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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시대 이후 격동의 30년

마오시대 이후 격동의 30년

중국에서 공산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 큰오빠의 나이는 일곱 살이었다. 부모는 1940년대 미국에 가 있을 동안 쑤저우(蘇州)에 사는 친척에게 오빠 광위안(光遠; 저 멀리의 불빛이라는 뜻)을 맡겼다. 부모는 대학만 졸업하면 귀국할 생각이었다. 오빠가 부모 없이 자라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부모는 조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정을 제대로 몰랐는지도 모른다. 1949년 10월 마오쩌둥(毛澤東)이 베이징에 진입하면서 세상이 바뀌었다. 귀국에는 너무 큰 위험이 따랐다. 오빠는 쑤저우의 외가에서 자랐다. 쑤저우는 과거 황제, 유녀(遊女), 시인들이 음주가무를 즐겼던 우아한 정원으로 유명했다. 나는 다른 오빠 두 명과 함께 미국 중서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리고 공산당에 빼앗긴 큰오빠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1979년 1월 1일 마침내 기회가 왔다. 이날 미국과 중국은 30년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외교관계를 정식으로 복원했다. 밀월관계가 지속될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체 없이 비자를 받았다. 2월 20일 저녁, 무거운 가방을 끌고(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척들에게 줄 선물로 가득했다) 베이징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119호 기차에 올라탔다. 아무런 편의시설도 없는 딱딱한 침대칸의 희뿌옇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속에서 승객들이 나를 경이의 눈빛으로 훔쳐봤다. 미국인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모두 싸구려 여행가방과 해지고 기운 보따리들을 부둥켜 안았다. 얼음장 같은 추위에 구식 천 슬리퍼만 신은 사람도 있었다. 가까운 침대칸에서 인민해방군 병사 한 명이 군용 외투를 입은 채 코를 골며 잤다. 그가 진흙투성이 전투화도 벗지 않은 채 곯아떨어졌다는 기억만 남아 있다니 정말 우습다. “베트남에서 막 돌아왔나 봐.” 누군가 농담을 던졌다. 베트남과 국경전쟁이 시작된 지 한 주도 안 됐지만, 그리고 양측 희생자가 수천 명이라고 보고됐지만(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만 명이 숨졌다) 차내의 승객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모두 미국 얘기를 들려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베이징을 출발한 기차는 21시간여 동안 1130㎞를 달려 쑤저우에 도착했다. 당시 37세였던 오빠는 부인, 두 딸, 장모와 함께 제이드 피닉스(玉鳳) 거리에서 살았다. 다섯 살짜리 조카는 나를 보자마자 원을 그리고 뛰면서 고모는 “외국인”이라고 소리쳤다. 집은 장방형의 단칸방이었는데 가운데 대형 옷장을 놓아 두 칸으로 나눴다. 한 칸이 1.1㎡였으며 요강을 화장실 대신 사용했다. 오빠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라고 여겼다. 집에 마루바닥과 천장이 있고 닭 몇 마리를 키울 만한 작은 마당이 있다는 얘기였다. 학자풍에 부드러운 말투의 낙천주의자인 그는 실크 공장에서 밤샘 근무를 하면서 26달러에 상당하는 월급을 받았다. 오빠는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이 지식인을 탄압하며 기승을 부릴 때 집의 서재가 없어진 일을 무엇보다 아쉬워했다. 마오가 세상을 뜨자 실권자인 개혁파 덩샤오핑(鄧小平)은 다른 종류의 세력을 풀어놓았다. 전해 여름 당 지도자들이 홍콩 국경 바로 건너편의 한 착공식에 외국인 기자들을 초대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홍콩에서 기자로 일했다. 선전은 작은 어촌 마을로 원주민이 17가구에 불과했다. 그러나 덩은 자신이 추진하는 거대한 실험의 전초기지로 이곳을 택했다. 선전을 반자본주의 수출지향적인 ‘경제특구’로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그날 나와 서방 기자들은 중국의 미래가 되리라는 진흙 땅을 의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황당무계한 구상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30년이 지난 지금 선전은 인구 1200만 명의 거대도시가 됐으며 계속 커간다. 오두막이 있던 자리에 69층짜리 신싱(信興) 플라자 같은 사무용 건물 단지가 줄줄이 늘어섰다. 이 건물의 높이는 384m로 현재 세계에서 일곱 번째다. 지역 주민들에 따르면 그보다 15m 이상 높은 또 다른 고층건물이 곧 들어설 예정이다. 그런 폭발적인 변화가 인구 13억 명의 나라 전역에서 일어난다고 상상해 보라. 2008년 세계의 TV 화면에 비치는 중국은 (그들이 귀에 못이 박이도록 강조하듯) 수세기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불과 지난 30년 사이에 완전히 탈바꿈했다. 30년 전 중국은 강요된 무지와 절대 빈곤으로 뒤덮인 거대한 폐허였다. 마오의 판단착오로 중국 사회가 변혁의 몸살을 앓은 뒤 남은 정신적인 외상이었다. 그때부터 현재 사이의 간격은 보기보다 훨씬 크다. 일직선의 궤도를 달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흔히 달러와 센트, 몇 백만 명의 인구, 수t의 콘크리트 등 명확한 숫자로 그 여정을 묘사한다. 하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서 들여다보면 그 변화는 훨씬 더 놀랍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119호 열차 여행을 시작으로 중국의 여정에 동행했으니 말이다. 쑤저우를 방문한 지 1년 뒤 덩은 중국의 문호를 활짝 열어젖혔다. 뉴스위크는 공산당 집권 후 미국 시사잡지로는 처음으로 베이징에 지국을 설치하고 운영을 내게 맡겼다. 그 후 베이징, 홍콩, 워싱턴 DC의 유리한 위치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르고 광범위하다고 할 만한 국가적 변신과정을 직접 목격했다. 중국의 눈부신 고도성장을 견인한 수많은 요인을 어느 한 사람이 요약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변화가 나와 오빠 같은 개인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를 알면 그 폭과 규모를 가늠하기 쉽다.
