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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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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생각하고 문제 푼다”...GPT-5 출시 앞둬

IT 일반

챗GPT 개발사 오픈AI의 샘 올트먼 최고경영자(CEO) 최신 AI 모델 GPT-4.5를 수주 내 출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 4.5는 오픈AI의 마지막 비추론 모델로, 향후 모델은 추론과 일반AI를 통합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12일(현지시간) 올트먼은 자신의 X(전 트위터)를 통해 "다음 출시할 모델은 내부적으로 '오리온'(Orion)이라고 불렀던 GPT-4.5"라며 "우리가 개발하는 마지막 비(非)사고의 사슬(chain-of-thought) 모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사고의 사슬은 AI가 학습한 내용을 즉각적으로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사슬처럼 연결된 일련의 사고 과정을 거치는 방식을 말한다. 즉, 저장되고 학습된 내용 뿐만이 아닌 사람처럼 스스로 추론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다.올트먼은 "향후 'o 시리즈' 모델과 GPT-시리즈 모델을 통합하는 것이 주요 목표가 될 것"이라며 "이를 통해 모든 도구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언제 깊이 사고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으며, 광범위한 작업에서 유용하게 작동하는 시스템을 만들려 한다"고 설명했다.GPT-4.5 이후 출시될 모델은 GPT-5로, 챗GPT와 API(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 모두에서 GPT-5를 출시할 예정이다. 올트먼에 따르면 'o3'를 포함한 다양한 기술을 통합한 시스템이 될 것으로 보인다.그는 "앞으로 'o3'는 독립적인 모델로 제공되지 않는다"며 "챗GPT 무료 이용자는 기본 지능 수준의 GPT-5를 무제한 사용할 수 있고 (유료 서비스인) 플러스 구독자는 더 높은 지능 수준의 GPT-5를 사용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올트먼은 게시물에서 이들 모델의 구체적인 출시 일정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와 관련한 질문에 "GPT-4.5는 수 주, GPT-5는 몇 달 내"라고 답한 바 있다.

