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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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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경제 大예측 | 중후장대 침체 벗어날까?] 자동차·조선·철강 수요회복 전망… 정유는 쉽지 않아

자동차

장기적 수요하락 국면… 환경 규제, 유가가 변수 자동차·조선·철강·중화학공업 등 중후장대(重厚長大·무겁고 두껍고 길고 큰) 산업은 한국 경제의 핵심 축이었지만 산업의 구조적 변화로 수년간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20년엔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영향으로 경영상 어려움이 심화했고, 비대면 사회로의 전환에 속도가 더해지며 산업에 대한 주목도도 크게 낮아졌다.2021년에도 코로나19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겠지만, 2020년의 기저효과에 의해 세계 수요는 모든 산업에서 증가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산업연구원은 수요 하락이 장기적 추세인 철강이나 항운 등의 정상화가 늦어져 수요에 영향을 받는 정유 등의 회복세는 다소 제한적일 것으로 전망하면서도, 친환경 관련 이슈에 따른 환경 규제로 친환경 선박 등 조선 발주는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제 자동차 시장에 큰 타격을 입혔다. 한국 시장은 개별소비세 인하 등 소비 진작 정책으로 성장했지만, 한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자동차 판매가 감소했다. 이에 따라 한국 자동차 기업들은 내수 시장에서 선전했지만 해외 시장에선 어려움을 겪었다.한국자동차산업협회(KAMA)에 따르면 2020년 1~10월 현대·기아자동차를 비롯해 한국GM·르노삼성·쌍용자동차 등 국내 자동차 회사들의 생산 대수는 288만5481대로, 전년 동기(326만6698대) 대비 11.7%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자동차 회사들의 내수 판매는 같은 기간 133만4105대로 6.2% 증가했지만, 해외시장 침체로 수출이 23.2% 감소한 152만4045대에 그쳤기 때문이다. 같은 기간 현대·기아차의 해외생산(245만6151대)도 전년 대비 24% 감소했다.2021년의 자동차 시장은 정반대의 양상이 펼쳐질 전망이다. 해외 시장에선 이연됐던 수요가 늘어나고 2020년의 기저효과로 수출·해외 생산이 성장세로 전환하지만, 국내 시장에선 개별소비세 인하 정책 종료로 인한 판매 감소가 예상된다. 수출과 해외생산 규모가 국내시장보다 커서 종합적으론 판매량 증대가 일어날 것이란 분석이다.특히 기대는 친환경차 시장에 집중된다. 2021년부터 유럽연합(EU)의 환경 규제가 강화되며 기존의 내연기관차는 유럽시장 수출에는 제한이 걸릴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다만 전기차 등 친환경차의 수요는 본격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마냥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간 어려움을 겪던 쌍용자동차는 모회사인 인도 마힌드라의 지원이 끊기며 채무를 상환하지 못하고 자율구조조정 제도를 이용한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다. 3개월 안에 매각협상이 원활히 이뤄지면 회생의 길이 열리지만 그렇지 못하면 최악의 경우 청산될 가능성도 있다.조선업은 당초 2020년 일감 확보 기대가 컸지만 실상은 달랐다. 수주한 물량을 2년여에 걸쳐 건조하는 조선업의 특성을 고려할 때 대형 3사들의 재무상태는 전년보다 나아졌지만 수주가 줄어 수주잔고가 크게 줄었다. 2020년 10월 기준 한국 조선업 전체 수주잔량은 1842만CGT로 연초 대비 21.1%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다만 2021년에는 전세계에서 선박 발주가 많이 늘어날 거란 전망이 나온다. 특히 한국 선사들은 중국 선사 대비 경쟁력이 높은 액화천연가스(LNG) 선박을 중심으로 수주가 많이 늘어날 것이란 기대감이 커진다.수주 기대감은 2020년 연말부터 현실화하고 있다. 최근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은 글로벌 수주를 연일 공시하고 있다. 삼성중공업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선박 계약 기록을 갈아치우기도 했다. 2020년 진행된 카타르의 대규모 LNG선 슬롯(slot) 예약도 2021년 정식 발주로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다만 정부 발주물량은 2020년에 비해 줄어들 것으로 예상한다.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는 전세계에서 선박 발주가 2021년부터 4년에 걸쳐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한편, 한국 조선업계의 구조조정은 뜻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국조선해양과 대우조선해양의 합병은 유럽의 결합심사가 늦어지면서 지연되고 있으며 주요 중형 조선사의 매각도 진행이 더디다. ━ 수요 회복 철강, 예측 불가 정유 조선과 자동차 업황의 침체에 따라 철강업도 2020년 침체기를 보냈다. 한국철강협회에 따르면 2020년 1~3분기 국내 철강업체의 조강 생산량은 4960만t에 그쳤다. 연간을 기준으로 4년 만에 7000만t을 밑돌 전망이다. 2021년엔 세계 경제 회복세와 맞물려 철강 수요가 회복될 것으로 기대한다. 각국이 경기부양을 위한 인프라 투자를 확대할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세계철강협회는 최근 보고서에서 2021년 철강 수요가 2020년 대비 4.1% 증가한 17억9500만t이 될 것으로 추산한 바 있다. 코로나19 확산 추세가 심각하던 2020년 6월 내놓은 전망치인 17억1700만t보다 상향 조정됐다.다만 중국 등과의 경쟁으로 증가 폭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2020년 생산량이 4.5% 늘어 주요 생산국 가운데 유일하게 증가했다. 이에 맞춰 한국 철강사들은 제품 포트폴리오의 고부가제품 위주 전환, 생산원가 절감 등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의 설비 합리화, 유럽의 철강 탄소 중립 추진 등 선진국은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철강산업의 자발적 구조조정 추진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코로나19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정유업의 업황은 예측이 어려운 상황이다. 기록적인 저유가로 인해 국내 정유 4사는 2020년 5조원 규모의 사상 최대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추산된다. 정유업계의 원유 정제설비 가동률도 계속 떨어지고 있다. 결국 2021년 전망은 코로나19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지느냐에 달렸는데, 수요가 얼마나 회복될지는 미지수다.수요가 회복된다 하더라도 국내외 조세 강화 움직임이란 변수가 남아있다. 최근 발의된 지방세법 개정안에는 유류 정제제품이나 유해 화학물질 취급량에 세금을 부과하는 내용이 담겼다. 미국에서도 바이든 당선인의 선거 공약인 ‘탄소 국경 조정세’가 도입될 수 있다. 국내 정유사들은 재생 에너지 사용 비중이 낮아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분석한다.- 최윤신 기자 choi.yoonshin@joongang.co.kr

2020.12.26 16:18

4분 소요
[‘코로나19 시대 한가위’ 11인의 시선 | 이종우-투자] 30년간 국내 주식 투자 수익률은 채권·부동산에 뒤쳐져

부동산 일반

중후장대 산업 대체할 곳을 찾지 못한다면 박스권 맴돌 수 있어 코로나19 확산 이후 주가가 상승하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여러 일들이 일어났다. 우선 주식관련 책이 잘 팔린다. 1년전에는 주식은 고사하고 경제관련 서적 조차 베스트셀러 10위내에 들어가는 일이 드물었는데 지금은 투자 관련 책이 20위중 8개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아졌다. 유튜브도 케이블 TV도 사정이 비슷하다. 모두 주가가 오르면서 생긴 현상들이다. 외환위기 직후 8개월 사이에 주가가 350% 상승했을 때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사람들의 관심이 쏠린 만큼 과연 주식 투자로 돈을 벌 수 있을지는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990년에 1000만원을 갖고 주식, 채권, 서울지역 아파트에 투자한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주식에 투자한 돈은 지금 2640만원이 돼 있을 것이다. 종목에 따라 다르지만 코스피를 가지고 계산하면 그렇다. 서울지역 아파트에 투자했다면 이제 4170만원이 됐다. 채권을 샀다면 8261만원이다.결과적으로 주식은 다른 어떤 자산보다 지지부진한 성과를 기록했다. 주식의 연 평균 수익률(CAGR)은 2%를 조금 넘을 정도여서 채권의 3분의 1도 되지 않는다.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건 뜻밖에도 채권이다. 1990년대 금리가 두 자리였던 영향이 크지만 금리가 낮았던 지난 10년사이에도 성적이 나쁘지 않다. 채권과 비슷한 수익을 올린 곳은 강남 아파트 밖에 없다. 금리가 낮아 저축에서 투자로 돈이 넘어왔을 거란 생각과 달리 돈은 주식에서 빠져 채권으로 움직였다. 2011년 88조원이었던 주식형 수익증권 잔고가 최근 40조로 줄어든 반면 채권형은 8조3000억원에서 30조원으로 4배 가까이 늘어난 게 대표적인 예다. ━ 높은 금리와 산업구조 때문에 주가 부진 과거의 투자 실적이 미래의 수익률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망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주식 시장은 지난 30년처럼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월등히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지도 못할 것이다. 5년단위로 볼 때 연평균 주식투자 수익률은 금리에 약간의 추가 수익이 더해지는 정도에 그치지 않을까 전망된다. 현재 회사채 수익률이 2%대 후반이니까 주식수익률은 3%대 중반에서 4%대 정도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를 5년으로 환산하면 누적 수익률이 20%에 해당한다.3월에 코로나19가 발생한 후 주가가 저점에서 70% 넘게 올랐기 때문에 ‘5년동안 겨우 20% 밖에 안 돼?’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코로나19 이전 상황을 고려하면 이 숫자가 터무니 없는 게 아니다. 지금부터 5년전인 2015년 9월 코스피는 1960이었다. 지금이 2400정도니까 5년 간 누적 상승률은 22%다. 10년전으로 돌아가면 결과가 더 옹색하다. 2010년 9월 코스피는 1880이었다. 10년간 누적수익률은 28%에 그친다. 코로나19로 주가가 단기에 급등했기 때문에 주식과 부동산이 한없이 큰 이익을 낼 것 같지만 상황이 바뀌면 또 다른 모양이 될 수 있다.긴 투자 기간을 고려하면 주식시장 수익률은 저조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1975년이후 45년동안 코스피가 73에서 2400까지 올랐지만 실제 상승한 기간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코스피는 100을 넘는데 7년 6개월, 1000을 넘는데 16년 5개월이 걸렸고, 2000에서도 현재까지 12년동안 붙잡혀 있는 상태다. 반면 주가가 고점을 뚫고 오르는 이른바 대세 상승 기간은 9년 밖에 되지 않는다.우리 시장이 이렇게 장기간 지지부진했던 건 금리가 높아서다. 과거에는 은행에 예금을 해도 1년에 15% 이상 수익을 얻을 수 있는데 굳이 주식에 투자할 이유가 없었다. 다른 자산에서 주식보다 큰 수익이 난 것도 주식투자를 꺼리게 된 이유다. 대표적인 게 부동산이다. 강남지역 땅값은 개발이 시작된 후 10만배 가까이 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주식에 투자할 필요가 없었다.산업구조도 주가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기업의 채산성이 낮다 보니 주가가 특정 지수대를 통과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종합주가지수 100이 경공업이 우리 경제의 중심일 때 주가가 오를 수 있는 최대치였고, 중화학공업이 중심일 때는 1000을 넘지 못했던 게 대표적인 예이다. 다행히 2007년에 IT산업 발전과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덕분에 중화학공업의 수익성이 높아지면서 코스피가 2000을 넘었지만 그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 향후 주식이 높은 수익을 낼지는 미지수 지금도 우리 경제의 중심 축을 이루고 있는 중후장대산업을 대체할 곳을 찾지 못해 주가가 크게 오르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나스닥 시장이 25년 사이 30배 가까이 오른 건 하이테크 산업에서 세계적인 기업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를 해결하지 못하고 10년째 박스권만을 맴돌고 있다.코로나19 확산 이후 종목별 흐름에서 나타난 특징은 배터리, 바이오 등 성장 산업에 대한 기대가 어떤 때보다 커졌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애플, 테슬라, 아마존 등을 모델로 삼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미국 시장을 끌고 온 건 소프트웨어가 강한 플랫폼 회사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아마존이다. 만일 과거 유통회사가 아마존만큼의 시장 지배력을 가지려 했다면 세계 곳곳에 수없이 많은 백화점을 내야 했을 것이다. 아마존은 이를 서버 증설을 통해 해결했는데 그만큼 한 기업의 세계 시장 지배력이 커진 것이다.우리 기업은 이런 변화를 만들어내기 힘들다. 소프트웨어를 통한 지배는 하드웨어를 통한 지배보다 더 어렵기 때문이다. 선두주자가 구축해 놓은 생태계를 넘는 게 하드웨어보다 더 어렵다. 이런 한계 때문에 국내 소프트웨어 기업의 성공모델은 네이버처럼 자국 시장을 확실히 지배하는 형태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는 국내 제조업체가 세계 시장에서 행사했던 영향력이 과거보다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주가는 경제 상황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할 뿐 지속적인 상승을 기대하기 힘들다.코로나19 이후 주가가 오르면서 주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합당한 이익을 얻으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의 투자 성향이 공격적인지 방어적인지 파악해 본인에게 가장 맞는 투자법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투자는 이성으로 시작하지만 탐욕으로 끝이 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시장은 특히 더하다. 즐거움보다 고통을 줬던 기간이 더 긴 곳이다. 많은 사람이 주식에 몰입해 있을 때 멈춰서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경제 및 주식시장 전문 칼럼니스트로, 오랜 기간 증권사 리서치센터에서 해당 분석 업무를 담당했다. 자본시장이 모두에게 유익한 곳이 될 수 있도록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등 주식분석 기본서를 썼다.