I. “물에 빠진 똥개를 매질하라”
1980년 기자로서 암흑기를 맞았다고 생각했다. 첸먼(前門) 호텔 8층의 박쥐가 우글거리는 객실이 내 사무실이었다. 타자기를 이용해 새 기사를 완성하면 언제나 자전거에 뛰어올라 미친 듯이 페달을 밟아 수㎞ 떨어진 시내의 공립 전신국 건물로 향했다. 거기서 고물 텔렉스 기계에 기사를 다시 타자한 후 구멍 뚫린 종이 테이프를 들고 널따란 방을 가로질러 건너편의 카운터에 가서 접수계원(물론 국가공무원)에게 어서 발송해 달라고 애걸하다시피 한다. 보통 제대로 보냈는지 확인하려고 전송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때로는 의자에 앉아 얼어붙을 듯 춥고 음침한 홀에 울려 퍼지는 기계의 찰칵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꾸벅꾸벅 존다. 그렇게 몇 시간을 기다린다. 물론 그 몇 시간에 취재 시간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덩은 정적을 제거하고 마오가 남긴 상처를 치유(이 순서대로)하는 데 역점을 뒀지 언론의 재갈을 풀어주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1980년의 최고 뉴스는 4인방(마오의 도도한 아내 장칭과 남자 아첨꾼 세 명)의 재판 기사였다. 1976년 마오가 사망하기 전 10년 동안 중국인들을 상대로 자행된 문화혁명의 많은 범죄를 사주한 혐의였다. 중국의 세기적 재판과 관련된 모든 내용은 실제보다 부풀려졌다. 69쪽의 소장은 48건의 세부 죄목을 열거하고 “합법적 또는 비합법적, 공개적 또는 비공개적, 그리고 펜 또는 총을 이용한 온갖 종류의 음모”를 지적했다. 피고인들은 3만4800명의 희생자를 포함해 70만 명 이상의 중국인을 무고(誣告)하고 숙청하고 박해한 혐의를 받았다. 남아공 식의 희망적인 “진실과 화해” 절차와는 거리가 멀었다. 엄정한 심사를 거친 관측통 900명만 재판정 입장이 허용됐을 뿐 외국 언론이나 독립적인 감시단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상 그곳에서 전개되는 드라마는 치밀하게 짜인 각본에 따랐다. 그 절차의 목적은 오로지 책임 전가였다. 국영 신화통신이 충실하게 발표하는 공식적인 사건 개요는 4인방이 피에 굶주리고 놀라운 언변을 가진 악한이라고 묘사했다. “물에 빠진 똥개를 매질하라”고 4인방 중 한 명인 장춘차오(張春橋)가 지시했다고 신화통신은 전했다. “그들의 이름에서 악취가 풍기게 하라.” 마오도 재판대에 세워야 했지만 사후인데도 불가능했다. 중국의 ‘붉은 태양’이라고 떠받들며 여러 해 동안 그를 신격화하다시피 하는 광적인 선전 활동을 펼치다가 느닷없이 그의 가면을 벗긴다면 이미 해질 대로 해진 중국 사회조직의 와해는 불 보듯 뻔했다. 대신 덩 진영은 마오를 “70% 옳지만 30%는 틀렸다”고 공개적으로 평가하는 선에서 그쳤다. 재판정 밖에서는 새로운 개방의 조짐이 훨씬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덩의 첫 번째 잠정적인 경제개혁이 대표적이었다. 내가 도착한 지 몇 달 안 돼 사방에서 공설 시장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애완용 찌르레기로부터 청동 골동품에 이르기까지 온갖 물품이 팔렸다. 여러 해 동안 마오의 명령에 따라 철저히 통제 받던 중국인들을 인터뷰했더니 ‘인민공사’를 해체해 가족농장으로 분할한 조치 같은 변화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안후이(安徽)성의 한 집단농장에서는 토지뿐만 아니라 농장의 실물 자산까지 조합원들이 나눠 가졌다. “나는 손수레 바퀴를 챙겼어!” 한 주민이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나머지는 이웃집에서 가져갔다.” 그런 기회는 우리 가족을 포함해 많은 중국인을 전혀 새로운 기대에 부풀게 했다. 큰오빠를 방문한 후 상하이에 들러 큰아버지를 만났다. 전에는 공중보건 관료였지만 1950년대 공산당의 첫 번째 마녀사냥 바람이 불 때 ‘반동’으로 지목받아 고비사막 끝자락의 신장(新疆)성으로 추방됐다. 1964년 폐인이 되어 귀향했지만 옛 ‘범죄’의 망령이 되살아났다. 그의 가족까지 강압에 못 이겨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제 팔십 줄에 들어선 백모는 그런 음모가 바로 어제의 일인 듯 아직도 그들의 ‘배신’ 이야기를 입에 올린다. 내가 찾아갔을 때 큰아버지는 정치적으로 복권됐었다. 당국에서 찾아와 큰아버지의 연금지급이 재개됐다는 내용의 주홍색 증명서를 정문에 붙였다. 지역 보건소에서 위생교실 강사 자리를 내주기까지 했다. 삼촌은 덩이 개혁을 빨리 펼친 덕에 나라를 위해 자신의 기술과 지식을 전수하게 됐다며 기뻐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 사회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공산주의 이념이 존속했던 러시아와는 달랐다. “우리는 오랫동안 잘못된 길을 걸었다”고 큰아버지는 말했다. “이제 그것을 만회해야 한다. 젊은이들이 스스로 배우고 관리하지 못한다면 우리 늙은이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야 한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누구라도 의심한다고 탓할 형편이 못 됐다. 희망을 가졌던 순간이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탄압으로 사라졌다. 1982년 7월 큰오빠네 가족은 미국 비자를 받아 우리 부모가 살던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내가 그들의 미국행에 따라나서 모든 낯선 여행 절차, 특히 세관 수속절차를 통역하고 설명했다. 짐 속에 과일이나 야채가 있는가? 축산품이나 곤충 식품은? 최근 농장에 간 적이 있는가? 모든 질문의 답은 ‘아니오’였다. 그러나 헌팅턴 비치에 있는 부모님 댁에 도착한 후 오빠 방에서 이상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오빠에게 물어봤더니 호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 그 안에는 ‘골든벨’ 귀뚜라미가 두 마리 있었다. 깨끗하고 맑은 울음소리 때문에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곤충이었다. 공항에서 발각됐다면 어떤 낭패를 겪었을지 오빠는 아무런 감도 없었다. 그 작은 곤충들이 머나먼 고국 땅의 부드럽고 달콤한 노래를 들려줄 동안 캘리포니아의 밤은 깊어갔다.
