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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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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틴, 21년간 제물포·서울 랜드마크 바꿨다”

산업 일반

구(舊)러시아공사관, 독립문, 덕수궁 정관헌·중명전 등 지금도 서울 정동 일대에는 19세기 말 건립된 서양식 건축물들이 다수 남아 있다. 이들을 설계한 사람은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틴. 그는 경복궁 시위대(侍衛隊: 근위대)로 복무하면서 명성황후 시해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는 어떤 경위로 조선을 찾았으며, 무엇 때문에 이 땅에 21년간이나 머물렀을까? 1882년 12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외교부) 협판(차관) 겸 총세무사(국세청장)로 임명된 묄렌도르프는 이듬해 1월 해관(海關: 세관) 설립을 위한 차관 도입과 해관원 모집을 위해 청국으로 출장을 떠났다. 중국으로 건너온 이후 13년 동안 청국 해관과 독일 영사관에서 천덕꾸러기로 전전했던 묄렌도르프는 제물포항에 발을 디디자마자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권한과 그 어떤 외교관보다도 더 많은 보수와 그 어떤 대신(大臣)보다도 고귀한 지위”를 한꺼번에 움켜쥐었다. ‘코리안 드림’을 이룬 묄렌도르프가 상하이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만국조계(萬國租界: 유럽인 거주지)에 퍼지자, 동아시아에서 마지막 남은 ‘기회의 땅’에서 인생 역전을 꿈꾸는 유럽 청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묄렌도르프는 보좌관 하스(Joseph Haas)에게 해관원 모집 업무를 맡기고, 자신은 차관 도입 협상에 집중했다. 상하이 주재 오스트리아 영사관 직원이었던 하스는 묄렌도르프가 조선 해관의 2인자 자리를 제안하자 주저 없이 영사관을 박차고 나와 조선으로 건너왔다. 하스는 영국, 미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덴마크 등 다양한 국적의 청년 20여 명을 해관원으로 선발했다. 23세 러시아 청년 사바틴(A. I. Seredin Sabatin)도 외국 조계 측량과 궁궐 건축을 담당할 영조교사(營造敎士)로 선발돼 그해 9월 가족과 함께 조선으로 이주했다. 러시아 공병에서 해관 토목사로조선으로 건너오기 전 사바틴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는 1860년 태어나 러시아 육군유년학교를 졸업하고 토목·건축 분야의 2급 자격증을 획득해 러시아 육군 공병(工兵)으로 근무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 모든 추정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정도의 이력으로 기라성 같은 건축가들이 각축을 벌이던 상하이에서 괜찮은 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조선 정부에 서양식 건축물을 지을 예산도 의지도 없다는 것이 일천한 경력으로 조선에서 자리를 얻고자 한 그에게는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다. 사바틴은 궁정 건축가로 일할 것으로 기대하고 조선으로 건너왔지만, 정작 그에게 주어진 자리는 인천해관 토목사(土木師)였다. 인천해관 소속 14명의 해관원 가운데 해관장, 항장(港長)에 이은 세 번째 직위였고, 연봉도 250달러로 나쁘지 않았다. 그는 서울과 인천을 오가면서 서양식 궁궐 도면을 작성하고, 인천해관 청사를 설계했다. 하지만 그가 제안한 벽돌제조공장 설립안이 비용 문제로 폐기되자 서양식 궁궐 건축 계획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 후 사바틴은 15~16명의 조선인 인부를 인솔해 인천 부두축조공사를 지휘했다. 해관 일은 그다지 분주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사바틴은 남는 시간을 이용해 세창양행(E. Meyer & Co.) 사옥 설계를 맡았다. 독일인 마이어가 설립한 세창양행은 같은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지원을 업고 무역, 선박운송, 금광 등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사바틴이 설계한 세창양행 사옥은 6·25전쟁의 포화로 사라질 때까지 60여 년간 인천의 랜드마크 역할을 맡았다. 1885년 조·러 수교 이후에는 러시아공사관 설계를 맡았다. 