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대 미국의 대공황 탈출전략/근로자에 용기줘 불황터널 돌파
30년대 미국의 대공황 탈출전략/근로자에 용기줘 불황터널 돌파
“지금 우리에게는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미국의 위대한 국민은 현재까지 존속해 왔던 것처럼 미래에도 존속할 것이며 새로운 생명력을 소생시켜 번영하게 될 것입니다.” 1933년 3월4일 백악관에서 개최된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루스벨트는 취임연설에서 국민에게 용기를 가지라고 호소했다. 1929년 몰아닥친 공황으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의 용기가 없다면 위기는 극복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미 3년여의 공황을 겪은 미국 국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용기였으며 루스벨트의 리더십이 강렬하게 빛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1929년 10월24일 ‘검은 목요일’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온 미국의 대공황은 최근의 한국 상황과 유사한 점이 많다.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는 점부터가 그렇다. 미국의 대공황은 1928년 제31대 대통령 후버가 “빈곤에 대한 마지막 승리가 다가왔다”고 선언한 직후 미국인에게 떨어진 ‘날벼락’이었다. 한국의 경제 규모로 봤을 때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정부 발표를 믿다가 국제통화기금(IMF)의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하는 한국 국민들의 충격과 별 차이가 없다. 현상도 비슷하다. 장기간의 호황 끝에 대공황 당시 미국의 주식은 ‘검은 목요일’ 이후까지 지속되어 10월29~30일 이틀 동안에도 하루 11%를 넘는 대폭락을 경험한다. 또 대공황이 시작된 1929년에서 1933년까지 4년간 미국인의 명목 국민 순생산액은 9백60억 달러에서 4백90억 달러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은 향후 1∼2년간 한국 상황과 자주 비유될 것이며 뭔가 교훈을 찾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새로운 연구 대상으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대공황시 실업률 최고 40% 그러나 무엇보다 대규모 ‘실업’이 당시의 정부나 국민을 괴롭힌 가장 큰 ‘공적(公敵)’이었다는 점에서 미국의 대공황은 한국에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불황의 정점기인 1932∼33년의 실업률은 자그마치 25%에 육박,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모두 1천3백만명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했고 일부는 유랑민이 돼 거리를 떠돌아야 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수치를 “공식적일 뿐”이라며 실제 실업자 수를 최고 3천4백만명으로까지 추산하고 있다. 40∼50%에 이르는 실업률이다. 살인과 방화, 절도 등 각종 사회범죄가 증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소설 ‘분노의 포도’에서 존 스타인백은 “도로변에는 빈민 캠프가 늘어섰다. 굶주림에 대한 공포, 끼니를 걸러 볼품없이 말라버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이들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다”며 중산층이 빈곤으로 내몰리는 참담한 모습을 묘사했다. 이처럼 비참하지는 않겠지만 한국 중산층도 이같은 문제에 시달릴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새해 벽두부터 튀어나온 ‘정리해고제’는 기업이 살기 위해 불가피하다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지난해 초에도 거쳐갔던 바람이지만 이번에는 그냥 지나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내년 실업자 수를 최고 2백만명까지 추정하는 연구보고서가 있으니 미국의 대공황과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미국은 노동정책에서 이 실업문제를 어떻게 다뤘으며 어떻게 극복한 것일까. 또 우리는 그들의 경험에서 어떤 지혜를 얻어야 할까. 지금 한국 경제를 담당하는 모든 정책결정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주제일 것이다. 실업을 극복하기 위한 미국 정부의 노력을 배우기 위해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당시 사회 분위기. 1920년대까지 개인주의와 자유방임주의가 미국을 지배하는 이념이었다. 사적 영역에 대한 국가 개입은 최소화되는 것이 이상적이었다. 노사관계는 물론 아동·여성노동에 대한 보호입법, 실업 등 사회보장에 관한 정부 개입도 ‘비미국적’인 것으로 비판받아 마땅했다. 