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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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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홍라희, 해인사에 디지털 반야심경 깜짝 선물

CEO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그의 모친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이 해인사에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을 초고화질 디지털로 촬영해 책으로 제작한 디지털 반야심경을 선물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선물은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49재 봉행에 대한 감사 표시인 것으로 보인다. 5일 재계 등에 따르면 이 부회장과 홍 전 관장은 지난달 25일 1주기를 맞은 고 이건희 회장을 추모하기 위해 이달 1일 경남 합천 해인사를 방문해 참배했다. 이후 해인사 방장 스님을 예방해 디지털 반야심경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인사 방문 시점은 삼성전자 창립 52주년 기념일이었다. 특히 홍 전 관장은 디지털 반야심경을 전달하면서 메타버스를 언급한 것으로 전해졌다. 메타버스는 가상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현실 세계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 3차원 가상세계를 의미하는 용어다. 홍 전 관장은 “이제 가상공간이 생기면 이렇게 꽂기만 해도 자기가 그 속에서 리움 컬렉션을 다 볼 수 있는 세상이 온다. 곧 온다”며 “내 것 네 것이 없는 세상이 되는 거 같다”고 말했다. 리움미술관을 방문해 관람할 수 있었던 추사의 반야심경 책자를 가상공간을 활용해 경남 합천에서도 볼 수 있음을 의미하는 말로 해석된다. 한편, 이 부회장과 홍 전 관장은 지난 2일에는 경남 양산의 통도사를 찾아 고 이건희 회장 1주기를 추모하기도 했다. 재계에선 이 부회장이 아버지인 고 이건희 회장을 기리고, 자신의 수감 생활로 마음고생을 한 모친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경남 지역 사찰을 연이어 방문한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이창훈 기자 lee.changhun@joongang.co.kr

2021.11.05 10:50

2분 소요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의 이 한 문장] 기본 익히되 기본에 집착 말아야

산업 일반

검을 휘두르는 자세에 정해진 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자세가 있으면서도 자세가 없다는 뜻에서 ‘유구무구(有構無構)’라고 한다. 어떠한 자세를 취할지는 상대방과의 관계에 따라, 혹은 그때의 상황에 따라 조금이라도 더 상대방을 베기에 유리한 쪽으로 선택해야 한다. 전투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군사를 배치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상황에 따라 시기적절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물의 장 검을 휘두르는 5개의 기본 자세가 있지만 이는 기본일 뿐이다. 실전에서는 다양하게 변형되고 응용된다. 기본을 익히는 목적은 근본을 튼튼히 하기 위함이며, 변화무쌍한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한 기본 능력을 갖추기 위함이다. 기본을 익히지 않고 응용에 나서는 것은 교만이고, 기본을 익히고도 기본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협량(狹量)이다. 형식을 익혀 본질을 이해하고 본질을 이해하면 형식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유구무구, 자세가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다는 대목에서 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떠올리면서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무사시의 특성을 느낄 수 있다.기본과 응용을 익히고, 일단 검을 들고 승부에 나서면 꼭 이겨야겠다는 의지가 중요하다. 휘두르는 검에 불패의 강력한 의지가 실려 있어야 이길 수 있다. 무기와 장비에 우선하여 투지와 각오를 다져야 한다. 비록 객관적 전력에서 열세더라도 절대절명의 승부처에서 이기겠다는 의지가 강하면 궁즉변 변즉통(窮卽變 變卽通), 절박하면 변화하여 방법을 찾아내고 통하게 된다는 의미이다.2차대전 이후 공산 베트남은 프랑스·미국·중국과 전면전을 벌여 모두 승리했다. 베트남 군대의 지휘관 보 구엔 지압(武元甲) 장군은 프랑스 식민통치에 대항해서 절대열세로 평가받던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 군대에게 디엔비엔푸에서 1954년 승리했고, 이어진 세계 초강대국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이겼다. 베트남은 1979년 공산 중국의 20만 대군이 베트남을 침공하면서 발발한 중공-베트남 전쟁에서도 전격적인 작전으로 기선을 제압하고 대승을 거두었다.지압 장군의 승부관은 ‘결전결승(決戰決勝)’, 즉 ‘전쟁을 결행하면 승리를 결심한다’이다. “모든 방법으로 적과 싸워야 한다. 손에 있는 모든 무기로 적과 싸워야 한다. 전략의 핵심은 ‘적극성·주도·활력·창조·전격’, 이렇게 5가지다. 전쟁의 예술은 ‘소(小)로 대(大)를 이긴다, 소(少)로 다(多)와 맞서 싸운다, 양질(良質)로 다량(多量)을 이긴다. 약(弱)으로 강(强)을 이긴다’에서 나온다. 적의 강·약점을 발견한 후 기회를 적시에 활용해 최소의 피해로 최대의 효과를 내 결정적인 승리를 얻는 것이다.”역사학을 공부하고 20대에 역사교사와 신문기자 생활을 했던 지압 장군은 정규 군사교육의 경험이 없는 백면서생(白面書生)이었다. 그럼에도 역사학과 기자생활을 통해 ‘병법의 도’를 터득해 강대국에게 연전연승하면서 ‘붉은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압 장군이 주창한 ‘적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않고, 적이 좋아하는 장소에서 싸우지 않으며, 적이 생각하는 방법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병법의 도에 충실하되 응용과 변칙을 다양하게 구사하는 ‘3불(不) 전략’은 ‘당신들은 당신들 식으로 싸워라. 우리는 우리 식으로 싸운다’는 전술개념으로 발전하면서 승리의 원동력이 됐다.- 김경준 딜로이트 안진경영연구원장

