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중심 AI기술로 ‘치매=절망’ 편견 깰 것” 고명진 실비아헬스 대표
[Interview] 김홍일 혁신우혁신⑨ 고명진 실비아헬스 대표
프린스턴 경제학 졸업, 서울대 의대 재학 중 창업 뛰어들어
AI·빅데이터 통해 인지건강 진단할 수 있는 실비아 앱 론칭
집에서도 실행 가능한 체계적인 두뇌건강 관리 솔루션 제공
맞춤형 인지건강 관리 시장 선도 “노화 두렵지 않은 세상”
“몇 년 만에 연매출 수백억 신화”, “고졸이 대박집 사장이 되기까지”, “유명 대기업에 수백억 투자받은 비결”, “스타트업, 나처럼 하면 성공한다”…. 창업 관련 기사를 수놓는 미디어의 헤드라인이다. 가시밭길을 밟아온 창업가의 역경 드라마를 소개하고,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지 장밋빛 전망을 늘어놓는 식이다. 스타트업의 숱한 곡절을 생생하게 목격한 김홍일 케이유니콘인베스트먼트 대표(전 디캠프 센터장)는 창업 시장이 일률적으로만 묘사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창업가의 성공에 손뼉만 치고 끝낼 게 아니라, 그들의 혁신 비법을 우리 사회가 함께 공유하자.” [이코노미스트]가 ‘김홍일의 혁신우혁신’을 연재하는 이유다. 창업 요람의 리더 역할을 하던 VC 대표와 현직 기자가 스타트업 CEO를 만나 진중한 질문부터 가볍고 짓궂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침체에 빠진 한국 경제를 살릴 새 성장 동력을 찾을지도 모를 일이라서다. 아홉 번째 대담의 주인공은 치매 조기 진단 및 예방을 목표로 하는 인지건강 플랫폼 실비아를 론칭한 고명진 실비아헬스 대표다.[편집자]
치매를 둘러싼 에피소드는 대부분 깊고 어둡다. 냉정한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건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나 유효하다. 연구가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정확한 발생 원인이 밝혀지지도 않은 탓이다. 확실히 증명된 예방법이 없고, 완전한 치료약도 없다. 치매인구의 증가는 곧장 사회에도 부담이다. 치매환자를 돌보는 의료 인프라가 부족해 그 역할의 상당 부분을 가족이 떠맡고 있어서다.
고명진 실비아헬스 대표는 이 무거운 담론에 발을 디딘 창업가다. 치매 조기 진단 및 예방을 목표로 하는 인지건강 관리 모바일 플랫폼 ‘실비아’를 출시했다.
수백만원이 소요되는 치매 검사 대신 앱을 통해 두뇌건강을 관리할 수 있는 솔루션이다. 음성·안구 패턴·촉각 분석 등 비대면 인공지능(AI) 기술을 통해 개인의 인지건강을 평가하고, 전문가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 인지건강을 기를 수 있는 생활습관도 안내한다. 시공간능력, 실행기능, 기억력, 주의집중력, 언어능력 등의 향상에 도움이 되는 ‘인지 트레이닝 콘텐트’를 갖췄다. 치매 진단의 심리적 장벽을 낮추고 의료 접근성을 높이겠다는 게 당장의 목표다.
“깜빡 하지 말고 실비아 하세요”
실비아 앱은 지난해 8월 오픈베타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월간활성사용자수(MAU)가 매달 180% 넘게 증가했다. 1인당 평균 방문 횟수는 13회에 이를 정도로 참여도가 상당하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치매극복선도기업 선정, 광주광역시 서구, 시니어클럽, 금천 50플러스센터, 성남 고령친화 산업 동반 협력기업 선정 등 다수 지자체와의 업무협약(MOU)도 맺었다.
지금은 업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의 리더지만, 고명진 대표가 처음부터 창업을 꿈꿨던 건 아니다. CEO 명함을 만들기 전엔 서울대에 재학 중인 의대생이었다.
