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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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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전보장회의(NSC) 대신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ESC)

정책이슈

정부가 국가 간 경제·기술 경쟁 심화에 대응하기 위해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가칭 ‘ESC’) 신설에 대해 논의하기로 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경제와 안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현안 이슈에 보다 정밀하게 점검·대응하기 위해 대외경제장관회의 산하에 경제부총리가 주재하는 별도의 장관급 협의체 신설에 대해 논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홍 부총리는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는 경제·외교·안보 관련 부처 장관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위원 등으로 구성된다”며 “신설이 확정되면 앞으로 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 신설 배경에 대해 홍 부총리는 “코로나19 사태 후 국가 간 기술패권 경쟁, 탄소중립 관련 규제 강화, 세계 공급망(Global Value Chain) 재편 등 잠재된 불확실성들이 언제든 리스크(위험요소)로 부각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최근 경제·기술·안보 등이 다각적으로 얽힌 형태의 국가 간 경쟁이 심화하면서 각종 경제 현안에 대한 대응 전략 구상에 전략적·정무적 판단이 함께 고려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경제와 안보가 얽힌 현안은 기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대신 앞으로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를 중심으로 논의될 전망이다. 홍 부총리는 “주요 선진국들의 통화정책 기조 변화가 신흥국 시장에 미칠 영향이 다분하다”며 “만반의 준비를 갖춰 나가야 할 상황”이라고 말했다. 박정식 기자 park.jeongsik@joongang.co.kr

2021.09.27 11:21

1분 소요
[지소미아 중단 후폭풍 어디까지] 아슬아슬 한일 관계 ‘정냉경냉(政冷經冷)’ 덫에 빠지나

산업 일반

역사문제, 징용공 판결에서 비롯된 양국 갈등… 무역·투자 이어 외교·교류에도 악영향 한국 정부가 8월 22일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ESOMIA·지소미아) 종료(또는 파기)를 결정하면서 동북아시아 안보 지형에 격랑이 예상된다. 지소미아는 양측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자동 연장되는데, 한쪽이 종료를 결정하면 시한 90일 전에 통보해야 하다. 8월 22일은 종료를 결정했을 경우 통보해야 하는 시한을 이틀 앞둔 시점이었다. 한국 정부는 8월 2일 일본 정부가 한국을 화이트국가 리스트에서 배제한 점과 그 후에도 계속 협의에 응하지 않은 점을 이유로 들며 “협정을 지속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고 결정 배경을 설명했다.이로써 2016년 11월 시작된 지소미아는 3년 만에 종료에 이르게 됐다. 한·일 간 유일한 군사협정으로서 양국 간 안보 협력을 있는 끈으로 작용해왔던 지소미아의 종료는 한·일 관계에 결정적인 악재가 될 수밖에 없다. 한국과 일본 정부가 서로 동맹 관계는커녕 우방도 아니며 심지어 적의마저 느낄 수 있는 사이로 관계가 악화하고 있는 셈이다. ━ 오랜 ‘정냉경온(政冷經溫)’ 관계에서 악화 8월 22일 한국 정부의 지소미아 중단 또는 파기 선언은 가뜩이나 지난해 10월 22일 대법원의 징용공 판결로 악화해온 양국 관계를 더욱 벼랑끝으로 몰고갈 전망이다. 양국 관계는 오랫동안 ‘정냉경온(政冷經溫)’으로 불려왔다. 정치적으로는 과거사 등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설전을 벌이며 양국 사이에 냉기가 돌아도 경제 관계는 좋았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재 양국 관계는 정치도 경제도 모두 싸늘한 ‘정냉경냉(政冷經冷)’의 위기에 빠져있다고 볼 수 있다.역사문제, 징용공판결, 화이트국가 배제에 이어 지소미아 리스크까지 개입하면서 양국 경제 관계는 더욱 악화할 것으로 우려된다. 관계 악화는 이미 양국 간 무역과 투자, 교류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선 일본의 대한 직접투자가 줄고 있다. 일본의 대한 직접투자는 2012년 연간 500건 가까이 됐으나 그해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갑자기 독도를 방문하면서 격감하기 시작했다. 2015년 연간 200건까지 감소된 후로 계속 그 수준을 유지해왔으나 징용공 파결이 나온 2018년부터 다시 감소했다. 올해 1~6월 일본의 대한 직접투자 건수는 0에 수렴하고 있다. 양국 간 무역총액도 감소세이며, 관광객 교류도 마찬가지다. 양국 관계가 식어가는 것이 급기야 경제 분야까지 미친 셈이다.이런 상황에서 터진 한국 정부의 지소미아 중단은 동아시아 국제사회의 이해관계 전반에 걸쳐 깊은 파장을 부를 수밖에 없다. 북한 미사일과 핵 관련 정보를 포함한 양국 간 군사 정보교류와 협력은 물론 한일 관계, 심지어 한미 동맹에까지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 예상 못한 결론에 일본 반발 지소미아 종료 결정이 알려진 22일 오후 일본의 반응은 한마디로 ‘설마’였다. 설마 한국이 이렇게까지 나올 것이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일본의 고노 다로(河野太) 외상은 “한국이 완전히 오인했다” “매우 실망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22일 늦은 밤에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를 초치해 항의했다. 이런 상황으로 볼 때 지소미아 종료로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예상하지 못한 타격을 입힌 것은 사실로 보인다. 마치 일본 정부가 7월 4일 고순도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터,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반도체 소재의 대한 수출을 규제하고 8월 2일 한국을 전략물자 수출 간소화 대상인 화이트국가에서 제외한 것이 반도체 생산 업체와 한국인에게 상처를 준 것과 흡사한 효과다.하지만 한국 정부의 지소미아 중단이 어떤 실익을 가져올지는 불투명하다. 특히 미국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지소미아 중단 소식을 접하자마자 “실망”이라는 반응을 내놓은 것은 이번 조치의 파장이 한일 관계에는 물론 한미 관계에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016년 지소미아의 탄생 자체가 미국이 한일 관계 악화를 막고 군사적 협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한국 정부를 설득하고 압박한 결과다.지소미아는 타국에 군사정보를 주기 위해 체결해야 하는 협정이다. 제공 받은 정보를 어느 수준까지 공유할지, 타국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어떻게 보호할지를 규정해 준수함으로써 유효 기간 중에 정보를 지속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게 하는 장치다. 한국과 일본은 지소미아를 체결해 2급 이하의 군사비밀을 직접 공유할 수 있게 됐다. 이전에는 미국을 매개로 삼아 양국의 정보가 서로 전달됐다.일본이 가장 관심 갖는 정보는 당연히 북한 핵·미사일 관련 사안이다. 이를 통해 한국은 북한이 동해 방향으로 발사해 수평선 넘어 일본 쪽으로 날아간 미사일의 종말 단계 행방을 일본을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한국은 북한 지역의 영상 정보를 파악하는 금강 정찰기와 통신 등 시긴트(SIGINT, 신호정보)를 탐지하는 백두 정찰기에서 얻은 정보가 강점이다. 항공기와 미사일을 탐지, 추적할 수 있는 이지스 전투시스템이 장착된 한국 해군의 군함도 북한 미사일 발사와 초기 비행 정보를 파악한다. 북한이나 북중 국경지역의 휴민트(HUMINT, 인간 정보원)도 강점이었으나 현재는 실태를 알 수 없다.일본은 한반도 상공에서 정지궤도를 도는 7대의 광학 또는 레이더 위성에서 확보한 대북 정보가 강점이다. 미국도 한반도를 정찰하는 정지 위성은 운영하지 않고 전 세계를 도는 위성이 한반도를 지나는 동안 얻는 광학이나 레이더 등 정보에만 의지한다. 미국 위성은 성능이 뛰어나지만 시간적 제한이 있는 반면, 일본의 정지 위성은 성능은 몰라도 이런 제약 없이 즉시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일본은 북한이 1998년 함경북도 무수단리에서 발사한 대포동 2호 미사일이 동해를 거쳐 일본 동북 지역 상공을 지나 북태평양으로 날아간 사건 이후 충격을 받아 정보수집위성을 개발해 2003년 첫 발사했다. 이름이 정보수집위성일뿐 사실상 정찰위성 또는 스파이위성이다. 위성뿐 아니라 동해에 배치된 일본 해상자위대의 이지스 시스템 탑재 군함도 동해로 발사된 북한 미사일의 비행 경로를 추적해 정보를 파악한다. 게다가 일본은 선양 영사관을 통한 휴민트 정보 수집 능력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동북 지역의 조선족 중국인과 탈북자, 중국을 왕래하는 북한인을 통한 휴민트 정보 수집으로 추정할 수 있다.이런 한·일 지소미아 중단은 동북아 안보 상황에 상당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지소미아 폐기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언론은 전문가를 인용해 “북한과 중국이 수혜자” “한국이 피해자” 등의 반응을 보였다. 아사히와 요미우리,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 신문을 비롯한 일본 언론들은 ‘동아시아 안보에 그림자’ ‘일한(한일) 대립에 결정적’ ‘미한동맹(한미동맹)에도 타격’ 등의 제목으로 우려의 눈길을 보냈다.이런 우려대로 지소미아 중단의 가장 큰 문제는 동북아 안보지형도의 변화다. 이는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전개해왔던 안보체제를 허무는 효과가 있다. 이를 위해 우선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후 전 세계에서 전개해왔던 글로벌 안보 시스템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된 1949년 북미와 서유럽 국가와 북대서양조약을 맺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창설해 집단안보 군사동맹 체제를 유지해왔다. 이는 대규모 원조를 통한 경제부흠 프로그램인 마샬 플랜과 함께 서방을 결집하는 바탕을 이뤘다. 회원국 일방에 대한 무력공격은 미국을 포함한 전체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나토가 개입한다는 나토 헌장 제5조는 나토 동맹의 근간을 이뤄왔다. 나토는 1992년 옛 소련이 무너진 이후 과거 소련이 주도했던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을 받아들이면서 영역을 동유럽으로 확대해왔다. 나토는 냉전 해체 후에도 존속해 집단 안보 체제를 앞세운 대테러 전쟁 등을 주도하고 있다. 미국은 중남미 국가들과는 나토 창설 전인 1947년 이미 미주상호원조조약을 맺고 결속을 다져왔다. 이 체제는 1961년 쿠바 미사일 위기 등에 공동 대응하며 협력 체제를 유지해왔다. ━ 인도·태평양 사령부에서 중국 팽창 저지 역할 눈여겨볼 점은 아시아 지역이다. 중요한 점은 미국이 아시아 지역에서 유럽과 달리 집단안보체제가 아닌 개별 안보협약에 의지해왔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자신과 연결된 아시아 지역 여러 나라를 연결하는 아시아 안보협력 체제의 ‘허브’ 역할을 해왔다. 미국은 필리핀과는 1951년 미국·필리핀 상호방위 조약을 맺고 미군이 필리핀에 주둔했지만 1991년 필리핀 상원이 미군기지 조차 연장법안을 거부하면서 미군은 기지를 반환하고 철수했다. 하지만 미국은 필리핀과 23년 만인 2014년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을 맺고 10년간 필리핀 군사기지 접근과 이용을 허가받고 미군 배치 지역의 별도 시설물을 설치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다. 명분은 미군이 대테러전 등을 위해 필리핀 내 기지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미군은 필리핀 중부의 바사, 남서부의 안토니오 바티스타, 남부의 막탄-베니토 에부텐, 룸비아 등 공군기지 4곳과 북부의 포트 막사이사이 육군기지 등 5군데를 사용하고 있다.미국은 1979년 중국과 수교하고 대만과 국교를 단절하면서 대만관계법을 제정해 대만에 대한 미국의 무기 수출이 가능하도록 했다. 중국의 반발에도 미국 국무부가 지난 2월 대만에 M1A1 에이브람스 전차의 개량형인 M1A2 108대와 스팅어 미사일 등 22억 달러의 무기 수출을 승인한 데 이어 8월 21일에는 80억 달러 상당의 F-16V 66대의 판매도 결정한 법적 근거다. F-16V는 기존 F-16 전투기에 성능이 개량된 레이더를 장착하고, 작전 컴퓨터와 전자전 장비 및 추락방지 장치 등을 추가해 2012년 공개한 최신 버전의 무기체계다.미국이 아시아 지역에서 유일하게 방위를 위해 피를 흘린 나라가 한국이다. 미국은 6·25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주한미군 한반도 주둔의 권리를 보장받고 한미동맹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은 일본과 1960년 미일 안보조약을 체결하고 주일 미군을 앞세워 일본 영토의 공격에 대처하고 있다. 아울러 미군이 일본 시설을 사용하는 근거를 제공받고 있다.미국은 호주·뉴질랜드와는 1951년 태평양 안보조약을 맺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이 팽창하면서 미국은 한국·일본을 묶고 호주·뉴질랜드까지 결합하는 한·미·일·호·뉴질랜드 5개국 안보체제를 추구해왔다. 여기에 인도의 협력까지 더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군사적·외교적·지리적으로 중국을 포위해 팽창을 저지하고 영향력 확대를 억제하려는 인도·태평양 전략을 글로벌 전략의 축으로 삼아왔다. 미국의 사령부가 2018년 5월 30일 해리 해리스 사령관(현재 주한 미국대사)의 취임에 맞춰 명칭을 인도·태평양 사령부로 바꾼 것은 미국이 추구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다. 이 사령부는 인도양과 태평양 및 그 연안을 담당한다. 미국은 자국을 포함한 전 세계를 북부사령부(북미), 남부사령부(멕시코를 제외한 중남미), 유럽사령부(유럽과 러시아), 아프리카 사령부(아프리카), 중부사령부(중동과 파키스탄, 중앙아시아), 그리고 인도·태평양 사령부 등 6개의 관구로 나누고 있다. 이 가운데 인도·태평양 사령부가 관할 구역이 가장 넓다.이 인도·태평양 사령부 관할 지역에서 미국은 한·미·일·호·뉴질랜드 5개국 군사동맹으로 중국을 억제하고 싶어 한다. 여기에 인도가 포함될 수도 있다. 아시아판 또는 인도·태평양판 나토를 만들고 싶은 것이 미국의 오랜 의도였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이 역사 문제로 갈등하자 한국을 설득해 2016년 맺도록 한 것이 지소미아다. 바로 그 지소미아가 종료한 것은 단순히 한일 관계 악화를 넘어 미국의 아시아 또는 인도·태평양 전략에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한국은 지소미아 폐기로 미국의 글로벌 전략 의도를 제대로 따르지 않은 것은 물론 그르치게 한 셈이다. 이에 따라 미국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한일 협력의 끈을 유지하려고 노력할 가능성이 크다. 일본도 미국에 매달려 한국이 지소미아 중단을 번복하게 하든지,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반도체 소재 대한 수출금지와 화이트국가 배제 당시 한국이 미국에 중재를 요청하려고 했던 당시와는 역전된 상황이다. ━ 미국의 다음 대응 카드는… 현재도 미국은 주한미군 주둔 분담금 인상과 호르무즈 해협 파병 등으로 한국에 부담을 주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어떻게 나올지가 문제의 핵심이 되고 있다. 지소미아 중단 또는 파기는 한일 문제를 넘어 한미동맹의 문제로까지 떠오를 수밖에 없다.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어떤 외교력을 발휘할까.-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2019.08.25 15:26