2016.11.19 09:01

2분 소요
[자본시장의 리더 | 최석종 KTB투자증권 사장] 현금 늘리되 유로화·달러도 챙겨라

산업 일반

불확실성 커서 보수적으로 접근할 시기... ‘익스클루시브(exclusive) 오션’의 강자 지난 4월, 최석종 전 교보증권 IB금융본부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전화였다. 일요일 복집에서 만났다. 제안은 뜻밖이었다. “사장으로 와 달라.” 교보증권을 마지막 직장이라고 생각했다. 편하게 두둑한 성과급 받으며 일할까, 월급쟁이 최고 명예인 사장에 도전할까. 선택을 가른 건 20여년 같이 일한 후배들이다. ‘내가 나가야 그들도 본부장 할 수 있다’ ‘같이 하자’는 말도 하지 않았지만, 30여 명이 사표를 따라 냈다. 전화를 한 사람은 이병철 KTB투자증권 부회장이다.최석종 KTB투자증권 사장이 밝힌 이직 스토리다. 7월 취임 후 한 달 만에 1000억원 규모의 항공기 딜(거래)을 성사시키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그를 최근 만났다. 사무실에는 서류가 널려 있었다. 탁 트인 시야와 방 사이즈를 빼면 사장이라기보다는 실무 본부장 방 같았다. 그가 대접하는 보이차를 마시며 인터뷰를 이어갔다.보이차는 어떻게 마시게 됐나.“5년 전쯤 김해준 교보증권 사장 방에서 처음 마셨다. 몸에 좋더라. 지금 마시는 차가 기자(1979년생)보다 5~6살 오빠·언니쯤 되는 차다. 사치품이라고 해서 중국에서는 보이차를 90년대 말까지 금지했다. 그래서 2000년대 이전 차는 아주 귀하다. 최근 중국 부자들이 보이차를 찾으면서 차 값이 뛰고 있다. (차를 따라주며) 보이차는 호스트가 서빙을 해야 한다. 혼자 먹으면 맛있겠나. 직원들 불러 같이 차 마신다. 마시면서 일이 아니라 그냥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아이디어도 생기고.”이직이 김해준 사장 입장에서는 일종의 ‘배신’ 아니냐. KTB투자증권으로 옮기면서 미안한 마음은 없었나.“왜 없겠나. 인터뷰라 하는 말이 아니라 김 사장은 내가 직장 생활하면서 본받아야 할 성향·성격을 갖춘 몇 안 되는 분 중 하나다. 일과 중 시간 나면 ‘반야심경’ 붓글씨로 쓴다. 직원들이 화내는 걸 못 봤다고 할 정도다. 가능하면 순화해서 얘기하고, 가능하면 되는 방향으로 대화하고. 그분 밑에서 편하게 회사 생활했다. 성과가 좋으니 연봉도 많이 받았고. 고민 많았다. 김 사장도 ‘다른 증권사 본부장으로 간다고 하면 말렸겠지만 사장으로 간다니 잡을 수가 없네. 다만 최 전무, 보이차 끊지 마이소’라는 말씀만 하셨다.”만난 적도 없는 이병철 부회장이 어떻게 알고 스카웃을 했을까.“내가 기자들을 잘 안 만난다. 그렇지만 업계에는 소문이 좀 났다. NH농협증권(우리투자증권과 합병해 현 NH투자증권)서 회사 수익의 절반을 우리(IB) 본부가 벌었다. 교보로 이직해서도 첫 해 우리 본부 덕분에 회사가 적자를 면했고. 작은 증권사가 살아남는 길은 ‘제안 영업’을 하는 거다. 현대차가 회사채 발행하는 데 가서 200개(억) 따 오는 게 뭐가 중요하냐. 경쟁은 치열한데 돈은 얼마 못 번다. 그런데 우리가 ‘갑’의 고민을 알고 그에 대한 해법을 들고 가면 갑은 우리를 쓸 수밖에 없다. 나는 이런 시장을 ‘익스클루시브(exclusive) 오션’이라고 부른다. 그런 곳에서 영업해야 돈 벌 수 있다.”그래서인가, 장관 표창도 받았다(2003년 우리투자증권(현 NH투자증권)에서 LG카드 부실채권을 처리하는 배드뱅크 구조를 짜냈고, 2008년 NH농협증권에서는 건설사 미분양 적체 해소를 위한 프라이머리 채권담보부증권(P-CBO)을 4044억원 발행해 건설사의 유동성을 지원한 공로로 기획재정부 표창을 받았다).“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회의실에 직원들 모아 놓고 구조도 그리는 거다. 2003년 카드 사태 터졌을 때 정부에서 해결할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어왔다. 2002년 답 안 나오는 KT 민영화를 우리가 구조 잘 짜서 성사시켰기 때문이다. 2008년 건설사 위기 때에도 우리가 유동성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우리가 제안한 딜 구조에서는 돈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갑의 입장에서도 구조를 누구보다 잘 아는 제안 증권사에 일 맡기는 게 낫고. 그런 딜에서는 증권사 규모가 아니라 딜 이해 능력 같은 게 입찰을 따내는 중요 요건이 된다. 이게 진정한 IB다. 난 직원들이 ‘회사채 200개 따 왔어요’ 이러면서 자랑하는 것보다 ‘전무님 이런 딜을 생각해 봤는데 어떠세요’ 이러면 팔짝팔짝 뛰면서 좋아한다.”본부장이 아니라 이젠 사장이다. 사장으로서의 비전이 뭔가.“증권사 직원들은 ‘수퍼 을’이다. 회사채 달라고 기업에 가서, 기금 받자고 기관에 가서 굽신거려야 한다. 그러나 익스클루시브 오션에서 증권사 직원들은 갑은 아니더라도 갑과 을 사이의 애매한, 사실상 갑의 위치에서 일할 수 있다. 내가 IB본부에서 일 하지만 술 한 잔을 못 마신다. 술 마시면서 하는 영업은 나 말고도 많이들 한다. 그렇지만 익스클루시브 오션에서는 고민거리 있을 때 갑이 나한테 먼저 전화한다.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창의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 증권사를 만들고 싶다.”밑에 있으면 일 못하는 직원은 괴롭겠다.“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이 순간까지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면 원아웃 시켰지, 다른 걸로 직원들 힘들게 한 적 없다. 여기가 워낙 그런(횡령·배임 등) 일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곳이다. KTB에 와서 제일 먼저 만든 게 특수목적법인(SPC) 관리하는 곳이다. SPC는 많게는 수천억 원이 왔다갔다 하는데도 관리 감독의 사각지대에 있다. SPC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유능한 직원에게 관리를 맡겼다. 그리고 직원들에게 특히 ‘시행 사업하는 사람들하고 술 먹으면 나한테 죽는다’고 엄포를 놨다. 그렇게 어울리다 보면 꼭 뒤탈이 생겨서다. 실제로 전 회사에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직원을 한 번에 아웃시켰다. 예외 없다. 여기 업계가 결과만 보는 곳이지만, 난 과정을 더 중요하게 본다. 내가 창의적으로 생각하라고 하는데 결과만 본다면 당장 뛰어야지 누가 생각할 수 있겠나.”요즘 해외 부동산 투자가 활발한데, 과열되는 느낌이다.“보수적 접근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해외에서 국내 투자자들 간에 가격 경쟁이 붙는 경우도 생기더라. 투자 가치가 있을까 싶은 물건인데도 무리하게 들어가는 경향이 있다. 어차피 돈 대는 곳은 연기금이고, 연기금은 대체투자에 혈안이 돼 있으니 양쪽의 니즈가 맞은 것이겠지. 그렇지만, 딜을 중개하는 금융회사는 이런 과열을 경계해야 한다. 부동산 시장 호황도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을 감안하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KTB투자증권 상품은 거의 기관 위주다. 일반 투자자들을 위한 공모 상품 출시 계획은 없나.“공모 생각은 아직 없다. 우리가 취급하는 상품 대부분이 대중의 이해도가 떨어지는 전문적인 분야의 상품이다. 아파트·오피스텔·상가 분양 받는 것도 아니고. KTB 같은 중소형사 입장에서는 인적 구조상 (공모 상품을 팔 만한) 여력이 안 된다. 다만, 대체투자에 대한 일반 투자자들의 지식과 인식이 어느 정도 갖춰지고 저변이 확대된다면 공모형 상품도 출시할 수 있다.”지금 유망한 투자자산은 뭘까. 개인적으로 투자는 어떻게 하나.“시장 전망은 내 전문 영역이 아니다. 특정 자산이 유망하기 때문에 어디에 ‘몰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될 조언이다. 어떤 투자가 유행한다고 해서 휩쓸려 투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막말로 어느 것이 유망하다는 거 알면 내가 먼저 투자하지(웃음). 다만, 지금은 현금성 자산을 늘려야 할 때라는 생각이다. 불확실성이 너무 크다. 현금성 자산은 원화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 최근 파운드화를 좀 샀다. 유로화·달러 등 외화 자산을 포트폴리오에 담았다.”