II. 피로 물든 천안문 광장
1980년대의 중국은 흥분과 가능성의 땅이었다. 모두, 특히 홍콩과 대만 출신 중국인 기업가들이 돈 벌 기회와 연줄에 혈안이 됐다. 실제로 덩샤오핑 치하의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역에서 경제가 활짝 피어났다. 정치 자유를 확대하라는 목소리도 덩달아 높아졌다. 80년대 내내 곳곳의 민주화 시위 현장을 뛰어다니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1985년 티베트에서 꿈같은 휴가를 보낼 동안 미래의 모습을 엿볼 기회가 있었다. 다섯 번째 용이라는 별명을 가진 친한 친구가 그 여행을 주선해 줬다. 그 친구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한때 윈난(雲南)성의 군벌이었는데 그들 가족이 외국으로 빼돌린 재산을 본토에 투자하라고 중국 당국이 친구를 꼬드겼다. 라싸에서 거나하게 술에 취한 어느 날 저녁 함께 술을 마시던 어느 당 고위 관료가 상의를 열어젖히더니 권총을 꺼냈다. “호신용으로 갖고 다닌다”고 그는 말했다. “누가 당신을 해치려는가”라고 갑자기 술기운이 달아난 내가 물었다. 그는 나의 무지가 애처로운 듯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여름이 다가오자 라싸에서 독립투쟁이 시작됐고 그 후 소요사태가 끊이지 않았다. 중국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민주화 행진이 거역하지 못할 대세라고 믿을 만했다. 아시아의 중산층이 성장하면서 그들의 기대와 영향력도 커졌다. 필리핀에서는 아시아 최초의 ‘피플 파워’ 혁명이 일어나 1986년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하와이로 쫓겨났다(그의 탈출을 간발의 차로 놓쳤다. 대통령궁 앞의 예민해진 경비병이 쏜 총에 무릎을 맞아 마닐라 병원의 응급실로 실려갔기 때문이다). 1년 후 서울에서는 또 다른 압제적인 군사정권이 학생 시위에 굴복해 한발 물러섰다. 집권 군부는 자국의 경제발전을 과시하려는 열망에서 1988년 서울 올림픽 주최권을 따냈다. 군사정권은 최루탄이나 유혈 탄압으로 올림픽을 망쳐 국제적 망신을 당하기보다 문민정부에 길을 열어주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그해 여름 올림픽을 취재하지 못하고 랑군(양곤)으로 날아가야 했다. 그곳에서 민중이 항상 승리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덜컹거리는 픽업트럭의 뒤에 올라타 스트랜드 호텔로 향하는 길에 버마(미얀마)인 지인은 불안한 표정으로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계속되는 혼란 속에서 시위대가 어떻게 군인들의 소총과 탄약을 탈취했는지 설명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군사정권이 무력으로 진압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 사진기자와 나는 구덩이와 총알을 피해 가며 시내의 오래된 병원을 찾아갔다. 병원은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었다. 병동 복도에는 똥덩어리들이 널려 있었다. 무엇보다 시체보관소의 짓이겨진 시체 수를 세는 일이 힘들었다. 한 어린 10대의 시체는 머리가 거의 날아갔다. 이듬해에는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외교부 브리핑 동안 졸지 않는 일이 가장 큰 고역이리라고 생각했다. 30년간의 중·소 간 적대관계를 풀고 1989년 5월 15일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베이징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5월 3일 택시를 잡아 타고 천안문 광장에 이르렀을 때 네다섯 명이 자전거에 탄 채 인간사슬을 만든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몇몇은 이마에 하얀 띠를 두르고 팔짱을 낀 채 나란히 페달을 밟았다. 이들의 이동 시위로 길이 완전히 막혔다. 그들의 대담함에 혀를 내둘렀다. 학생 운동가들은 자신들의 최대 영웅인 정치국원 후야오방(胡耀邦)의 사망을 애도했다. 후는 2주 남짓 전에 심장 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학생 운동가들은 2년 전부터 후에게 충성을 바치기 시작했다. 당시 덩샤오핑은 대학 내 소요에 너무 안이하게 대처한다는 이유로 후를 공산당 총서기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후의 사후, 화환과 그의 초상화가 천안문 광장에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민일보는 사설에서 애도객들이 ‘사회불안’을 유발하고 당 지도부의 전복을 음모한다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러나 내가 도착한 날 자오쯔양(趙紫陽) 당시 당 총서기는 그 사설이 “도를 넘었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정권 내부에서 상반된 신호가 나오는 이유를 한 외교관 친구에게 물었을 때 그의 답변은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무서운 권력투쟁이 진행 중이다.” 천안문 사태의 목적은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틀린 생각이다. 경제의 역할도 컸다. 10년간의 경제개혁은 인상적이었지만 불안정했다. 물가가 뛰고 이번에는 농민들이 돈을 벌었지만 도시 거주자들은 뒤처졌다. 특히 대학의 실험실과 교실은 주택만큼이나 낡았다. 그래도 원동력은 이상주의였다. 공산당이 집권하기 오래전부터 학생들은 중국 사회의 양심 역할을 해왔다. 아버지에게서 그 사실을 배웠다. 1930년대 아버지는 학생 대표단을 이끌고 당시 중국 지도자 장제스(蔣介石)를 찾아가 일본의 침략에 더 강경하게 대처하라고 촉구했다. 이제 베이징의 고전적인 경극 내용과 똑같은 드라마를 목격하는 셈이다. 옳은 일을 위해서는 희생도 불사하겠다며 정의감에 불타는 학생들이 잔인하고 부패한 늙은 황제에게 도전했다. 