2025.02.13 14:20

2분 소요
‘페이스북 선거’ 시대 열렸다

산업 일반

가짜뉴스, 빅데이터 등을 마케팅 도구로 이용…유권자 성격·라이프스타일·가치관 분석해 맞춤 공략 지난해 가을 미국 대선 몇 주 전 말쑥하게 차려 입은 영국 남자가 무대로 걸어 올라가는 동안 록그룹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의 ‘Bad Moon Rising’ 도입부 화음이 뉴욕시 한 호텔 연회장을 뒤흔들었다.불길한 달이 뜨네 위기가 닥쳐오네영국 명문 이튼 스쿨 출신의 연사 알렉산더 닉스는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 워런 버핏, 억만장자 투자자 조지 소로스, 톰 브로코 NBC TV 전 앵커, 티 분 피켄스 BP 캐피털 매니지먼트 회장, 데이비드 페트레이어스 전 중앙정보국(CIA) 국장,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같은 이름의 비슷한 글로벌 엘리트끼리 어울리는 자리였다. 정책입안자와 자선사업가들로 이뤄진 그 연례 모임 참석자 중 일부에겐 실제로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다. 미국 대선의 영향으로 그들의 세계 질서가 붕괴되려는 참이었다. 그러나 트럼프 선거진영 일을 맡은 업체의 최고경영자인 닉스에겐 그런 혼란이 큰 호재였다.그날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회사 케임브리지 어낼리티카(CA)는 트럼프 선거진영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트럼프 진영은 미국 유권자 관련 정보의 대규모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중이었다. 그 회사의 기술로는 무엇보다도 유권자의 ‘사이코그래픽 프로파일링(psychographic profiling, 주민의 행동·가치관·흥미 등에 관한 분석조사)’이 첫 번째로 꼽혔다. 그날 오후 트럼프가 승리할지 전혀 불확실한 상황이었지만 닉슨 CEO는 회사의 기막힌 신제품 홍보 목적으로 그 자리에 참석했다.그는 “오늘 선거과정에서 빅데이터와 사이코그래픽의 위력에 관해 논할 기회를 얻게 돼 영광”이라고 입을 열었다. 그는 슬라이드를 넘기며 CA가 사람들의 감정에 어떻게 어필할 수 있는지 설명하면서 미국인 남녀에 관한 방대한 데이터 덕분이라고 설명했다.닉스 CEO는 빅데이터에 관해 훑은 뒤 CA가 그것을 어떻게 정치적 용도로 추출하는지에 관해 설명했다. ‘평균적인 성격’을 찾아낸 뒤 다른 변수들을 토대로 성격 유형을 더 구체적인 하위 그룹으로 분류해 세밀하게 조율된 메시지에 끌릴 만한 더 작은 소그룹을 형성하는 방식이다.그는 CA의 미국 유권자 관련 데이터에서 추린 이른바 ‘실생활 사례’ 속으로 청중을 인도했다. 보편적인 성격 유형을 가진 익명의 대그룹에서 출발해 한 명의 특정인으로 좁혀 내려갔다. 설명을 듣고 보니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인물이었다.닉스 CEO는 공화당 아이오와 주 코커스(당원집회) 참석이 유력한 4만5000명 그룹에서 출발했다. 약간만 등을 떠밀면(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설득 메시지’) 투표에 참석해 테드 크루즈 후보(2016년 예비선거 초반 CA 서비스를 이용했다)에 표를 던질 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생활과 관련된 수많은 디지털 데이터 자료를 정밀 분석하는 알고리즘의 데이터 흐름 속에서 이들 집단의 세부정보를 건져 올렸다. 닉스 CEO는 자사 알고리즘에서 ‘정서적 안정성(neuroticism)이 대단히 높고, 개방성이 꽤 낮으며 다소 성실하다’는 판정을 받은 하위그룹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찰칵. 그래프와 원형 도표 스크린으로 넘어간다.“그러나 우리는 더 세분화할 수 있다. 그들이 어떤 이슈에 관심을 갖는지 볼 수 있다. 우리는 총기 소유할 권리를 선택했다. 그에 따라 범위가 약간 더 좁아진다.”찰칵. 또 다른 그래프와 원형 도표 스크린이지만 몇몇 세부 항목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다.“이제 총기소유권리에 관한 메시지의 필요성은 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진 성격 유형에 따라 뉘앙스를 달리 한 설득 메시지가 돼야 한다.”찰칵. 또 다른 스크린. 아이오와 주 지도에 작은 적색·청색 점들(개별 유권자들)이 점점이 수놓아졌다.“더 파고들기를 원한다면 그 데이터를 개인 차원까지 세분화할 수 있다. 우리는 미국 내 성인 개개인에 관해 4000~5000건에 가까운 데이터를 보유한다.”찰칵. 제프리 제이 루스트라는 단 한 사람의 이름에 동그라미가 쳐진 또 다른 화면. 성별(남성)과 그의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좌표.방금 글로벌 엘리트들 앞에서 닉스 CEO가 마치 동물원의 동물처럼 심리적 성향을 열거한 미국 유권자는 찾아내기 어렵지 않았다. CA 조사팀은 그의 주소뿐 아니라 그에 관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알았을 것이다. 필시 페이스북 ‘좋아요’를 들여다본 듯했다. 예를 들어 헤비메탈 그룹 아이언 메이든, ‘e핫 로즈 앤 건즈’라는 뉴스 사이트, ‘마이 데일리 캐리 건’과 ‘모파 드래그 레이싱’이라는 페이스북 그룹 가입 기록 등이다. 이 같은 ‘좋아요’는 사이코그래픽 프로필의 필수조건이다.루스트는 자신만을 위해 맞춤 작성된 메시지를 트럼프 후보로부터 받을 수 있도록 아주 사적인 데이터 대다수를 보여줄 의향이 있는지 질문 받은 적이 없었다. 현재 케임브리지의 분석 알고리즘에 포착된 다른 미국인 수억 명도 마찬가지였다.빅데이터·인공지능(AI) 그리고 CA 관계자 같은 전략가들이 설계·운영하는 알고리즘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팬옵티콘(Panopticon)으로 탈바꿈시켰다. 간수들이 꼼짝하지 않고도 모든 수감자들을 하루 24시간 매일 감시할 수 있도록 설계된 19세기 원형 감옥 말이다.우리의 21세기 감시자들은 우리가 구글에서 이탈리아를 검색하거나 아마존에서 피렌체 관련 서적을 구입한 사실을 토대로 토스카나 휴가여행 상품만 팔려 하는 건 아니다. 그들은 인간의 불완전하고 종종 비이성적인 의사결정 방식에 대한 수십 년 간의 행동과학 연구를 토대로 우리 자신도 모르는 새 우리를 특정 후보 쪽으로 은근히 ‘떠민다’.살인 테러를 저지르는 종교 전사들로부터 북극 빙하의 해빙, 전 세계에서 부상하는 작은 히틀러들에 이르기까지 요즘 현실세계 속의 온갖 공포 영화 같은 반전과 무시무시한 괴물의 등장 중에서도 무엇보다 가장 섬뜩한 것이 있다. 기계가 우리보다 우리 자신에 관해 더 많이 알고, 그들이 가까운 장래에 우리에게 최초의 AI 대통령을 안겨줄 수 있다는(만일 아직 그러지 않았다면) 확실성이다.1948년 미 중앙정보국(CIA) 프랭크 위즈너 요원이 모킹버드 작전(CIA 최초의 언론조작 시도)을 수립했을 때 자신의 네트워크가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의 팩트와 여론을 조작할 수 있는 ‘막강한 월리처 오르간(a mighty Wurlitzer)’이었다고 자랑했다. 그런 가상 머신의 관리에 수반되는 파워와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위즈너는 곧 머리가 돌아 목숨을 끊고 말았다.그러나 오늘날 가공되지 않은 온라인 개인 정보를 기반으로 훨씬 더 강력한 버전의 프로파간다 ‘월리처’가 존재한다. 끊임없이 공급되는 이들 개인정보는 머신에 입력된 뒤 알고리즘에 의해 분석된다. 비슷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더 소규모 집단에 맞춰 정치적 메시지를 개인화하는 알고리즘이다. 상업용과 치안 용으로 방대한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되고 있다.그 데이터베이스는 정치인과 그 전략가에게도 판매된다. 그들은 이제 우리에 관해 우리 배우자나 부모보다 더 많이 알 수 있다. 정보원·전화도청·훔쳐보기가 전부였던 옛 소련 KGB와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는 그런 슈퍼 스파이 기능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누구나 시도해 볼 수 있다. CA의 조사기법이 개발된 케임브리지대학은 그 회사와 상업적 관련성은 없지만 그들의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페이스북 기반의 온라인 사이코그래피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볼 수 있다. ApplyMagicSauce.com의 알고리즘은 (페이스북 이용자의 동의를 받은 뒤) 미국의 지난 대선 기간 전 CA가 1차적으로 저임 기술 근로자를 고용해 그들의 페이스북 프로필을 넘겨받아 ‘친구’가 수천만 명에 달했을 때 한 일을 재현한다.페이스북 포스트·친구·좋아요를 샅샅이 훑은 뒤 몇 초만에 성격 프로필을 토해 낸다. 이른바 OCEAN 심리성향 테스트 점수(개방성·성실성·외향성·친화성·정서적 안정성)가 대표적이다.대규모 사이코그래픽 프로파일링 기능을 가진 CA는 국가주의자 스티브 배넌 백악관 수석 전략가와 공화당의 오랜 비밀 공작 전문가 로저스톤 정치 전략가 등 트럼프 선거진영의 다른 여러 운동원과 마찬가지로 음지의 장인 장르에 속한다. 배넌은 CA 이사였으며 그의 후원자인 로버트 머서가 CA의 90% 지분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머서는 이름 곁에 거의 예외 없이 ‘베일에 가려진(shadowy)’이라는 형용사가 따르는 보수파 억만장자다. 그러나 CA는 트럼프 선거진영의 커다란 데이터 추출 머신에서 하나의 톱니에 불과했다. 전 세계 거의 20억 명에 관한 온라인 행태 데이터를 보유한 페이스북이 트럼프에게 훨씬 더 유용했다. 정보 열람 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있는 전략가와 마케터는 그 개개인의 정보를 들여다볼 수 있다.트럼프 선거진영은 2억2000만 명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프로젝트 알라모라는 닉네임을 붙였다. 유권자 등록 기록, 총기 소유 기록, 신용카드 구매기록, 그리고 거대한 데이터 금고인 엑스페리안사(Experian PLC), 데이터로직스, 엡실론, 그리고 액시옴(Acxiom Corporation)을 이용했다.맏사위 재러드 쿠슈너는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기 오래 전에 페이스북의 위력을 간파했다. 지난해 대선 캠페인이 끝날 무렵 페이스북은 트럼프의 선거운동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트럼프의 데이터팀이 제임스 반즈라는 페이스북 직원을 선거 캠프의 MVP로 선정할 정도였다.그들이 그런 방식을 도입한 최초의 전국적 선거 캠프는 아니었다. 민주당 전국위원회는 유권자 2억4000만 명의 데이터가 저장된 데이터베이스 캐털리스트(Catalist)를 이용했다. 상용·공공 기록에서 추출한 데이터가 1인당 수백 건씩 저장돼 있었다.그러나 그것은 페이스북에 ‘유사 타깃(Lookalike Audiences)’ 기능이 생기기 전, AI와 알고리즘이 유권자를 분석해 25인 이익집단으로 세분화할 수 있게 되기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2020년이 되면 분명 2016년의 디지털 발전은 정치전략의 골동품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페이스북이 광고주들에게 제공하는 많은 서비스 중에 ‘유사 타깃’ 프로그램이 있다. 광고주(또는 정치 캠페인 관리자)가 소그룹의 알려진 고객이나 지지자 정보를 들고 페이스북을 찾아가 규모를 키워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페이스북은 수십억 건의 포스트·사진·좋아요·연락처 열람권한을 이용해 원래 그룹과 유사한 사람들의 그룹을 형성한 뒤 그 집단에 영향을 미치도록 제작된 표적 광고를 내보낼 수 있다.사이코그래픽 마이크로타게팅(microtargeting, 유권자 맞춤 전략)과 페이스북의 유사 타깃 프로그램의 결합은 적어도 2004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술에서 논리적으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다음 수순이었다. 당시 칼 로브는 오하이오 주의 아미시 교파를 찾아낸 뒤 동성결혼 문제로 그들을 자극하는 등의 방법으로 유권자 마이크로타게팅에 착수했다. 결과적으로 아미시 교도들은 사상 처음으로 투표에 참여했다.그 뒤로 미국인 유권자를 분석하고 분류하는 머신과 알고리즘의 능력이 크게 향상됐다. 요즘 정치전략가들은 빅데이터의 도움으로 마우스나 키보드를 한 번만 움직이면 개인의 OCEAN 상대 점수를 요청해 입수할 수 있다. 사이코그래픽 분석에는 페이스북조차 필요 없다. 상업적으로 제공되는 수천 건의 데이터를 이용해 컴퓨터가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분류한 뒤 실제로 테스트 받은 사람들과 그들의 프로필을 대조하면 된다. 2008년 버락 오바마가 대선에 출마했을 때 그의 캠프는 소셜미디어와 데이터 추출에 정통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4년 뒤인 2012년 오바마 선거진영은 새로운 가능성을 테스트했다. 특정 그룹의 ‘설득가능성’ 순위를 매기고 메시지가 그들에게 얼마나 주효했는지에 관한 인구통계 분석과 전화조사를 결합하는 실험을 실시했다.2012년에 접어들면서 빅데이터·소셜미디어 그리고 AI를 결합해 할 수 있는 일에 큰 발전이 있었다. 그해 페이스북은 행복·슬픔 같은 감정 조작 실험을 실시했다. 100만 명을 두 그룹으로 나눠 포스트 메시지를 조작했다. 한 그룹은 친구들로부터 행복한 업데이트 소식을 받고 또 한 그룹은 슬픈 소식을 받도록 했다. 그 뒤 그 영향에 대한 알고리즘 분석을 통해 그들이 뜻밖에도 사람들의 기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입증했다(사상 최대 규모의 개인 행동 데이터를 축적한 페이스북은 지금도 행태 조사를 실시한다. 여전히 광고와 수익사업 목적이다. 지난 5월 초 페이스북의 호주 지사에서 유출된 문서에선 페이스북이 ‘불안정한 십대’를 포함한 사람들의 감정상태를 파악해 제품 표적 광고를 향상시킬 수 있다고 광고주들에게 홍보하고 있었다).2013년 케임브리지대학 연구팀은 사이코그래픽 프로파일링에 페이스북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 실험했다(이 방식은 훗날 CA에서 상용화했다). 미국인 연구원 알렉산더 코건도 리서치의 상업화에 참여한 과학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결국 3000만 건의 페이스북 프로필을 확보해 CA의 전신에 넘겨줬다. 그는 회사를 떠난 뒤 캘리포니아 주로 건너가 알렉산더 스펙터로 정식 개명했다. 델라웨어에서 자신의 온라인 설문과 서베이 데이터를 판매하는 회사를 세웠다. 온라인에서 개인 정보를 빨아들이는 또 하나의 약간 더 투명한 방법이다.지금은 때때로 ‘페이스북 선거’로 불리는 2016년 대선에서 페이스북은 CA의 실험을 뛰어넘어 완전히 새로운 기술을 적용했다. 소셜미디어가 존재하기 전에도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이 컸지만 데이터 수집 기술의 발전 그리고 미국이 프라이버시 문제에서 비교적 무법 상태였던 탓에 정치사상 가장 공격적인 마이크로타게팅이 가능해졌다. ‘정보가 적은’ 새 유권자들을 정치집단으로 끌어들이고 인종주의적·반유대주의적·여성혐오적 정치연설의 경계를 확대했다.독일 IT 컨설턴트 크리스토프 보른셰인은 온라인 프라이버시와 기타 인터넷 현안에 관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고문 역할을 한다. 그는 오바마와 트럼프 대선 전략의 차이는 알고리즘과 오늘날의 발전된 AI에 있다고 말한다. 마케터들은 ‘통계적 쌍둥이’ 즉 비슷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을 찾아내 그룹을 형성한 뒤 그들에게 신발·여행상품·세탁기를 판매하기 위한 표적 광고를 내보내는 데 몇몇 도구를 사용한다. 정치 전략가들도 똑같은 도구를 이용해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슬로건과 스토리, 일명 가짜 뉴스로 가득한 ‘에코방(echo chambers, 자신들의 메아리만 울리는 방)’을 만들 수 있다. 페이스북은 함께 묶기 어려운 사람들을 광고 도구들을 이용해 비슷한 사고방식의 아주 작은 소그룹으로 분류했다. 이는 이른바 오버튼 윈도(Overton window, 미국의 공적 토론에서 허용되는 연설의 한계)를 깨는 데 도움이 됐다. 예컨대 (페이스북에서) 비공개로 인종차별이나 반유대주의 사고를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진 유권자들로 그룹을 만들어 출처가 공개되지 않은 이른바 암흑 광고(dark ad)를 그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 지난해 미국 대선에서 인종주의적 정서, 백인 우월주의, 난민에 대한 반감, 반유대주의, 악의적인 여성혐오가 소셜미디어에서 넘쳐나 대학 캠퍼스 포스터와 대중 집회로 퍼져나갔다.전략가들은 사이코그래픽 알고리즘을 이용해 성난 인종주의자뿐 아니라 지적으로 현혹되기 쉬운 개인들을 표적으로 삼을 수 있다. 이성적이기보다 감정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다. 트럼프에게 그런 유권자들은 어두운 탄광 속의 다이아몬드나 다름없었다. CA도 일익을 담당한 듯했다. 대선 몇 주 전 CA에 관한 스카이 뉴스 보도에서 실제로 한 직원이 ‘인지 척도의 필요성’에 관한 논문을 살펴보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인지 척도는 OCEAN 테스트와 마찬가지로 개인 데이터에 적용될 수 있으며 개인의 의사결정에서 ‘사고 vs 감정’의 상대적인 비중을 측정한다.트럼프 선거진영은 페이스북의 표적 광고기법을 이용해 극히 정밀하게 조준된 메시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소집단을 찾아냈다. 그렇게 찾아내는 집단의 규모가 갈수록 작아졌다. 이 같은 타게팅의 바탕을 이루는 행동과학에선 사람들이 자신의 관점과 다른 정보는 거부하지만 친밀하거나 사고방식이 비슷한 사람들이 전할 때는 더 잘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타났다.페이스북의 각종 도구를 이용해 이민·여성·흑인·유대인 혐오자들을 찾아내고 자극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페이스북은 그런 위험을 알면서도 지금껏 그것을 저지하기 위한 방벽을 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은 인정했다. 페이스북은 지난 4월 보고서에서 “우리는 보안의 초점을 계정 해킹, 멀웨어(악성코드), 스팸, 금융 사기 같은 전통적인 불법 행위에 한정하지 않고 공개토론을 조작하고 사람들을 기만하려는 시도 등 더 미묘하고 교활하게 퍼져나가는 부정 행위까지 포함하도록 확대해야 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진영은 하루 최대 7만 개의 변종 광고를 내보냈다. 그리고 힐러리 클린턴과의 제3차 토론을 전후해 17만5000건의 변종 광고를 쏟아냈다. 트럼프 진영의 게리 코비 디지털 광고 팀장은 변종 광고가 구체적으로 가령 ‘오하이오 주의 밥 스미스’를 표적으로 하기보다는 다양한 소규모 유권자 집단의 기부 확대를 겨냥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 과정을 조금씩 자주 수익을 실현하는 ‘초단기 주식 거래’에 비유하며 트럼프가 “정계의 다른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방식으로 페이스북을 이용했다고 말했다.그는 트럼프 진영이 CA의 사이코그래픽스를 이용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닉스 CEO가 뉴욕 강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분명 CA는 트럼프 유권자들에게 그 기법을 적용했다.코비 팀장은 동유럽과 미국에서 이뤄진 반(反) 클린턴 광고와 프로파간다 공세의 배후가 트럼프 진영이라는 주장도 부인했다. 그 공세는 페이스북의 도구를 통해 기존에 알려진 트럼프 유권자들과 비슷한 성향으로 확인된 불만분자들을 정확히 겨냥했다. 소수인종과 여성들의 투표를 억제하려는 시도였다. 조사에 따르면 그런 억제 광고와 가짜 뉴스가 트럼프의 투표 독려 광고보다 대선 결과에 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인종과 성별에 따른 페이스북의 표적 광고와 관련된 스캔들이 일어나긴 했지만 새롭지도 않고 합법적이다. 