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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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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경학적 파편화와 저금리 자금 시대의 종언 [최배근 이게 경제다]

국제 경제

21세기 들어 겪는 충격들 대부분은 기존의 지적 체계나 경험들로 예측하기 어렵거나 예측하더라도 쉽게 혹은 단기적으로 해결책을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새로운 처음’형 충격들이다. 예를 들어, 10억 달러 이상 피해를 발생시킨 기후변화 재난은 1980년대에는 연평균 2.9회와 재난 당 178억 달러의 피해 및 287명의 사망자를 유발했지만, 2010년대에는 연평균 11.9회와 재난 당 810억 달러의 피해 및 522명의 사망자를 낳고 있듯이 기후변화에 대한 해결책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기후변화는 산업 문명의 산물인 반면, 인류 세계의 지적 체계나 시스템, 제도 등은 산업 문명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가 겪는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역시 자연생태계 파괴에서 비롯한 것이기에 자연을 인간의 이용(착취) 대상으로 보는 인간 중심주의 세계관을 바꾸지 않는 한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백신 개발 방식이 해결책이 되지 않는 이유이다. 2007~08년 금융위기 역시 2008년 가을 미국 하원에서 앨런 그린스펀이 “지난 수십년간 지배해온 현대 리스크 관리 패러다임의 전체 지적 체계가 붕괴하였음을 보여주었다”고 진술하였듯이 (기존의 지적 체계로 예측할 수 없었던 위기라는 점에서) ‘새로운 처음’형 충격이다. 기존의 충격이나 위기와 달리 ‘새로운 처음’형 충격이나 위기는 규모나 범위가 세계적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는 ‘새로운 처음’형 충격이 모두가 연결된 세계에서 발생하는 충격임을 의미한다. 반면 산업 문명을 만든 지적 체계는 세상의 모든 것은 분리되었다고 보거나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결과 (중심부는) 충격의 전염을 차단할 수 있다는 기계론적 세계관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늘날 세계는 (경제적으로) 전례가 없을 정도의 깊이와 복잡성으로 상호연결(의존)되어 있고, (기술적으로도) 모든 것이 연결된 세상이기에 충격의 전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위기나 코로나 팬데믹 등의 새로운 처음형 충격들은 (특히 중심국에서는) 저금리 자금(easy money) 투입으로 해결하였다. 예를 들어, GDP 대비 연준의 자산(부채) 비중은 금융위기 전 6.1%에서 금융위기 수습 과정에서 25.3%까지 증가하였고, 팬데믹 대응 과정에서도 19.4%에서 38.1%로 증가하였다. 유럽중앙은행(ECB)의 자산(부채)은 GDP 대비 유로존 위기 대응 전후 15.4%에서 31.8%로 증가하였고, 다시 (환율을 통한) 경기부양을 위해 40.0%까지 증대시켰고, 팬데믹 전후로는 40%에서 약 70%까지 증대시켰다. 천문학적인 저금리 자금 투입이 없었으면 충격들의 수습은 불가능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그 결과 정부채무 급증과 자산가격의 과도한 인플레를 초래하였다. 금융위기 전 58%도 되지 않았던 미국 연방정부 채무는 지난해에는 약 118%로 두 배 이상 증가했고, 유로존 평균 정부채무도 66%에서 96%로 증가하였다. 그럼에도 달러와 유로 등은 기축통화의 힘과 저금리(제로금리)로 정부채무가 당장 문제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산가격 인플레는 경기부양 효과도 존재하면서 저금리 자금 투입 방식을 지속할 수 있었다. ━ 기존 지적 체계로 예측 어려운 '새로운 처음'형 충격...모두가 연결된 세계에서 발생 그런데 22년 글로벌 경제를 덮친 우크라이나 전쟁발 ‘새로운 처음’형 충격은 저금리 자금 투입을 더는 용인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보여준다. 우크라이나 전쟁발 경제위기는 경제블록의 분할을 의미하는 ‘지경학적 파편화(geoeconomic fragmentation)’가 가져온 충격이다. 일부에서 탈세계화로 표현하는 지경학적 파편화는 자본, 상품과 서비스 교역, 아이디어, 기술 등의 국제 흐름에 균열을 의미한다. 지난 40년간 추진된 세계화는 불평등 문제를 포함해 많은 도전을 받아왔지만 빈곤 개선과 생산성 증대, 세계 경제성장의 동력이었다. 자신감을 얻은 미국은 (다자주의 협상에 기반해 WTO라는) ‘규칙 기반의 무역 세계화 시스템(a rule based system of trade globalisation)’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새로운 시스템에서 가장 이득을 본 나라는 중국이었다. 그리고 이는 (수익성 극대화를 추구한) 월가 이해의 결과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월가의 이익은 금융위기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금융위기 이후 뒤늦게 중국 통제를 시작했지만, 중국은 자신의 달라진 위상에 부합하는 역할과 몫을 요구하였다. 기존 틀의 재편이 한계가 존재하자 중국은 자신이 주도하는 새로운 질서 만들기로 선회하였다. 여기에 동유럽으로 확장한 나토와 (부국강병과 제국 건설을 추구하며 등장한) 푸틴 러시아가 충돌한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하자 G7은 러시아를 G8에서 축출하고 트럼프 행정부에서 나토 동진을 계속하였다. 동시에 다자주의는 물론이고 G7 등으로는 해결이 어렵다고 생각한 트럼프 시절 미국은 무역전쟁을 일으켰고, 뒤를 이은 바이든 역시 (G7만으로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가치 동맹’을 구성하여 중국과 러시아 압박을 가하고 있다. 자유주의 체제와 권위주의 체제라는 상이한 지각판이 연결되어 하나의 지각판처럼 움직였던 세계화 시대가 지각판 사이의 단층선이 표면으로 부상하면서, 즉 경제블록이 분열하면서 막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지경학적 파편화는 인플레이션 → 금리 인상과 양적 긴축(QT) → 자산가격 조정, 성장 둔화 및 후퇴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지경학적 파편화의 본 게임인 미·중 충돌은 중국 경제의 비중과 역할 등을 고려할 때 글로벌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가늠하기도 어렵다. 문제는 자산가격 조정과 성장 둔화 등에 대응해 다시 저금리 자금을 투입할 수 있느냐이다. 문제의 원인인 지경학적 파편화를 초래한 패권 충돌이 해결되지 않는 한 지경학적 파편화는 해결되기 어렵다. 지경학적 파편화가 야기한 인플레이션과 침체가 과거의 위기와 다른 이유이다. 패권 충돌을 해결하는 것이 해법인 것을 알면서도 단기적으로 그리고 구조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지경학적 파편화는 새로운 처음형 충격이다. 문제는 기존의 새로운 처음형 충격과 달리 ‘저금리 자금’의 투입이 어렵다는 점이다. ‘저금리 자금 시대의 종언(An End of Cheap Money Era)’은 미국과 유럽 등의 마지막 의지처인 달러와 유로가 힘이 되어줄 수 없고, 따라서 세계 경제의 장기침체 도래를 의미한다. *필자는 건국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아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경제 전문가다. 현재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경제사학회 회장을 지냈다. 유튜브 채널 ‘최배근TV’를 비롯해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 KBS ‘최경영의 경제쇼’ 등 다양한 방송에 출연 중이며, 한겨레21, 경향신문 등에 고정 칼럼을 연재했다. 주요 저서로 등이 있다.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2022.07.23 15:00

4분 소요
‘NATO 가입 논쟁’ 터키 VS 스웨덴·핀란드 막바지 협상 진통

국제 이슈

27~29일(현지시각)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가 열리는 가운데 28일 튀르키예(Turkiye 옛 터키)와 스웨덴·핀란드 정상들이 NATO 가입에 대한 논쟁을 벌인다. 스웨덴(마그달레나 안데르손 총리)과 핀란드(산나 마린 총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를 계기로 국가 안보 위협을 느끼게 되면서 우크라이나와 함께 NATO 가입을 서두르고 있다. 양국은 그동안 오랫동안 유지해온 중립국 원칙을 깨고 지난달 18일 NATO에 가입 신청서를 공식 제출했다. NATO 가입하려면 30개 NATO 회원국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해야 가능하다. 하지만 NATO 회원국인 터키(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가 강렬하게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터키는 “터키의 안보를 위협하는 쿠르드노동자당(PKK) 세력을 옹호하고 있는 스웨덴·핀란드와 NATO 동맹을 맺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PKK는 미국·영국·유럽연합(EU) 등 서방세계가 테러 조직으로 지정한 무장 단체로, 터키로부터 쿠르드족(이란·이라크·시리아·터키 접경지역에 거주하며 언어·문화를 공유하는 민족)의 분리독립을 추구하는 무장단체다. 스웨덴과 핀란드가 이런 PKK 세력을 비호하고 있다는 것이 터키의 시각이다. 스웨덴과 핀란드는 지난달 25일(현지시각) NATO의 중재로 양국의 협상 대표단을 터키로 보냈으나 의견을 좁히지 못했다. 이달 20일(현지시각)에도 벨기에 브뤼셀에서 터키 측과 협상을 벌였으나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 마드리드 NATO 정상회의 때 또다시 회담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이번 회담에는 옌스 스톨텐베르그 NATO 사무총장의 중재로 터키 대통령, 스웨덴 총리, 핀란드 총리가 참석할 예정이다. 러시아에 대항하고 있는 미국이 터키를 설득하고 있지만 터키는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중재에 나서고 있는 NATO 지도부도 “자국의 안보 위협을 걱정하는 터키의 입장은 당연하다”고 인정하는 한편,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NATO 지도부는 터키가 그동안 NATO에서 어떻게 활동해왔는지 십분 이해한다는 입장이다. 터키는 1952년 NATO에 가입한 이래 NATO의 문호 개방을 지지해왔다. 러시아와의 충돌이 우려되는 NATO의 동유럽 진출 전략에도 지금까지 반대 입장을 내비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스웨덴과 핀란드가 PKK 등 테러리스트 세력에 대해 구체적인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터키를 위협하는 세력에 포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스웨덴과 핀란드에게 터키의 요구를 받아들일 해법을 제시할 것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식 기자 tango@edaily.co.kr

