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회장의 엇갈리는 공과] 샐러리맨 신화 일궜지만 ‘성공의 함정’에 빠져 -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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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회장의 엇갈리는 공과] 샐러리맨 신화 일궜지만 ‘성공의 함정’에 빠져

[김우중 회장의 엇갈리는 공과] 샐러리맨 신화 일궜지만 ‘성공의 함정’에 빠져

만 30세에 창업해 한국 기업 세계화 이끌어… 사상 최대 규모 분식회계, 추징금 미납 오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12월 9일 오후 11시50분 숙환으로 향년 83세로 별세했다. 베트남에서 젊은 인재를 키워내던 김 전 회장은 지난해 말 건강 악화로 귀국했으며 대우그룹이 해체된 지 20년 만에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진은 해외 언론에 보도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사진:연합뉴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12월 9일 오후 11시50분 숙환으로 향년 83세로 별세했다. 베트남에서 젊은 인재를 키워내던 김 전 회장은 지난해 말 건강 악화로 귀국했으며 대우그룹이 해체된 지 20년 만에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진은 해외 언론에 보도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사진:연합뉴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1989년 펴낸 자서전 제목이다. 파란만장한 김 전 회장의 삶이 일목요연하게 담긴 제목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 기업의 세계화를 이끌어낸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동시에 사상 최대 규모의 분식회계와 추징금을 미납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12월 10일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등 재계 총수가 줄줄이 빈소를 방문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이 울먹이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11일에도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박찬구 금호석유화학그룹 회장,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장 등 재계 총수가 조문했다. 이처럼 김우중 전 회장이 여전히 재계의 어른으로 존경받는 건 일개 회사원에서 시작해 재계 2위 대규모기업집단을 일군 신화적 존재라서다.

근현대사를 따져보면 국내 주요 대규모기업집단의 상당수가 적산기업에서 출발했다. 1910년 일본이 강제로 국권을 강탈한 이후 일본인은 한국 주요 산업 시설의 80%가량은 일본인 손아귀에 넘어갔다. 하지만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면서 ‘무조건 항복’을 외친 일본인은 한국에 남아있던 자산을 미처 챙길 틈도 없이 줄행랑을 쳤다. 이렇게 일본인이 한반도에서 축적했다가 내팽개친 재산(적산·敵産)과 기업(2700여 개)이 수두룩했다.

광복 이후 미군정청이 일본인 재산·기업을 불하(拂下·국가와 공공의 재산을 민간에게 매매하는 행위)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재계 1위 삼성그룹의 경우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미스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조선생명(현 삼성생명)을 불하받았다. 재계 2위 현대차그룹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조선이연금속 인천공장(현 현대제철)을 불하받은 적이 있다. 재계 3위 SK그룹도, 4위 LG그룹도 마찬가지다. 고(故) 최종건 SK그룹 창업주가 선경직물(현 SK네트웍스)을, 구인회 LG그룹 창업주는 조선제련(현 LS메탈)을 받았다. 고(故) 박병두 두산그룹 창업주가 소화기린맥주(현 OB맥주)를, 고(故)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주가 조선화약공판 인천공장(현 ㈜한화)을,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가 대한항공공사(현 대한항공)를 불하받는다.

이처럼 현재 국내 주요 대규모기업집단은 창업 초기 적산기업 덕분에 사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혼돈의 시기에 미군정청 간부에게 로비하지 않으면 적산을 불하받기는 사실상 힘들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정경유착은 불가피했다. 김우중 전 회장이 설립한 대우그룹은 이와 같은 국내 주요 대규모기업집단과 시작부터 달랐다. 김 전 회장은 1966년까지 섬유회사(한성실업)에서 일하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는 1967년 만 30세의 나이로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자본금 500만원에 직원을 5명 둔 중소기업이었다. 500만원은 지금 화폐가치로 약 1억6000만원 수준이다.