저술가이자 언론인 줄리아 앙윈은 저서 ‘집요한 감시의 세계에서 프라이버시·보안·자유를 찾아(Dragnet Nation: A Quest for Privacy, Security, and Freedom in a World of Relentless Surveillance)’에서 주택분양 광고주들이 페이스북의 ‘인종 친화성(ethnic affinity)’ 마케팅 도구를 이용해 광고에서 흑인들을 배척했다고 밝혔다. 페이스북은 그것을 예방하는 도구를 마련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인종 타깃의 정치적 메시지에 그 도구를 이용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일절 함구했다.페이스북의 한 대변인은 각종 혐의에 관해 공식 인터뷰를 거부하며 마크 저커버그 창업자 겸 CEO는 이 기사를 위해 논평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변인은 이메일에서 “사람들을 오도하거나 그들의 정보를 오용하는 행위는 우리 정책에 직접적으로 저촉되며 그런 기업에 대해서는 페이스북 이용을 금지하고 부적절하게 수집된 데이터를 모두 파기하는 등 신속히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데이터 오용에 관한 페이스북의 정의는 약관에 설명돼 있다고 대변인은 밝혔다. 장문의 약관은 안전과 신원정보 문제 등 개괄적으로 분할돼 있다. 약관에는 CA가 서비스하는 것과 같은 사이코프래픽 분석을 명확하게 금지하는 조항은 없는 듯하다.‘페이스북 선거’에 관한 페이스북의 마지막 공개 발언은 지난 3월 노스 캐롤라이나 농업·기술 주립대학에서였다. “우리가 사람들이 클릭하기를 바라고 우리 서비스에 실제로 이런 콘텐트를 원한다는 비난이 있었지만 얼토당토않은 소리다. 우리 커뮤니티에서 가짜 정보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사이코그래픽 마이크로타게팅에 관해서는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선거 후 비판이 거세지자 페이스북에 3000명을 새로 고용해 신고된 증오 발언을 모니터하도록 했다. 뉴스위크가 만난 민주당 캠페인 전략가들은 트럼프의 디지털 전략이 효과적이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대선 승리 요인으로는 보지 않았다. 2012년 오바마 대선 캠프 디지털 전략 부책임자였던 마리 댄지그는 “궁극적으로 트럼프의 전반적인 전략이 과거보다 세련미가 떨어졌다”고 말했다. 현재 진보주의 성향 정치전략 기업 블루 스테이트 디지털에서 일하는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대규모의 대중적인 공포 유발 전략에 초점을 맞췄다. 강력한 정치적 플랫폼으로 자리 잡은 소셜미디어가 지지난 대선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소셜 미디어는 튀는 발언으로 지지기반을 규합하거나 가짜 뉴스를 퍼뜨리기에 완벽한 수단이다. 통용되는 사이코그래픽 또는 행위 데이터를 이용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오도하거나 두려움을 유발하는 것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 위험한 게임이다.”페이스북의 마이크로타게팅 능력, 행동과학, 그리고 트위터나 스냅챗 같은 다른 소셜미디어 플랫폼이 보유한 다량의 데이터 같은 도구는 판도라의 상자 안에 다시 집어넣을 수 없는 도구들이라고 댄지그를 비롯한 민주당 전략가들은 말한다. 그들은 물론 공포 기반 메시지에 넘어가기 쉬운, 정서적 안정성과 성실성이 낮은 유권자를 찾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빅데이터·행동과학·페이스북·마이크로 타게팅의 결합은 더 바랄 게 없는 정치 공식이다. 그들도 그것을 이용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가다듬고 개선해 나갈지는 입에 올리지 않을 것이다.코비 팀장은 2020년에는 구글과 페이스북 같은 플랫폼이 더 많이 등장하고 수만 또는 수십 만 건의 변종 광고 제작이 더 프로그램화·기계화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끝으로 ‘메신저 봇’이 더 보편화하고 개인화돼 가령 오하이오 주의 유권자들이 자신과 자신들의 공동체만의 문제에 관해 트럼프 봇으로부터 답변을 들을 수 있게 된다고 내다봤다.저커버그, CA 심지어 민주당 컨설턴트들까지 그 문제와 관련해 너무 깊이 파고들려 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인터넷이 우리에게 숨기는 것(The Filter Bubble: What the Internet Is Hiding From You)’의 저자 엘리 패리서는 말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위험이 따른다. 하나는 어떤 정치적 주장이 누구에게 향하는지 듣지 않으면 대화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런 마이크로타깃 세계에 이미 상당히 근접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특정 사이코그래픽 하위 그룹에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단계를 뛰어넘는 상황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 세상에선 정치 캠페인에서 기계가 만들어낸 100만 가지 메시지를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100만 개 그룹에 전달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이 효과적인지 또는 심지어 어떤 주장인지 이해하는 과정도 없이 후보 지지가 눈에 띄게 증가하는 메시지만 증폭하게 된다.”구글 임원 출신의 트래비스 재레이는 “사람들은 데이터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온라인 신원정보 보안을 전문으로 하며 주로 해커와 절도범으로부터 대기업을 보호하는 일을 하는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인터넷 주변에 어떤 빵 부스러기를 남기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정부 당국자들은 데이터 분석기술이 어떻게 작동하지는 모른다.” 재레이가 창업한 컨설팅 업체는 온라인 신원정보와 보안에 관해 기업에 컨설팅한다. 그는 수조 달러를 다루는 금융기업 관리자들도 모르는 건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데 정부와 일반 시민이 이해할까?”그러나 데이터 기술은 지금껏 법률·규제 프레임워크를 앞서 나갔다. 그것을 정치 캠페인에 사용하는 데 따르는 윤리문제에 관한 토론은 아직 거의 없다. 어떤 중진 국회의원이나 워싱턴 정부 관료도 사이코그래픽 데이터 마이닝이 프라이버시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인지나 합리적 사고의 회피에 기초한 정치 메시지의 윤리성 또는 인종주의와 기타 지금껏 금지됐던 발언의 주류화에서 AI의 역할과 관련된 문제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유럽의 운동가들은 그와 관련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스위스 수학자이자 데이터 보호 운동가 폴-올리비어 데하예는 사람들이 자신에 관한 데이터에 접근하도록 돕는 퍼스널데이터.IO의 창업자다. 페이스북이 자신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 관해 수집하는 정보에 대해 열 번 중재에 나섰다. 그는 페이스북과 케임브리지가 수집하는 데이터를 요청하는 법의 설명을 포함해 두 회사에 관해 폭넓게 저술했다. 그는 “두더쥐 잡기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이들 플랫폼이 별개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모든 플랫폼 전반에 걸쳐 이용자를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기업이 있으며 그런 것들을 상호 연결시키는 제품들도 있다.”업계 관계자들도 데이터 기반 사이코그래픽스가 미치는 영향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는 점을 인정한다. 최대 데이터 수집업체 중 하나인 에퀴팩스의 그레그 존스 부사장은 “그 가능성은 무시무시하다”고 말했다. 최근 워싱턴 D.C.에서 열린 빅데이터 규제 관련 패널 토론에 참여했던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CA가 마이크로타게팅 기법으로 이룬 성과를 보면 그것은 마케터의 꿈인 셈이다. 완벽한 시점에 완벽한 제안을 할 수 있을 만큼 고객을 속속들이 아는 것이다. 그런 정보의 활용은 합법이지만 윤리적인지는 모르겠다. 시장을 세분화해 그것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신용카드든 최고의 정당이든 가장 좋은 제안을 하지 못하게끔 정치적 목적에 일부 규제를 적용해야 할까? 이 중 일부는 현재 상태로는 곤란하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사람들이 결정해야 할 문제다.”하지만 그게 언제쯤일까? 대선 후 미국 프라이버시 법과 정책에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월 프라이버시를 제한하고 상업적 데이터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분명한 조치를 취했다. 광대역·무선통신사들이 민감한 정보를 공유하려면 허가를 받도록 하는 오바마 시대 프라이버시 규정을 폐기했다. 지금은 버라이즌과 AT&T 같은 기업들이 사람들의 집안 활동 그리고 그들의 전화 상 온라인 활동에 관한 데이터를 이용해 수익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대선 후 CA의 모 기업인 방위산업체 SCL(Strategic Communications Laboratories)은 곧바로 백악관으로부터 수 블록 거리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미국 국무부가 제시한 50만 달러짜리 계약을 마무리지었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해외 프로파간다가 미치는 영향의 평가를 돕는 계약이었다.그러나 그들이 돈을 쓸어 담을 동안 작지만 집요하고 강렬한 분노에 밀려 이제껏 자기 홍보에 여념이 없던 닉스와 그의 회사가 소극적이고 겸손해졌다. CA는 페이스북의 데이터를 사용하지 않으며 페이스북 정보를 추출할 때는 “참여하기 원하는 개인의 명백한 동의를 받아” 설문을 통한다고 홍보책임자 닉 피버트가 뉴스위크에 말했다. 또한 CA는 트럼프 선거 운동에 사이코그래픽스를 적용할 시간이 없었다고 말했다.영국 언론에서 수개월 전부터 이 문제를 취재하면서 갈수록 비판적인 기사가 많아졌다(특히 영국 가디언의 캐롤 캐드왈라드르는 CA의 작업을 가리켜 권위주의적인 감시국가를 위한 프레임워크라고 불렀고, CA는 그 뒤 그의 보도에 법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마침내 사생활 보호권과 영국의 엄격한 관련법 준수를 모니터하는 독립기구인 영국 정보커미셔너사무국(ICO)은 지난 5월 17일 브렉시트(영국 EU 탈퇴)와 기타 국민투표에서 CA와 SCL의 역할을 조사 중이라고 발표했다.그 밖에도 런던의 변호사들은 CA와 SCL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준비 중이다. 이 문제와 관련된 데이터 수집의 막대한 규모 때문에 손해배상 평가액이 천문학적인 규모에 이를 수도 있다.미국에선 의회 의원들이 우익 성향의 동유럽 웹 봇과 CA의 관련성을 조사 중이라고 전해진다. 그 웹봇들은 대선 기간 중 여론조사에서 트럼프의 지지도가 떨어질 때마다 클린턴에 관해 부정적인 때로는 사실과 다른 스토리를 인터넷에 쏟아냈다.미국 벤처자본가와 기업가들은 가짜 뉴스의 흐름을 막을 수 있는 웹사이트와 앱 개발에 열을 올린다. ‘나이트 오보 방지 시제품 펀드(Knight Prototype Fund on Misinformation)’와 소규모 벤처 자본가 그룹이 관련 아이디어를 가진 사업가들을 위한 종자돈을 모으고 있다. 올해 초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개최된 제1회 미스인포콘(Misinfocon)에 수백 명의 개발자가 참석했으며 그런 컨퍼런스가 앞으로 더 많이 계획돼 있다. 페이스북과 구글은 지난해 11월 이후 쏟아지는 가짜뉴스를 걸러내는 방안 개발에 고심해 왔다.미국 대선 이후 마이크로타게팅과 가짜 뉴스 공작의 규모가 명확하게 드러나면서 CA와 페이스북은 방어태세로 전환했다. CA 창업자 중 한 명은 사이코그래픽스의 정확도가 1% 선에 그친다며 자신들의 방식이 효과적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닉스 CEO가 가짜 약 장수라고 말하는 셈이다.과거 CA는 미국 대선 레이스에 자신들의 사이코그래픽 기술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공개적으로 자랑하고 다녔다. 기자들이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고, 유럽의 프라이버시 운동가들이 소송을 준비하고, 영국 ICO가 조사에 착수하고, 미국 상원 위원회가 대선 기간 중 러시아의 트럼프 밀어주기 공작에 대한 CA의 연루 가능성 조사에 착수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SCL은 아직도 자신들의 작업이 개도국 선거에 미치는 영향을 광고하며 웹사이트에서 ‘샌디아 내셔널 래버러터리즈’ 같은 미국 방위산업체와의 관련성를 언급한다. 안전하다고 알려진 애플 제품의 해킹이 가능한지 알려지기 오래 전에 이미 그 방법을 알아낸 업체다.뉴욕시 뉴스쿨의 뉴미디어 학과 데이비드 캐롤 교수는 CA의 과거 선전이 사실이며 지금은 거짓말을 한다고 본다. “그들이 엄청나게 많은 데이터를 보유한다는 말은 허튼소리가 아니다.”지난 5월 15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빅데이터 업계 컨퍼런스 강연에서 현재 러시아에 망명 중인 미국 국가안보국(NSA) 내부고발자 에드워드 스노든은 온라인의 모든 상호작용과 활동 기록의 대규모 수집과 보존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위협하는지 고려해야 한다고 위성 중계를 통해 방청객에게 호소했다. 그는 “사람들의 활동이 추적당할 수 있고 이 기록의 사슬을 벗어날 길이 없어질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계수화된 거미줄이 되고 만다”며 “그것은 자유롭고 개방된 사회에는 극히 부정적인 결과”라고 말했다.페이스북은 갈수록 거세지는 비판에 직면하고도 수익성 높은 데이터 분석과 세분화 광고 도구를 폐기하겠다는 계획은 발표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몇 주 사이 그들의 광고 도구 때문에 IT 전문 매체 엔가젯(Engadget) 소속 바이올렛 블루의 표현을 빌리자면 ‘증오단체 인큐베이터’이자 ‘깔끔하고 조명 밝은 파시즘 공간’으로 변했다는 비난을 받아 왔다. 블루 기자는 ‘페이스북과 저커버그의 인종주의적인 규정집’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페이스북은 사회적 책임보다 돈을 더 중시하기 때문에 대표적으로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부정 등을 조장한다고 비난했다.가디언은 페이스북이 ‘영국 브렉시트 대강도(The Great British Brexit Robbery) 배후의 은밀한 글로벌 공작’에 참여했다고 비난하고 최근 ‘페이스북 파일들’이라며 그들에게 불리한 문건을 대량으로 공개했다. 최근 선거에서 페이스북의 도구들이 어떻게 사용됐는지를 극히 비판적으로 다룬 책도 최근 2종 출판됐다. 대니얼 크라이스의 ‘신기술 집약적 선거 운동과 민주주의의 데이터(Prototype Politics: Technology-Intensive Campaigning and the Data of Democracy)’와 아이턴 허시의 ‘선거 캠프는 유권자를 어떻게 인식하나(Hacking the Electorate: How Campaigns Perceive Voters)’다.최초의 진정한 소셜 미디어 대통령인 트럼프가 맏사위 재러드 쿠슈너를 비공식 선거운동 보좌관으로 임명했을 때 쿠슈너는 실리콘밸리를 찾아가 페이스북의 광고 도구에 관한 집중강좌를 들은 뒤 선거 캠페의 페이스북 전략을 수립했다. 그 뒤 그를 비롯한 디지털 팀은 2억2000만 유권자의 쇼핑·신용·운전·사고 습관에 관한 트럼프 캠프 데이터베이스 구축작업을 지휘 감독했다. 이제 백악관에 한 자리를 차지한 그는 정부의 기술혁신국을 맡아 정부 발표에 따르면 ‘기술과 데이터’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쿠슈너는 그것을 이용해 정부를 기업체처럼 운영하고 미국인을 ‘고객처럼’ 대하도록 이끌 계획이라고 말했다.고객이라는 단어가 저급하긴 해도 키포인트다. 백악관과 공화·민주 양 진영의 정치 전략가들은 마케터들이 제품 홍보에 사용하는 도구들을 똑같이 사용할 수 있다. 2020년에는 행동과학, 첨단 알고리즘 그리고 AI가 어느 때보다 많은 개인 데이터에 적용되면서 정치인들도 어느 때보다 더 섬세하고 정확한 공약을 내걸 수 있게 될 것이다.독일 IT 컨설턴트 보른셰인은 사회와 입법가들이 규제를 요구하지 않는 한 인간 행동의 정확한 예측을 위해 더 많은 데이터를 활용하는 기술은 계속 진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유권자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 정말로 우리가 가진 모든 역량을 동원하기 원하는가? 아니면 어느 시점엔가는 그 모든 데이터 마법을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규칙을 정할 것인가? 이것이 유토피아 또는 반유토피아의 미래로 발전할지는 이제부터 데이터·민주주의 테마의 논의에서 우리가 검토해야 할 문제다.제프리 제이 루스트는 CA의 사이코그래픽스에 따르면 ‘정서적 안정성이 대단히 높고, 개방성이 꽤 낮고, 다소 성실한’ 트럼프 지지자였다. 그리고 실제로 총기 소유권리를 대단히 중시하는 남자다. 그는 지난 미국 대선 기간과 그 뒤까지 알렉산더 닉스 CA CEO가 연회장을 가득 메운 글로벌 엘리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신의 GPS 좌표와 정치적·감정적 성향을 스크린에 띄웠다는 사실을 모른 채 평소처럼 생활해 왔다.닉스는 지난해 9월의 행사에서 루스트의 풀네임과 좌표를 표시했다(유튜브 동영상에선 가려졌다). 나는 지난 5월 스위스 프라이버시 운동가 데하예의 도움을 받고, 그의 몇몇 페이스북 친구를 통해 루스트를 찾아냈다. 이메일로 닉스 강연의 유튜브 동영상을 링크해 그에게 보냈다. 해군 퇴역군인으로 할아버지가 된 그는 단지 손자들 사진을 보려고 페이스북에 가입했다며 닉스 CEO가 자신에 관해 그렇게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미국 남부에 거주하는 그는 “그들은 내 집의 경도와 위도를 알고 있었다”며 “그것이 좀 신경에 거슬린다”고 말했다. “세상에 온갖 미치광이가 다 있는데 나에 관한 정보가 온 세상에 공개됐다. GPS에 띄워 보니 실제로 우리 집 옆을 지나가는 작은 개울까지 표시됐다. 그 데이터만 있으면 우리 집 앞까지 찾아올 수 있다.”전력회사 시설 담당자로 일하는 루스트는 내 전화를 받을 때까지 사이코그래픽 정치 마이크로타게팅에 관해 들어보지 못했다. 그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 정보를 광고에 사용해 필요하지 않거나 원치 않는 물건을 구입하도록 설득할 수 있다. 또는 나를 타깃으로 삼는 데 사용할 수도 있다. 나는 보수 성향이지만 사물에 대해 대단히 외교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분명 다른 이미지로 비치기를 원치 않는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다.” 그는 이미 설문에 답하거나 익명의 메일에는 응하지 않으려 조심한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지금보다 좀 더 조심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들이 나에 관한 그런 데이터를 공개하는 건 정말 마음이 편치 않다.”너무 늦었다. 거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루스트가 흘려 놓은 수많은 데이터 부스러기를 기계가 집어삼키고 전략가들이 분석할 수 있었다. 그가 숨을 곳은 이제 없다. 당신도 마찬가지다.- 니나 벌리 뉴스위크 기자