고르바초프의 방문이 임박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정상회담 전에 시위대를 거리에서 쫓아내지 않으면 당국이 큰 망신을 당할 참이었다. 소련 지도자가 도착하기 전날 밤 나는 광장에서 단식 투쟁자들과 함께 지냈다. 천을 기워 만든 화려한 시위 깃발과 현수막이 달빛 속에서 산들바람에 펄럭였다. 한 현수막에는 ‘배가 고프지만 차라리 민주주의를 위해 죽겠다’고 영어로 새겨져 있었다. 키릴 문자로 ‘우리에겐 개방이 필요하다’고 적힌 현수막도 있었다. 그날 밤 광장에 있던 21세의 학생 티안훙은 민주주의에 관한 감상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가 개방을 시작했다”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지난 몇 년에 걸친 독재정치가 실패했음을 안다.” 버마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내 눈에서 눈물이 솟구쳤다. 다음날 중국 정부 당국자들은 고르바초프를 인민대회당의 뒷문으로 인도해야 했다. 학생운동에 고무된 시민들이 5월 19일 계엄령이 선포된 후에도 시내 곳곳에서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많은 지역에서 방책을 세우고 군대의 통행을 막았다. 거의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목격됐다. 군인 50명이 AK소총을 손에 쥔 채 땅바닥에 앉아 있었고 확성기를 손에 든 학생들이 군인들에게 아이스캔디를 나눠주고 민주주의 강연을 했다. 또 다른 지역에서는 시위대를 막는 방어선 속에서 군인 한 명이 튀어나와 소리쳤다. “우리는 인민의 군인이다! 결코 여러분을 탄압하지 않는다!” 그러자 군중은 우레와 같은 환호로 응답했다. 어느 날 새벽 동트기 전 또 다른 수송대가 은밀히 도시에 진입을 시도했다. 미사일 수십 기(시위와는 전혀 무관)를 방수포로 덮은 채 운반하다가 몰려든 민간인들에 갇혀버렸다. 군중이 무기를 보고 야유를 보낼 동안 군인들은 얼굴을 찡그린 채 속수무책으로 지켜봤다. 무력진압이 일정한 형식을 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위기가 발생한 지 여러 주가 지난 뒤에 사태의 전환점이 찾아오는 경향을 보인다. 정부와 해외 언론이 모두 진이 빠진 다음에 말이다. 6월 3일 새벽 2시,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광장 부근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새파랗게 젊은 군인 수천 명이 비무장 상태로 베이징의 중앙통인 창안제(長安街)를 진군해 내려오다가 놀란 시위대에게 저지당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두려움과 혼란의 도가니였다. 당황한 군인들이 서로 밀치며 우왕좌왕했다. 몇몇 군인이 군중에게 구타당했고 나머지는 군중이 던진 신발과 쓰레기에 맞아 멍이 들고 생채기가 났다. 군인 중 일부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들의 충돌은 대부분 평화롭고 애정까지 담겼다. 어떤 남자는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좀 쉬라”며 한 군인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담배까지 억지로 물려줬다. “자네는 너무 지쳤어.” 다른 군인 한 명은 그런 친절에 당황한 듯했다. “여기에 나쁜 사람들, 불량배들이 있다고 하던데요.” “자네 눈에는 우리가 그런 사람들로 보이나?” 한 민간인이 대꾸했다. “베이징에 나쁜 사람이 이렇게 많겠어?” “하여간 어느 쪽이 동쪽이죠?” 한 군인이 혼란스러운 듯 말을 돌렸다. 무기는 들지 않았지만 물통, 불룩한 배낭, 심지어 휴대형 버너까지 온갖 무거운 장비를 잔뜩 짊어진 채였다. 한 군인이 배낭을 땅에 떨어뜨려 낡은 플라스틱 슬리퍼와 손전등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한 호기심 많은 여성이 배낭 안을 들여다보며 인민해방군의 배급식량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즉석 라면이라니 정말 불쌍하다”며 그녀가 혀를 찼다. 당시 정권은 국민의 신임을 거의 받지 못하는 데다 체면까지 잃었다. 같은 날 아침 비슷한 충돌 상황에서 인민해방군 수천 명이 광장에 진입하려다 저지당했다. 군용 지프 한 대가 방책을 뚫고 들어가 민간인 세 명이 사망했다. 랑군에서처럼 시위대가 군인들로부터 AK 소총 몇 자루를 탈취했다는 미확인 보도가 더 불길했다. 친구와 정보원들은 광장 근처에서 최루탄이 발포됐다거나 서쪽 멀리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속속 전해왔다. “전신국 건물 부근에서 싸움이 벌어졌다”는 전화도 있었다. “네가 있는 방향으로 이동 중이다.” 뉴스위크 지국과 내가 묵는 호텔은 천안문 동쪽 약 1.6㎞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그에 앞서 나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광장 가장자리에 있는 베이징 호텔 객실을 예약했다. 그날 저녁 천안문을 향해 걸어가면서 본 창안제는 으스스하고 어두웠다.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를 절망적인 외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위대는 아우성치며 화염병을 던졌다. 그리고 총성이 들렸다. 총알이 생명을 위협할 만큼 가까이 날아오면 핑 하는 소리가 들린 후 퍽 하는 충격음이 난다는 사실을 마닐라에서의 경험을 통해 알았다. 내 주변 사방에서 온통 핑 소리와 퍽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앞에 선 남자의 하얀 셔츠에 선홍색 얼룩이 불규칙하게 번졌다. 그의 팔을 잡고 도와주려 했지만 남자 세 명이 나타나 부리나케 세 바퀴 수레에 그를 던져 넣은 후 어디론가 실어갔다. 병력 수송 장갑차 한 대에 불이 붙었다. 민간인들은 마치 살아 있는 괴물과 싸우듯 몽둥이와 쇠파이프로 불타는 차량을 내려쳤다. 6월 4일 오전 5시 30분, 스산한 회색빛 새벽. 