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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좌익 매파가 부상한다

미국의 좌익 매파가 부상한다

러시아의 미국 선거 개입 의혹이 강경 반공노선 내세웠던 냉전 시대의 리버럴리즘 되살려
취임 선서 후 백악관 부근으로 행진하는 트럼프 대통령 부부. 러시아가 그의 선거를 도왔다는 의혹이 일면서 진보주의자들이 매파로 변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부터 제45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까지 흘러간 영화 ‘맨츄리안 캔디데이트(The Manchurian Candidate)’가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미국 소설가 리처드 콘돈이 1959년에 발표한 동명의 냉전 스릴러 소설을 원작으로 존 프랑켄하이머 감독이 1962년 발표한 영화다. 한국전쟁 당시 정체를 알 수 없는 세력에 납치돼 세뇌당한 미군이 미국 대통령 후보를 암살하려 한다는 내용이다. 이번 미국 선거에서 러시아가 개입해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을 도왔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불거진 상황에서 백악관에 꼭두각시를 앉히려는 소련과 중국의 음모를 다룬 이 영화가 인구에 회자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난 1월 뉴욕타임스 신문은 트럼프가 현대판 ‘맨츄리안 캔디데이트’가 아닌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 한달 전엔 NBC 방송의 패러디 코미디 쇼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도 그에 빗댄 에피소드를 방송했다. 상의를 벗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벡 베넷이 연기했다)이 트럼프(알렉 볼드윈이 연기했다)에게 “우린 당신이 최고의 후보, 가장 똑똑한 후보인 ‘맨츄리안 캔디데이트’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트럼프는 “‘맨츄리안 캔디데이트’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아주 굉장하게 들린다”고 맞장구친다.

영화 ‘맨츄리언 캔디데이트’는 역사가들이 말하는 ‘냉전 진보주의(Cold War liberalism)’의 대표적인 예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도입된 미국 국내의 진보정책(흑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고 뉴딜 스타일의 연방정부를 강조했다)과 대외적인 반공정책을 가리킨다.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연설이 그런 관점을 적절히 요약했다. 그는 자유 증진을 위해서라면 미국은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고, 어떤 부담도 기꺼이 떠안으며, 어떤 고난에도 의연히 맞설 뿐 아니라, 친구라면 누구라도 도와주고 적이라면 누구에게라도 저항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트럼프 신임 미국 대통령의 거리 초상화가 훼손됐다. 트럼프 대통령의 반나토주의로 유럽은 우려가 크다.
케네디 대통령은 ‘맨츄리안 캔디데이트’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고, 1963년 그가 암살된 후 배급이 중단됐다(영화에서 대통령 후보를 암살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음모가 드러나면서 케네디 암살의 섬뜩한 전조로 비쳤다). 아무튼 이 영화는 당시의 진보주의 시대 풍조에 찬사를 보낸다.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의 자부심 강한 회원도 등장하고, ‘매드맨(Mad Men, 1960년대 유명 광고 제작자의 일과 사랑, 권력 싸움을 그린 미국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섹스 어필도 있다. 예를 들어 기차 안에서 독신 여성(재닛 리가 연기했다)은 그 이전의 아이젠하워 시대에선 볼 수 없는 만용을 부리며 주인공(프랭크 시나트라)을 유혹한다. 마찬가지로 시나트라가 공산주의 음모를 밝혀내는 데 도움을 주는 이지적인 정신과 의사는 흑인이다.

요즘의 미국에도 ‘냉전 진보주의’가 되돌아온 듯하다. 미국 대통령 후보자 3차 토론에서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가 트럼프 공화당 후보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꼭두각시’라고 불렀을 때 일부 나이 많은 시청자는 1960년 대통령 후보자 토론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당시 케네디 민주당 후보는 미국과 소련 사이의 ‘미사일 격차’(나중에 허구로 드러났다), 대만 해협의 작은 섬 두 개에 대한 중국의 위협과 관련해 초강경 입장을 취해 리처드 닉슨 공화당 후보보다 더 우익에 섰다. 마찬가지로 이번 선거에서도 민주당은 러시아가 민주당전국위원회와 클린턴 캠프 선거본부장 존 포데스타의 개인 이메일을 해킹했을 수 있다는 의혹을 엄정히 수사하라고 정부를 압박했다. 또 민주당은 트럼프 캠프 간부들과 러시아 사이의 의심스런 통화에 대한 수사도 촉구했다.