2017.06.19 10:17

21분 소요
기획 연재 | 조원경의 ‘미래 산업의 소울메이트(SOULMATE)’(1)

전문가 칼럼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고 있는 시점에서 미래 산업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격변하는 기술 발전의 시대에 우리가 추구하고 생각할 가치를 소울메이트(SOULMATE)로 정의하고 하나하나 풀어본다. 예컨대 기술 발전이 어디까지 이를 것인가(Singularity), 누구를 위한 풍요로움인가(Opulence), 미래의 도시화 방향은 어떠해야 하나(Urbanization), 노동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Labour)를 탐구하는 기획이다. 그 첫번째는 기술 발전에 대한 분석과 전망이다. 어느 한 신문에 나온 2045년 어느 날을 조금 각색해 보자. 인구 감소가 진행되는 가운데 고령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대도시로 인구가 몰리고 지방도시는 쇠퇴한다. 전체 인구 대비 65세 이상 인구는 35.6%로 노인 천국이다.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 멍하니 앉은 한 사내는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생각한다. 뇌가 신호를 보내자 커피 머신이 작동한다.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는 세상이다. 몽골 출신의 40대 대한민국 공무원인 그는 간단한 식사 후 집 앞에서 자율주행 셔틀버스를 탄다. 목적지는 인천공항본부세관 사무실이다. 도중에 음악을 들으며 서울 시내 건물을 구경한다. 주변에는 강철만큼 강하지만 탄소섬유만큼 가벼운 소재로 지은 건물이 즐비하다.10년 전 대한민국과 몽골인민공화국은 사증면제협정에 이어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었다. 두 나라의 인적·경제적 교류가 폭발적으로 늘자 한국 정부는 대몽골 관세업무를 담당할 몽골 출신 직원으로 그를 뽑았다. 그는 안경의 테두리를 슬쩍 문질러 증강현실(AR) 통역앱을 활성화시킨다. 동료 직원들의 한국어 인사가 몽골어로 실시간 통역된다. 한국어 서류들이 몽골어로 번역된 형태로 보인다. 그는 오전 회의를 주재하면서 몽골산 육류의 무관세 수입 혜택을 연장할지 여부를 직원들과 논의했다. 한국에서 몽골식 양고기 요리 체인점이 큰 인기를 끌면서 몽골산 육류의 수입량이 꾸준히 늘자 축산 농가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한국 정부의 인공지능 국정운용시스템인 ‘나우 4.0’은 지난주 몽골산 육류에 대한 수입규제 조치의 필요성을 ‘권고’ 수준으로 관세청에 통고했다.문제는 한국인 전임자가 인공지능 앱과 정면으로 맞선 것이다. 전임자는 몽골산 양고기 수입이 한국과 몽고 간 관계증진에 미치는 선순환 효과와 여타 한국산 제품의 수출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공지능의 권고보다 전임자의 의견을 따르고 싶어한다. 한국 입장에서는 양고기 무관세 수입을 막는 것이 이득보다도 손실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다. 대한민국 공무원으로서, 한국의 국익을 위해서 누군가는 인공지능이 주장하는 관세부과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반론을 제기해야 한다고 믿는다. 일단 그가 반대 결정을 내리자 보고서는 30분 만에 깔끔하게 작성된다. ━ “2045년이 되면 인공지능이 인간 지능 앞서” 그는 잠시 추억에 젖어 본다. 지난 30년 동안 일자리의 80%가 사라졌다. 추억 속에 묻힌 일자리의 개수는 20억 개에 달했다. 컴퓨터가 인간이 하는 거의 모든 작업을 해내자 하루하루 그와 주변 동료는 인공지능과 씨름하고 있다. 하긴 20여 년 전부터 그런 조짐이 보였다. 오래전 인천의 길병원은 IBM의 인공지능 왓슨의 처방을 제공했다. 의료진과 왓슨의 생각이 다를 경우 환자들은 대개 왓슨을 선택했다. 전문가보다 인공지능을 더 믿는 시대가 이미 그때부터 도래한 셈이다. 그는 당시 미국이 낳은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의 말을 떠올렸다. 레이 커즈와일은 1999년 클린턴 미 대통령으로부터 기술 분야의 최고 영예인 과학기술 훈장을 받았다. 2001년 발명가의 노벨상 격인 레멜슨 MIT상으로 상금 50만 달러를 받았고, 명예박사 학위도 수십 개다.“현재 컴퓨터는 계산 속도만 빠를 뿐 쥐의 뇌보다 못한 수준입니다. 기술이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2045년경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앞서게 될 것입니다. 이 시기가 되면 인간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말이 미래 산업의 소울 메이트의 첫 장을 장식한다.미래 이야기를 잠시 중단하고 현재로 돌아와 보자.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나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는 사업에서 질적인 도약을 이뤘다. 기업인들은 누구나 자신의 사업이 번창하는 특정 시점이 반드시 도래한다고 믿고 싶어 한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시기인 ‘특이점(Singularity)’은 과학기술의 빅뱅 시점이다. 특이점이란 말은 우주 물리학에서 차용한 용어로 일반 물리학에서는 적용할 수 없는 법칙인 블랙홀과 같은 우주 시간에서의 한 점을 일컫는다. 커즈와일은 2045년경 인류는 인간보다 뛰어난 기계가 출현하는 이 특이점에 도달한다고 믿는다. 커즈와일은 2005년 출간한 저서 『특이점이 온다(The Singularity is Near)』에서 ‘기술적 특이점’의 도래를 주장했다. 그의 책을 보면 사실 과장이 많다. 그는 2020년이 되면 진단의학기술이 극적으로 발전해 기대수명이 150살로 늘어나고, 2030년에는 질병과 노화 과정을 예방하거나, 극도로 늦출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하면 1000살 수명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는 현재로선 다소 황당한 주장으로 평가받는다. 그래도 그의 주장을 한번 들어나 보자. “게놈 지도 완성으로 이미 생명공학은 예측 가능한 발전 궤도에 올라섰습니다. 의술은 기하급수적 발전의 문턱을 넘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처음 게놈 지도의 1%를 해독하는 데 7년이 걸렸습니다. 나머지 99%가 7년 만에 풀렸습니다. 컴퓨터 기술이 발전한 속도를 상상해 보세요. 허풍이 아닙니다.”인간의 몸은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진 기계로 정상적인 기능을 하다 보니 부산물로 여기저기에 고장이 생긴다. 자동차처럼 관심을 가지고 DNA를 점검하면서 정기적으로 바꿔주고 필요한 영양을 채워주면 계속 정상적으로 기능을 한다. 불가피하게 병에 걸려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커즈와일은 불멸의 시대가 열리는 날까지 생존하기 위해 코엔자임 큐텐(Q10), 포스파티딜 콜린, 비타민 D 등을 포함해 하루 150개의 알약을 오늘도 먹고 있다.그는 ‘그날’을 준비하기 위해 직접 교육기관을 만들었다. 2008년 미국 실리콘밸리에 ‘싱귤래리티 대학(Singularity University)’을 설립했다. 과학과 기술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해결책을 연구하는 기관이다. 이 대학은 다양한 융합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 항공우주국(NASA), 구글 같은 글로벌 기관과 기업이 후원하고 있다. 정식 학위를 주는 대학은 아니나 수업 일정은 대학원 과정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살인적이다. 커즈와일은 10가지 필수 전공 중 ‘미래학’을 직접 강의한다.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Singularity Institute for Artificial Intelligence’도 해마다 싱귤래리티 서밋을 연다.물론 특이점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며 언제, 어떻게 도래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학기술의 힘이 역사를 만든다고 굳게 믿는다. 인공지능의 혁명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다음 세기에도 지금과 같이 소파에 앉아 TV나 보면서 살아갈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은 결코 용납하지 못한다. 그들은 극단적인 세계관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누군가 자신들의 주장을 ‘터무니없는 말장난’이라고 부르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 특이점의 순간순간은 예전에도 존재했다 그들은 특이점의 순간순간은 예전에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1997년 IBM이 개발한 인공지능 ‘딥블루’는 체스 세계 챔피언과 대결해 승리했다. 같은 해 오셀로 게임에서도 인공지능 ‘로지스텔로’가 세계 챔피언을 상대로 완승을 거뒀다. 2011년에는 IBM이 개발한 인공지능 ‘왓슨’이 미국 인기 퀴즈 프로그램 역대 우승자에게 승리하면서 체스와 오셀로, 퀴즈 분야를 인공지능이 석권해 인간의 뇌를 초월했다.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결 결과에 따라 바둑 분야에서도 특이점이 발생할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본다. 이세돌은 연패를 하고 한번을 이겼을 뿐인데 세간에는 알파고가 일부러 졌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이후 알파고가 온라인 바둑 서비스 타이젬과 한큐바둑에서 정상급 바둑기사를 상대로 60연승을 거뒀기 때문이다. 알파고처럼 인공지능이 사람보다 사고력이 뛰어나 사람이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특이점을 속도 측면에서 이해하기 위해 다른 예를 들어 보자. 마이크로칩 기술의 발전 속도에 관한 법칙이 있다. 마이크로칩의 성능이 매 2년마다 두 배로 증가한다는 경험적 예측으로 고든 무어가 주장했다. 어찌 됐든 그동안 컴퓨터 성능은 크게 개선됐고, 30년간 비교적 정확하게 무어의 예측이 맞아떨어졌다. 무어의 법칙은 인터넷에서 적은 노력으로도 커다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메트칼프의 법칙, ‘조직은 계속적으로 거래비용이 적게 드는 쪽으로 변화한다’라는 가치사슬의 법칙과 함께 인터넷 경제의 3원칙으로 불린다.무어의 법칙은 컴퓨터의 처리 속도와 메모리의 양이 두 배로 증가하고 비용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런 디지털 혁명은 1990년대 말 미국이 정보기술에 막대한 비용을 투자하는 계기가 됐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정보통신기술(ICT)의 생산성에 대한 의문과 생산성 역설 논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정보통신기술의 양적인 성장에 더해 상상할 수 없는 질적인 변화가 가해지는 게 특이점이다. 기술의 발전은 1차 방정식이 아닌 지수 방정식으로 일어나고, 2020년대까지는 인간의 두뇌를 가진 엔지니어에 의해 컴퓨터가 발전한다. 하지만 2020년대가 끝날 때쯤이면 컴퓨터가 인간의 지능과 맞먹게 되고, 그 다음부터는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한다. 2045년에는 컴퓨터의 능력이 크게 늘어나는 한편 경비는 대폭 줄어 ‘만들어진 인위적인 지능의 양’이 오늘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능의 수억만배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알파고가 승리한 원동력은 인간의 뇌와 신경회로를 그대로 재현한 ‘딥러닝’ 덕이 크다. 딥러닝은 인공지능의 최첨단 기술로 발전해 온 머신러닝(기계학습)의 새로운 기법이다. 그 전까지는 인간이 데이터 분석 방법을 미리 입력해 컴퓨터를 가르치는 방식이었으나, 딥러닝은 컴퓨터 스스로가 데이터를 분석해 특징을 찾아낸다. 알파고는 딥러닝 기술 개발에 협력한 프로 바둑기사들의 3000만 개 수(手)를 학습하면서 상대방의 움직임을 57%의 확률로 예측할 수 있었다.딥러닝 기술이 발전을 거듭해 전문 기술을 갖춘 인간의 능력과 직감까지 학습할 수 있게 되면 응용분야는 더욱 늘어난다. 의사 수준으로 암을 진단할 수 있게 되고,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는 자율주행차, 침입자를 막는 감시 카메라,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내는 휴머노이드 로봇처럼 영화에서나 가능했던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게 된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학습이라는 과정을 거쳐 인공지능이 스스로를 계발할 수 있는 수준인 강(强)인공지능에 도달해 기술적 특이점에 이른다. 자기계발이 가능한 인공지능은 스스로의 기능을 향상시킴과 동시에 인간을 대신해 많은 분야의 연구를 대체하게 된다. 그렇게 계속되는 개발의 말미에, 강(强)인공지능은 지성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인 수준인 초인공지능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 생물과 기계의 장점을 결합한 하이브리드로 물론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공지능의 급속한 발전에 우려를 나타내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윤리적·종교적·기술적·법률적으로 반론이 상당하다. 왜 그럴까? 그들의 신경을 건드리는 커즈와일의 주장을 들어 보자. “인간은 절대로 신이 될 수는 없지만 신처럼 되어갈 것입니다. 내게 진화란 곧 점점 신을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인류는 우주 만물의 섭리를 끝없이 통찰하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진화를 가능케 하는 원리이지요. 우주는 우리에게 진화를 허락했습니다. 앞으로 인간은 기계와 항상 연결돼 있어 기계가 곧 인간이고 인간이 기계인 시대가 펼쳐질 것입니다.”그의 예측에 누군가는 강한 부정을 하고 싶을 수 있다. 인간이 기계라는 데 거부 반응이 들지 않겠나. 이에 대해 커즈와일은 말한다. “당신이 24시간 곁에서 떼놓지 않는 스마트폰을 생각해 보세요. 몸에 이식되지 않았을 뿐이지 깊이 의존한다는 측면에서 사실상 이미 뇌의 연장이 아니고 뭐지요?”그의 되물음이 두렵게 느껴져 몸이 떨릴지 모르겠다. “인류가 처음 불을 발견했을 때 위험하고 무섭다고 멀리했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문제는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인류는 기술과 함께 보완책도 항상 같이 발전시켜왔기에 기술 발전을 두려움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의 중추신경과 핵심 프로세서가 클라우드에 저장되는 시대가 곧 올 것입니다. 무궁무진한 저장 공간 덕분에 백업도 충실히 돼 있고 복제본도 수만, 수억 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현재처럼 ‘하나의 정신, 하나의 몸통’인 인간이 아닌 시대지요. 그때는 ‘완전한 파괴나 죽음’이 아주 어렵게 됩니다. 언젠가 우리 몸을 서버에 연결해 뇌의 기억을 분산 저장하거나 다른 사람 뇌와 연결해 기억을 공유하는 것도 가능해질 수 있어요.”그는 마치 USB를 사용하듯 뇌를 컴퓨터와 연결해 업로드하고, 우리는 생물학적 사고관의 한계를 넘어 점점 기계적 사고관의 영향을 받는 시대가 온다고 예측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우리가 기계가 되는 것은 아니고 생물과 기계의 장점을 결합한 ‘하이브리드’가 되는 것으로 정의한다. ‘생각’이란 프로세스의 대부분이 클라우드에서 이뤄질 것이라고 주장한다.그의 말을 듣자 이런 생각이 든다. 인간의 육체가 기계로 대체된다면 어디까지가 인간의 경계선인지, 사고의 중추가 되는 육체가 기계로 대체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감각의 생산자라고 말할 수 있는지 말이다. 호모사피엔스라는 정의 자체가 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몸에 온갖 장치를 집어넣고 뇌마저 컴퓨터로 돌아가는 존재를 과연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이 특이점을 난센스라고 생각한다. 실리콘밸리판 ‘휴거’라고도 주장하고 사이비 과학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하버드대학의 인식 과학자 스티븐 핀커와 전산학자 미치 카포는 ‘로봇이 성공적으로 인간을 흉내내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을 보인다. 스티브 핀커의 주장을 들어 보자. 그는 무어의 법칙을 비롯한 기술 성장 그래프가 더 이상 지금과 같은 속도를 기록하지 못할 것이라는 통계학자들의 예측을 따른다. “특이점이 온다는 것을 믿을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당신의 상상 속에서 미래를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은 실제로 그것이 가능하다는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반구형 도시, 수중 도시, 가장 높은 건물, 그리고 원자력을 이용한 자동차, 당신이 어렸을 때 상상했던 이 모든 초현실적 공상의 산물은 결코 도착점이 없습니다. 방향을 벗어난 처리 능력은 당신의 모든 문제를 멋지게 해결해주는 반도체가 아닙니다.” ━ 인간의 두뇌엔 결코 복제할 수 없는 게 있다? 공중보건학자 제이 올샨스키 미국 일리노이대 교수는 역사상 영생을 추구했던 모든 이들은 다 죽었으며 수많은 과학자가 예전부터 노화 방지의 꿈이 이뤄진다고 말해왔다며 커즈와일의 주장을 깎아내린다. “과학을 만능으로 바라보고, 과학이 인간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갈 것으로 기대한다면 이것은 과학주의라는 또 하나의 우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우리는 인공지능이 계산이나 하고 작곡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두뇌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그런 시대를 크게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특이점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인간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인간의 두뇌에는 아무리 많은 정보를 입력해도 결코 복제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고 역설한다. 철학적인 의문도 제기된다. 인공지능이 가치판단을 필요로 하는 시점에 인간처럼 도덕적 결정을 할 수 없을 것이란 주장이다.물론 인공지능이 인류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대해 싱귤래리티언들은 기회는 안 보고 부작용만 걱정하는 것이라며 인간보다 인공지능이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똑똑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오히려 인공지능을 잘못 쓰는 인간의 우매함이라고 색다른 주장을 제기한다. 도덕적 판단을 떠나 말도 하고 행동도 하는 컴퓨터가 나와 눈을 감고 들었을 때 사람과 구별할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고 가정할 경우 컴퓨터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지각력이나 감각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느냐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것은 신비로운 의식이 없는 정교하지만 ‘영적 세계가 없는 기계덩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이와 달리 해답이 없는 의문도 계속 쌓이고 있다. 만약 나의 의식을 컴퓨터에 입력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계속 ‘나’일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우리들이 불멸이나 전지전능에 가까워 졌을 때 우리 삶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마음을 모방하려는 시도는 마음의 모방할 수 없는 본질적 특성을 놓치고 간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결론적으로 일련의 싱귤래리티언들이 꿈꾸는 것만큼 과학 기술이 발전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이 현재 상상 못할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게 빠른 변화가 이뤄지고 있고, 인간은 앞으로 다가올 자신의 운명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게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간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가 들고 있는 휴대전화는 오래전 컴퓨터에 비교하면 크기도 100만 분의 1에 불과하고, 가격도 100만 분의 1에 지나지 않지만 성능은 그 1000배가 넘는다.세상이 발전해 2045년 불멸의 시대가 도래하는 데 의문을 품는다 하더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2045년 우리는 기계와 공생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어의 법칙에 따르면 모든 기술 제품은 1~2년 사이에 가격 대비 성능비가 두 배씩 좋아졌다. 그리고 그때마다 새로운 사업 기회가 생겼다. 기술이 일자리를 앗아간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지금 어쩌면 우리는 기술을 두 가지 시선으로 바라볼지도 모른다. 기술이 절망이자 곧 희망이라고 말이다. 이 말을 떠올리며 미래 산업의 소울메이트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이어가 보자. (다음호에 계속)조원경 - 연세대(경제학과)와 미국 미시간주립대 (파이낸스 석사) 를 졸업했다. 현재 기획재정부 국제금융심의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명작의 경제』, 『법정에 선 경제학자들』, 『식탁 위의 경제학자들』이 있다.

2017.02.27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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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변곡점에 선 세계경제

산업 일반

앤드루 그로브(75)는 세계 반도체 산업의 개척자로 꼽힌다. 그는 고(故) 로버트 노이스, 고든 무어(82)와 함께 인텔을 창업했다. 인텔 회장 겸 CEO를 맡기도 했다. 그는 그저 그런 경영자가 아니었다. “경영자가 일정한 경지에 오르면 치밀한 이론가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 인물이다.” 예일대 경영대학원 제프리 가튼 교수의 평이다.그는 국내 경영자들이 곧잘 쓰는 경영 잠언(箴言)의 주인공이다. 바로 ‘전략적 변곡점(Strategic Inflection Points)’이란 말이다. 그는 1998년 8월 경영자 모임에서 이 개념을 처음 소개했다. 그때 그로브는 “경영자인 당신이 기존 상식과 통념까지 다시 생각하면서 경영 전략을 근본적으로 바꾸도록 하는 것”이라고 의미를 설명했다.미국 경영자들은 2001~2008년 유동성과 자산 거품에 취해 그로브의 전략적 변곡점이란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금융위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유럽·중국 등 주요 국가가 공격적으로 돈을 풀어 경기가 빠르게 회복하는 듯해서였다.그런데 요즘 전략적 변곡점이란 말이 되살아나고 있다. 이번 ‘8월 패닉’이 계기였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글로벌 기업 경영자들이 8월 패닉을 계기로 경영 전략을 근본적으로 다시 짜고 있다”며 “경영자들은 지금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상식 또는 통념까지 회의하고 있다”고 전했다.그만큼 8월 패닉의 충격은 컸다. 누군가 음모를 꾸며 의도적으로 8월 휴가철을 겨냥한 듯했다. 겉으로 드러난 방아쇠는 8월 5일 신용평가회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의 미국 신용등급 강등이었다. 절대 안전을 의미하는 트리플A(AAA)에서 더블A플러스(AA+)로 낮췄다.미국 신용등급 강등은 예견된 일이었다. 국내외 이코노미스트들은 강등 직전까지 “(미 신용등급 강등은) 이미 주식과 채권 가격에 반영돼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충격은 크지 않을 것”이란 말을 서슴지 않았다.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미국·유럽·아시아 시장에서 자산가격이 줄줄이 미끄러졌다. 1971년 미국이 달러-금 태환(바꿔주기)을 중단했을 때보다 자산가격은 더 가파르게 추락했다. 2008년 금융위기 때만큼이나 빠르게 자산가격이 붕괴했다는 분석도 있다.위기 원인은 주요국의 디레버리징 사태미국 신용등급 강등이 그토록 큰 충격이었을까. “미스터 시장(Mr. Market)은 늘 그렇지는 않지만 자주 영악하게 판단한다. 물 위 작은 얼음을 보고도 물밑 빙산 크기를 가늠한다.” ‘증권 분석의 아버지’ 벤저민 그레이엄이 생전에 제자들에게 자주 했던 말이다. 이 말대로라면 시장은 미국 신용등급 강등으로 글로벌 경제의 위기 요인들에 반응한 셈이다.위기의 출발점은 부채다. 미국·유럽·일본이 시달리고 있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경제를 이끌어온 트로이카다. 올 6월 말 기준 세 지역의 빚더미는 30조 달러(약 3경2700조원)에 달한다. 중앙·지방·정부투자기관 등의 부채를 모두 더한 금액이다. 가계 부채까지 합하면 천문학적 규모다.세계 경제는 빚더미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형국이다. 구축효과(정부의 재정지출 확대가 기업의 투자 위축을 발생시키는 것) 탓이 아니다. 정부가 채권을 많이 발행해 자금을 쓸어가 버리는 바람에 기업이 자금을 조달하지 못해 투자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는 얘기다. 요즘만큼 자금이 풍족했던 시절을 역사적으로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미국·유럽·일본의 디레버리징(부채축소) 사태 탓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경제학) 교수의 진단이다. 마치 눈사태처럼 디레버리징이 일어나고 있다. 제일 먼저 시작한 쪽은 미국 가계다. 주택 거품이 붕괴한 뒤 미국 소비자들은 소비를 줄여 빚을 갚기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은 유로존의 변방으로 번졌다. 그리스·아일랜드·포르투갈이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했다.미국 가계나 남유럽 부채위기는 성격이 좀 다르지만 대책은 똑같다. 씀씀이를 줄여 디레버리징하는 방식이다. 미국 가계는 자발적 판단이나 채권 금융회사의 채무 구조조정(워크아웃), 법원 판결에 따라 빚 줄이기를 하고 있다. 남유럽 세 나라는 EU(유럽연합)와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 긴축을 처방 받았다.‘허리띠 졸라매 빚 갚기’는 국내 경영자들에게 너무나 상식적인 처방인 듯했다. 국내 경영자들의 잊지 못할 경험과도 일치했다. 한국은 1998년 IMF 구제금융을 받고 긴축처방을 충실히 이행해 위기를 탈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긴축은 방탕한 채무자에 대한 징계로 비치기도 했다. 국내외 일반인뿐 아니라 전문가들 역시 ‘(그리스와 포르투갈 등이) 능력도 안 되면서 빚을 끌어다 잘 먹고 잘 살았다’ ‘과도한 복지를 만끽한 결과’ 등 남유럽 재정위기국들을 비난했다. 이어 ‘당연히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결론을 쉽게 내렸다. 이들 나라 이름의 머리글자를 묶어 ‘피그스(PIIGS)’라고 부르는 이면엔 그런 인식이 똬리를 틀고 있다.일부 전문가는 ‘긴축 패러다임’을 비판했다.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와 조셉 스티글리츠 등이다. 그들의 비판은 소수설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상 무시됐다. 몇몇 경제학자는 그들의 의견을 “너무나 좌파적”이라고 비판했다.하지만 EU가 그리스에 2차 구제금융을 투입하고 받을 돈 21% 정도를 탕감해 주기로 하자 긴축 패러다임에 대한 의구심이 싹텄다. ‘긴축으론 재정위기가 해소되지 않는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시장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경제학자들보다 시장이 한발 앞서 눈치 챈 셈이다.시장의 의구심은 이후 몇 가지 이벤트로 강화됐다. 미국이 또 다른 형태의 부채위기를 겪기 시작한 것. 미국은 연방정부 부채한도 협상으로 난항을 겪었다. 마이너스 통장 한도(기존 14조3000억 달러)를 늘리는 문제를 놓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 진영과 공화당이 정면 충돌했다. 부도 시한인 8월 2일이 다 돼서야 가까스로 타결됐지만, 비슷한 시기에 미국 더블딥(경기회복 뒤 재침체) 우려가 불거졌다.“미 부채한도 협상 난항과 더블딥 우려는 언뜻 보면 성격이 다른 위기 요인들로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미국 자산운용사 노던트러스트의 폴 캐스리얼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이렇게 분석했다. 그는 미국 최고 경제 분석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부채한도 협상에서 두 패러다임이 충돌했다. 정부 부채가 경제 활력을 떨어뜨린다는 쪽(공화당 티파티 세력)과 정부 부채를 늘려서라도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는 쪽(오바마 대통령)이 벼랑 끝 승부를 벌였다.두 세력 또는 패러다임의 충돌은 곧 경제정책의 방향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어느 한쪽이 주도권을 쥐지 못하면 위기 대응능력이 떨어지기 십상이다. 그 결과가 바로 미국 정부의 강제적 디레버리징으로 나타났다. 10년 동안 2조 달러가 넘는 재정 지출을 줄여 나가기로 한 것이다.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다. 미국 정부가 2009년 이후 연간 3000억 달러를 경기부양에 투입했는데, 앞으로 10년 동안 해마다 2000억 달러가 넘는 돈을 긴축해 빚을 갚아야 한다.캐스리얼은 “미 정부의 긴축은 2차 양적완화의 종료(6월 말)와 맞물려 더블딥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했다. 마침 S&P가 미국 신용등급을 강등시켰다. 울고 싶을 때 뺨 때려준 격이다.글로벌 시장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여기저기를 둘러봐도 탈출구가 없었다. 미국 가계뿐 아니라 정부도 긴축, 유럽도 긴축 중이다. 세계 경제의 신형 엔진인 중국과 브라질은 또 다른 긴축에 여념이 없다. 인플레이션과 자산거품을 진정시키기 위한 돈줄 죄기(통화긴축)다. 글로벌 경제의 한계상황이다.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이런 상황을 빗대 ‘저축의 역설(Paradox of Thrift)’이라고 했다. 개인 차원에서 저축이 좋은 일이지만 모두가 저축하면 경기가 악화한다는 말이다. 이를 요즘 상황에 대입해 개인이나 개별 국가 차원에서 보면 지출을 줄여 빚을 갚는 게 옳은 일일 수 있지만 글로벌 차원에서는 재앙일 수 있다. 한계에 부닥친 글로벌 경제세계적 금융이론가 로버트 실러 예일대(경제학과) 교수는 세계적 긴축-디레버리징 움직임을 대공황 시기 보호무역주의에 비유했다. 그는 “1929년 주요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자국 산업을 지키기 위해 장벽을 쌓았다. 경제학자들이 반대했지만 그 시절 시각에선 당연한 대응이었다. 마치 요즘 긴축이 당연한 대응인 것처럼. 긴축과 보호무역은 관련이 없지만 결과는 비슷할 듯하다. 글로벌 경제 침체다”라고 말했다.긴축-디레버리징 사슬은 쉽게 끊을 수 없을 듯하다. 긴축을 지지하는 기존 패러다임(신자유주의)이 여전히 우세하다. IMF와 유럽·미국 중앙은행의 기본 이론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부채 탕감 같은 조치는 반시장주의적인 것을 넘어 반자연적인 것이다.글로벌 공조도 쉽지 않다. G7(주요 7개국)과 G20(주요 20개국) 틀이 마련돼 있기는 하지만 2008년 위기 때처럼 한목소리를 내기 힘들어 보인다. 각국 상황이 다를 뿐만 아니라 보는 시각도 제각각이다. 메시아를 찾는 갈망은 크지만 글로벌 리더십의 위기마저 엿보인다. 미국·유럽·중국 정상 가운데 자국의 단기적 이익을 포기하고 글로벌 공동의 선을 내세우고 나설 사람이 없다.시장은 ‘기존 패러다임의 그늘’과 ‘공조 위기’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주요 국가 리더들이 기존 패러다임에 갇혀 획기적 대책을 내놓기 힘들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래서 빌미만 있으면 주식과 상품 가격이 급락할 기세다. 심지어 재정위기가 금융위기로 바뀔 조짐마저 나타났다. 최근 자주 미국·프랑스·독일·영국의 은행 주가가 폭락했다. 시장이 유럽 재정위기국 국채를 보유한 은행들의 주식을 싼값에 팔았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 소시에테제네랄과 자금 거래를 회피하는 아시아 은행들이 나타날 정도다.이 모든 현상은 글로벌 리더들에 대한 시장의 압력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국 정상과 경제정책 담당자들이 기존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시장이 먼저 반응하면서 기존 정책의 한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사회적 압력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증폭될 가능성도 엿보인다. 긴축 결과 그리스 실물경제가 침체에 빠지면서 실직자들의 반발이 거세다. 이런 식의 사회 불안이 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으로 번질 가능성도 있다. 앞서 소개한 앤드루 그로브가 말한 대로 “기존 통념과 상식까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경영전략 전면 재검토할 때미국 경영자들은 일단 현금을 대량으로 확보하고 있다. 최근 WSJ와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은 “GE와 마이크로소프트의 금고엔 어느 때보다 현금이 많이 쌓여 있다”며 “2008년 위기 때 돈 가뭄이 발생한 것이 크게 작용한 듯하다”고 보도했다. 세계 경제 수요가 되살아날 가능성이 작은 때 현금이 가장 믿을 만한 방패이기 때문이다.현금 확보는 단기 대응책이다. 제프리 가튼 예일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거시경제 상황이 요동해 기존 경제 패러다임이 효력을 상실하고 있지만 대안 패러다임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비즈니스 리더들은 자신의 상식뿐 아니라 기존 경영 전략의 전제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2011.09.0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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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식품업계는 ‘안전 혁명’ 중