베이징 호텔의 메모장에 펜으로 그 끔찍한 장면을 기록하려 애쓰던 참이었다. 민간인들이 고함을 지르는 동안 약 50대의 군용 차량이 굉음을 내며 창안제를 내달리면서 방책을 마구 쓰러뜨렸다. 습관적으로 전차와 병력 수송 장갑차가 지날 때 수직선 네 개에 사선 한 개를 긋는 식으로 다섯 대씩 숫자를 정확히 셈하려 애썼다. 전차는 천막, 시체, 그리고 학생들이 며칠 전에 세운 10m짜리 ‘민주주의 여신’상 조각 등을 모두 깔아뭉개고 지나갔다. 이윽고 확성기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모든 시민은 집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반란은 진압됐다.” 음질이 아주 나빠 무슨 말인지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광장 북단에서 군인들이 일렬 횡대로 배를 깔고 누워 베이징 호텔을 향해 기관총을 겨눴다. 민간인 무리를 향해서는 발포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총알을 맞지 않으려고 지하보도로 뛰어들어 몸을 숨겨야 했다. 숙박비를 계산하려고 동료 캐롤 보거트와 함께 베이징 호텔로 돌아갈 무렵 시위는 무참히 진압됐다. 며칠 동안 그 지역의 출입이 차단됐기 때문에 ‘천안문 광장 사태로’ 호텔 출입이 불가능했던 날의 요금을 청구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창구직원에게 말했다. 접수계 직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천안문 광장의 상황이라뇨?” 이건 너무 한다 싶었다. 피로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에게 고함을 쳤다.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못 봤단 말이오? 당신네 호텔 창문 바로 앞에서 벌어진 일인데.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호텔 경비직원들이 나를 향해 조금씩 접근했다. “살인은 없었소,” 창구직원이 말했다. “광장에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소.” 나는 캐롤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III. 무엇보다도 돈이 최고야
천안문 유혈사태가 일어날 때까지 우리 집 대가족의 재상봉을 계획 중이었다. 부모님, 미국에서 태어난 남자형제 둘과 함께 고모와 다른 친척들을 만나러 베이징에 갈 생각이었다. (큰오빠는 또다시 남아야 했다. 이번에는 미국이었다. 대만 사람이 LA 인근에서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하던 오빠는 직장을 쉬지 못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베이징을 거부하고 대신에 더 멀리 떨어진 윈난(雲南)을 택했다. ‘영원한 봄’이라는 뜻의 윈난성 성도 쿤밍(昆明)은 1930년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구애했던 곳이었다. 광장에서 학살이 일어난 터라 쿤밍 사람들이 시무룩하고 방어적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베이징(그리고 거기서 일어난 일)과 아무 상관이 없는 듯 행동했다. 쿤밍 사람들은 장사에 열을 올렸다. 길거리는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넣고 신발을 고치고 구운 치즈 같은 토속음식을 만들어 파는 소규모 자영업자들로 넘쳐났다. 관광지 스린(石林)에서는 이국적 옷차림의 원주민 여성들이 왜소한 체구의 우리 어머니 주변으로 벌떼처럼 몰려들어 집에서 짠 자수 조각보들을 팔려고 난리였다. 어머니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다 거의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어머니는 쿤밍의 하늘이 어릴 때 기억처럼 눈부시게 파랗지 않다고 불평했다. “공산주의자들이 날씨를 망쳐놨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나는 웃었다. 요즘 베이징의 언제나 희뿌연 하늘을 보노라면 어머니 말씀이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천안문은 그 속도를 더욱 빠르게 했을 뿐이다. 국제적으로 배척당하는 데다 자신의 경제개혁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휩싸인 덩샤오핑은 일당독재의 포기만 빼고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해 산업을 발전시키겠다는 태도였다. 홍콩과 대만에서 투자자들이 밀려들어왔다. 그들은 인권이 어쩌고 저쩌고 참견하지 않았다. 오로지 지방에서 올라온 값싼 이주 노동자들을 부려 공장을 지을 생각만 했다. 1992년 이 ‘최고지도자’는 선전을 비롯한 여러 경제특구를 방문하며 나라 안팎에 경제발전상을 선전했다. 비록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과거는 잊고 미래에 집중하라는 내용이었다. 그의 표현을 옮기자면 “치부광영(致富光榮)”이다. 수백만 중국인은 자발적으로 그 대열에 참여했다. 큰오빠 부부와 함께 1992년에 쑤저우(蘇州)를 찾았다. 그들은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후 최초의 고향 방문이었다. 문화혁명 때 시골 농장으로 차출됐던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오빠의 친구들은 그들 표현대로 “바다에 뛰어드는” 게 유행이라고 말했다. 편안한 공무원 생활을 정리하고 개인사업에 뛰어드는 풍조를 말했다. 오빠의 가장 친한 친구는 시골을 돌아다니며 목재사업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한 사촌과 전화통화를 했는데 그는 하이난(海南)에 있는 외국인 정유회사에서 일했다. 오빠가 친구들과 즐겁게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오빠가 두 번이나 시대의 흐름에 소외되지 않았나 생각했다. 