대공황이 있기 전 상황을 보자. ‘번영의 시대’를 구가했던 기업들은 겁없이 자본설비를 확장시켰다. 당시 많은 전문가들은 이 수치를 근거로 경제는 지속적인 번영을 구가할 것으로 예측했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주가는 투자가들에게 멀지 않아 부자가 되리라는 기대를 심어줬다. 노사분규는 그 어느 때보다 적었다. 기업은 노조 없이도 노동자들이 풍요를 누릴 수 있다고 선전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공황은 이같은 기대와 꿈을 하루 아침에 ‘환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당시 실업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있었던 인물이 바로 후버 대통령이었다. 1928년에 대통령에 당선돼 1933년 임기를 마쳤으니 표면상으로 미국의 대공황은 전적으로 그의 몫이었다. 정권 교체기에 발생된 한국의 IMF 불황과는 이 점에서 성격을 달리 한다. 후버 대통령 역시 책임을 통감하고 공황을 넘기 위한 대규모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훗날 사가(史家)들은 그의 대응방식에 명백한 한계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대공황을 불러 일으킨 바로 그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것이다. 개인주의에 입각한 ‘미국적 체계’강화에 그의 모든 노력이 집중됐고 여전히 정부 간섭을 최소화했다. 따라서 불황을 맞는 모든 국가의 초기처럼 그 역시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에게 자발적 협력을 촉구했을 뿐이다. 기업인들에게는 생산 감축과 해고를 하지 말아달라고, 노동자들에게는 더 높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조건을 요구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세계 자본주의 역사에서 보여지는 노·사 ‘고통분담’의 원류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발적 협력에 의지한 채 정부가 이 모든 절차를 통제할 권위를 갖지 못했다는 점이 바로 문제의 핵이었다. 1933년 이 공황의 처리는 마침내 루스벨트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의 취임연설은 후버의 그것과는 천지차이였다. 그는 무엇보다 국민들을 패배감에서 끌어 내야 했으며 여기에 자신의 리더십을 십분 발휘했다.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것은 바로 두려움 그 자체일 뿐”이라며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다. 루스벨트는 또한 ‘말’이 아닌 ‘행동’으로 뭔가를 보여줘야 했다. 검증되지 않은 약이라도 써야 할 만큼 경제는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이른바 ‘뉴딜’이란 말 그대로 새로운 정책(deal)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새로운 도박(deal)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일관된 이념이나 철학이 있었다기보다는 급박한 사회·경제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일종의 ‘실험’이었기 때문이다.
뉴딜정책은 말 그대로‘대도박’ 뉴딜은 미국이 그 동안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했던 많은 가치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기업과 노동자, 정부 모두 국가의 간섭이 필요없다는 자유방임주의를 버렸다. 동시에 국가는 그 동안 개인에 의해, 혹은 사적 영역에서 해결해야 마땅했던 빈곤과 실업문제를 책임졌다. 이제 그 같은 문제들은 개인의 손을 떠났으며 공동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이 있었던 것이다. 초기 뉴딜정책은 긴급적, 구호적 성격이 강했다. 목적은 국민소득을 증대시켜 구매력을 증진시킴으로써 경제회복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임금인상, 고용확대, 농산물 가격 인상 그리고 실업자와 빈민에 대한 구호금 지급 등의 정책이 포함됐다. 그러나 1935년 이후 시행되는 제2차 뉴딜정책은 제도적·개혁적 성격이 강하며 항구적 정책으로 정착된다. 제2차 뉴딜정책을 통해서 정부는 보다 강화된 통제력을 가지고, 노동·사회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노동정책에 초점을 맞춰보자. 한 마디로 뉴딜정책은 고용창출 정책이었다. 후버와 초기 루스벨트 대통령의 초기 정책이 빈민구제·구호의 성격이 강했던 반면 후기에 와서 루스벨트는 이같은 정책이 공황을 극복하기에 실효성이 의심된다고 판단했다. 제1차 뉴딜정책 기간에는 전국산업부흥법(NIRA)을 만들어 전국부흥청(NRA)을 통해 방대한 수의 실업자(연간 약 4백만명)를 고용했다. 또 공공사업청을 설립해 실업자들이 임시적으로 참가하도록 조치했는데 여기에는 도로, 학교, 공원건설 등이 포함된다. 이어 1935년에는 사업추진청을 설립, 2백10만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공공사업을 추진한다. 또한 연방긴급구제청을 통해 각 주에 소재한 구제기관들의 파산을 막을 현금을 교부했다. 