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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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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퇴진·노동권 보장” 노동단체, 서울 도심 곳곳서 집회

정책이슈

1일 노동절을 맞아 서울 도심 곳곳에서 노동단체들이 집회를 열었다. 양대노총 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3만3000명가량이 참가한 것으로 알려졌다.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은 이날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사거리 동화면세점 앞에서 ‘2024 세계노동절 대회’를 열고 정권 퇴진과 노동권 보장을 외쳤다.주최 측 추산 2만5000명의 참가자는 동화면세점 앞에서 덕수궁 대한문까지 약 600m 구간 6개 차로를 가득 메웠다.민주노총은 지난해 노조탄압 중단을 요구하며 분신해 숨진 건설노조 간부 고(故) 양회동 씨의 뜻을 이어가겠다며 윤석열 정권 퇴진, 모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쟁취, 노조법 2·3조 개정안(노란봉투법) 통과, 최저임금 인상 등 구호를 외쳤다.이들은 오후 3시 30분께 집회를 마치고 중구 서울고용노동청까지 1.2㎞ 구간을 행진한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도 이날 오후 2시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제134주년 세계노동절 기념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했다.주최 측 추산 8000여명은 의사당대로 4개 차로에 모여 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 재추진, 주4일제 쟁취, 최저임금 차등 적용 시도 중단 등을 외쳤다.앞서 민주노총 산하 건설노조 등 5개 노조는 이날 낮 12시께부터 서대문구 경찰청 앞 등 곳곳에서 사전대회를 연 뒤 본대회에 합류했다.

2024.05.01 17:49

1분 소요
재계

산업 일반

재계가 이른바 ‘노란봉투법’이라고 불리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 개정안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관련법이 시행되면 불법파업이 이어질 것이라며 노란봉투법 대신 ‘불법파업조장법’으로 칭하며 사실상 민주노총에 면죄부를 주는 법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23일 재계에 따르면 최근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최근 불법쟁의행위에 대한 손배·가압류 제한의 문제점 토론회를 열고 노란봉투법을 불법파업조장법이라고 했다. 이동근 경총 부회장은 토론회에서 “불법쟁의행위에 대한 손배·가압류를 금지하는 불법파업조장법은 민사상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의 기본원리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노란봉투법은 최근 야당이 추진하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을 말한다. 노동자의 파업으로 기업에 피해가 발생해도 파업 노동자에게 소송 등을 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2014년 쌍용차 노조의 파업으로 발생한 회사 측 손해에 대해 법원이 노조에 46억8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리자 한 시민이 노란색 봉투에 성금을 넣어 전달한 데서 개정안에 이른바 노란봉투법이란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재계는 관련법이 시행될 경우 노조를 보호하는 기능보다 산업 현장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기업의 정당한 경영 활동을 방해하는 불법파업이 증가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 때문에 노란봉투법이란 이름이 아닌 불법파업조장법으로 고쳐 부르는 것으로 해석된다. 앞서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노조법 개정안의 문제점’ 보고서를 통해 “이미 현행 노조법(제3조)은 정당한 파업에 대해서는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명시해 노조권을 보장해주고 있다”며 “헌법에서 보장하는 노동권은 합법을 전제하는 것이지, 불법행위까지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경총은 “불법 쟁의행위가 사업장 점거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대부분 민주노총 사업장에 집중되어 있다”며 “민노총 중심의 불법 쟁의행위에 대해 면죄부를 주려 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고용노동부가 2009년부터 2022년 8월까지 노동조합을 상대로 제기된 손해배상소송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총 151건(청구액은 2752억7000만원) 가운데 민주노총을 상대로 제기된 소송 건수는 94%, 청구액 기준으로는 99.6%로 나타났다. 민주노총을 상대로 한 소송 142건 가운데 금속노조에 대한 소송이 105건으로 가장 많았고 공공운수노조에 대한 소송이 12건으로 뒤를 이었다. 경총은 “사용자의 손배청구권을 제한하려는 노조법 2·3조 개정안은 위력에 의한 사업장 점거 등 민주노총의 불법행위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며 “법 개정의 필요성 없음이 명백하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노동계는 “우리나라처럼 손배소 폭탄을 투하해 보복성으로 노조를 탄압하는 곳은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은 21일 논평을 내고 “해외에서는 파업에 대한 기업의 손해배상청구 소송 자체가 매우 드문 일인데, 이번 고용노동부 조사에서는 그 부분은 드러나지 않았다”고 전했다. “판례는 쟁의행위가 정당성이 없는 경우 노조와 조합원 전원의 공동불법행위로서 부진정연대책임을 부담시키고 있으나 이는 파업에 참여한 개인에 지나치게 가혹한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한국노총은 또 “정부는 사용자가 노동기본권 탄압이나 인권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손배·가압류를 남용하지 않아야 하고, 노동기본권 행사가 제약되지 않도록 관련 법·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병희 기자 leoybh@edaily.co.kr

2022.10.23 16:16

2분 소요
SPC 파리바게뜨 노조 “내가 만든 빵 먹지마”…발등 찍는 ‘불매운동’ [이코노 EYE]

유통

“우리는 노동착취로 만들어지는 빵을 먹지 않겠다.” 파리바게뜨 가맹점에서 일하는 제빵기사들 중 일부가 자신들이 만든 빵을 먹지 말아 달라며 ‘자사 제품 불매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민주노총 화섬노조 소속 노조원들이다.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여성민우회, 민주노총 인천본부, 청년유니온, 청년행동 등 수많은 단체들이 불매운동 참여를 선언했다. 불매운동 이유는 이렇다. 파리바게뜨를 운영하는 SPC그룹이 민주노총 소속 노조원을 탄압하고 연차 휴가, 점심시간 등 휴가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제빵기사들이나 또 다른 이해관계자인 가맹점주들은 전혀 동의하지 않고 있다. 제빵사의 휴가권 보장은 가맹점주와의 조율을 통해 해결할 문제인데다 노조탄압이라는 일부의 주장이 마치 5000여명의 제빵기사 전체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처럼 비춰지는 것도 적잖은 부담이다. 그러잖아도 파리바게뜨는 노노갈등을 겪으며 격변을 겪어왔다. 파리바게뜨 제빵기사들은 현재 한국노총 산하의 전국식품산업노동조합연맹과 민노총 화섬노조로 양분된 구조다. 초창기 세를 잡은건 민노총이었지만 현재 제빵기사들의 대표 노조는 한노총이다. 한 때 700여명까지 가입자수를 확보했던 민노총은 이들의 활동에 반감을 가진 제빵기사들이 한노총으로 옮겨가면서 주도권을 잃었다. 현재 민노총 화섬노조에 남은 제빵기사들은 200여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지난 5월 민노총 소속 제빵기사 주도로 시작된 불매운동은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노동권 보장을 위한 투쟁이라기 보다는 한노총에 뺏긴 주도권 싸움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대중들의 시선도 의아하다. 특정 성향의 시민단체는 그렇다 치더라도 본인이 만들어 팔고 있는 빵을 사지 말라고 하는 것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는 의견이다. 더구나 내가 일하고 있는 회사가 나에게 부당한 처우를 했다고 불매운동을 하고 주변사람들에게 동참을 요구하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이다. 노조의 ‘파업’은 많이 들어봤어도 ‘불매운동’은 쉽게 찾을 수 없는 이유다. 결국 이번 불매운동은 일부 이해관계 집단의 이익에 들어맞을지 몰라도 ‘제 발등 찍기’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더구나 불매로 인한 손실을 ‘동료’와 ‘가맹점주’가 고스란히 떠안아 하는 상황이라면 말이다. 3년 전 시작된 ‘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떠올려보자. 지난 2019년 8월 일본 정부가 대한국 수출 규제 조치를 발표하자 국민들 사이에서 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벌어졌고 일본 브랜드 제품 판매량은 급감했다. 한참 잘나가던 SPA브랜드 유니클로 매장이 하나 둘 문을 닫았고 수입맥주 1위를 달리던 일본산 맥주는 순위 밖으로 밀리며 자취를 감췄다. 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부당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기저에 깔렸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SPC 불매운동은 현재 시민단체 동원을 통해 명맥만 간신히 이어나가고 있는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했다. 뒤늦게 이들도 이상함을 감지한 걸까. 민노총 소속 노조원들은 화섬노조 홈페이지를 통해 ‘노조가 SPC 불매를 하고 있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제빵기사들의 인권과 노동기본권이 침해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 시민들이 자발적 불매를 시작했다는 주장이다. 책임회피인지 뒤늦은 발뺌인지는 이제와서 중요하지 않다. 노동현장에서 ‘혼자가 아닌 우리’를 외치면서 수천명의 동료들과 가맹점주들의 피해를 이들 스스로 키우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아이러니에 가깝다. 요새 자주 회자되는 ‘올바른 노사 문화’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불매를 외친 이들 스스로 따가운 눈총과 비난의 이유를 더 잘 알 것이다. 김설아 기자 seolah@edaily.co.kr

2022.07.14 09:00

3분 소요
포켓몬빵 신드롬이 생긴 네가지 이유 [허태윤 브랜드 스토리]