“치매는 많은 이들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만, 국가적인 문제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죠. 저 역시 그렇게 방관하던 사람 중의 한명이었습니다.”
김홍일 케이유니콘인베스트먼트 대표(김홍일 대표) : 청운의 뜻을 품고 창업을 목표한 건 아니었다고요.
고명진 실비아헬스 대표(고명진 대표) : 실비아헬스의 주춧돌은 서울대 의과대학과 디캠프가 공동주관한 데모데이였습니다. 굵직한 경력의 심사위원을 상대로 창업할 서비스나 제품, 아이디어를 선보이는 자리였죠. 그때 서류를 낼 때 비즈니스 모델(BM)을 적는 항목이 있었거든요. 저는 실비아헬스의 BM을 ‘비영리’라고 적었어요.
김홍일 대표 : 엉뚱한 시작이었네요.
고명진 대표 : 창업을 할 의지가 뚜렷하진 않았던 거죠. 데모데이 참가를 준비할 때만 해도 법인을 만들 생각이 없었고요. 저를 중심으로 친한 의대생이 모여 만든 동아리 형식의 팀이었죠.
김홍일 대표 : 그런데 우승까지 거머쥐었습니다. 그제서야 창업을 결심하게 된 건가요.
고명진 대표 : 맞습니다. 창업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저는 의대 재학중에는 창업에 크게 관심이 없었어요. 창업이 저와 어울리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뭔가 창업가 특유의 이미지가 있잖아요. 맨손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불도저 같이 밀어붙이는 식의 정신이요.
2030 세대에게 창업은 중요한 생존전략 중 하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청년이 성공을 꿈꾸면서 스타트업을 만든다. 대개는 실패로 끝이 나는데, 성공한 이들을 추려보면 공통의 DNA가 드러난다. 사회와 세상을 변화시키길 갈망하는 뜨거운 에너지나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강한 도전 욕구가 대표적이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창업가가 되기로 한 것처럼, 운명에 이끌리듯 창업을 길을 걷는다.
고 대표의 설명대로라면 그는 ‘어쩌다 창업가’가 된 것처럼 보인다. 실비아헬스의 초기 모델이 돈을 버는 회사를 염두에 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떠밀리 듯 실비아헬스를 만든 건 아니었다. 고 대표 역시 의대 연구동에 붙어있던 한 장의 포스터에 적힌 슬로건에 운명처럼 끌렸다. ‘소소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아이디어’였다. 마침 그에겐 소소한 아이디어가 있었다. 치매를 AI로 진단하는 것이었다. 증상과 결과의 상관관계를 AI 알고리즘으로 분석하면 그럴듯한 결과를 내지 않겠냐는 공상이었다.
의학은 빅데이터 기반 AI 기술 접목이 가장 두드러지는 분야였다. 고 대표는 특히 진단의료 분야에서 성과가 탁월하단 얘길 들었다. 그런데 이 기술을 치매와 같은 인지장애 관련 분야에 활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진 못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데이터를 365일, 24시간 학습해 정확도를 높이면 인간 의사와 견줄 만한 정밀도를 갖출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아이디어를 현실로 구현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마침 초등학교 동창이 하버드대에서 컴퓨터과학을 전공한 AI 전문가였다. 고 대표는 친구에게 관련 데이터를 보내고 이걸 AI에 접목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데모데이에서 우승하면 상금도 탈 수 있다”고도 꾀어냈다.
한참 뒤, 친구의 회신이 왔다. “기술적으로 가능해. 그런데 명진아. 나 이 아이디어에서 창업이 보여.” 소꿉친구는 실비아헬스의 공동창업자가 됐다. 전재민 최고기술책임자(CTO)였다.
김홍일 대표 : 전재민 CTO와 합심해 실비아헬스를 만들었습니다. 의사라는 안정적이고 창창한 미래를 걷어차는 게 쉽진 않았을 텐데요.
