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CONOMIST

5

이재용‧홍라희, 해인사에 디지털 반야심경 깜짝 선물

CEO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그의 모친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이 해인사에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을 초고화질 디지털로 촬영해 책으로 제작한 디지털 반야심경을 선물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선물은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49재 봉행에 대한 감사 표시인 것으로 보인다. 5일 재계 등에 따르면 이 부회장과 홍 전 관장은 지난달 25일 1주기를 맞은 고 이건희 회장을 추모하기 위해 이달 1일 경남 합천 해인사를 방문해 참배했다. 이후 해인사 방장 스님을 예방해 디지털 반야심경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인사 방문 시점은 삼성전자 창립 52주년 기념일이었다. 특히 홍 전 관장은 디지털 반야심경을 전달하면서 메타버스를 언급한 것으로 전해졌다. 메타버스는 가상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현실 세계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 3차원 가상세계를 의미하는 용어다. 홍 전 관장은 “이제 가상공간이 생기면 이렇게 꽂기만 해도 자기가 그 속에서 리움 컬렉션을 다 볼 수 있는 세상이 온다. 곧 온다”며 “내 것 네 것이 없는 세상이 되는 거 같다”고 말했다. 리움미술관을 방문해 관람할 수 있었던 추사의 반야심경 책자를 가상공간을 활용해 경남 합천에서도 볼 수 있음을 의미하는 말로 해석된다. 한편, 이 부회장과 홍 전 관장은 지난 2일에는 경남 양산의 통도사를 찾아 고 이건희 회장 1주기를 추모하기도 했다. 재계에선 이 부회장이 아버지인 고 이건희 회장을 기리고, 자신의 수감 생활로 마음고생을 한 모친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경남 지역 사찰을 연이어 방문한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이창훈 기자 lee.changhun@joongang.co.kr

2021.11.05 10:50

2분 소요
해인사 찾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CEO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모친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과 1일 경남 합천군 해인사를 방문한 것으로 전해졌다. 같은 날 해인사를 찾은 관광객이 두 사람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리면서 이 같은 사실이 알려졌다. 2일 SNS에는 이 부회장과 홍 전 관장이 해인사를 방문한 모습의 사진이 게재됐다. 두 사람이 해인사를 방문한 것은 지난달 25일이었던 고(故) 이건희 심성 회장의 1주기를 추모하기 위함이라는 해석이다. 공교롭게도 이 부회장이 해인사를 방문한 1일은 삼성전자 창립 52주년 기념일이었다. 지난해 12월 해인사에선 고 이건희 회장 49재 봉행식이 열린 바 있다. 이창훈 기자 lee.changhun@joongang.co.kr