전문가 칼럼

대한적십자사가 심각하게 부족한 혈액 난을 해결하기 위해 포켓몬 빵에 도움을 구했다. 심각한 혈액 난 해결을 위해 빵 만드는 기업에 구원을 요청한 것이 얼핏 이해가 어려울 수 있지만,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 네티즌이 적십자사가 코로나 발 혈액 부족을 겪는다는 말을 듣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포켓몬 빵’ 제조 기업인 SPC 삼립식품에 포켓몬 빵을 헌혈 후 간식용으로 제공할 것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빵을 사기 위해 편의점 ‘오픈런’ 현상을 만들고 10시간씩 대형마트 앞에서 텐트 노숙을 하며 기다리는 열풍을 긍정적 사회현상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는 실제로 적십자사와 SPC 삼립식품에 의해 내부적으로 논의되었으나 현실화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심각한 물량 부족을 이유로 실제적인 검토는 어려웠지만 절묘한 아이디어였다. 적십자사로서는 포켓몬 빵을 헌혈 후 조혈을 위한 영양식으로 무료 제공하면 젊은 층의 헌혈이 크게 늘 것이고, SPC는 오너 3세의 마약 투약 혐의 등으로 인한 오너리스크, 일감 몰아주기, 노조탄압 등 최근에 만들어진 부정적 브랜드 이미지를 희석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 본질은 웩더독(Wag the Dog) 마케팅 실현이 되지 않았음에도 이 아이디어가 언론과 SNS에서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바로 ‘포켓몬 빵’에 대한 일종의 사회현상 때문이다. 출시된 지 불과 40일 만에 1000만개가 팔린 포켓몬 빵에 얽힌 일화는 수도 없이 많다. BTS의 리더 RM의 부모님이 편의점을 전전하며 그가 원하는 포켓몬 빵을 사러 다니는가 하면, 이를 보다 못해 RM이 직접 SNS를 통해 ‘더 많이 팔아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어떤 편의점주는 포켓몬 빵 불매운동을 벌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없으면 없다고 고객에게 욕먹고, 하루에 두 개 들여와서 (없다고) 또 욕먹느니 차라리 안 팔고 말겠다’라는 것이 불매 선언의 이유다. 1천500원짜리 빵을 사면 제공되는 ‘띠부띠부씰’을 30배가 넘는 5만 원의 웃돈을 지급하고 샀다는 중고마켓의 거래도 화제다. ‘품절 대란’을 넘어서 ‘신드롬’이 일고 있다. 그런데 포켓몬 빵 열풍은 세상에 없었던 빵 맛 때문도 아니고 가성비가 좋아서도 아니다. 빵을 사면 제공하는 사은품 격인 ‘띠부띠부 씰’(떼었다 부쳤다 하는 씰의 줄임말)때문이다. ‘띠부씰’은 빵과 함께 무작위로 제공되는 일종의 스티커로 포켓몬에 등장하는 캐릭터 159종을 소재로 만든 것이다. 자연스럽게, 모든 씰을 모으는 것은 일종의 게임이자 컬렉션 아이템이 되었고, 이 씰을 구하기 위해 빵은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 개가 꼬리를 흔드는 것이 아닌, 꼬리가 개의 몸통을 흔드는 이른바 ‘웩더독’(Wag the Dog) 마케팅인 것이다. 16년 전 처음으로 포켓몬 빵이 나왔을 당시에도 띠부띠부씰의 인기는 굉장했다. 당시는 151종이었던 이 씰을 모두 모으기 위해 빵을 구매한 뒤 씰만 빼고 남은 빵은 전부 버리는 경우가 허다해,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던 것은 기억을 돌려보면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요즘에는 씰 뿐만 아니라 빵 자체도 귀해서 당근마켓이나 중고나라 등에서 빵이 활발히 거래돼, 버려지는 빵은 거의 없다. 1개에 불과 1500원인 빵을 사면 사은품으로 주는 스티커를 구하기 위해 편의점 배송 차량이 오는 시간인 밤 10시에 편의점 앞에 기다리다가, 그래도 순서가 오지 않으면, 살 수 있는 편의점이 나올 때까지 배송 차량을 따라가는 기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심지어 희소 ‘씰 아이템’의 경우 중고 시장에서 빵값의 30배를 주고 스티커만을 구매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실 ‘웩더독’ 마케팅은 맥도널드와 스타벅스 같은 브랜드들이 이미 쏠쏠한 재미를 봤던 전략이다. 맥도널드는 1979년부터 수십 년간 지속해서 이런 웩더독 마케팅을 전개해 왔다. 해피밀 메뉴를 주문한 어린이 고객들을 위해 당시에 유행하던 캐릭터 굿즈를 무료로 제공하는 마케팅을 시즌별로 아이템을 바꿔가며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한국에서도 슈퍼마리오 피규어가 맥도널드 점포 앞에 어린이는 물론 어른아이(키덜트)들을 줄 세웠던 기록이 있다. 스타벅스는 매년 여름 휴가 시즌과 연말에 굿즈를 구매 마일리지에 따라 제공해 왔다. 그 중 매 17잔마다 주는 여름 휴가백을 구하기 위해 한사람이 무려 374잔을 주문하고 자신은 한잔 만 마신 후 모두 두고 나온 일화는 2020년 여름 내내 논란이 되었다. 이마트24 편의점도 지난해 도시락을 사면 삼성전자, 네이버, 현대차 등 10개의 상장사 주식을 증정하는 주식 도시락으로 주식 열풍에 빠진 MZ세대들을 저격해, 하루 만에 모든 도시락이 동이 나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도시락 가격은 4900원이었고 증정 주식 중 가장 비싼 주식인 네이버가 40만원 가치가 있었으니 운만 좋으면 8000%넘는 차익을 기대할 수 있었던 ‘대박’ 도시락이었다. OTT ‘왓챠’가 이마트 24와 콜라보 한 ‘왓챠 팝콘’ 역시 ‘웩더독’의 사례로 손꼽히는 경우다. 개당 2000원에 세 가지 맛의 팝콘과 함께 왓챠 서비스를 최소 2주, 최대 3개월 동안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프리미엄 이용권을 ‘꽝’ 없이 100% 담은 마케팅으로 한 달 만에 모든 재고를 소진했다고 한다. ━ 팍팍한 현실 속 어린 시절로의 타임슬립 ‘포켓몬 빵 신드롬’의 원인은 우선 불황기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레트로(복고) 심리를 저격한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빵의 주 고객인 2030에게 ‘진로 이즈백’이나 ‘곰표’의 레트로는 본인이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막연한 과거로부터의 복고 감성이지만, 포켓몬은 자신이 경험했던 구체적 과거 속의 특별한 복고 감성이다. 어린 시절 포켓몬 애니메이션에 빠졌던 이들은 ‘포켓몬고’를 통해 게임으로 포켓몬의 기억을 소환했던 대학 시절을 지나, 이제는 당당한 소비의 주체로 성장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갑갑하고, 불황으로 인해 녹록치 않은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그런데 1500원만 주면 살 수 있는 포켓몬 빵은 본인을 고민 없고, 걱정 없던 어릴 적 시절로 타임슬립(시간여행) 시켜주며 잠시나마 안정감과 포근함을 느끼게 한 것이다. 두 번째는 단순한 컬렉션을 넘어 띠부띠부씰이 가지고 있는 게이미피케이션의 요소를 들 수 있다. 운에 따라 어떤 캐릭터 씰을득템 하는가는 같은 가격에 구매하더라도 각각의 ‘포켓몬빵’은 다른 현실 가치로 환원된다. 중고 시장에서의 리세일 벨류가 그렇게 잠정가치를 인식하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이 구매하는 포켓몬 빵은 일종의 대박심리를 자극하는 장치로서 ‘랜덤박스’의 역할 한다. 이러한 장치는 마치 복권의 당첨확률을 높이기 위해 여러 장의 복권을 사는 심리와 유사하기 때문에 제품의 본원적 가치와는 별개로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제품을 구매하게 한다. ‘안 산 사람은 있어도 한 개만 사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세 번째는 일종의 밴드웨건 효과로 해석할 수 있다. 갑자기 20·30세대들의 관심이 몰리면서 유행에 동조해 동질감의 확인과 충족을 통해 관계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는 심리가 작동한 측면이 있다. 네 번째는 포켓몬 캐릭터들이 가지고 있는 경쟁력이다. 하나하나의 캐릭터 디자인은 몬스터지만 스티커로 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싶을 정도의 귀여운 감성을 가지고 있다. 귀엽고 매력적인 캐릭터들은 현실 속에서 고단한 하루를 보내는 2030들에게 소소한 위로를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 본원적 가치 없는 제품은 지속 불가능 분명 포켓몬 빵 신드롬은 과거 어떤 웩더독 마케팅 사례보다 많은 기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논란은 있다. 과연 이 현상이 언제까지지속할지에 대한 의문이다. 스타벅스의 사례는 커피라는 제품의 본질적 가치가 건재한 상태에서 계절적 프로모션의 형태로 굿즈를 제공했고 그 굿즈가 제품의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할 정도의 고품질이면서 한정판이란 이유로 큰 인기를 끈 경우다. 그런데 포켓몬 빵의 경우, 구매의 주된 이유가 빵이라는 제품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띠부띠부씰’이라는 일종의 사은품에 더 큰 비중이 있다. 스타벅스의 경우, 사은품에 대한 고객 반응이 식더라도 제품의 본질적 가치와 브랜드 가치에 의해 지속성을 가진다. 그러나 포켓몬 빵의 경우, ‘띠부띠부씰’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은 수집과 소장의 열기가 식으면 낮아질 수밖에없다. (적어도 포켓몬에서 새로운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지속해서 나와 세계관과 에피소드의 다양성이 더 넓어지기 전까지는말이다) 제품의 본질적 가치보다는 부가적 가치로 제품과 브랜드가 얼마나 지속 가능할지 의문이 제기된다. 몸통 없이 꼬리만 존재하는 개는 없기 때문이다 SPC 삼립이 이런 품절대란에도 생산설비를 쉽게 늘리지 못하는 것도 아마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단기간은 품절로 인한 소비자의 오픈런은 계속될 것으로 보이지만 그 끝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한신대 IT 영상콘텐츠학과 교수다. 광고회사와 공기업, 플랫폼과 스타트업에서 광고와 마케팅을 경험했다. 인도와 미국에서 주재원으로 일하면서 글로벌브랜딩에 관심을 가졌고 공기업 경험으로 공기업 브랜딩, AR과 플랫폼 기업에 관여하면서 플랫폼 브랜딩을 연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2023년 서울에서 열리는 ADASIA 사무총장으로 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허태윤 칼럼니스트

2022.04.09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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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노동자탄압·임금억제로 물가 안정…조작사건도 많아

