 붙였다. 이들의 꿈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이고, 어떤 색일까. 주제는 무엇이며 혹시 중간에 꿈이 바뀐 적은 없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들의 꿈과 레노버의 류촨즈, 하이얼의 장루이민, 완커그룹의 왕스 같은 시대를 풍미한 인물들이 꾼 꿈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들의 마음속 변화, 화려한 커리어, 일상에서의 다양한 경험은 새로운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과 향후 20년간 중국을 이끌 차세대 리더가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더없이 귀중한 교훈이 될 것이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창업형 리더들의 꿈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그 동기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생존 추구다. 생존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다. 가장 우선적인 창업 동기는 가난과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자신과 가족들이 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랐거나 ‘가난’과 ‘출신’ 때문에 남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기 위해 이들 마음 속에는 사회적 지위를 추구하려는 욕망이 생겨났다. 인터뷰 대상자 가운데 수많은 창업자들의 최초 동기는 바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G52는 졸업한 뒤 철도부에 취직했다. 주변에서는 다들 괜찮은 직장이라고 했지만 월수입이 고작 113위안(한화 2만원)에 불과했다. 그는 “풍족한 생활에 대한 동경이 나의 원동력이었다. 대학까지 졸업하고도 집에 손을 벌리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털어놓았다. G25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창업을 하게 된 가장 원초적인 동기는 부모님이 남들보다 좀 더 나은 생활을 하셨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때 우리는 비좁은 옛날식 주택에 살고 있었고 그 동네에서 제일 늦게 흑백TV를 컬러로 바꿨다. 나는 우리 집 TV를 옆집이나 친구네보다 더 큰 컬러 TV로 바꿔주고 싶었다.”

지금은 물질적 빈곤에서 벗어난 시대지만 물질에 대한 사회적 욕망은 늘어만 간다. 수많은 사람이 자신은 상대적인 빈곤에 처해 있고 금전이나 물질로 자신을 열심히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생존을 위한 투쟁 수단으로서의 창업은 여전히 차이나 드림을 꾸게 하는 중요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기회를 잡아라
두 번째 동기는 기회 포착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는 모험가들에게 천국이나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늘어나는 고객 수요는 방대한 비즈니스 기회를 창출했고, 여기에 과감히 뛰어드는 자는 남보다 먼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절호의 기회는 비교적 안정적인 위치에 있는 기술자나 공무원들까지 비즈니스 세계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더러는 ‘룰의 사각지대’를 이용한다든지 ‘은밀한 정경유착’을 통해 기회를 포착하고 막대한 부를 거머쥐기도 한다. 정보를 손에 넣으면 상대를 일격에 쓰러뜨릴 수 있고, 시대의 흐름을 잘 타면 사업이 승승장구할 수 있다.

기회 포착 역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순수한 우연, 둘째는 인맥을 통해 생겨난 기회, 셋째는 관찰과 연구를 통해 통찰해 낸 기회다. G14는 졸업 후 주하이(珠海) 경제특구로 갔다. 그곳에서 7년간 공무원 생활을 한 끝에 창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유는 당시 소속기관에서 자신을 3차 산업에 속하는 서비스 회사로 보냈기 때문이다. 업무는 잘 수행했지만 국가 정책이 조정되면서 기관이 더 이상 기업을 운영할 수 없게 되자, 기관은 그를 다시 조직으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그는 이미 정부기관을 나오면서 “한번 나온 이상 다시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고 결심한 터였다. 그 뒤 본격적으로 사업가로 변신한 그는 친구와 함께 하니웰 제품 대리점을 차렸다. 그 뒤 계속해서 업종을 바꾸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영어시험 교육 분야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중국 최대 규모의 영어학원을 차렸다.

국가기관의 제도개혁 기회를 포착해 전문경영인에서 창업자로 변신한 사례도 있었다. M61은 회사의 현직 실무 담당자이자 기존 그룹 소속의 경영대표다. 그는 중국과학원 소속 산하 그룹에서 프로젝트와 부서를 이끌었다. 그 뒤 하나의 자회사로 독립해 한 해 100만 위안에 달하던 매출액을 불과 3~4년 만에 7000만~8000만 위안까지 끌어올렸다. 이후 2000년 체제개혁으로 국유주식의 지분 비중이 50% 이하로 낮아지자 자연인 신분으로 주주총회에 들어가 그 길로 경영자가 됐다.