2022.06.28 06:00

2분 소요
글로벌 원전 르네상스 시대 다시 열까 [채인택 글로벌 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한국은 글로벌 원전 르네상스 시대를 열 수 있을까. 윤석열 대통령이 6월 22일 ‘탈원전 백지화 및 원전 최강국 건설’ 구상을 밝히면서 그동안 빈사 상태에 빠졌던 원전 산업의 부활과 글로벌 진출 기대가 커지고 있다. 윤 대통령이 이날 경남 창원의 원자력‧수소‧신재생 플랜트 업체인 두산에너빌리티(옛 두산중공업)를 방문해 “원전 세일즈를 위해 백방으로 뛰겠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우선 1조원을 2025년까지 국내 원자력 관련 업체에 응급 수혈해 산업 경쟁력을 되살리기로 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중앙일보에 “원전 수출에 의미 있는 나라가 폴란드‧체코‧네덜란드”라고 지목하고 6월 29~30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에서 “이들 국가의 정상과 관련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5월 20~22일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의 방한 당시 발표된 한미정상회담 공동발표문에는 ‘소형모듈원자로(SMR)로 글로벌 공동 진출’이 명시됐다. 바야흐로 정부가 직접 나서 원전 관련 국내 산업 심폐소생술을 하면서 해외 경제 외교에 나서기로 선언한 셈이다. ━ “원전 세일즈 위해 백방으로 뛰겠다” 원전 수출 산업은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가. 원전 수요와 관련해 거시적으로 상황을 살펴보자. 우선 지구가 어떤 에너지원에 의존하는지를 살피면 총체적인 수요 전망을 가늠할 수 있다. 글로벌 통계 사이트인 아워월드인데이터를 바탕으로 코로나19 팬데믹 전인 2019년 공급원별 전 세계 에너지 소비를 보면 원자력의 글로벌 위상을 파악할 수 있다. 석유가 33.1%, 석탄이 27%, 가스가 24.3%로 이들 화석 연료를 합치면 전체의 84.3%에 이른다. 수력‧풍력‧태양열‧바이오‧지열‧조력 등 재생에너지와 원자력을 합친 ‘저탄소 에너지원’은 15.7%에 불과하다. 원자력이 4.3%, 수력이 6.4%, 풍력이 2.5%, 태양열이 1.1%, 바이오가 0.7%, 지열과 조력 등 기타 재생에너지가 0.9%를 각각 차지한다. 이는 직접 태우는 것을 포함한 것으로, 전기 생산에서 차지하는 에너지원의 비율을 살펴보면 보면 원자력의 비중이 훨씬 높다. 영국 런던에 본부를 둔 국제원자력협회(WNA)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전기의 10%가 원자력에서 나온다.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에선 전체 전기의 18%를 원전에서 생산한다. WNA는 전기를 쾌적한 방식으로, 안정적으로 대량 확보하는 신뢰할 수 있는 미래 에너지 공급원으로서 원전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데이터도 비슷하다. 이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전 세계 에너지원별 전기 생산량은 석탄이 36.7%, 가스가 23.5%, 수력이 16.0%, 원자력이 10.3%, 태양열‧풍력‧지열‧조력 등이 8.2%, 석유가 2.8%, 기타가 2.6%를 각각 차지한다. 원자력 발전은 석유‧석탄‧가스 등 화석연료를 태워서 나오는 열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생산하는 화력발전과 달리 우라늄이 핵분열 할 때 나오는 열로 증기를 만들고 그 힘으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만든다. 터빈을 돌려 발전을 한다는 점에선 동일하지만 열원이 서로 다르다. 원자력은 탄소를 거의 배출하지 않기 때문에 기후변화를 늦추기 위한 글로벌 노력 속에서 가치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앞으로 전기차 등으로 전기 수요가 앞으로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탄소 배출을 최소화하면서 전기를 풍부하게 공급할 수 있는 에너지원은 원자력이 유일하다는 사실은 원전 산업의 미래를 기대하는 근거의 하나다. IAEA는 탄소배출 제로와 관련해 원전 산업의 성장을 전망했다. IAEA가 지난해 9월 16일 발표한 ‘2050년까지 에너지, 전기, 그리고 원자력 전망(Energy, Electricity and Nuclear Power Estimates for the Period up to 2050)’ 보고서 2021년 판에서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전력 생산에서 원자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욱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 사고 이후 처음으로 원전 산업의 성장을 예상한 것이다. 이 보고서는 세계가 기후변화에 맞서기 위해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것을 그 배경으로 지적했다. 수많은 나라가 신뢰할 수 있고, 깨끗한 에너지 생산을 늘리기 위해 원전 도입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IAEA의 이 보고서는 2020년 393기가와트(GWe)인 전 세계 원전 발전 용량이 2050년까지 그 두 배인 792기가와트(GWe)로 증가하는 것을 최대 예상치로 제시했다. 이는 전해보다 10%가 많은 수치다. 최저 예상치는 현재 수준을 유지하는 392기가와트(GWEe)로 예상했다(전력 단위를 보면 100만 킬로와트(kW)가 1000메가와트(MWe), 1000메가와트(MWe)가 1기가와트(GWe)에 각각 해당한다). 새로운 IAEA 원전 시나리오는 전 세계가 원전을 저탄소 에너지 생산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는 가운데 나왔다. IAEA의 라파엘 마리아노 그로시 사무총장은 “전 세계가 탄소 제로를 실현하기 위해선 이산화탄소를 거의 배출하지 않는 원전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높아졌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IAEA에 따르면 킬로와트(kW)의 전기를 생산할 때 배출하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발전원별로 보면 석탄이 992g으로 가장 많고, 석유가 782g, LNG가 549g, 태양광이 54g이었으며 원전은 10g 수준이다. 국제원자력협회(WNA)의 통계도 비슷하다. 1950년대 말 미국에서 가동을 시작한 원전은 2022년 6월 현재 전 세계 440개의 원자로에서 지구촌이 쓰는 전기의 10%를 생산하고 있다. 2019년 기준으로 전체 저탄소 에너지의 28%를 차지해 수력에 이어 둘째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 외에 전 세계 50개국에서 220개의 연구용 원자로를 가동해 의료와 산업용 방사성 동위원소를 생산하면서 원자력 교육‧훈련용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전 세계 원전의 전기 생산은 어떤가. 과연 성장하고 있거나 향후 성장의 여지가 있는가. IAEA에 따르면 2020년 전 세계 원전의 전기 생산은 전년보다 4%가 줄었다. 당시까지는 비관적이었다. 2011년 후쿠시마 제1 원전 사고의 여파가 여전히 영향을 미친 셈이다. 유럽연합(-11%)과 일본(-33%), 미국(-2%)이 원전 전력 생산 감소를 이끌었다. 같은 시기 원전의 전력 생산은 중국에선 5%, 러시아에선 8%가 늘었다. 하지만 2021년이 되면서 원전의 전력 생산은 바닥을 치면서 상승세로 반전했다. 전 세계적으로 2%가 늘었다. 눈여겨볼 점은 이 해에 신흥경제국이나 개도국에선 5%가 늘었다는 사실이다. 이들 나라에선 새롭게 전력을 송출하기 시작한 원자로가 줄을 이었다. 브릭스(BRICs)에 포함된 신흥경제국인 중국‧인도‧러시아에 이슬람권인 아랍에미리트(UAE)‧파키스탄, 그리고 유럽연합(EU) 회원국인 동유럽의 슬로바키아가 이 대열에 합류했다. 일본에선 몇몇 원전이 새로 재가동에 들어가면서 원전의 전기 생산이 6% 늘었다. 세계경제포럼(WEF)은 지난 1월 28일 2020년 세계 원전 전기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국가별로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글로벌 원전 전기 생산량은 2553테라와트시(TWh)로 이는 전 세계 전력 생산량의 10%에 해당한다. 원전 전기 최다 생산국은 96개의 원자로를 가동하는 미국으로 전 세계의 30.9%를 차지했다. 그 다음이 50개 원자로를 가동하는 중국으로 13.5%를 차지해 처음으로 프랑스를 제치고 세계 2위에 올랐다. 58개의 원자로를 돌리는 프랑스는 13.3%를 차지해 3위였다. 39개의 원자로에서 전기를 생산하는 러시아는 7.7%를 차지해 4위에 올랐다. 24개의 원자로를 가동하는 한국은 6.0%로 세계 5위다. 원자로 7개의 캐나다가 3.6%, 15개의 우크라이나가 2.8%로 각각 6위와 7위였다. 탈원전을 앞두고 아직 6개의 원자로를 운용하는 독일이 2.4%로 8위였다. 7개인 스페인이 2.2%, 역시 7개인 스웨덴이 1.9%, 15개의 영국이 1.8%로 각각 9~11위였다. 33개의 원자로가 있는 일본이 1.7%, 22개의 인도가 1.6%, 7개의 벨기에가 1.3%, 6개의 원자로가 전기를 생산하는 체코가 1.1%로 12~15위로 기록됐다. 주목할 점은 WEF가 경제 성장으로 에너지 수요가 늘고 있는 중국이 앞으로 15년 동안 4400억 달러를 들여 150개의 원자로로 추가로 가동할 계획이라는 점을 적시했다는 사실이다. 현재 50개인 중국의 가동 원자로가 15년 뒤에는 모두 200개가 돼 4배로 증가하는 셈이다. 터키의 국영 안달루 통신은 지난해 10월 데이터 분석을 통해 글로벌 전력 생산에서 원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2020년 10%(40만 메가와트=400기가와트)에서 2030년까지 15%(50만 메가와트=500기가와트)로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을 했다. 2020년 현재 전 세계 33개국에 443개가 가동 중인 원자로의 용량을 고려하면 2030년에는 5만3000메가와트의 전기를 추가로 공급하게 될 것이라는 게 근거다. 원전 산업은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글로벌 노력과 연결돼 앞으로 성장산업으로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주목을 받는 것이 지난 5월 한미공동성명에서 언급된 SMR이다. SMR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정의로 전기출력 300메가와트(MWe) 미만의 소형원자로를 가리킨다. 1000~1400메가와트(MWe)에 이르는 원전 설치 대형원자로보다 건설 기간이 짧고 좁은 부지에서도 설치가 가능해 전력 생산과 송전 외에도 해수 담수화 에너지원, 산업용 열원, 지역난방 열원, 선박 에너지원 등 다양한 쓰임새가 예상된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캐나다·호주처럼 국토가 넓고 인구밀집 지역이 드문드문 있는 경우 SMR이 유용하다. 대형 원전과 다른 도시를 연결하는 송전망 건설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지‧벽지가 많거나 도서가 많은 국가도 마찬가지다. 이런 나라나 지역에는 발전용량이 큰 대형 원전을 건설하고 다른 도시로 방대한 송전망을 건설하는 것보다 용량이 작은 SMR을 건설하는 것이 유용성이 높고 송전망 건설비용도 아낄 수 있다. ━ 미국 관심 커지며 SMR 개발 급물살 SMR은 최근 미국이 에너지 확보용으로 관심을 보이면서 개발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한국에선 100메가와트(MWe)급 SMR인 SMART를 개발해 2012년 원자로 표준설계 인허가를 획득했다. 미국에선 40~50메가와트(MWe)급 뉴스케일(NuScale)을 개발 중이다. 중국도 개발에 나섰으며, 러시아는 선박에 실어 수상 발전하는 방식으로 개발 중이다. 프랑스는 잠수정에 설치해 해저에서 운전하는 방식을 개발하고 있다. 미국에선 뉴스케일파워가, 한국에선 두산에너빌리티로 이름을 바꾼 두산중공업이 이 분야에서 서로 협력하고 있다. 두 업체는 자본과 기술 협력을 강화해왔다. 두 차례에 걸쳐 투자 계약도 맺었으며, 앞으로 SMR을 활용한 수소와 담수 생산 분야에서도 협력할 방침이다. 두 회사는 미국 발전사업자 UAMPS가 미 에너지부로부터 14억 달러를 지원받아 추진하는 아이다호주 프로젝트에 전략적으로 협력할 예정이다. UAMPS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에 SMR 건설 및 운영 허가를 신청해 2025년까지 허가를 받은 뒤 2029년 상업 운전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뉴스케일파워로부터 SMR에 들어갈 원자로 모듈 시제품을 만들고 있다. ━ 우라늄 채광부터 폐로까지 폭넓은 원전산업 결국 한국은 원전 건설과 SMR 설치 모두에서 경쟁력을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미국이 1979년 스리마일 원전 사고 뒤 추가 원전 건설을 중단하는 바람에 원전 기술이 정체되고 원전 사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동안 한국이 원자력 기술과 건설, 사업 전 분야에서 폭넓게 진출한 면도 있다. 또 주목할 점은 원자력 산업이 단순히 원전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범위가 상당히 광범위하다. 원자력 산업은 우라늄의 채광‧변환‧농축부터 핵연료 제조, 그리고 원전 건설과 송전, 사용후핵연료 처분, 수명이 다한 원전의 폐로 등 전 주기에 걸쳐 있다. 한국이 전 세계와 협력할 수 있는 분야는 널려 있다. 우리가 부족한 점도 적지 않다. 원전 건설과 판매에서 시야를 더욱 넓혀 지속 가능하고, 장기적이며, 미래 지향적인 상생형 원자력 산업의 발전을 고민할 때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2022.06.25 15:00