정책이슈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전 대통령이 향년 90세로 23일 사망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 현대사를 굴곡지게 만든 장본인이어서 각계 평가가 엇갈린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한국 경제에 남긴 명암을 짚어봤다. 전두환 정권의 철권통치 대상엔 노동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는 노동자를 불순분자로, 그들의 파업·집회를 사회혼란으로 여겼다. 정권에 대항하는 노동운동가들을 삼청교육대에 강제수용하는 등 인권유린은 다반사였다. 심지어 근로자 임금 인상 억제를 강제해 국가 차원에서 물가 안정 수단으로 악용하기도 했다. 전두환 정부(1980년 9월~1988년 2월)는 앞서 박정희 정부가 수립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96년 총 7차) 중 5차(1982~1986년)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경제개발 계획은 5차부터는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으로 이름을 바꿨다. 1960~1970년대에는 먹고 사는 생존이 중요한 과제였다면, 1980년대엔 자유·문화·복지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던 시기였다. 전두환 정부는 경제개발 계획을 이어나가 박정의 정부를 잇는 적통 정권임을 알리는 동시에, 사회 변화를 반영해 신군부에 대한 저항감을 줄이고 정권의 안착을 도모했다. 그 예로 국풍81 축제, 한국프로야구·축구 창설, 야간통행금지 해제,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 등을 진행했다. 사회·근로·연금·의료 관련 복지제도도 개선해나갔다. 도시화와 산업화로 농어촌을 떠나는 이농과 대도시 집중화가 심화하고, 소득불평등과 도시빈민이 증가하던 사회구조 변화도 복지 확충의 한 배경이 됐다. 근로복지 분야에서는 1984년 최저임금제 시행 방안, 1986년 의료보험 전국민 확대 방안과 국민연금제도·최저연금제 도입 방안, 1986년 최저임금법 제정, 부당 노동행위 처벌을 담은 노동조합법 개정 등을 발표했다. 최저임금제는 1953년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근거를 마련했으나 기업주들의 반발과 사회여건 부족으로 보류됐다. 그러다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 1986년 국민복지 증진의 일환으로 도입을 결정, 그 해 연말에 법을 만들어 정권 말기인 1988년 시행에 들어갔다. 최저임금제를 통해 사용자가 근로자에게 최저임금 이상을 지급하도록 강제성을 못박았다. ━ 사회복지망 확충으로 도시빈민·소득불평에 대응 전두환 정부는 사회복지제도도 확충했다. 당시 산업화를 좇아 농어촌을 떠난 사람들 대부분이 도시의 하층민을 형성하면서 소득불평등과 고령인구·도시빈민 증가, 도시화·핵가족화 확산, 부모부양의식 퇴조 등으로 사회보장 수요가 급증하던 때였다. 대책의 하나로 국민의 절반에 머무르던 의료보험 혜택을 모든 국민이 받도록 하는 ‘전 국민 의료보험 조기 정착’ 방안을 1987년에 제시했다. 이에 따라 의료보험을 1988년 농어촌으로, 이듬해엔 도시 전역으로 확대했다. 국민복지연금도 1986년 법 개정을 거쳐 수혜 폭을 넓혔다. 18~60세 미만 모든 취업연령층으로 확대, 1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 우선 실시, 사용자와 근로자 균등 분담, 정부가 제도운영관리비 부담 등의 내용으로 개선했다. 1987년엔 근로자의 주거 안정과 목돈 마련을 지원하는 법도 만들어 이듬해 시행했다. 정권 마지막 해인 1987년엔 노동관계법·노동조합법·노동쟁의조정법 등을 개정했다. 이를 통해 행정관청의 재량권 남용 축소, 노동조합 요건 축소와 설립 자유화, 단체교섭권한 위임절차 간소화와 사후신고, 노사 간 세력 균형을 위한 근거 마련 등의 조치를 취했다. 같은 해에 노후생활 연금신탁제를 도입하고 남녀고용평등법을 만들어 여성차별 철폐 기반도 마련했다. 이렇게 전두환 정부 때 기틀을 마련한 사회·근로 복지정책들은 신군부 차기 정권인 노태우 정부 때도 계속 이어졌다. ━ 정권의 폭압에 청년 노동자들 분신자살 잇따라 하지만 전두환은 국민에게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자마자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로 정당·정치활동 금지, 국회 폐쇄, 영장 없는 구금 등을 강행했다. 정권 말기에 각종 복지제도 확충으로 성난 민심을 달래려 했지만 항거하거나 민주화를 요구하는 노동자의 파업과 시위는 철저히 분쇄했다. 산업·재벌을 앞세우고 노동·인권을 묵살하던 박정희 정권과 닮은꼴이었다. 옛 노동부(현 고용노동부)의 노사분규 통계를 살펴보면 1985년에는 노사분규 265건, 노사분규참가자 2만8700명, 노동손실일수 6만4300일 수준이었다. 하지만 정권 말기인 1987년엔 3749건, 126만2300명, 694만6900일로 급증했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노동자·학생·시민들의 민주·자유 열망이 폭발한 것이다. 이렇게 억눌렸던 민심은 대통령직선제와 정당·언론 자유화를 추진한 차기 노태우 정부 때 봇물처럼 표출됐다. 이 때문에 전두환의 철권통치 때 적지 않은 노동자들의 희생이 잇따랐다. 부산에서 상경한 김종태씨는 1980년 서울 신촌역 부근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학살 사건을 알리고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했다. 김씨는 앞서 2년 전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을 가르치는 야학을 운영하다 정부 감시에 걸려 강제 해산됐다. 1984년엔 택시운전사 박종만씨, 1985년엔 건설노동자 홍기일씨, 1986년엔 금속노동자 박영진씨 등이 노조탄압 규탄, 근로기준법 준수, 노동3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분신 자살했다. 이 밖에도 노동운동을 하던 수많은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의문사·행방불명·행려병자 등으로 사라져갔다. 당시 정치인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3김(김대중·김영삼·김종필) 연금,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등 온갖 박해가 이어졌다. ━ 조작사건·경제정책에 희생되고 강제 수용되기도 전두환 정권은 정치범수용소라 할 수 있는 삼청교육대를 운영해 국가폭력과 인권유린을 자행했는데, 수많은 노동운동가들도 이곳으로 끌려갔다. 또한 1987년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일화로 유명한 박종철 고문치사 비극을 낳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은 집권 초기 1980년 12월에 ‘제3자 개입 금지’ 규정을 추가하는 등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을 개악했다. 제3자 개입 금지는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설립이나 노동운동 전개를 외부 세력이 돕지 못하도록 원천 금지한 조항이다. 제3자 개입 금지는 정부와 기업이 노동계를 탄압하는 주요 수단으로 악용됐다. 이후 정권이 바뀌고 일부 법 개정이 이뤄졌지만 그 잔재는 20여년동안 이어졌다. 결국 시민단체와 노동계의 반발로 2005년 노사관계선진화 방안에 채택돼 2006년에 결국 폐지됐다. 전두환 정권은 노동자 임금 인상 억제를 물가 안정 정책의 하나로 악용하기도 했다. 집권 초기 1980~1981년에 유가와 물가가 급등하자 인상을 부추기는 나쁜 심리를 내쫓자며 ‘부정적 심리 추방운동’을 벌였다. 그 대상 중 하나가 노동자 임금이었다. 국가 차원에서 임금 동결을 선언하며 노동자 임금 인상을 통제했다. ☞ 전두환 향년 90세로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31년 경남 합천 출생으로 1955년 육군사관학교 졸업,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등 육군대장까지 지냈다. 유가족으로는 배우자 이순자(82)씨를 비롯해 아들 재국·재용·재만씨와 딸 효선씨가 있다. 1961년 박정희 육군 소장의 5·16 군사구데타 때 육사생도 지지시위를 주도하고 국가혁명위원회에 가담했다. 1979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사건을 조사하면서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 신군부 정권을 출범시켰다. 1980년 신군부 퇴진과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던 전남도민들을 유혈진압했다. 간선제로 1980년 11대 대통령, 1981년 12대 대통령에 취임해 1988년 2월까지 집권하며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대통령직 퇴임 후엔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군사반란·내란죄, 광주시민 학살, 비자금 조성 등의 죄목으로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다. 박정식 기자 park.jeongsik@joongang.co.kr

2021.11.2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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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는 ‘빵 파업’…SPC vs 화물연대, 속사정은?

유통

파리바게뜨를 운영하는 SPC그룹이 화물연대의 장기 파업 여파에 시름 중이다. 가뜩이나 코로나19로 경기가 악화된 가운데 파업으로 인한 운송 시계가 한 달 남짓 멈추면서 손실 규모도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최대 피해자는 전국 3400여개에 이르는 매장의 가맹점주들. 이들은 빵을 만들 생지(빵 반죽)와 소스 등이 제시간에 배송되지 않아 매출이 떨어지고 있다고 호소한다. 일부 점포에선 판매할 빵이 없어 매대가 비워지는 일도 다반사다. 그런데도 민주노총(민노총) 소속 화물연대의 투쟁 강도는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지역사회와 가맹점주들의 피해 호소에도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고 있다. 30일 예고된 SPC삼립 청주공장에서의 대규모 집회, 10월 민주노총의 총파업을 앞두곤 전운마저 감돈다. SPC와 화물연대, 그리고 가맹점주들. 이들에겐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 봉쇄 또 봉쇄…누적 피해 금액 40억원 넘어 업계에 따르면 이번 운송거부 사태는 지난 2일 호남샤니 광주공장에서 시작돼 현재 전국 SPC 사업장으로 퍼졌다. 이 파업으로 3일 광주센터가 봉쇄되고 15일부터 원주, 청원, 대구센터가 순차적으로 봉쇄됐다. SPC그룹 측에서 추산하는 누적 피해 금액은 40억원 이상. 이 중 매출 손실, 영업손실 등 가맹점 피해는 집계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 달 가까이 파업이 이뤄지고 있지만, 갈등 국면이 해결되지 못하면서 사태는 더 장기화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번 파업의 시작은 화물연대 측이 SPC그룹에 물류 노선 증·배차 재조정 이행을 요구한 데서 비롯됐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애초 갈등은 배송 기사간 이권 다툼이다. SPC에서 증차해 준 차량 2대를 놓고 민노총 소속 배송기사들과 한국노총 소속 배송기사들이 코스 조정과 운영방식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견해차가 원인이다. ━ 쟁점 1. ‘화물연대 배송 파업’…SPC그룹이 해결 주체인가 쟁점은 SPC그룹의 책임론이다. 민노총 화물연대 주장은 이러한 일련의 갈등을 SPC그룹 측에서 해결해 달라는 데 있다. 반면 SPC그룹은 의무가 없다며 선을 긋는 상황이다. 이를 구분 짓기 위해선 이들 간 계약구조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SPC 측은 물류 자회사인 GFS와 운수사간 운송용역계약을 맺고, 운수사와 배송 차주가 차량 위수탁계약(지입계약)을 체결하는 현 구조상 SPC그룹 측에서 배송기사간 이견 다툼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GFS는 파리바게뜨, 던킨, 배스킨라빈스 등 그룹 내 브랜드 물류를 위탁받아 13여개 운수사와 화물 운송계약을 체결했다. 이들간 계약은 전국 11개 물류센터에 1050여대 차량으로 제과, 제빵, 휴면반죽, 아이스크림, 도덧 관련 원부자재 등을 일 1~3회에 걸쳐 7000여개 직 가맹점에 공급해주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GFS와 배송 차주들간 계약이 아닌 것이다. 배송 기사들은 각 운수사와 계약했고 각각 이념에 따라 민노총 화물연대, 한노총 건설노조, 전노평노조 등 단체에 가입돼 있다. SPC 관계자는 “각 물류센터에는 여러 개의 운수사 배송 차주가 상존하고 차량 운영 효율화를 위해 GFS는 대표 운수사를 선정하고 배차관리와 점포도착관리 등의 업무를 수행하도록 한 것”이라면서 “운수사의 역할을 원청사인 SPC그룹에서 관여하는 것 자체가 하도급법 위반”이라고 말했다. ━ 쟁점 2. 노선간 다툼? 노조 탄압?…뒤바뀐 목소리 또 다른 쟁점은 변질된 파업 배경이다. 당초 노선간 다툼에서 시작됐지만, 화물연대의 최근 목소리는 SPC그룹의 ‘노조탄압’과 ‘노조파괴 공작’으로 방향이 달라졌다. 장기 운송거부로 피해가 커진 SPC그룹 측에서 지난 14일 광주지역 운수사 11곳과 계약을 해지한 게 원인이 됐다는 분석이다. 화물연대는 계약해지 다음 날인 15일 연대농성에 돌입하면서 “노조 탄압”이라고 피켓을 바꿔 달았다. 파업의 배경도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합의안 도출이었다는 주장을 내놨다. 화물연대 측에서 30일 여는 결의대회 목적 역시 ‘SPC 자본·공권력 투입 규탄’이다. 업계에선 화물연대의 ‘집단 이기주의’라고 꼬집는다. 장기간 파업으로 제품 배송을 받지 못해 피해를 보고 있는 가맹점주들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득권을 얻기 위해 파업의 명분마저 바꾸는 화물연대의 이기심을 지적하는 목소리다. 업계 관계자는 “화물연대 요구안을 보면 이번 파업으로 인한 피해액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지도 말고 이번 파업에 대한 어떠한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말라고 하고 있다”면서 “가뜩이나 힘든 자영업자들에게 빵과 재료 등을 지급하지 않고 물리적 충돌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이보다 더한 역 갑질이 어딨겠냐”고 비판했다. ━ 쟁점 3. 밀가루 공장에는 왜?…늘어나는 피해자들 그 사이 피해자들은 더 늘어나고 있다. 화물연대 조합원들이 지난 17일부터 농성을 벌이고 있는 세종시 밀다원공장(밀가루)과 청주공장(야채류, 소스류)은 SPC삼립의 생산공장이다. 이 생산시설은 GFS와 운송계약을 체결하고 있지 않은 곳으로, 자체적인 운송사와 물류 계약을 하는 제3의 사업장이다. 현재 파업 중인 화물연대와 전혀 상관이 없는 곳에서 또 다른 피해를 양산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농성으로 인해 세종공장의 밀가루 공급량은 기존 하루 800~1000t에서 한 때 100~150t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청주공장에선 물류 출하 저지 집회를 벌이다 화물연대와 경찰 사이 마찰이 빚어지기도 했다. 특히 해당 공장에서는 내부 물품뿐 아닌 중소업체와 소상공인들에게 납품하는 물량도 있는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는 “이 시설을 불법 봉쇄하러 간 것은 마치 울산의 현대자동차 파업인력이 창원의 쌍용자동차 사업장에 달려가 출입문을 봉쇄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면서 “코로나19로 신음하는 또 다른 자영업자들에게 어려움을 가중시킬 수 있는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 기업 한계선 넘어…범정부 차원 접근 필요 전문가들은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선 범정부 차원의 접근이 필요한 때라고 입을 모은다. 이번 파업은 임금 인상과 같은 산업적 이슈가 아닌 데다 제3자 손에 넘겨진 물류망 문제에서 비롯된 이상 개별 기업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선을 넘어섰다는 설명이다. 안승호 숭실대학교 교수(경영학과)는 “물류에서 불확실성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이슈다. 특히 코로나 탓에 원재료와 부품을 못 구하는 등 물류 공급망 관리가 매우 중요한 사안으로 떠오른 상황 아니겠냐”며 “화물 운송업자들이 이런 상황에서 파업한다는 것은 범정부 차원에서 대응이 필요해 보인다”고 강조했다. 또 “원청사인 SPC에선 하도급법 위반 등 법적인 제한을 받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응책도 없다”면서 “SPC를 시범적으로 삼아 책임에서 벗어난 제3자와의 계약에서 비롯된 문제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설아 기자 kim.seolah@joongang.co.kr