덕수궁을 굽어보는 정동 언덕바지에 위치한 러시아공사관은 규모 면에서나 건축미 면에서 다른 나라의 공관을 압도했다. 사바틴이 설계하고 시공한 인천해관 청사와 부두. 왼쪽에 보이는 2층 건물이 인천해관 청사고,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은 세관 창고. 만일 사바틴이 상하이에 머물러 있었다면 결코 맡을 수 없었을, 경험 없는 20대 청년 건축가가 맡기에는 지나치게 규모가 큰 사업이었다. 이후 1888년 사바틴은 경복궁 건천궁 뒤편에 신축되는 관문각 공사에 책임자로 발탁되었다. 벽돌과 유리가 자재로 들어가고, 증기보일러가 설치된 서양식 건물인 관문각은 서양의 군사제도를 본받아 설치한 친군영의 청사로 사용될 예정이었다.사바틴은 관문각 공사를 감독하면서 ‘대조선 인천 제물포 각국 조계지 지도’를 작성했다. 상하이에서 하스가 제안한 외국 조계 측량과 궁궐 건축이라는 임무를 5년 후에야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 것이었다. 사바틴은 궁정 건축가로서 최초의 작품인 관문각 공사에 최선을 다했고, 그렇듯 열성인 그에게 고종은 설계·시공에서 재정 집행까지 전권을 부여했다.궁정 건축가로 고종의 신임을 얻다하지만 공사가 2년을 넘기면서 엉뚱한 문제가 야기되었다. 애초 재정 집행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던 조선 관리 현응택이 야금야금 사바틴의 권한을 잠식하더니 결국엔 사바틴을 일개 기술자 역할로 밀어내고 자신이 재정 집행의 전권을 행사했다. 현응택은 공사비를 아낀다는 명목으로 불량자재를 들여오고, 비용이 적게 드는 공법을 사용하라는 월권도 서슴지 않았다. 사바틴은 현응택이 자재상과 결탁해 공사비를 착복한다고 의심했다. 공사가 미처 끝나기도 전 천장에서 물이 새는 하자가 발생하자, 사바틴과 현응택은 책임 소재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현응택은 “하자에 대해 왕이 당신을 심문하면, 당신이 잘못한 것이라고 하지, 조선 사람이 잘못한 것이라고 하지 말라. 당신은 외국인이니 벌을 받지 않을 것이다”며 억지를 부렸고, “왕이 당신을 사퇴시키고자 했으나 내가 나서서 막았다”며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4년 만에 관문각 공사가 끝나자 사바틴은 조선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러시아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이번엔 체불된 임금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1891년 9월부터 체불되기 시작한 임금은 이듬해 11월까지 무려 15개월 동안이나 지급되지 않았다. 밀린 임금을 당장 지급하라는 고종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조선 관리들은 갖은 핑계로 임금 지불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로부터 1년 후에야 차관을 얻어 겨우 밀린 임금을 청산했다.임금 체불 문제는 사바틴뿐만 아니라 조선 정부에 고용된 외국인 거의 모두가 겪는 일이었다. 조선 정부의 외환 수입은 해관에서 거둬들이는 관세 수입이 사실상 전부였는데, 관세는 각종 차관의 담보로 제공된 데다 지출해야 할 곳도 워낙 많아 밀린 임금을 지불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 지불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조선은 국권을 상실하기 10여 년 전부터 재정적으로는 이미 파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명성황후 시해 사건 목격임금이 체불된 2년 동안 사바틴은 빚을 얻어 근근이 연명했다. 빚쟁이들은 매일같이 사바틴을 찾아와 빚 독촉을 했고, 러시아공사관까지 사바틴 대신 빚을 상환해 줄 것을 요구했다. 뒤늦게 지급받은 임금으로 원리금을 상환하고 나니 사바틴의 수중에는 가족과 함께 러시아에 돌아갈 여비조차 남지 않았다. 사바틴은 조선 정부에 여비를 청구했지만, 조선 정부는 여비 지급을 거부하고 대신 해관에 복직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서울 총세무사청에 근무하던 사바틴은 1894년 경복궁 시위대(侍衛隊)로 발탁되었다. 시위대는 청일전쟁 발발 직전 일본 군대가 경복궁에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미국인 군사고문 다이(W. M. Dye) 장군을 대장으로 삼아 설립한 조선 최정예 근위부대였다.사바틴은 고종의 신임을 받은 덕분에 건축가라는 본분을 버리고 ‘용병’이 되도록 강요 받은 셈이었다. 1895년 10월 8일, 사바틴은 다이 장군과 함께 경복궁 안 숙소에 머물고 있었다. 