8분 소요
‘나토의 미래’ 새 군비경쟁인가, 국제안보지형 변화인가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4월 4일로 창설 73주년을 맞은 군사동맹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으로 어떤 변화의 전기를 맞을까. 러시아가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나토의 동쪽 국경이 불안해지면서 전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나토 눈앞에서 벌어지는 전쟁 사실 국경이 무려 6993㎞에 이르는 영토 대국 우크라이나는 루마니아(서부 362㎞+남부 169㎞=531㎞)·폴란드(428㎞)·헝가리(103㎞)·슬로바키아(90㎞) 등 4개 나토 회원국과 접경하고 있다. 비나토 회원국인 러시아(1974㎞)·몰도바(939㎞)·벨라루스(891㎞)도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러시아는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벨라루스는 동맹인 러시아의 군사 훈련 기지와 침공로를 제공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북쪽으로 불과 100㎞ 떨어진 곳이 벨라루스 국경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나토의 동쪽 경계선 바로 밖에서 살상용 미사일과 포탄과 로켓탄, 총탄이 날아다니는 셈이다. 나토 창설 이래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전쟁에 벌어진 적은 없다. 냉전 뒤 유럽에서 벌어진 1992~95년의 보스니아 전쟁도, 2008년 러시아의 조지아 침공도 나토 국경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다. 물론 러시아는 지금도 에스토니아(138㎞)·라트비아(271㎞)·리투아니아(266㎞) 등 1940~91년 옛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발트 3국과 폴란드(204㎞)·노르웨이(196㎞) 등 5개 나토 회원국과도 국경을 맞대고 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의 역외영토(본토와 육로로 이어지지 않는 영토)인 칼리닌그라드(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독일령 동프로이센의 북부)와 경계를 맞댄다. 러시아 본토와 국경을 맞댄 나토 회원국은 에스토니아·라트비아·노르웨이뿐이다.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라트비아 국경까지는 직선으로 약 490㎞ 거리이며, 도로 주행거리는 538㎞다. 모스크바에서 에스토니아 국경까지는 직선거리로 809㎞, 도로 주행거리로는 1019㎞ 떨어졌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에스토니아 국경까지는 338㎞ 거리다. 러시아는 나토 가입 가능성이 거론되는 유럽연합(EU) 회원국으로 스칸디나비아 국가인 핀란드(1272㎞)와도 접경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가까운 핀란드 국경까지는 약 150㎞ 떨어졌다. 하지만 이들 나라가 러시아에 적대적인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러시아는 유럽 대륙에선 우크라이나 외에 동맹국인 벨라루스(1239㎞)와 캅카스에선 조지아(876㎞)·아제르바이잔(373㎞)과 각각 접경한다. 중앙아시아에선 카자흐스탄(7513㎞), 동아시아에선 몽골(3485㎞)·중국(4209㎞)·북한(17㎞) 등과 각각 국경을 맞댄다. 거대한 영토를 유지하다 보니 국경도 거대하다. 사실 나토 체제는 냉전의 산물이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1949년 4월 4일의 나토 창설은 미국이 그 한 해 전인 1948년 유럽 동맹국들의 전후 재건·원조 프로그램인 마셜 플랜(유럽부흥계획)과 함께 서방 세계의 결속을 다진 중추였다. 미국은 1948년 4월 3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서명으로 발효한 해외원조법을 바탕으로 4년 동안 서유럽에 130억 달러(2016년 가격으로 1300억 달러에 해당)를 지원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확립된 유럽경제협력기구(OEEC) 회원국이 대상이었다. 미국은 경제는 마셜 플랜, 정치·국방은 나토 체제라는 두 가지 트랙을 앞세워 서방 세계의 맹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1949년 4월 4일 체결된 북대서양조약으로 창설된 나토는 냉전 시기(1946~1991년)에 서방 군사동맹의 기둥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북대서양조약은 미국 주도로 영국·프랑스·네덜란드·이탈리아·벨기에·룩셈부르크·노르웨이·덴마크·아이슬란드·포르투갈 등 서유럽 국가와 북미의 캐나다가 미국 워싱턴에서 체결한 집단안전보장 조약이다. 이 조약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리스에서 좌·우파가 치열한 내전을 펼치면서 냉전이 격화하자 서방세계의 결속을 위해 체결됐다. 당시 그리스에선 친서방인 정부군과 공산당의 군사조직인 민주군이 1946~49년에 걸쳐 내전을 벌였다. 나토 헌장 제5조는 “회원국에 대한 무력행사를 회원국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개별적·집단적 자위권을 발동하고 상호 원조를 한다”고 규정했다. 바로 집단안보, 공동방위를 규정한 핵심 부분이다. 매년 나토 정상회의 때마다 미국의 대통령은 이 부분을 읽음으로써 동맹 보호를 약속해왔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시 이를 거부해 약간의 갈등이 생겼다. ━ 나토, 냉전 시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도입의 척도 역할 맡아 나토는 단순한 안보 동맹에서 머물지 않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서구의 가치를 공유하는 ‘가치 동맹’으로 진화해나갔다. 나토의 확장 역사가 이를 잘 말해준다. 서독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점령된 상태여서 1949년의 나토 창설 논의에는 참석할 수조차 없었다. 점령지 독일은 서방 점령지(서베를린 포함)엔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들어서고 소련군 점령지는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들어서면서 2개의 주권 국가가 됐다. 서독은 민주주의 헌법과 삼권분립의 국가체계를 갖춘 민주주의 국가로 재출발했지만,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민주주의 정착을 검증한 뒤 나토 회원국으로 받아들였다. 서독 지역의 연합군 점령은 1952년 체결된 본-파리 협정이 1955년 관계국 모두에서 비준되면서 끝났다. 독일의 재기를 두려워한 프랑스가 비준을 한차례 거부해 시간이 걸렸다. 민주주의 국가로 재출발한 서독도 이런 과정을 거친 뒤 1952년 나토에 가입할 수 있었다. 서독은 나토 회원국으로서 군대를 유지하고 냉전 시절 상당한 전력을 보유했다.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독일이 나토의 가이드라인에 맞춰 국내총생산(GDP)의 2% 수준으로 국방비를 높이기로 한 것은 두고 ‘독일 재무장’이라고 주장하는 소리도 있는데, 이는 실상과 거리가 있다. 독일은 이미 서독 시절 상당한 군사력을 보유해 나토의 주력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군대라는 이름 대신 자위대라는 어정쩡한 명칭을 사용하면서 상당한 군사비를 지출하는 일본과는 상황이 다르다. 냉전 뒤 통일 독일은 영국, 프랑스 등 다른 나토 회원국처럼 재래식 전력과 군사비 지출을 축소해오다 이번에 새로운 상황을 맞고 있을 뿐이다. 서독은 1990년 10월 동독과 통일을 이룬 뒤 동독지역까지 포함한 통일 독일로서 나토 회원국이 됐다. 스페인도 프란시스코 프랑코(1892~1975)의 파시스트 독재 정권의 집권 시기에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서방세계 가치를 공유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나토와 유럽경제공동체에 들어갈 수 없었다. 1975년 독재자 프랑코의 사망 뒤 1978년 민주 헌법을 제정했지만 1981년 불발 군사 쿠데타가 터지는 등 정치적인 위기가 계속돼 나토 회원국이 되지 못했다. 1982년 혼란이 가라앉고 안정적인 민주주의 체제를 이루면서 비로소 나토 회원국이 됐다. 그 뒤 국내에서 나토 탈퇴 움직임이 벌어지자 1986년 3월 12일 국민투표에서 56.9%의 찬성으로 나토 잔류를 확정했다. 스페인의 나토 가입과 잔류 결정 과정은 나토가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 동맹임을 잘 보여준다. ━ 냉전 뒤 공중분해된 바르샤바 조약기구, 나토는 그 사이 ‘동진’ 나토에 대항해 1955년 옛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공산당 서기장이 주도해 8개 회원국으로 창설했던 동유럽 공산권의 군사동맹인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공산권이 몰락하면서 1991년 자진 해산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1956년 헝가리 민주혁명 당시 헝가리 침공,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등으로 악명을 떨쳤다. 러시아의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새삼 당시 소련의 무력 사용의 기억이 재소환되고 있다. 물론 상황은 다르다. 소련의 헝가리 침공은 영국과 프랑스가 이스라엘과 손잡고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한 이집트를 침공한 수에즈 전쟁과 맞물려 소련에 강력한 항의를 하지 못했다. 당시 미국은 소련과 함께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을 설득해 전쟁을 중단시켰다.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당시 서유럽은 68혁명으로 외교에 신경 쓸 여유가 별로 없었으며, 미국 등은 핵확산금지조약(NPT) 성사를 위해 소련과 척지는 것을 원하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비록 미국이 2021년 8월 아프가니스탄에서 무리하면서까지 철군하면서 일종의 고립정책이나 대외 개입제한 정책을 펼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미국은 동맹국들과 함께 우크라이나에 대전차와 대공 무기를 지원하면서 항전을 돕고 있다. 러시아에 유례없이 대대적인 경제제재도 가하고 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위기를 맞아 중국과의 정면 대결도 일시 유보하는 모양새다. 냉전 당시 소련 주도의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이던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루마니아·불가리아·알바니아 현재는 모두 나토 회원국이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된 뒤 두 나라 모두가 나토 회원국이 됐다. 심지어 옛 소련의 일부였다가 독립한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도 회원국이 됐다. 과거 비동맹 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의 일부였다가 독립한 크로아티아·몬테네그로도 가입했다. 한국은 호주와 뉴질랜드·일본 등과 함께 나토의 협력국가(Global Partner)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물밑에서 새로운 변화의 움직임도 보인다. 그동안 EU에만 가입하고 군사동맹인 나토에는 들어가지 않았던 스칸디나비아 국가 스웨덴과 핀란드에서도 나토 가입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스웨덴은 오랫동안 중립국으로 있으면서 전투기와 군함, 전차 등을 스스로 개발·생산해 운용하고 있는 방위산업 강국이다. 발칸 반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코소보도 나토 가입을 탐색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나토의 확장을 부추기고 있는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토라는 울타리에서 집단 방위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크라이나 상황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토의 동진에 불만을 터뜨려온 러시아가 오히려 21세기 침략 전쟁으로 나토의 존재 이유를 분명하게 확인시켜준 셈이다. 미국도 2021년 1월 조 바이든 대통령 행정부가 들어선 뒤로 나토 동맹국들에 더욱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고 있다. 비용 부담을 다그치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때와는 딴판이다. 바이든은 지난해 6월 14일 브뤼셀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해 동맹국들을 다독거렸다. 올해는 3월 23~25일 브뤼셀을 방문해 24일 나토 정상회의를 연 데 이어 25~26일 우크라이나와 접경한 폴란드를 방문하고 26일 영국을 찾은 뒤 워싱턴으로 돌아갔다. 올해 6월 29~30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다시 나토 정상회의를 소집한다. 내년에는 러시아의 코앞인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 나토 정상회의를 열 예정이다. ━ 우크라이나 두고 고민 깊어진 나토 “전쟁 길어질 수도” 나토와 우크라이나의 관계는 오랫동안 우여곡절을 겪은 게 사실이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에서 독립한 이듬해인 1992년 나토와 관계를 맺었다. 2008년에는 나토 가입 전 단계인 회원국 행동계획(Membership Action Plan: MAP)을 신청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2010년 대통령에 당선한 친러파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비동맹을 추구하면서 나토와 유럽연합(EU) 가입 절차를 중단했다. 그러자 친서방 국민이 들고 일어나 2013~2014년 유로마이단 시위 끝에 야누코비치는 탄핵당하고 야누코비치는 러시아로 망명했다. 그 직후 들어선 임시정부도 나토 가입 계획이 없다고 했지만, 그해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병합하고 쇠락한 산업단지가 있는 동남부 돈바스 지역에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한스크 인민공화국이라는 분리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반전됐다. 그해 10월 우크라이나 의회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헌법에 EU와 나토 가입을 국가 전략이라고 규정한 조문을 삽입했다. 나토는 2021년 6월 브뤼셀 정상회의에서 과거 2008년 부쿠레슈티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가 외부의 간섭 없이 스스로 MAP를 통해 나토에 가입하려고 결정하는 것은 지지하기로 한 결정을 재확인했다. 우크라이나는 2008년 나토가 우크라이나를 회원국으로 즉각 받아들이지 않고 MAP 과정을 요구하면서 러시아가 침공하게 됐다고 불만을 터뜨린다. 하지만 여기에는 확대와 책임 사이에서 갈등해온 나토의 고민이 드러난다. 결국 우크라이나를 위해 당장 피를 흘리기에는 나토 회원국들의 정치적 부담이 너무도 크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아울러 핵보유국인 러시아를 상대해야 하는 미국과 서방의 고민을 잘 보여준다. 게다가 러시아의 전략적 계산과 자존심 등이 겹쳐 전쟁이 단시일 안에 끝나기도 어려운 게 사실이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이 6~7일 브뤼셀에서 열리는 나토 외무장관 회의에 앞서 취재진에게 “전쟁이 오랫동안 계속될 수도 있다”고 한 발언이 이를 잘 보여준다. 스톨텐베르그 사무총장은 이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심을 버렸다는 징후는 없다”며 이같이 지적했다. 그는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하고 이것(전쟁)이 오랫동안, 수개월, 심지어 몇 년간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톨텐베르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과 러시아에 대한 제재 유지, 그리고 나토 회원국의 방위 강화 등을 비롯한 장기전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의 발언은 이번 전쟁이 얼마나 난마처럼 얽힌 요소로 가득 차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나토도 새로운 위상과 목적, 갈 길을 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2022.04.09 18:00