2021.09.29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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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론 머스크에 관한 50가지 놀라운 사실

산업 일반

기상천외한 아이디어와 실행력 가진 괴짜 과학자·기업가로 뉴스의 중심에 서 있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그의 라이프 스토리를 살펴본다 요즘에는 일론 머스크(47)가 언제나 뉴스의 중심에 서 있는 듯하다. 자신의 자동차 회사 테슬라와 관련된 부정적인 보도의 비판이든, 태국 동굴에 갇힌 청소년들의 구조작업 지원 제의든, 풍자 사이트 ‘더 어니언’ 직원들의 스카우트든, 그 억만장자 기업가는 다음에 어디로 튈지 예측을 불허한다.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화제의 인물로 꼽히는 머스크의 행적에 관한 기본정보는 대부분 알려졌다. 그는 남아공 프리토리아에서 태어나 17세 때 모친의 조국 캐나다로 이주한 뒤 미국에 터전을 잡았다. 미국에서 IT 기업 창업에 잇따라 성공한 뒤 우주탐사로 눈길을 돌려 스페이스X를 세웠다. 화성 식민지 건설에 대한 그의 집착은 익히 알려졌다. 회 당 50만 달러를 받고 8만 명을 화성으로 보내겠다는 구상을 가진 것으로 전해진다.그가 꿈꾸는 것은 우주탐사뿐이 아니다. 2008년 전기차 회사 테슬라의 CEO가 됐으며 그 뒤로 환경친화적인 에너지원, 초고속 운송 시스템, 인공지능의 탐사·개발을 계속해 왔다. 그의 행보에는 논란이 없지 않았다. 본인은 한사코 부인하지만 테슬라 공장의 노조를 탄압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최근 태국의 동굴에 갇힌 소년들의 구조를 도우려는 그의 움직임은 일각에선 박수갈채를 받았지만 자아도취적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이 괴짜 기업가는 정말로 어떤 배경을 갖고 있을까? 그리고 그를 움직이는 힘은 뭘까? 뉴스위크는 머스크의 동기·욕구·신념을 조명하는 가장 흥미로운 사실들을 조사했다. 그뿐 아니라 지금까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유별난 사건들을 모아봤다. 머스크가 십대에 오락실 게임 재벌이 될 뻔한 사실을 아는가? 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한 영화 아이언맨의 모델이라는 것도? 미스터리처럼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는 이마는? 그 IT 억만장자에 관한 50가지 놀라운 팩트로 ‘머스크 지식’을 재점검해보자. 12세 때 개발한 비디오게임을 지금도 온라인에서 이용할 수 있다.1984년 12세 때 머스크가 개발한 비디오 게임 블래스타(Blastar)의 소스코드를 ‘PC 앤 오피스 테크놀로지’ 잡지에 E. R. 머스크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그 대가로 500달러를 받았다. 지금도 blastar-1984.appspot.com에서 게임을 이용하면서 어린 머스크의 머리 속을 엿볼 수 있다.첫 벤처사업은 오락실이었다.보그 잡지에 따르면 머스크는 15세 때 동생·사촌과 함께 오락실 사업을 시작했다. 3명의 소년은 개장허가 신청단계까지 사업을 진척시켰다가 그 사실을 알게 된 부모의 만류로 뜻을 접어야 했다.학교에서 괴롭힘당했다. 그는 2015년 보그 잡지에 “남아공은 상당히 폭력적인 곳”이라고 말했다. “성장 과정에서 미국의 어느 미국 학교에서도 용납되지 않을 만한 수준의 폭력이 있었다. 영화 ‘파리대왕’(무인도에 불시착한 소년들의 권력욕을 그린 소설)과 같았다. 상당히 악질적인 두 그룹의 갱단이 자리 잡고 사냥감을 골랐는데 나도 그 피해자 중 하나였다.”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심하게 구타당한 적도 있었다.대학시절 자택에서 나이트클럽을 운영했다.펜실베이니아대학 시절 룸메이트인 아데오 레시(졸업 후 기업가로 성공했다)와 함께 커다란 집을 임대한 뒤 집세를 벌려고 나이트클럽으로 리모델링했다. 소규모 사업이 아니었다. 보그에 따르면 최대 1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클럽이었다.이틀 만에 박사과정을 그만뒀다. 스탠퍼드대학 응용물리학 분야의 그처럼 권위 있는 박사 과정에 합격하면 대부분 더 없는 영광일 텐데 머스크는 이틀 만에 그만두고 온라인 도시 안내부 집 2(Zip2) 창업에 뛰어들었다.한동안 침대 대신 소파에서 잠잤다.집2가 뉴욕타임스·시카고트리뷴과 계약을 따냈지만 선데이 타임스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머스크는 오피스 빌딩에서 생활하며 소파베드에서 잠자고 인근 YMCA에서 샤워했다. 1999년 컴팩 컴퓨터가 현금 3억700만 달러에 집2를 인수했으며 28세의 머스크는 그중 2200만 달러를 받아챙겼다. 그중 일부를 종자돈 삼아 또 다른 회사 X닷컴을 차렸다.2000년대 초 우리의 이베이 중독이 그를 백만장자로 만들었다. 2000년 X닷컴은 페이팔의 모기업을 인수했으며 이 온라인 결제 서비스는 머스크의 역점사업이 됐다. 페이팔은 전자상거래 업체 이베이의 인기 덕분에 2001년 날아올랐으며 그해 말 15억 달러에 이베이로 넘어갔다. 그중 1억6500만 달러가 머스크의 수중에 떨어졌다.한때 화성에서 식물을 재배하려 했다.2001년 머스크는 화성 영구 정착지 건설은 “결정적인 시점에 인류를 통합할 수 있는 발전적이고 건설적이고 영감을 주는 목표”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화성탐사 계획을 대신하는 ‘화성 오아시스’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화성으로 미니 온실을 쏘아보내 식용작물 표본을 재배하면서 언젠가 인간이 화성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삶이 가능한지를 테스트하려는 구상이다.그의 실패는 성공의 발사대였다. 엄청나게 비싼 로켓 비용이 화성 오아시스의 비상을 가로막았다. 그 비용을 끌어내리려면 혁신적인 우주비행 방법을 새로 개발해야 했다. 그래서 우주탐사 업체 스페이스X를 창업했다.화성에서 생을 마치고 싶어 할 정도로 그 행성에 집착한다.2013년 음악 페스티벌 SXSW 연설 중 머스크는 “45억 년 만에 처음으로 화성에 갈 수 있는 기술수준에 도달했다”는 사실에 흥분과 긴박감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추락사고만 아니라면 화성에서 눈을 감고 싶다.”그의 공식 연봉은 3만7000달러(약 4100만원)에 불과하다.머스크가 테슬라를 창업하지는 않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후 CEO를 맡아 시가총액 기준 세계 최고 자동차 업체 중 하나로 키워냈다. 캘리포니아법에 따라 소득이 최저임금보다 낮아선 안 되기 때문에 영국 더타임스 신문에 따르면 명목상 연봉이 지급되지만 찾아가지 않는다. 대신 회사가 계속 성공가도를 달릴 경우 스톡옵션을 통해 수십억 달러의 소득을 챙기려 한다.테슬라를 구글에 넘겨줄 뻔했다.전기 ‘일론 머스크, 미래의 설계자(Elon Musk: Tesla, SpaceX, and the Quest for a Fantastic Future)’에 따르면 2013년 차량에 결함이 속출하고 매출이 급감하면서 테슬라가 바닥을 쳤다. 머스크는 60억 달러에 테슬라를 구글에 넘기는 내용의 계약서를 친구인 구글 창업자 래리 페이지와 함께 작성했다. 계약이 진척되지 않는 사이 자동차 판매가 다시 살아나자 머스크는 구글과의 계약을 없던 일로 했다.테슬라는 성차별 기업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영국 신문 가디언의 보도에 따르면 한 여성 엔지니어가 테슬라에 성희롱과 임금 격차 문화가 있다고 주장하는 소송을 제기했으며 그 뒤 다른 여성 근로자들이 그 주장을 뒷받침했다.인종차별 기업이라는 비난도 받는다.흑인 전기기술자 드윗 램버트는 “수개월 동안 반복적으로 인종차별적인 욕설”을 들었다고 주장했으며 회사측으로부터 이 문제를 언론에 발설하지 않을 경우에만 합의금을 지급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가디언이 보도했다.동성애 혐오 기업이라는 비난도. 지난해 한 조립라인 생산 근로자는 테슬라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감독이 자신의 성적 취향을 놀리기 시작할 때 회사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머스크는 노조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난해 온라인 매체 버즈피드가 입수한 이메일에서 머스크는 자동차노조를 맹공격하며 “그들이 실제로는 대형 자동차 업체들에 충성을 바치며 노조원에게서 걷는 회비가 테슬라에서 올릴 수 있는 소득보다 훨씬 많다”고 말했다.그러나 테슬라는 노조를 허용한다고 말한다. 머스크는 노조를 탄압한다는 주장을 부인하며 지난 5월 트윗을 띄웠다. ‘우리 자동차 공장에서 테슬라 팀의 노조 투표는 아무도 막지 않는다. 하지만 얻는 것 하나 없이 왜 노조 회비를 내고 스톡옵션을 포기하는가?’인간의 두뇌를 컴퓨터에 더 가깝게 만들고자 한다. 머스크는 지난해 신경기술 스타트업 뉴럴링크(Neuralink)를 창업했다. 무엇보다도 대표적으로 기억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임플란트를 통해 인간의 뇌에 인공지능을 통합하려는 목표다.그는 로스앤젤레스 지하에 터널을 뚫으려 한다.2016년 12월 17일 그는 트위터에 ‘교통 때문에 돌아버리겠다. 터널 굴착기를 만들어 당장 땅파기를 시작하겠다’는 글을 올렸다. 그는 그날 “지하 여러 층 아래 대형 터널망을 구축해 어느 도시에서든 교통정체를 해소할 수 있는” 보링 컴퍼니를 창업했다. 그 웹사이트에 따르면 ‘뉴욕에서 워싱턴 D.C. 간 이동시간을 30분 이내로 단축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그러나 먼저 모자부터 팔기 시작했다.지난해 보링 컴퍼니는 앞부분에 회사 이름이 새겨진 20달러짜리 검정색 야구모자 몇 가지 모델을 선보였다. 그들은 보링 모자 5만 개가 모두 팔리면 화염방사기 모델을 출시하겠다고 약속했다. 모자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화염방사기 모델도 모두 팔려나갔다. 이어 머스크는 지난 1월 말 보링 컴퍼니를 통해 화염방사기 2만 대를 대당 500달러에 출시했다. 2월 1일까지 모든 재고가 바닥났다. 머스크는 무기를 판매했다고 비판 받았다. 미겔 산티아고 민주당 소속 의원은 ‘웃기지 않은’ 깜짝 쇼라고 트윗에 올렸다.뉴스를 팩트체크하고자 한다.머스크는 지난 5월 “대형 미디어 업체들의 고결한 척하는 위선”을 비판한 뒤 트위터를 통해 ‘대중이 모든 기사의 핵심 사실을 평가하고 각 기자·편집자·매체의 신뢰성 점수를 장기간에 걸쳐 추적할 수 있는 사이트를 개설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사이트 이름은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서 따오겠다고 밝혔다.