2016.10.30 09:03

5분 소요
Codex Moment 옛 경전의 향기

산업 일반

귀중한 물건임을 상기시키기 위해 양피지, 야자수잎 등에 금, 은, 혈액 같은 재료로 글씨 새겨경전(sacred book)은 책처럼 보이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뉴욕 루빈 미술관에서 열리는 ‘일루미네이티드(Illuminated:The Art of Sacred Books)전’에서 보듯 일반 책과는 사뭇 다른 형태를 띠기도 한다. 일례로 18세기 티베트에서 제작된 ‘반야심경(Perfection of Wisdom Sutra)’ 책은 직사각형의 제본되지 않은 책장들이 포개진 형태다. 가로 24㎝, 세로 42㎝의 책장 한장 한장은 여러 장의 종이를 붙여 만들었다.나무로 된 약 50㎝ 길이의 표지들이 마치 샌드위치의 식빵처럼 이 페이지들을 위아래로 덮고 있다. 윗표지는 조각을 새기고 금박을 입혔다. 암청색 테두리가 쳐진 페이지들은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듯 형태가 일그러졌다. 울퉁불퉁해진 종이들이 포개진 모습을 옆에서 보면 마치 지층의 단면처럼 보인다.무게가 36㎏이나 나가는 이 책은 한 수도원의 도서관 소장품이었다. 벽 속의 보관대에 비슷한 형태의 다른 책들과 함께 보관됐다. 가장 자리에는 책 제목을 표시한 헝겊 조각들이 붙어 있다. 지하철에서 간편하게 읽는 가벼운 전자책과는 거리가 멀다.목제 표지 사이에 책장들이 포개져 있는 이 책은 ‘포티(pothi, 산스크리트어에서 파생된 펀자브어로 ‘경전’이라는 뜻)’의 형태를 따랐다. 포티는 BC 1세기경 남아시아와 남동아시아에서 처음 제작되기 시작했다.종이대신 야자수잎 위에 글씨를 쓰고 잎에 구멍을 뚫어 책으로 엮었다. 길고 좁은 야자수잎의 모양이 그대로 책의 형태가 됐다. 티베트 서적 역사가인 커티스 셰이퍼 버지니아대 교수에 따르면 티베트인들은 8~9세기에 포티의 형태를 도입했다. 셰이퍼는 티베트에서 포티가 진화한 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형태적 특성은 그대로 유지됐지만(The formal features remained the same)재료는 완전히 달라졌다(but the materials changed drastically).”9월 3일까지 열리는 ‘일루미네이티드 전’은 불교(티베트의 사례를 중점적으로 다뤘다)와 힌두교, 이슬람교, 자이나교, 기독교의 다양한 경전에 이용된 재료를 비교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전시된 기독교 서적 중에는 15세기 네덜란드에서 제작된 층계송(Gradual) 성가집이 있다. 양피지(parchment)로 된 이 책에는 찬송가가 가득 실려 있다. 전시된 책장은 밝은 바탕에 금장식이 곁들여졌고 붉은 꽃과 녹색 줄기, 새들이 그려졌다. 책장 맨 아래쪽에는 무릎 꿇은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졌다.이 책의 제작을 위해 돈을 기부한 사람들을 나타내는 그림이다. 금장식에 들어가는 금과 양피지에 쓰이는 동물 가죽 등 값비싼 재료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액수를 기부했을 듯하다.책의 크기는 예사롭지 않지만(닫았을 때 가로 41㎝, 세로 56㎝, 두께 12㎝) 형태는 한쪽 가장자리를 묶어 만들어 책등이 있는 전통적인 책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런 형태는 코덱스(codex, 나무나 얇은 금속판을 끈이나 금속으로 묶어서 제본한 서적의 원형)라고 부르는데 예수 시대에 처음 등장했다. 서적 역사가인 제프리 햄버거 하버드대 교수에 따르면 이집트의 콥트교 시대를 무사히 견디고 보존된 최초의 코덱스들은 파피루스로 만들어졌다.전시회에 선보인 층계송 성가집의 크기가 유난히 큰 이유는 성가대가 찬송할 때 대원 모두가 함께 보는 용도로 제작됐기 때문이다.이 전시회는 포티부터 코덱스, 두루마리(scroll), 콘서티나(concertina, 아코디언처럼 펼쳐지는 책)까지 경전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준다. 하지만 금과 은 등의 재료가 책에 쓰인 방식에선 각 문화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한다.이 값비싼 재료들은 책을 귀중한 물건으로 인식시키는 데 기여했다. 한 전시실에는 남색이나 어두운 색 바탕에 금 글씨가 쓰인 책들이 전시돼 있다. 이런 방식은 여러 종교의 경전에 도입됐다. 9~10세기 튀니지에서 제작된 ‘블루 코란’은 남색으로 물들인 양피지에 금으로 우아한 쿠파(Kufic) 문자를 써 넣었다. 페이지 한쪽 구석의 동그란 얼룩처럼 보이는 자국은 산화은(oxidized silver)의 흔적이다. ‘블루 코란’ 근처의 한 진열장에는 1720년 제작된 일본의 두루마리가 전시됐다.‘무량의경(Sutra of InnumerableMeanings)’이라는 경전을 수록한 작품인데 남색으로 물들인 종이 위에 금색 글씨가 세로로 가지런히 쓰여 있다.청색 바탕에 금색 글씨가 다양한 종교의 경전에 두루 쓰인 데는 실용적인 이유도 있었다. 전시회의 공동 큐레이 엘레나 파쿠토바의 말을 들어보자. “각 종교가 유사한 미학적 기준을 지녔다는 점이 놀랍다. 또 암청색 바탕에 금색 글씨는 대조 효과가 가장 큰 색상 조합이라는 이점 때문에 자주 채택된 듯하다. 눈에 잘 띌 뿐 아니라 매우 아름답기도 하다.”잉크와 금 같은 재료는 오랫동안 보존이 가능하지만 일부 재료는 쉽게 변한다. 인간의 혈액이 그중 하나인데 1931년 중국에서 혈액을 사용해 제작된 한 경전은 흰 종이 위에 옅은 갈회색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생명체의 일부였던 재료는 그 생명체 안에있을 때 가장 잘 보존된다. “인간의 혈액은 변하기 쉽고 색이 빨리 바랜다(very unstable and it fades very fast)”고 파쿠토바는 말했다. 티베트 고문서에도 인간의 혈액을 잉크에 섞어서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파쿠토바는 이런 전통이 사악한 의미를 지니진 않았다고 설명했다.“혈액을 기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헌신하는 마음(devotion)을 나타내고 공로(merit)를 세운다는 의미가 있었다. 또 유명한 거장의 혈액일 경우 그 문서를 더 신성하게 만드는(consecrate) 효과가 있었다.”전시된 글쓰기용 판 중 일부는 그 위에 쓰인 글씨를 지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일례로 티베트의 ‘삼타(samta)’는 석판 위에 분필로 글씨를 쓰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좁은 판 위에 약간 움푹 파인 검은 면이 있고,그 위에 기름을 살짝 바른 뒤 재를 덮는다(were lightly oiled and then coated with ash).그런 다음 “모래 위에 글씨를 쓸 때(writing in sand)”처럼 재를 긁어가며 글씨를 쓴다. 이런판은 메시지를 보내는 용도로도 쓰였다. 메시지를 받은 사람은 내용을 읽고 난 뒤 글씨를 닦아내고 새로운 메시지를 써서 돌려보낼 수 있다. 파쿠토바는 “마치 휴대전화의 문자 메시지”와 같은 기능이라고 말했다. 물론 속도는 느렸겠지만 말이다.