그러나 정부의 이같은 노력은 후세 사가들의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항구적인 일자리를 창출하지는 못했다. 루스벨트 대통령 재임중 실업률은 여전히 20%를 넘나들었고 대체적으로 1930년대는 15% 이상의 실업률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루스벨트의 정책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장기적으로, 특히 1940년대 이후의 대호황은 분명 뉴딜이 차지할 몫이었다. 뉴딜은 우리가 배워야 할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시켰고 국민들을 좌절에서 건져냈다. 말로 그친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입장에서 직접 일자리를 제공했고 각종 권익을 주면서 동시에 경제난을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준 것이다. 또 이전까지 주정부나 사설 자선단체의 몫이었던 빈곤과 실업이 더 이상 사적 영역이 책임져야 할 문제가 아니라고 규정함으로써 국민을 좌절과 비탄에서 건질 수 있었다. 이밖에도 최저 임금제 및 최고 노동시간제 등이 이 시기에 도입됐다는 점도 중요하다. 국민 대부분이 중산층이고 또 이들 대부분이 노동자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노동자의 권리를 강화시킨다는 정책은 곧 이들의 용기를 북돋워 준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미국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그리고 파업권이 보장됨으로써 이들의 권익과 지위가 향상된 것은 경제와 기업이 잘 나가고 노동자들의 삶이 윤택했던 시절이 아닌 바로 이때였다. 이같은 노동자 권익 보호 및 생산성 향상은 제2차 뉴딜 노동정책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그 핵심은 이른바 ‘와그너법’으로 불리는 전국노동관계법이다. 이 법은 노동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파업권 등으로 노동자의 권익을 보장하는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부당노동행위제도를 확립한 것이다. 기업의 노조탄압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했고 전국 노동관계위원회의 권한을 대폭 강화, 정부가 노동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하는 한편 노사 쌍방이 대등한 위치에서 단체교섭을 하도록 유도했다. 이 법의 목적은 단순히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 자본주의 경제전체를 회복하기 위한 경제적 목적에 있었던 것이다. 정부는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증대시키고 더 많은 유효수요를 창출해 경제회복을 촉진시키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전국노동관계법의 주창자인 상원의원 로버트 와그너는 대공황의 원인을 1920년대 노동세력의 빈약과, 이로 인해 노사간 단체교섭이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영원한 번영이 의존할 구매력의 공정한 분배”를 확보하기 위해 단체교섭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업 역시 이같은 방향을 받아들였다. 최고 재판소가 전국노동관계법의 합헌판결을 내린 이후 기업들은 점차 노조를 민주사회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받아들였다. 노조의 단체교섭권이 강화된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결국 장기적으로 경기회복이 촉진된 것은 모두 이같은 정부·기업·노동자의 협력에서 비롯됐다고 결론짓는다. 뉴딜 노동정책에 대한 다양하고도 때로는 상반된 해석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된다. 그러나 뉴딜이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교훈은 아직도 유효하다. 우선 대공황이라는 위기 상황이 있었기에 미국은 뉴딜이라는 대수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공황은 문제를 여지없이 드러내 줬고 뉴딜은 기존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결사’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뉴딜이 가져온 사고의 전환은 가위 ‘혁명적’이었다. 또 열악한 경제상황에서 정부는 노동자의 권익을 우선시함으로써 산업자본주의를 민주화하고 자본주의의 공평한 분배에 한 걸음 접근할 수 있었다. 정부는 실업자 구제대책을 구체적으로 세우고 그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국민들의 신뢰와 자신감을 회복했고, 이는 실제적으로 실업문제를 해결했던 것 이상의 효과를 가져왔다. 마지막으로 빈곤과 실업 문제는 단지 개인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해결돼야 할 문제이며 이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 해결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뉴딜은 보여줬다. 