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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아베’ 일본 정치 행보 어디로 향하나 [채인택 글로벌 인사이트]

아베 유산 계승 명분으로 내세워
전쟁 금지 헌법 개정 의지 불태워

 
 
고(故)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모습. [AP=연합뉴스]
아베 신조(安倍晉三·1954.9.21.~2022.7.8.) 전 일본 총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일본 정치가 어떻게 변할지에 관심이 쏠린다. 아베 총리는 전직 총리이지만 일본 집권당인 자민당과 일본 정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사망 직전까지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일본 정계의 개편이나 혁신의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 최소한 세력 균형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아베 전 총리는 2022년 7월 8일 오전 11시 30분, 나라(奈良)에서 참의원 선거 지원 유세를 하다가 전 해상자위대원인 야마가미 데쓰야(山上徹也‧41)의 사제 총에 맞아 숨졌다. 당시 아베 전 총리는 7월 10일 참의원 선거 이틀 앞둔 8일 더위 속에서 정장 차림으로 역 앞에서 거리 유세 중이었다. 총격을 당한 아베 총리는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심폐 정지 선언을 받았으며, 헬기로 큰 병원으로 이송되고 부인 아키에(昭惠) 여사가 도쿄에서 달려온 다음 사망 선고를 받았다. 총격이 알려지자 야마가타(山形)에서 유세 중이던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는 헬기를 타고 급히 도쿄로 달려와 총리 관저에서 긴급회견을 열었다.  
 
체포된 범인 야마가미 데쓰야(山上徹也‧41)는 인터넷에서 사 모은 부품으로 총기를 제작해 기회를 노렸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야마가타는 통일교 신자인 어머니가 교단에 거액을 기부한 뒤 파산하면서 원한을 품었는데, 아베 전 총리가 통일교 관련 행사에 동영상 메시지를 보낸 것을 보고 범행을 결심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세상을 떠난 아베는 단순히 ‘전 총리’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일본 정계의 실력자로 군림해왔다. 우선 일본 최장 재임 기록을 세운 총리라는 점에서 집권 자민당과 정계에서의 정치력과 영향력, 그리고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아베는 90대 총리로서 2006년 9월 26일~2007년 9월 26일의 1년간 재임한 뒤 물러난 단명 총리였다. 당시만 해도 정치를, 특히 자민당 내부 정치를 잘 모르는 인물로 평가됐다.  
 
하지만 2012년 9월 26일 야당이던 자민당 총재에 올라 그해 12월 26일 총선에 승리해 민주당(2009년 9월 16일~2012년 12월 26일 집권)으로부터 정권을 되찾으면서 다시 총리에 올랐다. 자민당 총재와 내각 총리를 두 번째로 맡으면서 아베는 변했다. 92대 총리를 지내고 자민당 내 3위 파벌의 수장인 아소 다로(麻生太朗)를 부총리 겸 재무장관으로 임명하면서 정치적으로 결합했다. 일본 정계와 자민당에서 우파 중의 우파로 분류되는 두 사람은 자위대를 헌법에 올리는 등 이른바 일본의 ‘정상국가화’에 의기투합했다. 아베는 그 뒤 세 차례의 총선을 연속 승리로 이끌면서 96~98대 총리를 지내고 2020년 9월 16일 물러났다.  
 
아베 전 총리는 총리로서 총 재직기간 3188일(약 8년 9개월)과 연속 재임 기간 2822일(약 7년 9개월)에서 일본 총리로서 각각 최장 기록을 세웠다. 아베는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安倍晉太郞‧1924~1991년) 전 외상의 야마구치(山口) 지역구(1구에서 4구로 바뀜)를 물려받아 연속 10선(1993년 7월 19일~2022년 7월 8일)을 기록했다.  
 
1957~1960년 56~57대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1896~1987년)가 외할아버지이고 1964~1972년 61‧62‧63대 총리를 지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1901~1975)가 작은 외할아버지다. 두 사람은 사토(佐藤) 집안 출신의 형제지간으로, 기시 전 총리는 어려서 기시 집안에 양자로 가면서 사토 대신 기시를 성으로 사용했다. 아베 총리의 동생인 기시 노부오(岸信夫房) 방위상은 어려서 외가에 양자로 가면서 기시 성을 쓴다.  
 
7월 8일 일본 나라현 나라시 소재 야마토사이다이지역 인근에서 괴한의 총격을 받아 쓰러진 고(故)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모습. [연합뉴스]

전‧현직 총리 7명 피살, 일본 정계 수난의 역사

 
아베는 일본 전‧현직 총리 중 암살 당한 일곱 번째 인물이다. 1889년 일본제국헌법이 제정되고 1890년부터 시행된 이래 일본 총리 중 현직 세 명과 전직 네 명이 암살로 숨졌다.
 