2020.09.20 15:53

4분 소요
[22주기 주목 받는 최종현의 경영 철학] 최종현 25년(CEO 재임 기간) 뿌린 씨앗, 글로벌 SK 열었다

산업 일반

‘총신이 길면 표적에 정확히 꽂힌다’… 뚝심으로 밀어붙인 중장기 사업 결실 맺어 수론(數論)에서 6은 완전수다. 성경에서 하느님은 6일에 걸쳐 세상을 창조했고, 눈의 결정은 정육각형이며, 벌집과 광물은 연속된 정육각기둥의 집합체다. 28 역시 완전수다. 남·녀가 결혼을 많이 하는 나이는 28세, 신생아의 생후 한 달은 28일이다. 완전수는 수학적 가설과 여러 물리·사회 현상을 이해하는 도구로 쓰인다.이에 비해 독립된 개체로서 인간이 생각하는 완전수는 수리·물리 현상과는 무관한 경우가 많다. 개인의 감성·경험·철학·통찰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최태원 SK 회장의 완전수는 22다. 최 회장은 2005년부터 대면 결재나 외부 행사 등 사인을 해야 할 때 숫자 22를 함께 쓴다. 2009년 대한핸드볼협회장에 선출돼 태릉선수촌을 방문했을 때는 등번호 22를 달고 시구하기도 했다.최 회장이 22를 아끼는 이유는 ‘행복(幸福)’ 두 글자의 한자 획수를 합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구성원의 행복과 사회적 가치 창출이란 자신의 뜻과 경영 목표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최 회장의 메시지는 항상 수수께끼 같고 우회적이며 남들이 곱씹게 한다.올해는 최 회장의 부친 고(故) 최종현 SK 회장이 22주기되는 해다. SK를 국내 굴지의 기업으로 키운 최 전 회장은 1998년 8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최 전 회장은 생전 장묘문화를 개선을 주장했고, 실제 자신이 세상을 떠나며 “내 시신은 매장하지 말고, 화장(火葬)하라”고 남겼다. SK그룹은 최 전 회장의 유지에 따라 500억원을 기부해 충청남도 세종시에 종합추모시설 은하수공원을 짓기도 했다.최 전 회장이 죽음의 현세적 의미를 찾은 것과 최 회장의 행복 경영은 의미론적으로 통한다. 부전자전이다. 두 사람 모두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행복(行福)을 추구하는 행동은 일견 불자(佛子)스럽다.22는 최 회장의 현세와 최 전 회장의 사후가 교차하는 숫자지만, 이를 매개로 최 전 회장의 업적과 발자취, 경영 철학 등을 되짚어 봤다. 최 전 회장이 생전 뿌린 사업적 씨앗을 추도(追道)하는 것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서다.SK가 애플이라면 고 최종건 회장은 스티브 잡스에, 그의 동생 최종현 전 회장은 팀 쿡에 빗댈 수 있다. 최종건 전 회장이 잡스처럼 창업자로서 기업의 초석을 다지고 비전을 제시했다면, 최종현 전 회장은 쿡처럼 기업을 확장하는 역할을 맡았다. 혁신가 잡스가 최고경영자(CEO)를 맡았던 2011년 애플의 주가는 50달러, 연 매출은 1080억 달러(2011 회계연도)였다. 관리형 CEO인 쿡이 이끌고 있는 애플의 주가는 500달러까지 치솟아 시가총액은 2조 달러로 불어났으며, 연 매출은 2602억 달러(2019 회계연도)에 달한다.경영성과는 거시경제 여건과 시장상황 등 복합 변수가 상호작용을 일으킨 결과물이기 때문에 숫자만 놓고 CEO의 역량을 재단하거나 우열을 따질 수는 없다. 하지만 애플의 경우처럼 기업의 성장 경로마다 적합한 CEO가 중요하며, 시의적절한 리더십이 기업의 성쇠를 가른다. ━ “유학 안 가도 돼” 부친 함께 설득한 동생 최종현 전 회장은 1960~70년대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기에 SK를 체계적으로 성장시킨 관리형 CEO다. 그러면서 남다른 통찰력으로 2020년 SK의 미래 먹거리의 초석을 닦기도 했다. 1세대 창업자 중 흔치 않은 해외 유학파다. 위스콘신대에서 화학(학사), 시카고대에서 경제학(석사)을 전공했다.최 전 회장이 선경의 경영 일선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962년 10월이다. 미국에 체류 중이던 최 전 회장은 아버지 최학배 대성상회 대표의 사망으로 10년 만에 급거 귀국했다. 늦은 귀국으로 부친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최 전 회장은 한국에 돌아온 지 하루 만에 부사장 직함을 달고 선경직물에 출근을 시작했다.경영에 참여하게 된 최 전 회장은 회사 경영 현대화 등 시스템 개혁부터 나섰다. 당시 선경직물은 여느 국내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며 임직원 급여가 밀리기도 했다. 최 전 회장은 인사관리와 급여체계·구매·판매 등 경영관리 부문을 전면 개편하며 시스템으로 일하는 회사를 만들었다.1965년에는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리는 손길승 명예회장을 신입사원으로 채용하는 등 직접 인재 관리까지 나섰다. 손 명예회장은 최 전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 6년간 SK그룹의 총수를 맡은 샐러리맨의 신화다. 정유화학·이동통신 등 SK의 핵심 사업을 현재 반열까지 올려놓으며, 최 전 회장이 유일하게 파트너로 인정하는 인물이다.최종건 전 회장은 최 전 회장의 혁신 행보를 전폭 지원했다. 자신과 달리 어린 시절부터 진지하고 과묵하며 배려심 깊은 동생을 유독 아꼈다. 최종건 전 회장의 창업자금 마련 일화는 두 형제의 우애를 잘 보여준다.최종건 전 회장은 6.25 전쟁이 끝나자 사업에 반대하는 부친으로부터 선경직물 불하자금 200만원 빌리려 온갖 애를 썼다. 최종건 전 회장은 6.25 여파로 망가진 선경의 직물기계를 모두 자기 손으로 수리하며 회사에 공을 들였다. 이 고비만 넘으면 사업이 성공하리라 확신했다.그러나 부친은 “가산을 함부로 쓸 수 없다”며 완강히 맞섰다. 이 모습을 본 최종현 전 회장은 “저는 유학을 가지 않아도 좋으니 형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부친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당시 최종현 전 회장은 학업 성적이 뛰어나 별도로 과외를 받았고, 일찌감치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 형님의 유언 “종현이를 도와 석유 사업을 해라” 그런 최종현 전 회장이 학업까지 포기하겠다고 하자 부친도 결국 손을 들고 최종건 전 회장에게 200만원을 빌려주게 됐다. 선경직물의 마중물이 된 돈이다. 이후 최종건 전 회장은 사업을 하며 아무리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아우의 유학 경비에는 일절 손대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격동의 1960~70년대, 선경직물도 수차례 위기와 기회를 맞이한다. 최종현 전 회장이 부사장에 취임한 1962년부터 1971년은 제1·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행되던 때다. 1950년대 물세탁 없이 재단이 가능한 ‘닭표’ 인조견으로 시장을 휩쓴 선경직물은 1960년대 들어 원자재부터 완제품까지 섬유의 수직 계열화에 나섰다. 이를 위해 1966년 선경 5개년 사업계획을 수립해 원사사업 진출 계획을 밝히고, 폴리에스터 원사 생산의 교두보로써 아세테이트 원사공장을 세우기로 했다.1962년 4월 8일에는 최초로 수출 실적을 올렸는데, 해외 바이어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선경’의 영문 이니셜을 따 브랜드로 사용했다. ‘SK’란 이름의 첫 등장이다. 이후 1970년대 말까지 해외섬유의 인수·확장, 울산직물·선산섬유 설립, 스카이론(SKYRON) 브랜드의 탄생, 아세테이트·폴리에스터 생산, 선경화섬·선경합섬 설립 등 혁명적 변화를 맞았다.그러던 중 선경직물은 1973년 변곡점을 맞는다. 1972년 정부가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서 중화학공업 집중 육성을 발표하면서 섬유가 지원 산업에서 빠진 것이다. 최종건 전 회장은 이전부터 정유·화학 분야에 뛰어들어 원유조달부터 정제, 추출, 섬유 제작까지 수직계열화 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임종철 전 서울대 교수(경제학)의 저서 를 보면 한국의 화학섬유공업은 1959년 미진화학이 하루 2t 규모의 폴리비닐알코올(PVA) 공장을 건설한 것을 시작으로 수요가 급증하며, 1969년에는 하루 128.5t 규모로 커졌다.이에 최종건 전 회장도 정유공장을 짓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1973년 경상남도 울주군 온산읍 일대에 15만 배럴 규모의 정유공장 설립을 추진했다. 미국에서 폐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고도 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등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1973년 10월 1차 석유파동이 터지며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며 끝내 좌절하고 말았다. 최 전 회장도 그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11월 48세의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유언은 간명했다. “종현이를 도와 석유 사업을 해라.”최종현 전 회장은 바로 선경합섬의 대표로 취임했다. 최 전 회장은 회사가 자유롭게 수출입을 할 수 있어야 사업을 확장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종합무역상사로 발돋움을 시작했다. 정유·화학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종합상사 역량의 향상은 불가피했다.최 전 회장은 1975년 신년사를 통해 “선경이 국제적 차원의 기업으로 부각하기 위해 두 가지를 당부한다”며 “석유로부터 섬유에 이르는 산업의 완전 계열화 확립을 위해 석유화학공업 진출, 석유정제사업 성취가 그것이다. 또 수억 달러에 달하는 자본력과 고도의 전문지식에 더불어 국제적 기업으로 손색없는 경영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당부했다.마침 정부는 1975년 종합 무역상사 육성 방안을 발표하고 원자재 수입 요건 완화, 수출금융 지원, 외국환은행 다수 거래 허용, 외환자금 보유 허용 등의 지원책을 내놨다. 다만 자본금 10억원, 수출 연 5000만 달러 이상, 해외지사 10개 이상 등 선정 요건이 까다로웠다. 삼성물산·대우실업·한일합섬·국제화학·쌍용 등 5개 회사만이 이 조건에 부합했다.최 전 회장은 이 조건을 맞추기 위해 1976년 사명을 선경직물에서 선경으로 바꾸는 한편 선경기계·크로바상사를 인수하고, 선경식품·선경금속·선경반도체·선경건설 등을 설립했다. 이런 확장은 선경이 70~80년대 그룹으로 거듭나는 밑거름이 됐지만, 단기적으로 재무상황이 나빠졌다. 선경의 부채비율은 1979년 938%, 1980년 1507%로 불어났다. ━ 소재·섬유 수직계열화 노리고 석유사업 진출 그럼에도 최 전 회장은 정유·화학 회사로의 비전을 놓지 않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에 연구 지원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일본이 한국의 정유·화학 산업 발전을 경계하며 기술 이전에 미온적이었고, 최 전 회장은 빚을 내서라도 자체 기술을 개발한다는 뜻을 밀어붙였다. 그 결과 폴리에스터필름 개발에 성공했고, 곧바로 공장을 지어 상용화에 나섰다.정부와 여론도 선경의 독자기술 개발을 높게 평가했다. 이런 우호적 환경 조성은 선경이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하는 자양분이 됐다.미국 걸프는 1980년 석유공사 보유 지분 50%를 전량 양도하고 철수키로 했고, 정부는 곧바로 석유공사의 민영화를 추진했다. 정부가 밝힌 석유공사 최대주주의 조건은 원유확보 능력, 자금조달 능력, 산유국 투자유치 및 교섭 능력, 경영관리 능력, 성실성 등이다. 두 차례 석유파동을 겪었던 정부가 산유국과의 관계를 최우선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다.당시 국내엔 강대한 석유패권국과 협상자리를 만들기는커녕 친분을 가진 회사조차 드물었다. 그럼에도 국내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석유공사는 포기하기엔 너무나도 매력적인 매물이었다.신뢰는 비즈니스의 모든 것을 좌우하며, 쌓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특히 사업의 중장기적 안정성이 요구되는 장치 산업은 더더욱 그렇다. 정부가 내놓은 산유국 투자 및 원유 조달 능력은 벼락치기로 얻을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국내에서 산유국과 깊은 신뢰 관계를 쌓은 회사는 선경이 거의 유일했다.최종현 전 회장은 정유공장 설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남다른 친분을 맺었다. 최 전 회장과 사우디의 친분이 빛을 발한 것은 1차 석유파동이 일어난 1973년이다. 당시 사우디가 주축인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한국을 석유 금수국으로 분류해 10개월 안에 모든 수출을 중단하겠다고 통보했다.이에 정부는 최 전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최 전 회장은 비공식 정부사절로 사우디를 방문해 석유공급 재개의 물꼬를 텄다. 또 1975년에는 사우디 국영화학공사(NCI)가 추진하는 플라스틱 공장 건설계획에 10%를 투자키로 했고, 무역상사 출범 뒤에는 수출대금 일부를 사우디 왕가 대리인에 수수료로 지급했다.1976년에는 사우디 왕족을 국내에 초청하는 등 친분을 이어갔다. OPEC의 ‘황제’ 격인 야마니 사우디 석유상은 1977년 최 전 회장을 초청해 “한국이 필요한 만큼 원유를 증량 공급하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선경과 사우디 국영석유광물공사는 장기 원유공급 계약을 맺고, 1980년 하루 5만배럴, 1981년 하루 7만 배럴, 1982년 하루 10만 배럴을 공급하기로 하는 등 양측의 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 정유·화학사업 진출로 제약·반도체 교두보 마련 당시 석유 조달에 불안감을 느낀 정부로서는 선경이 석유공사 인수의 최고 후보였던 셈이다. 석유사업 진출의 꿈을 품고 있던 최 전 회장은 석유공사 인수를 염두에 두고 일찌감치 알 사우디 은행으로부터 1억 달러의 차관을 끌어왔다. 결과적으로 당시 재계 10위권이었던 선경은 1980년 11월 29일 석유공사 인수에 성공했고, 순식간에 재계 순위 5위로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석유에서 섬유로 이어지는 수직계열화의 꿈을 이룬 순간이다.석유는 모든 산업의 근간이며, 대부분 소재·부품의 어머니다. 석유공사를 인수한 선경은 사업을 폭넓게 확장할 교두보를 마련했다. 바이오·반도체 등 첨단 기업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SK의 현재 모습은 최 전 회장이 큰 그림을 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최 전 회장은 에너지·화학의 뒤를 이을 사업으로 제약·바이오를 꼽고 1993년 대덕연구단지에 연구팀을 꾸려 제약사업에 첫 발을 내밀었다. 또 미국 뉴저지에 연구소를 세우며 바이오 역량 강화에 나섰다. 뉴저지는 푸르덴셜 등 대형 보험사, 존슨앤드존슨과 같은 화학회사, 아마린 같은 대형 제약사가 밀집한 지역이다.신소재·정밀화학 회사인 SK케미칼이 헬스케어·의약품 등 생명과학 부문으로 영역을 확장한 것도 최 전 회장의 노력에서 비롯됐다. 최 전 회장이 끈기 있게 폴리에스터필름개발에 성공했듯, 바통을 이어받은 최태원 회장도 독자기술 확보를 위해 매년 제약·바이오에 투자를 늘리고 있다.SK바이오팜이 지난해 11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독자개발 뇌전증 치료제 신약 승인을 받아 5월부터 미국 시판에 나서는 등 꾸준한 투자의 결과가 나오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의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의 투자를 받은 SK바이오사이언스는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나서며 글로벌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현재 SK그룹 매출에서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반도체 역시 최종현 전 회장이 밑그림을 갖고 추진한 분야다. 그는 반도체가 폴리에스테르처럼 산업의 쌀로서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판단했다. 반도체 사업을 육성함으로써 글로벌 기업의 기반을 닦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해 1978년 선경의 자사회로 선경반도체를 설립했다. 당시 상공부가 중점지원 전자업체로 지정할 만큼 성장성이 있었다. 그러나 오일쇼크 등으로 회사의 경영 악화가 가중되며 2년 만에 사업을 접어야 했다.선대 회장이 놓친 반도체 사업을 최태원 회장이 2011년 하이닉스를 인수하며 31년 만에 다시 일으켰다. SK가 하이닉스를 인수하면 막대한 투자 때문에 ‘승자의 저주’ 우려가 컸지만 최 회장은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 SK하이닉스는 25조3000억원(2019년 기준)의 매출을 올리는 SK그룹의 캐시카우로 성장했다. ━ ‘밀어주기 논란’에 제2이동통신 울분 삼키며 포기 최 전 회장이 일으킨 사업의 또 다른 축은 이동통신 사업이다. 1990년 정부가 통신산업 구조조정 계획을 밝히며 제2이동통신사 선정에 나섰다. 1992년 사업 공고를 냈고 선경과 포항제철·코오롱·동양·쌍용·동부 등이 참가했다. 당시 전화기 제조업과 서비스업을 겸하지 못하게 한 전기통신사업법 때문에 삼성전자·LG전자·현대전자 등 대기업들은 배제됐다.선경은 미주 경영기획실 내에 텔레커뮤니케이션팀을 마련해 1984년부터 통신사업 진출을 준비했다. 재무·기술 등을 기준으로 한 1차 심사 결과 선경(대한텔레콤)이 8388점으로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7496점을 얻은 코오롱, 3위는 7099점의 포항제철이었다. 사업계획 및 이행 평가 등을 중심으로 한 2차 심사 결과에서도 선경이 1위를 차지했다.그러나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돈 관계인 최 전 회장의 선경을 밀어준 것 아니냐는 특혜 논란이 일었다. 이에 강력한 대선주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거세게 압박했고, 결국 최 전 회장은 사업권을 정부에 반납했다.특혜 여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코오롱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겹사돈, 포스코는 민정당 총재를 맡았던 박태준 전 회장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어느 회사가 사업권을 받았든 특혜 논란이 일수밖에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제2이동통신 선정 당시 실무 책임자였던 석호익 동북아공동체ICT포럼 회장(전 KT 부회장)은 “어떤 외압도 없었다. 여러 불공정 논란이 발생할 수 있어 객관적 평가에 신중을 기했다”며 “건전하고 규모가 큰 기업들을 주요주주로 참여시킨 선경이 사업 전개 방향·재무상황 등에서 압도적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설명했다.그러나 1992년 8월 27일 당시 손길승 대한텔레콤 사장은 “합법적이고 공정하게 평가해 사업자로 선정됐으나, 국민통합에 기여한다는 취지에서 사업권 반납한다.