고명진 대표 : 주변에서 극구 만류했죠. 그렇게 반대에 부딪힐 때마다 저는 오히려 열정이 샘솟았어요. 오히려 ‘아, 나는 실비아헬스를 만들기 위해서 그간의 삶을 살아왔구나’란 생각이 들었죠. 많은 창업가가 기발하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트리거 삼아 창업하잖아요. 저는 반대였습니다. 창업 자체가 제 삶의 변곡점이자 트리거가 됐습니다.
김홍일 대표 : 순서가 바뀐 셈이군요. 그렇게 뜻밖의 기회로 첫 발을 떼는 스타트업도 많습니다.
고명진 대표 : 무엇보다 창업가로서도 충분히 제 장점을 발휘할 수 있겠더라고요. 저는 정답이 없는 문제를 마주하고 이를 고민하는 걸 즐기는 편입니다. 매 순간 끊임없이 문제와 부딪히고 이를 신속하게 해결해야 하는 창업이 그랬어요.
김홍일 대표 : 자, 이제 실비아헬스 얘길 해보죠. 치매 진단을 비즈니스 아이템으로 선정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고 대표는 아직 20대잖아요. 하필 이 무거운 시장에 뛰어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명진 대표 : 어떤 현상이든 그림자를 봐야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데요. 저는 그 그림자를 꽤 가까운 데서 목격했습니다.
고명진 대표의 이력은 범상치 않다. 세계적 명문 프린스턴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국내외 대기업을 노크하면 손쉬운 취업을 기대할 수 있는 스펙이었다. 그런데도 고 대표는 방향을 확 틀어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이번엔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 하고 싶은 건 해내고 마는 고 대표의 독특한 정체성은 현재 실비아헬스의 성장을 뒷받침하는 발판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남다른 삶의 궤적을 든든하게 지탱했던 건 고 대표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였다. 무슨 선택을 하더라도 고 대표를 지지하고 응원했다. 그만큼 그에겐 각별한 존재였는데,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항상 작은 고민거리도 저와 나누던 할머니가 저 모르게 치매 유전자 검사를 받고 오셨더라고요. 다행히 결과엔 특이사항이 없었지만,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손녀 몰래 검사를 신청하고 받고, 결과를 초조히 기다렸을 할머니를 떠올리니까요. 그사이 얼마나 속앓이를 했겠어요.”
노년층 위한 일상 속 전방위 케어 필요성 절감
김홍일 대표 : 치매가 무서운 병인 건 사실이잖아요. 정말 한국 사회만 유별나게 대응하고 있나요.
고명진 대표 : 다들 절망의 병으로 치부하는데, 치매는 질환이 아닙니다. 상태를 의미하죠. 저는 치매란 단어부터 바꿨으면 좋겠습니다. ‘어리석을 치(癡)’에 ‘미련할 매(呆)’, 어리석고 미련하다는 걸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주로 쓰던 게 일본이었는데, 지금은 바꿨어요. 인지증으로요.
김홍일 대표 : 다른 나라에선 뭐라고 합니까.
고명진 대표 : 디멘시아(Dementia). 라틴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정신이 없어진 것’이란 단순한 의미가 담겼죠. 전 세계를 휩쓴 넷플릭스 드라라 오징어게임의 오일남 캐릭터를 두고 미국 시청자가 이런 말을 써요. ‘디멘틱!(Dementic)’
김홍일 대표 : 이름을 바꿔서 인식을 개선하기엔 숨은 고통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요.
고명진 대표 : 중증의 치매는 그렇죠. 조기에 진단하면 개선할 방법이 여럿 있어요. 그런데 치매의 치자만 꺼내도 엄숙해지는 분위기니까, 악화할 대로 악화해서야 병원을 찾는 환자가 많은 겁니다. 깜빡깜빡하는 현상을 두고 차라리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은 어르신이 상당하다는 거죠. 치매를 남의 일로만 생각하는 분들도 많고요.