19대 하치 다카시(原敬) 총리는 현직에 있던 19921년 11월 4일 도쿄 역에서 철도 직원인 18세의 나카오카 곤이치(中岡艮一)의 단도에 찔려 사망했다. 나카오카는 제1차 세계대전 뒤 군축에 나선 하치 수상에 반감을 품은 상사가 “잘못한 정치인은 할복해야 한다”고 말한 데 영향을 받아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34년 특사로 풀려났다.
 
27대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총리는 1931년 8월 26일 도쿄역에서 극우단체 애국사 직원인 사고야 도메오(佐郷屋留雄)의 총격을 받고 1년간 치료를 받다 숨졌다. 하치 총리 이래 일본 총리는 별도 출입구를 통해 기차를 탔지만 하마구치 총리는 “승객들에게 폐를 끼친다”며 일반 통로를 이용하다 변을 당했다. 당시 일본은 대공황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하마구치 총리는 만주 침략에 반대해 군부의 반감을 샀다. 범인 사고야는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무기로 감형됐고, 1940년 가석방됐다. 하마구치 총리는 총격 1개월 뒤 총리에서 사임해 사망 당시에는 전 총리였다.
 
29대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 총리는 1932년 5월 15일 해군을 중심으로 한 극우청년 장교들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이누카이 총리의 군축정책에 불만을 품고 총리를 살해한 11명의 주동자는 재판에 회부됐으나 전국적인 사면 청원 서명으로 풀려났다.
 
일본 전직 총리의 암살은 아베에 앞서 3건이 있었다. 최초는 초대‧5‧7‧10대 총리를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1909년 10월 26일 중국 동북지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사건이다.
 
20대 총리를 지낸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清)와 30대 사이토 마코토(斎藤実)는 1936년 2월 26일에 군국주의 성향의 군인들이 벌인 2‧26 사건이라는 쿠데타로 자택에서 숨졌다. 하루에 두 명의 전직 총리가 목숨을 잃은 정변이다. 특히 사이토는 해군 제독 미국 유학을 거쳐 해군 대신(장관)을 지내다 3‧1운동 뒤인 1919년 조선 총독에 임명돼 1927년까지 문화정치를 편 인물이다. 1929~193년 조선 총독을 한 차례 더 지냈으며 1932~1934년 총리를 지냈다. 사이토는 육군 중심의 쿠데타 군인들에게 친영파이자 친미파로 분류돼 잔혹하게 살해됐다.
 
쿠데타 군인들은 원로 정치인들을 죽이고 일본 덴노가 직접 정치를 맡으면 농촌의 가난이 해결될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하지만 가까운 중신인 사이토가 살해되자 덴노인 히로히토는 화를 내며 28일 군대에 복귀 명령을 내렸다. 부대로 돌아간 쿠데타 주동자 2명이 자살했으며, 17명은 사형 선고를 받고 그 중 15명의 형이 집행됐다.
 
일본에선 제2차 세계대전 뒤 좌우 이념대결로 야당의 좌파 정치인이 암살된 경우도 있다. 1960년 10월 12일 친중 성격의 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稲次郎) 사회당 서기장이 도쿄 히비야 의 공회당에서 열린 삼당대표 합동 연설회에 참석해 연설하다가 현장에서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칼에 찔려 살해됐다. 범인은 만 17세 반공청소년 야마구치 오토야(山口二矢)였다. 평소 “사회당이 일본을 적화하려고 한다”는 주장을 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사건 직후 도쿄 소년감별소(소년원)에 갇혔으나 지급받은 치약으로 벽에 ‘천황폐하만세, 칠생보국(天皇陛下万才 七生報国)’이라는 글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칠생보국은 ‘일곱 번 다시 태어나도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뜻으로 일본의 극우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1970년 11월 25일 자위대 주둔지를 찾아 할복할 당시 이마에 멨던 띠에도 적힌 ‘군국주의’ ‘천황숭배’의 상징인 문구다.
 
홍콩 시민들이 2006년 12월 13일 홍콩 주재 일본 영사관 인근에서 난징 대학살을 추모하고 일본에 항의하는 의미로 도조 히데키 전 총리의 사진과 욱일기(일본 제국주의 상징 깃발)를 불태우고 있다. [AP=연합뉴스]

아베 사망으로 구심점 잃은 자민당 파벌 구도에 균열

 
칠생보국은 14세기 일본 고전 역사문학인 태평기(太平記)에 등장하는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라는 무장의 일화에 나온다. 마사시게는 14세기 초 고다이고(後醍醐) 덴노를 위해 싸웠다. 고다이고 덴노는 미나모토노 요리모토(源賴朝)가 세워 150년간 이어졌던 가마쿠라(鎌倉) 막부(1185~1333년)에 대항하려고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라는 무장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다카우지는 가마쿠라 막부를 무너뜨디고 무로마치(室町) 막부(1336~1573년)를 세웠으며 대항하는 고다이고 세력을 눌렀다. 마사시게는 다카우지에 대항해 싸우다 동생 마사스에(正季)와 함께 잡혔다. 그는 이런 대화를 마치고 서로 찔러 자결한 것으로 소설에 묘사된다.
 