8분 소요
러시아 가스 차단 위협에 EU ‘에너지 공동구매’ 대응 나서

국제 경제

러시아의 에너지 위협에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이 공동 대응에 나섰다.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을 줄이고 에너지 가격 급등에 대응하기 위해 가스·수소·액화천연가스를 공동으로 구매·비축하는데 합의했다. EU 비회원국인 우크라이나·조지아·몰도바도 공동구매에 참여할 수 있게 문호를 열었다. 이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경고이자 유럽의 단합을 과시하기 위한 차원으로 풀이된다. 다만 실행으로 옮기기까진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유럽에 공급되는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전면 금지하거나 에너지 가격 상한제를 도입하는 등 세부 실행방안에 대해선 유럽 회원국들간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 26일 뉴욕타임스·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25일(현지 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주요 7개국(G7) 정상,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등이 참석한 EU 정상회의에서 각국은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을 줄이는 방안을 두고 토론을 벌였다. 각국은 이 자리에서 에너지 공동 구매·비축엔 대의엔 도달했다. 회원국들의 에너지 구매 수요를 취합해 공동구매하는 협상 역할은 EU 집행위원회(EC)가 맡기로 결정했다. 당장은 다가올 겨울에 부족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공급 가스 비축에 힘을 모으기로 결의했다. EU 집행위는 가스 저장량을 현 25%에서 11월까지 80%, 내년까지 90%로 채우기로 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EU 회원국끼리 경쟁 입찰하지 않고 수요를 취합 공동 대응해 가격 협상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미국도 힘을 보태기로 했다. 미국은 유럽에 올 연말까지 액화천연가스(LNG) 150억㎥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EU는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 감축을 실행할 세부 방안에선 회원국들간의 이해관계가 엇갈려 합의까지 도달하진 못했다. 러시아는 전체 유럽 가스 공급의 40%를 차지하고 있는데, 회원국별로 사용하는 에너지 종류와 사용 비중이 천차만별이어서 의견을 일치시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스페인·이탈리아는 “에너지 가격 상한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네덜란드·독일은 “에너지 시장을 왜곡시켜 러시아 에너지 기업들만 이득을 챙길 것”이라며 반대한다. 동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 전면 중단”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독일·헝가리·오스트리아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유럽 가스 가격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EU는 에너지 공급처를 다변화하고 러시아산 수입을 줄이겠다는 계획이지만 대체 공급처를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 EU 집행위는 미국·나이지리아·아제르바이잔·이집트·카타르 등을 접촉하고 있으며 한국·일본 등에는 수입량 일부를 유럽으로 줄 수 있는지 등의 의향을 타진하고 있다. 박정식 기자 park.jeongsik@joongang.co.kr

2022.03.26 13:00

2분 소요
미국, 우크라이나 인근 동맹국에 전투기·헬기·보병 증강

국제 이슈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자 미국이 동유럽 지역에서 미군 전력 증강에 나섰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한 연설에서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진입을 ‘침공’으로 규정하고, 러시아와 인접한 발트3국(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의 방어와 전투준비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병력과 장비의 이동을 승인했다고 밝혔다. 바이든은 “러시아가 벨라루스에서 군대를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에 대한 응답”이라며 “발트해 동맹국을 강화하기 위해 유럽에 주둔 중인 미군과 장비의 추가적인 이동을 승인했다”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번 조치가 전적으로 방어적인 이동으로, 미국은 러시아와 싸울 의도가 없다”면서도 “미국은 동맹과 함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영토를 철저하게 방어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로이터 통신은 22일(현지 시간) 미국이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동유럽 지역에 F-35 전투기와 AH-64 아파치 공격 헬기를 추가로 배치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로이터 통신은 익명을 요구한 미국 국방부 고위 관리를 인용해 이날 조 바이든 대통령의 유럽 내 병력 재배치 계획에 따라 F-35 전투기 최대 8대가 나토의 동부 방면 작전 지역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발트해 지역에 보병 800명을 파견하기로 했으며, 아파치 헬기 32대를 발트해 지역과 폴란드에 추가로 배치할 계획이다. 이 국방부 관리는 동유럽 지역 병력 전진 배치와 관련해 “동맹국을 안심시키고 나토 회원국에 대한 잠재적인 공격을 억제하기 위한 조치”라며 “미국 본토에서 파견되는 새로운 병력은 없다”고 설명했다. 강필수 기자 kang.pilsoo@joongang.co.kr