2021.11.02 18:05

1분 소요
‘승부사’ 현정은 79위

산업 일반

현정은(54) 현대그룹 회장이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인’에 지난해에 이어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선정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오히려 79위를 기록한 것이 저평가된 감이 없지 않다. 포브스가 현 회장을 2년 연속 리스트에 올린 이유는 2003년 남편인 정몽헌 회장 타계 후 경영권을 이어받아 어려움 속에서도 5년 연속 흑자기조를 정착시키는 등 경영성과를 냈기 때문이다.포브스가 리스트를 작성하는 동안 현 회장은 또 하나의 역작을 만들어냈다. 남북관계가 극도로 경색된 상황에서 그는 8월 16일 묘향산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극적으로 만났다.그는 돌아와 북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와 합의한 금강산겙낵?관광 재개와 이산가족 상봉 등 5개 항을 발표했다. 북한은 그의 방북 기간인 8월 13일 억류 근로자를 석방했고, 이어 육로통행 제한 등을 담은 ‘12?조치’를 해제하는 등 유화 조치들을 내놨다.포브스가 발표한 이번 리스트에 ‘8?6 면담’이 반영됐다면 현 회장의 순위는 훨씬 올라가지 않았을까. 현 회장은 부잣집 딸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랐다. 꿈 많은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국내 최대의 재벌가로 시집 가 현모양처로 살던 전업주부였다. 2003년 현대가의 며느리 현 회장이 주인공으로 전격 캐스팅되면서 ‘현대 드라마’는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주위에선 그의 등장을 탐탁지 않아 했다. 경영능력을 믿을 수 없다고 했고, 가업은 마땅히 정씨(鄭氏)가 계승해야 한다는 논리로 압박하기도 했다. 그가 보낸 6년은 아무리 부정적으로 평가해도 ‘절반의 성공’은 된다. 2003년 취임 당시 만신창이였던 그룹은 이듬해부터 흑자전환을 시작해 6년 연속 흑자행진을 이어가고 있다.모두가 안 된다고 두 달도 가지 못할 거라 했지만, 전업주부 출신 회장은 실적으로 그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지난해 대북사업은 금강산관광 중단에 이어 최근 개성관광까지 발이 묶이며 800억원이 넘는 손실을 냈다. 대북사업은 ‘세계에서 가장 불확실한’ 사업이다. 그것을 감안하면 그 성패로 경영능력을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더구나 대북사업은 고(故) 정주영 선대 회장의 유지라서 그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현 회장의 친가는 대대로 호남에서 제일가는 거부였다. 증조부는 호남은행을 설립한 고 현기봉씨이고, 할아버지 고 현준호씨는 광주 농공은행과 우리나라 최초의 보험사인 조선생명을 설립했다.아버지 고 현영원씨는 신한해운을 운영하다 이후 현대상선에 합병돼 현대상선 회장을 지냈다. 외가도 쟁쟁했기는 마찬가지. 용문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는 어머니 김문희씨는 고 김용주 전방그룹 창업주의 장녀다. 전방그룹은 의류직물산업으로 국가경제를 일으킨 주역이다.플라멩코 추던 얄개 ▎현 회장은 8월 16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김 위원장 오른쪽은 정지이 현대U&I 전무이며 왼쪽에 서 있는 인물은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겸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 오른쪽은 현대아산의 최규훈 계약지원실장이다. 현 회장의 어린 시절이 특별했다면 영화감독 눈에 띄어 영화에 출연할 뻔한 에피소드와 5학년 때 월반해 남들보다 두 살이나 어린 나이에 중학교에 입학했을 만큼 총명했다는 사실 정도다.그는 여느 재벌가 딸들처럼 예능을 익히고, 교양을 쌓았다. 사회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어머니 영향으로 자유분방한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경기여고 시절 현 회장은 공부벌레는 아니었다. 그는 특별활동이 더 좋았다. 여름에는 교내 풀장에서 수영하고, 겨울에는 동대문에 있는 스케이트장을 오갔다. 평소엔 수예, 레이스 짜기, 동양 자수, 옷 만들기, 요리 등 가정 실습도 많이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개교기념 행사로 열린 민속무용대회다.시민들까지 와서 구경할 만큼 큰 행사여서 공부도 제쳐놓고 몇 달씩 연습에 매달렸다. 당시 그는 플라멩코를 추었다. 열일곱 이른 나이에 이화여대에 입학한 그는 전공인 사회학 중에서도 여성학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원에서 여성의 사회진출과 여성개발을 연구한 것도 그래서다.석사 논문도 우리나라 최초의 진보적 여성단체인 근우회를 연구한 것이었다. 여성단체 활동에 열심인 어머니의 영향이 컸지만, 여성문제를 공부하면서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게 된 것이다. 재벌가 딸이 자본주의나 시장경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모습에 당시 교수와 교우들이 적잖게 놀랐다고 한다.당시 직업 테스트를 해봤는데, 가장 적성에 맞는 직업은 기자, 안 맞는 직업이 비서로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적성 결과와는 달리 그는 기자처럼 다이내믹한 직업인이 되지 못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적성에 안 맞는,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전업주부가 됐다. 