눈치챘을지 모르지만 그는 일벌레다.2010년 창업자들에게 어떤 조언을 하겠느냐고 묻자 그는 “매주 80~100시간을 일에 쏟아부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다른 사람이 주당 40시간을 일할 때 당신은 주당 100시간씩 매달린다면 그들이 1년 걸릴 일을 4개월 만에 이루게 된다.”머스크는 세계 54위 부자다.경제지 포브스의 2018 억만장자 리스트에서 머스크는 54위에 랭크됐다. 그의 재산은 199억 달러로 추산됐는데 그 뒤 200억 달러를 넘어섰다. 포브스의 세계 실력자 리스트에선 25위에 올랐다.자동차를 우주로 올려 보냈다.올해 스페이스 X는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팰컨 헤비 로켓을 쏘아 올렸다. 발사 4분 뒤 로켓의 코 끝이 열리면서 빨간색 테슬라 전기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주인 모형이 운전대에 앉아 데이비드보위의 노래 ‘Space Oddity’를 반복적으로 재생했다.하지만 비행 자동차에는 관심 없다. 머스크는 2014년 베니티 페어 잡지의 뉴이스태블리시먼트 서밋 포럼에 참석한 청중 앞에서 “플라잉카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사방 천지를 비행하는 자동차로 하늘이 뒤덮인다면 풍경이 달라질 것이다. 스카이라인을 보기가 어려워진다. 더 시끄러워지고 우리 머리 위로 뭔가가 떨어질 확률이 높아진다.” 그는 대신 지하터널을 이용해 교통정체를 해소하고 속도를 높이는 방안을 선호한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한 아이언맨의 모델이었다.영국신문 가디언에 따르면 2008년작 영화 ‘아이언맨’에서 신기술 애호가 캐릭터 토니 스타크의 모델이 필요했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머스크에게 도움을 청해 그를 모델로 캐릭터를 만들었다. 머스크는 아이언맨 2에 카메오로 출연했다.모친은 70세의 슈퍼모델이다.메이 머스크는 1950년 남아공으로 이주한 모험적인 캐나다인 부부의 딸이었다. 그녀는 1969년 미스 남아공 선발대회 결선에 진출했으며 계속해 뉴욕매거진·타임·엘르캐나다의 표지를 장식했다. 2014년 비욘세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했으며 다음해 모델 매니지먼트 업체 IMG 모델스와 계약했다.부친은 머스크의 배다른 누이와 데이트 중 머스크는 지난해 롤링 스톤 잡지에 부친 에롤 머스크를 가리켜 “끔찍한 인간”이라고 평했다. 올해 72세의 에롤은 30세의 전 의붓딸(4세 때 부녀 관계로 만났다)과의 사이에서 아기가 생겼다고 밝혔다. 에롤은 “우리는 외롭고 방황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느님의 구상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인용됐다.과거 우연히 섹스 파티에 참석했다.에밀리 창은 IT 세계의 지독한 남성우월주의를 폭로한 저서 ‘브로토피아(Brotopia)’에서 부자 벤처자본가의 자택에서 열렸던 흥청망청한 섹스파티를 묘사했다. IT기업가 폴 비가는 그 뒤 자신 그리고 머스크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머스크의 대변인은 “머스크는 두어 시간 동안 파티에 머물다가 새벽 1시께 자리를 떴다”며 “그가 떠난 뒤 (섹스 파티가) 되리라는 조짐은 없었다”고 말했다.동굴에 갇혔던 태국 소년들을 도우려 했다. 태국의 청소년 축구팀이 홍수로 범람한 동굴에 갇혔다는 뉴스가 전해진 직후 머스크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구출하도록 특수 설계된 미니 잠수함을 가져갔다. 그러나 구조대 책임자는 “그들이 가져온 장비는 우리 작업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소년들은 잠수함의 도움 없이 구조됐다.인공지능이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머스크는 천체물리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의 주간 팟캐스트 스타톡에서 “(인공지능이) 핵무기보다 더 위험할 수 있는 기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불행한 인간은 사라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또는 행복을 최적화하기 위해 인간을 모두 잡아들여 도파민과 세로토닌을 끊임없이 주사해야 한다고 판단할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주의해야 한다는 말이다.”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금을 지원한다2015년 ‘미래의 삶 연구소(Future of Life Institute)’웹사이트에 따르면 ‘인공지능이 인류에 계속 도움이 되도록 하는 글로벌 리서치 프로그램’ 운영 자금으로 머스크가 1000만 달러를 기부했다. ‘머스크의 후한 기부금은 인공지능의 안전하고 윤리적인 활용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후원금으로 쓰이게 된다’.첫 부인은 공상과학 작가였다.머스크는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퀸즈대학에 다닐 때 저스틴 윌슨을 만났다. 부부는 다섯 자녀를 뒀다. 2004년 쌍둥이, 2006년 세쌍둥이다. 윌슨은 2005년 다크 팬타지 소설 ‘블러드에인젤(BloodAngel)’을 펭귄 북스에서 펴냈다.자녀 교육을 위해 직접 학교를 세웠다.아들들의 교육에 불만을 갖고 있던 머스크는 2014년 비공개로 학교를 설립했다. ‘별들을 향해’라는 의미를 가진 애드 아스트라라는 학교다. 머스크는 2015년 베이징TV 인터뷰에서 “(이 학교에는) 학년이 없다”며 “교육을 학생의 적성과 능력에 맞추는 편이 더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보그 잡지에 따르면 초등학생 연령의 아동 15명에 교사 3명이 있으며 그의 자택 중 한곳에 위치한다.첫 부인에 따르면 그는 군림하는 스타일이다.저스틴 머스크는 결혼 피로연 중 머스크가 부부관계에서 자신이 ‘알파’라고 하더라고 여성지 마리 클레르에 말했다. 그녀는 “머스크의 판단이 항상 내 판단에 우선했다”고 말했다. “그는 끊임없이 내게 부족한 점을 지적했다. 그때마다 ‘나는 당신의 아내이지 직원이 아니다’고 말하면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 내 직원이라면 해고감이야.’”이혼 후 곧바로 두 번째 부인과 결혼했다.저스틴은 머스크가 이혼 신청을 한 지 6주 만에 배우 탈룰라 라일리와 약혼했음을 문자로 통보했다고 2010년 마리 클레르에 썼다. 또 ‘이 남자와 함께한 나의 인생은 진부한 스토리로 전락했다’고 밝혔다.실제로 라일리와 만난 지 2주 만에 약혼했다라일리는 억만장자 머스크를 만나 약혼했을 때 불과 22세였다고 CBS 뉴스에 말했다. 영국인 배우인 그녀는 “머스크는 대단히 매력적이고 내가 만났던 사람 중 단연 가장 재미있고 별난 인물이었다”고 말했다.라일리와 두 번 이혼했다.두 사람은 2012년 처음 이혼했다. 2013년 재결합했다가 2014년 머스크가 다시 이혼신청을 했다. 머스크는 7개월 뒤 이혼신청을 철회하고 그들의 결혼생활에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2016년 마침내 다시 이혼했다.배우 카메론 디아즈와 데이트 소문을 부인한다.배우 카메론 디아즈가 머스크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고 주장한 연예매체 페이지 식스의 2013년 보도 이후 머스크는 그 루머가 사실이 아니라고 CBS뉴스에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배우 앰버 허드가 소설가 아인 랜드 팬이라는 데 이끌렸다.머스크는 2016~2018년 초 배우 앰버 허드와 데이트했다. 하지만 할리우드 리포터가 입수한 이메일에선 허드가 아직 조니 뎁의 부인이던 2013년부터 머스크가 그녀를 만날 구실을 찾고 있었다. 머스크는 ‘단순히 호기심에서 그녀를 만나보고 싶다’고 썼다. ‘듣자 하니 그녀는 조지 오웰과 아인 랜드의 팬이라던데 아주 특이하다.’자신과 비슷한 만물박사와 데이트 중 클레어 바우처(30세, 일명 캐나다 뮤지션 그라임스)는 재주가 많기로 유명하다. 최신 앨범 ‘Art Angels’(첫 부인 저스틴 머스크의 2005년작 소설 블러드에인절을 연상케 하는 제목)에서 모든 곡의 작사·엔지니어링·프로듀싱뿐만 아니라 앨범 커버 디자인도 직접 했다.그러나 그녀의 일부 팬은 불만이다.그라임스는 진보적이고 페미니스트적인 목소리의 소유자로 알려졌다. 이는 머스크와 테슬라의 노조탄압·차별 이미지와 충돌한다고 보는 팬이 적지 않다. 올해 두 사람이 커플이 됐다고 밝혔을 때 그녀의 팬들은 트위터를 통해 충격을 나타냈다.수십억 달러의 재산이 있어도 사랑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다.머스크는 지난해 롤링 스톤 잡지에 사랑에 관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 “나는 사랑을 하지 않으면, 오랜 동반자와 함께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 혼자 잠자리에 들면 죽을 것 같다.”전에는 머리 숱이 많지 않았다.머스크의 옛날 사진들을 보면 이마가 넓었는데 요즘엔 머리 숱이 많아졌다. 닥터 예이츠 헤어 사이언스의 윌리엄 예이츠 박사는 머스크가 모발이식 수술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경제 전문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에 말했다.방귀 끼는 유니콘을 표절했다.트위터 이용자 @lisaprank는 머스크를 ‘그라임스의 남자친구’로 부르면서 자신의 미술가 아버지가 그린 방귀 끼는 유니콘 그림을 머스크가 도용해 자신의 테슬라의 스케치 패드 홍보에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머스크는 소송 제기가 ‘한심한’ 짓이라며 그럴 경우 그 미술가가 그와 같은 ‘관심’에 고마워할 것이라면서 그런 주장을 일축했다.맥라렌 F1을 구입해 충돌사고를 냈다.1999년 머스크가 28세 때 최고급 맥라렌 F1 스포츠카를 구입했다. 몇 년 동안 잘 몰다가 페이팔 공동창업자 피터 틸에게 자랑하려다가 둑에 차를 처박았다.제임스 본드 카를 소유한다.머스크는 1977년작 제임스 본드 영화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에 등장한 잠수함차 소품 ‘웨트 넬리’를 2013년 98만9000달러에 인수했다. 그는 성명에서 테슬라 기술을 이용해 그 차량을 진짜 잠수함으로 변신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심슨네 가족들’에 카메오로 출연했다.‘심슨네 가족들’의 2015년 에피소드 ‘지구에 떨어진 머스크’ 편에서 자신의 음성 연기를 했다. 자신의 드래곤 우주선을 타고 스프링필드에 착륙해 호머 심슨으로부터 발명 아이디어를 얻는 스토리다. 미국 드라마 ‘빅뱅이론’의 한 에피소드에도 출연했다.30세 생일 전에 세상을 하직할 뻔했다.2000년 머스크는 브라질 여행을 다녀온 뒤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뻔했다. 전기 ‘일론 머스크, 미래의 설계자’에 따르면 그는 그 뒤 “휴가 여행을 갔다가 죽을 수 있다는 교훈을 그때 얻었다”고 말했다.- 뉴스위크 편집부