2022.02.23 16:22

2분 소요
옛 영화 꿈꾸는 러시아...우크라이나는 생존 가능할까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러시아와 서방 진영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전 세계가 조마조마하다. 전쟁 위기가 고조되면서 글로벌 증권 시장은 요동치고 있다. 러시아가 12만7000명(우크라이나 주장)의 병력을 동원해 우크라이나 국경을 3면에서 포위하고 있어서다. ━ 푸틴, 친나치 반공 게릴라 역사로 우크라이나 압박 에너지와 곡물 시장도 불안해 할 수밖에 없다. 글로벌 통계사이트인 스태이티스타에 따르면 러시아는 2020년 기준 2375㎥의 가스(파이프라인 1971억㎥, 액화천연가스(LNG) 404억㎥)를 수출한 가스 수출 1위 국가다. 핵심 식량자원인 밀도 2020년 기준 러시아는 물량과 금액에서 세계 1위인 79억 달러어치를 수출해 세계 밀 수출 시장의 17.7%를 차지한다. 우크라이나도 세계시장의 8%인 36억 달러를 수출해 세계 5위의 밀 수출국이다. 우크라이나 사태에는 전쟁 위기의 고조와 미래의 지정학적 위기에 대한 불확실성이 동시에 작동한다. 이번 사태의 특징은 비가역성이다. 위기가 계속 확대해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번 사태로 우크라이나는 물론 미국과 서유럽, 그리고 나토 동맹은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대한 모든 희망을 버릴 수밖에 없다. 국경이 맞닿았다는 이유로 더는 가까운 나라로 남을 수가 없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상상을 초월하는 압박은 오랫동안 역사와 종교‧문화를 공유했고 언어적으로도 가까운 우크라이나의 민심을 완전히 잃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4130만 인구의 77.8%가 우크라이나인, 17.3%가 러시아인으로 자신의 종족을 규정한다. 종교적으로 국민의 67.3%가 동방정교(소속 교회는 다양함)를 믿고 있다. 러시아 인구 1억4500만 명 중 1.4%가 우크라이나인이며, 러시아 국민의 70%가 동방정교(소속 교회는 다양함)를 믿을 정도로 양국은 오랫동안 가까운 공동체였다. 언어도 우크라이나어는 벨라루스어와 더불어 러시아어와 부분적으로 상호이해 가능(별도로 배우지 않고도 일부 통하는 언어)하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에 대해 적개심‧증오심을 품게 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체념일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유럽연합(EU)에 개입하고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틀 안에서 안보를 보장받는 ‘서유럽’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염원이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는 소련 시절 모스크바의 박해를 받은 기억이 상당하다. 소련 건국 초기 볼가 강 홍수 등으로 러시아에 흉년이 들거나 산업화 자본을 위한 외환이 필요하자 소련 공산당은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의 식량을 대거 징발했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인들은 대기근을 두 차례나 겪어야 했다. 1921~22년 굶주림과 관련 질병으로 곡창인 우크라이나 등 소련 전역에서 500만여 명이 숨졌다. 심지어 1932~33년에는 우크라이나에서만 250만~35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는 ‘기근을 통한 민족 절멸’이라는 뜻의 ‘홀로도모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특히 이오시프 스탈린이 산업 대도약을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곡물을 대거 징발해 외국에 수출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공산당에 대해 원한을 가질 수밖에 없는 역사적 비극이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우크라이나에선 제2차 세계대전 중 민족주의자들을 주축으로 친나치 반공 게릴라가 활동했다. 이들은 심지어 종전 뒤에도 우크라이나 서부를 중심으로 1950년대 초까지 공산체제에 저항하는 무장투쟁을 벌였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런 역사적 기억을 잊지 않고 우크라이나를 비난해왔다. 폴란드 남부에 있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가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에 해방된 지 75주년을 맞은 2015년 1월 푸틴 대통령은 추모 연설에서 과거사와 관련한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폈다. 푸틴은 “우리는 유대인 600만 명이 포함된 모든 희생자를 애도한다”면서 “죽음의 수용소들은 나치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나치 충복들이 운영했다”라고 말했다. 푸틴의 발언은 누가 봐도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일부 민족주의자를 노린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1월 27일은 유엔은 2005년 11월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로 지정한 날이다. 폴란드 정부는 1947년 수용소 자리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박물관을 세워 역사 교육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푸틴은 최근 폴란드가 제2차 세계대전 직전 나치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분할을 묵인해 재앙을 초래했다고 주장해 폴란드의 반발을 불러왔다. 폴란드는 1938년 나치가 분할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일부 영토를 병합했다.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 분할은 나치의 아돌프 히틀러가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 프랑스의 에두아르델라디에 총리,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가 함께 1938년 9월 서명한 뮌헨협정에 따른 것이다. 2차 대전 발발은 영국과 프랑스가 체코슬로바키아를 독일에 사실상 넘겼기 때문에 발생한 비극이다. 폴란드는 1939년 나치와 소련의 동서 협공을 받아 나라 전체가 점령되는 참극을 겪었던 전쟁의 피해자다. 나치와 함께 소련도 폴란드의 비극을 만든 주연이다. 푸틴의 발언은 과거 공산권이었다가 현재는 나토와 유럽연합(EU) 회원국으로 변신해 러시아 견제에 나서고 있는 폴란드를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푸틴의 발언에는 서방에 접근하면서 러시아와 사이가 벌어지고 분쟁까지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비난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푸틴은 이를 통해 2차대전 발발에서 나치와 함께 전범의 책임이 있는 소련을 옹호하는 ‘역사수정주의’를 주장한 셈이다. 여기에 맞춰 현재 서구와 손을 잡고 있거나 잡으려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 책임을 돌림으로써 러시아의 이들 동유럽권에 대한 압박과 영향력 확대를 정당화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러시아 중심의 옛 소련의 과오를 옹호하고 현재 친서방 동유럽 국가를 싸잡아 비난하려는 역사 왜곡의 무기화로 풀이할 수 있다. 푸틴이 최근 우크라이나에 대한 상상을 초월하는 압박의 먼 원인일 수 있다. ━ 러시아 군사력 앞에 작아지는 우크라이나 안보 그렇다면 러시아는 나토가 주시하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점령하거나 항복을 받을 수 있는 군사력을 확보하고 있는가?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가 매년 펴내는 밀리터리 밸런스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육군(28만)·해군(15만)·공군(16만5000)과 함께 전략미사일군(8만)·공수군(4만5000)까지 기본 5군 체제를 유지한다. 이와 함께 해상항공(3만1000)·해병대(3만5000)와 국경경비대 등을 합쳐 90만 병력을 유지한다. 거기에 러시아는 1만2000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4650개를 실전 배치해 9600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이 중 2468개를 실전 배치한 미국보다 더 많은 핵탄두를 배치한 핵보유국이다. 나아가 핵무기를 운반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까지 다양한 전략무기를 보유, 운용하고 있다. 거기에 세계적 수준의 s-300이나 s-400 등 방공미사일과 미그-29, 수호이 Su-27 등 최첨단 전투기도 다량 운용하고 있다. 육상에서는 전차·장갑차·자주포를 풍부하게 갖춘 강력한 기동군을 운용한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의 세 차례에 걸친 개혁으로 군을 현장 중심의 합리적인 조직으로 탈바꿈시켰다. 러시아 군사력은 우크라이나는 물론 나토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여기에 비해 우크라이나는 육군 14만5000명, 해군 1만1000명, 공군 4500명, 공수군 3000명, 특수작전군 등 20만9000명의 현역 병력을 보유한다. 여기에 10만2000명의 민병대가 있다. 우크라이나는 소련 붕괴 뒤 일시 핵무기를 보유했지만 1994년 미국과 영국, 그리고 러시아가 부다페스트 안보보장 각서에 서명하면서 핵탄두와 운반 수단을 포기하고 서방과 러시아로부터 안보를 보장 받았다. 핵무기는 해체되고 초음속 전략 폭격기인 Tu-160 같은 고가의 첨단 무기를 절단해 고철로 처리했다. 하지만 현재 푸틴의 강력한 압박 속에 우크라이나는 국제조약의 무의미함과 무가치함, 국제 정세의 가변성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북한이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며 교훈을 얻으며 새롭게 각오를 다질 수 있다. 올해 들어 부쩍 잦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자극받아 미국과 한국을 향해 믿을 것은 핵과 미사일뿐이라며 무력시위를 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는 이유다. ━ 푸틴 의중 읽고 사태 해결 실마리 찾아야하는 바이든 러시아가 표면적으로 내세운 우크라이나 압박 이유는 나토의 동진이다. 우크라이나는 나토와 EU 가입을 원한다. 러시아의 입김에서 벗어나 서구의 일원으로 보호받고, 경제적으로도 번영하고 싶어 한다. 번영이라기보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표현이 더욱 적합할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의 명목 금액 기준 2021년 전망치로 우크라이나의 국내총생산(GDP)은 1810억 달러로 세계 55위다. 1인당 GDP는 4384달러에 불과하다. 러시아의 절반 정도다. 항공기를 제작하고 다양한 무기를 만드는 국가이지만 경제적으로는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러시아가 레드라인으로 잡고 있다. 나토는 냉전 시대 북미와 서유럽의 군사동맹으로 소련 중심의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대항했다. 그런 나토는 1991년 소련이 무너지고 바르샤바 동맹이 사라졌음에도 조직을 유지했다. 민주주의‧시장경제 가치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존속해왔다. 나토는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동유럽은 물론 소련에서 독립한 비러시아 국가를 향해 동진에 나섰다. 냉전 당시 소련 주도의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이던 체코·헝가리·폴란드가 1999년에 가입한 것이 시작이었다. 2004년에는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인 불가리아·루마니아·슬로바키아와 옛 유고슬라비아에서 분리한 슬로베니아는 물론 1940년 옛 소련에 점령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이뤘던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까지 가입했다. 러시아로선 기가 찰 노릇이었을 것이다. 나토 회원국과 바로 국경을 맞대게 됐기 때문이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와는 러시아의 역외영토(본토와 육상으로 이어지지 않은 영토)인 칼리닌그라드(옛 독일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로 2차 세계대전 뒤 소련이 합병)와 접경하게 됐다. 에스토니아·라트비아와는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됐다. 러시아 제2도시로 푸틴의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가까운 지역이다. 러시아의 공식 요구는 나토가 우크라이나를 포함해 더는 동진하지 않는다는 문서 보장이다. 문제는 문서 보장이 힘 앞에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러시아가 손수 증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크라이나가 핵을 포기했던 1994년의 부다페스트 안전보장 각서는 한 사례에 불과하다. 옛 소련이 1939년 8월 23일 나치 독일과 맺은 독‧소 불가침 조약(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은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 침공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을 시작하면서 휴지조각이 됐다. 독소전으로 소련은 국토 서부가 초토화한 것은 물론 2000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피를 흘렸다. 이 과정에서 모스크바와 소련 서부 국경의 중간에 있는 우크라이나는 독일 침공과 소련 반격에서 모두 피의 전쟁터가 됐다. 우크라이나가 현재 러시아로부터 등에 비수가 찔린 것이나, 옛 소련이 나치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은 문서 보장은 국제정치적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휴지가 될 수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러시아는 왜 문서 보장에 집착하는 것일까. 푸틴과 러시아에 우크라이나 굴복이나 나토의 동진 저지가 아닌 다른 목적이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를 정확히 파악해 푸틴에게 거절할 수 없는 역제안을 하는 것이 미국과 서방 외교의 과제일 것이다. 문제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서방 동맹을 다독거려 러시아의 폭력을 저지할 능력이 있느냐는 점이다. 이번 사태로 바이든은 무기력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이런 바이든의 모습이야말로 푸틴이 가장 노린 것일지도 모른다.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2022.01.2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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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세기의 담판(23) 교훈이 된 레이캬비크 회담] 실패를 통해 나아가다