8분 소요
2020 미국 대선에 해킹 경보

정책이슈

러시아가 고전적인 냉전 전략을 이용해 차기 미국 대선에 대한 미국인의 신뢰를 저해하려 한다. 그 전략이 과연 통할까 2016년 10월 7일 꼬리를 물고 잇따라 발생한 3가지 사건이 로비 무크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첫째 사건은 오후 약 3시 반에 일어났다. 오바마 정부가 러시아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들이 민주당전국위원회(DNC)를 해킹하고 민주당에 혼란을 유발하는 이메일 수천 통의 유출을 지휘했으며 이는 “미국 선거절차를 방해하려는 의도”라는 내용이었다. 이날 정신없이 쏟아져 나오는 뉴스 속에서 그 특이한 발표는 주목받지 못했다.오후 4시 워싱턴 포스트는 악명 높은 ‘(NBC 방송 연예 프로그램) 액세스 할리우드 테이프’를 공개했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선 후보가 자신이 여성들을 성희롱한 일을 자랑하는 내용이 녹음된 테이프였다. “상대가 스타일 때는 여자들이 거부를 안 해. 무엇이든 할 수 있지. 사타구니를 손으로 잡아도. 뭐든 가능해.”한 시간도 안 돼 또 다른 미디어 폭탄이 투하됐다.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가 또 다른 이메일 뭉치를 공개했다. 힐러리 클린턴의 존 포데스타 선대위원장 계정을 해킹해 빼돌린 5만 통의 이메일 중 1차분 2만 쪽이었다. 당시 35세로 클린턴 캠프의 선거본부장이던 무크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주 분명했다”고 돌이켰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자들이 월스트리트 은행들 대상으로 한 고액 연설의 옛날 원고, 가톨릭 유권자들과 관련된 문제의 논평들과 기타 클린턴의 선거운동에 불리한 것으로 판명된 문서들을 발굴해 냈다. 미국 정보당국은 그 뒤 포데스타 메일 해킹과 러시아 군부의 연관성을 밝혀냈다.3년의 세월이 흘러 미국이 새로운 대선을 준비하는 시점에서 무크를 비롯한 다른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공격을 재개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KGB 요원들(독일 드레스덴에서 번역가로 위장한 블라디미르 푸틴이라는 젊은 신참 요원 포함)이 냉전 시대 완성한 ‘아지프로(agitprop, 선전선동)’의 최신 버전을 계속 구사하리라는 분석이다.러시아의 전반적인 의도는 크리스토퍼 레이 미국 연방수사국(FBI) 국장의 말을 빌리자면 언제나 “미국에 혼란을 유발하고, 사람들을 이간질하고, 분열과 불화의 씨앗을 뿌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인의 신념을 저해하는” 것이었다고 대다수 정보 당국자와 러시아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또는 미국 국무부 관료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대 테러조정관 출신으로 냉전 시대 많은 경험을 한 리처드 클라크의 말마따나 러시아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미국인이 우리 시스템을 포기하는 것”이다.많은 선거진영이 오래된 이메일과 문자메시지를 30일 정도에 한 번씩 시스템에서 삭제하고 관계자들이 로그인할 때 두 종의 기기를 통해 신원을 확인하는 이중 인증(two-factor authentication)을 의무화하면서 사이버보안 예방조치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선거보안 기준의 수립에 관여한 각종 민관 기관에서 일했고 다수의 선거운동에 컨설팅을 제공하는 사이버보안 전문가 조슈아 프랭클린의 말이다.내년 11월이 가까워짐에 따라 2016년 대선 중 러시아의 조직적인 인터넷 공작 캠페인으로 노출된 방대한 규모의 보안 취약점을 보강하려 동분서주하는 민간인, 공공정책 운동가, 정치인, 주·지방 선거 관계자, 국가 안보 기관이 갈수록 늘어난다.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의혹에 대한 뮬러 특검의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의회는 대선 사이버 보안을 강화하기 위해 각 주에 3억8000만 달러를 배정했다. 무크는 이번에는 초당적인 역할을 맡았다. 미트 롬니 후보의 2012년 대선 선대위원장을 지낸 공화당원 매트 로즈와 손잡고 2017년 하버드대학 산하 싱크탱크에 디지털민주주의수호프로젝트(D3P)를 설립했다. 사이버·정보 공격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목적의 단체다. 지난 6월 선거자금법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선거운동 조직에 무료·저비용 사이버보안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목적의 D3P 계열 조직이 연방선거위원회로부터 승인을 받았다.이제 무크 팀이 선거 당국의 승인을 받았으니 첨단 패턴인식 소프트웨어를 도입할 수 있는 선거본부가 늘어날 것이다. 은행들이 발생 가능한 스피어피싱(특정 대상을 표적으로 한 피싱 공격) 이메일과 특이한 대규모 데이터 파일의 유출을 모니터하고 불법 활동을 적발하는 데 사용하는 유형의 소프트웨어다. FBI 사이버 전문가 출신으로 사이버보안 업체 애거리 소속 크레인 해솔드 선임 위협연구 팀장의 말이다.선거본부들이 요즘 취하는 예방조치는 과거의 문제들에 대처하는 경향을 띤다. 예컨대 2016년 클린턴 선거본부에 궁극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줬던 민주당전 국위원회 해킹이 대표적이다. 첩보·보안 전문가들은 2020년 대선 중 러시아인이 지난 두 차례 선거의 영향에서 간과됐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어떤 일을 벌이지 않을까 걱정한다. FBI의 레이 국장은 지난 4월 외교위원회에 출석해 “우리의 적들이 계속 적응하면서 강도를 높여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미국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미국인의 신뢰를 러시아가 어떻게 저해할 계획인지 파악하기 위해 사이버 보안 전문가와 캠페인 관계자들은 2016년과 2018년 선거의 여파를 파헤치며 실마리를 찾고 있다. 2016년 대선 직전 워싱턴대학의 케이트 스타버드 연구원은 ‘#흑인생명도중요하다’ 운동의 온라인 대화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연구팀은 가장 활동적인 트위터 계정 일부를 팔로우하면서 그들의 트윗이 미치는 영향을 추적했다.인간-컴퓨터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스타버드는 무엇보다도 그 콘텐트 중 독성을 지닌 내용이 얼마나 많아졌는지 그리고 토론이 얼마나 신랄하고 분극화됐는지에 충격을 받았다. 폭력을 옹호하거나 인종차별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도 있었다. 스타버드 팀이 2017년 10월 그 주제에 관해 첫 논문을 발표한 불과 몇 주 뒤 의회의 조사를 받던 페이스북 관계자들이 인터넷 리서치 에이전시(IRA)라는 정체불명의 러시아 업체에 총 10만 달러를 웃도는 광고가 판매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시인했다. 친크렘린 프로파간다를 주도한 전력이 있는 업체였다. 미국 정보계는 러시아가 소셜미디어 트롤(trolls, 많은 반응을 얻거나 사람들을 선동할 목적으로 논란의 불씨를 던지는 악플러)들을 돈으로 매수해 가짜 뉴스를 퍼뜨려 여론에 영향을 미쳤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광고는 총기소유권, 이민과 인종차별 같은 정치적으로 분열적인 이슈에 초점을 맞췄다.그 뉴스를 접한 스타버드 연구팀은 그녀가 조사했던 대화에 관여한 트롤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지난해 11월 트위터가 제공한 IRA 관련 계정 리스트를 하원정보위원회가 공개했을 때 스타버드팀은 자신들이 알아볼 만한 계정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조사 결과는 놀라웠다. 리스트의 계정 수십 개가 그들의 데이터에 등장했다. 일부는 가장 많이 리트윗된 계정에 속했다. IRA 계정은 진정한 ‘#흑인생명도중요하다’ 그리고 그 운동가들로도 위장했다.스타버드팀이 2016년의 데이터를 다시 조사했더니 IRA의 인터넷 트롤들이 유사한 계정을 내세워 긴밀히 협력하면서 양 진영에 모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은 온라인 활동가의 캐릭터를 취해 커뮤니티에 침투하고 다른 참가자들의 정서를 모방하다가 기회다 싶을 때는 인플루언서(SNS의 유명인)로 나서 미묘하게 또는 노골적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일부는 비교적 온순한 캐릭터를 맡아 무리를 추종하면서 신뢰받는 브랜드를 구축했다. 나머지는 미국 유명 정치인의 커리커처를 맡아 반체제의 불길을 부채질하는 폭탄 투척병으로 활동했다. 그들은 “좌파 ‘흑인생명도중요하다’ 진영의 대화와 우파의 온라인 보수 행동주의를 모두 표적으로 삼았다”고 스타버드는 말했다. 스타버드는 “따라서 좌파 그리고 친 ‘흑인생명도중요하다’ 그룹에선 경찰을 돼지라고 부르며 경찰에 대한 폭력을 지지하는 ‘경찰 엿먹어라’ 같은 계정이 생겨나면서 IRA 트롤 중 일부는 그런 맥락에서 극히 심한 막말을 던진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파에선 인종차별적 욕설을 하며 몇몇 더 악질적인 말들을 쏟아놓는다. 어떤 경우엔 한쪽의 트롤이 반대쪽 트롤과 논쟁을 벌이며 서로에게 막말을 퍼붓기도 한다.”2016년 러시아의 온라인 캐릭터들은 우파에선 트럼프에 좋은 말을 늘어놓고 좌파에선 힐러리를 중상하며 그녀에게 투표하지 않도록 유도했다. 2020년에는 이들 똑같은 트롤이 ‘좌파 분열’ 노력을 강화할 것으로 스타버드는 예상한다. 주목을 받으려 경쟁하는 후보들이 난립한 상황에서 트롤들은 특정 후보와 연계된 캐릭터를 택해 대화에 끼어든 뒤 틈날 때마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다른 민주당 후보(필시 그들 옆 칸의 트롤들이 내세운 다른 캐릭터의 지지를 받는)를 공격해 결과적으로 득표수를 줄일지 모른다.그녀는 “그들은 ‘저항하라’나 그 밖에 다른 유형의 민주당 캐릭터를 정기적으로 모방하면서 다른 후보들을 폄하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특히 일단 민주당 후보가 선출되면 그를 깎아내리면서 ‘이 사람은 우리를 대표하지 않으니 그를 선출할 수 없어. 따라서 나는 그에게 투표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한다.”이번에는 트롤들도 더는 깜짝 출현의 우위를 차지하지 못한다. 그들을 차단하거나 영향력을 줄이려는 노력이 진행 중이다. 정치적 압력이 거세짐에 따라 페이스북과 트위터 모두 트롤을 차단하겠다고 다짐했다. 2018년 중간선거 전 FBI는 IRA가 운영하는 수십 개 계정과 페이지를 찾아냈다. 페이스북은 즉시 그들을 폐쇄했다. 또한 위협이 등장할 때 실시간으로 모니터하는 ‘전시상황실’을 설치했다.한편 연방기구들은 유권자들이 봇과 허위정보 유포 캠페인을 적발하도록 하는 노력을 강화했다. 웨스트버지니아·아이오와·캔자스·오하이오·코네티컷 주의 선거 당국자들은 유권자 교육 프로그램에 허위정보 교육을 포함할 계획이다. 군의 사이버사령부도 활발히 움직인다. 지난해 선거 전 2016년 선거개입 공작 배후의 러시아인들을 저지하는 캠페인에 착수했다. 러시아 공작원들에게 활동을 중단하라고 경고하면서 IRA가 운영하는 댓글 부대(troll farm)의 인터넷 연결을 수일간 차단했다. 그러나 우리 앞에 놓인 도전과제에 관해 환상을 갖는 사람은 없다. 댄 코츠 국가정보국(DNI) 국장은 지난 1월 상원정보위원회에서 러시아가 계속 “사회적·인종적 긴장의 심화, 당국에 대한 신뢰의 저해, 그리고 반 러시아 성향의 정치인 비판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더 표적 맞춤형으로 추가적인 영향력 도구상자(예컨대 허위정보 유포, 해킹·정보유출 공작 또는 데이터 조작 등)를 동원해 미국의 정책·활동·선거에 영향을 미치려 할지 모른다.”FBI의 레이 국장은 러시아인이 2018년까지 그들의 전술을 지속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모델이 상황에 맞춰 적응해 나가고 있으며 다른 나라들이 그 접근방식에 상당히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는 조짐이 보인다”고 말했다. 그들이 내세우는 목표는 과거와 조금도 변함이 없다. 클라크 전 대테러조정관은 “그들은 정치와 정치인이 끔찍한 존재라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고자 한다”고 말했다. “교착상태에 빠져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는다고. 그들은 우리끼리 내분을 일으켜 서로 으르렁거리기를 원한다.”냉소주의와 분열을 조장하려는 욕구도 2016년 러시아 해킹 공격의 또 다른 핵심적인 부분 그리고 미국의 2020년 취약점에 관해 그렇게 걱정이 많은 이유를 설명한다. 바로 미국의 선거 인프라에 침투하려는 러시아의 노력 때문이다.수전 그린핼그는 2016년 대선일 승패의 열쇠를 쥔 접전주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 카운티의 유권자 등록 시스템에 러시아인이 침투하는 데 성공해 자신이 목격했던 광범위한 혼란을 유발했는지 단언하지 못한다. 또한 2018년 선거일 오하이오·펜실베이니아·인디애나·조지아·플로리다 주의 투표절차를 엉망으로 만든 유권자 등록명부 문제의 배후가 그들이라는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못한다.그러나 누군가 지역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투표수를 줄이고 많은 사람을 열 받게 하고 미국 선거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를 원했다면 두 차례의 선거에서 자신이 실시간으로 목격했던 것과 필시 아주 흡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들 사건 중 어느 것도 아직 본격적으로(일부는 전혀)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뮬러 보고서에 따르면 플로리다주에선 2016년 적어도 한 카운티의 투표 시스템이 해킹당했다(주지사와 카운티 당국자들은 어느 카운티인지 입을 다물고 있다).그린핼그는 2020년 11월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걱정한다. 화학 원자재 브로커 출신의 그린핼그는 2000년대 초 금융업을 떠나 선거보안 강화 분야에서 새 천직을 잡았다. 미국 각지의 카운티들이 전자투표와 전자 유권자 등록 시스템으로 전환하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종이투표와 그 밖에 고장·해킹·사기에 대한 보호조치를 촉구하는 단체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또한 선거일에 헌법으로 보장되는 투표권을 방해할 만한 어떤 문제든 해결하기 위한 신속대응 선거모니터그룹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시작했다. 2016년 선거일 아침 그녀는 맨해튼 중부의 한 법률사무소의 널따란 콜센터에 배치됐다.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문제를 모니터하면서 대응하는 업무를 맞은 그룹에 배치됐었다. 오전 6시반 거의 투표가 시작되자마자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투표소 근무자들이 투표자 확인에 사용하는 랩톱과 태블릿에 유권자 등록명부의 전자판이 깔렸었는데 정보가 부정확한 듯했다. 수십 명의 유권자가 투표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기록에는 투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어떤 디지털 정보도 찾아볼 수 없는 투표소 근무자도 있었다. 그런 문제가 너무 만연하자 카운티 선거당국자들은 불과 한두 시간 만에 전자판 등록명부를 완전히 포기하고 옛날 방식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자 새로운 문제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투표소 근무자가 종이 버전 유권자 명부와 법정 투표양식을 찾으려 허둥댈 동안 줄이 길게 늘어서면서 원성이 빗발쳤다. 한 투표구에선 투표가 두 시간 동안 중단됐다. 그러는 동안 다수의 유권자가 아예 투표를 포기하고 직장이나 집으로 돌아갔다.그린핼그는 “줄이 줄어들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몇 시간이 걸렸다”며 “따라서 그것이 그날 사람들이 투표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실제로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그린핼그는 수상쩍다고 느꼈다. 두어 주 전 CNN에서 한 투표 시스템 공급업체가 러시아 정보국의 사이버 공격을 받아 FBI가 조사 중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그녀는 지인에게서 그 공급자가 VR 시스템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뒤 정오쯤 뉴스 기사 중간에 숨겨진 한 문장이 그녀의 숨을 멎게 했다. 불과 1년 전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이 VR 시스템의 전자 선거인명부 시스템을 이용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린핼그는 국토안보부에 연락을 취했다. “그들은 상당히 흥미를 보였다”고 그녀는 돌이켰다. 