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문제를 다음 정부로 이양한다”고 발표했다.다음 정부에서 실력으로 객관적 평가를 받겠다는 것이다. 실제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 정부는 제1이동통신사인 한국이동통신을 매물로 내놨고, 선경은 입찰에 참여했다. 선경이 한국이동통신 인수전에 뛰어들자 8만원대이던 주가가 30만원대까지 치솟았다. 결국 선경은 한국이동통신 주식 23%를 4271억원에 사들여 경영권을 확보했다. 제2이동통신 사업권 600억원보다 7배 비싼 비용을 치르고 통신사업에 진입한 것이다.선경 내부적으로 고가 인수 논란이 일자 최 전 회장은 “통신사업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나. 회사 가치는 앞으로 더 키우면 된다”고 일축했다. 이후 선경은 한국이동통신 사명을 SK텔레콤으로 바꾸는 한편 ‘스피드 011’을 슬로건을 내건 CDMA 사업에 성공해 국내 1위 통신사로 자리잡았다. 2002년에는 신세기이동통신을 인수했다.당시 SK텔레콤은 가입료와 보증금이 비싼 데 비해 개인휴대통신(PCS) 사업자들은 저렴한 요금제로 가입자를 빠르게 확보했다. 이에 SK텔레콤은 TTL 등 마케팅과 다양한 할인 요금제 등을 내세워 시장지배력을 지켰다. SK텔레콤은 현재 이동통신 사업을 근간에 두고 모빌리티·인공지능(AI)·사물인터넷(IoT) 등 첨단사업으로 확장하고 있다.최 전 회장은 양복 안감을 만들던 선경직물을 SK를 국내 시가총액 2위의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냈다. 1975년 연 매출 751억원, 종업원 8200명인 회사는 그가 세상을 떠난 1998년엔 연 매출 37조원, 종업원 2만1300명으로 성장했다. 이를 최태원 회장이 취임해 SK 매출규모를 4.4배 많은 161조원 수준으로 키웠다. SK의 그룹 전체 시가총액은 133조원(8월 21일 기준)에 달한다. ━ 최태원 회장 취임 후 매출 500배 증가 1980년 석유공사 인수와 1994년 한국이동통신 진출 등 최종현 전 회장이 뿌린 씨앗은 SK가 현재 바이오·헬스케어·반도체·정보통신기술(ICT) 기업으로 거듭나는 발판 역할을 했다. 그는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폐암 투병 중에 산소호흡기를 꽂은 상태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아가 “한국경제는 비상사태를 선포할 만큼 심각하다”고 고언할 정도로 국가 경제에도 애정이 깊었다.SK 관계자는 “최종현 전 회장은 기업 경영은 물론 국가적 인재육성에 열정을 바쳤다”며 “그의 경영철학과 유산은 SK의 핵심 경영화두인 사회적가치 경영으로 계승, 발전되고 있다”고 설명했다.최 전 회장은 당장 눈앞에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급급하기보다 10년, 20년을 내다보고 SK의 탑을 쌓았다. 최 전 회장의 족적은 국제 정세의 격변과 거대한 산업 전환 등 커다란 숙제를 받든 경영자들에게 중장기 가치를 두고 사업에 임할 것을 당부한다. 총신이 길면 총알은 흔들리지 않고, 표적에 정확히 꽂힌다. 대내외 환경과 기술의 변화, 시민들의 가치 변동 등 경영 환경의 변화를 감지하며 체계적 접근과 과감한 경영 판단이 필요한 때다. ━ SK의 이통사업 진출 특혜논란 관련 입 연 당시 실무총괄 석호익 회장 “한 치도 문제없어, 선경이 대부분 평가항목서 압도적 1위” SK텔레콤과 관련해 늘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최종현 전 SK 회장이 사돈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특혜를 받아 1992년 제2이동통신 시장에 진출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실제 SK텔레콤이 통신사업에 진입한 것은 그 다음 정부인 김영삼 대통령 때다. 1994년 제1이동통신 사업자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면서다.그럼에도 SK가 노 전 대통령의 호혜를 입어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했다는 믿음은 최태원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결혼이 만든 ‘맥락적 해석’이다. 한국은 고맥락 사회라 서로 탁하면 척하고 알아차리는 게 미덕이지만, 때로는 맥락을 잘못 파악해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이에 1992년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의 실무 총괄이었던 석호익 동북아공동체ICT포럼 회장을 만나 당시 상황을 상세히 들었다. 석 회장은 행정고시 21회로 1977년부터 체신부·정보통신부 요직을 거친 관료 출신으로,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원장·KT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당시 선경(대한텔레콤)을 선정한 이유는 뭔가.처음 서류를 받았을 때부터 선경이 될 거라 생각했다. 돈을 많이 들였고, 준비도 철저히 잘했다. 당시 대주주·주요주주를 나눠 재무건전성 평가를 했는데, 은행과 해외 기업들이 주요주주로 참여해 점수가 크게 올랐다.정치적 고려나 청와대의 압력은 없었나.당시 송언종 체신부장관이 노 전 대통령에게 ‘사돈 관계인데 문제가 없겠느냐’고 물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제2이동통신 신청 사업자 모두 청와대·민주자유당과 관계가 깊어 어느 곳이 되더라도 말이 많을 것’이라 했다. 청와대의 별도 지시나 압력은 없었다.심사 평가 기준은 어떻게 정했나.내가 실무 총괄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연구원, 안진회계법인 대표 등 총 7명이 만들었다. 재무·투자·안전성·기술력 등을 고루 따졌다. 사전에 사업자 선정과 허가신청 요령을 공개했는데, 선경은 모든 항목에서 뭐든 들어맞았다.김영삼 정부 때 비판하는 목소리는 없었나.취임 첫 해 체신의 날 대통령 말씀자료에 ‘전 정부의 제2이동통신 사업자는 엉터리며 왜곡됐으니 앞으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추진하겠다’는 메시지가 쓰였다. 체신부 상관과 청와대 수석을 찾아가 이 문장을 삭제해 줄 것을 직접 요구했다. 정치적 해석은 다를 수 있지만 법률·행정적으로 한 치의 문제도 없었다.-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2020.08.26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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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도 달라지는 한국 증시] 네 번째 대세 상승기 주가 3000시대 열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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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구조 변화, 기업 이익 증가로 시동...급등·정체 반복하는 ‘이머징 마켓형’ 장세 벗어날 계기 기대 지난해 12월부터 코스피 지수가 오름세를 이어가고 있다. 과거 대세 상승 때 중요한 ‘마디’를 넘어간 것처럼 이번에는 주가 3000선을 넘을 수 있을까? 증시의 발목을 잡았던 중후장대형 산업이 구조적 침체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반도체 등의 선전에 힘입어 기업 이익도 늘고 있다. 산업과 기업의 구조조정을 거쳐 주식시장의 토대가 탄탄해졌다는 평가다. 선진국의 급격한 금리 인상, 북핵 사태 악화 등의 돌발 변수가 없다면 코스피 지수 3000은 도달 가능한 고지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1975년 종합주가지수가 처음 발표됐다. 그로부터 42년 10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 주가가 추세적으로 오른 기간은 11년 5개월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31년 5개월은 주가가 횡보하거나, 하락하거나 또는 떨어졌다 회복하는 과정이었다. 주가가 고점을 경신하면서 오르는 이른바 ‘대세 상승’이 전체 기간의 26% 밖에 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렇게 보면 지금 주식시장에서는 보기 드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게 된다. 대세 상승이 진행되고 있으니 말이다. ━ 첫 대세 상승은 1975년 경공업→중공업 과정에서 1975년 9월에 종합주가지수가 만들어지고 첫 대세 상승이 시작됐다. 종합주가지수 이전에 다우식으로 지수를 산정하던 때도 대세 상승이 있었겠지만 시장의 규모가 너무 작아 분석에서 제외했다. 당시는 중동 특수에 따른 건설업 호황이 호재였다. 1978년 6월까지 2년 9개월 동안 상승이 이어졌다. 73.5에서 151.9까지 올라 상승률이 100%를 넘었다. 1975년 주가 상승은 한국의 산업구조가 섬유 중심의 경공업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동력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건설업이었다. 1차 석유 파동으로 유가가 상승해 중동 건설 붐이 일면서 주요 산업으로 자리잡았다. 중동에서 유입된 달러로 사상 최초로 경상수지 흑자 기록했다. 주식시장 역시 건설업 중심으로 재편됐다. 다른 하나는 중화학공업이었다. 정부가 1981년까지 중화학공업 비중을 51%로 늘릴 목표로 공업구조 고도화 작업에 착수하면서 중화학공업에 투자가 늘었다. 이에 따라 철강·기계·조선·화학·전자 등이 전략 산업으로 선정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1975년의 대세 상승은 경제나 산업구조 변화를 반영했다는 점에서 토대가 괜찮았지만 파급력이 크지는 않았다. 당시 국내 주식시장의 규모가 너무 작아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두 번째 대세 상승은 1985년 말 시작해 1989년 4월에 끝났다. 종합주가지수가 150에서 1000까지 올랐고 주식시장 규모도 커졌다. 당시는 중화학공업이 우리나라의 핵심 산업으로 자리잡는 때였다. 1970년대 초 중화학공업에 대한 투자가 시작됐지만, 중복 투자와 낮은 기술력으로 1980년대 중반까지 별다른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1980년대 들어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중화학공업 조정에 나서면서 중복 기업을 정리하는 산업합리화 과정이 시작됐다. 이에 따라 경쟁이 제한되면서 참가 기업이 수익성을 보장받는 긍정적 효과가 발생했다. 여기에 경기 호전이 더해졌다. 1985년 중반 3저(低) 호황이 시작됐고, 글로벌 수요가 증가하면서 우리 중화학공업 기업들이 이익을 내기 시작했다. ━ 경제·산업구조 바뀌는 토대에서 대세 상승 이뤄져 대세 상승이 시작되기 직전인 1983년만 해도 주식시장은 극도의 저평가 상태에 있었다. 주가수익비율(PER)이 3~4배 수준에 그칠 정도였다. 2차 오일쇼크가 1980년 말에 마무리된 후 기업 이익이 증가했지만 주가가 4년 가까이 반응을 하지 않은 결과였다. 3저 호황으로 경기가 좋아지고 기업 이익이 늘어나면서 낮은 주가가 관심을 끌기 시작해 시장이 빠르게 상승했다. 1985년 대세 상승은 우리나라 산업구조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중심이 옮겨온 후 해당 산업의 수익이 늘어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거시경제적으로도 대외 흑자가 크게 늘어나 국내 유동성이 커지는 등 경기·산업·유동성이 모두 양호했다.세 번째 대세 상승은 2003년에 시작해 2007년에 마무리됐다. 종합주가지수가 520에서 2000까지 상승해 상당히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2003년의 대세 상승은 이전의 대세 상승과 성격이 달랐다. 이전에는 주로 경제와 산업구조 변화가 동력이었던 것과 달리 2003년의 대세 상승은 기업 단위 변화가 핵심 동인이었다. 1999년부터 이익이 본격적으로 늘어났지만, 주가는 이보다 4년이 늦은 2003년에야 비로소 오르기 시작했다. 외환위기라는 큰 변화를 겪어 투자자들이 조심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확인 과정을 거쳐 기업 이익이 추세적으로 증가한다는 확신이 선 후부터 주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업면에서는 IT의 역할이 컸다. 저가 상품 위주였던 국내 IT산업의 제품군이 부품과 소프트웨어로 옮아가면서 수익성 높은 형태로 탈바꿈했다. 기업도 마찬가지였다. 외환위기 이후 진행된 구조조정으로 수익성이 좋아졌다. 거시적인 변화도 있었다. 중국이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이후 우리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기 시작해, 결국 미국을 제치고 제1의 무역 상대국이 됐다. 수출이 성장의 절반을 차지하는 우리 경제 입장에서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 미국도 다우지수 1000 부근에서 비슷한 경험 세 번의 경우에서 본 것처럼 대세 상승은 대개 경제나 산업구조가 바뀌는 토대 위에서 진행된다. 새로운 산업이 등장할 때, 그리고 시간이 지나 해당 산업에서 실제로 수익이 발생할 때처럼 구조적 변화가 일어날 때 이를 반영해 주가가 상승한다. 그리고 상승은 100, 1000, 2000 같이 마디 숫자를 넘는 수준까지 이어졌다.선진국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다. 1965년 미국의 다우지수가 처음 1000선에 접근했다. 수 차례 상승 시도에도 좀처럼 1000을 넘지 못하다가, 1982년이 되어서야 1000을 뚫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무려 17년에 걸친 장기 과정이었다. 주가가 박스권에서 벗어나지 못한 17년 동안 미국 경제는 구조적인 변화를 겪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 경제의 절반을 담당하고 있었다. 모든 산업에서 최고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고, 달러가 기축통화 역할을 시작했다. 당시 미국 경제는 전쟁으로 억제된 수요가 정상화되면서 소비 지출이 늘어나던 때다. 제조업이 번창했고, 이를 토대로 높은 성장률이 이어져 항공이나 전자산업과 같은 새로운 부문에 자본을 공급해 줄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1950년대 번영기를 지난 미국 경제는 1960년대 중반부터 수축기에 들어간다. 첫 번째 대상은 제조업이었다. 일본과 독일의 추격으로 1960년대 중반이 되자 자동차를 비롯한 몇몇 산업에서 미국의 절대적 우위가 사라졌다. 통화도 불안해졌다. 1958년 이후 국제수지 적자가 이어진 결과였다. 1973년 1월에 유럽과 일본 외환시장에서 달러화 투매가 일어났다. 이 때부터 기축 통화로서 달러화의 위상이 약화되기 시작하고, 주식시장도 장기 횡보 상황에 빠졌다.15년 넘게 경쟁력 둔화가 계속되자, 1980년대 초 주택대부 조합 처리를 계기로 경제 전반에 대한 구조조정이 단행됐다. 인수합병과 분사 등 다양한 방법이 기업 구조조정의 도구로 사용됐다. 그 후 미국 기업의 수익성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 힘이 1982년 주가가 장기 박스권에서 벗어나는 동력이었다. 구조조정 이후 미국 주식시장은 다른 나라보다 빠르게 상승했다. 구조조정 기간에는 미국 주식시장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60% 밖에 오르지 못했지만, 구조조정이 끝난 후 8년 간은 다른 나라보다 2.4배나 빠른 상승을 기록했다.앞으로 우리 시장은 어떻게 될까? 대세 상승이 이어질 수 있을까? 과거 대세 상승 때 중요한 ‘마디’를 넘어간 것처럼 이번에는 3000선을 넘을 수 있을까? 지난해 12월부터 종합주가지수가 역사상 네 번째 대세 상승에 들어갔다. 앞선 세 차례 상승처럼 산업과 기업 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반영하는 상승이다. 여러 변화 중 가장 눈에 띄는 게 기업 실적이다. 분기당 영업이익이 37조원 정도에서 50조원에 이르는 수준으로 늘었다. 기업의 이익 증가가 구조적 변화를 통해 이뤄진 만큼 당분간 현재 추세를 이어갈 걸로 전망된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상당수 기업의 이익이 30% 가까이 늘고 있다. 전체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수익구조 개선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수치다. ━ 장기에 걸쳐 꾸준히 상승하는 형태 될 듯 산업구조 변화도 눈에 띈다. 2011년 이후 우리 산업구조에서 가장 큰 문제는 중후장대형 산업의 구조적인 침체였다. 다행히 2015년부터 업종마다 둔화 요인이 약해지면서 이익이 늘어나고 있다. 철강·화학 등 중국 관련 산업은 글로벌 수요에 맞게 공급을 줄였다. 조선업은 업황이 개선되고 있으며, 자동차는 조만간 경쟁력 개선 작업에 나설 걸로 기대되고 있다. 우리 경제가 성숙 단계에 들어간 만큼 과거처럼 새로운 산업을 통해 돌파구를 만들긴 쉽지 않다. 대신 기존 산업의 구조 개편을 통해 여건을 개선하는 작업이 예상된다. 이 부분이 주가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할 것이다.산업과 기업의 구조조정을 통해 주식시장의 토대가 탄탄해졌음을 감안할 때 추가 상승이 어렵지 않아 보인다. 종합주가 지수 3000도 마찬가지다. 이번 상승이 2000 부근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3000은 시작점에서 50% 정도 오른 수치가 된다. 과거에 대세 상승이 시작되면 최소 120%, 최대 650%가량 주가가 올랐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어렵지 않은 목표다. 이익을 감안해도 동일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2007년에 처음 2000에 접근했을 때 분기당 영업이익은 23조원 정도였다. 지금은 50조원 정도다. 이익이 배 이상으로 늘어난 만큼 주가지수 3000은 도달 가능한 목표로 생각된다.다만 상승 형태는 과거와 다를 수 있다. 그동안 우리 시장은 급등과 정체를 반복하면서 계단식으로 움직이는 ‘이머징 마켓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거시변수나 산업구조가 개선되는 동안에는 주가가 급등하지만 그런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 장기간 정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형태였다. 주가가 이런 모양이 된 건 거시경제의 영향 때문이었다. 성장률이 높은 데다 변동성도 커서 주가 역시 요동을 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달리 선진국 경제는 성장률이 낮지만 변동성도 크지 않아 주가가 기업 이익 변화에 좌우됐다. 우리 경제의 진폭이 과거에 비해 줄었고, 선진국처럼 기업의 내적 변화가 미치는 영향이 커진 만큼, 주가는 속도가 느리지만 지속 기간은 긴 선진국형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2017.11.05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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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시 맥짚기] 지금은 4차 대세상승장 … 좀 더 간다