2012.06.29 15:38

4분 소요
한국 선불교에 길을 묻다

산업 일반

리투아니아출신의 보행스님은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에서 스님들의 규율을 책임지는 입승이다. 서울 화계사에 있던 국제선원이 자리를 옮겼다. 계룡산 자락에 수행도량을 지어 무상사라고 이름 붙였다. 8년 전 화계사에서 만났던 대진스님(51)이 이곳 주지다. 지난 세월만큼이나 그의 얼굴은 부드러워져 보였다. 봄볕같이 화사한 얼굴로 이방인을 맞았다. 그의 산중 생활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전 3시 기상해 25분 동안 108배(108 bows)를 올리고, 4시부터는 아침 예불(chanting)과 참선(meditation)을 한 뒤 6시5분 아침 공양을 한다. 다시 6시30분부터 1시간 동안 울력(청소 등 노력봉사)을 하고 7시30분엔 스님들과 둘러앉아 차를 마시면서 담소한다(House Meeting). 10시부터 사시(巳時) 예불을 한 뒤 11시 조금 넘어 점심 공양을 한다. 오후엔 2차 울력을 하고 4시30분 저녁 공양을 마친 뒤 6시부터 저녁 예불을 하고 7시부터 1시간 동안 다시 참선에 몰입한다(두문불출하고 참선에 전념하는 결제 기간에는 오전과 오후 참선 시간이 더 늘어난다).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인 그는 동부 명문 보스턴대학 화학과를 졸업했다. 80년대 초 한동안 건강식품 회사에 다녔다. 그러나 과학의 응용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과학이 두렵다”는 생각이 문득 들면서 고뇌가 시작됐다. 그 뒤로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세운 선(禪) 센터를 찾았고, 인도인이 운영하는 요가 수련원도 다녔다. 그러나 매 순간 자신을 옥죄어 오는 “나는 누구며 진정한 삶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풀지는 못했다. 우연히 숭산스님(1927~2004년)의 설법을 들었다. 숭산스님이 직접 세운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의 선방에서였다. “숭산스님은 소리가 우렁찼고, 행동도 컸으며, 그의 미국인 제자들도 한결같이 기운이 넘쳐났다”고 대진스님은 말했다. 그가 숭산스님과 나눈 첫 대화는 이랬다.“어떻게 하면 저의 본 모습을 알 수 있습니까?”“네 모든 것을 놓아버려라.”“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그럼 네가 도대체 누구냐?”“모르겠습니다.”“바로 그거다. 그 모르는 마음이 바로 너의 스승이다. 자나깨나 ‘오직 모를 뿐’이란 화두로 정진하면 언젠가는 깨달음이 확 터질 것이다.”대진은 1984년 한국으로 건너와 화계사 선방에서 20년 동안 수행했다. 숭산스님을 뒤따르던 그는 결국 국제선원장이 됐다. 그리고 스님이 입적하기 4년 전인 2000년 외국인 제자들을 위해 계룡산 자락에 세운 국제선원 무상사의 주지 직을 맡았다. 무상사는 숭산스님이 한국 선불교를 전 세계에 전파하는 과정에서 터득한 지혜를 바탕으로 세운 새로운 형태의 선원이다. 이곳에선 비구와 비구니, 스님과 일반신도의 구분 없이 모두가 함께 정진한다. 한국의 전통적인 사찰들과 차이가 나는 대목이다. “숭산스님은 계룡산에 따로 국제선원을 세워 자신의 가풍을 이어가려 했다”고 대진은 말했다. 무상사는 조계종 소속 사찰이 아니지만 계(戒)나 교육은 조계종에서 받는다. 그간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수행하던 외국인 스님들도 지금은 모두 무상사로 와서 수행 중이다. 현재는 최고 스님인 조실(zen master) 대봉스님, 절의 살림을 책임지는 주지(abbot) 대진스님, 스님들의 규율과 기강을 책임지는 입승(head monk) 보행스님, 지도법사(guiding teacher), 일반 스님(monk) 등 8명이 이곳에서 수행한다. 이들의 국적은 미국(3명), 리투아니아(2명), 체코(1명), 말레이시아(2명)다. 무상사 주지 대진스님. 그러나 음력 4월 보름부터 7월 보름까지 진행되는 하안거(올해엔 5월 9일~8월 5일)와 음력 10월 보름부터 이듬해 1월 보름까지의 동안거(12월 1일~내년 2월 28일) 기간에는 숭산스님이 전 세계에 세운 선센터에서 건너오는 스님들까지 합세해 40명에 이르는 식구가 무상사를 채운다. 각국에서 온 스님들이 함께 생활하다 보니 스님들 간의 일상적인 대화는 대부분 영어다. 그러나 10대발원문, 반야심경, 신묘장구대다라니경 등 염불과 독경은 모두 한국어다. 절집 운영에 소요되는 자금은 전 세계 선센터에서 보내오는 후원금과 템플스테이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충당한다. 숭산스님은 1972년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에 세운 홍법원(弘法院)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한국 선불교의 씨앗을 뿌렸다. 지금은 미국·캐나다·멕시코 등 북미지역에 33개, 홍콩·싱가포르·말레이시아 등 아시아지역에 5개, 오스트리아·벨기에·체코·덴마크·프랑스·독일·영국·헝가리·라트비아·리투아니아·폴란드·러시아·슬로바키아·스페인 등 유럽지역에 57개, 그리고 이스라엘에 1개 등 모두 96곳의 선센터에서 수천 명의 제자가 정진한다.대진과 대화하던 중 보행스님(48)이 불쑥 주지실로 들어섰다. 리투아니아 태생인 보행은 무상사의 입승(立繩)이다. 엊그제 공식 비구계를 받고 와서 그런지 상좌승인 대진 앞에서 눈에 띄게 몸을 숙였다. 그런 보행에게 숭산스님과의 인연을 물으니 한동안 묵묵부답이다. 얄궂게도 보행은 선승이 되기 전에도 무언극을 전문으로 하는 팬터마임 극단 책임자였단다.보행은 옛 소련 붕괴로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리투아니아가 혼란에 휩싸였던 1990년대 초 수도 빌뉴스에서 숭산스님을 처음 만났다. 한국 선불교의 세계화에 앞장선 숭산은 1978년 폴란드에 머물면서 동유럽 포교를 시작했고, 1991년엔 직접 리투아니아 포교에 나섰다. 현재 리투아니아 공화국엔 빌뉴스를 포함해 선센터가 3곳이나 있다. “18년 전 같았으면 붉은 적위대가 불교 공부하는 사람들을 감옥에 집어넣었을 것”이라고 보행이 말했다. “숭산스님의 설법은 강물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때론 폭포수처럼 힘찼다.” 숭산의 설법에 감명받은 보행은 폴란드 바르사뱌의 도암사로 건너가 매년 결제에 참가하는 등 행자생활을 하다가 고향 카우나스에 고봉사라는 사찰을 짓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젊은 시절 보행은 구소련의 육군, 리투아니아 TV 프로듀서, 시베리아 노동자, 극단 배우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한때는 고등학교 교사생활을 한 적도 있다. 그 와중에 러시아어로 된 불교서적을 읽는 순간 한 구절이 번쩍 눈에 띄었다. “세상에 드러내 자랑하는 너 자신의 모습은 결코 너의 진짜 모습이 아니다.” 이 구절 때문에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으려는 구도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재가불자 생활로는 궁극적인 해답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1999년 작심하고 한국으로 건너와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8년간 머무르며 행자생활부터 시작했다. 보행의 눈빛에 빨려 드는 순간 갑자기 밖에서 목탁 소리가 났다. 점심 공양을 알리는 소리다. 대진·보행 스님과 함께 공양간에 들어서니 공양주 보살이 정성 들여 만든 음식이 나왔다. 브로콜리와 버섯·감자를 섞은 죽, 김치, 잡곡밥이다. 