그런데도 국토안보부는 당시 선거 중 사용된 랩톱의 과학적 분석을 지난 6월에야 실시할 계획이라고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선거 당국자들은 자체적으로 조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선거 후 수개월이 지날 때까지 그런 요청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뮬러 특검팀은 러시아 첩보 공작원들의 활동을 상술한 기소장을 접수한 뒤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보고서를 발표했다. 2016년 대선 전 몇 주 사이 러시아 정보 요원들이 VR 시스템의 해킹을 시도했을 뿐 아니라 그 회사의 고객들인 지방 선거 당국자 122명에게 ‘스피어 피싱’ 이메일(다시 말해 수신자를 속여 링크를 클릭하거나 첨부파일을 열어 해커들이 계정에 침투할 수 있게 만들어진 개인 맞춤 이메일)을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그리고 같은 러시아 부대가 적어도 21개 주의 시스템을 조사하며 취약점을 찾았다.뮬러 보고서는 러시아 군 첩보부가 2016년 8월 미국 내 밝혀지지 않은 유권자 등록 기술의 “회사 네트워크에 악성 소프트웨어를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고 설명했다. VR 시스템이 바로 그 회사라는 의혹이 널리 퍼졌다고 그린핼그는 말한다.VR 시스템은 러시아 해커들이 자신들의 투표 시스템에 침투하려는 듯 직원과 고객에게 피싱 공격 이메일을 보냈다고 시인했다. 그들은 어떤 직원의 이메일 계정도 해킹당하지 않았으며 즉시 모든 고객에게 공격을 주의하라는 경고를 보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성명을 통해 “그 이메일을 열어봤다고 신고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밝혔다. 그들은 사법당국과 그동안 내내 협력해 왔으며 사이버 보안을 강화했다고 말했다.그러는 동안 선거 인프라의 취약점을 둘러싼 그린핼그의 우려는 더욱 커졌다. 실제로 2018년 중간선거 때도 똑같은 일을 목격했다. 이번에는 다른 주에서도 문제가 보고됐다. 오하이오·펜실베이니아·인디애나·플로리다 주에서 투표하러 나온 일부 유권자는 부재자 투표를 한 것으로 잘못 기록돼 있었다. 조지아주에선 오래 전부터 이용해온 투표소에 등록된 주소가 변경돼 신분증의 주소와 일치하지 않았다는 유권자들도 있었다. 등록 명부가 느닷없이 사라진 유권자도 있었다.이런 대다수 사례에서 또다시 신기술이 개입됐다고 그린핼그는 말했다. 그녀는 2016년이나 2018년 선거가 아무런 조작도 없이 깨끗했다고 인정할 생각은 전혀 없다. 2016년이나 2018년에 “미국의 투표를 방해하고 투표수를 바꾸거나 투표 집계능력을 저해했을 만한 미국 선거 인프라의 훼손을 나타내는 정보 보고는 없다”고 지난 1월 의회에서 증언한 코츠 DNI 국장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그녀의 의혹이 합당하든 않든 러시아인에게는 필시 큰 문제가 되지 않을 듯하다. 그들의 일차적인 목표는 결과를 바꾸는 게 아니라 신뢰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투표 조작은 중요하지 않다. 미국 시민이 투표가 조작됐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작전은 성공한 셈이다.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물론 선거 인프라의 보호장치를 강화하려는 노력이 진행 중이다. 문제는 미국 선거제도가 분산됐으며 수많은 개별 카운티·도시·타운의 선거관계자들이 관리한다는 점이다. 그들 중 다수가 연방정부에 자치권을 빼앗길까 전전긍긍한다. 전자투표기 제조업체들은 지방·주 선거당국자들과 낙하산 인사를 주고받는 긴밀한 유착관계를 구축했다.일부 선거보안 운동가들에게는 불가해한 듯한 문제가 이것으로 설명된다. 모든 연방 선거에 대한 새로운 사이버 보안 기준을 수립하는 법안이 상원에서 수개월 동안 묶여 있다(미치 맥코넬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가 지금껏 표결을 거부했다).뉴욕대학 로스쿨 브레넌 사법센터의 로렌스 D. 노든 선거개혁 프로그램 소장은 “뮬러 보고서의 일부는 우리 선거에 대한 명백한 공격에 맞서 우리가 충분히 대처하지 않았으며 얼마나 더 대비해야 하는지에 관한 진심 어린 호소”라며 “그리고 이런 일부 취약점을 보완하려는 노력을 얼마나 기울이지 않았는지 정말 기가 막힐 정도”라고 말했다.이런 시스템 중 다수에 보안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2016년 더럼에서 아주 많은 문제를 유발했던 유형의 전자 선거인명부가 최소 34개 주 이상에서 사용된다고 노든 소장은 말한다. 그 정보가 클라우드에 저장되거나 아무런 연방 보안 기준이 수립되지 않은 무선 기술로 관리되는 경우가 많다. 2017년 5월 기준으로 최소 41개 이상이 더는 서비스되지 않거나 보안 패치가 제공되지 않는 10년 이상 된 투표 시스템을 이용했다.한편 최소 11개 주 이상이 적어도 일부 카운티와 타운에서 투표용지 없는 페이퍼리스 투표기를 사용한다. 적어도 예비로 투표용지를 준비하는 시스템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미국 국립과학원, 상하원 정보위원회, 국토안보부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투표기의 생산과 프로그래밍 그리고 등록 데이터베이스의 유지(그리고 몇몇 경우 심지어 선거일 밤 투표 결과 집계)를 담당하는 민간 공급업자는 규제를 받지 않는다. 노든 소장은 “우리는 그들이 어떤 사람을 고용하는지, 보안과 관련해 어떤 심사 절차를 갖고 있는지, 그들의 사이버보안 관행이 무엇인지, 소유주가 누구인지, 심지어 그들이 누구인지, 얼마나 많은지 같은 기본적인 정보도 없다”고 말했다.러시아인과 2020년에 관해 가장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어떤 일이 다가오는지 모른다는 점이라는 우려가 크다.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사이버보안 정책 국장 출신으로 리처드 클라크 전 대테러조정관과 사이버 보안에 관한 신저를 공동저술한 롭 네이크는 “우리가 2016년의 재연 방지만 생각하는 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한쪽 통로를 폐쇄한다고 해커들이 포기하고 돌아서지 않는다는 점이 사이버 분쟁의 속성이다. 러시아인은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또는 이번에는 투표에 직접 간섭하는 다른 방안을 찾을 것이다.”정보 관계자들은 한 가지 비교적 새로운 무기를 찾아냈다. 코츠 DNI 국장은 의회 증언에서 러시아인이 ‘딥 페이크’(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난 것처럼 연출하는 조작된 비디오)로 혼란의 씨앗을 뿌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요즘 한 사람의 얼굴을 다른 사람의 몸에 쉽게 붙일 수 있게 하는 소프트웨어가 널리 통용된다. 지난 5월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술에 취한 듯 불분명하게 발음하는 초보 기술의 조작 동영상이 페이스북에서 수백만 건의 조회 수를 기록했을 때 섬뜩한 미래의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아담 쉬프 하원 정보위원회 위원장은 지난봄 “말한 적이 없는 것을 말하는 후보의 딥페이크 동영상이 나올 때 가장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말했다. “미트 롬니 후보가 (연방소득세를 내지 않는 미국 국민 47%를 비난한) 비디오테이프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돌아보면 더 인화성 강한 비디오테이프가 선거결과를 얼마나 바꿔놓을 수 있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런 미래를 향하고 있는지 모른다.”클라크 전 대테러조정관의 가장 큰 우려는 주요 접전주에서 러시아인이 선거인 명부에 침투해 투표수를 전략적으로 줄일 목적으로 혼란을 유발해 선거결과의 합법성에 관해 더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이다. 결국에는 그들을 저지하려는 노력에서 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도구는 기술과 거의 관계가 없다. 골수 클린턴 충성파들은 2016년의 해킹이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전례 없는 규모의 공격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상당수 경험 많은 냉전주의자들은 그것을 더 큰 맥락에서 바라본다. 역사적인 기준에서 볼 때 호전적인 러시아인이 훨씬 더 공격적인 전술을 택해왔다고 일부는 주장한다. 어쨌든 그들이 노조를 통제하면서 자신들을 위해 수천 명을 동원해 선동할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이런 전술이 훌륭해서 통하는 적은 없다. 모두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효과를 본다.” ‘신냉전: 푸틴의 러시아와 서방에 대한 위협(The New Cold War: Putin’s Russia and the Threat to the West)’을 포함해 많은 책을 써낸 영국의 저술가이자 보안 정책 전문가 에드워드 루카스의 말이다. ━ “미국 민주주의는 사이버 공격에 취약” - 사이버 보안 전문가 리처드 클라크, 2020년 미국 대선이 사이버 전장에서 치러지며 미국이 불리할 것으로 전망해 리처드 클라크는 지금까지 기회만 있으면 미국의 보안 취약성을 강조했다. 그는 조지 W. 부시 정부가 9·11 테러공격을 막지 못했다고 비난하면서 유명해졌다. 그가 로버트 네이크와 함께 집필한 신저 ‘제5영역: 사이버 위협의 시대에 조국과 기업, 우리 자신을 지키는 방법(The Fifth Domain: Defending Our Country, Our Companies, and Ourselves in the Age of Cyber Threats)’은 미국을 공격하기 위해 디지털 기술이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 또 그런 공격을 막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깊이 파헤친다.클라크는 로널드 레이건 정부 시절 국무부에서 일했고, 빌 클린턴 백악관의 국가안보회의에서 대테러 조정관을 맡았으며,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사이버보안 특별보좌관을 지냈다. 애덤 피오르 기자가 최근 그를 만나 사이버공간의 무기화와 국가안보에 관해 인터뷰했다.미국이 러시아·중국·이란과 저강도로 서서히 진행되는 사이버 전쟁 중이라고 말했는데 무슨 뜻인가?우리는 바로 지난달에도 이란을 상대로 사이버 공격을 했다. 그것이 하나의 명백한 사례다. 러시아의 경우 우리가 최근 그들의 전력망에 침투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내가 서서히 진행되는 저강도 사이버 전쟁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앞으로 대규모 실전이 사이버 공격으로 촉발될 수 있다고 보는가?그럴 가능성이 크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무장정파 하마스가 올해 초 이스라엘을 상대로 사이버 공격을 했을 때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사이버 시설 공습으로 대응했다. 지난 4년 동안 미국 국방부의 정책은 미국에서 중대한 사이버 공격이 있을 경우 미사일이나 폭탄으로 그에 대응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만약 북한이 미국에서 대규모 사이버 공격을 감행한다면 공습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기본 정책이다.사이버 전쟁과 관련해 긴장을 어떻게 완화할 수 있는가?1970~80년대 유럽에서 군축을 했을 때와 냉전 당시 소련과 미국이 전략적으로 대치했을 때 우리는 두 가지를 기본으로 삼았다. 첫째, 우리는 리스크를 줄이는 조치를 취했다. 특이한 활동 등 뭔가 신경 쓰이는 게 있으면 곧바로 상대측에 전화를 걸어 해명을 요구했다. 과거 우리 미사일 테스트가 잘못돼 목표와 다른 쪽으로 날아갈 때 나는 러시아인이 공격받는다고 오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곧바로 그들에게 우리 테스트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통보했다. 둘째는 신뢰 구축 조치다. 투명한 활동과 상대방의 활동에 참여하거나 참관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해 신뢰를 쌓았다.사이버 전쟁의 경우 아직은 아무도 리스크 감소 조치나 신뢰 구축 조치를 개발하지 못했다. 하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의 전력망에 침투하는 것 같은 사이버 공격으로 위기와 불안정이 더 많이 조성될수록 리스크 감축과 신뢰 구축 조치가 더 많이 필요하다.러시아는 신뢰 구축과 리스크 감축 조치를 도입할 생각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그 점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시도는 해봐야 한다.그런 위협에 미국이 어떻게 맞서야 하는가?우리는 방어 측면이 많이 부족하다. 우리는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집 안에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예를 들어 중국이 우리의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공격하거나 러시아가 우리의 전력망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뻔히 안다. 그 외 미국의 다른 중요한 시스템도 상당히 취약하다. 방어에 더 신경 써야 한다.사이버 보안의 관점에서 2020년 대선을 어떻게 보는가?방어보다 공격이 더 쉽고 비용도 적게 든다. 공격자는 표적을 선택할 수 있지만 방어자는 모든 곳을 막아야 한다. 공격자는 다크웹에서 맬웨어를 몇백 달러 주고 살 수 있겠지만 그 공격을 막으려면 수십만 달러를 들여야 한다. 해커는 다른 나라에서 비교적 소규모 팀으로 활동할 수 있지만 방어자는 미국 전역에서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 따라서 공격이 훨씬 더 유리하다. 2020년 대선이 그만큼 취약하다는 뜻이다.미국 민주주의가 러시아의 위협을 막아내고 건재할 수 있다고 얼마나 낙관하는가?지난 250년 동안 우리는 강하고 상당히 복원력이 뛰어난 국가였다. 끔찍한 상황도 겪었지만 늘 어려움을 딛고 일어섰다. 하지만 앞으로도 늘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그렇다면 낙관과 비관 어느 쪽인가?상당히 우려스럽다. ━ 해커들이 미국 대선 노린다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의 2년에 걸친 수사로 2016년 미국 대선에 러시아가 개입을 시도했다는 많은 사례가 밝혀졌다. 그 위협은 넓게 4가지 범주로 나뉜다. 소셜미디어, 선거 인프라, 선거운동 보안, 다크 머니(유권자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사용되는 정치 자금)가 그 영역이다. 보안 전문가는 지금부터 다음 미국 대선이 열리는 내년 11월까지 그와 비슷하게 광범위한 공세가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소셜미디어→ 러시아의 ‘인터넷 리서치에이전시(IRA)’는 2014년부터 수백만 달러를 뿌리며 수많은 사람에게 페이스북·유튜브·인스타그램·트위터에 가짜 계정을 만들도록 했다. 그들은 사회운동가로 행세하며 미국 유권자를 유인하는 소셜미디어 페이지를 운영했다. 목표는 ‘후보들과 정치 시스템 전반을 향한 불신을 퍼뜨리는 것’이었다.→ IRA는 이민자 문제에서는 ‘안전한 국경’ 같은 이름의 SNS 페이지를 통해, 흑인 인권운동과 관련해선 ‘블랙티비스트’ 등의 페이지를 통해, 종교 문제에선 ‘예수군’ ‘미국 통합 무슬림’같은 페이지를 통해, 지역문제와 관련해선 ‘남부 연합’ ‘텍사스의 심장’ 같은 그룹을 통해 분열을 조장했다.→ IRA가 관리하는 SNS 페이지 중 다수는 2016년이 되자 팔로어가 수십만 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정치 광고와 SNS 페이지는 흑인 팔로어에게 질 스타인 녹색당 대통령 후보를 찍든가 아니면 기권하도록 촉구했다.→ IRA는 풀뿌리 미국 단체로 위장하고 유세를 열고 금전적 보상을 미끼로 유권자가 특정 후보를 지지하든가 비난하도록 유도했다.선거 인프라→ 러시아 정보기관과 연계된 해커단은 미국 주 선거관리 컴퓨터 네트워크 최소한 21개(훨씬 더 많을 가능성이 크다)와 투표기계 제조사 최소한 한 곳을 공격했다.→ 지방 선거관리 간부들에게 보낸 스피어피싱(특정한 개인들이나 회사를 대상으로 한 피싱) 이메일로 플로리다 주에서 최소한 한 곳의 카운티 지방정부가 해킹당했다.→ 해커들은 일리노이주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유권자 데이터를 훔쳤다.선거운동 보안→ 해커들은 민주당 하원 선거위원회(DCCC)의 컴퓨터 29대에 침투해 79기가바이트 이상의 파일에 담긴 데이터를 훔쳤다. 그로써 민주당 전국위원회(DNC) 해킹의 발판이 마련됐다.→ 해커들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통령후보 선대위원장이던 존 포데스타의 이메일 5만 건 이상을 불법으로 내려받은 뒤 위키리크스를 통해 공개했다.→ 뮬러 특검에 따르면 DCCC와 DNC의 해킹이 알려진 뒤인 2016년 8월 익명의 하원의원 후보가 러시아 정보원들이 만든 가짜 온라인 아이디 ‘Guccifer 2.0’에 연락을 취해 훔친 데이터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러시아인은 그에게 상대 후보와 관련된 훔친 자료를 제공했다.다크 머니→ 2010년 미국 연방 대법원의 ‘시민연합(Citizens United)’ 판결로 무제한 정치자금 기부 통로가 열리면서 미국 정보관리들은 러시아가 미국 국내 파트너의 도움으로 미국 선거에 자금을 살포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애덤 피오르 뉴스위크 기자