창업한 김 회장은 ‘세계 경영’을 기치로 해외로 눈을 돌렸다.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호주(시드니)에 국외지사를 세웠고, 1975년 종합상사 시대를 열었다. 이후 기업을 인수해 사업을 확장했다. 1976년 한국기계(대우중공업), 1978년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대한조선공사(대우조선해양)을 인수했다. 1976~1978년에는 에콰도르·수단·리비아 등 중남미·아프리카 시장에도 진출했다. 덕분에 1970년대 후반 대우그룹은 현대그룹·삼성그룹·럭키그룹(현 LG그룹)에 이어 재계 4위에 등극한다.

사세를 확장하던 김 전 회장은 마침내 1982년 ㈜대우를 설립한다. 이후 자동차·중공업·조선·전자·통신·금융·호텔 사업에도 진출했다. 창업 30여 년 만인 1998년 41개 계열사, 396개 해외 법인을 거느린 대규모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당시 대우그룹 매출액(91조원)과 자산총액(76조원)은 현대그룹에 이어 재계 2위였다. 대한민국 총수출(1323억 달러, 약 157조9700억원)의 14%(186억 달러, 약 22조2100억원)를 대우그룹이 책임졌다(1998년 기준). 그가 지금도 ‘샐러리맨의 우상’으로 대접받는 배경이다.문제는 사세가 커지는 만큼 리스크를 관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해외 진출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자금을 국내외 금융사로부터 차입했다. 선진적인 금융 기법을 도입한다는 명목으로 글로벌 금융사에서 대출을 받아 투자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찾아왔다는 점이다. 국가신용등급이 추락하자 해외 채권자가 그간 빌려줬던 자금을 상환하라고 압박했다. 이 과정에서 400%가 넘는 대우그룹의 부채비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기업이 보유한 자산보다 빚이 4배 수준으로 많았다는 뜻이다. 경제상황과 기업의 경영 안정성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통상적으로 부채비율이 100% 미만이면 안정적이라고 평가한다.

김 전 회장은 과감한 투자를 통해 성공 신화를 이어가면서 ‘성공의 함정’에 빠졌다. 과거 성공을 이끈 이른바 ‘성공 방정식’을 맹신하면서 달라진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과도한 부채비율이 문제로 떠오른 상황에서, 김 전 회장은 오히려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서 더욱 수출을 확대하자고 주장했다. 수출 확대를 위해서는 초반에 보다 많은 투자가 필요하고, 이 과정에서 부채는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금융당국이 기업어음·회사채 발행을 제한하자 대우그룹은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여기에 대우그룹 생존을 위해서 회심의 카드로 내밀었던 대우자동차와 제너럴모터스(GM)의 합작 프로젝트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 김 회장은 1998년 41개 계열사를 10개로 축소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구조조정안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1999년 8월 대우그룹 12개 주요 계열사가 기업재무개선작업(워크아웃)에 돌입하면서 대우그룹은 해체됐다. 1999년 11월 1일 김 전 회장은 경영포기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당시 대우그룹의 부채 규모(89조원)는 자산 규모(76조원)를 상회했다.

2000년에는 분식회계까지 적발되면서 대우그룹 신화는 신기루가 됐다. 1997년(19조여 원), 1998년(21조여 원) 등 40조원 안팎의 분식회계가 드러났다. 전 세계 기업 역사상 최다 규모다. 이로 인해 김 전 회장은 2006년 징역 8년6개월에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받았다. 1년여간 복역하던 김 전 회장은 2008년 1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특별사면을 받았다.

김우중 전 회장은 지난 2014년 ‘대우특별포럼’에서 “방만한 경영 때문에 대우그룹이 해체했다는 건 사실과 다르다”며 “역사가 잘못된 사실을 바로 잡고 정당하게 평가해 달라”고 언급한 바 있다. 외환위기로 발생한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해서 기업어음(CP)·회사채를 발행하려고 했지만 한국 정부가 이를 가로막는 조치를 취하면서 자금난이 심화했다는 주장이다.