지난 1월7일 정부는 실업종합대책을 발표하고 다음달부터 시행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실업급여 수혜기간을 최고 1백80일로 늘리고 그 대상 기업의 폭도 확대했다. 이와 함께 고용창출을 위해 2천개 기업에 6천억원의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한국이 직면한 실업문제가 이 정도선에서 해결되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회의의 소리도 높다. 미국의 대공황에 비춰봤을 때 여전히 후버식 ‘전통의 연장선’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정부가 기업의 해고정책에 지향점을 두고 정리해고를 인정한다는 것 역시 노동자에게 용기를 줘 사태를 해결하려는 미국의 정책과는 거리가 있다. 전통의 파괴, 대단위 실험이라는 새로운 정책, 뉴딜이 필요한 시기가 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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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시 실업률 최고 40% 그러나 무엇보다 대규모 ‘실업’이 당시의 정부나 국민을 괴롭힌 가장 큰 ‘공적(公敵)’이었다는 점에서 미국의 대공황은 한국에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불황의 정점기인 1932∼33년의 실업률은 자그마치 25%에 육박,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모두 1천3백만명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했고 일부는 유랑민이 돼 거리를 떠돌아야 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수치를 “공식적일 뿐”이라며 실제 실업자 수를 최고 3천4백만명으로까지 추산하고 있다. 40∼50%에 이르는 실업률이다. 살인과 방화, 절도 등 각종 사회범죄가 증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소설 ‘분노의 포도’에서 존 스타인백은 “도로변에는 빈민 캠프가 늘어섰다. 굶주림에 대한 공포, 끼니를 걸러 볼품없이 말라버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이들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다”며 중산층이 빈곤으로 내몰리는 참담한 모습을 묘사했다. 이처럼 비참하지는 않겠지만 한국 중산층도 이같은 문제에 시달릴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새해 벽두부터 튀어나온 ‘정리해고제’는 기업이 살기 위해 불가피하다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지난해 초에도 거쳐갔던 바람이지만 이번에는 그냥 지나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내년 실업자 수를 최고 2백만명까지 추정하는 연구보고서가 있으니 미국의 대공황과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미국은 노동정책에서 이 실업문제를 어떻게 다뤘으며 어떻게 극복한 것일까. 또 우리는 그들의 경험에서 어떤 지혜를 얻어야 할까. 지금 한국 경제를 담당하는 모든 정책결정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주제일 것이다. 실업을 극복하기 위한 미국 정부의 노력을 배우기 위해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당시 사회 분위기. 1920년대까지 개인주의와 자유방임주의가 미국을 지배하는 이념이었다. 사적 영역에 대한 국가 개입은 최소화되는 것이 이상적이었다. 노사관계는 물론 아동·여성노동에 대한 보호입법, 실업 등 사회보장에 관한 정부 개입도 ‘비미국적’인 것으로 비판받아 마땅했다. 대공황이 있기 전 상황을 보자. ‘번영의 시대’를 구가했던 기업들은 겁없이 자본설비를 확장시켰다. 당시 많은 전문가들은 이 수치를 근거로 경제는 지속적인 번영을 구가할 것으로 예측했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주가는 투자가들에게 멀지 않아 부자가 되리라는 기대를 심어줬다. 노사분규는 그 어느 때보다 적었다. 기업은 노조 없이도 노동자들이 풍요를 누릴 수 있다고 선전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공황은 이같은 기대와 꿈을 하루 아침에 ‘환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당시 실업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있었던 인물이 바로 후버 대통령이었다. 1928년에 대통령에 당선돼 1933년 임기를 마쳤으니 표면상으로 미국의 대공황은 전적으로 그의 몫이었다. 정권 교체기에 발생된 한국의 IMF 불황과는 이 점에서 성격을 달리 한다. 후버 대통령 역시 책임을 통감하고 공황을 넘기 위한 대규모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훗날 사가(史家)들은 그의 대응방식에 명백한 한계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대공황을 불러 일으킨 바로 그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것이다. 