2018.08.13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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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우리의 슬픔을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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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비정규직법이 시행됐다. 한 직장에서 2년 이상 근무한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정규직이나 무기계약직으로 신분이 바뀌지 않는 한 회사를 떠나야 한다. 전국에서 정규직 전환을 꿈꿔왔던 많은 비정규직 근로자가 법 시행 하루 전인 6월 30일 해고됐다. 이후에도 비정규직 해고 사태는 이어지고 있다. 비정규직법 시행과 맞물려 해고된 근로자 3명의 지난 열흘 동안의 삶을 각각 따로 만나 들었다. 기사는 이들의 인터뷰를 묶어 지상토론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30대 중반 남자가 한 회사에서 8년 일하고도 아이를 못 키운다면…” “정규직 따가운 시선 속에서 묵묵히 일했는데 막상 돌아온 것은 해고장”  “평생 비정규직이라도 좋다. 다시 일터로 돌아가 월급을 받고 싶다” #1. 7월 9일 밤 9시 서울 서대문구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만난 KBS 비정규직 해고자 오진호(35)씨. 그는 “아이가 셋인 30대 중반 가장이 공영방송사에서 하루 16시간씩 7~8년 일을 했는데도 생활비 걱정을 해야 하는 사회가 정상이냐”고 물었다.불과 열흘 전까지, 오씨는 KBS 드라마제작국 세트장에서 드라마 천추태후, 장화홍련의 무대감독(플로어 매니저)이었다. 그러나 이제 오씨는 헤드셋 대신 머리띠를 매고, 대본 대신 투쟁을 알리는 전단지를 손에 쥔 채 출근투쟁을 하고 있다. 시종일관 당당했던 오씨였지만 “모레 막내아이 돌잔치가 있다”고 말할 땐 결국 고개를 떨궜다. #2. 7월 10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노조사무실로 올라가는 복도는 온통 대자보 천지였다. 눈에 쉽게 띄도록 색상지로 만든 대자보들은 언뜻 장식물처럼 화려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5월 15일 이 병원에서 해고된 비정규직 근로자 6명이 손으로 써 내려간 ‘살고 싶어요’란 글귀가 보이자 곧 눈이 번쩍 트였다.두 달 전만 해도 의무기록사로 이 병원 복도를 헤집고 다녔을 김성미(26)씨는 지금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를 인터뷰하는 내내 다른 해고자들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김씨는 “내 주변에도 일반 기업에서 해고된 비정규직이 많은데 공기업에서만 해고하고 있다고 하니 믿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수면 밑 수많은 해고자#3. 7월 8일 밤 9시 인천국제공항 경비대본부 건물. 조성덕(38)씨는 ‘파업전야’가 아닌 ‘시위전야’를 맞고 있었다. 그는 공공노조 인천공항지역지부 소속의 특경대 지회장이다. 이들은 이튿날 오전 10시, 장맛비가 앞이 안 보일 만큼 세차게 내렸지만 근무지 주변에서 해고자 복직과 노조탄압 항의시위를 벌였다. 인천국제공항이 하늘의 관문이라면 특경대(특수경비대)는 이 최첨단 국제공항의 관문이다. 특경대는 공항을 둘러싼 높은 담장 사이의 관문에서 사람과 짐을 검색하고 외곽 경비를 책임진다. 국가보안시설을 지키기 때문에 법적으로 파업조차 할 수 없다. 조성덕 지회장은 6월 30일 다른 동료 6명과 함께 회사로부터 해고통지를 받았다.이들이 수면의 비정규직 해고자라면 수면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수많은 해고자가 있다. 같은 비정규직이라도 직접 인력을 쓰는 회사에 고용된 사람이 있는 반면 조성덕씨처럼 어쩔 수 없이 몇 년 주기로 회사를 바꿔가며 비정규직 생활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조씨는 “한 회사의 비정규직이 된다면 정규직이라는 희망이라도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석박사급 비정규직 근로자도 법 앞에서는 예외가 없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이 해고한 석박사급 94명을 포함해 정부 출연기관에서 해고된 비정규직 인력들의 경우도 대표적인 수면 아래 해고자들이다. 대덕특구로 가 만나기로 했던 한 해고 연구원은 지인을 통해 ‘대신 싸워 달라”며 수면으로 부상하기를 꺼려했다. “어디서 일하느냐”고 물으면 단순히 장소를 얘기할 만큼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여전히 냉랭하다. 사진:전민규 기자 >> 언제 해고됐나?-조성덕 노조위원장이기 때문에 6월 15일 사측과 1차 교섭을 했다. 노조를 배제하고 입사지원서를 일괄적으로 쓰게 했기 때문이다. (조씨는 인천국제공항공사가 특수경비 외주를 준 SDK라는 회사의 계약 대상자다. 공사는 외주업체를 약 5년마다 입찰을 통해 바꾸는데 특수경비 근로자들은 그래서 5년마다 회사를 바꿔야 하기 때문에 형식상 입사지원서를 내고 있지만 근로자들은 대부분 동일하다. 이전 근무 회사에서 고용승계를 해왔다.) 6월 30일 경비대장이 구두로 나와 부지회장 등 7명과 계약을 맺지 않겠다고 말했다.-김성미 5월 20일이었다. 서울대병원 보라매병원에서 근무했는데 처음부터 2년 계약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6개월이었다. 그러더니 다시 6개월, 3개월, 6개월 이렇게 가다가 나중에는 두 달, 한 달짜리 계약을 했다. 계약연장 하루 전에도 아무 말이 없어 내가 물어봐야 했다. 직장생활이 정말 시한폭탄과 같았다.성실하게 일하고도 가계생활 마이너스-오진호 회사가 6월 5일 비정규직 420명이 해고대상이라고 발표했다. 그 다음은 다들 아는 내용이다. 나는 6월 30일 해고 통지를 받았다. 같이 해고된 사람들은 21명이다. 안전관리본부 청경 53명도 계약해지됐다고 들었는데 며칠 전에 무기계약으로 전환됐다.이에 대해 KBS 홍보실은 “비정규직 420명 중 계약해지는 6명, 자회사 이관이 12명이고 3명은 업무이관 절차에 필요한 동의서를 아직 안 낸 상태”라고 말했다. 청경들과 관련해서는 “최근 경영회의에서 이들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시키기로 결정한 것은 사실이고 이사회 보고를 남겨둔 상태”라고 설명했다.>> 해고 당시 상황을 얘기해 달라.-조성덕 인천공항공사가 일정 주기로 특수경비 업무를 수행할 외주업체를 입찰을 통해 선정한다. 올해 7월 1일부로 SDK가 입찰을 따냈다. 나는 시큐리티코리아에서 3년, 서운ST가 입찰을 따면서 그곳에서 5년을 일했다. 그런데 회사가 “갑 측(인천국제공항공사)과 야간 근무 10명을 더 늘려야 하는데 이를 주간에서 빼서 쓰는 것으로 하겠다는 얘기를 했다”며 사실상 근로환경을 악화시키겠다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우리(SDK)는 갑과 얘기했기 때문에 강수를 둘 수밖에 없다”며 압박을 시작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심지어 계약기간이나 연봉이 명시되지 않은 사실상의 백지 계약서를 내놓기까지 했다.-오진호 회사 사보에 경영방침이 실렸다. 이병순 사장이 몇 년 후까지 비용을 감축하겠다는 게 요지였다. 제작비도 줄였다.-김성미 계약을 연 단위가 아니라 개월 수로 끊게 된 것은 병원 측이 외주업체를 쓴다는 얘기가 나오면서부터다. 외주업체를 안 쓴다는 말이 나오면 6개월이 되고 또 쓴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2개월, 1개월짜리 계약이 난무했다.SDK 관리본부장은 “기간과 임금이 기재되지 않은 계약서를 준비했었지만 자체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우리가 사인하지 말아 달라고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해고가 아니라 회사가 바뀌기 때문에 면접결과와 이전 회사 근무실적을 놓고 최종적으로 7명을 불합격시킨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공항공사와 3년간 계약을 체결했지만 “비정규직법 시행에 따른 결과에 대해서는 의논하거나 아는 바가 없다”고 답했다.>> 단순히 비정규직법 시행으로 인한 문제가 아니라는 건가?-김성미 물론 비정규직법도 작용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외주업체를 쓰는 문제가 나온 거다. 2007년과 2008년에 서울대병원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비정규직이 400명이다. 외주업체가 들어오면서 비정규직법을 악용해 모두 해고한 것이다.-조성덕 비정규직법 이전부터 공기업 선진화 방안으로 우리가 공사의 비용절감 대책이 되고 있었다. 경영효율화라는 명목으로 인천공항 인력의 80% 이상이 외주업체 인력이라는 점도 오래된 문제다.-오진호 지금 비정규직 문제는 비용절감과는 상관이 없다. 왜냐면 많은 인원이 자회사로 이관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사장이 경영효율을 위해 이런 일들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판단된다. 내가 듣기로는 11월에 정규직도 명퇴 등 구조조정 대상이 된다고 했다. 개인의 재임을 위해 사장이 보여주기 위한 경영을 하는 것은 안 되지 않겠나.>>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연봉은 어느 정도였나?-오진호 본봉이 110만원 정도지만 수당을 합치면 한 달에 230만원 정도였다. 결혼해서 아이가 셋이니 그걸로 연명했다고 보면 된다. 부끄럽지만 집에서 보조를 받기도 했다.-김성미 기본급과 수당 합쳐 한 달에 180~200만원 정도였다.