그것도 결코 자유롭지 않은 현대가 며느리로. 정몽헌 회장의 러브레터1975년 초 현대중공업의 선박 명명식이 있었다. 당시 대학생이던 현 회장은 신한해운 사장이던 아버지를 따라 행사가 열리는 울산으로 내려갔다. 그곳에 도착하자 한 어른이 직접 가방을 받아주며 안내하기에 그냥 현대 관계자인 줄만 알았다. 저녁 리셉션에서 그는 그 어른이 정주영 명예회장이란 소개를 받고 깜짝 놀랐다.훗날 각별한 정을 준 시아버지와의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다. 이날 정 명예회장은 그를 아들 몽헌의 배필로 낙점했다. 평소 현영원 사장과 혼담을 주고받았던 터에 막상 실제로 보고 나니 맘에 쏙 들었던 것이다. 정몽헌 회장도 첫눈에 반했다. 그는 후에 “고운 얼굴에 여성스러운 정은이 맘에 들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현 회장도 정몽헌 회장에게 마음이 끌렸다. 무엇보다 재벌가 아들답지 않은 순수한 모습이 현 회장에게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의 표현처럼 당시 정몽헌 회장은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흙길 걷는 것을 좋아하는’ 문학청년이었다. 특히 현 회장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지금은 다래가 익어갈 무렵…’식으로 시작하는 정몽헌 회장의 러브레터였다.금지옥엽 부잣집 딸로 자란 현 회장이 다래가 어떤 열매인지 알 리 없었지만, 오히려 그런 알 수 없는 얘기가 자꾸만 편지를 기다리게 했다. 결혼에 골인한 건 성격 급한 시아버지 때문이었다. 학교도 마쳐야 하고 연애 기간도 더 길게 가지려 했지만, 정주영 회장은 서둘러야 한다며 사업처럼 속전속결로 밀어붙였다.데이트하고 들어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아들을 불러놓고 “오늘은 청혼했느냐”고 다그치곤 했다. 덕분에 교제한 지 1년 남짓된 76년 7월, 두 사람은 웨딩마치를 울렸다. 현대가 며느리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은 ‘부유한 노동자’라며 구두 한 켤레를 20년 이상 신을 만큼 사치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정주영 명예회장이었다. 당연히 집안 살림도 검소가 철칙이었다. 부족한 것 없이 자란 현 회장에겐 여간 당혹스러운 환경이 아닐 수 없었다. 더 힘들게 한 것은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집안 분위기였다.현대가는 남자가 많은 집안이라, 여필종부(女必從夫)의 원칙이 엄격했다. 새벽에 일어나 시어른 밥상을 차리는 것부터 시작해 남편 출근을 돕고 아이들 뒷바라지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가사일을 거드는 사람이 있어도 밥상은 꼭 며느리가 봐야 했다. 정 명예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지낼 때는 집안에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매일 같이 쏟아지는 술상에 뒷정리까지 며느리가 도맡아야 했다. 딸만 있는 집에서 자란 현 회장은 여자라고 차별 받아 본 적이 없다.하고픈 활동은 다 해보며 학창시절을 보내고, 진보적 여성학까지 공부한 젊은 며느리가 이런 집안 분위기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시아버지도 그를 며느리 가운데 유독 예뻐했다. 현 회장은 정성을 다해 시부모를 모시고 남편을 내조했고, 삼남매를 낳아 지극정성으로 키웠다.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아들과 엄마가 함께 참여하는 행사에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 소박한 옷차림으로 가장 먼저 학교에 갔을 정도다. 아무도 그가 현대그룹 며느리인 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슬픔 딛고 세상과 맞서다남편 정몽헌 회장의 죽음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정몽헌 회장은 현 회장에게 모든 것이었다. 살아가는 이유이자 세상이었다. 그를 비통함과 절망의 늪에서 빠져 나오게 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세상의 비정함이었다. 그는 슬픔 속에서도 남편이 없는 세상과 싸울 수밖에 없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음을 실감했다.정몽헌 회장의 49재를 지낸 지 꼭 한 달. 현 회장은 서둘러 현대엘리베이터 회장에 취임했다. 취임식도 등기이사 등재도 생략했다. 한가하게 격식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남편이 죽음과 맞바꾼 그룹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KCC와의 경영권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고인의 유지를 받들겠다.” 취임사는 짧지만 비장했다.현 회장은 취임 후 8명의 사장 중 4명만 재신임하고 임원 승진인사를 단행했다. ‘가신 청산’으로 명분을 쌓고, 분위기를 쇄신해 ‘현정은 체제’를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직원들에게 호소했다. “정몽헌 회장의 꿈을 반드시 실현시켜 주고 싶다.” 사내는 물론 밖에서도 현 회장을 지지하기 시작했다.여성계 인사들은 현 회장을 지키기 위한 모임까지 결성했다. 