2019.08.04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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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뿐인 해외 파병 주둔이냐 철군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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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끝없는 시리아·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끝내고 싶어 하고 군인들도 동의하지만 그들은 그동안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의아해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해외 주둔 미군을 철수시키려 한다. 9·11 테러가 발생한 지 17년이 지난 지금 오래 전의 입법에 따라 7개국에서 미군이 참전 중이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로서 그런 끝없는 전쟁 2건을 끝낼 수 있다고 시사했다.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장성들의 조언을 묵살하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급진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에 승리를 선언하고 시리아 주둔 미군 2000명의 철수를 명령했다. 그는 올해 초 병력 7000명을 국내로 순환 배치하라고 국방부에 지시해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도 대폭 감축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임무 완수”를 선언했듯이 트럼프 대통령은 미군이 승리의 깃발을 들고 귀국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전임자들이 병력을 귀국시켜 호전적인 극단주의자들에게 좌절을 안겨줬다면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 받았을 것이라고 트위터에서 주장했다. 리서치 결과 끝없는 전쟁에 대한 국민적 피로감 확대가 트럼프 당선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미국의 병력과 자금을 쏟아붓는데 승리의 정의는 명확하지 않은, 다시 말해 출구전략이 없는 대외 정책에 유권자의 불만이 커졌다. 2020년 대선 후보이자 평소 트럼프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판해온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대통령의 시리아·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철수 결정을 지지한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전쟁의 책임을 맡은 1%의 미국 국민인 군인들도 반대하지 않는다. 국방부의 전·현직 관료들은 그런 전쟁을 끝내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방침이 틀리지 않았으며 자신을 향한 일부 비판이 불공평하다는 그의 주장도 일리 있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AP통신이 최근 실시한 미국 전국 여론조사에 따르면 현역·퇴역 미군의 56%가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을 지지하는 반면 43%가 반대한다(AP 여론조사는 미군 현역·퇴역 군인 40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트럼프 정부가 미국을 테러로부터 더 안전하게 만들었다는 응답자가 51%, 그렇지 않다는 답변이 35%였다. 그러나 군부 관계자들은 장기적인 국가안보 전략에서 당장의 결과를 원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욕심이 현실을 너무 앞서간다고 말한다. 전쟁은 어떤 상징적인 순간에 끝나지 않으며(아마도 제2차 세계대전은 예외) 승리, 특히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승리는 환상이라는 설명이다. ━ 좋든 싫든 기상나팔은 울린다 그 트윗은 지난 1월 1일 미국 동부 시각으로 자정 1분 뒤 떴다. 미국 국방부의 발표였다. 보잉 중역 출신으로 군 경력이 전무하며 정부에 등용된 지 1년 반 된 패트릭 섀너핸이 국방장관 대행을 맡는다는 내용이었다.언젠가 한 해병대 동료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기상나팔은 울린다고 말한 적이 있다. 쉽게 말해 이럴 줄 알았다는 뜻이다. 트윗은 정부 내 ‘어른’으로 칭송 받은 마지막 장성이자 시리아 철군에 대놓고 반대한 제임스 매티스가 사퇴했음을 분명히 전했다. 2014년 미국이 시리아 내전에 처음 개입한 이후 주둔병력이 불어나 지금은 2000명 선으로 증가했다. IS의 경우 전투원 그리고 현지 주민 사이에 심어놓은 동조자가 2만5000~3만 명으로 추정된다. 국방부의 한 고위 소식통은 매티스가 사퇴하기 3일 전 뉴스위크와 인터뷰에서 시리아 주둔 미군 병력의 철수 결정을 반기는 미군 장성은 없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철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 영향력과 영토를 확대하듯이 IS 부활의 기폭제가 될 수 있다. 현지에서 동맹을 결성하고 시리아민주군(SDF)을 훈련시키며 보낸 시간이 헛수고였다는 느낌이라고 그 관료는 말했다. 결국 쿠르드족이 학살당하도록 미국이 방치할 셈이라면 그동안 무엇을 위해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리며 희생했단 말인가? 개인과 여러 나라가 치른 비용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시리아 철군 계획에 정통한 그 소식통은 “현재 장성들은 철군이 질서정연하고 안전하게 그리고 현재와 미래의 현지 파트너들과 작전·관계의 노출을 최소화하면서 이뤄지도록 준비한다”고 말했다. “트럼프의 결정에 군부 지도자들이 당황했을까? 그렇다. 그러나 대통령이 뭔가를 지시하면 그것을 실천하는 최선의 방법을 내놓는 것이 그들의 임무다. 그들은 정책을 수립하지 않는다.” 대통령은 적절한 채널을 통해 철군 결정을 전달하지 않고 곧바로 트위터에 올렸다고 그 소식통은 전했다. 대통령이 그런 결정을 내리기 전에 보통은 국방장관·합참의장·국가안전보장회의·국무부와 의논하는데 이번에는 그런 절차가 생략돼 장성과 미국 우방들 사이에 많은 불확실성과 럭비공 같은 대통령에 관한 우려가 확산됐다.갑작스러운 철군은 지역 우방들과의 전략적 동맹을 흔들고, 러시아와 이란이 지중해에서 본격적인 군사개입과 확고한 기반을 거리낌없이 재구축하게 하고, 미국이 후원하는 쿠르드족 전사들이 터키의 공습에 보호막 없이 노출되게 한다고 미국 정부 관계자들이 뉴스위크에 말했다. 완전 철군은 이스라엘 그리고 일정 부분 요르단 같은 우방들의 이해를 포함해 지역에서 미국의 이해를 위협하는 세력에 소중한 지정학적 우위를 양보하는 셈이 된다.국방부 고위 소식통은 “그런 식으로 병력을 철수하기로 할 때는 적절한 견제와 균형을 보장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과거·현재·미래의 우방들이 영구히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전략과 우선순위가 변할 수 있지만 모든 결정에 따른 영향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뉴스위크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캐롤라이나)이 불만스러워 하는 대통령을 설득해 시리아 철군 기한을 30일에서 4개월로 연장하도록 했다(이 뉴스는 뉴욕타임스가 먼저 보도했다). 그레이엄 상원의원은 미군 철수 전 대통령이 충족시킬 조건의 개요를 설명했다. 대표적으로 IS의 영구적인 퇴치, 이란 작전의 억지, 쿠르드족 전사 보호 등이다. 국방부 당국자들은 짧은 철군시한과 잠정적인 목표에 거부감을 나타냈다.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은 IS가 퇴치되고 터키가 쿠르드족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내놓을 때까지 미군이 시리아에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아직 유동적이라는 의미다.매티스 장관의 사퇴를 불러 국방부를 당혹시켰던 대통령의 2018년 12월 19일 발표에선 그런 단서조항이 빠져 있었다. 지난 1월 5일 케빈 스위니 국방부 장관 비서실장이 사임했다. ━ 아프가니스탄은 실패한 전쟁 미군의 시리아 주둔 기간은 4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는 17년간 주둔했으며 미국의 최장기 전쟁에서 철수하기는 그만큼 더 복잡하다. 단기적으로 완전 철군은 미국의 약속을 믿을 수 없다는 관점에 힘을 실어주는 한편 아프가니스탄·탈레반·미국 간에 이견 조율 목적으로 진행 중인 정치협상을 와해시킬 것이라고 미국 당국자들은 우려한다.그러나 9·11 테러 이후의 전쟁들은 잇따라 연임한 조지 부시와 버락 오바마 정부를 넘어 지속돼 왔으며 아프가니스탄은 (진전이 있다는 최근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효과 없는 대외정책, 미국인의 목숨, 국민 세금을 소모하면서 질질 끄는 실패한 전쟁이라는 의견이 미국의 현역·퇴역 군인 사회의 반수를 넘는다. 일부 아프간 참전군인은 전쟁이 끝나면 좋겠다지만 동지들이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지 의구심을 표하는 사람이 많다. 무의미한 희생이었던가? 그들의 머리 속을 맴도는 의문이다. 전쟁 초기에 참전했던 사람들은 전우들이 피를 흘린 영토가 탈레반에 다시 넘어가는 광경을 이미 지켜봤다. 13년간 보병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참전했던 미 해병대 하사 출신 루카스 다이어는 “철군이 옳은 결정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동의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나 하는 의문은 남는다. 내가 무엇을 위해 그런 역할을 했고 내 동지들이 왜 죽었는지는 안다. 이 전쟁 또는 어떤 전쟁이든 한 챕터를 마감하기가 쉽지 않다.”전차장(tank commander)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참전해 의병 전역한 미 해병대 병장 출신 매튜 무어스는 군인들보다는 전쟁의 구조가 문제라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그들은 자기 임무를 수행하다가 숨진 프로들이었다. 그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그들은 동지들을 보호하고 지원하려다가 숨졌다. 그것은 고귀한 행위였으며 누가 뭐라 해도 거기에는 변함이 없다. 나를 열 받게 하는 것은 그들이 목숨을 바칠 때 ‘잘 모르겠지만 몇 년간 빈둥거리기’보다는 더 의미 있는 계획이 있겠지 하는 믿음이 있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빈둥거리기(muddle)’는 지난해 12월 아프가니스탄 주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군 사령관 출신의 스탠리 맥크리스털 퇴역 육군 대장이 한 발언을 가리킨다. 그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에게 소수의 미군 병력이 아프가니스탄에 남아 “빈둥거리는” 게 “최선의 방안”이라고 말했다. 미군 현역·퇴역 군인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온라인 뉴스 사이트 태스크&포스가 입수한 유출 녹취록 내용이다. 한편 현지 주둔 미군의 움직임에서 어떤 변화는 눈에 띄지 않는다. 국방부 고위 관료는 “현재 아프가니스탄과 관련해선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며 “철군과 관련해 공화당 지도부로부터 그런 비판이 쏟아질 줄은 정부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 병력의 절반 감축(언젠가 완전 철군을 위한 예고편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을 발표한 이후 그레이엄 상원의원은 군사 전문 기자들이 몇 달 전부터 듣기 시작했던 국방부 논리를 지지했다. 그레이엄 상원의원은 트위터를 통해 ‘(현 시점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을 고려할 때 미군 철수는 고위험 전략’이라며 ‘현 노선을 유지할 경우 우리가 이룩한 성과를 모두 날려버리는 과정에 시동이 걸려 제2의 9·11사태로 말려들게 될 것’이라고 썼다. 국방부가 “반환점을 돌고 있다” “진전을 이루고 있다” 같은 상투적 문구를 대신하는 이른바 ‘끝없는 전쟁’을 합리화하는 새로운 논리를 찾아냈다고 보는 현역·퇴역 미군이 많다.지난해 9월 아프가니스탄 남서부 특수부대(Task Force Southwest) 지휘관 출신인 로저 터너 미 해병대 준장으로부터 그레이엄 상원의원의 논리를 처음 들었다. 터너 준장은 “우리는 9·11 사태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막고 있다”고 말했다. 2017년 터너 준장과 함께 복무했던 해병대원들은 그 발언을 그 바닥 언어로 번역하면 “X 같은 상황을 덜 X 같게 만든다”가 된다고 귀띔했다. 터너는 2014년 이후 해병대의 첫 헬만드주 남부 재배치를 이끌었다.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8월 아프가니스탄 정책을 설명하며 “아프간 치안군이 강해질수록 우리의 필요성은 줄어든다”고 말했다. “아프간인이 자국의 안전과 건설을 담당하고 자신들의 미래를 정의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성공하기를 바란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인의 불만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우리의 안보 이해를 다른 모든 현안에 우선하기보다는 다른 나라들을 우리 자신의 이미지로 재건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에너지·돈 그리고 무엇보다도 목숨을 소비한 외교정책에 대한 국민의 불만에 공감한다.” 트럼프의 선거 공약은 종종 그의 전임자들이 실패한 문제에서의 성공에 초점을 맞췄다. 테러 단체와 기존 외교정책 실수에 신속하게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분명하게 약속하지 않았지만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대 주장을 펼쳐 불개입주의자로 보였다고 워싱턴포스트의 애런 블레이크 기자는 썼다.트럼프 대통령은은 조지 W. 부시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전쟁들은 예산낭비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정부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일으킨 의회 법안을 이용해 예멘·소말리아·리비아·이라크·니제르의 무력분쟁을 확대 또는 재개했지만 그의 말이 틀렸다고 하기는 어렵다.2017년 8월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자인 오바마가 이라크 전쟁을 접으려 했을 때 무엇을 배웠는지 이해하는 듯했다. “성급히 철군하면 공백이 생겨 9·11 사태 전에 그랬던 것처럼 IS와 알카에다를 포함한 테러단체가 곧바로 그 자리를 채우게 된다.” 그러나 다음해 4월 미시건주의 한 집회에서는 태도를 바꿨다. 그는 부풀려진 추정치를 인용하며 “우리는 중동에 무려 7조 달러를 쏟아부었다”고 말했다. “그 대가로 무엇을 얻었나? 아무 것도 없다.”미국이 발을 빼려면 강력한 리더십과 전략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뉴스위크의 제프 스타인 기자는 지난해 9월 기사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철수하면 그 사분오열된 국가가 신정체제 이란, 부상하는 중국, 특히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뿐 아니라 파키스탄과 인도의 음모에 넘어가 그 지역에서 영향력 확대를 위한 200년 역사의 ‘대형 게임’이 또다시 반복된다’고 썼다.국방부의 또 다른 관료는 “매티스의 사퇴는 큰 타격”이라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국방부의 트럼프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트럼프를 옹호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우리는 전문가들이고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지만 문제는 매티스가 없는 상황에서 혼란을 맞았다는 점이다.”섀너핸 국방부장관 대행과 트럼프 대통령은 막대한 숙제와 마주했다. 미국은 30년 동안 큰 전쟁에서 이겨본 적이 없지만 그 뒤로 거의 내내 이곳저곳에서 전쟁에 개입해 왔다. 군인들은 결코 달아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승리를 기다리는 편이 나을까, 아니면 그냥 승리했다며 귀국하는 편이 나을까?- 제임스 라포타 뉴스위크 기자