국제 이슈

최근 2년간 식품 안전 사고가 자주 발생하면서 중국 거대 식품회사와 소비자도 원재료 생산 과정에 주목하게 되었다.먹을거리가 밭에서 식탁에 오르기까지는 긴 과정이 필요하다. 대략 양식·재배와 초기 가공, 생산·제조, 저장·운수, 소비자 판매 등 다섯 과정으로 나뉜다. 과거 30년간 이 과정 중에서 성장이 빠르고 관리수준이 가장 높은 부분은 생산·제조다. 다른 과정들은 모두 관리감독이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이런 이유로 식품 안전 위험성이 높아졌다.중국 정부의 복잡한 관리감독 시스템도 중국 식품 안전 문제의 고질병 중 하나다. 하지만 모 식품회사 대표처럼 식품 안전 사고 발생 후 “잘못한 게 없다”고 외쳐서는 안 된다. 식품 안전 사고의 유일한 해결책은 식품 산업 사슬의 각 부문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새로운 경영 방식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식품 대기업은 새로운 경영 모델을 필요로 했다.생산시스템의 총체적 관리 시도농업과 식품 영역의 전체 산업 사슬에 대한 관리는 2008년 싼루분유의 멜라민 사건 이후 시작됐다. 마침 그해 중국 최대 식품 기업인 쭝량그룹은 ADM, 벙기(Bunge), 카길(Cargill Worldwide), 루이스 드레퓌스(LouisDreyfus) 등 4대 식품 대기업을 본떠 밭에서 식탁에 오르기까지 전 과정의 관리감독을 시작했다. 쭝량그룹은 산업 사슬의 중간 부문인 무역과 가공 외에도 초기 단계인 양식 재배와 마지막 단계인 판매 과정까지 진두지휘한다.쭝량그룹 부총재 츠징타오는 “반드시 전체 산업 사슬에 대해 품질안전 심사관리를 진행해야 식품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한다. 2008년 이후 쭝량그룹은 자체 품질관리체제를 개선해 그룹과 경영센터, 저층 생산조직으로 구성된 3단계 감독검사 시스템을 만들었다. 지금 쭝량은 한발 더 나아가 사무실에 속해 있던 ‘품질안전관리부’를 독립조직으로 만들려 한다.츠징타오는 “쭝량그룹의 13개 산업 중 전 과정의 관리감독을 모두 자체 진행하는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쭝량이 선택한 것은 ‘예약제 농업’ 방식이다. 바로 농민에게 자금과 종자, 비료와 기술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이렇게 하면 통제력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쭝량은 양식·재배 과정에 대한 지식과 기술력 부족으로 농민과 소통의 문제가 생기기 쉽다.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쭝량은 이 부분에 정통한 기업들과 합작한다. 쭝량은 토마토 산업에서 문제에 봉착한 적이 있다. 수확 시기인데도 빨갛게 익은 토마토와 아직 덜 익은 녹색 토마토가 섞여 있어 수확이 곤란했다. 쭝량이 하인즈(Heinz)와 합작한 후 이 문제가 해결됐다. 하인즈는 종자를 제공하고 농민에게 재배 기술을 지도해 주었다. 지금 신장 지역의 쭝량 토마토 재배원에서 자라는 토마토는 거의 한 가지 색깔만 띠고 있다. 토마토 성장 속도가 비슷해서 동시에 익힐 수 있고, 또 공업화된 방식으로 동시에 수확할 수 있다.쭝량그룹은 가공 기업과 산지를 최대한 가까이 둬 물류시간을 단축한다. 하지만 전체 산업 사슬의 관리는 품질관리의 위험성이 크다. 사실상 관리할 부분이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다. 관리감독에 대한 투자는 앞으로 쭝량이 계속 확대해야 한다.쭝량과 달리 농산품의 무역과 가공만을 고집하는 이하이자리는 다른 방식을 추구한다. 이하이자리는 수많은 다국적 식품회사의 공급상이고, 동시에 중국 본토의 수많은 곡물재배상과 농민은 이하이자리의 공급상이다. 이하이자리의 방식은 완제품 단계의 성숙한 품질관리시스템을 원재료 재배 단계에도 그대로 옮겨 적용하는 것이다.원재료 관리와 패드백 정보를 강화하기 위해 이하이자리는 밭과 산지 근처에 공장을 세웠다. 이를 통해 물류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품질관리 직원이 공장 업무와 동시에 재배 기간 중 밭으로 가서 농민과 직접 대면할 수 있다. 다국적 대기업에서 배운 이런 품질 관리 시스템을 통해 해당 산지를 직접 관리할 수 있다.중국 최대 사료업체로 식품도 생산하는 신시왕그룹은 쭝량과 이하이자리보다 더 민첩하게 대응한다. 신시왕은 사료부터 방역, 양돈, 도축, 가공 및 최종 상품화 단계에 이르기까지 전 생산과정을 관리감독한다. 원재료 생산에서 씨돼지는 자체 양식하고 실제 양돈은 주로 농민에게 위탁하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더불어 신시왕은 정부, 기업, 농민으로 구성된 양돈합작사로서 은행과 도축가공기업, 보험회사 등과 공생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런 완벽한 양돈 산업체 시스템 덕분에 농민 측의 수입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신시왕과 농민이 이익공동체를 형성해 돼지고기의 품질과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신시왕은 이 공동체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쓰촨러샨 지역에 러샨신시왕농장과 담보회사를 세웠다.최근 들어 민간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하나가 되는 혁신적인 방식이 시도되고 있다. 식품 안전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는 상황 아래서 소비자는 자구책을 찾기 시작했다. 바로 이 시기에 ‘커뮤니티지원농업(CSA·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모델이 출현했다. 샤오마오뤼시민농원은 바로 그 전형적인 사례다.소비자 스스로 감시에 나서커뮤니티지원농업은 전통적인 산업 사슬을 단축시켰을 뿐만 아니라 소비자가 스스로 감독인증함으로써 고비용의 정부 측 인증이나 제3자 평가를 불필요하게 했다.2009년 베이징의 샤오마오뤼시민농원은 정식으로 경영을 시작했다. 경영 방식은 두 가지인데, 채소를 판매하는 ‘배송’ 방식과 스스로 경작하는 ‘노동’ 방식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소비자가 직접 농장 일에 참여하고, 농장 생산을 감독해야 한다.뚸리농장의 경우 창업 초기 중간 과정을 단축하는 경영 원칙과 직접 판매 방식을 결정했다. 회사는 회원제 예약판매 방식을 택했다. 회원들이 월이나 반년 혹은 연간 주기로 사전 지불, 포장 구매한다. 뚸리농장은 고객의 신뢰를 얻기 위해 소비자가 제품 포장 코드를 통해 인터넷상에서 자신이 구매한 야채의 재배 경로와 비료 종류, 배송 일자를 직접 찾아볼 수 있게 만들었다. 동시에 정기적으로 회원들을 초청, 농장을 참관케 하는 등 소비자와의 교류를 확대하고 이로써 신뢰 문제를 해결했다.용예그룹은 1994년 네이멍구(內蒙古)에 세워졌는데, 주요 업무는 생물학적 프로세스와 양식·재배, 의약 등이다. 용예궈지는 2009년 9월 나스닥에 상장됐다. 4월 26일 용예그룹과 베이징농학원이 합작 개발한 용예현대농업과기생태원이 외부에 개방되었다. 또한 ‘러쯔란’이라는 브랜드의 건강제품을 출시하기도 했다.용예는 현재 두 가지 방식을 진행한다. 그중 하나는 전국 각급 소도시 26000여 곳의 용예과학기술서비스센터를 통해 농민에게 우수한 품질의 기술력과 재테크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 루트는 농민이 재배한 무독무해한 농산품을 도시로 가져와 최종적으로 ‘판매점-농민-판매점’ 방식을 시도하는 것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이 방법은 농민의 수입을 증대하는 한편 농민 스스로 신뢰를 중시하고 유기농 제품을 적극 재배하도록 만든다.“중국 농민은 토속적 색채가 가장 진하다. 그들은 같은 지역 사람들을 해칠 수 없다. 특히 돈을 벌도록 도와주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우즈션 용예그룹 이사장의 주장이다.식품 기업은 모두 도시와 농촌, 소비자와 생산자를 연결하는 하이웨이를 희망한다. 하지만 사실상 모든 하이웨이는 ‘마지막 1㎞’의 효율에 의해 결정된다. ‘마이크로 산업 사슬’의 또 다른 작용 하나는 이 ‘마지막 1㎞’를 튼튼하게 만드는 것이다.

2011.06.14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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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시대 이후 격동의 30년