이런 지지는 현 회장 승리에 큰 힘이 돼 주었다.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현 회장은 어금니가 다 빠졌다. 현 회장은 임직원에게 보낸 글에서 “우리에게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고 썼다. 그는 이미 정주영처럼 강인해졌던 것일까.2006년 현대중공업과의 경영권 분쟁 때도 한 치의 흔들림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현 회장은 ‘정씨 적통 문제’도 정면으로 항변했다. “정씨 집안으로 시집와서 30년을 살았고, 어떠한 경우라도 정씨 집안의 사람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2005년 7월, 북한 김정일 위원장은 “정몽헌 회장에게 금강산을 주었으니 현 회장에게는 백두산을 맡기겠다”며 백두산과 개성관광을 승인했다.현 회장을 대북사업의 공식 파트너로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현 회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북사업이 전면 무효가 될지도 모를 위기에 봉착했다. 당시 김윤규 현대아산 부회장을 사퇴시킨 것에 대해 북측은 강한 유감을 표하며 금강산관광 인원을 절반으로 축소할 것을 요구하고, 롯데관광에 개성관광을 제안했다.심지어 현 회장이 금강산 이산가족 면회소 착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출입국사무소에 들렀을 때는 핸드백을 열어 보라고까지 했다. 북측의 요구는 김 부회장의 복귀였다. 현 회장은 딜레마에 빠졌다. 실리를 좇아 북측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원칙을 지킬 것인가.그룹을 지키자니 대북사업이 어렵게 되고, 대북사업을 성공시키자니 그룹의 기강이 무너질 것 같았다. 현 회장은 원칙을 지켰다. “비굴한 이익보다 정직한 양심을 택하겠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북측은 다소 누그러진 태도로 금강산관광 협의를 해오기 시작했다.그는 북측에 끌려 다니지도 않으면서도 끝내 사업 재개를 이끌어냈다. 한국 정부도, 심지어 미국도 힘겨워하는 북측과의 협상을 경험도 없는 여성 경영자가 성사시킨 것이다. 대북사업은 현 회장의 존재이유다. 현대그룹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점에서도, 남편 정몽헌 회장의 한이 서려 있다는 점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숙명의 과제다.2006년 북핵 실험으로 금강산 관광객이 하루에 평소 1500명에서 20명까지 떨어졌을 때도 현 회장은 “단 한 명의 관광객이 있더라도 계속하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그가 대북사업에서 거둔 성과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 후, 백두산관광과 금강산 비로봉 관광사업 합의서가 체결됐고, 개성관광도 시작했다.관광객 피격사건으로 금강산관광이 전면 중단된 데 이어 개성관광마저 길이 막힌 상황에서도 그의 대북사업 의지는 확고했다. 그리고 끝내 대화의 물꼬를 텄다. 그가 침몰 직전의 ‘현대호’를 넘겨받은 지 6년. 대북송금 사건으로 그룹 전체가 유동성 위기에 빠졌고 KCC와의 경영권 분쟁으로 취임 첫해인 2003년 2654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현 회장은 상처를 감수하며 경영권 분쟁을 마무리하고 계열사 추스르기에 팔을 걷어붙였다. 이후 해마다 흑자를 냈다. 대외 신인도도 급상승해 현대상선,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증권의 회사채 신용등급이 2003년보다 최고 6단계나 상승했다. 글로벌 시장 개척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전 계열사의 글로벌 역량 강화를 당부하자 계열사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대상선은 러시아·두바이·시드니 등지에 현지사무소를 개설하는 등 2010년까지 해외 거점을 10개 지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감성리더십 빛났다경영권 분쟁과 대북사업의 불확실성 속에서도 그룹을 살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회장으로 취임할 때 가장 큰 결격사유로 지적됐던 ‘경험 없는 주부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현 회장은 남성적 분위기의 현대그룹을 감성적으로 바꾸는 데 리더십을 보였다.복날엔 임직원들에게 삼계탕을 보냈다. 가족의 건강을 챙겨본 주부가 아니라면 못하는 일이다. 여직원에게, 여성에게 보내는 희망 메시지가 담겨 있는 다이어리를 선물하기도 했다. 샘플을 놓고 요리조리 돌려보며 “여자들은 이런 디자인을 좋아한다”고 수정을 지시했다. 딸을 키우는 엄마이기에 가능한 아이디어다.임직원의 고3 수험생 자녀에겐 목도리를 선물했다. 회장이 계열사 사장단과 ‘반 고흐 전’ 관람을 가는 것도 ‘현대스럽지’ 않은 풍경이다. 취임 초부터 그의 최대 무기는 e-메일이었다. 그룹에 위기가 닥쳤을 때마다 e-메일로 임직원을 직접 격려하고 진심을 털어놨다.직원들은 그의 진정어린 편지를 읽으며 함께 슬퍼하고 분노했다. 그런 공감은 결속을 만들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생전 이런 말을 했다. “누구나 생애 동안 역사에 남을 정치가, 학자, 혁명가가 될 수 있고 예술가도 될 수 있다. 그리고 기업가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주부도 역사에 남을 기업가가 될 수 있다.