2019.01.21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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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변심 어떻게 읽을까] 북한식 ‘벼랑 끝 전술’로 주도권 잡기?

국제 경제

기습적이고 전격적인 발표로 효과 극대화…트럼프식 ‘거래의 기술’ 재조명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월 24일(현지시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북·미 정상회담 취소를 발표한 것은 트럼프 특유의 ‘협상의 기술’을 전격 적용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이른바 ‘벼랑 끝 전술’을 펼치려는 상대에게 오히려 동일한 전술을 구사했다. 상대의 힘을 역이용한 엎어치기 기술로 상황을 완전히 반전시켰다. 시간 끌기와 상하좌우 압박으로 협상에서 우위에 점하려는 상대에게 기습적인 충격을 가해 이를 무산시킨 것도 한 기술이다. ━ 2003년 이라크전 작전명 ‘충격과 공포’에 비견 트럼프의 이번 발표는 2003년 3월 21일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를 전격 침공하면서 붙인 작전명인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전광석화 같다. 이 발표는 문재인 대통령이 워싱턴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마친 후 귀국한 날이자 북한이 남측과 외신 기자들 앞에서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의 핵실험장 폭파 장면을 보여준 바로 그날 이뤄졌다는 점에서 발표 효과를 극대화했다.트럼프의 발표는 기습적이고 전격적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5월 22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회담하지 않을 것”이라며 불만을 제기했고 23일엔 “다음 주에 알게 될 것”이라고 분위기를 한 단계 더 띄웠다. 그럼에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6월 12일 싱가포르 정상회담 가능성은 열어뒀다. 그런 상황에서 24일 전격적으로 회담 취소를 발표한 것은 충격적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다.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김정은에게 보낸 편지를 토대로 보면 회담 취소는 최근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과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잇단 담화가 결정적 사유가 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회담이 지금과 같은 시기에는 적절치 않다”면서 “북한이 최근 성명에서 보여준 엄청난 분노와 공개적인 적개심”을 이유로 꼽았다. 트럼프가 말한 분노와 적개심은 존 볼튼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비난한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의 5월 16일 성명과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원색적으로 모욕한 24일 최선희 부상의 대미 성명을 가리킨 것이다.김 부상은 성명에서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거론했던 ‘리비아식 핵폐기안’에 반발하며 “북·미 정상회담을 재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회담 취소와 관련한 언급은 북한의 김 부상이 가장 먼저 한 셈이다. 북한을 자주 접해본 입장에서 이 발언은 회담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흔히 해온 수법으로 인식할 수도 있었다. 압박과 위협, 또는 상태를 떠보기 위해 ‘질러보는’ 발언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북한은 이런 식의 압박과 막판 뒤집기로 상대의 애를 태워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해왔다. 흔한 기법이다.남북 관계에서도 이런 기법으로 남측을 흔들고 영향을 행사할 수 있었다. 2009년 시작된 방어적 차원의 통상적이고 연례적인 한·미 연합 공중훈련인 맥스선더(Max Thunder)에 대한 압박이 한 사례다. 한·미 당국이 이 훈련을 5월 11~25일 진행한 데 대해 북한은 16일 “공중 선제 타격과 제공권 장악을 위해 벌이는 훈련”이라고 비난했다. 그러자 남측에서 ‘송영무 국방장관에게 경고를 줘야 한다’는 발언이 나온 것이 그 한 맥락이다. 북한은 미국을 상대로도 이런 효과를 노렸을 수가 있다. 북한이 북·미 정상회담 자체를 위협하는 이런 발언으로 트럼프가 볼턴 보좌관을 배제하거나 발언을 중지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을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가 회담을 성사하기 위해 그럴 수 있다고 본 셈이다. ━ 북한의 미국 흔들기에 교과서적으로 대응 하지만 미국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교과서적이었다. 이런 사태를 접한 미국은 북한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워싱턴 외교 소식통은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접하고 즉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에게 북한의 진의를 확인해 보라고 지시했고, 폼페이오 장관은 북·미 핫라인을 통해 북한에 연락을 취했지만 북한이 받질 않았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때 처음 분노했다고 한다.트럼프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를 앞둔 지난 5월 20일 문 대통령에게 전화해 20분 간 통화하며 북한 성명의 배경을 물은 이유가 바로 이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트럼프는 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도 북한의 의도와 관련한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했고 이는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미 정상회담 직후 사태는 더욱 악화했다. 24일엔 북한의 최선희 부상이 담화에서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지목해 ‘무지몽매’ ‘아둔한 얼뜨기’ 등 원색적 언어로 대놓고 비난했다. 최 부상은 펜스 부통령의 언론 인터뷰를 문제 삼으며 “정치적으로 아둔한 얼뜨기”라며 “우리는 미국에 대화를 구걸하지 않으며 미국이 우리와 마주앉지 않겠다면 구태여 붙잡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 부상은 “미국이 우리를 회담장에서 만나겠는지 아니면 핵 대 핵의 대결장에서 만나겠는지는 전적으로 미국의 결심과 처신 여하에 달려 있다”고 공개적으로 위협했다. 로이터 통신은 백악관 관계자의 말을 빌어 “펜스 부통령에 대한 북한의 반응이 ‘인내의 한계’였으며, 정상회담을 취소하게끔 했다”라고 보도했다.트럼프는 펜스 부통령에 대한 비난을 듣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라며 쌓였던 감정이 폭발한 것으로 전해진다. 볼턴 비난으로 분노하다 펜스 모욕에 폭발하며 회담 취소라는 결정적인 결심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소식통에 따르면 트럼프는 북한이 배제를 원했던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이 사안을 마지막으로 상의했고 여기서 일단 취소 서한을 보내자고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북한은 남북 사이에서 흔히 해 왔던 원색적이고 모욕적인 비난과 원치 않은 인물 배제에 대한 직간접적인 요구 등 거의 내정간섭적인 요구를 통해 미국을 뒤흔들고 협상에서 무디게 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미국에 통하지 않았다. 돌아온 것은 회담 취소라는 트럼프의 싸늘한 통보였다. 여기에 북한이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양국의 싱가포르 실무 회담장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물론 연락에 응답도 없는 등의 행동으로 신뢰를 깬 것도 트럼프의 결정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연락을 받지 않고 애를 태우는 것은 북한이 남북 관계에서 흔히 써온 수법이다. 북한은 풍계리 현장 취재와 관련한 남측 기자 명단도 접수하지 않고 연락에도 침묵하면서 남측을 애태운 것이 그 한 사례다.북한은 한·미 연합훈련과 탈북 여종업원 문제 등을 거론하며 남북 접촉을 거부한 것은 물론 북·미 회담이 잘 된다고 남북 관계도 따라서 잘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며 압박을 가했다. 그러자 남측에선 북한의 불만이 무엇인지를 찾아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며 달래야 한다는 여론이 줄을 이었다. 북한 정권의 치부를 폭로한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대사관 공사와 한·미 연합 공중훈련에 대한 비난, 그리고 중국에서 탈북한 여종업원들을 북한 요구대로 송환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면서 ‘남남 갈등’이 증폭됐다. 북한은 원하는 것을 얻었는지 결국 마지막 순간에 기자단 방북을 허용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미국에는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 정가에선 트럼프의 북·미 정상회담 취소 결정을 환영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대북 강경파인 톰 코턴 공화당 상원의원은 “북한은 협상에서 일방적인 양보만 요구해온 오랜 역사가 있다”며 “과거 공화, 민주 양당 행정부 모두 이러한 북한의 책략에 넘어갔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의 사기행각을 간파했다”고 말했다.트럼프의 전격 발표는 이날 진행된 북한의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 행사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단박에 덮었다. 미국 CBS방송은 “핵실험장 폐기 여부를 검증할 수 있는 전문가가 현장에 초대되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미국 행정부 관계자는 북한은 전문가를 풍계리 현장에 초청하겠다는 약속을 깨뜨렸음을 문제 삼았다. 전문가의 검증 없는 일방적인 폭파는 정치적인 쇼 이외의 다른 의미가 없어 보인다. 폭발로 갱도 입구만 파괴됐는지 갱도 전체가 무너졌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날 이 지역에서 인공 지진파는 감지되지 않았다. 더구나 다량의 콘크리트를 부어 실험장을 완전 밀봉하지 않으면 이 지역을 다시 실험장으로 쓰거나 남아있는 플루토늄 채취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번 조치의 의미는 축소될 수밖에 없다. ━ 트럼프 발표 8시간 만에 북한 유화적 제스처 사실 이번 핵실험장 폐기 행사는 상징적 의미가 대부분으로 보인다. 북한은 이미 지난해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를 곧이곧대로 믿으면 추가 핵실험을 하지 않아도 핵무기 개량과 기술 고도화가 가능하다는 뜻이 된다. 더구나 북한 핵무기연구소는 이날 “핵시험 중지는 세계적인 핵 군축을 위한 중요한 과정”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핵 폐기나 핵 포기가 아니라 ‘핵보유국으로서 비확산 의무를 이행하는 핵 군축’이 북한의 목표임을 재차 확인시켜 준 셈이다. 핵을 계속 보유하면서 한반도와 전 세계에 걸쳐 핵 군축을 진행하자는 것은 북한의 오랜 요구사항이었으며 남·북 정상회담이나 북·미 정상회담 추진에서도 이를 관철한다는 것이 김정은 위원장의 의지로 볼 수밖에 없다.북한은 트럼프의 정상회담 취소 발표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북한 반응은 도발이 아니라 ‘태도 변화’였다. 트럼프의 최소 발표가 나온 지 불과 8시간 만인 5월 25일 이른 아침에 문제의 김 제1부상이 ‘위임에 따라’라는 말을 앞세워 조근조근한 내용의 담화를 발표한 것이 그 증거다. 시간 끌기, 상대방 애태우기 등 기존의 기법은 온 데 간 데 없이 즉각적으로 반응한 셈이다. 그만큼 북한의 마음이 급하다는 이야기다. ‘위임에 따라’라는 문구가 들어간 것은 이 담화에 김정은 위원장의 의사가 담겨있음을 보여준다. 트럼프의 회담 취소 발표에 김정은 위원장이 급히 반응한 셈이다.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김 제1부상은 이날 담화에서 “조선반도(한반도)와 인류의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하려는 우리의 목표와 의지에는 변함이 없으며 우리는 항상 대범하고 열린 마음으로 미국 측에 시간과 기회를 줄 용의가 있다”라고 했다. 원색적인 욕설과 비난, 저주, 그리고 압박과 위협으로 가득했던 기존의 담화와 천양지차다. 김 제1부상은 “만나서 첫술에 배가 부를 리는 없겠지만 한 가지씩이라도 단계별로 해결해 나간다면 지금보다 관계가 좋아지면 좋아졌지 더 나빠지기야 하겠는가 하는 것쯤은 미국도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아무 때나 어떤 방식으로든 마주앉아 문제를 풀어나갈 용의가 있음을 미국 측에 다시금 밝힌다”라고 했다. 제발 회담의 불씨를 살려달라는 뜻이다. 최 부상이 담화에서 “우리는 미국에 대화를 구걸하지 않으며 미국이 우리와 마주앉지 않겠다면 구태여 붙잡지도 않을 것”이라고 날을 세우던 때와는 천양지차다.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담화로만 보면 영낙없는 순한 양의 모습이다. 트럼프의 충격과 공포 작전이 북한에 얼마나 큰 충격을 줬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트럼프의 사업 스타일을 총망라한 저서 을 살펴보면 트럼프가 이번에 구사한 기술을 짐작할 수 있다. 특유의 승부사 기질로 사업을 크게 키운 것으로 평가받는 트럼프는 이 책에서 자신이 구사해 성공에 이른 각종 거래의 기술을 소상하게 밝혔다. 트럼프는 이 책을 성경 다음으로 좋아한다고 말했다. 2016년~2017년 미국 대통령 선거 캠페인 기간 중 트럼프의 득표 전략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 책을 보면 거래나 협상, 담판에서 상대방의 허점을 노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든 다음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해서 원하는 바를 얻는 것이 트럼프의 대표적인 기법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트럼프가 자가용 비행기를 헐값에 산 과정이다. 그야말로 상대의 약점을 이용한 충격과 공포의 기법을 사용했다. 트럼프는 1987년 미국 경제잡지 의 기사를 읽다가 경영난에 처한 다이아몬드 샴로크라는 기업의 고위 간부들이 회사 소유의 호화판 보잉 727기를 마음대로 타고 다녔다는 내용을 발견했다. 확인 결과 200명이 탈 수 있는 여객기를 15명이 탈 수 있도록 개조한 것으로 침실과 목욕탕, 집무공간을 갖추고 있었다. 일반 사람이 봤으면 혀를 차면서 이 회사 고위 간부들의 도덕적 해이라고 비난하고 말 내용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이 기사를 보면서 머리에 스파크가 번쩍하고 터졌다.당시 신형 727기 구입에는 3000만 달러가 들었다. 크기가 727의 4분의 1 정도인 AG-4도 1800만 달러나 한다. 큰 건의 사업을 하나 벌이기에 충분한 고가다. 당시 다이아몬드 샴로크는 이 비행기를 팔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런데도 이를 구입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가격도 비싸고 이미지도 나빴기 때문이다. 기다려도 사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거래에 들어간 트럼프는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인 500만 달러를 불렀다. 허를 찔린 상대는 1000만 달러로 맞섰지만 이미 약점을 보인 다음이었다. 서로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800만 달러에 합의가 이뤄졌다. 트럼프가 처음부터 이긴 거래였다. ━ 상대 허점 파고들어 거절할 수 없는 제안해 다이아몬드 샴로크의 입장에서는 자사 고위 간부들의 비도덕성을 보여주는 골치 아픈 자가용 비행기를 빨리 팔아 치우고 현찰도 확보했으니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제 값을 다 받고 팔기는 쉽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이 거래는 가격이 약간 문제였을 뿐 다이아몬드 샴로크로서는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을 것이다. 이 값에 자가용 비행기를 얻은 트럼프는 입가에 미소를 지울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래다. 트럼프식 거래의 기술이다. 트럼프가 북한을 상대로 이런 거래의 기술을 써먹으려면 북한에 대한 정보가 필수적이다. 북한 체제나 김정은 위원장의 허점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트럼프가 정보기관인 중앙정보국(CIA)의 수장이던 마크 폼페오에게 대북 접촉을 맡긴 것도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폼페이오는 첫 방북 당시 현직 CIA국장이자 국무장관 지명자였다. 북·미 정상회담 추진도 그 취소 마무리도 그가 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2018.05.26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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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 재가동 될까] 남북 해빙 무드에도 산 넘어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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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합의해도 유엔 대북 제재 등 남아…손실 커진 입주 기업들 일단 지켜보기로 2016년 2월 10일, 군사작전처럼 아무런 예고 없이 개성공단 폐쇄 결정이 떨어졌다. 정부의 방침이었고, 신속히 진행됐다. 북한이 한 달 전 진행한 4차 핵실험이 기폭제가 됐다. 박근혜 정부는 “북한이 개성공단 임금을 핵과 미사일 개발에 전용한다”고 폐쇄 이유를 밝혔다. 개성공단 입주 기업 124곳은 하루 아침에 공장을 잃었다. 개성공단 입주 기업 대표들은 당시를 눈앞이 캄캄했다고 회상한다. 신한용 개성공단기업비상대책위원장(이하 비대위)은 당시 상황에 대해 “물건을 많이 가져와야 피해를 줄일 수 있는데 예고도 없이 정부가 1사 1인 1차량으로 제한했다”고 전했다. 