산업 일반

중국에서 공산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 큰오빠의 나이는 일곱 살이었다. 부모는 1940년대 미국에 가 있을 동안 쑤저우(蘇州)에 사는 친척에게 오빠 광위안(光遠; 저 멀리의 불빛이라는 뜻)을 맡겼다. 부모는 대학만 졸업하면 귀국할 생각이었다. 오빠가 부모 없이 자라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부모는 조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정을 제대로 몰랐는지도 모른다. 1949년 10월 마오쩌둥(毛澤東)이 베이징에 진입하면서 세상이 바뀌었다. 귀국에는 너무 큰 위험이 따랐다. 오빠는 쑤저우의 외가에서 자랐다. 쑤저우는 과거 황제, 유녀(遊女), 시인들이 음주가무를 즐겼던 우아한 정원으로 유명했다. 나는 다른 오빠 두 명과 함께 미국 중서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리고 공산당에 빼앗긴 큰오빠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1979년 1월 1일 마침내 기회가 왔다. 이날 미국과 중국은 30년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외교관계를 정식으로 복원했다. 밀월관계가 지속될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체 없이 비자를 받았다. 2월 20일 저녁, 무거운 가방을 끌고(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척들에게 줄 선물로 가득했다) 베이징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119호 기차에 올라탔다. 아무런 편의시설도 없는 딱딱한 침대칸의 희뿌옇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속에서 승객들이 나를 경이의 눈빛으로 훔쳐봤다. 미국인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모두 싸구려 여행가방과 해지고 기운 보따리들을 부둥켜 안았다. 얼음장 같은 추위에 구식 천 슬리퍼만 신은 사람도 있었다. 가까운 침대칸에서 인민해방군 병사 한 명이 군용 외투를 입은 채 코를 골며 잤다. 그가 진흙투성이 전투화도 벗지 않은 채 곯아떨어졌다는 기억만 남아 있다니 정말 우습다. “베트남에서 막 돌아왔나 봐.” 누군가 농담을 던졌다. 베트남과 국경전쟁이 시작된 지 한 주도 안 됐지만, 그리고 양측 희생자가 수천 명이라고 보고됐지만(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만 명이 숨졌다) 차내의 승객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모두 미국 얘기를 들려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베이징을 출발한 기차는 21시간여 동안 1130㎞를 달려 쑤저우에 도착했다. 당시 37세였던 오빠는 부인, 두 딸, 장모와 함께 제이드 피닉스(玉鳳) 거리에서 살았다. 다섯 살짜리 조카는 나를 보자마자 원을 그리고 뛰면서 고모는 “외국인”이라고 소리쳤다. 집은 장방형의 단칸방이었는데 가운데 대형 옷장을 놓아 두 칸으로 나눴다. 한 칸이 1.1㎡였으며 요강을 화장실 대신 사용했다. 오빠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라고 여겼다. 집에 마루바닥과 천장이 있고 닭 몇 마리를 키울 만한 작은 마당이 있다는 얘기였다. 학자풍에 부드러운 말투의 낙천주의자인 그는 실크 공장에서 밤샘 근무를 하면서 26달러에 상당하는 월급을 받았다. 오빠는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이 지식인을 탄압하며 기승을 부릴 때 집의 서재가 없어진 일을 무엇보다 아쉬워했다. 마오가 세상을 뜨자 실권자인 개혁파 덩샤오핑(鄧小平)은 다른 종류의 세력을 풀어놓았다. 전해 여름 당 지도자들이 홍콩 국경 바로 건너편의 한 착공식에 외국인 기자들을 초대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홍콩에서 기자로 일했다. 선전은 작은 어촌 마을로 원주민이 17가구에 불과했다. 그러나 덩은 자신이 추진하는 거대한 실험의 전초기지로 이곳을 택했다. 선전을 반자본주의 수출지향적인 ‘경제특구’로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그날 나와 서방 기자들은 중국의 미래가 되리라는 진흙 땅을 의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황당무계한 구상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30년이 지난 지금 선전은 인구 1200만 명의 거대도시가 됐으며 계속 커간다. 오두막이 있던 자리에 69층짜리 신싱(信興) 플라자 같은 사무용 건물 단지가 줄줄이 늘어섰다. 이 건물의 높이는 384m로 현재 세계에서 일곱 번째다. 지역 주민들에 따르면 그보다 15m 이상 높은 또 다른 고층건물이 곧 들어설 예정이다. 그런 폭발적인 변화가 인구 13억 명의 나라 전역에서 일어난다고 상상해 보라. 2008년 세계의 TV 화면에 비치는 중국은 (그들이 귀에 못이 박이도록 강조하듯) 수세기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불과 지난 30년 사이에 완전히 탈바꿈했다. 30년 전 중국은 강요된 무지와 절대 빈곤으로 뒤덮인 거대한 폐허였다. 마오의 판단착오로 중국 사회가 변혁의 몸살을 앓은 뒤 남은 정신적인 외상이었다. 그때부터 현재 사이의 간격은 보기보다 훨씬 크다. 일직선의 궤도를 달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흔히 달러와 센트, 몇 백만 명의 인구, 수t의 콘크리트 등 명확한 숫자로 그 여정을 묘사한다. 하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서 들여다보면 그 변화는 훨씬 더 놀랍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119호 열차 여행을 시작으로 중국의 여정에 동행했으니 말이다. 쑤저우를 방문한 지 1년 뒤 덩은 중국의 문호를 활짝 열어젖혔다. 뉴스위크는 공산당 집권 후 미국 시사잡지로는 처음으로 베이징에 지국을 설치하고 운영을 내게 맡겼다. 그 후 베이징, 홍콩, 워싱턴 DC의 유리한 위치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르고 광범위하다고 할 만한 국가적 변신과정을 직접 목격했다. 중국의 눈부신 고도성장을 견인한 수많은 요인을 어느 한 사람이 요약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변화가 나와 오빠 같은 개인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를 알면 그 폭과 규모를 가늠하기 쉽다. I. “물에 빠진 똥개를 매질하라” 1980년 기자로서 암흑기를 맞았다고 생각했다. 첸먼(前門) 호텔 8층의 박쥐가 우글거리는 객실이 내 사무실이었다. 타자기를 이용해 새 기사를 완성하면 언제나 자전거에 뛰어올라 미친 듯이 페달을 밟아 수㎞ 떨어진 시내의 공립 전신국 건물로 향했다. 거기서 고물 텔렉스 기계에 기사를 다시 타자한 후 구멍 뚫린 종이 테이프를 들고 널따란 방을 가로질러 건너편의 카운터에 가서 접수계원(물론 국가공무원)에게 어서 발송해 달라고 애걸하다시피 한다. 보통 제대로 보냈는지 확인하려고 전송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때로는 의자에 앉아 얼어붙을 듯 춥고 음침한 홀에 울려 퍼지는 기계의 찰칵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꾸벅꾸벅 존다. 그렇게 몇 시간을 기다린다. 물론 그 몇 시간에 취재 시간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덩은 정적을 제거하고 마오가 남긴 상처를 치유(이 순서대로)하는 데 역점을 뒀지 언론의 재갈을 풀어주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1980년의 최고 뉴스는 4인방(마오의 도도한 아내 장칭과 남자 아첨꾼 세 명)의 재판 기사였다. 1976년 마오가 사망하기 전 10년 동안 중국인들을 상대로 자행된 문화혁명의 많은 범죄를 사주한 혐의였다. 중국의 세기적 재판과 관련된 모든 내용은 실제보다 부풀려졌다. 69쪽의 소장은 48건의 세부 죄목을 열거하고 “합법적 또는 비합법적, 공개적 또는 비공개적, 그리고 펜 또는 총을 이용한 온갖 종류의 음모”를 지적했다. 피고인들은 3만4800명의 희생자를 포함해 70만 명 이상의 중국인을 무고(誣告)하고 숙청하고 박해한 혐의를 받았다. 남아공 식의 희망적인 “진실과 화해” 절차와는 거리가 멀었다. 엄정한 심사를 거친 관측통 900명만 재판정 입장이 허용됐을 뿐 외국 언론이나 독립적인 감시단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상 그곳에서 전개되는 드라마는 치밀하게 짜인 각본에 따랐다. 그 절차의 목적은 오로지 책임 전가였다. 국영 신화통신이 충실하게 발표하는 공식적인 사건 개요는 4인방이 피에 굶주리고 놀라운 언변을 가진 악한이라고 묘사했다. “물에 빠진 똥개를 매질하라”고 4인방 중 한 명인 장춘차오(張春橋)가 지시했다고 신화통신은 전했다. “그들의 이름에서 악취가 풍기게 하라.” 마오도 재판대에 세워야 했지만 사후인데도 불가능했다. 중국의 ‘붉은 태양’이라고 떠받들며 여러 해 동안 그를 신격화하다시피 하는 광적인 선전 활동을 펼치다가 느닷없이 그의 가면을 벗긴다면 이미 해질 대로 해진 중국 사회조직의 와해는 불 보듯 뻔했다. 대신 덩 진영은 마오를 “70% 옳지만 30%는 틀렸다”고 공개적으로 평가하는 선에서 그쳤다. 재판정 밖에서는 새로운 개방의 조짐이 훨씬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덩의 첫 번째 잠정적인 경제개혁이 대표적이었다. 내가 도착한 지 몇 달 안 돼 사방에서 공설 시장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애완용 찌르레기로부터 청동 골동품에 이르기까지 온갖 물품이 팔렸다. 여러 해 동안 마오의 명령에 따라 철저히 통제 받던 중국인들을 인터뷰했더니 ‘인민공사’를 해체해 가족농장으로 분할한 조치 같은 변화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안후이(安徽)성의 한 집단농장에서는 토지뿐만 아니라 농장의 실물 자산까지 조합원들이 나눠 가졌다. “나는 손수레 바퀴를 챙겼어!” 한 주민이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나머지는 이웃집에서 가져갔다.” 그런 기회는 우리 가족을 포함해 많은 중국인을 전혀 새로운 기대에 부풀게 했다. 큰오빠를 방문한 후 상하이에 들러 큰아버지를 만났다. 전에는 공중보건 관료였지만 1950년대 공산당의 첫 번째 마녀사냥 바람이 불 때 ‘반동’으로 지목받아 고비사막 끝자락의 신장(新疆)성으로 추방됐다. 1964년 폐인이 되어 귀향했지만 옛 ‘범죄’의 망령이 되살아났다. 그의 가족까지 강압에 못 이겨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제 팔십 줄에 들어선 백모는 그런 음모가 바로 어제의 일인 듯 아직도 그들의 ‘배신’ 이야기를 입에 올린다. 내가 찾아갔을 때 큰아버지는 정치적으로 복권됐었다. 당국에서 찾아와 큰아버지의 연금지급이 재개됐다는 내용의 주홍색 증명서를 정문에 붙였다. 지역 보건소에서 위생교실 강사 자리를 내주기까지 했다. 삼촌은 덩이 개혁을 빨리 펼친 덕에 나라를 위해 자신의 기술과 지식을 전수하게 됐다며 기뻐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 사회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공산주의 이념이 존속했던 러시아와는 달랐다. “우리는 오랫동안 잘못된 길을 걸었다”고 큰아버지는 말했다. “이제 그것을 만회해야 한다. 젊은이들이 스스로 배우고 관리하지 못한다면 우리 늙은이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야 한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누구라도 의심한다고 탓할 형편이 못 됐다. 희망을 가졌던 순간이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탄압으로 사라졌다. 1982년 7월 큰오빠네 가족은 미국 비자를 받아 우리 부모가 살던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내가 그들의 미국행에 따라나서 모든 낯선 여행 절차, 특히 세관 수속절차를 통역하고 설명했다. 짐 속에 과일이나 야채가 있는가? 축산품이나 곤충 식품은? 최근 농장에 간 적이 있는가? 모든 질문의 답은 ‘아니오’였다. 그러나 헌팅턴 비치에 있는 부모님 댁에 도착한 후 오빠 방에서 이상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오빠에게 물어봤더니 호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 그 안에는 ‘골든벨’ 귀뚜라미가 두 마리 있었다. 깨끗하고 맑은 울음소리 때문에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곤충이었다. 공항에서 발각됐다면 어떤 낭패를 겪었을지 오빠는 아무런 감도 없었다. 그 작은 곤충들이 머나먼 고국 땅의 부드럽고 달콤한 노래를 들려줄 동안 캘리포니아의 밤은 깊어갔다. II. 피로 물든 천안문 광장 1980년대의 중국은 흥분과 가능성의 땅이었다. 모두, 특히 홍콩과 대만 출신 중국인 기업가들이 돈 벌 기회와 연줄에 혈안이 됐다. 실제로 덩샤오핑 치하의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역에서 경제가 활짝 피어났다. 정치 자유를 확대하라는 목소리도 덩달아 높아졌다. 80년대 내내 곳곳의 민주화 시위 현장을 뛰어다니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1985년 티베트에서 꿈같은 휴가를 보낼 동안 미래의 모습을 엿볼 기회가 있었다. 다섯 번째 용이라는 별명을 가진 친한 친구가 그 여행을 주선해 줬다. 그 친구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한때 윈난(雲南)성의 군벌이었는데 그들 가족이 외국으로 빼돌린 재산을 본토에 투자하라고 중국 당국이 친구를 꼬드겼다. 라싸에서 거나하게 술에 취한 어느 날 저녁 함께 술을 마시던 어느 당 고위 관료가 상의를 열어젖히더니 권총을 꺼냈다. “호신용으로 갖고 다닌다”고 그는 말했다. “누가 당신을 해치려는가”라고 갑자기 술기운이 달아난 내가 물었다. 그는 나의 무지가 애처로운 듯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여름이 다가오자 라싸에서 독립투쟁이 시작됐고 그 후 소요사태가 끊이지 않았다. 중국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민주화 행진이 거역하지 못할 대세라고 믿을 만했다. 아시아의 중산층이 성장하면서 그들의 기대와 영향력도 커졌다. 필리핀에서는 아시아 최초의 ‘피플 파워’ 혁명이 일어나 1986년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하와이로 쫓겨났다(그의 탈출을 간발의 차로 놓쳤다. 대통령궁 앞의 예민해진 경비병이 쏜 총에 무릎을 맞아 마닐라 병원의 응급실로 실려갔기 때문이다). 1년 후 서울에서는 또 다른 압제적인 군사정권이 학생 시위에 굴복해 한발 물러섰다. 집권 군부는 자국의 경제발전을 과시하려는 열망에서 1988년 서울 올림픽 주최권을 따냈다. 군사정권은 최루탄이나 유혈 탄압으로 올림픽을 망쳐 국제적 망신을 당하기보다 문민정부에 길을 열어주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그해 여름 올림픽을 취재하지 못하고 랑군(양곤)으로 날아가야 했다. 그곳에서 민중이 항상 승리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덜컹거리는 픽업트럭의 뒤에 올라타 스트랜드 호텔로 향하는 길에 버마(미얀마)인 지인은 불안한 표정으로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계속되는 혼란 속에서 시위대가 어떻게 군인들의 소총과 탄약을 탈취했는지 설명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군사정권이 무력으로 진압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 사진기자와 나는 구덩이와 총알을 피해 가며 시내의 오래된 병원을 찾아갔다. 병원은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었다. 병동 복도에는 똥덩어리들이 널려 있었다. 무엇보다 시체보관소의 짓이겨진 시체 수를 세는 일이 힘들었다. 한 어린 10대의 시체는 머리가 거의 날아갔다. 이듬해에는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외교부 브리핑 동안 졸지 않는 일이 가장 큰 고역이리라고 생각했다. 30년간의 중·소 간 적대관계를 풀고 1989년 5월 15일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베이징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5월 3일 택시를 잡아 타고 천안문 광장에 이르렀을 때 네다섯 명이 자전거에 탄 채 인간사슬을 만든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몇몇은 이마에 하얀 띠를 두르고 팔짱을 낀 채 나란히 페달을 밟았다. 이들의 이동 시위로 길이 완전히 막혔다. 그들의 대담함에 혀를 내둘렀다. 학생 운동가들은 자신들의 최대 영웅인 정치국원 후야오방(胡耀邦)의 사망을 애도했다. 후는 2주 남짓 전에 심장 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학생 운동가들은 2년 전부터 후에게 충성을 바치기 시작했다. 당시 덩샤오핑은 대학 내 소요에 너무 안이하게 대처한다는 이유로 후를 공산당 총서기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후의 사후, 화환과 그의 초상화가 천안문 광장에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민일보는 사설에서 애도객들이 ‘사회불안’을 유발하고 당 지도부의 전복을 음모한다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러나 내가 도착한 날 자오쯔양(趙紫陽) 당시 당 총서기는 그 사설이 “도를 넘었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정권 내부에서 상반된 신호가 나오는 이유를 한 외교관 친구에게 물었을 때 그의 답변은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무서운 권력투쟁이 진행 중이다.” 천안문 사태의 목적은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틀린 생각이다. 경제의 역할도 컸다. 10년간의 경제개혁은 인상적이었지만 불안정했다. 물가가 뛰고 이번에는 농민들이 돈을 벌었지만 도시 거주자들은 뒤처졌다. 특히 대학의 실험실과 교실은 주택만큼이나 낡았다. 그래도 원동력은 이상주의였다. 공산당이 집권하기 오래전부터 학생들은 중국 사회의 양심 역할을 해왔다. 아버지에게서 그 사실을 배웠다. 1930년대 아버지는 학생 대표단을 이끌고 당시 중국 지도자 장제스(蔣介石)를 찾아가 일본의 침략에 더 강경하게 대처하라고 촉구했다. 이제 베이징의 고전적인 경극 내용과 똑같은 드라마를 목격하는 셈이다. 옳은 일을 위해서는 희생도 불사하겠다며 정의감에 불타는 학생들이 잔인하고 부패한 늙은 황제에게 도전했다. 고르바초프의 방문이 임박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정상회담 전에 시위대를 거리에서 쫓아내지 않으면 당국이 큰 망신을 당할 참이었다. 소련 지도자가 도착하기 전날 밤 나는 광장에서 단식 투쟁자들과 함께 지냈다. 천을 기워 만든 화려한 시위 깃발과 현수막이 달빛 속에서 산들바람에 펄럭였다. 한 현수막에는 ‘배가 고프지만 차라리 민주주의를 위해 죽겠다’고 영어로 새겨져 있었다. 키릴 문자로 ‘우리에겐 개방이 필요하다’고 적힌 현수막도 있었다. 그날 밤 광장에 있던 21세의 학생 티안훙은 민주주의에 관한 감상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가 개방을 시작했다”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지난 몇 년에 걸친 독재정치가 실패했음을 안다.” 버마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내 눈에서 눈물이 솟구쳤다. 다음날 중국 정부 당국자들은 고르바초프를 인민대회당의 뒷문으로 인도해야 했다. 학생운동에 고무된 시민들이 5월 19일 계엄령이 선포된 후에도 시내 곳곳에서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많은 지역에서 방책을 세우고 군대의 통행을 막았다. 거의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목격됐다. 군인 50명이 AK소총을 손에 쥔 채 땅바닥에 앉아 있었고 확성기를 손에 든 학생들이 군인들에게 아이스캔디를 나눠주고 민주주의 강연을 했다. 또 다른 지역에서는 시위대를 막는 방어선 속에서 군인 한 명이 튀어나와 소리쳤다. “우리는 인민의 군인이다! 결코 여러분을 탄압하지 않는다!” 그러자 군중은 우레와 같은 환호로 응답했다. 어느 날 새벽 동트기 전 또 다른 수송대가 은밀히 도시에 진입을 시도했다. 미사일 수십 기(시위와는 전혀 무관)를 방수포로 덮은 채 운반하다가 몰려든 민간인들에 갇혀버렸다. 군중이 무기를 보고 야유를 보낼 동안 군인들은 얼굴을 찡그린 채 속수무책으로 지켜봤다. 무력진압이 일정한 형식을 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위기가 발생한 지 여러 주가 지난 뒤에 사태의 전환점이 찾아오는 경향을 보인다. 정부와 해외 언론이 모두 진이 빠진 다음에 말이다. 6월 3일 새벽 2시,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광장 부근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새파랗게 젊은 군인 수천 명이 비무장 상태로 베이징의 중앙통인 창안제(長安街)를 진군해 내려오다가 놀란 시위대에게 저지당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두려움과 혼란의 도가니였다. 당황한 군인들이 서로 밀치며 우왕좌왕했다. 몇몇 군인이 군중에게 구타당했고 나머지는 군중이 던진 신발과 쓰레기에 맞아 멍이 들고 생채기가 났다. 군인 중 일부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들의 충돌은 대부분 평화롭고 애정까지 담겼다. 어떤 남자는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좀 쉬라”며 한 군인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담배까지 억지로 물려줬다. “자네는 너무 지쳤어.” 다른 군인 한 명은 그런 친절에 당황한 듯했다. “여기에 나쁜 사람들, 불량배들이 있다고 하던데요.” “자네 눈에는 우리가 그런 사람들로 보이나?” 한 민간인이 대꾸했다. “베이징에 나쁜 사람이 이렇게 많겠어?” “하여간 어느 쪽이 동쪽이죠?” 한 군인이 혼란스러운 듯 말을 돌렸다. 무기는 들지 않았지만 물통, 불룩한 배낭, 심지어 휴대형 버너까지 온갖 무거운 장비를 잔뜩 짊어진 채였다. 한 군인이 배낭을 땅에 떨어뜨려 낡은 플라스틱 슬리퍼와 손전등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한 호기심 많은 여성이 배낭 안을 들여다보며 인민해방군의 배급식량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즉석 라면이라니 정말 불쌍하다”며 그녀가 혀를 찼다. 당시 정권은 국민의 신임을 거의 받지 못하는 데다 체면까지 잃었다. 같은 날 아침 비슷한 충돌 상황에서 인민해방군 수천 명이 광장에 진입하려다 저지당했다. 군용 지프 한 대가 방책을 뚫고 들어가 민간인 세 명이 사망했다. 랑군에서처럼 시위대가 군인들로부터 AK 소총 몇 자루를 탈취했다는 미확인 보도가 더 불길했다. 친구와 정보원들은 광장 근처에서 최루탄이 발포됐다거나 서쪽 멀리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속속 전해왔다. “전신국 건물 부근에서 싸움이 벌어졌다”는 전화도 있었다. “네가 있는 방향으로 이동 중이다.” 뉴스위크 지국과 내가 묵는 호텔은 천안문 동쪽 약 1.6㎞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그에 앞서 나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광장 가장자리에 있는 베이징 호텔 객실을 예약했다. 그날 저녁 천안문을 향해 걸어가면서 본 창안제는 으스스하고 어두웠다.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를 절망적인 외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위대는 아우성치며 화염병을 던졌다. 그리고 총성이 들렸다. 총알이 생명을 위협할 만큼 가까이 날아오면 핑 하는 소리가 들린 후 퍽 하는 충격음이 난다는 사실을 마닐라에서의 경험을 통해 알았다. 내 주변 사방에서 온통 핑 소리와 퍽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앞에 선 남자의 하얀 셔츠에 선홍색 얼룩이 불규칙하게 번졌다. 그의 팔을 잡고 도와주려 했지만 남자 세 명이 나타나 부리나케 세 바퀴 수레에 그를 던져 넣은 후 어디론가 실어갔다. 병력 수송 장갑차 한 대에 불이 붙었다. 민간인들은 마치 살아 있는 괴물과 싸우듯 몽둥이와 쇠파이프로 불타는 차량을 내려쳤다. 6월 4일 오전 5시 30분, 스산한 회색빛 새벽. 베이징 호텔의 메모장에 펜으로 그 끔찍한 장면을 기록하려 애쓰던 참이었다. 민간인들이 고함을 지르는 동안 약 50대의 군용 차량이 굉음을 내며 창안제를 내달리면서 방책을 마구 쓰러뜨렸다. 습관적으로 전차와 병력 수송 장갑차가 지날 때 수직선 네 개에 사선 한 개를 긋는 식으로 다섯 대씩 숫자를 정확히 셈하려 애썼다. 전차는 천막, 시체, 그리고 학생들이 며칠 전에 세운 10m짜리 ‘민주주의 여신’상 조각 등을 모두 깔아뭉개고 지나갔다. 