2009.10.08 12:02

9분 소요
“치매 앓던 선친 뜻 이제야 깨달아”

산업 일반

동성제약 이양구 사장. 그는 얼마 전 선친인 이선규 회장의 49재를 지냈다. 고(故) 이선규 회장은 생전 뇌졸중과 치매를 앓다 세상을 떠났다. 이 사장은 선친의 영정에 『치매, 그와 관련된 질환들』이라는 책을 바쳤다. 외국 서적을 번역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데만 6년이 걸렸다. 이 사장을 만나 책을 내게 된 동기와 치매로 고생하다 돌아가신 선친에 대한 회고담을 들었다. ‘타인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아도, 타인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결코 알 수 없다.’ 필립 클로델이 쓴 『회색 영혼』이란 소설에 나오는 말이다. 치매 환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딱 저렇지 않을까. 치매 환자가 사랑했던 가족이라면 소통의 어려움은 더욱 답답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의 속마음을 알 수 없다고 해서 그 사람과의 관계까지 포기하지는 않는다. 끈질기게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타인의 마음속에 따뜻한 존재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계속 가지고 있다. 그 대상이 가족이라면 더욱 그렇다. 염모제 ‘세븐에이트’로 유명한 동성제약의 이양구 사장과 선친인 고 이선규 회장의 관계가 꼭 그랬다. 이선규 회장은 1994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치매와 중풍을 앓기 시작했다. 이양구 사장을 비롯한 가족들의 노력으로 증상이 많이 호전됐지만 얼마 전 예상하지 못한 폐렴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향년 84세였다. 이 사장은 선친의 영정에 『치매, 그와 관련된 질환들』(약사공론)이라는 책을 바쳤다. 약학박사인 권중무 부사장과 이 사장이 공동으로 쓴 책이다. 외국 서적을 번역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데 6년이 걸렸다. 이 사장은 “고인이 살아계실 때 완성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며 “그래도 부친이 소망하신 일 중 하나를 이뤄 기쁘다”고 말했다. “선친이 쓰러졌을 때 많이 놀랐죠. 그런데 곧 회복하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치매, 중풍을 모두 앓으셨지만 간병인을 두지 않을 정도로 강인하셨죠. 그래도 올해 들어 많이 약해지셨다는 생각은 들었어요.” 이선규 회장은 다시 건강을 회복했지만 97년에 다시 한 번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결국 2001년 아들인 이 사장에게 CEO 자리를 물려줬다. 부친과 건강식품 사업 놓고 갈등 “병을 앓기 시작하시면서 선친에겐 두 가지 바람이 있었습니다. 치매에 관련된 책을 발간해 관련 정보를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치매와 당뇨, 뇌졸중에 관련된 의약품을 개발해 싼값에 공급하는 것이었어요. 책을 발간했으니 부친의 염원 중 하나는 이룬 셈입니다.” 이 사장은 부친 곁에서 알뜰한 간병을 하진 못했다. 부친이 쓰러진 직후 회사를 온전히 떠안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강하던 부친의 아픈 모습을 가족의 입장에서 지켜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부친은 평생 제약회사에 열정을 바친 분이 아닌가. 동성제약은 1957년 창립한 제약회사다. 국내 최초의 염색약 양귀비 1호를 개발한 것을 시작으로 염모제 ‘세븐에이트’와 일반의약품인 ‘정로환’을 통해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다른 제약회사들과 달리 의약품 부분이 약한 편이지만 현재는 이선규 회장의 바람대로 노인성 질환과 관련된 의약품을 개발하고 라이선스를 통한 외국과의 협력을 추진 중이다. “선친은 뇌졸중으로 처음 쓰러진 94년 이전부터 노인성 질환에 대해 관심이 많았어요. 어쩌면 선견지명이기도 한데, 이쪽 시장이 크게 확대될 것이라는 확신을 하셨습니다. 한번은 치매 치료차 일본에 있는 병원을 가셨다가 기능성 건강식품을 접하셨는데 그 제품의 가능성을 보시고 곧바로 수입을 결정하시기도 했죠.” 이 사장을 포함해 회사 간부들은 제품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기능성 건강식품 시장은 규모도 작았고,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주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부친의 뜻이 워낙 확고해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이 사장의 염려대로 수입한 건강식품은 기대에 못 미쳤다. 이 사장은 선친과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기능성 건강식품이 성과가 없는 것을 선친은 광고가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했어요. 