정부의 일방적인 통보에 입주 기업들은 공장을 수습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쫓기듯 개성공단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기업들은 이후 2년 간 공단 근처도 못가고 있다. 공장의 설비나 시설 점검을 위해 정부에 4차례 방북을 요청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남북관계가 전쟁 위기설까지 도는 등 악화일로를 걸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그러나 매섭게 한반도를 몰아치던 한파가 물러가고 봄이 오고 있다. 4월 말로 예정된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5월에는 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이다. 김정은 북한 노동위원장의 제의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격 수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세계는 깜짝 놀랐다. 외신들은 ‘대사건’ ‘중대 변화’라는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정상회담을 앞둔 사전 접촉과 회담 결과에 따라 비핵화에 이어 65년 간 이어져온 한반도 휴전 상태를 종식시키는 북미 평화협정 체결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정세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결이 다른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드는 것이다. 이에 따라 남북 경제협력의 상징과도 같던 개성공단 재개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비대위는 논평을 통해 “이산가족 상봉·군사회담 등이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만 경협 분야에서는 개성공단 문제가 먼저 거론되리라고 기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개성공단 재개까지는 갈 길이 멀다는 분석이 나온다. ━ 박근혜 전 대통령의 초법적 지시에 가동 멈춰 개성공단은 현대아산과 북한이 2000년 8월 개성과 강원도 통천·신의주 등 3곳에 공단을 건설하자는 ‘공업지구개발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하면서 사업이 시작됐다. 2003년 6월 330만㎡ 규모의 1단계 공단이 착공했고, 이듬해 4개 업종 15개 기업이 시범단지에 입주했다. 같은 해 말 개성공단 첫 제품으로 ‘통일냄비’가 생산되기도 했다. 이후 2005년과 2007년 각각 24개, 183개 기업이 입주 신청을 했고, 2012년 공단 내 북한 근로자가 5만 명을 돌파하는 등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2016년 2월 개성공단은 가동을 멈췄다. 군사작전을 하듯 전격 진행된 개성공단 폐쇄에 대해 당시 박근혜 정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통해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지난해 말 통일부 정책혁신위의 조사 결과는 달랐다. 혁신위는 “개성공단 가동 중단 조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두 지시’에 따른 것”이라며 “초법적 통치행위”라고 규정했다. 공식 의사결정 체계의 토론과 협의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의 일방적인 구두 지시로 개성공단의 전면 중단이 결정된 것이라는 얘기다.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입주 기업들은 휘청거렸다. 애초 정부의 투자 권고와 사업 보장을 믿고 입주한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개성공단기업협회에 따르면 개성공단 입주 기업 124곳 가운데 현재 휴업 중인 곳은 10여곳에 이른다. 국외에 대체 생산시설을 마련한 곳이 30여곳이고, 국내에서 기존 공장을 증설하거나 대체 생산시설을 확보한 업체는 80여곳이다. 국내외에서 공장을 돌린 기업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협회에 재무제표를 제출한 108곳의 2016년 매출은 2015년 대비 평균 26.8% 감소했다. 매출이 50% 이상 떨어진 기업(사실상 휴업·사업축소)도 23%인 25곳이었다. 2015년에 비해 영업이익에서 영업손실로 전환된 기업은 40곳, 영업이익이 감소한 기업은 26곳, 영업손실이 증가한 기업은 14곳이었다. 생존이 불가한 폐업 직전의 입주 기업은 지금까지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폐업을 하면 당장 대출금을 반환해야 하고, 추가 보상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대출이자만 쌓아가면서 세월만 보내고 있는 것이다. 입주 기업 한 곳은 공단 폐쇄 직후 법원에 법정관리 신청을 했지만 개성에 자산(공장)이 있다는 이유로 기각되기도 했다. ━ '이르면 올해 안에 재가동’ 기대감 솔솔 그럼에도 입주 기업들은 2년 간 공장의 설비나 시설 점검조차 못했다. 입주 기업들은 평창 동계올림픽 폐막 다음 날인 2월 26일 다섯 번째로 정부에 방북신청서를 제출했다. 어느 때보다 기대감이 컸다. 남북 단일팀이 출전한 평창올림픽이 무사히 끝나면서 꽁꽁 얼어붙었던 남북관계가 해빙 무드로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부는 3월 15일 방북 신청을 유보했다. 기업인들이 방북하려면 북측의 초청장이 필요한 데 이와 관련 북측의 반응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통일부는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 큰 틀에서 국면이 전환되고 어떤 요건이 정리되면 다른 길이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입주 기업들도 4월 남북 정상회담까지 다시 방북신청을 하지 않고 기다린다는 입장이다. 비대위는 3월 15일 보도자료를 내고 “4월 정상회담에서 개성공단을 비롯한 남북경협 사업이 의제로 다뤄지길 희망한다”고 밝혔다.개성공단은 언제쯤 재가동에 들어갈 수 있을까. 재계에서는 남북, 북미 회담 결과에 따라서는 올해 안에도 가능하지 않겠냐는 기대감이 확산하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 의제에 민간교류 확대에 대한 부분도 포함될 텐데 당연히 개성공단 가동이나 금강산 관광 재개 논의가 이뤄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남북이 함께 참가한 동계올림픽도 잘 끝났고, 올해 초 1년 11개월 만에 판문점 연락채널이 재개된 만큼 정상회담 이후 (개성공단 가동 논의가) 급물살을 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최근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실제 재가동까지는 난관이 적지 않다는 의견도 나온다. 유엔의 북핵 제재와 연계된 상황으로 남북이 합의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2년 간 가동을 중단한 만큼 기계설비나 시설 등을 보수해야 하는 현실적 문제도 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미국이 주도하는 대북 제재 공조시스템이 작동하는 상황에서는 현실적으로 우리가 독자적으로 개성공단을 재개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며 “연이은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대화가 열리고 낮은 단계에서라도 의미 있는 합의가 나와야 경제협력을 재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2018.03.24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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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GEOPOLITICS - 중동을 누가 이 지경으로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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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에 휘말린 아랍국가들의 붕괴를 막으려면 미국이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중동 혁명 ‘아랍의 봄(Arab Spring)’이 이제 3년째로 접어들었다. 처음엔 ‘봄’이 의미하듯 희망이 가득했지만 지금 이곳의 화두는 ‘중동을 누가 잃어버렸나?’다. 아랍 정부들이 약화되고 국가가 해체되면서 옛 국경이 사라지고 극단주의자들이 득세하며 여러 분파로 갈려 서로 싸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드는 의문이 있다. 미국의 초연한 듯한 태도가 오래 갈 수 있을까?오바마 대통령의 비판자들은 여론이 어떠하든 미국의 이익에 여전히 중요한 이 지역을 미국 정부가 방치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이라크 정부와 협약도 체결하지 않고 이라크전을 끝냈을 뿐 아니라(체결했다면 일부 미군이 잔류할 것이다) 시리아 내전과도 거리를 두기 때문이다. 일부 중동인들은 미국이 중동에 더는 관심이 없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힘이 없다고 생각한다.좀 더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미국이 약간만 투자하면 이 지역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수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독재자가 강압통치를 통해 하나로 뭉쳐지지 않고 나라가 여러 분파로 분열된 상황에서는 최선의 방책이 분권화일지 모른다. 부족들이 서로 치열하게 싸우는 지역들을 느슨한 연방 체제로 묶는다는 뜻이다.자말 빈오마르 유엔 예멘 특사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중앙집권화된 국가가 실패했다. 이제는 권력이 지방으로 위임되는 새로운 체제가 필요하다. 지방 정부가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형태를 말한다.” 그러나 과연 미국 정부가 중동 국가들의 지방분권화 유도에 관심이 있을까? 아니, 다른 어떤 형태로라도 이끌 생각이 있을까?조지 W 부시 정부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일했던 마이클 도란 브루킹스 연구소 연구원은 이렇게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중동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는 어떤 프로그램에도 전력투구하기를 극히 꺼린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이런 냉담한 태도가 중동의 권력 공백을 만들어냈다. 시리아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상황이다. 이란과 알카에다가 시리아에 대한 영향권을 두고 서로 경쟁하는데도 두 집단 모두 세가 더 강해지고 있다.”미군의 철수로 공백이 생기면서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 식민주의 국가들이 그은 옛 국경을 가진 나라들의 존립이 위협받고 있다. 사이크스-피코 협약(1916년 5월 영국 대표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 대표 조르주 피코의 아랍 민족 지역의 분할을 위한 비밀협정)에 따른 국경선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다.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스라엘 하이파대의 이라크문제 연구소장 아마트지아 바람은 “중동의 현대 국가들은 100% 제국주의자들의 작품이 아니다”고 말했다. 현재의 국경선은 중동에서 이슬람의 부상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독립체에 근거하고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바람은 종파를 불문하고 그들이 수세기 동안 “독특한 관료제, 제도, 문화, 언어”로 통일된 국가에서 살아왔다는 점을 들며, 예를 들어 이라크의 수니파와 시아파는 “자신이 먼저 이라크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고 주장했다.그러나 바람도 시리아가 붕괴했고 레바논은 큰 위협에 직면했으며, 예멘, 바레인, 이라크 등 통일된 국가 단위의 미래가 위협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 나라들을 원상 복구시키려면 미국의 리더십을 포함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이라크의 경우 미국이 8년의 전쟁 끝에 알카에다를 격파했고 잠시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미국이 주도하는 평화)’를 누렸지만 이제 그곳에서 다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알카에다 연계단체인 ISIS는 서부 이라크의 수니파 근거지인 라마디와 팔루자를 장악했다. 그 단체의 공식 명칭인 ‘이라크·시리아 이슬람 국가’가 그들의 목표를 시사한다. 성전(지하드)의 깃발 아래 기존 아랍국들을 통합하는 것이다.한편 1월 초 쿠르드 지역과 터키의 지중해 항구 세이한 사이에 건설된 파이프라인으로 석유가 흐르기 시작했다. 궁극적으로 그 송유관을 통해 매일 원유 약 200만 배럴이 유럽 시장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다. 놀랍게도 그 협상에서 이라크 중앙정부는 배제됐다. 갈수록 자치권이 강해지는 북부 이라크의 쿠르드 지역 대표단과 터키 정부만 참여했다. 누리 알-말리키 이라크 총리 정부는 당연히 분노했다.미국 관리들은 현재 이라크에서 다시 벌어지는 전쟁이 미국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이 말리키 정부와 군사협정을 체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라크가 무장세력을 몰아내는 데 도움을 주는 일부 미군 병력이 잔류할 수 없다.미 국무부의 메리 하프 대변인은 “이라크 주둔 미군이 16만 명이었을 때도 분파간의 긴장을 완화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많은 미군 병력이 이라크에 있었는데도 시리아와 맞댄 국경은 아주 허술했다. 일부 미군이 잔류해서 약간의 성공을 거둔다고 해도 언제까지 그럴 것인가? 10년? 20년? 30년? 언제 끝날 것인가? 그건 장기적 해법이 아니다.”시리아 내전과 관련해서도 오바마 행정부는 비슷한 논리로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을 반대한다. 특히 ‘지상군 투입’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시리아는 현재 최소한 3개 분파로 나눠졌다. 해변 지역은 아사드 대통령의 알라위파, 북부와 동부는 여러 수니파 단체들(그중 다수는 서로 싸운다), 일부 지역은 쿠르드족이 장악하고 있다.시리아 내전은 국경을 맞댄 이라크만이 아니라 레바논까지 번졌다. 레바논은 오랫동안 수니파, 시아파, 드루즈파(이슬람 시아파의 분파), 마론파(동방정교회의 분파) 사이의 불안한 공존이 계속됐다. 지금 레바논은 차량폭탄테러, 암살, 인구 중심지의 혼돈 등 내전 상황으로 급속히 회귀하고 있다. 스위스에서 1월 22일 평화협상 회담이 열렸지만 시리아 내전이 조만간 끝나리라고 예측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1월 초 유엔은 시리아 내전의 사상자 추정 집계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마지막 집계는 사망자 약 10만 명이었다. 브루킹스 연구소의 마이클 도란은 “미국이 시리아에서 제3의 세력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란과 알카에다 둘 다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을 말한다. 그런 세력은 지상에서 미국의 소중한 우군이 될 수 있다. 그럴 경우 미국은 모든 시리아 문제 논의에서 지배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다.”시리아가 미국의 우군이 되려면 궁극적으로 2013년 12월 예멘에서 체결된 것과 비슷한 헌법 협약을 용인해야 한다.예멘 정부는 남부인들을 오랫동안 무시했다. 알리 압둘라 살레 예멘 대통령이 강압에 의해 사퇴한 뒤 부족들은 서로 싸웠다. 중동 각지의 수니파 성전주의자들이 그곳에 몰려가 알카에다 거점을 만들었다.그러자 레바논의 이슬람 시아파 무장세력 헤즈볼라도 예멘의 시아파를 보호하려고 뛰어들었다.자말 빈오마르 유엔 특사는 “원심력으로 중앙집권 국가가 해체될 위기였다”고 말했다. “특히 남부의 분리 운동 때문이었다.” 그는 예멘인들이 새로운 연방 국가를 만드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결론을 내리도록 협상을 주선했다.그의 끈질긴 설득 덕분에 예멘의 모든 정치 지도자들은 그런 취지의 협약에 서명했다. 그 협약은 연방제를 목표로 한다. 자치 정부가 지역 내부의 사안 대부분을 책임지는 형태다. 사나는 여전히 수도로 남아 있지만 국가적인 외교 정책 등 일부의 책임만 떠맡는 약화된 정부의 기능을 갖게 된다.새 연방이 몇 개 주로 구성될지 같은 세부 사항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외부인과 방해꾼들이 여전히 그 계획을 망칠 수 있다. 그러나 강압에 의해서만이 유지될 수 있었던 옛 아랍 독재 국가에서 연방국가로 거듭나는 첫 공식 협약은 이제 공식화됐다.하이파대의 이라크문제 연구소장 아마트지아 바람은 그와 유사한 협정이 이라크 문제의 대부분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라크의 수니파도 쿠르드족과 같은 수준의 자치권을 원한다고 그는 설명했다. 수니파도 이라크 중앙정부의 도움으로 2008년에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혐오하는 외국인 성전주의자들을 몰아낼 수 있다.그러나 “세부 조건에서 문제가 잘못될 수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s)”고 바람은 경고했다. 미국은 이라크에서 철수하기 전까지 부족 지도자들을 잘 다뤘다. 옛 이라크 질서를 바탕으로 공평한 연방제를 수립하려면 그와 같은 미국의 개입이 필수적이다.시리아도 그런 협약으로 혜택을 얻을 수 있다고 바람은 말했다. 수니파는 석유와 물 등 필수 자원이 많은 곳을 장악하고 있다. 그러나 바다 접근권은 아사드의 알라위파가 쥐고 있다. 따라서 다마스쿠스에 연방 정부를 두고 다수의 자치구를 만드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일지 모른다.오바마 행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런 목적을 달성하려면 미국이 중동에서 리더십을 재확립해야 한다고 말한다. 도란은 “오바마 행정부는 전통적인 미국의 리더십 역할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연합전선을 구축한다고 해서 반드시 미군이 투입돼야 한다는 게 아니라 주도권은 잡아야 한다는 뜻이다.”미국의 개입이 없으면 반미 성전주의자들이 득세할 가능성이 크다. 도란은 성전주의자들이 득세하면 미군이 어쩔 수 없이 중동에 재개입할 수밖에 없다고 우려한다. “따라서 다른 누군가에게 떠밀려 빠져들기보다는 미국의 독자적인 생각으로 중동의 질서를 하루빨리 재편하는 게 바람직하다.”