이윽고 확성기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모든 시민은 집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반란은 진압됐다.” 음질이 아주 나빠 무슨 말인지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광장 북단에서 군인들이 일렬 횡대로 배를 깔고 누워 베이징 호텔을 향해 기관총을 겨눴다. 민간인 무리를 향해서는 발포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총알을 맞지 않으려고 지하보도로 뛰어들어 몸을 숨겨야 했다. 숙박비를 계산하려고 동료 캐롤 보거트와 함께 베이징 호텔로 돌아갈 무렵 시위는 무참히 진압됐다. 며칠 동안 그 지역의 출입이 차단됐기 때문에 ‘천안문 광장 사태로’ 호텔 출입이 불가능했던 날의 요금을 청구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창구직원에게 말했다. 접수계 직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천안문 광장의 상황이라뇨?” 이건 너무 한다 싶었다. 피로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에게 고함을 쳤다.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못 봤단 말이오? 당신네 호텔 창문 바로 앞에서 벌어진 일인데.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호텔 경비직원들이 나를 향해 조금씩 접근했다. “살인은 없었소,” 창구직원이 말했다. “광장에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소.” 나는 캐롤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III. 무엇보다도 돈이 최고야 천안문 유혈사태가 일어날 때까지 우리 집 대가족의 재상봉을 계획 중이었다. 부모님, 미국에서 태어난 남자형제 둘과 함께 고모와 다른 친척들을 만나러 베이징에 갈 생각이었다. (큰오빠는 또다시 남아야 했다. 이번에는 미국이었다. 대만 사람이 LA 인근에서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하던 오빠는 직장을 쉬지 못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베이징을 거부하고 대신에 더 멀리 떨어진 윈난(雲南)을 택했다. ‘영원한 봄’이라는 뜻의 윈난성 성도 쿤밍(昆明)은 1930년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구애했던 곳이었다. 광장에서 학살이 일어난 터라 쿤밍 사람들이 시무룩하고 방어적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베이징(그리고 거기서 일어난 일)과 아무 상관이 없는 듯 행동했다. 쿤밍 사람들은 장사에 열을 올렸다. 길거리는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넣고 신발을 고치고 구운 치즈 같은 토속음식을 만들어 파는 소규모 자영업자들로 넘쳐났다. 관광지 스린(石林)에서는 이국적 옷차림의 원주민 여성들이 왜소한 체구의 우리 어머니 주변으로 벌떼처럼 몰려들어 집에서 짠 자수 조각보들을 팔려고 난리였다. 어머니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다 거의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어머니는 쿤밍의 하늘이 어릴 때 기억처럼 눈부시게 파랗지 않다고 불평했다. “공산주의자들이 날씨를 망쳐놨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나는 웃었다. 요즘 베이징의 언제나 희뿌연 하늘을 보노라면 어머니 말씀이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천안문은 그 속도를 더욱 빠르게 했을 뿐이다. 국제적으로 배척당하는 데다 자신의 경제개혁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휩싸인 덩샤오핑은 일당독재의 포기만 빼고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해 산업을 발전시키겠다는 태도였다. 홍콩과 대만에서 투자자들이 밀려들어왔다. 그들은 인권이 어쩌고 저쩌고 참견하지 않았다. 오로지 지방에서 올라온 값싼 이주 노동자들을 부려 공장을 지을 생각만 했다. 1992년 이 ‘최고지도자’는 선전을 비롯한 여러 경제특구를 방문하며 나라 안팎에 경제발전상을 선전했다. 비록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과거는 잊고 미래에 집중하라는 내용이었다. 그의 표현을 옮기자면 “치부광영(致富光榮)”이다. 수백만 중국인은 자발적으로 그 대열에 참여했다. 큰오빠 부부와 함께 1992년에 쑤저우(蘇州)를 찾았다. 그들은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후 최초의 고향 방문이었다. 문화혁명 때 시골 농장으로 차출됐던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오빠의 친구들은 그들 표현대로 “바다에 뛰어드는” 게 유행이라고 말했다. 편안한 공무원 생활을 정리하고 개인사업에 뛰어드는 풍조를 말했다. 오빠의 가장 친한 친구는 시골을 돌아다니며 목재사업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한 사촌과 전화통화를 했는데 그는 하이난(海南)에 있는 외국인 정유회사에서 일했다. 오빠가 친구들과 즐겁게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오빠가 두 번이나 시대의 흐름에 소외되지 않았나 생각했다. 한번은 그 어려웠던 시절 중국에 너무 집착해서였고, 두 번째로는 오빠 세대의 중국인들이 막 잘살기 시작할 무렵인 8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기 때문에. 그리고 변화는 더욱 빨라졌다. 1995년에 덩샤오핑의 고향 쓰촨(四川)성의 성도인 청두(成都)를 지나다 여기가 어디냐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오쩌둥의 커다란 백색 동상은 여전히 중앙광장에 서 있었지만 주변은 팹스트 블루 리본 맥주, 후지 필름, 담배 등을 선전하는 형형색색의 대형 풍선과 광고판으로 가득했다. 앞으로 길게 내뻗은 마오쩌둥의 손 아래에는 “개혁 개방 지속”이라는 영어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베이징도 숨가쁘기는 마찬가지였다. 친구들에 이끌려 한 나이트클럽에 갔는데 그곳 매니저는 새로 설치한 2000달러짜리 조명기구와 외국인 DJ 3명, 그리고 최신식의 서구적 분위기를 자랑하며 “미국과 똑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클럽 소유주는 당연히 인민해방군과 연줄이 닿았다.) 그리고 라싸(拉薩)도 완전히 바뀌었다. 포탈라궁 아래에 있는 동네는 미용실, 성매매 여성, 그리고 ‘Material Girl’ 같은 노래를 틀어대는 가라오케 술집들로 가득했다. 티베트 친구 한 명은 처음으로, 자기 아이가 만다린어를 배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야 좋은 직장을 얻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는 그렇게 말하는 자신을 혐오했다. 몇몇 천안문 사태 주역도 제도권 안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그나마 망명이라도 갔었던 사람들이다. 1989년 당시 “피로 씻긴 광장만이 민중을 일깨운다”고 선언했던 차이링(柴玲)도 1996년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 입학하면서 자기 계발에 매진했다. 그해 대통령 선거의 감시원으로 대만을 찾은 차이링을 쫓아다닌 적이 있다. 차이는 성숙이 지나쳐 아예 딴 사람처럼 보였다. 학생 지도자였던 그는 1989년에 현금 기부를 받았다고 비난 받았다. 그 돈으로 눈을 ‘둥글게’ 만드는 성형수술을 받았다. 그 덕택에 서구로 도망치기 전 중국에서 도피생활을 하는 10개월 동안 사람들이 자신을 못 알아봤다고 차이는 말했다. “당시 나는 너무 어렸다”고 천안문 항거를 회상하면서 그는 말했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건 대화였다.” 그는 이제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인터넷 소프트웨어 회사를 운영한다. 대만 사람들은 본토에서 부는 그 모든 당혹스러운 경제변화에 편승하려고 촉각을 곤두세운 듯했다. 그 자체가 커다란 변화였다. 70년대 중반 타이베이에서 살았는데 당시 총통이었던 장제스(蔣介石)의 편집증적인 군정은 끊임없이 침략의 공포를 부채질했다. 한 미국 친구는 세탁을 맡긴 양복 주머니에서 중국 본토의 동전이 나왔다는 이유로 당국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고 “빨갱이 중국 간첩”이라는 죄목의 보석금으로 1만 1000달러를 내야 했다. 또 나는 중국 본토와 간접무역이 이뤄진다는 기사를 써서 곤욕을 치렀다. 양국 정부의 적대적 관계에도 불구하고 중국 약재와 상하이 민물게 등이 타이베이 시장에서 팔린다는 내용이었다. 대만 정부 관계자들은 대만과 본토가 언젠가 상업적 거래를 트고, 여행을 하고, 심지어 운동경기나 학계의 교류도 빈번해지리라는 관측을 어떻게 감히 내놓느냐며 호되게 몰아붙였다. 1996년까지 대만의 본토 투자는 최소 240억 달러 이상이었다. 그리고 상하이에만 대만 사람 수만 명이 거주했다. 대만 친구 중 몇몇은 자녀를 베이징에 있는 대학에 진학시켰다. 그리고 타이베이의 디화 거리 상점은 상하이에서 들여온 산 게, 마오타이 술 같은 본토 상품들을 전문으로 판매했다. 10년 전의 내 소심한 예측은 오늘날 현실이 됐다. IV. 떠오르는 국가주의 중국에 적극적인 사고를 가졌던 아버지는 나를 항상 놀라게 했다. 1997년 초반 80세가 된 아버지는 심장수술을 받았다. 당시 7월 1일에 홍콩에 머물면서 영국의 식민지를 벗어나 중국 주권을 회복하는 역사적 반환을 기사로 쓸 예정이라고 말씀 드렸더니 아버지는 즉각 “나도 가겠다!”고 말씀하셨다.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비행기만 18시간을 타야 했고 더군다나 아버지가 그 반환을 경축할 이유가 뭐냐는 점이 더 큰 의문이었다. 아버지는 베이징의 공산주의자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냥 가보고 싶다며 “그 장면을 목격하는 소수의 중국인 중 한 명”이 되겠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마오쩌둥이 권력을 잡기 반세기 전에 줏대 없는 만주족 정권이 빼앗긴 홍콩 땅을 중국이 되찾아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릴 때 아편전쟁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가장 커다란 치욕이었다. 그래서 영국을 증오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벌어진 일들 때문에 더욱 영국을 싫어했다. 아버지는 1930년대 상하이 조차지에서 영국령 인도 출신의 터번을 두른 건장한 시크교도 경찰들이 중국인 걸인과 매춘부들을 때리던 모습을 기억했다. 결국 아버지는 홍콩에 가서 오랜 벗들과 함께 반환행사를 지켜봤다. 찰스 왕세자가 뺨과 턱에 떨어지는 햇빛을 받으며 굳어진 입술로 송별사를 읊던 모습을 기억한다. 국기 하나를 내리는 행사는 생김새가 서로 다른 영국인 세 명이 집행했는데 키도 차이가 나고 걸음걸이도 다르고 복장도 달랐다. 한 사람은 킬트 스커트를 입었다. 키가 아주 크고 동작이 완벽하게 통일됐으며 티 하나 없이 말끔한 유니폼을 입은 중국 의장대와 어딘지 슬픈 대조를 이뤘다. 인민해방군 병사 한 명이 엄청나게 큰 중국 국기를 한 번에 척 소리 나게 펼치는 모습을 보노라니 그런 대조적 감정이 더욱 커졌다. 우리 아버지를 포함한 수백만 중국인의 가슴에 자부심과 당당함이 물결쳤다. 중국의 위정자들은 홍콩이 필요했다. 단지 돈을 만들어내는 주식시장 때문이 아니었다. 일당독재의 정당 이름 말고는 공산주의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정당화하려고 다른 ‘이념’을 찾아야 했다. 그 대답은 바로 국가주의였다. 공산당 지도부는 과거의 아픔을 되갚고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하는 국가의 위대한 수호자로 자신들을 자리매김했다. 홍콩은 첫 번째 단계일 뿐이었다. 마카오도 곧 뒤따를지 모른다. 최대의 목표는 바로 대만이다. 태평양의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은 불안한 눈으로 사태를 지켜본다. 1996년 중국은 대만해협에서 대대적인 미사일 발사 시험을 강행했다. 대만의 대통령 선거를 뒤흔들려는 시도였다. 거기다 중국 해군은 남중국해에 있는 작은 모래산호초의 소유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당시 땅 따먹기 식의 영토 분쟁은 실소를 자아냈다. 중국 해군은 산호도라 불리는 지역에다 본토의 흙을 실은 커다란 뗏목 같은 것을 정박시켰다. 거기에 야채를 심어 바다에 떠다니는 밭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조상의 땅이여 영원하라는 식의 간판을 세워뒀다. 당시 미국 정부는 새로운 냉전이 움트지 않느냐는 의문을 떨치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의 새로운 표어는 중국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1998년 다시 특파원 업무를 맡아 베이징으로 갔을 때 10대 소녀들로 이뤄진 중국 최초의 펑크록 밴드 행 온 더 박스를 알게 됐다. 빨강 뾰족머리에 징이 박힌 개 목걸이를 한 열아홉 살의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왕유에는 줄담배에 입이 거친 반항아였다. 하지만 그는 천안문 사태를 놓고는 별 말이 없었다. 그는 “군대가 제대로 했다”고 말했다. “안 그랬으면 사태가 더욱 악화됐을 것이고 외부인들이 그 혼란을 틈타 중국을 차지하고 해를 끼치려 들었을 것이다.” 서구사회는 로큰롤이 중국의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인터넷이 해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지난 1년 반 동안, 이제 막 사이버세계를 배운 당국의 컴퓨터 경찰들은 새로운 기술에 정신을 못 차렸다. 그 와중에 몇몇 웹사이트를 폐쇄하고 몇몇 사이버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했다. 물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을 놓치긴 했지만. 그러나 중국의 인터넷 만리장성, 다시 말해 만리방화벽은 점점 더 많은 민주주의 성향 사이트의 접근을 막고 친정부, 반서구 사이트들을 그냥 내버려둔다. 거기에 실린 독설은 특히 젊은 사람들 사이에 만연한 대중적 정서를 반영한다. “확실히 국가주의가 힘을 얻는다”고 한 외교관 친구는 말했다. “20대 젊은이들은 자기네 나라가 피해를 본다고 생각한다. 특히 거대하고 또 사악한 미국 때문에.” 이런 새로운 태도는 1999년 5월에 보다 분명해졌다. 당시 옛 유고슬라비아에서 전쟁이 벌어졌는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의 제트기 한 대가 실수로 베오그라드 중국대사관을 조준해 세 명의 중국인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1989년 이래 처음으로 거리 시위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중국 경찰이 교통을 정리했고 당국이 생수를 제공했으며 수천 명의 시위대가 미국과 영국 대사관으로 쳐들어가 벽돌과 쓰레기를 던졌다. 나중에 제임스 새서 미국 대사는 대사관 창문 밖을 쳐다보며 중국 공안원이 돌멩이를 집어 들어 자신을 향해 던졌노라고 씁쓸하게 말했다. 다시 질서가 잡힌 후 미국 무관 한 명과 다시 그 장소를 찾았다. 그는 페인트가 어지럽게 뿌려진 미국 대사관 정문을 지나면서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유리창이 깨지고 파편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중국의 청년들이 자유의 여신상을 모델 삼아 민주주의의 여신을 앞세우고 천안문 거리를 행진한 지 불과 10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중국의 홍커(紅客, 붉은 해커라는 뜻)도 아주 바빴다. 베이징과 선전에서 그들은 아주 보란 듯이 여러 가지 소행을 저질렀다. 그들 중 하나는 백악관 사이트를 공격했는데 빌 클린턴의 얼굴에 히틀러의 콧수염을 달아놓았다. 그리고 어떤 해커는 미국 내무부 사이트에 베오그라드 폭발 사고의 희생자 사진을 올려놓았다. 천안문 사태의 학생 지도자였던 왕단(王丹)이 공개적으로 그 폭발사고는 사고였다고 천명하자 그에게 살해위협 e-메일이 도착했고 그의 친민주주의 사이트인 june4.org는 “빌어먹을 왕단!”이라는 커다란 글씨로 도배됐다. 어떤 면에서 이들 해커는 천안문 광장에서 만났던 왕단 같은 순진한 젊은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제도권을 공격하는 이상주의적 이단아들 말이다. 하지만 커다란 차이가 있다. 1989년의 저항은 중국 지도자들에게 서구사회의 이상을 받아들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1999년의 저항은 점차 서구사회를 적으로 간주하고 뭐가 됐든 중국 정부가 너무 유약하게 대처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중국은 지난 수세기 동안의 어느 때보다 훨씬 강하고 자부심이 높아졌으며 국제무대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한다. 하지만 국가주의가 날뛰면서 공산당 지도부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괴물에 밟히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쓸 뿐이다. V. 안락한 노후 보내는 ‘바다거북 가족’ 다시 수천 명의 시민이 베이징의 거리로 뛰쳐나간 건 2001년 7월 14일 밤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순전히 축제 열기 때문이었다. 불꽃놀이와 레이저 광선이 밤하늘을 수놓았고, 20만 명의 시민이 천안문 광장에 운집했다. 탱크 대신 자동차가 창안제로 밀려 들어왔고 젊은이들은 열광적으로 붉은 대형 깃발을 흔들었다. 중국이 2008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진심으로, 가슴 깊이 기뻐했다. 그들의 조국이 마침내 국제사회의 일원임을 정식으로 인정받은 날이었다. 중국의 지도자들에게는 이번 올림픽 유치가 90년대 말 홍콩 반환만큼이나 절실했다. 그들은 보다 크고 나은 성과를 올려 끊임없이 대중의 신뢰를 유지해야 했다. 중국 특유의 천명(天命: 군주란 백성을 섬기라고 하늘이 세운 사람이며 군주가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백성이 그 군주를 축출하고 새 군주를 세울 수 있다는 사상) 철학 때문이었다.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고 우주에 중국인을 보내고, 세계 최대의 댐, 가장 높은 철도, 가장 높은 관람차(페리스 휠)를 건설하는 이유도 같다.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는 아시아를 호령했던 옛 영광을 되살리고 싶은 꿈이 있다. 동시에 중국의 지도층은 중국이란 거인이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면 온 세계가 경계하리란 점도 안다. 2008년이 가까워 오고, 또 활황을 맞은 중국 경제가 에너지, 원자재, 그리고 새로운 시장을 찾아 눈에 불을 켠 지금, 중국 정권은 재빠르게 세계 여러 나라에 친절을 베풀며 미국의 오랜 동맹국이든 불량국가든 가리지 않고 친분을 쌓기에 바쁘다. 쉴 새 없이 터지는 국제적 위기 상황에 대처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미국은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돼가는 과정을 거의 눈치채지 못했다. 중국 외교관들은 자국이 미국을 제압하려는 의도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중국이 초대강국이 되기란 불가능하다. 그냥 강국이라면 몰라도 초대강국은 아니다.” 한 중국 관리가 2005년 베이징의 스타벅스에서 익명을 전제로 편안하게 긴 대화를 나누며 말했다. (그렇다, 중국 관료들이 익명 취재에 응하는 시대가 왔다). “우리는 제국 건설에는 관심이 없다.” 중국 내부에서도 부쩍 국가 이미지를 신경 쓰면서 지도층에 오염이나 노동력 착취 같은 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촉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불도저와 건설 장비가 도시들을 온통 휘젓고 다니면서 서민들의 보금자리를 깔아뭉개는 데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2003년 무자비한 개발업자의 손에 삶의 터전을 잃은 한 남자가 분신 자살을 시도했다. 사진기자와 함께 병원을 찾아가 분노에 찬 그의 친척들이 병원 직원들을 가로막는 새 몰래 병실에 들어갔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취재원 한 명이 전화를 걸어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펑타이구의 어느 집에 깡패들이 진입해 사람들을 쫓아낸다. 외신에 보도되도록 해달라.” 사람들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 1년 전 중국 당국은 외신기자들의 취재 제한 규정을 2008년 10월까지 한시적으로 해제했다. 지방정부의 허가 없이도 누구든 취재에 응한다면 대화를 해도 된다. 2007년 1월 이조치가 적용되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공공질서를 침해했다”는 이유로 2년간 수감돼 있던 류안준이라는 운동가였다. 그는 자신을 취재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 외에 모두가 인터뷰에 응했다”고 그는 재촉했다. “당신도 여기 와서 나와 얘기를 나누면 어떤가?” 난 아직도 4인방 공개 재판에 관한 기억이 생생했고, 10월 이후 일어날 일이 걱정됐다. 하지만 투밍더 베이징 올림픽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은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 “중국은 개방을 향해 전진할 뿐이다. 후퇴는 없다.” 아마도 그의 말이 맞을지 모른다. 우리 집 부텈 창밖으로 중국의 미래는 아직 ‘공사중’이다. 난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며 베이징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 될 차이나 월드 트레이드센터 페이스3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 옆에는 세계적인 건축가 렘 쿨하스가 설계한 파격적인 사다리꼴 형태의 중국국영방송본사(CCTV타워) 사옥이 있다. 많은 중국인이 아직도 이 건물 구조가 안정적인지 의심스로워한다. 서양식 발코니에 서면 공원과 지하철역, 호화로운 아파트가 내려다보인다. 얼마 전까지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하던 서민들이 모여 살던 달동네였따. 밤이 되면 레이저 광선이 야자수나 무지개 등 환상적인 모양으로 하늘을 수놓는다. 1989년 중국인민해방군이 탱크를 몰고 진입했던 바로 그 교차로 위다. 이제 중국 사회는 도시의 하늘만큼이나 급격히 변했다. 한때 나같이 중국 사회에 정식으로 소속되지 않은 해외파들은 토종 중국인이라 하더라도 외계인 취급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서양인들도 중국에서 수많은 틈새직종을 구한다. 심지어 성대한 결혼식의 한 순서로 기독교 예배를 넣고 싶은 중국인 예비부부들을 위해 목사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진짜 변화의 증거는 서구에서의 삶을 접고 중국으로 속속 귀환하는 중국인들의 물결이다. 중국에서는 이런 이들을 “바다거북”이라고 부른다. 대양을 건너 왔다 갔다 하는 모습에 빗댄 표현이다. 많은 사람이 너무 오랫동안 고향을 찾지 않으면 새로운 발전상을 놓칠까봐 걱정한다. 내 조카의 남편은 베이징에서 자랐지만 캘리포니아에서 조카를 만나 결혼했는데, 아직도 중국의 변화 속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미국에 한 2년간 있다 돌아오니 친구들의 대화 내용을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사업 ‘기반’(비즈니스 플랫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버지는 이번 크리스마스에 91세가 되지만, 올림픽이 열릴 때 베이징에 오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그때쯤이면 많은 친척이 아버지를 맞아 줄 듯하다. 광위안 오빠의 딸 조이스와 남편, 두 아이는 중ㅇ국에 역이민한 ‘바다거북’ 가족이다. 광위안 오빠는 지금 은퇴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옛 고향인 쑤저우에서 보낸다. 미국에서 열심히 일한 덕분에 오빠 부부는 약 280㎡의 고급 아파트에서 안락한 노후를 보낸다. 그들은 아파트의 옥상 정원에 올라가 밤의 장막이 서서히 도시에 드리우는 풍경을 즐겨 본다. 제이드 피닉스 거리에 위치한 옛날 판잣집은 수년 전에 철거 됐고 그 자리에 쇼핑몰이 대신 들어서따. 하지만 그래도 고향에 오니 좋다고 그들은 말한다.