치매로 기억력이 감소하신 탓에 과거 광고 시장에 대한 기억만을 가지고 계셨던 거죠. ‘그 돈으로 왜 광고를 더 하지 않느냐’고 많이 다그치셨습니다. 실제로는 광고도 많이 했어요. 근데 매체가 많이 늘어나면서 지면 광고의 효과가 별로 없었던 거죠. 시장도 협소했고…. 그때 마음고생 많이 했습니다.” 이 사장이 키우려는 제품과 부친이 미는 제품이 달라 이견을 좁히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 사장은 회사를 성장시키자면 주력 제품에 대한 투자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데 반해 이 회장은 본인이 직접 앓고 있는 노인성 질환 의약품과 건강식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이선규 회장의 막내아들인 이 사장은 30세 무렵부터 회사에서 경영수업을 쌓았다. 회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회사에 대한 애정도 선친 못지않았다고 자부했다. 동성제약은 선친의 지나온 인생이 모두 담겨 있는 회사였기 때문에 회사에 대한 애정은 더욱 각별했다. 이 사장은 “선친이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 제일 가슴 아팠다”고 말했다. “선친의 바람을 이루고 싶은 마음은 자식들이라면 누구나 하지 않나요?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선친이 몸을 회복하는 것만큼 선친이 키운 회사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했죠. 그래서 선친의 뜻을 무조건 따를 수는 없었어요. 물론, 싫은 소리도 하고 반대도 많이 했지만 아버지의 바람을 이루고 싶다는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요.” 이선규 회장은 열여섯 살에 서울로 상경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약 장사를 시작했다. 그 후 고려은단주식회사를 인수해 회사를 키웠다. 동성제약을 인수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망해가던 동성제약은 제자리를 찾았고 곧 성장 궤도에 올라섰다. 컬러 염색약 ‘훼미닌’ ‘세븐에이트’, 배탈·설사약 ‘정로환’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선친은 자수성가하신 분이고, 또 다른 창업 1세대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판단에 대한 확신이 상당하셨어요. 병을 앓고 계시면서도 회사 일에 관심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병 중에도 인사 문제는 꼭 선친의 결재를 받아야 했어요. 2005년이 되어서야 구체적인 업무에는 신경을 쓰지 않을실 정도였죠.” 치매의 치명적인 약점은 자신의 상태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치매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회사의 CEO라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이 사장은 부친이 시장성이 약한 건강기능식품에 대한 고집을 부릴 때마다 회사 간부들과 함께 말리며 위기를 넘겼다고 말했다. ‘이선규 의학상’ 통해 노인성 질환 약학자 발굴 “회사 간부들이 설득을 못하면, 제가 또 설득을 하고, 제가 설득을 못하면 어머니까지 설득에 나섰죠. 사실 어머니의 역할이 컸어요. 선친이 어머니 말씀은 들으셨거든요. 다행스러운 건 회사 간부들이나 나나 아버지가 왜 그런 생각과 판단을 했는지 이해를 했다는 겁니다. 무조건 치매 환자로 부친을 대했다면 지금 동성에서 치매백신 개발이나 노인성 질환과 관련된 외국 의약품 수입을 적극적으로 하겠습니까? 부친도 질병을 앓고 계셨지만 절실했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이해를 한 거죠. 물론 건강식품은 이제 포기를 했지만요.” 동성제약은 동성장학재단을 설립해 15년 동안 소년·소녀 가장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왔다. 그리고 10년 전부터는 ‘이선규 약학상’을 제정해 뛰어난 의약품을 개발한 약학자를 지원하고 있다. 현재는 노인성 질환과 관련된 의약품을 개발하는 약학자 위주로 수상자를 고른다. 동성제약이 개발하고자 하는 제품에 시너지 효과를 불러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다. “처음에 건강식품을 수입할 때는 오로지 돈이 목적이었어요. 회사 CEO라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달라졌어요. 노인성 질환 관련 제품을 개발하고 수입하는 것은 투자 이외의 보람도 있습니다. 노인성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한 줄기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선친의 뜻을 깨달은 거죠. 당시엔 아버지가 왜 저러실까 많이 답답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 생각이 결국 맞았던 게 아닌가 싶어요.”