절밥이 본디 맵거나 짜지 않지만 서양인의 식성을 고려해 더 싱거워진 느낌이다. 옆자리에서 함께 공양을 하던 체코 출신의 행자 원만(圓滿·23)에게 무상사로 오게 된 연유를 물었더니 “인터뷰는 안 된다”며 말을 막았다. ‘묵언수행’을 하기 때문이다. 보행스님. 지난해 10월 체코에서 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앞으로 1년간 행자생활을 한 뒤 사미계 여승(novice nun)이 되고, 몇 년간 더 수행해 비구니(nun)로 살겠다는 계획을 말했다. 그러면서 더 이상의 질문엔 입을 닫았다. 맞은편에서 공양 중이던 스웨덴 출신의 롤랜드(61)는 “은퇴한 뒤 유럽에서 줄곧 생활하다 관광비자로 한국에 왔는데 이곳이 너무 좋아 당초 계획보다 더 오래 머무르고 있다”고 말했다.공양이 끝나고 경내를 돌아보는 순간 젊은 외국인 남성이 눈에 띄었다. 다가가 물으니 미국 인디애나대 종교학과를 졸업한 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보조교사로 일하는 조 맥기번(23)이라고 한다. 봄방학을 맞아 한국 선불교 탐구차 무상사를 찾은 그는 주말에 열리는 2박3일 일정의 템플스테이에 참가했다(템플스테이는 두 종류로 1박2일에 2만5000원, 2박3일에 5만원이다). 오늘이 이틀째란다. 아버지는 개신교도, 어머니는 유대교 신자지만 자신은 불교 신자라는 그는 숭산의 법문을 현각스님이 정리한 ‘선의 나침반(The Compass of Zen)’을 읽으면서 한국 선불교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현각은 현재 무상사를 떠나 미국에서 포교 중이다).맥기번은 한국과 일본의 선불교를 나름대로 비교하기도 했다. “한국 선불교는 참선을 할 때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등 보다 심오한 질문을 던지지만 일본 선은 모든 상념을 떨치고 오직 좌선에만 힘쓰는 시칸타자(只管打坐)를 추구하는 듯하다.” 숭산은 입적하기 3년 전 뉴스위크 한국판과의 인터뷰에서 “일본 선은 계단 선이다. 한 단계가 끝나면 다음 단계로 올라간다. 그러나 그것도 임제종(臨濟宗)만 그렇고, 조동종(曹洞宗)이나 황벽종(黃壁宗)에선 아예 화두 자체가 없다(묵조선)”며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선은 형식적인 데가 많다. 참선을 할 때는 열심히, 기계적으로 하지만 일단 참선이 끝나면 그 자리에서 술도 마시고, 고기도 먹고, 부인도 둘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보리 달마에서 내려오는 선을 옳게 가르치는 곳은 한국뿐이다. 중국은 선방이 사라졌고, 일본은 옳게 공부하지 않는다. 한국 불교의 어깨가 무겁다.” 회교 국가인 말레이시아 출신 명안스님(50)도 한국 선불교에 푹 빠져 있다. 숭산스님과의 첫 만남이 “어쩌면 나의 카르마(業)였던 듯하다”고 운을 뗐다. 중국 화교 출신인 명안은 15세 때 영국에 건너가 뉴캐슬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셰필드대에서 MBA를 땄다. 그 후 브리티시 개스사에서 근무하다 홍콩으로 옮겨 1992년부터 다우케미컬사에서 잘나가는 금융 컨설턴트로 일했다. 그러나 “내 삶에는 늘 뭔가가 빠져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그러던 중 1992년 숭산스님이 홍콩에 왔다는 얘기를 듣고 설법을 들으러 갔다. 당시 통역은 숭산을 한국군 장성 출신으로 잘못 전달했다. 이를 모르던 명안은 설법이 끝난 뒤 숭산에게 물었다. “당신은 한국군 장성 출신이므로 전시에 적군을 죽이라고 명령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생을 금하는 불교 승려가 될 수 있는가?” 그러자 숭산은 대뜸 이렇게 대답했다. “부모가 필요하면 부모를 죽이고, 선생이 필요하면 선생을 죽이고, 부처가 필요하면 부처를 죽여라!(When you need your parents, kill your parents. When you need your teacher, kill your teacher. And when you need the Buddha, kill the Buddha!)” 임제선사의 설법을 원용한 숭산의 대답에 명안은 그간 자신을 옥죄던 불만의 뿌리가 쓸데없는 집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처럼 명쾌한 설명에 한동안 생각이 멍해졌다”고 명안은 당시를 돌이켰다. 불교는 영어로는 Buddhism이다. 굳이 말하자면 ‘붓다주의’다. 따라서 본질적으론 부처의 사상과 행동을 따르는 일이다. 숭산이 뉴욕 맨해튼 14번가에 세운 ‘조계 국제 선센터’의 지도법사(guiding teacher) 우광선사(66·본명 리처드 슈로브)는 선불교를 “꼭 종교라기보다는 진정한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일종의 방법론”으로 규정했다. 말레이시아 출신의 명안스님. 유대계로 조계 국제 선센터의 행정을 책임진 잰 포템킨(57)도 “선불교는 종교도, 철학도 아니며 일정한 가치나 규범 이전의 인간 심성에 내재하는 원초적 평상심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이라고 말했다. 뉴욕 등 세계 각지의 선센터에서 수행 중인 사람들 중엔 기독교도나 유대교 신자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불교가 서양에 어필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불교 특유의 이 같은 ‘포용성’ 외에도 창조주가 없다는 사유체계가 서양의 무신론자(atheist)나 불가지론자(agnostic)들에게 먹히기 때문이다. 흔히 가톨릭에선 묵상(contemplation)을 통해 인격신인 하느님과 계속 대화하려 하지만 선불교에선 절대자를 찾는 마음까지 비우고 자신의 깊숙한 내면을 파고들어 자신의 ‘본모습(불성)’을 찾으라고 한다. 숭산이 서양인 제자들에게 “생각이 끝나는 그곳에 무엇이 있는가”라고 물은 이유다. 그것을 찾는 과정은 길고도 험난하다. 외도선(外道禪), 범부선(凡夫禪), 소승선(小乘 禪), 대승선(大乘禪), 그리고 최고 경지인 최상승선(最上乘禪)-.자신의 본모습을 깨닫는 확찰대오(確察大悟)의 순간은 언제쯤 찾아올까? 대진은 “대답을 찾으려는 마음마저 놔버릴 때”라며 “대답을 갈구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대답을 찾지 못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전통 선원에서도 어떤 결과나 깨달음(enlightenment)을 얻으려고 화두를 잡아선 안 된다고 가르친다. 이 점은 무상사도 예외가 아니다. “어느 날 아침 해가 뜨면 삼라만상이 위대하고, 나무는 초록빛이고, 하늘은 푸르게 보이면서 스스로를 이해하게 된다. 깨우칠 순간을 기다리지 말고, 오직 정진하라고 가르친다”고 대진은 말했다. 그게 더 큰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설명이다. 숭산도 살아생전에 “자나깨나 ‘오직 모를 뿐’이라는 화두로 정진한다”고 말했었다.다시 짓궂은 욕심이 슬쩍 고개를 내민다. 앞에 놓인 반쯤 찬 찻잔을 두고 명안스님에게 “이게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명안은 그 찻잔을 슬그머니 기자 앞으로 밀었다. 다시 물었다. ‘나는 어디서 왔으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얻었는가? 그러자 명안은 파안대소를 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10년 후 다시 나를 찾아오라.” 10년 후에나 답을 알겠다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과거와 미래는 없고 오직 이 순간만 존재할 뿐이라는 뜻이었을까?