“죽어서 구계(九界‧불교에서 말하는 지옥도‧아귀도‧축생도‧수라도‧인간도‧천상도 등 육도(六道‧중생의 세계)와 성문계‧연각계‧보살계 등 깨달음의 세계를 합한 아홉 세계) 중 어디에 가고 싶은가?”
 
“일곱 번이고 인간 세상에 다시 태어나서 이 손으로 조적(朝敵‧조정의 적)을 멸하고 싶다.”
 
이렇게 죽은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덴노에 대한 충성의 상징이 됐다. 현재 도쿄 황거 입구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메이지 유신 이휴에 들어섰다. 천황주의를 앞세운 일본의 극우 정치 활동에는 과거 문학의 일화가 광신적인 모습으로 인용된다.
 
하지만 아베 총격에는 이런 극우적인 배경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히려 통일교라는 종교와 관련한 외톨이 청년의 황당한 계획 살인으로 정리되고 있다.
 
아베 사망으로 일본 자민당 내부는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겪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자민당은 특유의 파벌 정치 때문에 수장을 잃은 최대 파벌 아베파부터 변화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일본 자민당에는 6대 파벌이 있다. 파벌의 영수는 공천과 정치 자금, 그리고 유세 지원 등을 통해 회원을 모집하고 정치인으로 키우며,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거나 유지한다. 자민당 소속 중의원 263명 중 60명을 제외한 전원, 참의원(이번 선거 이전 기준) 111명 중 22명을 제외한 전원이 파벌에 소속됐다. 전체 374명의 의원 중 6대 파벌에 소속하지 않은 의원은 82명뿐이다. 여기에 속하지 않은 의원들도 크고 작은 모임으로 서로 연결하고 결속한다.
 
아베가 사망 직전까지 회장으로 있던 세이와(淸和) 정책연구회는 59명의 중의원과 35명의 참의원 등 모두 94명의 의원을 회원으로 둔 자민당의 최대 파벌이다. 2위 파벌인 헤이세이(平成) 연구회는 모테키 도시미츠(茂木敏充) 전 외상(현 간사장)이 회장이다. 3위 파벌인 시코카이(志公會)는 아소 다로(麻生太郎) 전 총리(재무상 겸 부총리)가 회장이다.  
 
아베는 아소와 정치적으로 긴밀히 결합하고 있으며 둘의 연합체는 AA로 불리며 2020년 9월 아베의 총리 사임 뒤 스가 요시히데(管義偉)와 기시다 총리의 인선을 좌우한 것으로 관측된다. 세이와 정책연구회와 시코카이는 아베가 추진한 개헌 등에서 서로 정책적으로 유사한 지향점을 보여왔다. 하지만 아베의 사망으로 아베와 아소 간의 결합으로 이뤄졌던 연합의 강도와 성격이 변화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
 
4위 파벌은 고치카이(宏池會)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전 총리가 회장이다. 통상 파벌 수장이 총리에 오르면 다른 인물에게 회장직을 넘기는데 기시다는 중의원과 참의원 선거가 끝날 때까지 이를 유지해왔다.
 
5위 파벌인 시스이카이(志師會)는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전 경제산업상이 회장을 맞고 있다. 니카이는 막후에서 한일 관계 등 다양한 업무를 맡아온 자민당의 거물이다. 6위 파벌인 근미래정치연구회는 모리야마 히로시(森山裕) 전 농림수산상이 회장이다.
 
7월 10일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의석 과반을 확보해 승리하자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이자 자민당 대표가 당선자 이름들 앞에서 축하 연설을 하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미·러·중 대립 심화에 일본 전쟁 개헌 의지 가열

 
아베의 사망으로 그의 필생의 숙원인 개헌과 자위대의 헌법 명문화 등이 급물살을 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일본 중의원은 전체 465석으로 233석 이상이면 과반이 되며, 310석을 차지하면 개헌안 발의를 위한 3분의 2를 확보하게 된다. 현재 자민당은 과반인 261석을 차지하고 있으며 연립을 하고 있는 공명당의 32석을 합하면 연립여당이 293석이다. 여기에 개헌에 찬성하는 일본유신회 41석과 국민민주당 11석까지 합치면 모두 345석으로 3분의 2인 310석을 훌쩍 뛰어넘는다. 개헌 반대세력은 입헌민주당 97석과 일본공산당 10석 정도다.
 