2008.01.15 13:14

25분 소요
정신분열증은 불치병 아니다

산업 일반

Talking to the Demons 마이크 해리스(가명·35)는 잉글랜드 케임브리지를 떠나 스코틀랜드의 대학에 갔다. 갈 때만 해도 독립생활을 시작하는 데 따르는 열의에 차 있었다. 그러나 파티와 캠퍼스에 난무하는 마약을 견디지 못했다. 1년 뒤 해리스는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갔다. 몇 년 후 다시 대학 생활을 시도했지만 또다시 캠퍼스를 떠나야 했다. 해리스는 환청과 “머릿속에서 찍찍거리는 소리”에 시달려, 오랜 기간 잠을 못 자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어느 순간 먹지 않고, 씻지 않음으로써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매우 비현실적인 믿음을 가졌었다.” 해리스는 몇 번을 입원했고,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집중적인 집단·개인·가족 병행 정신요법과 사회성 훈련 덕분에 마침내 정신분열증의 문턱에서 회복했다. 케임브리지의 ‘젊은이들의 서비스’라는 정신과 전문병원에서는 환자들이 함께 시장을 보고, 요리하며, 식사를 한다. 그리고 공포증을 극복하기 위해 서로 돕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신분열증은 유전자의 불운한 조합으로 발생하는 평생 불치병으로 간주됐다. 환자들은 평생 약물에 의존해야 했다. 그러나 요즘 과학자들은 정신분열증이 환경적 요인에 크게 영향받는다는 증거를 내놓기 시작했다. 그들의 연구는 치료 방법과 관련해 큰 의미를 갖는다. 이제 의사들은 정신요법과 사회복지 서비스가 대부분의 정신분열증 치료에 더 좋은 방법이라고 믿는다. “증세가 호전되려면 정신요법이 필수”라고 뉴캐슬대 정신과의사 더글러스 터킹턴이 말했다. “약물치료만으로는 효과가 없다.” 2005년 11월 스칸디나비아 정신과의사 협회보에 발표된 논문(지금까지의 연구들 중 가장 완벽하게 정신분열증을 다뤘다)은 정신적 상처나 어린 시절의 학대가 정신분열증 발생의 한 가지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정신분열증은 여러 환경적·유전적 요인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유전자가 직접 정신분열증을 일으키지는 않으며, 다만 환경적 위험에 취약한 사람들을 확인해줄 뿐”이라고 아일랜드 왕립 외과대 정신의학 연구자 메리 클라크는 말했다. 오클랜드대 정신분석 의사 존 리드가 46명의 정신분열증 환자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남자 환자의 59%, 여자 환자의 69%가 어린 시절 육체적 혹은 성적 학대를 경험했다. 물리적 방치 혹은 육체적·감정적 학대까지 포함한 별도의 연구에서는 이 수치가 남자의 경우 85%, 여자의 경우 100%로 증가했다. 리드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 곳곳에는 진정한 사회적 원인을 도외시하는 진단을 받은 환자 수백만 명이 있다. 그 결과 그들은 보다 더 효과적이고 인간적인 치료를 받지 못한다.” 이 조사가 점점 더 신뢰를 얻으면서 이 분야 최고 전문가들의 견해가 달라지는 중이다. 지난 8월 미국 정신과 협회 연례회의에서 스티븐 S 샤프스타인 회장은 연간 항정신병 치료제 매출액이 현재 65억 달러에 달한다고 밝혔다. 또 정신병이 과잉치료되고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전문가로서 우리 의사들은 약물·정신·사회적 치료를 무시하고 오로지 약물치료에만 매달렸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알약 하나, (의사를 잠깐 만나) 약 처방 받는 게 치료의 전부가 되고 있다.” 앞서의 연구에 따르면 환자들이 정신분열증에 조기 대응만 잘한다면 심신을 쇠약하게 만드는 약물을 평생 복용하지 않아도 된다. 종종 터무니없는 생각·망상·환각 등의 증상을 보이는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신경쇠약을 치료하면 정신분열증을 완화할 수 있다. 해리스를 케임브리지 의사들에게 처음 소개해준 정신과의사 샨카르나라얀 스리나트 박사는 “치료만 제대로 받으면 정신분열증을 이겨낼 수 있다”면서 “만약 사람들이 그 단계에서 도움을 받는다면 고통의 원인을 이해한다. 그러나 도움과 치료를 제대로 못 받으면 평생 만성적인 정신과 환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도 정신분열증에 유전자가 기여하는 바 크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과학자들은 수백 개의 유전자 사슬들이 점증적으로 결합해 정신분열증에 걸리기 쉬운 상태를 야기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런던 타비스토크 앤드 포트먼 전문병원의 데이비드 테일러 박사는 “환경적 요인 없이는 유전자가 발현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해리스는 그전에도 걸핏하면 우울증이 잘 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치료결과에 따르면 환경적 요인들이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게 분명하다. 정신건강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는 거의 밝혀지지 않았다. ‘지구의 야수들: 동물·인간·질병’(Beasts of the Earth: Animals, Humans, Disease)의 저자인 정신과의사 E 풀러 토레이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20년 전만 해도 (정신분열증 연구자들은) 일단 유전체 지도만 나오면 만사가 해결된다고 생각했다. 정신분열증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는 기껏해야 두세 개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그 말은 잘못됐음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사고의 전환으로 공중보건 분야의 우선 순위를 두고 직접적인 갈등이 빚어진다. 영국 의학협회는 케임브리지의 ‘젊은이들의 서비스’(2006년 1월 문 닫을 예정)뿐만 아니라 옥스퍼드셔와 컴브리아의 전문병원을 포함해 영국 정신의료팀의 3분의 1이 해체를 계획 중이라고 전했다(영국 보건부는 정신과 간호사 및 사회복지사들을 포함한 관련 팀이 공백을 메울 예정이라고 밝혔다). 영국 정신과의사 협회보에 실린, 세계 각국의 정신분열증 치료 지침에 대한 최신 조사에 따르면 모든 국가가 약물을 추천하지만 정신·사회적 개입에 대한 조언은 빈약하다. 현재 애인과 직업(교사)이 생긴 해리스는 “이런 치료법이 너무나 중요하다. 나는 인생을 살아갈 방법들을 전수받았다”고 말했다. 정신분열증은 대개 젊은 사람이 독립생활을 할 무렵 발병한다. 정신 치료법과 사회적 치료법들의 중요성이 다시 확인되면서 더 많은 젊은이들이 그 시기를 무사히 넘기는 데 도움을 받을 듯하다. 정택진 ctjin@joongang.co.kr

2005.12.26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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