2009.05.19 16:12

8분 소요
바위 위에 펼치는 산상 예술세계

산업 일반

Hard Rock Holiness 칭다오(靑島) 국립공원 산악지대의 고지에서 싱가포르의 미술가 탄스위히안은 정신주의(그리고 새로운 중국)를 기리는 기념물을 조각하고 있다. 이 산속에서 탄이 하고 있는 작업은 인류 문명에 경의를 표하는 이미지, 자신의 불교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이미지를 바위들에 새겨넣는 것이다. “처음 그 산을 보았을 때 나는 화엄경이 그대로 내 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고 그는 당시를 돌이켰다. 그가 이번 작업의 소재로 선택한 얼굴들은 의외로 국제적인 면모를 갖고 있다. 셰익스피어·채플린·아인슈타인, 그리고 현대무용의 개척자 마사 그레이엄이 모두 루쉰(魯迅) 같은 중국 문학의 몇몇 거장들과 함께 자태를 드러낸다. “이들은 모두 역사에 영향을 미친 위인들이다. 그들의 사고와 비전은 계몽의 계기를 이뤘다”고 탄은 설명한다. 종합 예술가인 탄은 작품 속에서 상이한 감성(중국·인도·서구 등)을 혼합하는 능력으로 오래 전부터 인정받아 왔다. 그는 1968년 현대 중국 문학의 이정표를 이루는 자신의 첫 시집 ‘거인’으로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후 탄은 35편의 시·에세이·소설·비평 모음집을 펴냈고 사뮈엘 베케트, 앙리 미쇼, 자크 프레베르의 작품들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그는 전통예술 형식의 대가로 존경받는다. “탄은 수묵화로 유명하다”며 싱가포르 국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탄의 작품 전시회 큐레이터인 로스제위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의 초상화는 특히 강렬하다. 그는 붓을 몇차례 놀려 피사체의 표정뿐 아니라 유사성을 효과적으로 포착한다.” 그는 붓글씨의 대가이기도 하다. 서예는 시의 내용뿐 아니라 한자 획을 이루는 붓놀림의 부드러운 흐름과 조화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형식이다. 그의 붓글씨 서명 하나가 1만달러를 호가하기도 한다. 1996년 그의 붓글씨가 현판에 새겨져 양쯔(揚子)강변의 ‘세계유명중국인예술가작품전시관’ 입구에 세워졌다. 2000년에는 중국 당국이 고대 전설의 제왕인 황제 탄생일을 기념하는 에세이와 서예작품의 제작을 그에게 의뢰했다. 그것은 산시(陝西)省 진시황릉의 바위에 새겨졌다. “그것은 크나큰 영광이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칭다오 서부에 있는 이 산상 미술관에서 탄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과업을 만난 것 같다. 돌에 새겨진 초상화나 돌로 깎아 만든 형상을 통해 탄은 “자연과 함께 일하며 자연이 이미 그 안에 품고 있는 것을 표출하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한다며 말을 잇는다. “때때로 두어줄만 새기면 형상이 드러난다. 때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아도 형상이 이미 그곳에 존재하기도 한다.” 산길을 통과하는 그 4시간 30분의 관람 코스는 3개의 섹션으로 나뉜다. 최초의 속세 차원에는 뉴턴과 피카소의 형상이 자리잡고, 그 다음 정신적 차원에서는 불교세계의 여러 부처들, 끝으로 루미 같은 정신적 선각자들의 현실 문명으로 다시 돌아간다. 2001년 이후 탄은 2백명의 조각가들과 함께 간헐적으로 작업을 진행해 왔다. 탄이 형상이나 글씨를 돌에 그리면 이어 조각가 팀이 그의 구도를 완성한다. 때로는 80m 높이의 ‘반야심경 절벽’에서처럼 25cm 깊이까지 돌을 파기도 한다. “작업의 3분의 1 정도를 마쳤다. 앞으로 6년 아니면 평생이 걸릴지도 모른다. 급할 게 없다.” 탄의 말이다. 끊임없는 미소와 지극히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탄은 자신이 갖고 있는 불교 신앙의 화신인 듯이 보인다. 그는 언제나 동시에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지금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 넬슨 만델라의 주도로 시작된 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만델라는 자신의 희망과 평생의 경험을 상징하는 일련의 핸드 사인 여섯개를 그린 바 있다. 전세계의 예술가 20명이 그 이미지에 대한 자신의 예술적 해석을 추가하도록 요청받았다. 그의 다른 모든 작품들처럼 초문화적 결합은 밝은 앞날을 갖고 있는 것 같다.

2004.09.21 15:57

3분 소요
“국악은 餘音까지 들어야 제 맛”