김홍일 대표 : 관련 인프라가 부족한 건 아닐까요.
고명진 대표 : 치매 환자를 위한 스타벅스까지 등장하는 일본과 견줄 순 없지만, 한국도 인프라는 훌륭해요. 특히 오프라인은요. 전국에 치매안심센터가 250여개가 있습니다. 땅끝 거제도에도 있죠. 60세 이상 국민에겐 무료로 검사도 해줘요. 그런데 심각성을 크게 느끼기 전에는 오프라인 문턱을 넘기가 어려워요.
김홍일 대표 : 이 문턱을 낮추는 게 실비아헬스의 임무군요.
고명진 대표 : 오프라인 상담소를 찾아가는 게 부담스럽고, 수백만원을 웃도는 검사·관리비가 부담이 되는 분도 손쉽게 조기진단을 받고 치매 예방에 대한 접근성도 높기 때문이죠 요샌 어르신도 유튜브 보고 카톡도 하잖아요. 그런 앱보다 쉽게 실비아 앱을 다룰 수 있게끔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인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김홍일 대표 : 치매에 드는 사회적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점에서 실비아헬스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실비아헬스가 앞으로 성장해서 더 많은 사람이 실비아를 접해야 할 텐데요. 가능할까요.
고명진 대표 : 될까, 안 될까를 확률로 재고 있진 않습니다. 꼭 해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죠. 고령화 사회, 치매는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는 문제입니다. 실비아 앱을 통해 그 고통과 슬픔, 두려움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만들고 싶습니다.
김홍일 대표 : 치매를 마냥 두려워하는 완고한 사회 분위기가 정말로 바뀔 수도 있겠군요. 그것도 20대 청년 창업가를 통해서요.
고명진 대표 : 최종적으론 노화가 두렵지 않은 세상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실비아헬스는 그 변화에 크게 기여하고 싶고요. 이런 꿈같은 일이 가능하겠냐고 묻는다면, 저는 또다시 꼭 해낼 거라고 답할 겁니다.
기자가 본 고명진 대표
고 대표가 부연했다. “부족한 점이 있겠지만, 저 역시 절실합니다. 인생을 걸었거든요. 다행히 그간 사람을 공부하는 학문을 다뤘어요. ‘사람은 이럴 거다’란 전제 아래 경제학은 사람과 사회의 행동 패턴을 탐구하고, 의학은 사람의 몸을 다루죠. 실비아헬스는 AI를 다루는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기술이 아닙니다. 인간을 이해하려는 마음인 거죠.”
고 대표는 결이 다른 두 학문을 공부하면서 공통의 깨달음도 얻었다. 이론과 실전은 완전히 다르다는 거다. 경제가 전문가들의 전망대로 전개되지 않고 환자의 상태가 의료진의 예상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듯 말이다. 이 때문에 한 가지 답에 정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이론과 치료법이 등장한다.
의사가 아닌 창업을 통해 실전에 뛰어든 고 대표는 실비아헬스 경영에 이 깨달음을 적용했다. 모든 경영 결정이 사업을 위협하는 변수고, 정답이 없는 문제다. 그만큼 골머리를 썩이지만 온 힘을 다하고 있다.
우연한 계기로 스타트업 생태계에 발을 디뎌서인지 고명진 대표는 스테레오 타입의 창업가처럼 보이진 않았다. 대신 학구열에 불타는 ‘모범생’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노화가 두렵지 않은 세상’이란 대담한 꿈을 꺼내기 전까진 말이다. 그가 훤칠하게 커 보였다. 이 가시밭길 많은 공상을 실현해야 하는 건 고명진 대표의 몫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보단 더 많은 사람의 응원과 지지를 받았으면 좋겠다.
김다린 기자 kim.dar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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