한번은 그 어려웠던 시절 중국에 너무 집착해서였고, 두 번째로는 오빠 세대의 중국인들이 막 잘살기 시작할 무렵인 8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기 때문에. 그리고 변화는 더욱 빨라졌다. 1995년에 덩샤오핑의 고향 쓰촨(四川)성의 성도인 청두(成都)를 지나다 여기가 어디냐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오쩌둥의 커다란 백색 동상은 여전히 중앙광장에 서 있었지만 주변은 팹스트 블루 리본 맥주, 후지 필름, 담배 등을 선전하는 형형색색의 대형 풍선과 광고판으로 가득했다. 앞으로 길게 내뻗은 마오쩌둥의 손 아래에는 “개혁 개방 지속”이라는 영어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베이징도 숨가쁘기는 마찬가지였다. 친구들에 이끌려 한 나이트클럽에 갔는데 그곳 매니저는 새로 설치한 2000달러짜리 조명기구와 외국인 DJ 3명, 그리고 최신식의 서구적 분위기를 자랑하며 “미국과 똑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클럽 소유주는 당연히 인민해방군과 연줄이 닿았다.) 그리고 라싸(拉薩)도 완전히 바뀌었다. 포탈라궁 아래에 있는 동네는 미용실, 성매매 여성, 그리고 ‘Material Girl’ 같은 노래를 틀어대는 가라오케 술집들로 가득했다. 티베트 친구 한 명은 처음으로, 자기 아이가 만다린어를 배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야 좋은 직장을 얻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는 그렇게 말하는 자신을 혐오했다. 몇몇 천안문 사태 주역도 제도권 안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그나마 망명이라도 갔었던 사람들이다. 1989년 당시 “피로 씻긴 광장만이 민중을 일깨운다”고 선언했던 차이링(柴玲)도 1996년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 입학하면서 자기 계발에 매진했다. 그해 대통령 선거의 감시원으로 대만을 찾은 차이링을 쫓아다닌 적이 있다. 차이는 성숙이 지나쳐 아예 딴 사람처럼 보였다. 학생 지도자였던 그는 1989년에 현금 기부를 받았다고 비난 받았다. 그 돈으로 눈을 ‘둥글게’ 만드는 성형수술을 받았다. 그 덕택에 서구로 도망치기 전 중국에서 도피생활을 하는 10개월 동안 사람들이 자신을 못 알아봤다고 차이는 말했다. “당시 나는 너무 어렸다”고 천안문 항거를 회상하면서 그는 말했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건 대화였다.” 그는 이제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인터넷 소프트웨어 회사를 운영한다. 대만 사람들은 본토에서 부는 그 모든 당혹스러운 경제변화에 편승하려고 촉각을 곤두세운 듯했다. 그 자체가 커다란 변화였다. 70년대 중반 타이베이에서 살았는데 당시 총통이었던 장제스(蔣介石)의 편집증적인 군정은 끊임없이 침략의 공포를 부채질했다. 한 미국 친구는 세탁을 맡긴 양복 주머니에서 중국 본토의 동전이 나왔다는 이유로 당국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고 “빨갱이 중국 간첩”이라는 죄목의 보석금으로 1만 1000달러를 내야 했다. 또 나는 중국 본토와 간접무역이 이뤄진다는 기사를 써서 곤욕을 치렀다. 양국 정부의 적대적 관계에도 불구하고 중국 약재와 상하이 민물게 등이 타이베이 시장에서 팔린다는 내용이었다. 대만 정부 관계자들은 대만과 본토가 언젠가 상업적 거래를 트고, 여행을 하고, 심지어 운동경기나 학계의 교류도 빈번해지리라는 관측을 어떻게 감히 내놓느냐며 호되게 몰아붙였다. 1996년까지 대만의 본토 투자는 최소 240억 달러 이상이었다. 그리고 상하이에만 대만 사람 수만 명이 거주했다. 대만 친구 중 몇몇은 자녀를 베이징에 있는 대학에 진학시켰다. 그리고 타이베이의 디화 거리 상점은 상하이에서 들여온 산 게, 마오타이 술 같은 본토 상품들을 전문으로 판매했다. 10년 전의 내 소심한 예측은 오늘날 현실이 됐다.
IV. 떠오르는 국가주의
중국에 적극적인 사고를 가졌던 아버지는 나를 항상 놀라게 했다. 1997년 초반 80세가 된 아버지는 심장수술을 받았다. 당시 7월 1일에 홍콩에 머물면서 영국의 식민지를 벗어나 중국 주권을 회복하는 역사적 반환을 기사로 쓸 예정이라고 말씀 드렸더니 아버지는 즉각 “나도 가겠다!”고 말씀하셨다.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비행기만 18시간을 타야 했고 더군다나 아버지가 그 반환을 경축할 이유가 뭐냐는 점이 더 큰 의문이었다. 아버지는 베이징의 공산주의자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냥 가보고 싶다며 “그 장면을 목격하는 소수의 중국인 중 한 명”이 되겠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마오쩌둥이 권력을 잡기 반세기 전에 줏대 없는 만주족 정권이 빼앗긴 홍콩 땅을 중국이 되찾아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릴 때 아편전쟁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가장 커다란 치욕이었다. 그래서 영국을 증오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벌어진 일들 때문에 더욱 영국을 싫어했다. 아버지는 1930년대 상하이 조차지에서 영국령 인도 출신의 터번을 두른 건장한 시크교도 경찰들이 중국인 걸인과 매춘부들을 때리던 모습을 기억했다. 결국 아버지는 홍콩에 가서 오랜 벗들과 함께 반환행사를 지켜봤다. 찰스 왕세자가 뺨과 턱에 떨어지는 햇빛을 받으며 굳어진 입술로 송별사를 읊던 모습을 기억한다. 국기 하나를 내리는 행사는 생김새가 서로 다른 영국인 세 명이 집행했는데 키도 차이가 나고 걸음걸이도 다르고 복장도 달랐다. 한 사람은 킬트 스커트를 입었다. 키가 아주 크고 동작이 완벽하게 통일됐으며 티 하나 없이 말끔한 유니폼을 입은 중국 의장대와 어딘지 슬픈 대조를 이뤘다. 인민해방군 병사 한 명이 엄청나게 큰 중국 국기를 한 번에 척 소리 나게 펼치는 모습을 보노라니 그런 대조적 감정이 더욱 커졌다. 우리 아버지를 포함한 수백만 중국인의 가슴에 자부심과 당당함이 물결쳤다. 중국의 위정자들은 홍콩이 필요했다. 