2014.02.11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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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동지로 물고 물리는 삼각관계

산업 일반

중·일 보수 우경화 세력 발호 … 미국은 등거리 외교로 견제 동북아시아 정세가 불안하다. 미국·중국·일본의 첨단병기가 속속 동중국해로 집결하고 있는 걸 보면 이러다 진짜 전쟁이라도 벌어지지 않을까 두렵다. 차분히 이 상황을 조망할 필요가 있다. 동북아를 감도는 물살은 거센 듯 보이지만 수면 아래를 흐르는 조류는 사뭇 다르다. 세 나라가 서로 적당한 선에서 이해를 공유하고 있다. 최근 중국의 방공식별구역을 둘러싸고 벌어진 양상을 세 가지 관점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우선 내치(內治)의 관점에서다. 사실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는 요즘 유례없이 강한 공조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분쟁에 이은 방공식별구역 갈등이 두 나라 안에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보면 쉽게 이해된다.군사·외교 갈등으로 국내 현안 무마아베의 군국주의 야욕의 화룡점정은 중국 몫이다. 말 많고 탈 많은 시진핑의 방공식별구역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확대와 헌법개정, 역내 군사력 확대에 일조할 뿐이다. 최근 일본 내 비난여론이 높았던 비밀보호법이 순식간에 의회를 통과하고 일본판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빛의 속도로 창설된 것도 좋은 예다.이번에는 순번을 바꿔 아베의 차례다. 아베가 시진핑의 방공식별구역에 맞서 강수를 둘수록 시진핑이 만들어놓은 국가안전위원회는 조기에 체계를 갖추고 안착할 수 있다. 아베가 세차게 중국을 비난하고 미국이 이를 거드는 것처럼 보일수록 중국 내 군경(軍警)조직은 국가안전위원회를 거쳐 시진핑에게 길들여진다.일본과 중국이 당면한 내부 과제는 향후 적잖은 진통을 예고한다. 중국은 투자와 수출 주도 경제에서 내수경제로 체질 전환을 이뤄내야 한다. 경제 체질을 바꾼다는 것은 구조조정에 다름아니다. 그 과정에서 경제 주체들의 고통은 커질 수밖에 없다. 들썩이는 집값과 꿈틀대는 물가, 벌어지는 소득격차, 자치구 내 민족갈등 등 당의 지배력을 위협하는 불안 요소는 적지 않다. 일본은 아베노믹스의 성공에 들떠 있지만 서민들의 삶은 피곤해지고 있다.17개월째 뒷걸음치는 근로자 임금(기본급 기준), 그런데도 꾸준히 오르는 물가는 서민들의 실질구매력을 갉아먹는다. 주식에 투자할 여력이 없는 가계에 최근의 일본 증시 활황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일 뿐이다. 내년 4월 소비세 인상이 예정된 상황에서 상당 폭의 기본급 인상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내부 불만은 더 커져갈 것이다. 양국 모두 이를 돌파하기 위해선 내부통제를 강화해야 하고, 여론 분열을 막아줄 외부의 적도 필요한 법이다.일본과 중국이 걷는 길은 서로 다르지 않다. 걸음걸이도 닮았다. 일본이 일방적으로 댜오위다오 국유화를 선언했듯, 중국도 일방적으로 하늘에 선을 그었을 뿐이다. 물론 가는 길이 같다 해서, 쓰는 수법이 동일하다 해서, 서로를 아끼고 위하는 것은 아니다. 할퀴기 바쁘다. 그 과정에서 고조되는 서로를 향한 국민적 분노는 아베와 시진핑이 애초 하고 싶었던 일을 밀어붙이는 동력으로 치환될 뿐이다. 이 상황은 동북아 내 보수 우경화하는 집권세력이 국내 정치에서 필승을 하는 게임이다.다음으로 중국의 시간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국이 주요한 정책을 내놓고 이를 진행할 때는 단기간 내 승부를 보겠다는 생각은 없다. 경제정책이나 사회개혁의 경우 숱한 실험에 실험을 거쳐 점진적으로 이뤄진다. 10억이 넘는 거대 인구를 상대로 시행하는 정책인 만큼 서두르는 법이 없다. 일단 방향이 서면 조금씩 부작용을 제거해나가며 진행한다. 외부에서 보기엔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는 중국이지만 시간이 지나서 보면 어느덧 변해있는 게 중국이다.외교·안보 부문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더 조심해왔다. 최근 20년 간 국제사회에서 대만의 존재감이 얼마나 약해졌는가를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중국은 단기간 내 대만을 접수하려 들지 않았다. 오랜 세월에 걸쳐 꾸준히 대만의 힘을 뺐을 뿐이다.그 세월 대만과 외교를 단절하고 중국에 접속하려는 나라는 하나 둘 늘어 이제 대만과 국교를 맺은 나라는 19개국에 불과하다. 대만 경제 역시 사실상 중국 시장에 예속됐다. 이번 방공식별구역 선포도 마찬가지다. 일단 하늘에 선을 그어놓은 것에서 출발할 뿐이다. 여차하면 잠시 물러섰다가 때 되면 다시 부각시키기를 긴 세월 반복할 것이다.세번째로 미국의 입장을 살펴보자. 동중국해 분쟁이 미·중 간 전면전으로 확산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데,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현재로선 확률이 지극히 낮다. 장기 역사적 관점에서 미국의 힘은 약해지고 있고, 중국의 힘은 부상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주식에 비유하면 미국이라는 주가는 지속적으로 우하향 추세에 있고, 중국이라는 주가는 우상향 추세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 주가의 그래프가 중국 주가의 그래프 위에 있다.경제력이나 군사력 등 모든 객관적 전력에서 여전히 미국은 중국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중국이 정면으로 미국에 부딪힐 일은 없다. 어떤 식으로든 회피하려 들 것이다. 오히려 위기의 순간은 미국과 중국의 주가 그래프가 만나려는 순간일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도 중국과는 경제·외교 측면에서 지속적인 협력이 필요하다. 아시아 중시 전략(Pivot to Asia)을 선언하며 일본과 손잡고 중국 봉쇄에 나서고 있다.그러나 중국의 협조 없이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진을 헤쳐나갈 수가 없다. 미·중 간 투자협정조약, 더 나아가서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라인의 동북아 대륙으로의 연장에도 미국과 중국의 협력이 필요하다. 단기적으로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양적완화 축소 과정에서의 국채시장 안정 문제(중국은 미국의 최대 채권자다)도 마찬가지다.물론 미국이 보기에 중국의 방공식별 구역은 기존의 동북아 질서를 위협하는 것이다. 좁혀보면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중·일 간 갈등의 연장선으로 보이지만 미국이 여기서 발을 빼면 미·일 관계는 급속히 나빠진다. 일본은 물론이고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역시 안보 동반자로서 미국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된다.그렇기 때문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B52 폭격기를 날려보냈고 ‘일본의 뒤에는 미국이 있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언행은 일본과 중국을 향한 것이자, 동시에 동아시아 안보동맹국 모두에게 안심하라고 하는 이야기다.미국은 중국 어르고 일본 달래고그러면서도 중국의 입장을 배려해 B52 폭격기의 비행은 이미 오래 전 예정된 훈련이라며 한발 물러섰다. 미국 민항기들에게는 중국의 방공식별구역에 진입할 경우 중국 측에 사전 통지할 것을 권장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오바마의 안보정책을 총괄하는 수잔 라이스의 11월 20일(현지시간) 연설이다. 이날 연설에서 수잔 라이스는 중국과 신형 대국 관계 구축을 추진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여름 시진핑이 오마바를 만나 요구한 신형 대국 관계를 오바마의 안보총책이 재차 확인한 셈이다.최근 일본을 방문한 조 바이든 부통령 역시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선포를 비난했지만, 방점은 오히려 두 나라가 만나서 대화로 잘 풀어보라는데 맞춰졌다. 오바마 입장에선 ‘아베의 뒤를 내가 든든히 받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하지만, 아베가 폭주하는 것도 막아야 한다. 아베와 시진핑이 댜오위다오를 놓고 실제 무력충돌을 벌이는 경우 오바마의 머리 속은 겉잡을 수 없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국제경제 분석 전문 매체 Global Monitor 특약