재테크

경제 전 부문에 걸쳐 완연한 회복세 … 주가 패턴 선진국형으로 전환 중 1975년에 종합주가지수가 처음 발표됐다. 이후 42년 5개월이 흘렀는데, 해당 기간 동안 주가가 추세적으로 상승한 기간은 얼마나 될까. 겨우 5년 10개월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36년 7개월은 주가가 횡보하거나, 하락하거나 또는 떨어졌다 회복하는 과정이었다. 주가가 고점을 경신하면서 오르는 이른바 대세 상승이 전체의 15%에 불과했다는 의미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현재 시장에서는 드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 된다. 대세 상승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주가가 추세적으로 오를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경제와 산업 구조가 바뀌었기 때문인데, 첫 번째 상승기인 70년대 중반은 중동 특수에 의한 건설업 호황이 원인이었다. 86~88년 사이 종합주가지수가 150에서 1000까지 오른 두 번째 상승은 한국의 핵심 산업이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넘어오는 과정이었다. 중화학공업에 대한 투자는 70년대 시작됐지만, 중복 투자와 낮은 기술력으로 80년대 중반까지 별다른 수익을 내지 못했다. 3저 호황을 계기로 글로벌 수요가 증가하면서 중화학공업 기업들이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 세 번째는 2003~07년이다. 외환위기 이후 진행된 구조조정으로 기업의 수익구조가 좋아진 게 상승 원인이었다.이번에도 시간이 지나면 전체 상승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가 만들어지겠지만, 아직 그 단계까지 발전하진 못한 것 같다. 일관된 상승 논리가 있느냐 없느냐는 향후 주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논리가 없을 경우 주식시장은 2500선을 넘지 못하고 새로운 박스권을 만드는 데 그칠 것이다. 일시적인 경기 회복과 한 단계 높아진 기업 이익을 반영하는 이상의 주가 상승을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반면 논리가 만들어진다면 2500선 근방에서 한번 조정을 거쳐 지속적인 상승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앞선 세 번의 경우 같이 경제의 근본적 변화에 의해 주식시장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어느 쪽으로 발전할지 단정짓지 못하겠다.큰 그림은 좀 더 시간이 지나야 판단할 수 있지만 단기적인 상승은 여전히 유효하다. 경제 변수 회복과 기업 실적에 대한 기대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 예상을 뛰어 넘는 경기회복세 올 1분기 국내총생산(GDP)이 작년 4분기보다 1.1% 늘어났다. 전년동기보다는 2.9% 증가했는데, 3%대 성장이 눈 앞에 왔다. 수출의 역할이 컸다. 5월 국내 수출액이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13.4% 늘었다. 아직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진 못했지만 상황이 계속 나아지고 있다. 반도체와 대아세안 수출액이 이미 사상 최고액을 넘어섰다.글로벌 교역 확대가 국내 수출 증가를 뒷받침하고 있다. 3월에 전세계 수입액이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12.8% 늘었다. 금액 기준으로 사상 최고치의 91% 수준인데, 앞으로 선진국 경제 상황이 개선될 경우 최고 수입액 경신도 어렵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다른 부문의 회복도 눈에 띈다. 가계 소비심리가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개선되고 있고, 재정확대를 통해 경기안정을 꾀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도 강하다. 3월에 국내 경기가 본격적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올해 중에 경기가 재차 둔화하는 일은 없을 걸로 전망된다. 과거 경기 사이클을 보면 한번 회복이 시작되면 최소 1년 이상 유지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당분간 경기 회복이 주가 상승의 버팀목 역할을 할 걸로 기대된다.국내 기업이 1분기에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거둠에 따라 연간 실적 전망치가 계속 올라가고 있다. 매출액 전망치가 1743조8000억원으로 전년동기 대비 7.8% 증가했으며, 영업이익과 순이익도 각각 32.6%와 42.7% 늘었다. 부담 요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2분기 영업이익이 46조3000억원으로 1분기와 비슷한 수준에 그치고 있는데, 전통적으로 2분기가 실적이 좋지 않았던 때라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이익 증가로 주가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것이다. 과거 종합주가지수와 주가이익배율(PER)의 관계를 보면, 이익이 증가한 후 PER이 뒤따라 오르는 게 대부분이었다. 올 들어 주가가 20% 가까이 상승했음에도, PER은 여전히 낮은 상태에 머물고 있다. 이익 증가율이 주가 상승률을 압도하기 때문인데, 앞으로 또 다른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싶다. 이익이 증가하는 만큼 주가도 올라 저평가가 차차 해소되는 상황 말이다.주가가 석 달 가까이 상승한 후유증으로 조정국면이 올지 모른다는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단기 급등으로 인한 부담이 큰 상태인 건 맞지만, 당장 조정에 들어가기보다 좀 더 오른 후 조정에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된다. 2500선이 조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지점이 될 것 같은데, 이 선은 박스권 상단 2150에 수년간 주가가 머물렀던 지수 폭 350을 더한 지점이다. 지금은 과거 모아놓았던 에너지가 분출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어떤 인위적인 요인으로도 상승을 막기 힘들다.낙폭 과대 대형주가 주도주 역할을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순이익 전망치가 42.1% 증가했다. 과거 상승기에도 주도주가 다른 주식보다 이익 전망치가 빠르게 올라간 게 사실이지만, 지금은 속도가 더 빠른 것 같다. 2003~07년 사이 주도주였던 중국 관련주의 경우 초반 6개월 이익 전망치가 14.1% 증가했다. 2009~11년 주도주였던 자동차와 화학주는 4.2%, 2014~15년의 내수주도 12.4% 상향 조정됐다. 낙폭 과대 대형주의 이익 전망이 유난히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것은 1분기 실적이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높은 이익 전망은 시간이 가면서 하향 조정되겠지만, 조정 폭이 50%에 달한다고 가정하더라도 증가율이 과거보다 월등히 높아 걱정할 게 없다.빠른 이익 증가는 주도주에 대한 평가를 바꾸는 역할을 할 것이다. 낙폭 과대 대형주의 PER이 8.1배 수준에 머물고 있다. 과거 주도주에 비해 낮은데, 중국 관련주의 경우 PER 최고치가 15.3배였고 자동차· 화학은 10배, 내수주는 가장 높아 32.1배 수준이었다.빠른 이익 증가와 낮은 PER을 감안할 때 낙폭 과대 대형주는 주가가 크게 조정에 들어갈 때까지 그 역할을 계속해 나갈 걸로 보인다. 주가가 주춤할 때마다 중소형주와 코스닥 비중을 높이라는 추천이 이어지고 있지만 좋은 전략이 아니다. 주가가 오르는 동안 기존 주도주와 성격이 전혀 다른 주식으로 매수가 옮겨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 대형주의 장세주도 이어질 듯 이번 주가 상승을 계기로 종합주가지수 움직임이 선진국과 같은 형태로 바뀌지 않을까 생각된다. 1980~90년대 미국이나 유럽의 주식시장은 한번에 크게 오르거나 떨어지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작은 폭이지만 꾸준히 올랐는데 주가가 이익을 반영해 움직인 덕분이다. 반면 한국 시장은 급등과 정체를 반복하면서 계단식으로 움직이는 이머징 마켓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였다. 거시변수나 산업구조가 개선되는 동안에는 주가가 급등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 장기간 정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앞으로 상승 요인이 달라지는 만큼 한국 증시도 상승 속도는 느리지만 지속 기간이 긴 형태로 바뀔 것으로 기대된다.선진국 시장은 이머징 마켓보다 예측 가능성이 큰 특징이 있다. 지금은 지난 6년간 쌓였던 이익이 한꺼번에 시장에 반영하는 상황이어서 주가가 생각보다 빠르게 올라가고 있지만, 어떤 단계가 되면 시장이 급등락이 없는 안정적인 형태로 바뀔 것이다. 주가의 형태가 바뀌면 자산 선택도 달라진다. 수익에 대한 예측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주식 투자에 참여하는 사람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2017.06.11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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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을 기억하는 스무 가지 방식(6) 프랑켄슈타인 경제] 박정희가 만든 프랑켄슈타인 대마불사 믿다 끝내 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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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주축된 무분별한 부채·투자로 부실 성장... 3저 호황에 취해 충격에 취약한 경제구조 못 바꿔 ‘프랑켄슈타인 경제’.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1995년 6월 3일자 한국 특집기사 중 한 꼭지의 제목이다. 이 기사는 ‘재벌 체제가 한국 경제의 위험’이라고 경고했다. 기사는 재벌 기업으로의 경제력 집중과 폐해를 지적한 다음 “그러나 재벌을 둘러싼 가장 큰 걱정거리는 경제적 안정에 대한 위협”이라고 진단했다. 또한 “재벌은 막대한 부채를 쌓음으로써 비대해졌는데, 이로 인해 취약해졌다”며 “매출 부진이 닥치면 재벌 그룹들이 부채상환 일정을 맞추지 못하게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재벌 그룹들이 부도가 날 경우 금융시스템이 부실채권에 묻힐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경제성장이 둔해져서 더 많은 부도가 발생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제기했다.프랑켄슈타인 경제를 움직이는 동력이자 위험하게 하는 믿음이 ‘대마불사(大馬不死)’였다. 대마는 바둑에서 많은 점으로 넓게 자리 잡은 말을 가리키고, 대마불사는 대마는 쉽게 죽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마불사는 경제에서는 정부가 대기업을 망하게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였다. 박정희 시대 정부의 지시와 구제에 길들여진 기업은 과중한 부채를 짊어진 무분별한 투자를 주저하지 않았다. 기사는 “투자 프로젝트가 잘못될 경우 구제해준다는 정부의 암묵적인 약속이 확장 성향을 강화했다”고 설명했다. 몸집을 불려놓을수록 잘못될 경우 금융지원 등 정부의 구제를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프랑켄슈타인 경제는 충격에 취약했다. 한국 경제는 대기업 위주로 성장했고, 대기업은 대마불사를 믿고 경쟁적으로 덩치를 키웠다. 외형 성장에 반비례해 대기업의 체력은 떨어졌다. 그 결과 다른 나라는 감기로 넘길 충격을 한국은 폐렴으로 앓기 십상이었다.재벌 시스템 지적한 영국 이코노미스트: 해당 기사는 외환위기를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한국 경제의 가장 큰 위험요소를 정확히 짚었다. 당시 호황에 기고만장하던 한국 경제는 불과 2년 뒤에 안팎의 충격을 맞고 국가부도 지경에 처했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 것이다. 외환위기를 복기하는 일련의 작업에서 이 기사를 참고자료로 검토해야 하는 까닭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의 기사는 그 무렵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의 단선적이고 기계적인 주장이 비중 있게 소개되고 논의된 데 비춰서도 재조명할 가치가 있다. 크루그먼은 1994년 11월 포린어페어스에 기고한 ‘아시아 기적이라는 신화’에서 노동과 자본 등 요소투입 증대에 의존하는 아시아식 성장모델에는 한계가 있으며 기술력이나 생산효율 향상이 없이는 그런 성장을 지속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한국이 아시아 여러 국가에 이어 외환위기에 빠지자 그의 전망이 적중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크루그먼의 분석과 전망은 외환위기 이후 경제 상황 전개에 비춰볼 때, 핵심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아시아의 성장이 구조적인 한계에 봉착해 외환위기에 좌초했다면, 한국과 대만은 이후 기술 혁신과 생산효율 향상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할 짧은 기간엔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과 대만은 위기 이후 곧바로 성장 경로로 복귀했다. 한국 경제는 1999년에 11.3% 성장했다. 이 성장률은 1998년 극심하게 위축된 상태와 비교한 결과이기 때문에 큰 의미를 두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2000년 8.9%, 2001년 4.5%에 이어 2002년 7.4%를 기록했다.크루그먼의 주장이 맞다면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빠른 성장률 회복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 ‘한국 경제는 외환위기 전에는 기술혁신과 생산효율 향상을 하지 못하다가 이후 단기에 두 가지 중 하나 또는 두 가지 모두에서 확실한 성과를 냈고, 그 결과 2000년 이후 높은 경제성장률을 달성하게 됐다.’ 그러나 환란 이후 한국 경제의 단기 회복은 이들 요인 덕분이라기보다는 구조조정과 재정투입에 의해 기업·금융 부문의 부실을 제거한 결과였다.영국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으로 돌아오자. 기사의 제목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프랑켄슈타인 경제’는 통제 불가능하고 위험스러운 재벌이 주축이 된 한국 경제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렇다면 프랑켄슈타인은 누구를 빗댄 말일까.영국 작가 M.W. 셸리가 19세기 초에 쓴 소설 에서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이 아니다(이 이름은 이후엔 괴물을 지칭하는 데에도 쓰이게 됐다). 프랑켄슈타인은 인조인간을 만든 과학자의 이름이다. 비극은 거구의 인조인간이 자신을 추하게 창조한 프랑켄슈타인을 증오하면서 싹튼다. 인조인간은 프랑켄슈타인의 동생을 죽이고 신부마저 살해한다.기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 경제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프랑켄슈타인 같은 역할을 했다고 비유했다. 박 대통령은 수출 대기업을 집중적으로 지원했다. 그 결과 재벌 그룹들은 정부가 통제하지도 못하고 내버려둘 수도 없는 규모로 성장했다. 재벌 그룹들은 또 부도가 나도록 방치될 경우 한국 경제에 미치는 타격이 부담스러울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프랑켄슈타인의 운명: 소설에서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피조물로 인해 파멸에 이르고 만다. 박정희 대통령도, 궁정동에서 저격 되지 않았더라도, 그런 운명을 맞이하게 됐을까? 재벌 그룹의 도미노 부도로 경제가 파탄에 이르러 경제개발의 신화에 큰 손상을 입게 됐을까? 영국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이 그런 파국을 예고했다면, 그 예언은 박정희 사후 15년이 지난 시점에야 적중했다. 따라서 우리는 추가로 다음 의문을 갖고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을 읽어야 한다. 둘째, 한국 경제는 박 대통령이 타계한 1979년 이후 19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프랑켄슈타인적인 구조를 답습하고 있었나? 셋째, 프랑켄슈타인 경제가 짧지 않은 시일이 흐른 뒤인 1997년에 무너진 까닭은 무엇인가? 먼저 이코노미스트는 역사에 가정법을 적용해, 박정희 대통령이 창조한 프랑켄슈타인 경제는 그대로 폭주했을 경우 붕괴됐을 수 있다고 예상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박 대통령이 몇 년 더 살았다면 한국의 경제 기적을 스스로 모두 파괴했을지 모른다”고 봤다.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박정희가 역사로 퇴장하고 나서 경제운영의 기조가 바뀐 덕분이었다고 이 매체는 분석했다. 이 매체는 1980년대 들어 경제정책을 담당한 관료들이 원화 가치를 떨어뜨리고 긴축정책을 단행함으로써 1979년 닥친 제2차 오일쇼크 위기를 넘겼다고 설명했다.3저호황에 위기 유예: 이후 한국 경제는 국제 변수가 유리하게 돌아가면서 이른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3저 호황을 누리게 된다. 저달러·저유가·저금리에 크게 힘입은 1986~88년의 3저 호황은 프랑켄슈타인 경제의 수명을 연장해줬다. 경제 성장률은 3년 동안 11.2%, 12.5%, 11.9%에 달했다. 3저 호황의 가장 큰 계기는 1985년 플라자합의였다. 재정과 무역수지에서 쌍둥이 적자에 시달리던 미국이 주도한 플라자 합의에 따라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에 대한 달러화의 약세가 추진된다. 이 과정에서 원화는 주요국 통화에 비해 덜 절상됐고 이 덕분에 생긴 가격경쟁력으로 한국 수출은 1986년 이후 연평균 30% 이상 급증했다.세계 주요국은 오일쇼크에 대응해 금리를 인하하고 있었다. 한국은 국제금리 하락으로 외채상환 부담이 줄었고 경상수지가 호전됐다. 더욱이 산유국들이 1985년 12월 고정유가제를 폐지하고 산유량을 늘리면서 유가가 하락했다. 유가가 떨어지자 국제수지가 개선됐다.3저 호황이 아니었다면 한국 경제는 1980년대에 외채 위기에 빠졌을지 모른다. 양우진 한신대 교수는 책 에서 “(1970년대에)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며 설비와 원자재 수입 수요가 늘어나 경상수지 적자의 폭이 더욱 커졌었다”며 “결국 1980년대 초반 누적 외채가 급증하여 ‘외채망국론’이 한동안 유행되기도 하였다”고 전했다. 국제수지가 3저 호황으로 대규모 흑자로 돌아서자 외채망국론은 잦아들었다. 외채를 경계하는 마음도 함께 사라졌다. 정부는 재벌의 재무구조 개선을 압박하기 위해 여신관리제도를 1984년 본격 시행했고 시중은행 민영화를 통한 대출심사 기능 강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와 법으로는 재벌의 행동 양태를 변화시킬 수 없었다”고 양 교수는 분석했다. 프랑켄슈타인 경제의 속성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다만 1980년대 성장에서 중화학공업은 외형과 내실을 함께 키웠다. 중화학공업에서 정부는 중복 투자를 조정하는 강제 구조조정을 실시했고, 중소기업과 외국자본이 참여해 분업관계 및 수직적 통합생산체계를 구축했다. 양 교수는 “중화학공업 특히 중공업 가공조립산업에서 조립 부문과 소재 부품 부문간 통합생산체제가 형성된다”며 “이것은 1980년대 초를 지나 중화학공업이 중심이 되어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다시 달성하는 바탕이 되었다”고 평가했다.‘대마불사’에 무모함 결합: 1990년대가 들어서고 김영삼 정부가 1993년에 출범하면서 한국 경제의 프랑켄슈타인적인 속성은 더 악화됐다. 재벌 그룹 경영자들은 실력보다 훨씬 큰 자신감에 사로잡혔다. 대마불사의 믿음에 더해 과도한 자신감에 부푼 그들은 국내외 부채를 무분별하게 동원한 무모한 사업 확장으로 내달렸다. 희망과 의욕에 넘치는 시절이었고 위험을 키우는 시기였다.당시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내놓은 해법은 무엇이었을까. 이코노미스트는 “해법 가운데 하나는 금융시스템을 개혁하는 데 있다”며 “정부가 기업의 투자위험을 감시하는 일을 금융회사에 넘겨, 재벌의 폭주하는 투자계획이 은행에 의해 걸러지도록 하는 것”이라고 제시했다. 이어 “박정희 대통령이 금융시스템을 너무 취약하게 만들어 놓아 현재 금융부문은 그렇게 할 역량이 아직 안 된다”고 평가하고 따라서 “금융시스템 개혁을 포함한 재벌 개혁을 정부가 맡아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금융시스템을 고치는 동시에 금융부문을 통한 재벌 그룹의 재무구조 개선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김영삼 정부의 금융시스템 개혁은 너무 늦게 착수됐다. 게다가 대기업 재무구조 개선은 추진되지 않았다. 당시 한국 경제는 대기업이 주도권을 쥔 시기였다. 박정희의 유산인 대마불사의 프랑켄슈타인 경제는 1997년 한국 경제가 파탄에 이른 뒤에야 종식됐다. 정부의 구제가 아니라 시장 원리에 따른 구조조정이 자리를 잡았다. 생사의 기로를 거쳐 살아남은 대기업은 재무건전성을 최우선적으로 관리하게 됐다. ━ 박정희 정치에 대한 시대착오적 향수 - 환상과 검증 부실이 빚은 박근혜 당선···이번엔 전철 피해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임기에는 물론이고 박정희 정치에 대한 향수에도 마침표를 찍었다.박근혜 전 대통령 지지자 중 일부는 그가 부친으로부터 배운 정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의 리더십은 취임 직후부터 한계를 드러냈다. 그로써 박정희 정치에 대한 일부 시민들의 환상도 차츰 걷히게 됐다. 그의 리더십이 실패한 큰 이유는 정치에 대한 그의 기본적인 생각이 시대착오적이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정치에 대한 그의 관념은 박정희 시대의 것이었다. 민주주의 사회와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관념이었다. 그런 생각을 품고 실행하는 정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통할 수 없었고 알력과 마찰, 불만을 빚을 뿐이었다.정치에 대한 그의 생각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취임사다. 잠시 여기서 ‘원형’이라는 단어를 택한 배경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는 정치 이슈를 놓고 자주 정반대로 말을 바꿨다. 그래서 어느 한자리의 발언으로는 그의 정치관을 짐작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이 된 다음 선거과정의 경쟁에서 벗어나 백지에 국정 구상을 펼쳐놓은 취임사에는 그의 생각이 많이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그는 취임사에서 ‘막중한 시대적 소명’으로 경제부흥, 국민행복, 문화융성을 제시하고 설명했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과정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정치와 관련된 발언을 굳이 찾아보면, ‘정부’와 ‘국민’의 관계에 대해 “저는 깨끗하고 투명하고 유능한 정부”를 만들 테니 “국민 여러분께서도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위해 같이 힘을 모아주실 것을 부탁드린다”고 말한 대목뿐이다.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취임사는 물론이거니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취임사와도 판이한 부분이다. 두 대통령은 정치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정치부터 바뀌어야 한다”며 “당리당략보다 국리민복을 우선하는 정치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대결과 갈등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푸는 정치문화가 자리 잡았으면 한다”며 “저부터 야당과 대화하고 타협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전 대통령은 실용정치를 내걸고 정치권에 “소모적인 정치관행과 과감하게 결별하고 국민의 뜻을 받들고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생산적인 일을 챙겨 하자”고 제안했다. 이를 위해 “여와 야를 넘어 대화의 문을 활짝 열고 국회와 협력하고, 사법부의 뜻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했다.박정희 독재의 경험이 각인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행정부가 민주절차에 의해 의견을 수렴하고 정책을 수립해 입법하고 시행하는 과정이 자리 잡지 않았다고 나는 짐작한다. 그래서 그는 민의를 듣지도 않았고 민의의 대의기구인 국회를 상대로 자신의 생각을 설득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의 정치 리더십이 지지자들의 기대는 물론 일정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은 취임 후 시일이 지나면서 드러났다. 그는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관념이 없었을 뿐더러, 정치 지도자의 기본조건을 어느 하나도 온전히 갖추지 못했다. 정치 지도자의 기본조건은 통찰력과 설득력, 공감능력과 도덕성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이번 대선 후보는 적어도 이 네 가지 기준에서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2017.04.16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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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윤 교수의 ‘중소기업 강국으로 가는 길’(1)] 오락가락 정책에도 중소기업 60년 새 150배 증가