여느 날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운 밤이었다. 하지만 새벽 5시 경계를 서고 있던 조선 군인이 다급히 사바틴의 숙소에 뛰어 들어와 대궐 전체가 무장한 폭도들에게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숙소 밖으로 뛰쳐나가자 폭도들이 총기를 난사하며 대궐 안으로 들이닥쳤다. 시위대의 저항을 무력으로 제압한 폭도들은 왕비의 숙소로 우르르 몰려갔다. 사바틴은 폭도들로부터 ‘왕비가 숨은 곳을 말하라’‘왕비가 누구인지 지목하라’는 협박을 받았고, 폭도들이 일본 군인의 지시를 받고 있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그날 새벽 폭도들은 왕비를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폭도들이 물러난 후 일본 공사는 대원군의 지시를 받은 조선 군인의 소행이라고 발뺌했지만, 사건의 전말을 목격한 사바틴과 다이 장군은 왕비를 시해한 것은 조선 군인이 아니라 일본 군인임을 전 세계에 증언했다. 그날 이후 시위대는 일본에 의해 해산되었고, 사바틴은 신변 보호를 위해 러시아로 피신했다. 하지만 이듬해 2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자 사바틴은 조선으로 돌아왔다. 독립협회의 요청에 따라 사바틴은 파리 개선문을 본떠 독립문을 설계했고, 영국인이 경영하는 무역회사 홈링거양행 인천지점 사옥을 설계했다. 사바틴은 선박회사 지점장으로 근무하면서 청일전쟁 이후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는 서양식 건축물들의 설계를 맡았다. 고종의 요청에 따라 덕수궁 정관헌·돈덕전·구성헌·중명전 등을 설계했고, 제물포 외국인구락부와 손탁호텔의 설계도 맡았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사바틴은 21년간의 조선 생활을 청산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했다. 그에게 조선은 결코 안식과 평화의 땅은 아니었지만, 뜻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 땅이었고, 그를 믿고 기억해 준 이들이 사는 땅이었다. 그가 조선 생활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21년 동안 조선을 떠나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한국 최초 서양식 숙박 영업 영욕으로 얼룩진 손탁호텔 러시아공사 베베르의 처제 손탁이 고종이 하사한 땅에다 지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 손탁(A. Sontag)은 1885년 초대 러시아공사로 부임하는 형부인 베베르(K. Veber)를 따라 조선으로 들어왔다. 1854년 프랑스령 알사스에서 태어났지만 보불전쟁 이후 그곳이 독일령으로 편입되면서 독일 국적으로 바뀌었다. 손탁은 베베르의 추천으로 궁중 출입을 하면서 외국인 요리 접대를 맡았고, 그를 통해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큰 신임을 얻었다. 손탁은 1898년 고종으로부터 덕수궁에서 길 하나 건너편 대지를 하사 받아 한국 최초로 서양식 호텔 영업을 시작했다. 손탁호텔은 서양 외교관들과 대한제국 고위관리들의 사교장 역할을 했고, 정부가 주최하는 행사에도 종종 이용되었다. 손탁은 1902년 사바틴에게 의뢰해 호텔을 2층 건물로 재건축했다. 2층은 국빈급 귀빈객실이었고, 1층은 일반객실과 식당·커피숍으로 사용되었다. 손탁호텔은 아관파천의 모의가 이루어진 곳이었고, 1905년 을사늑약을 강요하기 위해 온 이토 히로부미가 여장을 푼 곳이기도 했다. 손탁호텔은 1917년 이화학당에서 인수해 기숙사 ·프라이홀 등으로 사용되다가 1975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2009.04.27 15:05

7분 소요
오보 해프닝…세계 눈길 조선에 쏠리다

산업 일반

1. 에밀리 브라운이 대한제국 황후가 되었다고 보도한 기사. (Boston Sunday Post, 1903. 11. 29) 2. 정장 차림의 고종 황제. 3.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생활하던 경운궁 돈덕전. 에밀리 브라운이 실존했다면 이곳에서 살았을 것이다. 고종 폐위 이후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다. 1903년, 주한 미국공사 알렌(H. N. Allen)은 특별한 휴가를 보냈다. 6월 1일 서울을 출발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유럽을 거쳐 대서양을 항해해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6개월 동안의 긴 휴가였다. 