2013.12.10 17:05

5분 소요
강화, 미완의 동북아 트라이앵글

산업 일반

강화도 일대 군사분계선·비무장지대(DMZ)·민통선. 아무 움직임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아직은 미약한 기대지만 대한민국의 뉴프런티어로 부상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DMZ는 살아 있었네’ 2탄이다. 1. 강화의 논: 강화도와 인근 교동도에서는 양질의 미곡이 풍부하게 생산된다. 특히 민통선 안쪽에서는 기계화를 통해 소수의 농민들이 많은 양의 쌀을 생산한다.ⓒ이상엽 강화도 북쪽 해안가는 철책선이 길게 이어진 최전방이자 군인들도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남방한계선이다. 우리 취재진 일행은 서북단 끝의 해안 경계를 맡은 해병대의 한 초소를 찾았다. 거기서 만난, 이제 갓 스무 살이 넘었을까 싶은 초병의 얼굴에는 청년의 패기와 더불어 소년의 어린 티가 그대로 남아 있다.하지만 그 어려 보이는 얼굴의 두 볼에도 오랜 시간 서해의 바닷바람에 시달린 상흔은 역력했다. 내가 가르치는 대학원생 제자들보다도 한참이나 어릴 그의 하루하루와, 그가 온몸으로 감당해야 할 북녘의 화포와, 그가 지켜야 할 등 뒤의 힘없는 백성들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보지 않고는 느낄 수 없는 풍경과 삶들이 강화도 북쪽 해안 철책선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다.초병이 서 있는 지점은 왼쪽으로 약간 멀리 희미하게 교동도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조금 더 멀리 희미하게 북녘 땅이 펼쳐진 지점이다. 초소 앞 바다에는 안개가 끼어 있다. 앞을 바라볼 수 없는 지독한 안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확하게 앞을 볼 수도 없을 정도의 희미한 안개가 초병의 시계를 희롱하고 있었다.서해를 바로 앞에 두고 한가롭게 벼가 자라는 강화도의 평범한 들판을 바로 뒤에 둔 채, 초소의 해병대 초병은 그렇게 거기에 서 있었다. 한 시간만 서 있으면 평범한 사람도 철학자가 될 듯한 지점에서 말없이 경계근무를 서는 초병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경계 근무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온 병사들이 생활하는 병영생활관은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국방부는 금년도 추가경정예산 4000억원의 상당부분을 병영생활관 개선사업에 사용하기로 했다. 물 위에 세워진, 보이지 않는 장벽 앞에서여러 명이 한 침상에서 생활하는 구식 생활관을 병사들이 각자의 개인침대에서 생활하는 신형 생활관으로 바꾸는 개선작업이다. 주로 침대에서 자라 온 신세대 병사들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 군인과 배려, 과거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던 조합이라는 생각이 든다. 병사들의 사물함에는 그리운 사람들의 사진과 함께 몇 권의 책이 꽂혀 있다.가까이 가서 책 제목들을 보니 ‘해커스토리’ 같은 일반서적도 간간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한자능력검정시험, 컴퓨터활용능력 1급 기본서 등 자격시험 대비용 서적들이다. 그리고 몇몇 병사의 사물함에는 아내의 화장대에서 본 듯한 핸드크림과 선블록(자외선 차단제)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병사와 시험 대비용 서적, 그리고 선블록의 오묘한 조화가 인상적이다.우리 취재진은 김포반도와 강화도를 시작으로 비무장지대와 민통선 지역에 대한 탐방을 시작했다. 시작부터가 나에게는 조그만 충격이었다. 이른 아침에 방문한 김포반도의 한강하구에서 나는 처음으로 서울의 마포나루를 떠난 배가 한강을 이용해 서해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파주 오두산 전망대 부근에서 남쪽에서 올라온 한강과 북쪽에서 내려온 임진강이 만난다. 여기서부터의 한강을 할아버지 조(祖)자를 써서 조강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그 합수지역 이후부터 서해까지가 한강하구 중립지역이다. 일종의 물 위의 비무장지대인 셈이다. 강폭은 1.3∼1.8㎞ 정도 되는데, 남한과 북한은 각각의 하안으로부터 100m 지역까지만 관할한다. 그리고 가운데 지역은 물고기와 철새 이외에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하는 지역이다.학생시절에 지리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은 아니다. 내가 대학입시를 위해 치렀던 학력고사에서도 가장 많은 문제를 틀린 과목이 지리였기는 하다. 그래도 한강의 마지막 부분을 수로로 통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내가 무식한 탓일까 아니면 무관심한 탓일까? 어쩌면 분단과 비무장지대 그리고 민통선은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그렇게 멀어져 있었나 보다.한강하구의 전류리 포구에서 들려주는 황복 이야기는 또 한 번 이른 아침 방문자의 가슴을 적셔 온다. 황복은 바다에서 자라다가 강으로 올라오는 물고기인데 그 맛이 좋다 하여 복 중에서도 으뜸 중의 하나로 친단다. 서해에서 자란 황복이 조강하구, 즉 한강하구를 따라 올라오다가 어떤 녀석은 북쪽 임진강으로 올라가고 어떤 녀석은 남쪽 한강으로 내려온다. 2. 민통선 검문소: 젊은 해병대 대원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다. 이 지역은 해병대 관할 지역으로, 소수의 해병대 병사들이 길게 이어진 해안선 일대와 섬과 섬으로 이어진 광대한 주변 지역 경계를 책임지고 있다.ⓒ이상엽 어떤 기준으로 황복이 갈 곳을 정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조강하구에서는 사람이 가진 선택의 자유가 황복이 가진 선택의 자유보다 작다는 사실만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한강하구에서의 부끄러움과 황복에 대한 부러움을 뒤로한 채 나는 다시 내 본연의 임무로 되돌아온다. 휴전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각각 2㎞ 이내 지역이 비무장지대며, 중앙의 휴전선으로부터 남쪽 2㎞ 지점에는 남방한계선이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남방한계선 뒤쪽으로 5∼20㎞ 떨어진 지역이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는 민통선 지역이다.민통선 둘러싼 관(官)과 군(軍)의 힘겨루기이번 취재에서 나에게 주어진 기본 임무는 이들 비무장지대, 민통선지역의 경제를 돌아보고 이 지역 경제의 현재와 미래, 가능성과 한계, 그리고 이 지역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삶과 좌절과 희망을 알아보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비무장지대와 인근 지역은 자연생태계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은 지난 60여 년간 온갖 식물들이 자라고 죽고, 동물들이 드나들었지만 환경파괴의 최대 주범인 인간들의 접근이 제한되었던 곳이다. 당연히 세계가 인정하듯 자연생태계의 보고라고 할 만하다. 이 지역은 안보관광 활성화의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기도 하다. 안보라는 것이 보고 즐기는 관광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또 다른 고민이 필요하지만 외국인들이 한국에 오면 가장 가 보고 싶어 하는 곳 중의 하나가 이곳이라는 점에서 국제관광자원의 잠재력은 충분하다. 이와 같은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이 지역은 태생적으로 내부적인 갈등이 내재되어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군이다. 국가안보를 책임지는 군으로서는 모든 판단에서 최고 최대의 우선순위를 국가안보에 둘 수밖에 없다. 국가안보가 바로 군이 존재하는 단 하나의 절체절명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지역의 발전 책임을 맡고 있는 행정당국이나 일반 지역민들의 입장에서는 국가안보의 가치와 함께 지역발전도 함께 고려해야 할 중요한 가치다. 지역이라는 미세한 현미경으로 볼 때 국가안보와 지역발전은 전통적으로 갈등관계일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지역주민들은 해당 지역 발전을 위해 미활용 군사시설을 활용하려는 욕구가 항상 있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대개 논의를 시작하기조차 쉽지 않은데, 바로 군과 지역민들이 생각하는 미활용 군사시설의 개념에서부터 천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지역민들의 눈으로는 1년에 한두 번 사용할까 말까 하는 군사시설은 미활용 군사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이를 민간 차원에서 활용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긴다. 그러나 군의 입장에서는 전쟁은 언제 발발할지 모르는 휴화산이며, 따라서 10년에 한 번 사용하더라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시설이면 미활용 군사시설이 아니라 활용 군사시설이다.그동안 민통선 지역에서는 이러한 갈등이 수없이 반복되어 왔다. 이는 어느 일방의 탓이라고 보기 어려운, 우선순위와 가치의 차이에서 비롯된 난제다. 이러한 갈등이 어떻게 표출되고 해결되는가를 관찰하는 일 역시 이번 탐방에서 내가 맡아야 할 중요한 임무 중 하나다. 지역개발 차원을 떠나 국가 전체의 차원에서 비무장지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도 매우 중요하다. 국가 차원에서 볼 때 산악 중심의 동부지역으로부터 북한과 지리적, 문화적으로 가까운 중부지역, 그리고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우면서도 강과 바다라는 특수상황까지 포함된 서부지역에 이르기까지, 통일 이전과 통일시기 그리고 통일 이후를 염두에 둔 장기적인 개발 및 보존 계획이 필요하다. 1. 연륙교 공사현장: 강화와 교동을 연결하는 연륙교가 건설되고 있다. 장기적으로 북한 쪽과 연결되는 교량이 완성된다면 강화는 새로운 통일의 허브로 기능할 것이다.ⓒ이상엽 강화도는 우리가 방문하는 비무장지대 중에서도 특이한 지역으로 생태의 보고나 관광자원의 관점에서도 중요하지만, 군과 민의 갈등이 더욱 중요한 고려 요소가 되는 지역이다. 이곳은 중동부지역과는 달리 일상생활에서 민통선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고,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군과 민이 융합되어 살아가는 복합지역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일반인들이 벼농사를 짓는 논이나 작물을 경작하는 밭이 남방한계선을 표시하는 철책 바로 직전까지 펼쳐져 있는 경우가 많다. 요즘에는 민통선과 아주 가까운 지역에까지 일반인들이 주말 휴양소로 사용하는 펜션들이 들어서 있다.강하면서 유연하다! 지역경제 기여하는 해병대강화군과 해병대는 대화를 통해 우선순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문제들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지혜롭게 풀어나가고 있었다. 강화군과 이 지역을 관할하는 해병대는 주요 현안이 있을 때마다 관군협의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이 회의에 강화군에서는 군수와 부군수, 실·과장 이상의 간부들이, 그리고 해병대에서는 사단장과 주요 참모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관군협의회를 통한 성과도 일부 나타나고 있었다. 김포에서 강화대교를 건너 고려인삼센터에서 우회전해 길을 따라가면 월곶돈대 안에 연미정이라는 정자가 나온다. 이곳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해 그 모양이 제비꼬리 같다고 하여 연미라 불린다. 강화도를 설명하는 책자에 의하면 연미정은 고려시대 고종이 학생을 모아 놓고 면학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 곳이다. 조선 인조 때 정묘호란 당시에는 청나라와 조선이 강화조약을 체결한 곳이기도 하다. 월곶돈대 가운데에 열댓 명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크기의 연미정이란 정자가 있다. 바라보고 있으면 눈이 아름다워지고 안쪽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아름다워지는 아담한 정자다. 원래 이 연미정은 민통선 내에 위치해 일반인들이 출입하려면 총을 들고 서 있는 초병의 검문을 받아야 했다.연미정을 강화도의 또 하나의 관광명소로 만들고 싶어 하던 강화군은 해병대와 협의를 통해 검문초소를 연미정 입구 뒤쪽으로 후퇴시켰다. 그리하여 일반인들이 아무런 검문이나 제지 없이 자유롭게 연미정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그 아름다움 속에서 들리는 조상의 숨결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민통선 지역에서 관군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한 한 사례라고 하겠다. 관의 적극성과 군의 유연성이 조화를 이룬 사례다. 연미정에서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조금 더 나아가면 은암자연과학박물관이 있고, 서쪽으로 더 나아가면 제적봉 위에 최근 개관한 평화전망대가 나온다. 큰 강의 강폭보다도 좁은 바다 건너 북녘의 들판과 산들과 마을까지가 코 밑에 바로 내려다보이는 전망대며, 초소에서 신분증만 제시하면 누구나 들어가 볼 수 있다.이 전망대 역시 강화군과 해병대가 협의를 거쳐 함께 이룩한 사업의 결실이다. 군은 기존의 경계초소가 있던 산 정상을 강화군에 내주었고, 강화군은 여기에 관광시설인 전망대를 설치하면서 동시에 군이 사용할 별도의 전망시설을 함께 지어주었다. 한마디로 군에도 좋은 일이고 민간에도 좋은 일이 이루어진 셈이다.강화도와 강화도의 서쪽에 위치한 교동도를 연결하는 교동연륙교의 건설 과정도 관군의 협력 사례라고 할 만하다. 건설비용이나 연결도로 등으로 판단할 때 강화도와 교동도를 연결하는 연륙교의 최적 위치는 강화도 북부의 민통선 지역을 통과하는 경로다. 그러나 해병대 입장에서 볼 때 이 지역은 민통선 내 지역으로 이곳에 연륙교를 건설할 경우 군의 작전수행에 애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지역이었다. 2. 상추 농사: 민통선 안쪽 농민들의 일상은 한가롭다. 철조망으로 막혀 갯벌 농사는 불가능하지만 너른 들판은 농사짓기에 부족함이 없다.ⓒ조우혜 강화도 사람들의 꿈과 희망당연히 해병대에서는 민통선보다 아래쪽에 연륙교를 건설할 것을 주장했으며, 강화군에서는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민통선 내를 통과하는 최단거리를 주장했다. 첨예하게 우선순위의 이해관계가 대립되던 이 사안은 결국 양측의 협의를 거쳐 민통선 내에 있는 최단거리로 연륙교를 건설하기로 결정되었다. 필자가 교동연륙교 건설현장을 방문했을 때는 한창 기초공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엄청난 크기와 길이의 H빔을 옮기느라 거대한 크레인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교동도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공자의 화상을 봉안한 교동향교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1286년 고려 충렬왕 12년에 문성공 안향 선생이 원나라 유학에서 귀국하는 길에 교동도에 들러 지금의 향교 자리에 임시로 초막을 세우고 공자의 상을 봉안했다고 한다. 아마도 안향 선생은 교동도에서 배를 타고 강화도로, 다시 배를 타고 김포반도나 개성으로 향했을 것이다. 이제 교동대교가 연결되면 이 뱃길들은 북한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람과 자동차가 다니는 육로로 바뀌게 된다. 교동연륙교가 완성되면 김포반도에서 강화대교를 건너 강화도로 들어온 관광객은 넓게 뚫린 시원한 도로와 다리를 건너 순식간에 교동도에 들어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교동연륙교가 현재 위치에 만들어지기까지 자신의 역할과 우선순위에 충실하던 강화군청과 해병대의 대립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는 수많은 갈등과 협의가 있었음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교동도와 강화도를 연결하는 연륙교가 건설되듯이 언젠가는 강화도와 황해도를 연결하는 연륙교가 생길 날도 올 것이다. 이 연륙교가 민통선과 비무장지대를 건너서 만들어질지, 아니면 아예 민통선과 비무장지대의 개념이 없어진 상태에서 우리 땅을 연결하는 상황이 될지 궁금해진다. 아침 6시에 서울을 출발했는데 애기봉, 승천포, 제적봉 평화전망대, 인화보 그리고 교동연륙교 공사현장을 거쳐 강화군청을 방문했을 때 시계는 벌써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강화군청 앞에 서 있는 표지판의 ‘비타민 강화’라는 구호가 눈길을 끈다. 단어의 음률을 중시해 만든 구호겠지만, 필자에게는 한반도에 없어서는 안 될 비타민 같은 강화도가 되겠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강화군청은 다른 군청과 달리 주차장이 2층으로 되어 있었고, 업무시간으로는 비교적 늦은 시간임에도 자동차를 주차할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군청에는 비상경제상황실이 운영되고 있었다. 부군수를 상황실장으로 하고, 그 아래 상황점검반, 기획재정반, 고용경제안정반, 복지지원반 등 4개 반이 설치되어 있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부실에서 시작된 금융위기의 여파가 하늘과 땅을 건너 강화도에까지 상륙해 있었다. 인천세계도시축전을 위해 강화도 각 지역을 점검하고 막 군청에 돌아온 문화관광과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강화도의 중요성에 대해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는 강화도 행정수장을 강화유수라 했는데, 강화유수는 비변사(요즘으로 치면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참석하는 멤버였으며 충청, 전라, 경상의 3도 수군에 대한 통제사를 겸임하는 중요한 자리였단다.강화도는 150기의 청동기시대 고인돌에서부터 고려시대 항몽 시절의 유적, 그리고 조선후기 병인양요·신미양요· 운양호사건 등 서구열강과의 격전지까지 문화재의 보고다. 실제 문화관광과장은 강화도가 신라 천년의 수도인 경주보다 문화재 밀집도가 높다는 점을 강조한다. 강화도는 고려시대에 이미 간척이 이루진 우리나라 최초의 간척사업지기도 하다.강화도 부근의 석모도에서는 해명, 용궁, 영암 등 세 개의 온천이 발출되어 온천관광단지 조성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지정학적 여건상 강화도는 일조시간이 길고 밤낮의 기온차가 커 농업에 적합한 지역이기도 하다. 강화도 개발계획에는 강화도의 균형발전을 위해 경제자유구역 확대를 통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강화도 북부지역을 개발하고, 130㎞에 달하는 강화도 해안고속도로 건설 계획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그래서 강화도 지역개발에 대해서는 강화군청을 믿어보기로 했다. 다만, 강화군의 면적은 411㎢로 인천시 전체면적의 41%에 달하지만, 2009년도 기준 전체 예산 3176억원에 재정자립도 16.5%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강화도 지역에 대한 인천시 및 국가 차원의 개발 및 보전계획 수립이 필요할 것이다. 환황해경제권의 중심으로 태어난다강화군청의 입장에서는 강화도 내부가 보이지만, 구글어스를 통해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누구나 한반도의 정치, 경제의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강화도가 보인다. 예로부터 강화도는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물류의 중심지였다. 고려시대에 강화도를 수도로 삼았거나, 조선시대에 왕이 강화도로 피난한 기록은 널리 알려져 있다.고려시대 강화도가 오랜 기간 수도로서 기능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강화도의 농산물 생산능력과 더불어 삼남지방에서 세곡선을 이용해 조세를 거두어 들이기에 수월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왕정의 최고 보물로 추정되는 조선왕조실록 및 조선왕실족보의 원본을 보관하던 곳이 강화도 정족산사고의 장사각이었다.1236년에 설립된 대장도감에서 팔만대장경을 만들 때는 대장경목판을 실은 배가 거제도를 출발해 강화도 선원면에 있는 선원사 앞까지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1900년 우리나라 최초의 성공회 성당인 강화성당을 만들 때에는 백두산 원시림의 나무를 압록강을 이용, 강화도까지 운반해 사용하기도 했다. 이미 오랜 과거부터 강화도는 백두산과 거제도가 만나는 물류와 경제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지금부터 시간이 가면 갈수록 강화도는 더욱 크고 번성한 환황해경제권의 중심으로 변모할 공산이 높다. 중국의 성장열차가 지칠 줄 모르고 달리면 달릴수록 한반도의 중심에서 중국과 근접한 강화도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것이다.강화도는 환황해경제권의 중심지역임과 동시에 서울과 인천, 개성을 연결하는 트라이앵글의 중핵지역이다. 이 트라이앵글의 현재는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 그리고 민통선 지역으로 갈기갈기 찢겨 있고 상대방을 노려보는 총구들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숨죽이게 하고 있다. 아직은 적막, 갈등 그리고 그리움만이 존재하는 미완성 삼각지대일 뿐이다.환희의 트라이앵글이 주는 무거운 숙제 고인돌: 하점면에 있는 잘생긴 고인돌이다. 선사시대부터 강화에 많은 주민과 권력화된 인물이 존재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강화에는 수많은 고인돌이 산재한다.ⓒ이상엽 한반도에 평화가 오고 황복이 누리는 정도의 자유를 평범한 국민도 누릴 수 있게 되는 날, 이 트라이앵글은 평화, 화합 그리고 환희의 삼각지대로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날에는 강화도와 황해도 연백군, 개풍군 사이에 나들섬(인공섬)이 떠 있을 것이다. 이 나들섬을 중심으로 교동도와 황해도 연백군을 연결하는 연륙교, 강화도와 김포반도, 황해도 개풍군을 연결하는 연륙교 그리고 인천과 강화도를 연결하는 연륙교가 완공되어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강화도는 서울, 인천, 개성 트라이앵글을 숨 쉬게 하는 심장, 백두산 천지와 제주도의 백록담을 연결하는 한반도의 심장, 그리고 세계를 호령할 환황해경제권의 심장으로 거듭날 것이다. 강화도 비무장지대 탐방은 이렇게 끝났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는 이미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적막, 갈등, 그리움의 트라이앵글을 평화, 화합 그리고 환희의 트라이앵글로 만들기 위해 나는, 우리는, 그리고 국가는 지금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무거운 숙제를 안겨준 하루였다. 새벽부터 밤까지 움직이느라 파김치가 된 육신은 당장 잠을 자라고 요구하지만, 고뇌에 빠진 정신과 마음은 긴 밤을 지새울 것 같다. 갑자기 내일 아침 학교강의를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2009.06.15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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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아성 지키는 최후의 전사

산업 일반

네오콘들 지리멸렬한 지금 마지막 깃발 치켜든 에이브럼스 9·11테러 이후 미국의 외교정책을 좌지우지했던 네오콘들이 힘겨운 시절을 맞았다. 대부분 부시 정부에서 쫓겨나고, 내분에 휘말렸으며, 몇 해 전만 해도 그들의 권력을 찬양했던 외교가의 조롱을 받는다. 지난 10월이 가장 가혹했다. 민주당이 상하 양원을 장악하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봤다. 부시 대통령이 워싱턴의 막후 협상가 제임스 베이커와 리 해밀턴을 만나는 모습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양당 인사가 포함된 두 사람의 연구그룹은 네오콘 정책이 이라크에 만들어놓은 수렁에서 미국을 구해내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설상가상으로 1986년께 중남미에서 냉전시대의 숙적이었던 다니엘 오르테가가 다시 일어나 니카라과의 대통령으로 뽑히는 모습을 지켜봤다. 네오콘들이 휘청거리긴 했어도 아직 죽지는 않았다. 강단 있는 몇 사람이 남아 꿋꿋이 버틴다. 최근의 역풍에 맞서 불어오는 작은 역풍도 있다. (이상주의가 아니라) 현실주의의 보루로 알려진 국무부의 일부 관리조차 저항의 목소리를 냈다.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신념을 가진 직원이 많다”고 한 고위관리가 익명을 요구하며 말했다. “만일 베이커 보고서에서 우리가 이라크에서 철수하고자 모종의 타협을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들의 희망은, 그리고 모든 네오콘의 희망은 엘리엇 에이브럼스의 양 어깨에 달렸는지 모른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2인자인 에이브럼스는 네오콘들의 지상명제인 중동지역의 민주주의 촉진을 여전히 담당한다. 뉴스위크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한 에이브럼스는 현재 안성맞춤인 일을 한다. 하버드 출신의 변호사로서 중동 담당이며 이라크와는 무관하다. 올해 초 조용한 정권교체 추진을 목적으로 이란에 내보내는 TV·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을 8500만 달러 규모로 확대하는 업무를 추진했다. 이제 성직자 정권 추방 목표는 포기했는지 모른다.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같은 아랍 동맹국들에서 개혁을 추진한다는 정책도 마찬가지다. 무바라크는 유명한 반체제 인사를 11개월 이상 감옥에 가두고 국민의 인권을 제약했다. 얼마 전까지 부시의 연설문 작성자였던 마이클 거슨(현재는 뉴스위크에 글을 기고한다)은 에이브럼스가 틀림없이 이 같은 분위기 변화를 걱정한다고 말했다. “민주주의 확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무바라크가 민주화를 후퇴시킨다고 크게 우려한다”고 말했다. 에이브럼스는 팔레스타인 선거 추진과정에서 얻은 예기치 않은 부산물의 뒤처리도 해야 한다. 하마스의 부상(浮上)과 평화협상의 붕괴가 그것이다. 그러나 에이브럼스에게는 강력한 원군이 있다. “부시는 그를 높이 평가한다”고 한 고위관리가 익명을 전제로 말했다. “첫째, 에이브럼스가 최후의 기수라는 사실을 안다. 둘째로 크게 두드러지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다.”(에이브럼스는 20년 전 의회에 이란-콘트라 사건 관련정보를 제대로 알리지 않은 죄를 시인한 이래 언론을 기피해왔다. 나중에 사면받았다). 가장 치열한 싸움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 이란·북한·시리아 같은 정권과 타협하느냐의 여부다. 부시는 압제정권의 위협에 정권교체 추진으로 맞서는 수법을 써왔다. 위클리 스탠더드 편집인이자 논객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네오콘인 빌 크리스톨은 대통령이 모든 기존 전략에 등을 돌린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부시는 권력을 쥔 최후의 네오콘이다. 사실 부시가 그 중심이었다.” 크리스톨은 네오콘들이 서로 물고 뜯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역사의 종언’을 쓴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공개적으로 네오콘과 절연했고, 그들이 신뢰를 잃었다고 생각한다. 국방부 고문을 지낸 네오콘의 대부 리처드 펄은 자기 같으면 이라크 침공을 결정하지 않았으리라고 말했다(뉴스위크와의 인터뷰를 거부했다). 크리스톨은 옛 친구 펄이 “고백 모드”로 바뀌었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내홍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지식 집단, 모든 정치 집단은 작은 분란의 시기를 겪으면서 약간 다른 방식으로 재정렬한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신뢰 잃은 집단이라면서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우리의 신뢰를 흠집 내느라 엄청난 시간을 쓴다.” 크리스톨의 동료들은 에이브럼스가 전열을 재정비해주기 바란다.

2006.12.05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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