게다가 흑인 인권운동가인 존 루이스 하원의원(민주당·조지아 주)이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에 불참을 선언한 것은 그가 무슬림 이민자 유입을 일시적으로 금지하라고 촉구해서가 아니라 러시아가 선거에 개입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루이스 의원 같은 민주당의 비둘기파가 ‘러시아 때리기’에 나섰다면 민주당 내부에서 뭔가 큰 변화가 있다는 뜻이다.

1970~80년대에 미국에서 성장한 사람이라면 민주당을 ‘평화의 정당’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20세기 대부분에 걸쳐 민주당은 강경 매파였다. 예를 들어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이끌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공화당이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와 반유대주의 라디오 선교사 찰스 커플린 신부 같은 고립주의자들과 같은 노선을 취했던 시절에 나치 독일에 맞선 미국의 동맹국들을 돕고 싶어서 안달했다.
지난해 12월 NBC 방송의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손에 트럼프 후보가 놀아난 것을 풍자하는 패러디를 내보냈다.
1944년 루즈벨트 대통령은 재선을 위해 비둘기파 부통령이던 헨리 월리스를 하차시키고 미주리 주 출신의 매파 민주당 상원의원이던 해리 트루먼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루즈벨트가 부임한 지 82일 만에 뜻밖으로 숨을 거두면서 트루먼이 대통령이 됐다). 4년 뒤 월리스는 소련에 더 부드러운 접근법을 제시하며 무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트루먼에게 완패했다.

강경 반공노선을 견지한 트루먼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동맹국 연합을 결성했다(현재 많은 미국인은 트럼프 대통령이 그런 동맹을 약화시키거나 해체할지 모른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정치인들만 진보적 반공주의를 주창한 건 아니었다. 노조 지도자들[전미자동차노조(UAW)를 이끈 월터 로이터 등], 지식인들(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 2세 등), 신학자들(라인홀드 니버 등), 외교관들(조지 케넌 등)도 냉전 진보주의의 선봉에 섰다.

대다수 냉전 진보주의자들은 흑인차별정책이 식민지에서 갓 독립한 국가들(특히 아프리카 국가들)이 소련 대신 미국과 동맹을 맺도록 설득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강조했다. 1960년대의 그런 강경파 진보주의자들에겐 미국 외교정책에 해를 끼치는 인종분리주의자였던 조지 월리스의 대권 야망을 무너뜨리는 것이 그로부터 약 20년 전 고립주의자였던 헨리 월리스를 대통령 선거에서 완파시키는 것만큼 중요했다.

냉전 진보주의는 베트남전으로 드디어 한계에 부닥쳤다. 케네디 대통령이 미국을 베트남전의 수렁으로 밀어넣었고, 후임자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미군의 베트남전 개입을 크게 확대했다. 그 전쟁으로 존슨 대통령과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 등 매파 진보주의자들을 비난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특히 로버트 케네디의 변신이 주목할 만했다.

1964년 뉴욕 주에서 연방 상원의원에 선출된 그는 형인 케네디 대통령 곁에서 ‘냉전 전사’로 활약했지만 그 후엔 베트남 반전운동의 지도자가 됐다. 1972년 조지 맥거번이 베트남전 철군을 약속하며 ‘미국이여 돌아오라(Come Home, America)’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을 때 쯤 민주당은 과거와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전의 기억이 희미해지자 죽은 듯했던 민주당의 매파 본능이 되살아났다. 1990년대 진보주의자들과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발칸 반도의 내전에 개입해 세르비아계의 무슬림 학살을 막도록 압력을 가했다.