이번 선거 전 245석(이번 선거에선 248석)이 정원인 참의원은 123석이 넘으면 과반이며 개헌안 발의에 필요한 3분의 2는 166석이 필요하다. 참의원은 7월 10일 선거 전에는 자민당 111석과 공명당 28석 등 연립여당이 139석으로 과반을 차지했으며, 국민민주당+신록풍회 16석, 일본유신회 15석까지 합치면 개헌 찬성 세력이 170석으로 3분의 2를 넘었다. 입헌민주당+사회민주당 45석과 일본공산당 13석이 개헌 반대 세력이다.
 
7월 10일 전체 의원의 절반과 보궐 1명을 포함해 125명을 새로 뽑은 참의원은 선거 뒤 정당별 전체 의석이 자민당 119석, 공명당 27석으로 연립여당이 146석을 차지했다. 21석으로 세를 불린 일본유신회와 10석을 확보한 국민민주를 합치면 개헌 세력이 177석이 된다. 개헌 세력이 입지를 더욱 넓힌 것이다. 입헌민주 39석과 일본공산당 11석이 개헌 반대 세력이다.
 
일본의 평화헌법 개헌의 가능성이 더욱 커지는 상황이다. 1889년 제정된 일본제국헌법이 태평양 전쟁 종전 뒤 폐지되면서 1947년 새로 제정된 일본국 헌법은 제정 이래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다. 일본의 개헌 절차는 일본국 헌법 96조에 따른다.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각각 3분의 2가 찬성하면 개헌안을 발의할 수 있다. 그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과반수 얻으면 헌법 개정이 이뤄진다.
 
아베가 총격으로 숨진 지 이틀만인 7월 10일의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한 기시다 총리의 자민당은 헌법 개정에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기시다 총리는 참의원 선거 다음 날인 7월 11일 기자회견에서 “헌법 개정은 자민당의 오랜 과제이며 이번 선거의 대표 공약이기도 하다”며 “국민의 뜻을 받들어 국회에서 활발한 논의를 이끌어가겠다”고 밝혔다. 기시다 총리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뜻을 이어가라는 국민의 뜻을 새기겠다”며 “개헌을 위한 정당 간 논의와 국민 설득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3년 뒤인 2025년까지 선거가 없어 안정적으로 정권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기시다가 개헌의 깃발을 올림으로써 일본에서 개헌 논의가 본격적으로 물꼬를 틀 가능성이 커졌다.
 
지난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미·중 경쟁 가열 등으로 글로벌 안보 불안이 커지자 일본의 개헌파들은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며 분위기를 띄어왔다. 여기에 아베 전 총리의 뜻을 계승한다는 명분까지 내세우면서 개헌을 밀어붙일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지금까지 자민당에서 나온 이야기를 종합하면 개헌 일정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우선 가까운 시일 안에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헌법심사회를 개회한다. 그런 다음 2024년쯤 개헌안을 발의하고 2025년에 개헌 국민투표를 하는 시나리오다.
 
자민당과 개헌 세력이 이미 지난 선거 때부터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개헌안 발의에 필요한 의석의 3분의 2를 확보했음에도 개헌을 강하게 추진하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다. 개헌 추진 세력 간의 의견 차이와 여론의 향배다.
 
여론은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지난 5월 교도통신이 헌법의 날을 맞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헌법 9조를 바꿀 필요가 있느냐’는 물음에 ‘있다’와 ‘없다’가 50%대 48%로 맞섰다. 전쟁 금지를 명문화한 헌법 9조에 굳이 한정하지 않고 전반적으로 헌법을 개정할 필요를 묻는 말에는 ‘있다’가 68%, ‘없다’가 30%로 나타났다. 묵은 조항을 고치는 개헌의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민감한 헌법 9조에는 손대고 싶지 않다는 여론이 만만치 않다는 이야기다.
 
시기와 관련해서도 기시다 총리의 임기 중 개헌이 가능할 만큼 ‘개헌 기운이 무르익고 있느냐’는 질문에 부정적인 답변이 70%에 이르렀다. 참의원 선거 직전인 7월 6일 아사히신문이 발표한 여론조사에서도 기시다 정권에서의 개헌에 대해 ‘찬성’ 의견이 36%로 ‘반대’ 의견 38%와 팽팽한 양상을 보였지만 반대가 조금 많았다. 개헌하자는 의견이 상당하지만 서두르거나 무리할 필요는 없다는 여론이 지배적임을 보여준다. 일본 자민당의 선거에서 연거푸 승리하고, 야당이 지리멸렬해 견제구를 날릴 여력을 확보하지 못해도 헌법 9조를 포함한 개헌이 큰 힘을 받기는 쉽지 않은 이유를 보여준다.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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