-조성덕 200만원이 안 된다. 문제는 회사를 계속 옮겨야 하기 때문에 신입과 12년차 숙련자의 월급 차이가 10만원도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리 많이 받아도 나와 비슷한 수준이다. 불완전한 법 시행한 것 자체가 문제 >> 해고 이후 생활은 어떻게 해나가고 있나? 당장 월급이 나오지 않아 곤란할 텐데. -오진호 따로 저축해 놓은 돈이 없다. 지난달에 일했던 것이 이번 달에 나오지만 그 이후는 실업급여를 신청하면 되고…. 모레가 아이 돌잔치다. 그런데, 아무리 우리나라 경제가 어렵다고 해도 이해가 안 간다. 어떻게 30대 중반이 돼서 같은 회사에서 8~9년을 일하는데 아이 키우고 가정을 보살필 수가 없는지 말이다. 나름대로 성실하게 일해 왔는데 가계생활이 마이너스로 살아가야 한다는 게 말이나 되나. -조성덕 저축은 꿈도 못 꾼다. 그나마 이 정도 월급이 된 게 불과 몇 년 전이다. 정규직 노조는 몇 백억원씩 있다지만 비정규직 노조는 돈이 많지 않은데도 조합원들이 힘이 돼주고 있다. 3개월 후에는 공공노조 차원에서 일부 지원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김성미 200만원이 채 안 되는 월급이었지만 2년 동안 2000만원을 모았다. 이 돈으로 버티고 있다. >> 직장 내에서 정규직과의 사이는 어땠나? -조성덕 우리는 500명 인원 중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다. 관리직도 마찬가지다. 사장 등 경영진도 회사가 입찰을 받으면서 6월 30일부로 임명된 사람들이다. 우리는 비정규직일지는 몰라도 대한민국의 관문이고 국가보안시설 갑급인 공항을 지킨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런 게 없으면 여기서 이렇게 오래 버틸 수 없다. -오진호 나는 사실 지금도 내가 비정규직이었고 그래서 이런 푸대접을 받는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전에 녹화 중인 스튜디오를 돌아보다가 같은 드라마를 만드는 이 많은 사람이 저마다 정규직, 비정규직, 파견, 아르바이트 이런 식으로 신분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었다. 슬픈 일이다. 나는 비정규직은 철폐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성미 병원 정규직 직원 한 명이 출산휴가를 낸 적이 있다. 3개월 휴직을 했는데 멀쩡하게 2년 계약을 맺고 다니던 친구를 서류상으로 해지하고 신규 비정규직으로 계약을 하게 해 그 자리를 메웠다. 그 와중에 11일 동안 일한 월급도 못 받았다. 같은 일을 하는데 정규직과 월급이 100만원 이상 차이가 난다. 수당과 휴가는 말할 것도 없다. 가장 힘든 건 (주저하며) 같이 근무했던 정규직 분들의 시선이 따갑다는 것을 느낄 때다. 정규직은 그들의 프라이드가 있다. 그 우월감은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대신 가슴을 더 짓누른다. 서울대병원 측은 이에 대해 비정규직을 대상으로 6월 30일 면접을 보고 이 중 일부를 해고했다는 내용에 대해 “병원 복도에 그런 내용의 대자보가 붙어 있는 것을 보긴 했는데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과거와 달리 올해 정규직 전환이 없는 이유와 정규직 직원의 출산휴가 기간에 비정규직 직원의 계약을 해지하고 해당 업무에 투입하기 위해 단기 계약을 맺은 사실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 비정규직법, 어떻게 돼야 한다고 보나? -조성덕 나는 해고됐지만 유예는 안 된다. 그저 미루자는 얘기다. 비정규직법이 만들어졌을 때는 한시적 근로자들이라고 판단해 이렇게 된 거다. 공항이 새로 문을 열고 8년 동안 계속 유지되고 있는 우리 일을 전혀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정규직이 전혀 될 수 없는 시스템이다. 우리는 비정규직이라도 되고 싶다. 해고될지언정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김성미 불완전한 법을 시행한 것 자체가 문제다. 몇 년을 더 유예한다는 건 의미가 없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고용을 보장해 우리를 보호하는 법 아니냐. 법의 목적이 안 맞으면 결함을 개선할 생각을 해야 한다. -오진호 올해 해결 안 되고 내년에 돼도 좋으니 심도 있게 논의해 손을 봤으면 좋겠다. 회사, 정규직 모두 고통분담을 하고 정부의 지원금도 보태서 바꿔나가야 한다. 기자회견에 참석해 보면 기자들이 어느 순간 사라진다. 지금도 비정규직법과 관련한 내용들이 쏙 들어갔다. 국민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으면 한다. 조성덕 지회장(가운데)이 7월 9일 오전 인천공항 지원단지에서 해고자들과 함께 시위를 하고 있다. 지금 생활이 너무 힘들다>> 그러면 해고가 이어지더라도 법 유예보다 시행이 더 낫다는 뜻인가?-조성덕 얼마 전에 공항공사가 자회사를 추진한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공기업 선진화 방안이 나오면서 팀 자체가 해체됐다고 들었다. 회사가 바뀔 때마다 이직한다면 공항도 두려운 일이다. 공사가 우리를 직접 무기계약으로라도 고용해 임금 같은 것은 나중에 맞추면 된다고 생각한다. 공항은 4년 동안 서비스 평가 1위였다. 공항 직원의 87%가 비정규직, 외주업체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그 업적을 과연 누가 이뤄낸 것인가. 비정규직들이다.-오진호 조성덕씨 말도 이해가 된다. 비정규직이라도 제대로 된 자회사에 근무하고 싶다는 뜻일 거다. 차라리 비정규직을 뽑지 말고 아르바이트를 구분해 뽑다가 자리가 생기면 정규직을 뽑아야 하지 않겠나. (10년 전부터 논의된 사항에서 역행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미국 경제가 흔들린다고 해도 그 여파가 대한민국 KBS에서 열심히 일하는 오진호란 사람한테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러니 어떻게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김성미 나도 마찬가지다. 나 같아도 외주업체 소속이라면 과거의 내 위치처럼 비정규직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외주업체를 많이 뽑는 추세인 것 같다. 하지만 (의료 부문에 있어서는) 전문성이 떨어지고 숙련도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김성미 나는 죽을 각오로 복직을 위해 투쟁한다. 평생 비정규직이라도 다시 일터로 돌아갈 수만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생활이 너무 힘들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눈치 보이고 울컥한 때도 많았지만 그때의 월급이라도 받고 싶다.-조성덕 해고된 조합원들을 원대 복귀시킬 때까지 투쟁하겠다. 법이 참 많다. 그런데 우리처럼 밑에 있는 계층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법은 없다. 정말,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 우리 일은 지금도 다른 공항에서는 청원경찰들이 하는 일이다. 바로 그런 것을 꿈꾸면서 이 일을 시작하지 않았겠나.-오진호 내 아이가 셋인데 30년 후에 내 아이들이 설령 똑같이 비정규직이 된다 하더라도 소송(오씨는 회사에 해고 무효 소송을 제기했다)에서 이겨서, 아버지처럼 살라고 말하고 싶다. 더 훗날에는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애들 사회책에서나 볼 수 있는 말이 되었으면 좋겠다. 용어풀이 비정규직법안 정확한 법률 명칭은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하 비정규직법안)이다. 2009년 7월 1일부터 시행된 비정규직법안은 한 직장에서 2년 이상 일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하는 법이다. 법 적용 대상은 5인 이상 사업장의 비정규직 가운데 기간제근로자, 파견근로자, 15시간 이상 단시간근로자다. 법안의 주요 내용으로는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금지와 기간제 근로 및 단시간 근로 남용 제한, 불법 파견에 대한 제재 등이 담겨 있다. 무기계약직 계약직과 정규직의 중간 형태로 임금이나 복지수준은 계약직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계약기간은 무기한으로, 대체적으로 정년까지 보장해 주는 개념이다. 정년까지 근무할 수 있기 때문에 고용 안정성 측면에서 정규직과 유사한 개념이다. 노동부는 무기계약직이 계약을 갱신하는 기간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정규직으로 인정하고 있다. 비정규직 사용제한 현 비정규직 법안은 사용 사유의 제한 없이 임시계약직을 허용하고 있다. 비정규직 사용 사유 제한이란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무기계약)을 원칙으로 하되, 일정한 사유가 있을 때만 비정규직을 허용하는 방식이다. 기간제 근로자의 사용을 억제함으로써 고용의 안정성을 가져오지만 비정규직의 사용 사유를 제한할 경우 고용감소 폭이 사용기간을 제한할 때보다 훨씬 더 커질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된다. 공기업 선진화 방안 정부는 공기업의 ‘체질개선’과 ‘거품빼기’를 모토로 지난해부터 총 6차례의 공기업 선진화 방안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129개 전체 공공기관의 12.7%에 해당하는 2만2000명의 인력 감축 ▶산업은행과 인천국제공항공사 등 24개 기관 민영화 또는 지분 매각 ▶주택공사와 토지공사의 통합 등 41개 기관을 16개 기관으로 통폐합 ▶청년인턴 채용과 대졸 초임 인하 등이다.