전문가 칼럼

레이건·고르바초프의 담판… 실패 원인 복기, 새 합의점 찾아 1983년 3월, 로널드 레이건 美 대통령은 복음주의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총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핵무기 동결을 논의하면서 우리는 자만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우월하다고 단언하고, 양측 모두 잘못이라고 규정하며, 악의 제국의 공격적인 충동과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군비경쟁을 거대한 착오라 부르면서 정의와 불의, 선과 악의 투쟁을 외면하는 그런 자만 말입니다.”아무리 적대국이라고 해도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는 것은 그때껏 어느 미국 대통령도 해본 적 없는 극단적인 발언이다. 더욱이 2주 후, 레이건은 전략방위계획(Strategic Defense Initiative, SDI)을 발표했다. 소련의 탄도미사일(ICBM)을 방어하기 위해 인공위성으로 실시간 감시하고, 레이저를 활용해 요격한다는 구상이다. 우주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영화 이름을 따서 ‘별들의 전쟁(스타워즈)’ 계획이라고도 불렸다.SDI는 소련을 크게 긴장시켰는데, 그동안 애써 구축한 핵 전력이 무력화될 뿐 아니라 SDI가 공격무기로 전환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경제난을 겪던 소련으로서는 그에 대응할 체제를 갖출 수 없었던 터라,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 서로의 마지노선 파악 후 조율 집중 그러던 와중에 소련의 리더가 교체됐다.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장이 사망했고, 뒤이어 집권한 안드로포프 서기장이 1984년 2월에 병사했다. 후계자인 체르넨코 서기장도 1985년 3월, 눈을 감는다. 해마다 최고권력자가 교체되는 혼란 속에서 새로 서기장에 오른 사람이 바로 미하일 고르바초프다. 소련이 건국된 이후 태어난 최초의 서기장으로, 전임 서기장들에 비해 훨씬 젊은 나이였다.고르바초프는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소련의 위기를 타개하고, 국가를 일신하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Перестройка, 개혁)’와 ‘글라스노스트(Гласность, 개방)’를 내세웠다. 공산주의 경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부패한 관료제를 개혁하며, 정보의 자유를 추구한 정책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재원이 필요했는데, 미국과의 체제경쟁을 위해 과도하게 지출하고 있는 군비를 절감하고 평화를 구축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고르바초프가 집권하자마자 동유럽에 SS-20 미사일 배치를 중단하고, 6개월간 핵실험을 중지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그래서다. 외무장관도 개혁파인 셰바르드나제로 교체했다. 미국과의 협상에 나서기 위해서였다.대소 강경파이자 ‘힘을 통한 평화’를 강조해 온 레이건은 처음에는 고르바초프가 보내는 신호를 믿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의 상투적인 기만, 선전 전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85년 11월 1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양국 정상이 만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제네바회담은 일종의 탐색전이었다. 어떠한 합의도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회담이 성사되기까지 레이건과 고르바초프가 주고받은 수많은 편지, 실무진의 노력은 양국이 상호신뢰를 구축하는 데 이바지했다. 오랫동안 등을 졌던 두 나라 정상이 만나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주고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 그리하여 1986년 10월 11일, 두 정상은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에서 두 번째로 만났다.제네바회담이 만남 그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면, 이제 레이캬비크에서는 어떻게든 생산적인 결론을 도출해야 했다. 처음에는 희망적이었다. 유럽에서 중장거리핵무기(INF)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즉시 제거하고, 5년 안에 전략무기 50%를 감축하며, 다시 5년 안에 100%를 제거하자고 의견이 모였다. 레이건이 “10년 뒤, 마지막 미사일을 제거한 후에 이곳에 와서 다시 축배를 듭시다”라고 말할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다.그런데 SDI에 대한 양국의 견해 차이가 담판을 가로막는다. 고르바초프는 SDI가 공격용으로 전용될 수 있고, 우주에서의 핵무기 경쟁을 촉발할 것이라며 향후 10년간 ‘실험실 수준으로 제한’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레이건은 SDI는 순수하게 방어목적이라며, 의심스럽다면 연구결과를 소련과 공유하겠다고 설득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렇게 고르바초프는 SDI의 포기를 요구하고, 레이건은 SDI를 포기할 수 없다고 고집하면서 결국 회담은 무위로 돌아갔다. 소련의 외무장관 셰바르드나제가 “훗날 후손들이 우리가 이런 기회를 그냥 흘려보낸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사실 SDI는 이렇게 논란이 될 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SDI는 미국 내에서도 부정적인 목소리가 컸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요될 뿐 아니라 기술적으로 과연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의견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건이 SDI를 고집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SDI를 통해 자유진영의 시민을 핵미사일로부터 방어한다”는 명분(회담 직후 레이건이 나토 기지에서 한 발언), 그리고 소련과의 군비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다. 기존의 틀을 무너뜨리고 게임의 룰을 미국이 정하겠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이러한 미국의 의도에 넘어가지 않기 위하여 SDI 포기를 주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그런데 레이캬비크 회담은 실패로 끝났지만, 영원히 실패로 기록된 것은 아니었다. 1987년 12월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워싱턴에서 ‘중거리핵전력조약(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 Treaty, INF)’을 체결했는데, 양측 모두 레이캬비크 회담이 돌파구가 되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서로의 마지노선을 알았기 때문에, 즉 SDI가 문제 해결을 위한 전제라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에, 이 사안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 상충 안건 연계치 않고 새 합의점 찾아 레이건은 고르바초프와 꾸준히 소통하며 의견을 조율했고, 고르바초프도 군축 논의에서 더는 SDI를 연계하지 않았다.(고르바초프는 소련의 핵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 등의 조언을 받아 SDI의 허점을 면밀하게 파악하고, 양보해도 괜찮겠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양국은 핵탄두 장착용 중·단거리 미사일 폐기에 합의했고, 4년 후에는 ‘전략무기감축협정’까지 체결할 수 있었다.레이캬비크 회담이 무산되었을 당시, 미국 백악관은 “99야드를 날아올랐지만 1야드를 날지 못해 추락했다”고 논평했다. 고르바초프는 “(비록 실패했지만) 우리는 처음으로 수평선을 보았다”라고 밝혔다. 담판이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패하게 된 원인을 잘 복기하고, 계속 대화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 실패를 전환점으로 삼아 새로운 합의점을 찾아갈 수 있다. 99야드를 날아봤기 때문에 다음 기회에는 마지막 1야드에 집중하면 되는 것이고, 처음 바라본 수평선을 믿고 계속 날아가면 되는 것이다.※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등이 있다.

2020.05.17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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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주년 나토의 미래] 70주년 회의 곳곳서 파열음… 집단안보 뒤에서 갈등만 키워