정책이슈

1980년대 ‘보호와 육성’으로 정책 전환... 대·중소 격차 벌어지며 경제민주화의 중심에 경제민주화. 경제와 정치의 이질적인 조합이다. 경제와 정치의 관점은 다르다. 경제는 합리성에, 정치는 권력에 바탕을 둔다. 경제는 효용을 위한 최적 전략이, 정치는 선거를 위한 필승 전략이 필요하다. 경제민주화가 풀리지 않는 이유다. 경제민주화의 주요 대상은 한국 경제의 절대 다수인 중소기업이다. 중소기업 하면 보호, 지원, 열악한 환경, 낮은 임금 등이 떠오른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중소기업은 돌봐야 하는 ‘덤’ 신세가 된다. 한국경제는 성장의 돌파구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중소기업 강국이다. 중소기업이 성장의 돌파구인 이유다. ‘중소기업 강국으로 가는 길’은 ‘왜 중소기업인가’를 찾는 과정이다. 중소기업의 어제를 훑어보며 어떻게 커왔는지를 볼 것이다. 그래야 오늘날 중소기업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중소기업의 내일을 그려보며 어떻게 커가야 하는지를 볼 것이다. 이를 통해 그릇된 관점을 바로잡고, 올바른 방향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한국의 근대화 시작은 강화도조약(1876년)이다. 외국 문물이 유입돼 거래 품목이 다양해졌다. 시장은 커졌고 상사(商社)가 상인(商人)을 대신했다. 상사가 이 땅에 등장한 최초의 중소기업이다. 이후 가내 수공업을 벗어난 공장과 기업이 등장했다. 일제 강점기였지만, 1938년 기업 수는 2273개에 달했다. 아쉽게도 중소기업의 성장은 여기까지였다. 일본은 중·일 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치렀다. 전쟁을 위해 국책회사를 설립하고, 기업을 흡수했다. 한국기업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이 기간 의미 있는 결실은 삼성, 현대, LG가 닻을 내렸다는 점이다.한국전쟁 이후 경제는 딜레마에 빠진다. 부흥과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했다. 피해복구는 절실했지만, 예산은 부족했다. 세율 인상과 통화량 확대가 불가피했다. 물자가 부족한 데 통화량이 증가하니 물가는 치솟았다. 때문에 중소기업의 자금난은 심각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중소기업 육성을 천명한다. 그리고 ‘중소기업육성 대책 요강’을 발표한다. 이 ‘요강’은 가치가 있다. 정부가 처음 만든 중소기업 정책이라는 점, 중소기업 육성을 경제 정책으로 인정한 점, 성장보다 보호의 관점으로 접근한 점이다.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등장한다. 산업화의 시작이다. 당시 재정은 전체 기업을 대상으로 하기에 한계가 있었다. 정부는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분배할 수밖에 없었다. 철저하게 경제의 관점, ‘선택과 집중’으로 접근해야 했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기업에 투자를 집중했다. 당시 대기업은 음식품, 피혁, 고무 등 중소기업 시장에 침투했고, 독과점을 형성했다. 이를 바로잡고자 정부는 ‘중소기업사업조정법’을 제정한다. 이후 13년 동안 사업조정은 한 건도 이뤄지지 않았다. 관심만 있었던 시대상이 보인다.마침내 66년 ‘중소기업기본법’이 제정됐다. 이전만 해도 중소기업은 상대적으로 작은 기업을 의미했다. 이제 중소기업은 처음으로 법적인 이름을 갖게 됐다. 이 결과 2만4112개 중소기업과 152개 대기업이 탄생한다. 73년 정부는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한다. 당시 재정기금의 50% 이상, 제조업 대출자금의 80% 이상을 중화학공업에 집중했다. 중소기업의 자금난은 심해졌다. 그러나 중화학공업화는 중소기업에 기회였다. 대기업과 납품 관계가 구축됐기 때문이다. 중화학공업은 여러 부품이 모여 하나의 최종재가 된다. 이에 정부는 ‘중소기업계열화촉진법’을 제정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수직계열화로 분업체계를 만든다. 즉, 중소기업이 부품(중간재)을 만들어 대기업에 납품하고 대기업은 제품(최종재)을 만들어 수출하는 그런 체계다. 산업화 과정에서 중소기업이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그러나 계열화 구축은 더뎠다. 오히려 대기업이 스스로 계열사를 세우거나 중소기업을 인수했다. 1974~78년 4년 동안 현대는 22개, 삼성은 9개, 대우는 25개, 럭키금성은 26개 계열사가 늘어났다. 여기에 석유파동이 겹쳤다. 대기업은 휘청거렸지만, 중소기업은 곤두박질쳤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가 벌어질 대로 벌어졌다. ━ 산업화의 밑단을 책임진 중소기업 이즈음 등장한 전두환 정부는 정의사회 구현을 내세운다. 대·중소기업 격차를 해소하는 것도 전두환 정부가 내세운 정의 중 하나였다. 중소기업 정책이 쏟아졌다. 그리고 중소기업 정책의 패러다임이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바로 보호와 육성이다. 그동안 중소기업 정책은 미미했지만 경제의 관점이었다. 비로소 중소기업 정책에 정치의 관점이 깊숙이 개입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중소기업을 언급한 것은 다섯 번에 불과했다. (정치적 슬로건에 불과했다는 평을 받지만) 정의를 내세운 대통령이 산업화를 시작한 대통령보다 중소기업에 관심이 많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어찌 됐던 산업화를 시작한 후 한국 경제는 고도 성장을 이뤘다. 대기업, 중화학공업, 수출이라는 전략이 맞아떨어졌다. 여기에 중소기업은 납품하며 분업체계에서 보완 역할에 충실했다. 성장의 몫은 적절히 분배됐다. 대기업의 수출이 증가하면 납품 중소기업의 매출도 늘었다. 중소기업 근로자의 소득도 나아졌다. 이를 소위 ‘낙수효과’라 한다. 이런 구조와 효과는 별 탈 없이 지속한다. 적어도 글로벌 금융위기 전까지 말이다.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중소기업은 양적 팽창을 거듭한다.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떠난 대기업 근로자들이 너도나도 창업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보기술(IT) 산업이 성장하면서 많이 늘어난 벤처기업도 한몫했다. 1999~2003년 중소기업은 32만 개나 증가했다. 이후 중소기업 수는 지속해서 증가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중소기업은 처음으로 300만 개를 돌파한다. 1966년 2만4112개였던 중소기업이 오늘날 354만 5473개가 됐다. 60여 년 사이에 150배가량 증가한 수치이다.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는 다른 문제를 낳았다. 단순히 경제 문제는 아니었다. 위기를 자초한 이들은 ‘1%의 가진 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망하지 않았다. 손해를 본 사람은 ‘99%의 덜 가진 자’였다. 1%를 위한 공적자금은 99%의 세금에서 나왔다. 경제적으로 부당했고, 불평등했다. 99%는 폭발했다. 부당함과 불평등은 사회의 분절로 이어졌다.한국은 다소 양상이 달랐다. 이런 분절이 대기업(1%)과 중소기업(99%)의 갈등으로 불거졌다. 당시 정부가 동반성장을 추진한 배경이다.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동반성장은 경제민주화로 옮겨갔다. 중소기업 정책에 정치의 관점이 강하게 작용했다. 불행히도 경제민주화는 선거용에 그쳤다. 그래서 경제민주화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조만간 19대 대통령 선거가 있다. 경제민주화는 선거의 중심이 될 듯하다. 그래서 중소기업이 아직도 중심에 있다.필자는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다.