단지 돈을 만들어내는 주식시장 때문이 아니었다. 일당독재의 정당 이름 말고는 공산주의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정당화하려고 다른 ‘이념’을 찾아야 했다. 그 대답은 바로 국가주의였다. 공산당 지도부는 과거의 아픔을 되갚고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하는 국가의 위대한 수호자로 자신들을 자리매김했다. 홍콩은 첫 번째 단계일 뿐이었다. 마카오도 곧 뒤따를지 모른다. 최대의 목표는 바로 대만이다. 태평양의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은 불안한 눈으로 사태를 지켜본다. 1996년 중국은 대만해협에서 대대적인 미사일 발사 시험을 강행했다. 대만의 대통령 선거를 뒤흔들려는 시도였다. 거기다 중국 해군은 남중국해에 있는 작은 모래산호초의 소유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당시 땅 따먹기 식의 영토 분쟁은 실소를 자아냈다. 중국 해군은 산호도라 불리는 지역에다 본토의 흙을 실은 커다란 뗏목 같은 것을 정박시켰다. 거기에 야채를 심어 바다에 떠다니는 밭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조상의 땅이여 영원하라는 식의 간판을 세워뒀다. 당시 미국 정부는 새로운 냉전이 움트지 않느냐는 의문을 떨치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의 새로운 표어는 중국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1998년 다시 특파원 업무를 맡아 베이징으로 갔을 때 10대 소녀들로 이뤄진 중국 최초의 펑크록 밴드 행 온 더 박스를 알게 됐다. 빨강 뾰족머리에 징이 박힌 개 목걸이를 한 열아홉 살의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왕유에는 줄담배에 입이 거친 반항아였다. 하지만 그는 천안문 사태를 놓고는 별 말이 없었다. 그는 “군대가 제대로 했다”고 말했다. “안 그랬으면 사태가 더욱 악화됐을 것이고 외부인들이 그 혼란을 틈타 중국을 차지하고 해를 끼치려 들었을 것이다.” 서구사회는 로큰롤이 중국의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인터넷이 해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지난 1년 반 동안, 이제 막 사이버세계를 배운 당국의 컴퓨터 경찰들은 새로운 기술에 정신을 못 차렸다. 그 와중에 몇몇 웹사이트를 폐쇄하고 몇몇 사이버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했다. 물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을 놓치긴 했지만. 그러나 중국의 인터넷 만리장성, 다시 말해 만리방화벽은 점점 더 많은 민주주의 성향 사이트의 접근을 막고 친정부, 반서구 사이트들을 그냥 내버려둔다. 거기에 실린 독설은 특히 젊은 사람들 사이에 만연한 대중적 정서를 반영한다. “확실히 국가주의가 힘을 얻는다”고 한 외교관 친구는 말했다. “20대 젊은이들은 자기네 나라가 피해를 본다고 생각한다. 특히 거대하고 또 사악한 미국 때문에.” 이런 새로운 태도는 1999년 5월에 보다 분명해졌다. 당시 옛 유고슬라비아에서 전쟁이 벌어졌는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의 제트기 한 대가 실수로 베오그라드 중국대사관을 조준해 세 명의 중국인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1989년 이래 처음으로 거리 시위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중국 경찰이 교통을 정리했고 당국이 생수를 제공했으며 수천 명의 시위대가 미국과 영국 대사관으로 쳐들어가 벽돌과 쓰레기를 던졌다. 나중에 제임스 새서 미국 대사는 대사관 창문 밖을 쳐다보며 중국 공안원이 돌멩이를 집어 들어 자신을 향해 던졌노라고 씁쓸하게 말했다. 다시 질서가 잡힌 후 미국 무관 한 명과 다시 그 장소를 찾았다. 그는 페인트가 어지럽게 뿌려진 미국 대사관 정문을 지나면서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유리창이 깨지고 파편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중국의 청년들이 자유의 여신상을 모델 삼아 민주주의의 여신을 앞세우고 천안문 거리를 행진한 지 불과 10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중국의 홍커(紅客, 붉은 해커라는 뜻)도 아주 바빴다. 베이징과 선전에서 그들은 아주 보란 듯이 여러 가지 소행을 저질렀다. 그들 중 하나는 백악관 사이트를 공격했는데 빌 클린턴의 얼굴에 히틀러의 콧수염을 달아놓았다. 그리고 어떤 해커는 미국 내무부 사이트에 베오그라드 폭발 사고의 희생자 사진을 올려놓았다. 천안문 사태의 학생 지도자였던 왕단(王丹)이 공개적으로 그 폭발사고는 사고였다고 천명하자 그에게 살해위협 e-메일이 도착했고 그의 친민주주의 사이트인 june4.org는 “빌어먹을 왕단!”이라는 커다란 글씨로 도배됐다. 어떤 면에서 이들 해커는 천안문 광장에서 만났던 왕단 같은 순진한 젊은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제도권을 공격하는 이상주의적 이단아들 말이다. 하지만 커다란 차이가 있다. 1989년의 저항은 중국 지도자들에게 서구사회의 이상을 받아들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1999년의 저항은 점차 서구사회를 적으로 간주하고 뭐가 됐든 중국 정부가 너무 유약하게 대처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중국은 지난 수세기 동안의 어느 때보다 훨씬 강하고 자부심이 높아졌으며 국제무대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한다. 하지만 국가주의가 날뛰면서 공산당 지도부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괴물에 밟히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쓸 뿐이다.