산업 일반

미국 방위비 더 내라며 회원국 압박… 프랑스 대통령 “나토는 뇌사 상태” 미국과 유럽의 집단안보체제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28개 회원국 정상이 12월 3~4일 영국 런던에서 연 창설 70주년 회의는 역사적인 회합이다. 70년이나 지속한 동맹은 서계사에서 보기 드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당위성이 그랬을 뿐 70주년 회의는 실제로는 분위기가 전에 없이 싸늘했다. 이번 정상회의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냉전이 막을 내린 지 30년이 된 현재 나토가 겪고 있는 정체성 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더욱 세계화하고 다극화한 ‘글로벌 세상’이라는 환경 변화 속에서 동맹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집단안보체제의 미래를 살펴보는 계기이기도 하다.정상회담이 끝난 4일 나토 회원국 수뇌들은 ‘대서양 동맹’의 유대가 계속될 것임을 재확인하는 공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대서양 동맹은 나토를 통한 미국과 유럽 간의 군사동맹을 가리키는 말로 시작해 냉전 이후에는 가치·경제·문화 협력까지 의미가 확대했다. 올해 공동 선언문에서 눈여겨볼 점은 “중국의 커가는 영향력은 나토가 대처할 필요가 있는 기회이면서 동시에 도전”이라는 문구가 새로 추가됐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군사대국 부상에 나토 차원에서 공동 대응하기로 천명한 것은 처음이다.냉전 초기 소련을 가상 적국으로 출발했던 나토가 창설 70년 만에 중국을 적국으로 인식한 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냉전은 끝났지만 앞으로 중국과 나토 간에 신냉전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공식화한 셈이다. 나토는 중국의 위협을 인식하는 한편 러시아와 테러세력의 위협에도 계속 대처하겠다고 천명했지만, 무게 중심은 중국으로 쏠렸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앞서 12월 3일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기자들과 만나 “중국의 군사대국 부상이 나토 안보에 주는 영향력에 대응해야 한다”며 “중국은 세계에서 둘째로 많은 군사비를 지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중국은 최근 미국과 유럽까지 도달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했다”며 “중국의 영향력이 나토 영역인 북미와 유럽에까지 미치고 있다”고 강조했다. ━ 중국 부상하자 나토 “공동 대응” 스톨텐베르크 사무총장은 특히 “중국이 유럽의 사회기반시설과 사이버 공간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고 북극과 아프리카에서 우리에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다. 나토의 안보 이익과 관련이 있는 인프라와 지역 투자에 대응할 수 있음을 시사한 발언으로 볼 수 있다. 나토가 중국과 안보 문제를 두고 본격적으로 충돌하고 견제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셈이다. 그럼에도 최근 미국이 중국 통신장비업체인 화웨이 기기와 관련해 안보를 이유로 사용을 금지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나토 회원국인 독일과 프랑스는 미국과 다른 입장을 보였다. 이탈리아는 중국의 일대일로에 협력해 항구 개발 등에 공동으로 투자하기로 했다. 명백한 군사적 조치나 압박에 대한 대응이 아니라면 국가 간 이익에 다라 해석이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나토 차원의 대중 대처가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은 근래 인터넷이나 정보통신, 항만, 공항, 에너지 등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따라서 나토의 공동 선언이 공허한 말잔치에 그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게다가 이번 나토 정상회담은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겼다. 이견과 분열, 갈등과 반목이다. 이틀에 걸친 일정을 마친 나토 회원국 정상들이 ‘대서양 동맹’의 유대가 계속될 것임을 재확인하는 공동 선언문을 발표하며 중국의 부상에도 공동 대응하기로 했음에도 이는 표면적일 뿐 이면의 공기나 온도는 사뭇 달랐다. 이번 정상회의는 사실 분열을 보여주는 파열음이 곳곳에서 요란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나토를 보는 트럼프의 싸늘한 눈초리와 동맹 앞에 비용만 따지는 ‘가치착오’적인 발언이다. 이러한 회담 결과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트럼프 대통령의 귀국 뒤 발언이다. 런던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를 마치고 워싱턴에 돌아온 트럼프 대통령은 12월 5일 백악관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관계자들과 오찬을 함께 하면서 “나토에 충분히 기여하지 않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무역에 관한 조처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트럼프는 또 “많은 나라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2%’라는 국방 지출 기준에 접근하고 있다”면서도 “일부는 이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으며 부담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고 누구든 이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토 70주년 정상회담의 핵심이 국방 지출 부담 압박임을 자인한 셈이다. 트럼프는 그러면서 “우리는 무역과 관련 있는 일을 할지 모른다”며 국방 지출과 무역 문제를 연계할 뜻을 비쳤다. 로이터 통신은 “트럼프가 나토 국방 지출 인상에 박차를 가하려고 무역 관련 조치를 취하겠다고 압박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국방 지출 인상 압박을 위해 동맹국에 무역 보복이나 제재를 가하겠다는 ‘살벌한’ 발언을 대놓고 한 셈이다. 트럼프는 “그들이 미국의 보호를 받으면서 그들의 돈을 내놓지 않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해 동맹관계가 보호비를 지불하고 보호를 받는 관계라는 인식을 드러냈다. 동맹국들이 경악해 하고 우려할 수밖에 없는 발언이다.사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나토 무임승차론’을 제기하며 유럽 회원국들에게 국방 지출 증액을 압박하면서 계속 갈등을 겪어왔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이 나토 회원국은 GDP의 2%를 국방비로 지출한다는 가이드라인이다. 이는 사실상 유명무실한 상태다. 2018년 이를 충족한 회원국은 미국(3.39%), 그리스(2.22%), 영국(2.15%), 에스토니아(2.07%), 폴란드(2.05%), 라트비아(2.03%), 리투아니아(2.0%)의 7개국 뿐이다. 나머지는 가이드라인을 지키지 않았다. 경제 규모가 큰 주요 회원국인 프랑스(1.82%), 터키(1.64%) 독일(1.23%) 이탈리아(1.15%)도 마찬가지다. 스페인(0.93%), 벨기에(0.93%), 룩셈부르크(0.54%)는 가이드라인의 절반인 1%도 되지 않는다. 회원국인 아이슬란드는 군대 없이 해안경비대만 운용한다. ━ 트럼프 “동맹국은 보호를 내라” 이번 정상회의에서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나토 회원국의 국방 지출이 증가세에 있다고 강조했다. 스톨텐베르크 사무총장은 정상회의를 앞두고 25억 달러의 나토 운영비 분담금도 조정해 미국 몫을 줄여 트럼프를 무마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트럼프는 이번 정상회의에서도 국방 지출 증액을 대놓고 압박했다. 이에 나토 유럽 회원국들은 2024년까지 국방비 지출을 GDP의 2% 수준으로 늘리기로 했지만, 트럼프는 4%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하지만 미국을 포함한 나토 회원국 중에서 국방비를 GDP 4% 수준으로 지출하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사실 나토는 실질적으로 미국이 주도해왔다. 나토 통계에 따르면 나토 회원국 29개국의 2018년 국방비 1조134억 달러 가운데 미국이 7060억 달러로 가장 많다. 미국이 나토 전체 군사비의 69.67%를 차지하는 것이다. 나머지 회원국을 모두 합쳐도 전체 국방비 지출의 30%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영국이 615억 달러, 프랑스 520억 달러, 독일 510억 달러, 이탈리아 257억 달러, 스페인 138억 달러, 그리스 50억 달러 수준이다.이를 바탕으로 트럼프는 미국이 너무 많은 돈을 부담한다고 볼멘소리를 하지만 사실 여기에 나토의 정체성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나토의 근원을 따져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1949년 4월 4일 체결된 북대서양조약으로 창설된 나토는 냉전시기(1946~1991년) 서방 군사동맹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북대서양조약은 미국이 주도해 영국·프랑스·네덜란드·이탈리아·벨기에·룩셈부르크·노르웨이·덴마크·아이슬란드·포르투갈 등 서유럽 국가와 북미의 캐나다가 미국 워싱턴에서 체결한 집단안전보장 조약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리스에서 친서방인 정부군과 공산당의 군사조직인 민주군이 1946~49년 치열한 내전을 벌이면서 냉전이 격화하자 서방 세계의 결속을 위해 체결된 조약이다. 조약 제5조는 “회원국에 대한 무력행사를 회원국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개별적·집단적 자위권을 발동하고 상호 원조를 한다”고 규정했다. 그 유명한 집단 안보 규정이다. 미국과 함께 소련에 대응한다면 미국이 방위를 책임지겠다는 이야기다. 서유럽권을 미국의 영향력 아래 묶어 소련에 대응한다는 미국의 필요성에 의해 시작된 것이 나토 동맹이라는 이야기다. 여기에 나토의 본질이 담겼다. 서유럽 국가들의 소련에 대한 두려움이 이들의 나토 참여 결정을 이끌어냈다. 냉전 붕괴 뒤 중유럽과 동유럽 국가는 물론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옛 소련권 발트 국가까지 나토에 가입한 이유다. 북대서양조약기구를 창설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을 시작으로 역대 미국 대통령은 나토 정상회의에서 이 집단안보 규정을 확인하는 연설을 하는 것이 관례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거부해왔다. 냉전 균열 이후 가치 동맹, 테러와의 전쟁 등 다양한 명분을 개발하며 존재해온 나토는 이렇게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유럽의 나토 회원국과 트럼프는 국방 지출 외에도 여러 분야에서 갈등을 빚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미군의 시리아 동북부 철수 결정과 그 뒤 이어진 또 다른 나토 회원국 터키의 해당 지역 쿠르드족에 대한 군사 공격이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최근 영국 이코노미스트와 인터뷰에서 이런 일련의 사태와 함께 미국과 나토의 유럽 동맹국 사이의 갈등과 미국의 리더십 부재, 터키의 예측 불가능성을 지적하면서 “나토가 뇌사 상태”라고 대놓고 비난했다. 그러자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 트럼프는 그의 발언을 즉각 바난했다. 이런 일련의 사태는 나토 내부의 균열을 촉진했다.나토 정상회의에서 만난 트럼프와 마크롱은 ‘나토 뇌사’ 발언은 물론 나토의 장래 역할, 터키의 위상,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 쿠르드족 문제 등을 둘러싸고도 대립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마크롱 대통령과 회견한 뒤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함께 좋은 일을 많이 했다”고 말했지만 마크롱은 나토는 뇌사상태라고 했던 발언에 대해 “철회하지 않겠다”며 물러나지 않았다. 이번 정상회의에서 균열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순간이다. 희극도 있었다. 12월 3일 버킹엄 궁에서 열렸던 나노 70주년 정상회의 환영 행사장에서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마크롱 대통령,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등과 대화를 나누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회견으로 40분간 늦었다는 내용 등으로 그를 놀리는 듯 한 발언이 희미하게 들리는 동영상이 4일 공개되면서 분위기는 더욱 나빠졌다. 트럼프는 트뤼도 총리를 가리켜 “위선적인 사람(two faced)”이라고 비난하고, 트위터를 통해 정상회의 뒤 예정됐던 기자회견을 갑자기 취소하고 워싱턴으로 돌아갔다. 백악관에서 무역을 이용해 압박하겠다는 발언은 그 직후에 나왔다.정상회의에선 마크롱과 에르도안의 갈등도 계속돼 마크롱은 정상회의를 마친 뒤 쿠르드 민병대를 테러 단체로 볼 것이냐의 문제를 두고 터키와 견해차를 좁히지 못했다고 말했다. 시리아의 극단주의 테러 단체인 이슬람국가(IS)을 시리아에서 몰아내는 과정에서 서방 동맹국들에 협조해온 쿠르드 민병대를 나토의 회원국인 터키가 공격한 이후 서방국가들과 터키는 극심한 갈등을 빚어왔다. 이번 정상회의는 그 갈등이 쉽게 해결될 수 없음을 재확인한 행사였다. 사실 이번 정상회의는 냉전으로 시작된 나토 체제의 미래를 가늠해보는 중요한 행사였다. 대서양 동맹은 미국이 1948년 유럽 동맹국들의 전후 재건·원조 프로그램인 마셜플랜(유럽부흥계획)과 함께 서방 세계의 결속을 다진 핵심 정책이었다. ━ 미국, 나토 전체 군사비 69% 이상 차지 미국은 1948년 4월 3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서명으로 발효한 해외원조법을 바탕으로 4년 동안 서유럽에 130억 달러(2016년 가격으로 1300억 달러에 해당)를 지원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확립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 대상이었다. 미국은 경제는 마셜플랜, 정치와 국방은 나토 체제를 앞세워 서방세계의 맹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냉전 이후 나토는 단순한 안보 동맹에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서구의 가치를 공유하는 ‘가치동맹’으로 발전했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이번 정상회의는 나토가 가치동맹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불화를 뒤에 숨긴 채 갈등의 불씨만 키워왔음을 보여준다.그동안 물밑에선 새로운 글로벌 시대에 나토라는 집단안보 체제가 얼마나 유익한지에 대한 지적이 계속됐다. 트럼프의 거친 대응은 이를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중국과 대결을 선언한 나토는 당장의 균열부터 해결해야 할 처지다. 나토는 계속 존재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의문도 있다. 내년에 대통령 선거를 치러야 할 트럼프는 국제관계를 이렇게 허물어 놓고도 미국 대통령으로 재선될 수 있을까? 재선된 트럼프는 세계를 어떻게 뒤흔들까? 주한민군 분담금 협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의문은 끝이 없다. 하나 같이 불길한 예감이 드는 질문이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데 말이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2019.12.08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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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옛 동독 지역 경제력, 여전히 서독 지역의 75%에 머물러