그가 의료 선교사 자격으로 한국에 입국한 것은 1884년.그의 한국 생활도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그동안 알렌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왕립 병원 제중원을 설립했고, 왕실의 시의(侍醫)로 일하면서 한국 국왕의 외교 자문 역할도 맡았다. 1887년 주미 한국공사관이 설치될 때는 참찬관으로 정식 임명돼 2년간 한국인 ‘초보’ 외교관들의 워싱턴 적응을 도왔다. 1890년부터는 주한 미국공사관 서기로 일했고, 7년 후에는 공사로 승진했다. 주한 미국공사로 근무한 지도 벌써 6년째였다. 한국에서 낳아 기른 자식들은 훌쩍 자라 1899년부터 영국에서 유학하고 있었다. 휴가기간 동안 알렌은 런던에서 자식들도 만났고, 보스턴에 들러 큰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진학하게 될 MIT도 둘러보았다. 9월에는 워싱턴에서 루스벨트(T. Roosevelt) 대통령과 만나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한반도 문제를 상의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콜로라도 스프링스 텔레그래프’ 편집장과 인터뷰를 했다. 11월 20일, 알렌은 긴 휴가를 마치고 상쾌한 기분으로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상쾌한 기분은 채 하루도 가지 않았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6개월 동안 ‘에밀리 브라운(Emily Brown)’이라는 정체불명의 미국 여성이 주한 미국공사관을 발칵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에밀리 브라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한 외국공관들의 문의가 이어졌고, 한국 황실에 일자리를 구하려는 미국인들의 이력서가 쇄도했다. 간호사, 의사, 가정부, 가정교사, 마부, 요리사, 심지어 치과의사들까지 이력서를 보내왔다. 에밀리 브라운이라는 미국 여성이 대한제국의 황후가 되었다는 기사를 미국의 유력 일간지들이 잇달아 게재한 탓이었다.‘보스턴 선데이 포스트’ 1903년 11월 29일자 기사 ‘어떻게 하나뿐인 미국인 황후는 왕관을 쓰게 되었는가?’는 미국의 ‘평민 출신’ 에밀리 브라운이 대한제국 ‘황후’에 등극하기까지 과정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에밀리 브라운은 미국 오하이오에서 장로교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15세 되던 해 아버지가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녀도 아버지를 따라 한국으로 이주해 교회 성가대를 지휘했다. 한국에서 황제는 무엇이든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절대권을 지니고 있다.선교사의 딸에서 대한제국의 황후로황제는 선교사의 딸에게 황궁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 한동안 에밀리는 황제의 요청을 거부했지만, 황제가 이른 시일 내에 결혼하겠다고 약속하자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에밀리는 황제의 청혼을 받아들였고, 교회 일을 그만두고 황궁으로 들어갔다. 에밀리의 황후 책봉식은 1903년 8월 거행되었다. 서울에서 거행된 평민 출신 에밀리의 황후 책봉식은 알라딘과 아라비아 공주의 결혼식보다 훨씬 화려하고 장엄했다. 책봉식이 거행되기 며칠 전부터 예행연습이 시작되었고, 책봉식 당일에는 아침부터 전국에서 축하객들이 사대문 안으로 구름처럼 밀려들어왔다. 진군 신호가 울리자, 황제의 친위대 1000여 명이 인산인해를 이룬 거리를 보무당당하게 행진했다. 요란한 나팔 소리가 울리자 황궁 문이 열리고 거대한 가마 두 대가 나란히 거리로 나왔다. 한 대에는 황제가, 나머지 한 대에는 황후로 책봉될 에밀리가 타고 있었다. 에밀리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황실의 보석과 비단으로 치장했다. 황후 책봉식에는 문무백관은 물론 미국공사, 일본공사, 영국영사 등 각국 외교 사절이 참석했다. 주한 미국공사관 성명서(1903) 주한 미국공사관에 더 상세한 문의사항이 있는 분께서는 다음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대한제국 황제는 에밀리 브라운이라는 미국 여성과 결혼한 사실이 없다. 