V. 안락한 노후 보내는 ‘바다거북 가족’
다시 수천 명의 시민이 베이징의 거리로 뛰쳐나간 건 2001년 7월 14일 밤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순전히 축제 열기 때문이었다. 불꽃놀이와 레이저 광선이 밤하늘을 수놓았고, 20만 명의 시민이 천안문 광장에 운집했다. 탱크 대신 자동차가 창안제로 밀려 들어왔고 젊은이들은 열광적으로 붉은 대형 깃발을 흔들었다. 중국이 2008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진심으로, 가슴 깊이 기뻐했다. 그들의 조국이 마침내 국제사회의 일원임을 정식으로 인정받은 날이었다. 중국의 지도자들에게는 이번 올림픽 유치가 90년대 말 홍콩 반환만큼이나 절실했다. 그들은 보다 크고 나은 성과를 올려 끊임없이 대중의 신뢰를 유지해야 했다. 중국 특유의 천명(天命: 군주란 백성을 섬기라고 하늘이 세운 사람이며 군주가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백성이 그 군주를 축출하고 새 군주를 세울 수 있다는 사상) 철학 때문이었다.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고 우주에 중국인을 보내고, 세계 최대의 댐, 가장 높은 철도, 가장 높은 관람차(페리스 휠)를 건설하는 이유도 같다.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는 아시아를 호령했던 옛 영광을 되살리고 싶은 꿈이 있다. 동시에 중국의 지도층은 중국이란 거인이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면 온 세계가 경계하리란 점도 안다. 2008년이 가까워 오고, 또 활황을 맞은 중국 경제가 에너지, 원자재, 그리고 새로운 시장을 찾아 눈에 불을 켠 지금, 중국 정권은 재빠르게 세계 여러 나라에 친절을 베풀며 미국의 오랜 동맹국이든 불량국가든 가리지 않고 친분을 쌓기에 바쁘다. 쉴 새 없이 터지는 국제적 위기 상황에 대처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미국은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돼가는 과정을 거의 눈치채지 못했다. 중국 외교관들은 자국이 미국을 제압하려는 의도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중국이 초대강국이 되기란 불가능하다. 그냥 강국이라면 몰라도 초대강국은 아니다.” 한 중국 관리가 2005년 베이징의 스타벅스에서 익명을 전제로 편안하게 긴 대화를 나누며 말했다. (그렇다, 중국 관료들이 익명 취재에 응하는 시대가 왔다). “우리는 제국 건설에는 관심이 없다.” 중국 내부에서도 부쩍 국가 이미지를 신경 쓰면서 지도층에 오염이나 노동력 착취 같은 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촉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불도저와 건설 장비가 도시들을 온통 휘젓고 다니면서 서민들의 보금자리를 깔아뭉개는 데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2003년 무자비한 개발업자의 손에 삶의 터전을 잃은 한 남자가 분신 자살을 시도했다. 사진기자와 함께 병원을 찾아가 분노에 찬 그의 친척들이 병원 직원들을 가로막는 새 몰래 병실에 들어갔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취재원 한 명이 전화를 걸어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펑타이구의 어느 집에 깡패들이 진입해 사람들을 쫓아낸다. 외신에 보도되도록 해달라.” 사람들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 1년 전 중국 당국은 외신기자들의 취재 제한 규정을 2008년 10월까지 한시적으로 해제했다. 지방정부의 허가 없이도 누구든 취재에 응한다면 대화를 해도 된다. 2007년 1월 이조치가 적용되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공공질서를 침해했다”는 이유로 2년간 수감돼 있던 류안준이라는 운동가였다. 그는 자신을 취재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 외에 모두가 인터뷰에 응했다”고 그는 재촉했다. “당신도 여기 와서 나와 얘기를 나누면 어떤가?” 난 아직도 4인방 공개 재판에 관한 기억이 생생했고, 10월 이후 일어날 일이 걱정됐다. 하지만 투밍더 베이징 올림픽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은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 “중국은 개방을 향해 전진할 뿐이다. 후퇴는 없다.” 아마도 그의 말이 맞을지 모른다. 우리 집 부텈 창밖으로 중국의 미래는 아직 ‘공사중’이다. 난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며 베이징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 될 차이나 월드 트레이드센터 페이스3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 옆에는 세계적인 건축가 렘 쿨하스가 설계한 파격적인 사다리꼴 형태의 중국국영방송본사(CCTV타워) 사옥이 있다. 많은 중국인이 아직도 이 건물 구조가 안정적인지 의심스로워한다. 서양식 발코니에 서면 공원과 지하철역, 호화로운 아파트가 내려다보인다. 얼마 전까지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하던 서민들이 모여 살던 달동네였따. 밤이 되면 레이저 광선이 야자수나 무지개 등 환상적인 모양으로 하늘을 수놓는다. 1989년 중국인민해방군이 탱크를 몰고 진입했던 바로 그 교차로 위다. 이제 중국 사회는 도시의 하늘만큼이나 급격히 변했다. 한때 나같이 중국 사회에 정식으로 소속되지 않은 해외파들은 토종 중국인이라 하더라도 외계인 취급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서양인들도 중국에서 수많은 틈새직종을 구한다. 심지어 성대한 결혼식의 한 순서로 기독교 예배를 넣고 싶은 중국인 예비부부들을 위해 목사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진짜 변화의 증거는 서구에서의 삶을 접고 중국으로 속속 귀환하는 중국인들의 물결이다. 중국에서는 이런 이들을 “바다거북”이라고 부른다. 대양을 건너 왔다 갔다 하는 모습에 빗댄 표현이다. 많은 사람이 너무 오랫동안 고향을 찾지 않으면 새로운 발전상을 놓칠까봐 걱정한다. 내 조카의 남편은 베이징에서 자랐지만 캘리포니아에서 조카를 만나 결혼했는데, 아직도 중국의 변화 속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미국에 한 2년간 있다 돌아오니 친구들의 대화 내용을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사업 ‘기반’(비즈니스 플랫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버지는 이번 크리스마스에 91세가 되지만, 올림픽이 열릴 때 베이징에 오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그때쯤이면 많은 친척이 아버지를 맞아 줄 듯하다. 광위안 오빠의 딸 조이스와 남편, 두 아이는 중ㅇ국에 역이민한 ‘바다거북’ 가족이다. 광위안 오빠는 지금 은퇴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옛 고향인 쑤저우에서 보낸다. 미국에서 열심히 일한 덕분에 오빠 부부는 약 280㎡의 고급 아파트에서 안락한 노후를 보낸다. 그들은 아파트의 옥상 정원에 올라가 밤의 장막이 서서히 도시에 드리우는 풍경을 즐겨 본다. 제이드 피닉스 거리에 위치한 옛날 판잣집은 수년 전에 철거 됐고 그 자리에 쇼핑몰이 대신 들어서따. 하지만 그래도 고향에 오니 좋다고 그들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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