9·11 테러 후엔 아프가니스탄에서 무력 사용에 반대한 민주당 하원의원이 단 한 명뿐이었다. 이라크전에선 진보주의자들의 견해가 분열됐지만 당시 상원의원이던 힐러리 클린턴과 존 케리(두 명 모두 그 이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아래서 차례로 국무장관을 지냈다), 조 바이든(오바마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이 됐다)은 전부 이라크 침공에 찬성표를 던졌다.
지난 1월 21일 미국 워싱턴 D.C.에선 트럼프 대통령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행진’ 시위가 대규모로 벌어졌다. 언론은 약 50만 명이 참석한 것으로 추산했다.
그러나 과거의 냉전 진보주의자와 지금의 반(反)푸틴 민주당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첫째, 지금 러시아의 도전은 편협한 지역주의에 불과하다. 공산주의는 베트남부터 쿠바까지 강한 호소력을 지녔던 이념이었다. 소련은 세계 전역에서 자칭 ‘혁명가’들의 후원자였다. 푸틴주의(그렇게 이름 붙일 수 있다면 말이다)는 국제적인 호소력이 전혀 없다. 러시아 국수주의의 표현일 뿐이다. 고작 올리가르히(러시아의 신흥재벌로 과두 지배세력을 가리킨다)에게 백지 위임장을 건네주고 동성애를 지탄하는 폭력행위를 부추긴다. 영국의 독립당(UKIP)이나 프랑스의 국민전선(FN) 같은 극우 민족주의·이민반대주의 정당과 비슷할 뿐 공산주의는 결코 아니다. 푸틴주의는 체게바라 티셔츠처럼 세계 곳곳에 널리 퍼져나가진 않는다.

둘째, 푸틴 대통령을 향해 강경 노선을 견지하는 민주당원도 개입주의로 지나치게 기울진 않는다. 예를 들어 그들은 영유권 분쟁 중인 남중국해에 인공섬을 건설하고 일본·베트남·필리핀·미국과 대치하며 긴장을 고조시키는 중국을 상대로 군사적 대응을 주장하지 않는다. 푸틴 대통령의 열렬한 시리아 지지에 맞서는 것 같은 문제에선 민주당 내부에서 의견이 갈린다. 힐러리 클린턴 전 대통령 후보 같은 인사는 잔혹한 시리아 정권을 상대로 한 더 강경한 대응을 지지하지만 바이든 전 부통령 같은 인사는 시리아 정권과 싸우는 반군을 지원하는 데 반대한다.

그러나 냉전 진보주의의 좀 더 공격적인 특징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 휴면 상태에 있을지 모른다. 공화당이 취임연설에서 ‘미국 우선주의’를 외친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더욱 고립주의적인 시절로 되돌아갔듯이 민주당의 DNA엔 매파 본능이 깊숙이 뿌리박고 있다.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등 2020년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설 수 있는 일부 인사는 상원 군사위원회에 들어갔다. 힐러리 클린턴이 8년 동안 활동했던 위원회다. 매파의 본색을 보여주기에 안성맞춤인 무대다.

트럼프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냉전 진보주의의 한 가지 특징은 유럽과 맺은 동맹관계에 관한 두터운 믿음이다. 독자노선보다는 겸허한 자세로 국제무대에서 협력하는 것을 말한다. 미국에 급진적인 사회개혁이 필요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본능이다. 그에 반해 ‘냉전 보수주의’는 쇼비니즘(맹목적 애국주의)에 가깝다.

극우 보수파 정치 이론가 제임스 번햄은 언젠가 이렇게 선언했다. “공산주의 제국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미국 제국이라는 것이 현실이다. 공식적인 경계가 세계 전체를 아우르지는 않는다고 해도 세계를 통제할 수 있는 결정적인 권한을 가진 미국 제국을 말한다.” 한편 냉전 진보주의자였던 트루먼 대통령의 생각은 그와 전혀 달랐다. “우리 힘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언제나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권리는 우리에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필요한 교훈처럼 들린다. 그는 미국이 이라크의 유전을 장악해야 하며 기후변화 같은 문제에선 세계적인 합의를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한다(실제로 파리 기후협약을 폐기시키겠다고 다짐했다).

‘맨츄리안 캔디데이트’에는 고압적인 제국주의 맹주처럼 행동하는 미국이 등장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상상만 해도 미국인만이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섬뜩한 느낌을 갖는다.

- 매튜 쿠퍼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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