에밀리 브라운 양의 놀라운 결혼설을 뒷받침해 줄 만한 어떠한 근거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대한제국 황실로부터 간호사, 가정부, 가정교사, 의사, 유모 등 외국인 초빙 계획을 들은 바 없다. 경운궁 대한문 앞에 운집한 군중.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이름을 고쳐 달았다. 에밀리는 ‘아침 여명’(Dawn of the Morning)이란 뜻을 지닌 ‘엄 황후’(Empress Om)에 책봉되었다. 그녀가 아들을 출산하면 언젠가 대한제국 황제에 즉위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녀의 아들은 역사상 최초로 미국인의 피가 흐르는 황제로 기록될 것이다.”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 일간지들은 기본적인 사실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다른 지역 신문이 보도한 기사를 인용·각색해 선정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뉴질랜드에서 간행된 ‘이브닝 포스트’ 1903년 9월 12일자 기사는 ‘뉴욕 헤럴드’ 기사를 인용해 보도하고, ‘콜로라도 스프링스 텔레그래프’ 1903년 10월 24일자 기사는 오스트리아에서 간행된 ‘노이에 프라이 프레세’ 기사를 인용해 보도하는 식이었다.에밀리 브라운의 나이는 24세에서 43세까지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었다 했고, 고향도 오하이오에서 위스콘신까지 제멋대로 옮겨 다녔다. 아버지 브라운 목사가 화가 나 결혼식 참석을 거부하자 미국공사 알렌이 아버지 역할을 대신했다는 기사도 등장했다. 하지만 당시 알렌은 유럽에서 가족과 함께 달콤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서로서로 베껴쓰다 보니 허무맹랑한 기사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출처조차 불확실했다.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H. Hulbert)가 서울에서 간행한 ‘코리아 리뷰’는 1903년 11월호에서 오보의 시작이 오스트리아에서 간행된 ‘노이에 프라이 프레세’라고 확신한 듯 “미국 신문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기사를 쏟아내는 것이 부끄럽지만, 오보가 처음 등장한 곳이 미국이 아니라 유럽이라는 사실에 그나마 위안을 얻는다”고 푸념했다.알렌은 “당시 한국에는 그런 기사의 근거가 될 만한 사건은 그림자조차 없었지만, 기사에는 실존하는 장소와 인물, 심지어 나까지 등장시켜 그럴듯하게 꾸며놓았다”며 혀를 내둘렀다. 알렌의 거듭된 항의에도 오보를 낸 미국 일간지들은 정정기사를 게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종이 퇴위한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에밀리 브라운의 근황에 대한 기사를 보도했다.어처구니없는 소동의 기원에 대해 대한제국 궁내부 외교 고문 샌즈(W. F. Sands)는 훗날 색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당시 많은 외국 기자가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것으로 예상하고 한국을 찾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전쟁이 발발하지 않자, 맨손으로 귀국하게 된 기자들이 의기투합해 위스키 잔을 부딪치며 지어낸 기사라는 것이다. 그럴듯한 가설이지만, 검증할 방법은 없다.한·미관계사 연구의 권위자 김원모 교수는 한국에 대한 미국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알렌의 자작극이라는 가설을 제기한다. 미국 일간지 ‘최초’로 에밀리 브라운을 보도한 ‘콜로라도 스프링스 텔레그래프’ 1903년 10월 24일자 기사는 알렌이 그 신문 편집장과 인터뷰한 직후에 게재되었고, 에밀리 브라운의 고향이 알렌의 고향인 오하이오로 설정되었다는 점에서 알렌이 거짓 정보를 흘린 혐의가 짙다는 것이다.하지만 알렌은 외교관이기 이전에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다. 잔꾀를 부릴 만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더욱이 김원모 교수의 지적과 달리 ‘콜로라도 스프링스 텔레그래프’가 미국 일간지 최초로 에밀리 브라운을 보도한 것도 아니었다. ‘LA 타임스’ 1903년 7월 19일자 기사 ‘이제 보위에 오르다’는 에밀리 브라운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해명할 실마리를 제공한다. 당시 알렌은 가족과 함께 런던에 있었으니 그가 거짓 정보를 흘렸을 개연성은 전혀 없다. 