2009.07.13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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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대 미국의 대공황 탈출전략/근로자에 용기줘 불황터널 돌파

산업 일반

“지금 우리에게는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미국의 위대한 국민은 현재까지 존속해 왔던 것처럼 미래에도 존속할 것이며 새로운 생명력을 소생시켜 번영하게 될 것입니다.” 1933년 3월4일 백악관에서 개최된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루스벨트는 취임연설에서 국민에게 용기를 가지라고 호소했다. 1929년 몰아닥친 공황으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의 용기가 없다면 위기는 극복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미 3년여의 공황을 겪은 미국 국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용기였으며 루스벨트의 리더십이 강렬하게 빛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1929년 10월24일 ‘검은 목요일’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온 미국의 대공황은 최근의 한국 상황과 유사한 점이 많다.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는 점부터가 그렇다. 미국의 대공황은 1928년 제31대 대통령 후버가 “빈곤에 대한 마지막 승리가 다가왔다”고 선언한 직후 미국인에게 떨어진 ‘날벼락’이었다. 한국의 경제 규모로 봤을 때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정부 발표를 믿다가 국제통화기금(IMF)의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하는 한국 국민들의 충격과 별 차이가 없다. 현상도 비슷하다. 장기간의 호황 끝에 대공황 당시 미국의 주식은 ‘검은 목요일’ 이후까지 지속되어 10월29~30일 이틀 동안에도 하루 11%를 넘는 대폭락을 경험한다. 또 대공황이 시작된 1929년에서 1933년까지 4년간 미국인의 명목 국민 순생산액은 9백60억 달러에서 4백90억 달러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은 향후 1∼2년간 한국 상황과 자주 비유될 것이며 뭔가 교훈을 찾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새로운 연구 대상으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대공황시 실업률 최고 40% 그러나 무엇보다 대규모 ‘실업’이 당시의 정부나 국민을 괴롭힌 가장 큰 ‘공적(公敵)’이었다는 점에서 미국의 대공황은 한국에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불황의 정점기인 1932∼33년의 실업률은 자그마치 25%에 육박,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모두 1천3백만명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했고 일부는 유랑민이 돼 거리를 떠돌아야 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수치를 “공식적일 뿐”이라며 실제 실업자 수를 최고 3천4백만명으로까지 추산하고 있다. 40∼50%에 이르는 실업률이다. 살인과 방화, 절도 등 각종 사회범죄가 증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소설 ‘분노의 포도’에서 존 스타인백은 “도로변에는 빈민 캠프가 늘어섰다. 굶주림에 대한 공포, 끼니를 걸러 볼품없이 말라버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이들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다”며 중산층이 빈곤으로 내몰리는 참담한 모습을 묘사했다. 이처럼 비참하지는 않겠지만 한국 중산층도 이같은 문제에 시달릴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새해 벽두부터 튀어나온 ‘정리해고제’는 기업이 살기 위해 불가피하다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지난해 초에도 거쳐갔던 바람이지만 이번에는 그냥 지나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내년 실업자 수를 최고 2백만명까지 추정하는 연구보고서가 있으니 미국의 대공황과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미국은 노동정책에서 이 실업문제를 어떻게 다뤘으며 어떻게 극복한 것일까. 또 우리는 그들의 경험에서 어떤 지혜를 얻어야 할까. 지금 한국 경제를 담당하는 모든 정책결정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주제일 것이다. 실업을 극복하기 위한 미국 정부의 노력을 배우기 위해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당시 사회 분위기. 1920년대까지 개인주의와 자유방임주의가 미국을 지배하는 이념이었다. 사적 영역에 대한 국가 개입은 최소화되는 것이 이상적이었다. 노사관계는 물론 아동·여성노동에 대한 보호입법, 실업 등 사회보장에 관한 정부 개입도 ‘비미국적’인 것으로 비판받아 마땅했다. 대공황이 있기 전 상황을 보자. ‘번영의 시대’를 구가했던 기업들은 겁없이 자본설비를 확장시켰다. 당시 많은 전문가들은 이 수치를 근거로 경제는 지속적인 번영을 구가할 것으로 예측했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주가는 투자가들에게 멀지 않아 부자가 되리라는 기대를 심어줬다. 노사분규는 그 어느 때보다 적었다. 기업은 노조 없이도 노동자들이 풍요를 누릴 수 있다고 선전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공황은 이같은 기대와 꿈을 하루 아침에 ‘환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당시 실업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있었던 인물이 바로 후버 대통령이었다. 1928년에 대통령에 당선돼 1933년 임기를 마쳤으니 표면상으로 미국의 대공황은 전적으로 그의 몫이었다. 정권 교체기에 발생된 한국의 IMF 불황과는 이 점에서 성격을 달리 한다. 후버 대통령 역시 책임을 통감하고 공황을 넘기 위한 대규모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훗날 사가(史家)들은 그의 대응방식에 명백한 한계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대공황을 불러 일으킨 바로 그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것이다. 개인주의에 입각한 ‘미국적 체계’강화에 그의 모든 노력이 집중됐고 여전히 정부 간섭을 최소화했다. 따라서 불황을 맞는 모든 국가의 초기처럼 그 역시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에게 자발적 협력을 촉구했을 뿐이다. 기업인들에게는 생산 감축과 해고를 하지 말아달라고, 노동자들에게는 더 높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조건을 요구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세계 자본주의 역사에서 보여지는 노·사 ‘고통분담’의 원류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발적 협력에 의지한 채 정부가 이 모든 절차를 통제할 권위를 갖지 못했다는 점이 바로 문제의 핵이었다. 1933년 이 공황의 처리는 마침내 루스벨트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의 취임연설은 후버의 그것과는 천지차이였다. 그는 무엇보다 국민들을 패배감에서 끌어 내야 했으며 여기에 자신의 리더십을 십분 발휘했다.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것은 바로 두려움 그 자체일 뿐”이라며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다. 루스벨트는 또한 ‘말’이 아닌 ‘행동’으로 뭔가를 보여줘야 했다. 검증되지 않은 약이라도 써야 할 만큼 경제는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이른바 ‘뉴딜’이란 말 그대로 새로운 정책(deal)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새로운 도박(deal)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일관된 이념이나 철학이 있었다기보다는 급박한 사회·경제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일종의 ‘실험’이었기 때문이다. 뉴딜정책은 말 그대로‘대도박’ 뉴딜은 미국이 그 동안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했던 많은 가치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기업과 노동자, 정부 모두 국가의 간섭이 필요없다는 자유방임주의를 버렸다. 동시에 국가는 그 동안 개인에 의해, 혹은 사적 영역에서 해결해야 마땅했던 빈곤과 실업문제를 책임졌다. 이제 그 같은 문제들은 개인의 손을 떠났으며 공동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이 있었던 것이다. 초기 뉴딜정책은 긴급적, 구호적 성격이 강했다. 목적은 국민소득을 증대시켜 구매력을 증진시킴으로써 경제회복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임금인상, 고용확대, 농산물 가격 인상 그리고 실업자와 빈민에 대한 구호금 지급 등의 정책이 포함됐다. 그러나 1935년 이후 시행되는 제2차 뉴딜정책은 제도적·개혁적 성격이 강하며 항구적 정책으로 정착된다. 제2차 뉴딜정책을 통해서 정부는 보다 강화된 통제력을 가지고, 노동·사회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노동정책에 초점을 맞춰보자. 한 마디로 뉴딜정책은 고용창출 정책이었다. 후버와 초기 루스벨트 대통령의 초기 정책이 빈민구제·구호의 성격이 강했던 반면 후기에 와서 루스벨트는 이같은 정책이 공황을 극복하기에 실효성이 의심된다고 판단했다. 제1차 뉴딜정책 기간에는 전국산업부흥법(NIRA)을 만들어 전국부흥청(NRA)을 통해 방대한 수의 실업자(연간 약 4백만명)를 고용했다. 또 공공사업청을 설립해 실업자들이 임시적으로 참가하도록 조치했는데 여기에는 도로, 학교, 공원건설 등이 포함된다. 이어 1935년에는 사업추진청을 설립, 2백10만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공공사업을 추진한다. 또한 연방긴급구제청을 통해 각 주에 소재한 구제기관들의 파산을 막을 현금을 교부했다. 그러나 정부의 이같은 노력은 후세 사가들의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항구적인 일자리를 창출하지는 못했다. 루스벨트 대통령 재임중 실업률은 여전히 20%를 넘나들었고 대체적으로 1930년대는 15% 이상의 실업률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루스벨트의 정책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장기적으로, 특히 1940년대 이후의 대호황은 분명 뉴딜이 차지할 몫이었다. 뉴딜은 우리가 배워야 할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시켰고 국민들을 좌절에서 건져냈다. 말로 그친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입장에서 직접 일자리를 제공했고 각종 권익을 주면서 동시에 경제난을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준 것이다. 또 이전까지 주정부나 사설 자선단체의 몫이었던 빈곤과 실업이 더 이상 사적 영역이 책임져야 할 문제가 아니라고 규정함으로써 국민을 좌절과 비탄에서 건질 수 있었다. 이밖에도 최저 임금제 및 최고 노동시간제 등이 이 시기에 도입됐다는 점도 중요하다. 국민 대부분이 중산층이고 또 이들 대부분이 노동자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노동자의 권리를 강화시킨다는 정책은 곧 이들의 용기를 북돋워 준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미국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그리고 파업권이 보장됨으로써 이들의 권익과 지위가 향상된 것은 경제와 기업이 잘 나가고 노동자들의 삶이 윤택했던 시절이 아닌 바로 이때였다. 이같은 노동자 권익 보호 및 생산성 향상은 제2차 뉴딜 노동정책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그 핵심은 이른바 ‘와그너법’으로 불리는 전국노동관계법이다. 이 법은 노동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파업권 등으로 노동자의 권익을 보장하는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부당노동행위제도를 확립한 것이다. 기업의 노조탄압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했고 전국 노동관계위원회의 권한을 대폭 강화, 정부가 노동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하는 한편 노사 쌍방이 대등한 위치에서 단체교섭을 하도록 유도했다. 이 법의 목적은 단순히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 자본주의 경제전체를 회복하기 위한 경제적 목적에 있었던 것이다. 정부는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증대시키고 더 많은 유효수요를 창출해 경제회복을 촉진시키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전국노동관계법의 주창자인 상원의원 로버트 와그너는 대공황의 원인을 1920년대 노동세력의 빈약과, 이로 인해 노사간 단체교섭이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영원한 번영이 의존할 구매력의 공정한 분배”를 확보하기 위해 단체교섭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업 역시 이같은 방향을 받아들였다. 최고 재판소가 전국노동관계법의 합헌판결을 내린 이후 기업들은 점차 노조를 민주사회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받아들였다. 노조의 단체교섭권이 강화된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결국 장기적으로 경기회복이 촉진된 것은 모두 이같은 정부·기업·노동자의 협력에서 비롯됐다고 결론짓는다. 뉴딜 노동정책에 대한 다양하고도 때로는 상반된 해석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된다. 그러나 뉴딜이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교훈은 아직도 유효하다. 우선 대공황이라는 위기 상황이 있었기에 미국은 뉴딜이라는 대수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공황은 문제를 여지없이 드러내 줬고 뉴딜은 기존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결사’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뉴딜이 가져온 사고의 전환은 가위 ‘혁명적’이었다. 또 열악한 경제상황에서 정부는 노동자의 권익을 우선시함으로써 산업자본주의를 민주화하고 자본주의의 공평한 분배에 한 걸음 접근할 수 있었다. 정부는 실업자 구제대책을 구체적으로 세우고 그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국민들의 신뢰와 자신감을 회복했고, 이는 실제적으로 실업문제를 해결했던 것 이상의 효과를 가져왔다. 마지막으로 빈곤과 실업 문제는 단지 개인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해결돼야 할 문제이며 이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 해결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뉴딜은 보여줬다. 지난 1월7일 정부는 실업종합대책을 발표하고 다음달부터 시행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실업급여 수혜기간을 최고 1백80일로 늘리고 그 대상 기업의 폭도 확대했다. 이와 함께 고용창출을 위해 2천개 기업에 6천억원의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한국이 직면한 실업문제가 이 정도선에서 해결되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회의의 소리도 높다. 미국의 대공황에 비춰봤을 때 여전히 후버식 ‘전통의 연장선’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정부가 기업의 해고정책에 지향점을 두고 정리해고를 인정한다는 것 역시 노동자에게 용기를 줘 사태를 해결하려는 미국의 정책과는 거리가 있다. 전통의 파괴, 대단위 실험이라는 새로운 정책, 뉴딜이 필요한 시기가 올지도 모르겠다.

1997.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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