산업 일반

음악을 듣고 죽은 사람이 있다? 지난해 인터넷을 통해 “황병기의 이란 곡을 세 번 이상 들으면 죽는다더라”, “음반을 틀지 않고 그냥 놔둬도 소리가 난다”는 등의 소문들이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고, 급기야 작가가 홈페이지를 폐쇄해야만 했던 해프닝이 있었다. 1975년에 초연된 은 가야금의 전통적 연주법 대신 여지껏 듣지 못했던 색다른 소리와 느낌을 시도했던 곡이다. 무용가 홍신자의 웃음소리, 울음소리, 신문 한 구절을 읽는 소리들이 함께 하고 있어 듣기에 좀 무시무시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창작국악의 개척자로 불리는 황병기 교수는 어떤 생각에서 이런 곡을 만들었을까? 올여름엔 유난히 비가 많았다. 역시 비가 오락가락했던 늦여름 날 북아현동 언덕에 있는 황병기 교수의 하얀색 3층집을 찾았다. 말끔하게 면도를 하고 옥색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황병기 교수와 자리를 마주하면서 을 둘러싼 ‘괴담’ 같은 소문 얘기부터 꺼내 보았다. “원래 제 스타일은 같이 명상적이고 아름답다고 얘기되는 계통의 음악입니다. 그런데 1950년대 말부터 서양현대음악이나 미술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1975년 월간지 100호 기념으로 명동국립극장에서 국제현대음악제를 개최할 예정이고, 그때 초연을 부탁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전위음악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에서 창작하게 됐습니다. 그 당시 이 음악을 듣다가 한 여자가 소리를 지르면서 뛰쳐나간 사건이 있었고, 문공부로부터 연주금지명령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음악평론가들은 모두 이 작품을 실험적이고 새로운 시도라는 관점에서 다루기도 했습니다.” 미학이 전공인 필자가 지금 들어도 전위적이고 형식파괴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75년 당시의 반응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처럼 실험적인 시도의 이면에 새로운 예술에 대한 작가의 의도 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가늠해 보게 된다. “미술은 구상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20세기 추상미술을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그렇지만 음악은 추상에서 출발합니다. (어떤 대상을 모방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 같다.) 이런 음악에 20세기 들어서는 웃음소리 ·신음소리 등과 같은 실제의 소리를 개입시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구체음악이라고 합니다. 도 우선은 그런 맥락의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가야금 연주방법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연주방법에서 탈피하려 했습니다. 첼로의 활이나 대나무 등으로 두드리거나 켬으로써 이제껏 전혀 듣지 못했던 소리들을 나타내려 하기도 했습니다.” 음악이란 기본적으로 소리를 통해서 그 무엇을 담아내는 예술이라 할 때, 그처럼 새로운 소리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종전의 가야금이 내지 못했던 표현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이라는 측면에서도 설득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질문을 해보았다. “종교적인 내용인데, 생명체로서 인간의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과정을 담고자 했습니다. 처음 부분의 가야금 소리는 초혼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홍신자 씨의 웃음소리 ·울음소리 언어 이전의, 즉 문화 이전의 소리에 해당합니다. 중간의 신문 읽는 소리는 문화를 상징하는 언어에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연주 당일 아침 신문을 읽도록 해서 문화의 현재 모습을 나타내려 했습니다. 그리고 끝부분의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낭독하는 소리는 피안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궤적을 가야금 소리와 사람 소리를 결합하여 만든 작품이라는 것이다. 실험적이고 형식파괴적인 예술일수록 이면에 이렇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뒷받침돼야만 할 것이다. 예술이란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대중과의 공감을 통해 발전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주금지명령 받았던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난 황병기는 부산 피난시절인 16세 때 우연히 가야금 소리에 매혹된 후 지금까지 52년 동안 하루도 가야금에서 손을 뗀 적이 없다고 한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당시 서울대 음대 학장의 요청으로 신설된 국악과에 출강했고, 국립국악원 ·이화여대에서도 강의를 했다. 사업가였던 부친의 권유로 극장 ·화학공장 등의 경영에 관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야금 연주와 작품 발표는 지속적으로 해왔으며, 74년부터 2001년까지 이화여대 한국음악과 교수로 재직했다. 90년 평양에서 있은 범민족통일음악회 전통음악 연주단장, 국악의 해 조직위원장을 지냈고, 지난해에는 미주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첼리스트 장한나와 협연 무대를 펼친 바 있다. 현재는 이화여대 명예교수,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있다. 이런 황병기 교수에게는 항상 ‘창작국악의 새 장르 모색’이라는 설명이 따라다닌다. 전통음악의 유산으로 간주돼온 조선시대의 것으로부터 탈피라는 점을 들기도 한다. 특히 그의 창작품 는 신라적인 예술세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과연 신라적인 것과 조선시대의 것이 다른 점은 무엇일까. “신라적인 것은 서역으로부터, 혹은 불교로부터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한시대에 서역적인 것이 받아들여지면서 토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무릇 문화라는 것이 외래문화로서 타자를 받아들이면서 자기 개성을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이지요. 그러던 것이 삼국시대로 오면서는 서역적인 것이 우리 고유의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당나라의 것은 외래의 것으로 여겨졌지요. 우리가 향피리라 할 때 그것은 서역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장구도 마찬가지고요. 반면 당피리는 삼국시대 당나라로부터 온 외래적인 것이고요. 이런 관점에서 삼국시대 토속적인 것에는 서역으로부터 온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경향이 강했습니다. 조선이 유교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터부시했다면, 삼국시대에는 나체에 종교적 신성함과 같은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지요. 