국제 이슈

동독 지역 주민 57% “2등 시민이라 느껴”… 경제적 격차 독일 정치의 핵심 과제 11월 9일로 1989년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가 30주년을 맞았다. 동유럽 공산체제의 종말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 뒤 동독은 개별 주가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 각각 가입하면서 해체되고, 독일은 1990년 10월 3일 재통일(Wiedervereinigung)을 이뤘다. 1871년 프로이센 왕국 주도로 오스트리아를 뺀 나머지 독일어 사용 지역이 하나의 나라로 통일(Einigung)됐던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자유진영의 서독과 공산진영의 동독으로 분단됐다가 재통일됐다. 베를린 장벽 붕괴는 1985년 3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이 벌인 개혁개방 정책이 동력을 제공했다. 고르바초프는 공산주의 계획경제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경제개혁 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와 정치 부문의 개방정책인 글라스노스트를 시행했다. 개혁의 물결은 동독을 비롯한 동유럽 공산국가에도 일었다.그 시작은 1989년 8월 19일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인 쇼프론에서 헝가리인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벌인 평화시위였다. ‘범유럽 피크닉’으로 불린 이 시위는 당시 서독 망명을 요구한 동독인 1000여 명이 시위에 참석했다가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넘어갔다. 그 뒤 9월 25일 동독 라이프치히에서 시민들이 시위를 시작했으며 10월 9일 매주 열리는 월요시위로 이어졌다. 결국 10월 18일 동독의 최고지도자 에리히 호네커가 물러났지만 시위는 잦아들지 않았다. 월요 시위에선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라는 구호가 등장해 시위의 상징이 되었다. 베를린 시위에선 ‘우리는 하나의 국민이다(Wir sind ein Volk)’라는 구호도 등장해 통일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11월 3일 베를린에서 100만 명이 시위를 벌였고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독일인들은 자유롭게 동독과 서독을 넘나들게 됐다. 결국 동독은 1990년 3월 18일 처음으로 자유선거를 실시했으며 집권당인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은 공산주의 일당독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동독지역, 극우·극좌 세력 떨쳐 통일을 위해 남은 과제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들로부터 통일 독일의 영토·외교·군사적 지위를 인정받는 일이었다. 독일은 1945년 5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뒤 유럽전선 승전국인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됐다. 소련 점령지 한 가운데에 있는 수도 베를린도 4개국이 분할했다. 그 뒤 1949년 미국·영국·프랑스 점령지역에는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수립돼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추구했으며, 소련 점령지역에는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세워져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와 공산주의 일당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독일의 분단이다. 베를린도 동·서 베를린으로 분할했다. 동독은 1961년 동·서 베를린을 가로지르는 베를린 장벽을 설치해 주민들의 통행을 막았다. 베를린 장벽은 분단의 상징으로 남았다. 서독은 1955년 미국 주도의 집단방어체제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가입해 서방 군사동맹의 한 축을 이뤘다. 동독은 1955년 소련 주도의 군사동맹 체제인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회원국이 됐다.이런 배경이 있는 독일이 재통일을 하려면 동·서독간 합의는 물론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불만을 잠재워야 했다. 그래서 6개국은 1990년 5월 5일에서부터 1990년 9월 12일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2+4 회담을 했으며 그 결과 9월 12일 최종합의 문서인 ‘2+4 조약’에 서명했다. 그 결과 통일 독일은 1991년 3월 15일 이후 국가 주권을 완전히 회복하고, 자신들의 동맹을 독자적으로 결정할 권리를 얻게 됐다. 통일 독일은 나토 동맹의 일원이 됐다. 동독과 동베를린에 주둔한 소련군을 서독 정부의 비용 부담으로 전원 철수하기로 했으며 1994년 이를 완료했다. 서베를린에 남아있던 나토군도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떠났다. 2+4 조약으로 통일 독일군은 병력이 37만 명 이하로 제한됐으며 화생방 무기의 생산과 사용이 금지됐다.특히 옛 동독 지역에는 외국 군대의 주둔이 금지됐으며 핵무기와 핵탄두를 실을 수 있는 무기의 배치가 금지됐다. 나중에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가 국력을 회복한 뒤 러시아 일각에서는 소련군의 동독 지역 철수는 나토의 동진을 허용한 실수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실제로 나토는 옛 동독 지역은 물론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동유럽 전역과 옛 소련에서 독립한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까지 나토에 가입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베를린 장벽은 세계의 질서를 바꾼 대전환의 시발점이었다. 문제는 이렇게 통일된 독일의 옛 동독 지역에서 지금은 극좌와 극우가 세력을 떨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10월 27일 옛 동독 지역인 튀링겐 주에서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옛 공산당 계열의 좌파당이 득표율 29.7%로 1위, 극우 성향의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23.8%로 2위를 각각 차지했다.연방의회의 집권당으로 2014년 이 지역 지방선거에서 2위를 차지했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소속한 기독민주당(CDU)은 지난 2014년 선거보다 11%포인트 떨어진 22.5%의 득표율로 3위로 떨어졌다. 지금까지 튀링겐 주는 좌파당이 사민당·녹색당 등과 대연정을 이뤄왔는데 중도 좌파인 사회민주당은 8.5%, 녹색당은 5.4%, 자유민주당은 5.0%를 각각 득표해 기존 정당의 연합으로는 연정을 구성할 수 없게 됐다. AfD는 지난 9월 옛 동독 지역인 작센 주와 브란덴부르크 주 선거에 이어 튀링겐 주에서 2위를 차지하며 확장세를 이어갔다. AfD의 확산에 배경에는 독일 전체를 휩쓸어온 반난민·반이슬람 정서와 함께 옛 동독지역이 독일 내에서 ‘2등 시민’으로 대접 받는다는 불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옛 작센 왕국의 수도로 옛 동독 지역의 대표적인 경제·문화 도시인 드레스덴은 지금 반난민·반이슬람 운동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서구의 이슬람화에 반대하는 애국적 유럽인들(PEGIDA)’라는 이름의 극우파 조직도 드레스덴에서 시작됐다. PEGIDA는 지난해 작센 주의 공업도시인 켐니츠에서 폭력 시위를 일으키기도 했다. 켐니츠는 동독 시절 공산주의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 카를마르크스슈타트로 불렸다. 마르크스의 고향은 독일 서부 트리어지만 동독 공산정권은 그의 이름을 딴 도시가 동독에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비슷한 인구의 켐니츠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도시 한복판에는 마르크스의 거대한 두상을 설치해 지금도 있다. 주민들은 통일독일 직전인 1990년 6월 공산당 정권의 통제가 느슨해지자 주민투표를 통해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통독 이후 전통적인 기계산업 도시의 영광도 되찾아가고 있지만 옛 서독 지역만큼의 활기를 유지하지는 못한다. ━ 문화적으로는 빠르게 통합 갑자기 찾아온 통일이었지만 사실 동·서독은 문화적으로는 의외로 빠르게 통합을 이뤘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어본 적이 없었기에 상호 증오 심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분단 시절에도 동독 주민들은 서독의 텔레비전을 볼 수 있었다. 이는 문화적인 이질화를 막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공산 체제에 지나친 자신감이 있었던 동독 당국은 주민들이 서독 방송을 보면 자본주의의 모순을 목격하게 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결과는 서독의 발달한 물질문명에 대한 동경만 낳았을 뿐이다. 주민들의 상호 왕래도 어느 정도 가능했다. 동독인은 국가의 허가를 얻으면 서독 지역을 여행할 수 있었고, 서독인은 동독 당국이 허용하면 동독을 방문하거나 머물 수도 있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서독의 목사인 아버지가 동독에서 생활한 경우다. 동독 당국은 서독의 반공인사 등을 골라내 방문을 불허하는 방법으로 정치적 압력을 가했다. 통일 뒤 문화적인 통합에는 문제가 없는 이유다.결국 문제는 경제적인 격차였다. 켐니츠에 있는 공산주의 창시자 마르크스의 동상 앞에서 극우 세력이 이민과 이슬람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것은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됐다. 유럽연합(EU) 내부에서 국경이 사라지면서 동유럽의 이민자가 옛 동독 지역으로 이주해 일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다반사가 됐다. 소득도 생각보다 늘지 않는 상황에서 실업자가 늘면서 극우정치가 만연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옛 동독 지역은 베를린장벽 붕괴 30년 뒤인 현재 옛 서독 지역과 비교해 생산성과 임금이 80% 수준에 머물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착시효과라는 주장이다. 옛 동독 지역의 생산성은 유럽 최고 수준인 옛 서독 지역보다는 낮지만 유럽 전체로 보면 상위권이기 때문이다.EU의 통계청인 유로스타가 올해 2월 26일 발표한 2017년 유럽 각국의 지역별 1인당 국내총생산(GDP) 통계가 이를 잘 말해준다. 이에 따르면 EU 평균 1인당 GDP는 3만 유로인데 독일은 3만9000유도다. 지역별로 보면 옛 서독지역인 함부르크(6만4700유로), 브레멘(4만9700유로), 바이에른(4만6100유로), 바덴뷔르템베르크(4만5200유로), 헤센(4만5000유로)이 4만 유로를 넘으면서 상위권을 형성했다. 반면 옛 동독지역인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2만6700유로), 작센안할트(2만7400유로), 브란덴부르크(2만7800유로), 튀링겐(2만8900유로), 작센(2만9900유로)로 2만 유로 대를 유지하면서 독일에서 경제적 낙후지역을 형성했다. 과거 동·서 베를린이 합쳐진 베를린은 3만7900유로로 중간 수준이었다. 나머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3만8700유로), 자를란트(3만8600유로), 니더작센(3만6500유로), 라인란트팔츠(3만5700유로), 슐레스비히홀슈타인(3만2400유로)은 모두 옛 서독 지역으로 3만 유로 대를 유지했다. 옛 동·서독의 지역별 경제 양극화를 여실히 보여주는 통계다.하지만 옛 동독 지역의 1인당 GDP는 옛 서독 지역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적어 보이지만 유럽 전체에서 보면 그리 나쁘지 않다. 이탈리아(2만8500유로), 스페인(2만5100유로)과 비슷하고 옛 동유럽 체제전환국인 체코(1만8100유로), 헝가리(1만2700유로), 폴란드(1만2200유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심지어 프랑스도 지역별로 따지면 파리 중심의 수도권인 일드 프랑스와 독일과 국경을 접한 동부 알자스 등 몇 군데를 제외하면 옛 동독 지역과 경제적으로 비슷하다. 통일 이후 옛 동독 지역의 옛 서독 지역 대비 1인당 GDP는 1991년 42.9%에서 2000년 67.2%, 2008년 70.9%로 꾸준히 성장해 왔다. 통일대박은 아닐지 몰라도 옛 동독 지역은 유럽 전체 수준에선 상당히 높은 경제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나 영국, 이탈리아 중부와 비슷하다. 동유럽 옛 공산권의 어느 나라보다 높은 경제 수준이다.공산주의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체제전환을 한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옛 동독 지역은 부동산 비용과 생활물가가 낮아 옛 서독 지역의 80% 정도면 어느 정도의 생활 수준은 유지할 수 있다. 옛 동독 지역 예나에 위치한 프리드리히 실러 대학 경제·경영학과의 비즈니스 동력·혁신 및 경제변화 담당 교수인 미카엘 프리치 박사의 주장이다. 독일연방정부는 옛 서독 지역에서서 연대세를 받아 옛 동독 지역의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투자해 장기적으로 격차를 줄이는 정책을 꾸준히 펴고 있다. 그 효과가 나타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주장도 많다. 일부에선 체제 전환 뒤 30년이 지나도 옛 동독 지역이 옛 서독 지역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과거 공산체제의 부작용이 지금도 장기적인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증거라는 주장도 편다. ━ 메르켈 총리 “아직 갈 길 멀다” 프리치 박사는 이를 공산주의 시절에 겪었던 트라우마에 따른 강박 증세로 표현한다. 예로 과거 동독 시절 공장이나 사업소들은 중앙에서 배정하는 원료만으로 가동해야 했기 때문에 부품과 원자재를 일단 필요 이상을 확보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 전통과 강박 관념이 남아있기 때문에 지금도 옛 동독 지역의 기업은 옛 서독 지역의 기업보다 원료를 충분히 확보하려는 경향이 보인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옛 동·서독 지역 간 경제적 격차는 독일 국내 정치의 핵심 과제다. 지난 9월 25일 독일의 연방경제에너지부가 발표한 ‘독일 통일 현황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옛 동독 지역 경제력은 옛 서독 지역의 75%, 평균 임금은 84% 수준으로 나타났다. 더 큰 문제는 주민들의 심리다. 보고서의 설문조사에선 옛 동독 지역 주민 57%가 자신을 ‘2등 시민’으로 느낀다고 응답했다. 옛 동독 지역 주민의 박탈감을 잘 보여주는 조사 결과다. 메르켈 총리도 10월 28일 주례 팟캐스트에서 “1990년 옛 서독지역의 43%였던 옛 동독지역의 경제력이 현재 75%까지 올라온 것은 대단한 성공이지만, 한편으론 아직 갈 길이 멀다”라고 지적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는 독일의 깊은 고민이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2019.11.09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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