G89는 2006년 식품안전 파동 뉴스 보도를 보며 비즈니스 기회를 감지했다. 당시 그는 가장 전통적인 방식의 양돈 산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료에서 도살까지 모든 과정을 처리하며 돈육식품을 공급하는 업체였다. 그는 학력은 높지 않았지만 통계수치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는 능력이 있었다. 식품 지출에서 돈육이 차지하는 비중을 살펴보니 70%였고, 돈육 산업은 1992년부터 연간 2.3%의 복합성장률(CAGR)을 기록하고 있었다. 2011년 중국의 돼지 소비량 6.9억 마리 가운데 85%는 연간 도살수가 150마리 미만인 개인 양돈가의 공급 물량이었다.

산업사슬이 끊어진 탓에 양돈 산업의 규모화를 이뤄야만 식용 돈육의 식품안전 리스크를 없앨 수 있었다. 그는 타이완에서 전문가를 모시고 해외 돼지품종을 수입해 체계적인 방법으로 양돈 사업을 키웠다. 현재 사업체의 연간 양돈 생산량은 60만 마리에 달하고, 2012년 7월에는 홍콩 증시에도 상장했다.

G33은 기업 설립 초창기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강력한 ‘뒷배경’을 지닌 라이벌을 만났다. 당시 회사가 소재한 시의 부시장이 거래처 사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자신들의 회사가 아닌 다른 업체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는 팀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남들보다 수준이 한참 떨어졌다면 경쟁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수준 자체가 다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경쟁을 하는 것은 그들과 수준 차이가 얼마 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끝까지 버티는 것이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이를 악물고 버티는 사람이 결국 성공하게 될 것이다.” 그는 재빨리 행동에 들어갔다. 팀원들과 함께 밤낮 없이 준비를 한끝에 결국 회사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프로젝트를 완수했다.

G02는 법학 전공자다. 사법기관에 재직한 경험도 있다. 그는 법조인의 경우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 없으며 고작해야 혼자서 각개격파로 꾸려 나가는 ‘자영업자’ 정도라고 생각했다. 또 자신의 지혜는 그 누구도 복제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중국에는 시장조사를 할 만한 사안들이 충분하고, 산업화 과정을 연구하면서 효율적인 조사 시스템을 마련한다면 얼마든지 상업적인 측면의 규모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아(小我)에서 대아(大我)로
세 번째 동기는 자아 완성이다. 수많은 창업자는 자기 동력이 무척 강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신념과 꿈이 있고, 남에게 자신을 증명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더 나아가 타인과 국가에 기여를 하겠다는 일종의 ‘구원에 대한 책임감’이나 ‘사회 개조에 대한 사명감’을 갖기도 한다. 즉 개인의 가치와 사회의 가치를 단단히 결부시켜 소아(小我)에서 대아(大我)로 나아가는 것이다.

인터뷰 대상자들은 자신에게 아직 가치가 있다는 점을 자주 언급했다. 이들은 안락함의 울타리를 벗어나 더욱 큰 세계에 도전하고자 했다. 가령 G1의 경우 과거 국유기업에서 관리제도 개혁을 시도했고 전반적으로 기업의 효율성을 높였다. 하지만 관리자 계층과 원로 간부들의 이익 충돌 탓에 보다 심도 있는 개혁을 지속하지 못했다. 결국 1995년 그는 사직서를 내고 적자를 내는 시골기업의 유지보수 하청업체로 옮겼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하며 자신만의 무대를 만들어 갔다. 이와 유사한 스토리는 다수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 국유기업이나 정부기관, 연구원, 학교처럼 상대적으로 안정된 기관에 있었지만 “스스로 앞날이 빤히 보인다 느낌이 들어 창업을 생각하게 됐다”고 고백했다.

삶을 통해 자신의 자아를 완성해 가는 여정에서 사람들은 보통 타인을 만족시키는 일을 하다가 진정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깨닫고 모종의 선택을 하곤 한다. M09는 중국 모 유명 전자기업의 ‘소장파(少壯派)’였다. 젊은 나이에 자회사의 사장 자리에 오른 그는 40세가 될 무렵 자기 내면의 소리에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는 전자업계에서 10년 넘게 일했지만 그것이 이 사회에 갖는 의미는 제한적이라고 보고 스스로 강점과 약점을 다시 한번 돌아봤다. 투자업계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그는 자신이 쌓아온 산업계 경험과 경영 노하우를 활용하고, 여기에 자본의 힘을 빌려 중국 산업이 다시 한번 우위를 점하고 더 큰 경쟁력을 지니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의 인터뷰이 가운데 가장 특수했던 사례는 창업환경연구에 관한 비영리단체인 I81이었다. 1999년 그가 출간한 중국 수자원 조사에 관한 서적은 2004년 영어로 번역됐다. 2006년 미국 타임지가 뽑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하나로 선정된 그는 자신이 정말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는 환경보호가 다른 누군가와 대립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장 큰 핵심은 훌륭한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기업들에 우호적인 입장에서 출발한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이 결국 전체 시스템에 공평한 환경을 조성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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