기사 첫머리에 ‘특종’ 표시와 함께 “도쿄에 있는 미국 선교단체에서 직접 타전된 것”이라 밝혔으니 전쟁이 발발할 것으로 예상하고 한국에 취재를 나간 외국기자들이 술김에 조작한 기사라 볼 수도 없다. ‘엄비’가 ‘에밀리’ 비슷하게 들렸을 수도“위스콘신 애플턴의 산골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난 에밀리 브라운은 40대에 이른 지금은 대한제국의 엄(Om) 황후이자, 대한제국 황위 승계자의 어머니다. 지난 1월, 대한제국 황제는 재위 40주년을 맞아 오랫동안 후궁에 머물렀던 아름다운 에밀리 브라운을 황후로 책봉하고, 그녀의 아들을 황위 승계자로 선언했다. 황후로 책봉되기 전 에밀리 부인(Lady Emily)으로 알려졌던 그녀는 이제 ‘아침 여명’을 뜻하는 엄 황후가 되었다. 에밀리 브라운은 장로교 순회 목사 헐버트 브라운과 무척 아름다운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5세 되던 해 선교사로 한국에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주했다. 에밀리는 교회에서 성가대로 활약하면서 한국어를 공부했다. 한국어를 빨리 익힌 그녀는 교회의 통역으로 정부 관련 업무를 처리했다. 에밀리의 미모는 황제에게 보고되었고, 황제는 그녀에게 후궁으로 들어오라고 명령했다. 에밀리는 분개해서 거부했다. 2년 후, 에밀리는 국사(國事)가 허락할 때 결혼하겠다는 황제의 진지한 약속을 믿고 황궁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아들을 낳은 직후, 황제가 그 약속을 지킨 것이다.”헐버트 목사의 믿음과 달리 오보의 진원지는 유럽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날조된 기사는 아니었다. 대한제국에 실제로 엄비가 있었다. 민비가 일본 낭인의 칼에 무자비하게 살해당한 이후 엄비는 실질적인 황후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영친왕이 태어나기 전까지 엄비는 아무런 봉작이 없는 궁인이었다. 1897년 영친왕이 태어난 이후 귀인(貴人)에 책봉되었고, 1900년 순빈(淳嬪)으로 승격되었다. 1903년 1월, 엄비는 황귀비(皇貴妃)에 책봉하기로 결정되었고, 그해 12월 책봉식을 치르고 정식으로 황귀비가 되었다. 엄비의 아들 영친왕이 황태자에 책봉된 것은 순종이 황위에 오른 1907년이었지만, 엄비가 황귀비에 책봉되는 순간, 후사가 없는 순종의 황위는 영친왕으로 승계될 것임이 확실해졌다. 이처럼 엄비의 일생은 미국인이 아니라는 점을 제외하곤 에밀리 브라운과 흡사했다. 미국 기자가 기사를 날조한 것이 아니라 엄비를 에밀리로 오인했을 가능성도 있다. 엄비는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공사관에서 1년 남짓 거주했는데, 그때 러시아공사관에 드나들던 서양 여성을 엄비로 오인했을 수도 있고, 미국인 귀에 ‘엄비’가 ‘에밀리’ 비슷하게 들렸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미국 언론이 ‘토종’ 한국인 엄비를 에밀리로 둔갑시킨 덕분에 애꿎은 주한 미국공사관만 ‘황제 사위’ 덕에 일자리를 구해보려는 미국인들의 등쌀에 시달렸던 셈이다. 궁인에서 출발해 황귀비에 오른 입지전적 여성 엄비는 누구? 엄비는 8세 때 궁인으로 입궐해 민비를 모시는 시위상궁(侍衛尙宮)으로 일했다. 을미사변이 발발하기 10년 전 엄비는 서른이 넘은 나이에 고종의 승은을 입었다. 민비는 자신의 시위상궁이 고종과 잠자리를 함께 한 것을 알고 크게 노해 엄비를 죽이려 했다. 하지만 고종의 간곡한 만류로 엄비를 궁궐에서 내쫓는 선에서 타협했다. 엄비는 사가(私家)에서 10년을 수절하며 환궁할 날을 기다렸다. 1895년 10월, 민비가 시해되자 고종은 닷새 만에 엄비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고종이 부른 것이 아니라 엄비가 찾아와 눌러앉았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고종이 황후 자리를 비워둔 것은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에 대한 항의표시이기도 했지만, 명성황후만큼이나 권략(權略)이 뛰어났던 엄 황귀비의 견제 때문이기도 했다. 조선 왕실은 장희빈 이후 후궁을 중전으로 책봉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엄 황귀비는 황후가 될 수 없었다. 어차피 황후가 못 될 것이라면 황후 자리를 비워두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었다. 영친왕이 10년이나 연상인 의친왕을 제치고 황태자에 책봉된 것은 엄 황귀비의 후광 덕분이었다.

2009.04.07 14:15

7분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