2017.02.05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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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 (4) 정인영 한라그룹 창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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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브스코리아가 한국경영사학회(회장 차동옥)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한국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의 네 번째는 정인영 한라그룹 창업회장이다. 7월 20일은 운곡 정인영 회장 추모 10주기이기도 하다. 한라그룹은 정인영 창업주의 기업가정신과 관련한 자료를 제공하며 이번 기획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고난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기업을 다시 세우고 성장시켰던 운곡(雲谷) 정인영(1920~2006)을 흔히 ‘한국 재계의 부도옹(不倒翁)’이라 일컫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운곡은 부와 성공에 집착했던 단순한 경제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운곡은 올곧은 경영철학을 실천한 한국의 프런티어 기업가였다. 최고 경영자로서 갖추어야 할 외국어 구사능력, 리더십과 자질 등 탁월한 창업가의 조건을 갖춘 진실한 기업가였다. 늘 책을 가까이하며 지행합일을 추구했던 인문주의자였고, 신 앞에서 겸손하게 살고자 했던 신앙인이기도 했다. 세월을 뛰어넘어 한국 재계의 거물이 살았던 다이내믹한 인생을 한 번 따라가 보자.정인영(鄭仁永)은 1920년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마을에서 6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이 바로 위 친형이다. 불세출의 기업가를 형으로 두었으니 태생적 환경이 이미 기업가의 삶이었다. 소년시절에는 고향에서 한학(漢學)을 배웠고, 14세에 그의 형 정주영처럼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다. 운곡은 YMCA에서 영어를 공부하며 셰익스피어에 심취했다. ━ 주경야독하던 책벌레의 경영수업 1938년, 운곡은 19세에 뱃삯만 겨우 챙겨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낮에는 신문팔이와 트럭조수로 일했기에 밤늦게야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지독한 책벌레였다고 한다. “틈만 나면 고서점에 들렀고 휴일이면 서점에서 거의 시간을 보냈다. 한 서점에서 오래 머물다 보면 주인의 시선이 따가워 슬그머니 옆 서점으로 옮겨 읽던 책을 찾아 그 다음 페이지를 읽어나가는 징검다리 독서를 했다”고 한다. 사람의 인성은 성장기에 기틀이 잡힌다. 당시 학비를 모으기 위해 우동으로 끼니를 때웠던 경험은 평생의 근검절약과 독서습관으로 이어진다. 세계 굴지의 기업들과 협상하며 공사를 수주하고, 세계 각지를 돌며 비즈니스 활동을 펼치는 데 큰 힘이 되었던 운곡의 영어 실력도 사실상 이 시절에 연마한 기초로부터 시작되었다. 운곡은 아오야마 가쿠인대학(靑山學院大學) 영어과에서 2년 간 공부하다 태평양전쟁 발발의 소용돌이에서 중퇴하고 귀국한다.인생은 계획된 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다. 운곡은 자서전에서 “전쟁이 나를 사업가로 바꿔놓았다”라고 썼다. 1948~1951년 운곡은 동아일보와 대한일보에서 기자로 활약한다. 6.25전쟁 중에는 갈고 닦은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미군통역관으로 일하게 된다. 당시 현대건설을 일으킨 정주영 회장을 도와 미군이 필요로 하는 사업, 예컨대 건설공사는 현대건설에, 물자보관 사업은 현대상운에 연결시켜주면서 기업경영활동에 참여하게 된다.운곡은 형 정주영 회장의 사업에 깊이 관여했다. 1·4후퇴 후 부산 피난시절 때는 현대상운 전무를 맡아 일하게 된다. 1953년에는 현대건설의 전후 복구사업에 차질이 생겨 회사가 어려워지자 정주영 회장의 요청으로 현대건설 부사장을 맡게 된다. 현대건설은 그 후 미군이 발주한 인천 항만공사와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수주하면서 회생의 기틀을 마련했다. 1960년에는 건설업계 순위 1위로 성장하게 된다. ━ 5대양 6대주 넘어 세계로, 현대양행 창업 현장에서 경영수업을 받았으니 독립해서 사업을 벌이겠다는 도전정신이 꿈틀댈 것은 당연하다. 현대건설의 기자재 수출입을 담당할 회사 설립을 구상한 운곡은 1962년 10월 1일 (주)현대양행을 창립한다. 그의 나이 43세 때다. 당시 운곡이 직접 지은 현대양행 사명(社名)은 “5대양 6대주를 넘어 세계로 나아간다”는 진취적인 뜻을 담고 있다.운곡이 창업한 현대양행은 이후 자동차부품을 생산하고, 건설 중장비를 국내 최초로 생산하며, 해외 플랜트설비 턴키 건설 등 중공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한다. 경영학자들은 창업이후 운곡의 경영전략의 특징을 중공업 중심 전략에서 찾는다. 기계장비 산업을 비롯한 중공업을 일으켜 국가에 보답해야 한다는 산업보국주의는 운곡의 경영철학에서 두드러지는 기업가정신이다.운곡의 중공업 전략은 이후 국가경제개발 제 2차 5개년 계획과 맞물려, 경제발전과 중화학 수출산업 강국으로 가는 선봉장으로서 대한민국 국가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현재 세계 1위의 담수화 플랜트 수주를 하고 있는 두산 중공업의 창원기계종합공장은 본래 운곡이 계획하고 구상했던 대규모 종합기계단지였다. 당시 운곡의 인재양성의지로 다양한 해외 연수를 받은 엔지니어들이 현재 창원기계공장의 각 기술 분야별 전문가로 성장해 한국 산업 발전에 원동력이 되고 있다. 운곡이 대한민국 중공업의 개척자로 불리는 이유다.하지만 인생에는 평탄한 신작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운곡은 1980년 신군부의 ‘중화학공업투자조정 조치’로 ‘현대양행과 계열사’를 남에게 넘겨주는 큰 아픔을 겪게 된다. 피땀을 쏟아온 현대양행 창원기계공장을 빼앗겨 사업기반이 통째로 허물어지는 위기를 맞았다.그러나 운곡은 담대했다.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1980년 현대양행 안양공장 상호를 만도기계로 바꾸고 꿈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운곡은 ‘전 세계 1만여 도시로 뻗어나간다는 의미’를 담아 ‘만도(萬都)’라고 했다. 재기의 꿈을 담은 ‘인간은 할 수 있다’는 뜻의 ‘Man do’의 의미도 담았다. 운곡은 평생 희망을 붙들고 살았던 휴머니스트다. 이라는 논문을 썼던 최종태 서울대학교 경영대 명예교수는 특히 이 대목에서 “뜻을 세우면 길이 열린다고 보았던 운곡이야말로 진정한 희망의 신봉자이고 인간적인 낙관주의자”라고 높이 평가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1980년대 들어 국내외 자동차산업의 폭발적인 성장과 더불어 자동차 부품기업인 만도기계와 한라공조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운곡도 그 기회를 타고 재기한다. 80년 그날로부터 11년이 지난 1991년, 한라는 매출액 1조원이 넘는 한국 27위의 그룹으로 성장했다. 제2창업에 가까운 성공이었다. 사람들이 운곡을 ‘재계의 오뚝이’라고 부르게 된 사연이다. 운곡의 기업가정신을 계승한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은 운곡을 이렇게 회고한다. “아버지는 진정한 리더셨다. 사람들이 아버지를 따랐던 것은 아버지가 굳은 신념과 수많은 시련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 철학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얄궂다. 오뚝이처럼 재기한 운곡에게 또 한 번 큰 시련이 찾아온다. 1989년 7월, 운곡이 과로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뇌졸중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정인영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운곡은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하는 책을 많이 읽을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운곡은 아내 김월계 여사의 헌신적인 간호와 초인적인 재활노력에 힘입어 건강을 회복한다. 쓰러진 지 1년도 안돼 경영일선에 복귀하고야 만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할 줄 모르는 운곡은 이제 ‘재계의 부도옹’으로 통하게 된다. 운곡은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뇌졸중이 나의 반신을 마비시킬 수는 있어도 나를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꿈과 의식이 살아 있는 한, 육체적인 시련에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다. 그 후로 10년간 나는 휠체어에 의지한 채 세계를 누비며 쓰러지기 전보다 더 정력적으로 일했다.” 운곡은 1990년대 들어 경제 환경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한라그룹을 글로벌기업으로 도약시켜 나간다. 한라그룹은 1992년 창립 30주년을 ‘국제경쟁력 강화의 해’로 설정, 경영체질의 국제화를 선언했다. 그리고 7월 1일, 운곡은 둘째아들인 정몽원 당시 만도기계 사장을 한라그룹 부회장으로 승진시키고 조선, 중장비 플랜트, 해외건설 등 해외영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그룹 차원의 통합 해외영업본부를 발족한다. 운곡은 당시 휠체어에 의지해 밤낮으로 해외출장을 다녔다. 1994년 205일, 1995년 217일, 1996년 203일을 해외에서 일을 했다. 특히 해외 투자자들, 금융가들과의 협상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국제금융기관들은 운곡의 열정에 반해 “한국이라는 나라를 보고 돈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정인영이란 사업가를 보고 빌려 준다”고 할 만큼 운곡을 신뢰했다. 한라그룹을 글로벌기업으로 성장시킨 운곡은 1996년 12월 24일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명예회장이 된다. 창업 35년 동안 운곡 정인영이 이룬 성과는 대단했다. 한라그룹은 자산 6조 2000억 원, 21개 계열사를 둔 재계 12위로 성장해있었다. 한라그룹 성장사를 연구해온 남명수 인하대학교 교수는 “운곡은 경영자로서 성공적인 기업 활동을 하기 위해 정도경영을 확립했고, 그 위에 속도를 중시하고, 기초를 다지며, 규모를 확장시키는 경영활동을 실행했다”며 “운곡의 이 같은 성공적 기업 활동은 한라그룹의 재무성과로 이어졌고 매출, 자산, 자본 모두 성장하는 결과를 이루었다”고 한라그룹의 성공요인을 분석했다. 운곡은 이처럼 도전정신으로 한국 중공업의 씨앗을 심었고(1962~1979), 오뚝이 정신으로 한라그룹을 일으켜(1980~1996) 정도경영으로 한라의 성장발전 (1996-2006)을 도모했다. 운곡은 한국 중공업 발전의 견인차 역할, 산업보국의 사회적 책임경영을 다한 뒤 일선에서 물러났고 2세 경영의 정몽원 회장 체제가 들어선다. ━ 낙관주의자 운곡의 희망경영 철학 하지만 하늘은 운곡이 편히 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운곡과 한라그룹은 뜻하지 않은 세 번째 시련을 겪게 된다. 1997년 12월 IMF 사태로 한라그룹은 부도를 내고 그룹해체의 위기를 맞았다. 다행히 한라건설(주)은 1999년 경영이 정상화되면서 4000억원 규모의 화의 채무를 모두 갚았지만 알짜기업인 만도기계를 외국계 투자회사에 완전히 넘겨주어야 했다. 한라그룹 재기의 모태가 된 만도기계에 대한 운곡의 애정은 각별했다. 하지만 힘이 부쳤다. 운곡은 2006년 노환으로 영면하고 만다. 7월 20 일이다. 한국경영사학회는 “운곡은 투명한 정도경영, 열정적 도전과 개척정신, 창의적 혁신 등에 기반을 둔 기업가정신과 탁월한 변혁적 리더십으로 한라그룹을 형성하고 성장시켰다.”며 “운곡의 기업가정신은 한라그룹이 걸어온 모든 과정에서 한라의 창업과 성장과정의 뿌리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운곡의 대표적인 기업가정신이 바로 투명한 정도경영이다. 운곡은 정도경영(正道經營)을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신념이자 철학으로 지켰다. 운곡은 모든 면에서 투명한 생활태도를 항상 주장했다. 사업을 하면서 일체의 뇌물, 향응 등을 제공하지 않았고, 공정한 경쟁과 윤리적 경영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1981년 3월 28일 외환관리법 위반이라는 혐의로 운곡 정인영 창업회장이 검찰에 연행되었다가 연행 14일 만에 무혐의로 석방된 사실은 유명하다. 비자금 사건으로 다른 그룹의 총수나 임원들이 수없이 정치자금이나 배임횡령 등의 구설수에 오르고 검찰에 소환될 때조차 그의 이름은 오르내리지 않았다. 기업인으로서 그는 이익창출과 납세의무를 지켰고, 인재육성과 고용창출을 확대하여 사회와 국가에 공헌하는 산업보국의 사회적 책임경영에 충실했다. 운곡을 특징짓는 또다른 기업가정신은 포기를 모르는 불굴의 도전정신이다. 운곡은 “낙관과 긍정이야말로 내 삶의 버팀목이다”라고 말했다. “나도 넘어졌고, 다시 일어섰을 뿐이다”는 그의 발언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쓰러져도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운곡의 도전정신은 그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다. 운곡은 또한 창의적 혁신정신을 보여준 기업가였다. 운곡은 미국 롱아일랜드 대학에 인재양성을 위한 과정을 개설하는 등 한국경영자로서 창의성 개발의 모범을 보였다. 운곡은 또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는데도 앞장섰다. 지금은 일반화된 조선소의 ‘플로팅 도크(Floating Dock)도 운곡의 머리에서 나왔다. 인천조선에서 부지의 한계로 정상적 도크시설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자 운곡은 ‘야드에 레일을 깔고 배를 옆으로 밀어서 바다에 진수시키는’ 플로팅 도크방식을 제안했다. 당시 국내 조선 전문가들까지 모두 불가능하다고 반대했지만 지금은 일반화됐다. 글로벌 경영을 선도한 것 역시 운곡에게서 두드러지는 혁신정신의 사례다. “한라의 고객은 세계다”는 그의 발언은 너무나 유명하다. 운곡은 ‘21세기는 문화가 지배하는 시대’라고 보았다. 그래서 항상 글로벌 문화에 대한 가치관과 규범을 공유하고자 했다. 그의 글로벌 경영과 혁신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쉼 없이 계속되었다. 인생의 황혼기, 평생 일궈온 한라그룹이 산산조각났지만 그래도 운곡은 꿈을 버리지 않았다. 운곡은 늘 “사업하는 사람은 꿈을 갖고 불굴의 신념으로 모든 일을 추진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는 만도기계를 되찾는 꿈을 꾸다 87세에 영면했다. 다행히도 운곡이 믿는 신은 그의 꿈과 기도를 잊지 않았다. 늦었지만 그 꿈은 실현되었다. ━ (주)만도 되찾은 정몽원 회장의 눈물 “드디어 잃어버린 만도를 되찾았습니다. 아버님 이제 편히 잠드세요.” 정몽원 회장이 만도를 되찾은 바로 그 장면이다. 정 회장이 2008년 1월 22일 흩날리는 눈을 맞으며 경기도 양평군 용담리 선친의 묘소를 찾았다. 한라그룹의 주요 임원 20여 명도 동행했다. 정몽원 회장은 2005년부터 만도의 권토중래를 밤낮으로 생각했다. 만도를 한 번도 남의 회사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는 절실함과 간절함으로 사람들을 설득했다. 결국 정 회장은 KCC, 산업은행, 국민연금관리공단(H&Q 사모펀드) 등과 함께 한라건설컨소시엄을 형성해 지분 72.4%를 사들이며 모기업이었던 만도를 다시 인수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만도를 한라의 계열사로 편입했다. 정 회장은 내리는 눈을 맞으며 묘소 앞에 조용히 하얀 국화 한 송이를 헌화했다. “(돌아가신 뒤에)‘저희 형편에 맞게 일단은 건설업을 했다가 만도를 되찾아서 그룹을 키워나가겠습니다. 지켜봐 주시고 보호해 주세요. 힘이 돼 주세요. 그렇게 보고를 했었는데, 이제 만도를 되찾았다는 보고를 드립니다’ 그렇게 아버님께 말씀드리고 났더니 제 눈에 눈물이 글썽했죠… 사실 만도를 되찾기까지는 무엇보다 아버님의 음덕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잠깐 하는 말씀이래도 ‘뭐 도와줄 거 없느냐?’ 면서 지원해주는 우군들이 참 많았어요.” 정몽원 회장이 지난 6월 7일 남명수 교수에게 털어놓은 당시의 감회다. 정몽원 회장이 운곡의 못다 한 꿈을 뒤늦게 이뤘다고 보고하는 그 자리는 아마도 하늘에 있던 운곡이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서정주의 시 )처럼 아들을 다독이고 눈물을 덮어준 포근한 서설(瑞雪)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이룬 한라그룹의 영광을 반드시 재현하겠다고 다짐한 정몽원 회장은 그 약속을 지켰다. 만도는 상장 폐지 10년 만인 2010년 5월 주식을 증권거래소에 다시 상장했다. 2013년 6월에는 세계 100대 자동차 부품업체 가운데 45위에 선정되었다. 한라그룹은 현재 재계 40위권대로 그룹의 중심인 (주)한라홀딩스를 포함해 25개의 계열사를 두고 내실있게 순항하고 있다. 경영 구루 피터 드러커는 “미래는 예상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는 운곡의 철학인 “꿈을 꾸고, 꿈을 믿고, 그 꿈을 실행하라”와 일맥상통한다. 경영사학자들은 운곡이 경영인생을 통해 피터 드러커와 같은 철학을 실행하고 구체화하는 삶을 살았고 이는 한국이 세계 경제를 이끌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는데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남명수 인하대 명예교수는 “운곡의 기업가정신을 연구하는 것은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공업계를 비롯해 향후 한국 기업의 지향점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며 운곡 추모 10주기를 맞아 재조명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 포브스코리아 특별취재팀 ━ 한라그룹 경영진과 임직원의 신뢰경영 결실 맺어 한라그룹은 매년 운곡 정인영 창업회장의 추모일이 다가오면 검소하고 내실 있는 행사를 통해 창업주의 정신을 되새기곤 한다. 2011년 7월 5주기 때는 추모 사진전을 열어 운곡의 기업가정신을 기렸다. 올해 역시 재계의 본보기가 될 만한 인상적인 사례를 남겼다. ㈜한라(구 한라건설)는 지난 6월 9일 이사회를 열고 임직원을 대상으로 보통주 300만주(약 15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실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호응해(주)한라의 대주주인 정몽원 회장도 임직원들의 회사에 대한 신뢰에 공감하고 화답하는 의미에서 개인 보유주식 중 100만 주를 임직원들에게 무상증여하기로 약속했다. 정몽원 회장 임직원에 무상 주식증여한라그룹 박종철 상무는 “글로벌 경기침체에 대응하는 선제적 차원에서 유상증자를 결정하고 임원들이 사업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올해 말이면 재무구조가 개선돼 어느 정도 수치를 보일 것이다’, ‘우리 조직은 앞으로 이런 모습이 될 것이다’ 라고 설명하며 직원들에게 증자 참여 의사를 물었더니 다 하겠다고 나서더라”며 “이에 정몽원 회장께서 보답하는 차원에서 보유하고 있던 주식을 내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상무는 그러면서 “한라그룹은 앞으로도 내실 있는 알찬 경영을 통해 수익성 극대화에 노력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한라그룹의 이 같은 발표는 조선과 철강 등 구조조정 위기를 겪고 있는 중공업계에 귀감이 될 만하다. 운곡이 늘 강조했던 사회책임 경영과 정도경영의 계승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 경영사학계의 평가다.