법원 판단은 다르다. 판결문에서 법원은 ‘금융기관에서 빌린 돈에 대한 이자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김 전 회장이 외형 확장을 계속하고…부실 기업인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는 등 자구 노력을 등한시했다’고 명시했다. 정부가 기업어음·회사채 발행을 가로막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법원은 ‘대우그룹은 이미 기업어음·회사채를 남발한 상황이었다’며 ‘더 이상 자금 조달을 기대할 수 없었다’고 판시했다.

- 문희철 중앙일보 기자 reporter@joongang.co.kr
 [박스기사] 김우중이 남긴 추징금 받을 방법 없나 - 일신전속적 성격으로 상속되지 않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지난 12월 9일 18조에 이르는 막대한 추징금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이에 추징금 환수 문제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실제 환수는 어려울 것이라는 게 법조계 전망이다. 김 전 회장은 2006년 11월 항소심에서 대우 등 계열사 분식회계와 사기대출 지시 및 재산 국외 도피 등의 혐의로 징역 8년6월과 벌금 1000만원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별도의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명령했다. 이는 당시 개인으로서는 역대 최대 규모로 아직 그 기록이 깨지지 않고 있다. 항소심 이후 김 전 회장과 검찰 모두 상소를 포기하면서 형이 확정됐다.

어마어마한 액수의 추징금 산정 배경은 뭘까. 김 전 회장은 임원들과 공모해 국내에 반입해야 할 자동차 수출대금을 국외에서 처분해 도피시켰으며 해외 현지법인을 통해 해외 금융기관으로부터 자금을 차입한 혐의를 받았다. 18조원에 이르는 추징금은 허위 수입 대금 송금액과 해외 현지법인 차입금 송금액, 자동차 수출 대금 송금액을 당시 환율에 적용해 이를 합산하는 방식으로 산정됐다. 당시 재판부는 “대한민국의 자산인 대우그룹의 부도로 국민경제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고 그 피해는 금융기관과 투자자를 넘어 국민 모두에게 영향을 끼친 점, 피해를 본 국내 금융기관이 외국 자본에 넘어가고 협력 업체들이 어려움을 겪은 점 등을 감안할 때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며 상응하는 엄벌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검찰이 지난 14년간 김 전 회장으로부터 거둬들인 추징금은 892억원(0.498%)뿐이다. 이마저도 김 전 회장의 자발적인 납부보다는 검찰이 추적한 덕이 컸다. 그간 검찰은 전직 대우 임원들로부터 김 전 회장의 재산을 일부 찾아 추징하면서 3년마다 돌아오는 시효를 연장해왔다.

김 전 회장이 사망하면서 추징금을 회수할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김 전 회장에 앞서 형을 선고받은 임원 6명이 김 전 회장과 공범으로 묶여 추징금을 함께 부담하도록 돼 있다. 검찰은 이들을 상대로 추징금 집행을 계속해나갈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이미 2명이 세상을 떠났고 임원 중 일부는 ‘범죄행위로 전혀 이득을 취한 바 없는데 거액의 추징금 선고가 부당하다’며 재심도 청구했다.

추징금을 가족에게 받을 수도 없다. 판사 출신 변호사는 “추징금은 일신전속적(특정한 자에게만 귀속하며 타인에게는 양도되지 않는 속성) 성격을 띠고 있어 상속되지 않는다”며 “숨겨놓은 재산이 발견된다면 추징할 수 있지만 자식 등 타인을 대상으로 추징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김 전 회장의 가족들이 골프장, 아트센터 등을 소유하고 있지만 공식적으로 국내에서 추징할 수 있는 김 전 회장 명의의 개인재산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추징금은 범죄 행위에 관련된 물건을 몰수할 수 없을 경우 범죄인이 불법하게 소유하는 물건을 돈으로 되받아내는 것이다. 죄에 대한 처벌을 목적으로 돈을 거둬가는 벌금은 미납 때 노역장 유치가 가능하지만 추징금은 내지 않아도 노역장에 넣을 수 없다. 범죄수익 환수는 검찰의 해묵은 난제다. 지난해 초 대검찰청에 범죄수익환수과, 서울중앙지검에 범죄수익환수부를 신설했다.

- 김수민·윤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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