개인주의에 입각한 ‘미국적 체계’강화에 그의 모든 노력이 집중됐고 여전히 정부 간섭을 최소화했다. 따라서 불황을 맞는 모든 국가의 초기처럼 그 역시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에게 자발적 협력을 촉구했을 뿐이다. 기업인들에게는 생산 감축과 해고를 하지 말아달라고, 노동자들에게는 더 높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조건을 요구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세계 자본주의 역사에서 보여지는 노·사 ‘고통분담’의 원류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발적 협력에 의지한 채 정부가 이 모든 절차를 통제할 권위를 갖지 못했다는 점이 바로 문제의 핵이었다. 1933년 이 공황의 처리는 마침내 루스벨트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의 취임연설은 후버의 그것과는 천지차이였다. 그는 무엇보다 국민들을 패배감에서 끌어 내야 했으며 여기에 자신의 리더십을 십분 발휘했다.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것은 바로 두려움 그 자체일 뿐”이라며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다. 루스벨트는 또한 ‘말’이 아닌 ‘행동’으로 뭔가를 보여줘야 했다. 검증되지 않은 약이라도 써야 할 만큼 경제는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이른바 ‘뉴딜’이란 말 그대로 새로운 정책(deal)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새로운 도박(deal)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일관된 이념이나 철학이 있었다기보다는 급박한 사회·경제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일종의 ‘실험’이었기 때문이다.
뉴딜정책은 말 그대로‘대도박’ 뉴딜은 미국이 그 동안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했던 많은 가치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기업과 노동자, 정부 모두 국가의 간섭이 필요없다는 자유방임주의를 버렸다. 동시에 국가는 그 동안 개인에 의해, 혹은 사적 영역에서 해결해야 마땅했던 빈곤과 실업문제를 책임졌다. 이제 그 같은 문제들은 개인의 손을 떠났으며 공동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이 있었던 것이다. 초기 뉴딜정책은 긴급적, 구호적 성격이 강했다. 목적은 국민소득을 증대시켜 구매력을 증진시킴으로써 경제회복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임금인상, 고용확대, 농산물 가격 인상 그리고 실업자와 빈민에 대한 구호금 지급 등의 정책이 포함됐다. 그러나 1935년 이후 시행되는 제2차 뉴딜정책은 제도적·개혁적 성격이 강하며 항구적 정책으로 정착된다. 제2차 뉴딜정책을 통해서 정부는 보다 강화된 통제력을 가지고, 노동·사회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노동정책에 초점을 맞춰보자. 한 마디로 뉴딜정책은 고용창출 정책이었다. 후버와 초기 루스벨트 대통령의 초기 정책이 빈민구제·구호의 성격이 강했던 반면 후기에 와서 루스벨트는 이같은 정책이 공황을 극복하기에 실효성이 의심된다고 판단했다. 제1차 뉴딜정책 기간에는 전국산업부흥법(NIRA)을 만들어 전국부흥청(NRA)을 통해 방대한 수의 실업자(연간 약 4백만명)를 고용했다. 또 공공사업청을 설립해 실업자들이 임시적으로 참가하도록 조치했는데 여기에는 도로, 학교, 공원건설 등이 포함된다. 이어 1935년에는 사업추진청을 설립, 2백10만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공공사업을 추진한다. 또한 연방긴급구제청을 통해 각 주에 소재한 구제기관들의 파산을 막을 현금을 교부했다. 그러나 정부의 이같은 노력은 후세 사가들의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항구적인 일자리를 창출하지는 못했다. 루스벨트 대통령 재임중 실업률은 여전히 20%를 넘나들었고 대체적으로 1930년대는 15% 이상의 실업률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루스벨트의 정책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장기적으로, 특히 1940년대 이후의 대호황은 분명 뉴딜이 차지할 몫이었다. 뉴딜은 우리가 배워야 할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시켰고 국민들을 좌절에서 건져냈다. 말로 그친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입장에서 직접 일자리를 제공했고 각종 권익을 주면서 동시에 경제난을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준 것이다. 또 이전까지 주정부나 사설 자선단체의 몫이었던 빈곤과 실업이 더 이상 사적 영역이 책임져야 할 문제가 아니라고 규정함으로써 국민을 좌절과 비탄에서 건질 수 있었다. 이밖에도 최저 임금제 및 최고 노동시간제 등이 이 시기에 도입됐다는 점도 중요하다. 