2016.06.23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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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대기업 DNA, 창업주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 (1) 삼성그룹 - 사업보국과 인재경영으로 ‘초일류 기업’ 우뚝

산업 일반

포브스코리아는 한국경영사학회와 공동으로 ‘한국 10대기업 핵심 DNA, 창업자들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라는 주제의 특집기사를 연재한다. 사업보국과 인재경영의 목표를 안고 도전과 열정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했던 창업 1세대들의 기업가정신을 돌아보고 후대 경영인들에게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기업가정신의 핵심 DNA를 재조명해보는 특별기획이다. 그 첫 번째는 재계 서열 1위 삼성그룹이다. 장면 하나.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일이다. 1971년 1월의 어느 날,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깊은 고뇌에 잠겨 있었다. 1910년생이니 그의 나이 만 61세. 인간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으니 이제 그룹의 후계자를 선택해야 했다. 그에게는 아들 셋과 딸 다섯이 있었다. 유학을 공부한 가풍이 몸에 배어 그는 오래 전부터 아들 상속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에게는 장남 맹희가 있고, 차남 창희, 3남 건희가 있었다.후계자 문제는 부자간 감정의 호오(好惡)를 떠나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문제였다. 뼛속까지 경영자인 호암에게 후계자가 장남인지 차남인지 3남인지의 여부는 그리 문제되지 않았다. 누가 삼성이라는 대그룹을 이끌어갈 변혁적 리더십의 자질과 능력이 있는지가 중요했다. 호암이 보기에 그동안 장남은 주위와 불화가 잦았다. 차남은 어딘가 모르게 유약한 모습이 보였다. 경영에도 뜻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건희인데…’ 3남 건희는 와세다대학 상학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미국 조지워싱턴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뒤 기업 일선에서 경영수업을 받고 있었다. 호암은 글로벌 기업인 미국의 GE나 일본의 SONY가 후계자를 장남이 아닌 차남이나 3남, 또는 사위, 나아가서는 경영능력이 출중한 평사원 중에서 발탁한 사례도 잘 알고 있었다.누구를 후계자로 선택하더라도 어느 정도 잡음이 있으리란 것은 예상되는 일이었다. 고뇌는 깊어졌다. 자식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창업 공신부터 계열사의 신입 사원에 이르기까지 임직원들 불만도 최소화해야만 했다. 하루 하루 입안이 바짝 타들어갔다. 그래도 그 길이 최선이라면.... 마침내 결심을 굳힌 이병철 회장이 직접 펜을 들어 유언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다.“장남 맹희는 경영에 흥미가 없고 인간관계가 원활하지 않으며, 차남 창희는 경영에 뜻이 없다. 이러한 뜻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다. 3남 건희도 당초에는 본인이 사양했으나 마지막에는 ‘역량은 부족하나 맡아보겠다.’는 뜻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경위로 삼성그룹의 후계자는 이건희로 정한 만큼 그를 중심으로 삼성을 이끌어갈 것이며…”재계서열 1위인 삼성그룹의 차기 계승자를 명시한 호암의 공식 유언장은 이렇게 작성되었다. 매사에 빈틈이 없었던 호암은 고문변호사의 공증을 받은 후, 금고 속에 유언장을 보관했다. 타계하기 16년 전의 일이었다. ━ 공개된 호암의 유언장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76년 9월, 이병철 회장은 일본 도쿄에 갔다가 게이오대학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던 중 위암이 발견된다. 재검 결과 위암이 확실하자 도쿄의 암연구소 부속병원에서 수술을 받기로 했다. 그리고 만일을 대비해 출국 전날 가족을 모두 불러 모았다. 그 자리에는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인 부인 박두을 여사, 장남 이맹희씨 부부, 그리고 장녀 이인희 씨를 비롯한 딸들도 모두 참석했다.“앞으로 삼성은 건희가 이끌어가도록 하겠다.”호암의 폭탄 선언이었다. 3남 이건희는 아버지의 수술을 위해 조운해 박사, 이동희 원장과 함께 도쿄에 체류하고 있다가 뒤늦게 그 소식을 들었다. 당시 재계 초미의 관심사였던 삼성의 후계자는 이렇게 결정됐다.호암은 이후 3남 이건희를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승진시키고, 1987년 타계하기 전까지 자신의 기업가정신 DNA를 물려주었다. 그 10년 동안 이건희 회장은 최고 경영자로서의 능력과 자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혹독한 경영수업과 훈련을 받았다. 호암의 타계 후 유언대로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 회장직을 이어받았다. 이후 장남 이맹희 씨는 CJ그룹, 장녀 이인희 씨는 한솔그룹, 5녀 이명희 씨는 신세계그룹의 창업자가 되어 지금의 범 삼성가를 이루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래 가계도 참조)왜 호암은 당시 장남도 차남도 아닌 3남을 후계자로 정했을까? 이는 호암의 경영철학과 기업가정신이라는 DNA를 얘기하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국내에서 호암과 이건희 회장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김성수 경희대 명예교수(한국기업경영종합연구원장)는 “호암이 기업을 이끌어갈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을 갖춘 변혁적 리더십의 기준에 3남 이건희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선정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호암은 3남 건희가 변화와 혁신, 기업 보호와 유지의 균형감각을 동시에 갖춘 섬김의 리더십이라는 호암의 기업가 정신을 제대로 이어받을 수 있다고 봤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호암은 이건희 회장에게 평생의 경영철학으로 ‘경청’과 ‘목계경영’을 주문했다는 것이 김 교수의 해석이다. ( 70쪽 인터뷰 기사 참조)1987년 11월 19일, 이병철 선대회장이 타계하자 삼성그룹 사장단은 오후에 긴급회의를 열어 이건희 부회장을 제2대 회장으로 추대했다. 이건희 회장의 나이 45세 때였다. 그리고 1987년 12월 1일, 이건희 회장이 호암아트홀에서 취임식을 갖고 그룹 회장에 취임한다. 이 회장은 선대회장인 호암으로부터 창업의 효를 이어 받아 호암의 경영철학을 내면화시키는데, 이는 그가 자신의 경영에 대한 소신을 밝힌 당시 취임사에서 그대로 드러난다.우선 본인은 삼성이 지금까지 쌓아 온 훌륭한 전통과 창업주의 유지를 계승하여 이를 더욱 발전시켜 나갈 것이며, 개인의 독선 보다는 다수의 의견과 조직을 우선하고 책임경영과 공존공영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의 경영이념을 실현해 나갈 것입니다.둘째로, 미래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을 통해 90년대까지는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입니다. 이를 위해 첨단 기술산업 분야를 더욱 넓히고 해외사업의 활성화로 그룹의 국제화를 가속시킬 것이며 새로운 기술개발과 신경영 기법의 도입 또한 적극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다음으로, 인재를 더욱 아끼고 키우는 데 모든 힘을 기울이겠습니다. 개성과 창의를 존중하고, 국가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교육시키며 그들에게 최선의 인간관계와 최고의 능률이 보장되도록 제도적인 뒷받침을 다해 나갈 것입니다. 특히 삼성이 50년의 맥을 이어 온 엄격한 신상필벌과 학연, 지연, 혈연을 철저히 배제한 공정한 인사의 전통은 영원 불변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밝혀두는 바입니다.끝으로 삼성은 좋은 제품을 싸게 만들어 사회에 공급하고 건실한 경영을 통해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지금 사회가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는 이상으로 봉사와 헌신을 적극 전개할 것입니다. ━ 이건희 회장의 ‘제2창업’ 선언 이건희 회장은 취임한 지 3개월이 지난 1988년 3월, 삼성 창립 50주년 기념사에서 ‘제2창업’을 선언했다. 그는 “21세기를 앞두고 국내외 환경이 급변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걱정 때문에 밤잠을 설치며 고민한 끝에 제2창업을 선포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날로 치열해지는 국제 경쟁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는 길은 우리의 인재들이 그리고 인재들이 모인 기업이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하여 5대양 6대주로 활동무대를 넓혀야 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라며 삼성의 비전으로 ‘글로벌 진출’을 선언했다.최고경영자(CEO)는 외로운 자리다. 실제 밤잠을 설칠 정도로 이건희 회장의 고뇌도 깊었을 것이다. 원로 기업인들에 따르면, 70~80년대 한국 재계 주변에서는 삼성가의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조선 태종조 장자 양녕대군, 둘째아들 효령대군, 셋째아들 충녕대군에 빗대어 수군대던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학문에만 전념해 유약하다는 말을 들어온 충녕대군이 왕위를 이어받은 뒤 성군이 되어 조선의 황금기를 열었듯이 이건희 회장은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지난 27년 동안 삼성그룹의 제 2의 창업을 지휘해 세계적 기업의 대열에 올려놓았다.지금의 글로벌 삼성은, 사실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과 제2창업자 이건희 회장의 미래를 내다보는 기업가정신과 탁월한 리더십의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성그룹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재계 서열 1위의 대기업으로 우뚝 서 있다. 삼성은 2013년, 그룹 전체에서 390조 원 규모의 매출을 올렸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같은 해 한국의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1428조 원이다. 삼성의 매출액이 한국 GDP의 26.6%나 차지하고 있다. 삼성의 2013년 수출액은 1572억 달러로 한국 전체 수출액 6171억 달러의 25%다. 단순 지표로도 한국 경제의 1/4을 책임지고 있다. 규모나 영향력에서 한 국가와 맞먹을 만한 힘을 갖추고 있는 만큼 삼성가의 일거수일투족이 온 국민의 관심대상이다.이건희 회장은 국내에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기업인으로 수차례 선정됐다. 한국갤럽조사연구소가 지난해 10월 2~29일 만 13세 이상 남녀 1700명을 대상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기업인’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34%가 이건희 회장을 꼽았다. 10년 전인 지난 2004년 1728명을 대상으로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도 1위를 차지했다. 영국 브랜드파이낸스가 지난 2월 발표한 ‘2015 글로벌 500 연례 보고서’를 보면 삼성의 브랜드 가치는 작년보다 4% 증가한 817억1600만 달러로 집계됐다. 애플에 이어 세계 2위다.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보다도 순위가 높다. 이건희 회장은 이제 세기의 경영인이자 글로벌 억만장자로 전 세계에 그 이름이 회자되는 거인이 되었다.이병철과 이건희. 두 거인의 삶속에 내재된 삼성그룹의 기업가정신 DNA는 실제 경영현장에서 어떻게 발현됐을까? 우선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의 기업가 정신은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정신으로 집약되었고 이는 삼성그룹의 지도원리가 되었다.첫째, 사업보국은 호암이 특히 강조한 기업가정신이었다. 그는 한국전쟁 직후 황폐해진 국민 경제회복과 국가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생산적인 제조업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당시 기업들이 엄두를 내지 못하던 제조업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1969년의 삼성전자 설립에 이어 1970년대에 중화학공업과 반도체산업, 항공산업 등 국가 기간분야의 기업들을 창설했다. 호암은 그가 삼성상회 등을 통해 구축한 상업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해 국가경제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고 있다.1988년 제2창업선언 뒤 호암의 경영철학인 사업보국은 이건희 회장체제에서 자율경영, 기술중시, 인간존중이라는 덕목으로 심화되어 나타난다. 특히 기술중시 덕목은 이건희 회장 특유의 기업가정신 DNA로 발휘됐는데 삼성의 반도체 신화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1974년 일이다. “미국·일본보다 20,30년 뒤쳐졌는데, 따라가기나 할 수 있겠는가?’ 이건희 회장이 파산 직전의 한국 반도체를 인수한다고 했을 때 나온 주위의 반응들이었다고 한다. 이건희 회장의 주장에 국내에서는 ‘자본, 기술, 시장’이 없기 때문에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안된다는 3불가론의 공격이 계속됐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 삼성반도체 신화의 시작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지요. 제 사재를 보태겠습니다.” 반도체 미래에 대한 의지가 확고했던 이건희 회장은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일본에서 유학했기 때문에 일본의 사정에 밝은 그는 거의 매주 일본으로가서 반도체 기술자를 만나 그들로부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만한 것을 배웠다. 세계적인 전문가들을 직접 찾아 나섰고 스스로 자료를 분석해 나갔다.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아 1986년 7월, 삼성은 1메가 D램을 생산하면서 반도체 산업을 본격적으로 꽃 피우기 시작했다.당시 세계 반도체 업계는 새로운 기술적 난관에 부딪쳐 있던 상태였다. 바로 ‘4메가 D램의 엄청나게 늘어난 용량을 어떻게 칩에 담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스택이냐, 트렌치냐’하는 두 가지 문제로 난관에 봉착했다. 당시 해외 선진 기업들은 아래로 파고 내려가는 트렌치 방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지만, 이건희 회장은 생각이 달랐다. “단순하게 생각합시다. 지하로 파는 것보다 위로 쌓는 게 쉽지 않겠습니까?”결과는 적중했다. 당시 선진 기업들이 고집했던 트렌치 방식은 갈수록 복잡해지는 기술을 수용해 나가지 못했다. “트렌치로 했으면 지금쯤 반도체는 망했고, 그룹까지도 흔들렸을 것이다.” 이건희 회장의 선택이 옳았다. 이후 이 회장의 과감한 두 번째 결단이 이어졌다. “모두가 하는 6인치로는 일본을 뛰어 넘을 수 없습니다. 삼성은 8인치에 승부를 겁니다.” 1993년 기존 6인치 웨이퍼가 주류를 이루던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은 8인치 생산을 결단했다. 그렇게 해서 늘어난 생산량으로 일본을 넘어서겠다는 복안이었다. 이 회장의 전략은 적중했다. 삼성은 64메가 D램 개발로 기술 주도권을 확보한데 이어 생산량을 늘리며 시장 점유율도 1위를 기록, 기술과 생산 모두에서 명실상부한 세계 1위 기업으로 올랐다. 반도체로 일군 휴대폰 사업이 바로 이건희 회장이 이룬 글로벌 삼성과 사업 보국의 발현이었던 것이다.두 번째, 세계 일류를 추구하는 정신도 호암과 이건희 회장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경영철학이다. 이건희 회장은, 한국의 헌법은 우리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므로, 우선 삼성 내에서만이라도 바꿀 수 있는 것은 모두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뀌려면 나부터 바뀌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1993년 6월 7일 독일에서 가진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중대선언을 한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말로 유명해진 신경영 선언이다. 신경영 대장정은 총 8개 도시를 돌며 임직원 1,8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350여 시간의 토의로 이어졌다.“올림픽 100m 달리기에서 1등과 2등의 차이는 불과 0.01초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도 1등과 2등은 엄청나게 다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삼성은 지금 이류인 것이다. 더구나 가만히 놔두면 삼류, 사류 회사가 될 것 같다고 느꼈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 회의를 시작했다. 나는 삼성이 과거의 모든 폐습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롭게 도약해줄 것을 바라고 있다. 아울러 나도 잘되지만, 나라도 잘되고, 국민도 잘되고, 내 자식도 잘되고, 후손에게도 잘해주자는 것이 목적이다. 삼성이 일류기업이 되기 위해서, 우리 모두 나부터 변할 것을 다짐하자.” ━ 세계 초일류가 되자는 비전 제시 이같은 일류기업 추구는 사실 그 뿌리가 호암의 제일주의 정신을 잇는 DNA다. 그의 기업가정신은 삼성이라는 기업 이름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제일제당이나 제일모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는 철저하게 제일이 되기를 바랐었고, 그것을 실현시키려고 노력했다.삼성이라는 브랜드에도 1등주의, 최고의 뜻이 함축되어 있다.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했을 때 호암은 ‘크고 강하고 영원하라’는 세가지 소망을 담아 100년 기업의 꿈을 심었다. 이같은 제일주의, 최고를 추구하는 정신은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변화하려는 진취적 사상의 표현이다. 무한경쟁의 시장경제체제에서는 기업은 끊임없이 변신하지 않으면 남아 있을 수 없고, 새로운 제품일수록 끊임없이 품질을 개선하여 혁신적으로 변신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호암의 제일주의와 최고주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이건희 회장이 세계 일류를 추구했던 상징적인 장면이 바로 불량 휴대폰 화형식이다. 이건희 회장은 일찍부터 삼성의 신수종 사업으로 휴대폰 사업을 예견했다. 그는 말했다.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옵니다. 전화기를 중시해야 합니다.”모토로라가 국내 휴대폰 시장을 석권하고 있던 1990년대 초반에 삼성은 휴대폰 기술개발에 전력을 쏟았다. 그리고 1994년 10월, 삼성은 애니콜 브랜드의 첫 제품인 SH-770을 출시해 시장을 장악했다. 당시 애니콜은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세계 초일류로 가기엔 한참 멀었다고 판단했다. 뭔가 충격이 필요했다. 1995년 3월 9일 오전 10시, 삼성전자의 구미사업장. 흐린 날씨임에도 2천여 명의 직원들이 운동장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머리에 ‘품질 확보’라고 쓰인 띠를 두르고 있었다. 직원들 앞에는 ‘품질은 나의 인격이요, 자존심!’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임직원들은 하나같이 굳은 표정이었다. 운동장 중앙에는 무선전화기를 포함해 키폰, 팩시밀리, 휴대폰 등 15만 대의 제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갑자기 미리 준비하고 있던 직원 몇몇이 손에 든 해머로 휴대폰과 전화 기기들을 사정없이 내려치기 시작했다.“퍽-! 퍼퍽-!” 돈으로 치면 무려 500억 원에 해당하는 비싼 기기들이 순식간에 쓸모 없는 플라스틱 조각으로 변했다. 부서진 조각들은 시뻘건 불 속으로 던져졌다. 이는 ‘양(量)이 아닌 질(質) 경영’에 대한 이건희 회장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 사건으로 그룹 전 직원들에게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한 일종의 극약처방인 셈이었다.사정은 이러했다. 이건희 회장은 그해 설을 맞아 삼성이 개발한 휴대폰 2천여 대를 임직원들에게 선물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기대했던 것과 달리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들려왔다.“이게 뭐야? 통화가 제대로 되지 않잖아.” “에이, 잔뜩 기대했는데… 속았네.”이건희 회장은 대로(大怒)했다. “고객이 두렵지도 않나. 돈 받고 불량품을 팔다니.”반도체에 이어 휴대폰이 삼성의 미래를 책임질 사업이라 여겼던 이 회장의 실망은 상상이상이었다. “휴대폰과 관련된 모든 제품을 회수해서 공장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태우시오.”화형식 이후 7년 반이 지난 2002년에 삼성이 만든 휴대폰은 세계시장 점유율 3위에 올랐다. 당시 삼성전자 총이익의 5.3%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던 불 속으로 사라진 500억 원도 7년 반이 지나 60배에 달하는 3조 원으로 되돌아왔다. ━ 업그레이드 된 인재제일주의 세 번째, 호암과 이건희 회장의 기업가 정신을 특징짓는 또다른 경영철학은 인재제일주의로 요약되는 인재경영이다. 삼성 신화를 일궈낸 기업가정신의 밑바탕에는 인재경영이 공통적으로 자리잡고 있다.호암은 평소에 주위 사람들에게 “일년지계(一年之計)는 곡식을 심는 일이요, 십년지계(十年之計)는 나무를 심는 일이며, 백년지계(百年之計)는 사람을 기르는 일”이라는 동양의 격언을 자주 인용하였다. 하나를 심어서 하나나 열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백이 생산된다는 중국적 투자효율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특히 “기업은 사람이다”라는 인재제일주의를 경영이념의 최우선 순위에 두었다. 이같은 인재활용의 리더십은 현재까지 승계되고 있다. 삼성 그룹이 선구적으로 채택한 사원 공채제도와 연수제도, 인사고과제도는 호암의 인재제일주의를 반영한 것이다. 삼성이 우리나라 기업 중에서 가장 먼저 종합연수원을 개설하여 인간개발과 인력개발에 노력한 것도 호암의 뜻이다.호암의 인재제일주의 DNA는 이건희 회장에게 발전적으로 이어진다. 1995년, 이 회장은 학력과 성별, 직종에 따른 불합리한 인사 차별을 타파하는 열린 인사를 지시했고, 삼성은 이를 받아들여 ‘공채 학력제한 폐지’를 선언했다. 삼성은 이때부터 연공 서열식 인사 기조가 아닌 능력급제를 전격 시행했다.이건희 회장은 또 인재제일의 철학을 바탕으로 ‘창의적 핵심인재’를 확보하고 양성하는데 매달렸다. 그래서 2002년 전 관계사 사장단 회의에서 CEO가 직접 핵심인재 확보를 위해 나서라고 주문했다. 그때부터 ‘S급 인재’로 불리는 핵심인재 확보는 CEO가 직접수행하는 주요 경영활동 목표로 자리 잡았다. ‘S급 인재’는 삼성이 매년 미래를 위해 수십명 씩 스카우트하는 초특급 인물이다. 앞서 호암이 그랬듯이 하나를 심어서 하나나 열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백이 생산된다는 중국적 투자효율사상에 기반한 것으로 인재중시주의를 넘어 천재중시주의라고 이름붙일만하다. 삼성은 세계 각국에서 확보한 핵심인재들을 통해 지금의 글로벌 삼성을 일궈왔다. 호암의 인재제일주의가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을 통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지난 3월 1일, 삼성전자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컨벤션센터(CCIB)에서 삼성전자의 전략 스마트폰 갤럭시S 시리즈의 여섯번째 모델인 갤럭시S6와 갤럭시S6 엣지를 공개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갤럭시S6와 갤럭시S6 엣지는 삼성이 만든 가장 아름다운 폰”이라고 평했고, 미국 정보기술(IT) 전문매체 슬래시기어는 “삼성이 드디어 우리가 원하던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을 만들어냈다”고 극찬했다. 미국, 유럽, 중국, 일본 등 세계 여러 나라 SNS 이용자들도 “디자인이 너무 멋있다”, “역시 한국은 스마트폰 최강국”이라는 칭찬을 쏟아냈다. 그런 반응에 가장 기뻐할 사람이 다름 아닌 이건희 회장일 것임은 불문가지다.22년 전인 1993년, 이 회장은 유럽주재원 간담회에서 다가올 시대에는 “디자인이 가장 중요해진다”고 말했다. 그는 디자인으로 상징되는 소프트 파워가 21세기 핵심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했다.그는 2005년에 세계적 명품과 디자인의 격전지인 밀라노에 주요 사장들을 소집하고 ‘디자인 전략회의’를 주재하기까지 했다. 이 자리에서 이건희 회장은 삼성의 디자인 경쟁력을 1.5류로 평가하며 글로벌 초일류 수준으로 혁신할 것을 주문했다.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삼성은 기술과 창의력을 결합한 고유의 디자인 경쟁력을 축적하면서 세계 디자인 트렌드를 주도하는 위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지금의 갤럭시S6와 갤럭시S6 엣지는 상당부분 이건희 회장에게 빚을 진 셈이다. ━ 3세 경영인들 창업주의 기업가정신 이어 받아야 이제 100년 기업을 향해 가고 있는 삼성은 3세 경영 시대를 맞고 있다. 이건희(73) 회장의 투병이 길어지면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해 5월부터 그룹 전면에 나서고 있다. 삼성의 대표 자격으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나 빌 게이츠 회장 등을 만나는 등 대외 활동의 폭을 넓히고 있고, 주요기업에 대한 인수합병(M&A)과 계열사 매각, 그룹 구조조정 등을 주도하는 상황이다. 이 부회장은 지난 2월 24일 박근혜 대통령과 재계 총수의 오찬자리에 삼성을 대표해 참석해 “전자제품만 팔기보다 문화나 국가 브랜드 가치가 함께 해야 세계시장에서 호응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해 나라에 보탬이 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재용 부회장의 활동에 비례해 동생인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 이서현 제일모직 사장의 보폭도 커지고 있다.기업의 생사소멸은 그 기업의 가치관, 즉 기업 DNA에 달려있다. 100년 기업을 꿈꾼다면 이들 3세 경영인들이 삼성을 창업한 호암 이병철, 제2의 창업을 주도해 지금의 삼성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우뚝 세운 이건희 회장 등 두 거인의 기업가정신의 핵심 DNA를 제대로 이어받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우리는 지금 가슴 벅찬 미래를 향한 출발선상에 서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초일류이며, 방향은 하나로, 눈은 세계로, 그리고 꿈은 미래에 두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 갑시다.” 21년 전인 1994년, 이건희 회장 자신이 했던 말처럼 이 회장이 병상에서 일어나 기업경영의 지혜를 나라발전에 써주길 바라는 국민들이 많다. 그만큼 기업가정신으로 똘똘뭉친 거인들의 DNA가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 절실하기 때문이다.- 포브스코리아 특별취재팀