따라서 내가 말하는 ‘신라적’인 것은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음악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불교적 법열(法悅)의 세계로 이행함을 의미하며, 는 그런 신라인의 춤곡이라 할 것입니다.” 서역은 중국의 서쪽이란 의미이고, 침향이 인도에서 나는 향료나무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는 서역의 향기 속에서 추는 춤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 같다. 황 교수의 음악이 명상적 사유에 적합한 곡이라는데 춤곡이라니, 좀 의아했지만 명상과 법열의 경지가 통한다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보다 더 의아했던 것은 과연 신라의 자료들이 남아 있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음악이란 사람들을 통해 전해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자료가 미비합니다. 세종 이전의 악보조차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신라 불상의 자세와 모양을 통해 그것이 춤을 출 때 나타나는 동영상 속의 한 스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불상이 움직일 때 혹은 춤을 출 때의 동작과 그에 따른 음악을 창안해봤습니다. 골똘히 생각하고 고민을 거듭하면서 만든 창작곡이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인터뷰라고 말하고 강의를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범민족통일음악회로 평양에 다녀온 이야기를 청해 보았다. “1990년이니까 아마도 내가 북한을 민간인으로 서는 처음 갔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라는 곡을 발표했는데, 소프라노겳으0즯장구가 어우러진 음악이었지요. 이 곡은 남북통일만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20세기가 탄압과 전쟁을 통해 각자의 우리를 내세우면서 빚어낸 갈등의 역사였다면, 그런 모든 것들을 넘어 인류 전체가 우리이고 하나라는 메시지를 주고자 한 것이었지요. 다시 말해 우리를 하나로 만들고 이뤄가는 과정을 담아내려 한 것입니다. 남북문제에서부터 인류 전체의 고통받는 영혼들을 위한 진혼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악기의 소리와 사람의 소리가 결합되고, 악기도 서양과 한국의 것이 결합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북이 하나라는 의미에 보다 가까이 간 시도로 북한 음악가와의 공동작업은 없었는지 궁금했다. “당시 북한의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 성동춘 씨와 합작한 이라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마 북한과의 합작이라는 최초의 분위기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 “우리 음들은 한국화의 붓자국 같은 것”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듯싶어 최근 우리 문화예술계의 화두인 한국문화의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꺼내 보았다. 그가 서양 음악과 한국음악의 차이를 줄비빔악기와 줄튕김악기의 차이를 들어 설명한 부분이 무척 인상적이라는 점에서부터 시작했다. “바이올린이나 첼로처럼 대를 이용하는 줄비빔악기는 음의 발생부터 끝남까지 사람이 컨트롤하는 악기입니다. 이에 반해 가야금처럼 손으로 튕겨서 소리를 내는 줄튕김악기는 사람이 음을 발생만 시키고, (호수에 돌을 던져 파문이 일 때처럼) 여음(餘音)들이 파문처럼 퍼져나가면서 지속되고 존재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그 여음에서 자연과의 동화를 이루게 되고, 결국에는 사람과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생각을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여음이란 무엇일까. 줄을 튕기고 난 후의 잔향음이라면 한국화의 여백과 같은 것일까. “서양사람들이 여음을 애프터톤(aftertone)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정확한 의미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서양에는 여음과 같은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동양에서는 소리와 침묵의 경계가 없다는 말을 합니다. 침묵도 소리와 같은 음악의 요소라는 것이지요. 여음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음악의 음들은 한국화의 붓자국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텐데요. 한국화에서 일필휘지를 말하는데, 더 이상 고쳐서는 안 되고 하나의 흐름으로서 여백과 상호관련 속에 존재합니다. 여기서도 붓 자체를 자연이라고 한다면, 붓자국은 그 자연과 사람의 합일을 나타내는 것이고 여백이 그 사이를 채우고 있는 것이지요.” 서양음악은 벽돌을 쌓는 것과 같고, 한국음악은 각기 다른 모양의 정원석을 배치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 생각이 났다. 동의를 구해 보았더니 “서양음악에서는 화음이나 하모니를 중시하고 그를 위한 음들의 통제를 중시한다면, 한국음악은 한국화에서 선이 갖는 독자성을 존중하듯이 개개의 음들을 존중하면서 이루어집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음악에서는 두 음을 겹쳐서 사용하지 않습니다”라고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이런 설명들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흔히 고루하다고 생각하는 국악의 세계가 무궁무진할 것만 같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아는 만큼 더 들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것이 국악의 진정한 대중화가 아닐까 생각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 보았다. “나는 계획을 미리 세워두고 하지 않습니다. 음악과 가야금이 좋아서 시작했고 지금까지 해왔듯이,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실행에 옮기게 되면 하고, 미리 계획을 세워 놓지는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을 존중합니다.” 황 교수의 연주가 듣고 싶어져서 조심스럽게 청해 보았다. 지금까지의 모습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고, 신이 나는 것 같아 보였다. 해박한 이론과 고민을 담아 국악이론의 대가로 꼽히지만 그는 역시 예술가였다. 가야금 연주를 하루도 거른 적이 없다는 점에서 철저한 노력과 자기관리를 통해 자신의 음악세계를 가꿔가는 음악가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자기관리가 우리 문화의 지금 모습에도 적용돼야만 한국문화의 정체성이 이뤄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2003.10.07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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