국민 대부분이 중산층이고 또 이들 대부분이 노동자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노동자의 권리를 강화시킨다는 정책은 곧 이들의 용기를 북돋워 준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미국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그리고 파업권이 보장됨으로써 이들의 권익과 지위가 향상된 것은 경제와 기업이 잘 나가고 노동자들의 삶이 윤택했던 시절이 아닌 바로 이때였다. 이같은 노동자 권익 보호 및 생산성 향상은 제2차 뉴딜 노동정책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그 핵심은 이른바 ‘와그너법’으로 불리는 전국노동관계법이다. 이 법은 노동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파업권 등으로 노동자의 권익을 보장하는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부당노동행위제도를 확립한 것이다. 기업의 노조탄압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했고 전국 노동관계위원회의 권한을 대폭 강화, 정부가 노동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하는 한편 노사 쌍방이 대등한 위치에서 단체교섭을 하도록 유도했다. 이 법의 목적은 단순히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 자본주의 경제전체를 회복하기 위한 경제적 목적에 있었던 것이다. 정부는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증대시키고 더 많은 유효수요를 창출해 경제회복을 촉진시키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전국노동관계법의 주창자인 상원의원 로버트 와그너는 대공황의 원인을 1920년대 노동세력의 빈약과, 이로 인해 노사간 단체교섭이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영원한 번영이 의존할 구매력의 공정한 분배”를 확보하기 위해 단체교섭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업 역시 이같은 방향을 받아들였다. 최고 재판소가 전국노동관계법의 합헌판결을 내린 이후 기업들은 점차 노조를 민주사회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받아들였다. 노조의 단체교섭권이 강화된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결국 장기적으로 경기회복이 촉진된 것은 모두 이같은 정부·기업·노동자의 협력에서 비롯됐다고 결론짓는다. 뉴딜 노동정책에 대한 다양하고도 때로는 상반된 해석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된다. 그러나 뉴딜이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교훈은 아직도 유효하다. 우선 대공황이라는 위기 상황이 있었기에 미국은 뉴딜이라는 대수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공황은 문제를 여지없이 드러내 줬고 뉴딜은 기존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결사’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뉴딜이 가져온 사고의 전환은 가위 ‘혁명적’이었다. 또 열악한 경제상황에서 정부는 노동자의 권익을 우선시함으로써 산업자본주의를 민주화하고 자본주의의 공평한 분배에 한 걸음 접근할 수 있었다. 정부는 실업자 구제대책을 구체적으로 세우고 그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국민들의 신뢰와 자신감을 회복했고, 이는 실제적으로 실업문제를 해결했던 것 이상의 효과를 가져왔다. 마지막으로 빈곤과 실업 문제는 단지 개인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해결돼야 할 문제이며 이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 해결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뉴딜은 보여줬다. 지난 1월7일 정부는 실업종합대책을 발표하고 다음달부터 시행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실업급여 수혜기간을 최고 1백80일로 늘리고 그 대상 기업의 폭도 확대했다. 이와 함께 고용창출을 위해 2천개 기업에 6천억원의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한국이 직면한 실업문제가 이 정도선에서 해결되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회의의 소리도 높다. 미국의 대공황에 비춰봤을 때 여전히 후버식 ‘전통의 연장선’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정부가 기업의 해고정책에 지향점을 두고 정리해고를 인정한다는 것 역시 노동자에게 용기를 줘 사태를 해결하려는 미국의 정책과는 거리가 있다. 전통의 파괴, 대단위 실험이라는 새로운 정책, 뉴딜이 필요한 시기가 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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