2015.03.27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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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유망기업 50’ 선정된 한라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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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브스아시아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50개 유망 기업을 선정했다. 이 중 한국 기업은 8곳이 선정됐다. CJ제일제당, 한라건설, 동부화재보험, 현대글로비스, 현대모비스, LG생활건강, 삼성엔지니어링, NHN 등이다. 포브스는 매출이나 시가총액 30억 달러 이상인 아태 지역 1073개 기업군 가운데 유망 기업을 선정했다. 부채가 많거나 지분의 50% 이상을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경우 대상에서 제외했다. 유망기업 50에 처음 선정된 한라건설의 정무현 사장을 만났다. 정무현 사장은 현대건설 토목사업본부장, 부사장을 거쳐 2010년부터 한라건설을 이끌어 왔다. 그는 포브스 유망기업 선정에 대해 “한라건설은 국내 도급순위 16위의 중견기업으로 글로벌 건설사에 비해 부족한 점이 많다”며 “이번 수상을 계기로 더욱 정진하겠다”고 밝혔다.한라건설은 1962년 고(故) 정인영 명예회장이 설립한 현대양행에서 시작됐다. 중화학공업 기업인 현대양행은 1980년 신군부의 발전설비 통합 정책으로 강제 분할 합병되며 주력 사업 분야인 중공업 부문 경영권을 정부에 넘긴다. 이후 기계사업 분야를 자동차 부품회사인 만도기계로, 건설을 담당했던 자원개발부를 한라자원으로 각각 독립시켰다.90년 7월 한라자원은 현재의 한라건설로 상호를 변경했다. “한라그룹 모기업인 한라건설은 80년 창립 이래 지난 30여 년 동안 국내외 토목, 건축, 주택, 플랜트,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세계 어느 건설사에 뒤지지 않는 강한 기업으로 키워나갈 겁니다.”지금 한라건설은 토목공사와 공공건물 및 주거용 건축사업, 폐기물·상하수도 처리시설 등 환경사업에 적극 나서고 있다. 특히 토목 부문에서는 목포신항만 조성, 인천국제공항 건설, 서해안고속도로 건설, 삼호조선소 건설, 4대 강 정비사업 등 국가기간시설 구축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건축 부문은 경부고속철도(KTX) 천안아산역사, 군산조선소, 현대백화점 대구점과 다양한 주거용 아파트를 시공했다.어려운 건설경기에도 탄탄한 실적한라건설이 한국의 유력 건설기업을 제치고 포브스 유망 기업 50에 선정된 건 어려운 건설경기에도 탄탄한 실적을 올려 시가총액이 증가했고, 해외 사업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라건설의 시가총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50%가량 불어났다. 2010년 매출액은 건설경기 위축으로 전년 동기 대비 소폭 감소했으나, 2011년 상반기 매출은 7681억원으로 10.3% 증가했다. 지난 7월 베트남 메콩강 지역의 110㎞ 운하를 개선하는 공사 계약을 따내기도 했다.외환위기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은 강인한 문화도 인상적이다. 정 사장도 한라건설 역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순간으로 1997년의 외환위기를 꼽았다. 당시 한라그룹은 재계 순위 12위, 계열사 수 18개의 대그룹이었다. 하지만 외환위기로 부도 처리되며 혹독한 구조조정을 겪어야 했다. “계열사가 법정관리와 통폐합 및 매각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동료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남은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한라그룹의 부도는 외환위기 당시 자금사정이 악화된 금융기관의 급속한 여신 회수가 직접 원인이었다. 그룹의 주력 기업인 만도, 한라공조, 한라중공업, 한라시멘트의 소유권이 국내외 기업에 넘어갔다. 한라건설은 98년 9월 화의인가 결정 후 기업개선 작업을 통해 99년 7월에야 정상화가 이루어졌다. 정 사장은 “수많은 역경과 좌절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소중한 경험을 쌓았다”고 강조했다.아픈 경험은 2008년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빛을 발했다. 당시 한국 건설사들은 수주물량 감소, 수익성 하락, 부동산 경기 장기 침체 같은 악재와 싸워야 했다. 100위권 기업 가운데 27개 업체가 법정관리를 신청했을 정도로 불황의 골은 깊었다. 금융위기가 발발하며 중견 건설사들이 자금조달을 못해 무더기로 쓰러진 것이다. 특히 무리한 프로젝트 파이낸싱으로 사업을 벌인 기업들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한라건설 사업장은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외환위기 때를 상기하며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듯 신중하게 사업을 벌여왔기 때문이다. 다른 건설사에 비해 분양도 순조로워 현금 흐름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동시에 해외 플랜트사업 등 사업을 다각화해 외부 충격에 대비했다. 그 결과 2008년 금융위기를 돌파할 수 있었다. 한라건설은 2009년 사상 최고 수익을 냈다.좋은 실적을 올리고 있지만 정 사장은 현장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스스로를 현장주의자라고 말하는 그에게 현장은 경영의 최전방이다. 앉아서 아이디어를 구상하기보다 현장에서 직원들로부터 한마디라도 듣는 게 경영에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조직 운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게 구성원과의 소통이라고 믿는다.“요즘과 같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기에 소통이 막힌 조직은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리더가 임직원에게 한발이라도 더 다가가서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작은 일을 이해해야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죠.”해외 시장 개척만이 살길이다그는 한국 건설 현장에서 공공부문 공사의 감소와 노령화가 가장 큰 문제라고 분석한다. 인프라 개발을 주도하는 공공 부문 물량은 감소 추세에 있다. 그가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이유다.신흥국에서는 정부 주도의 민관공동합작투자나 민간투자 사업이 확대되는 추세다. 특히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오일 머니를 기반으로 인프라 구축 발주가 늘어나고 있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중남미 건설시장도 정 사장의 관심 지역이다.“중동을 비롯해 아프리카, 남미 등 신흥시장에서 향후 수년간 수주 호조세가 지속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우리의 해외사업 전략은 ‘Hub&Spoke 방식’입니다. 즉 단기적으로는 이미 진출한 중국, 중동, 베트남 등에서 내실을 기하고 중장기적으로 주변 국가로 진출 범위를 확대하는 것입니다. 특히 중국에선 1995년 상하이에서 오피스텔을, 96년에는 베이징에서 주상복합아파트 PJT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2005년에는 중국 톈진에서 부동산 개발사업을 위한 독자법인을 설립했죠. 이를 통해 한국과 중국의 특성을 접목한 2000세대의 아파트를 분양 중입니다. 현지 반응이 굉장히 좋습니다.”노령화에 따른 주택 구매력 감소도 그가 풀어야 할 숙제다. 정 사장은 새로운 형태의 주거양식을 개발해 문제를 풀어나갈 생각이다. 아파트에 대한 수요는 줄고 있지만 노령화 및 이에 따른 세대 분화로 보다 다양한 주거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정 사장은 “주거 패러다임 변화에 따른 친환경 복합주거단지, 기능형 컨셉트 주거시설 등 새로운 주거 니즈를 자극할 수 있는 상품을 개발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한라건설은 주택, 건축, 토목 분야에서 안정적인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며 최근 몇 년간 빠르게 성장해 왔습니다. 국내외 사업 포트폴리오가 더욱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할 겁니다. 또 신규로 수주한 사업성도 더욱 엄밀히 따지고 현금 흐름에 문제가 없도록 해야지요. 글로벌 경제상황은 여전히 불안합니다.하지만 한라건설은 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이겨낸 저력이 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저력으로 성장세를 이어나겠습니다.”

2011.10.27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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