2008.05.25 10:50

5분 소요
[秘話 현대그룹]현정은의 첫 시험대 ‘가신그룹   청산’ ‘소폭 쇄신’

산업 일반

왼쪽부터 강명구 전 현대택배 회장, 최용묵 현대엘리베이터 사장,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 김재수 전 현대 구조조정본부 사장. 지난해 11월 현정은 회장이 취임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현회장 뒤로 고 정몽헌 사진이 보인다. 현정은 회장이 우여곡절 끝에 현대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지 보름을 갓 넘긴 지난해 11월6일.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은 서울 계동 사무실을 나와 허겁지겁 자신의 승용차를 탔다. 그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잠시 뒤 김사장이 탄 승용차는 동숭동 대학로에 있는 현대엘리베이터 서울 사무소에 도착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쏜살같이 현정은 회장 집무실로 들어갔다. 이 날짜 조간신문을 움켜쥔 채였다. 같은 시각 현대그룹 각 계열사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날 아침 핵심 경영진들이 모두 현회장에게 사표를 제출하기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강명구 현대택배 회장, 김재수 현대그룹 경영기획팀 사장, 최용묵 현대엘리베이터 사장, 노정익 현대상선 사장, 김지완 현대증권 사장 등 핵심 경영진들이 대상이었다. 김윤규 사장은 현회장 집무실에 들어서자 서둘러 손에 쥐고 있던 조간신문을 펼쳤다. “회장님! 이걸 보십시오.” 현회장은 조용히 신문기사를 쳐다봤다. ‘정상영 금강고려화학(KCC) 명예회장이 현대그룹 인수에 의욕을 보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저쪽 상황은 이렇게 급박하게 움직이는데 지금 우리가 핵심 경영진 인사를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쇄신 차원의 인사라고 해도 외부에서는 ‘적전분열’(敵前分裂)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뒤로 미루시죠.” 현회장은 괴로운 듯 혼잣말처럼 “헷갈린다”고 말했다. 현회장은 이어 “이 사람 말 들으면 이렇고, 저 사람 말 들으면 저렇다”고 말했다. 현회장은 얼마 전 강명구 회장이 보고할 때도 “여러 사람 말이 서로 달라 내가 판단하기 어렵다”고 토로했었다. 현회장은 자신이 취임한 뒤 처음으로 공식적인 사장단 회의를 이날 소집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앞서 현회장은 각 계열사별로 업무보고를 받고 임원들의 얘기도 들었다. 이런 얘기를 듣고 현회장은 결심을 굳혔다. 회장으로 취임한 마당에 분위기 쇄신을 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했다. 이미 내부 조율도 마쳤다. 그런 뒤 각 사장들에게 이날 소집을 통보했다. 현회장은 이날 사장단 회의에서 대국민 감사문도 채택할 계획이었다. 대국민 감사문에는 세 가지 내용을 넣기로 했다. 첫째, 현대그룹 회장으로서 일을 할 테니 국민 여러분이 지켜봐 달라. 둘째, 그간 현대그룹의 가신그룹과 모럴 헤저드(도덕적 해이)라고 지적받아온 경영진을 인사 조치하겠다. 셋째, 젊고 참신한 인재들로 새로운 임원진을 구성하고 재도약하겠다. 가신그룹으로 퇴진을 요구받은 사람은 바로 강명구 회장과 김재수 사장 두 사람이었다. 이들은 2000년 이른바 ‘왕자의 난’ 때 가신이라고 지목받아 정부·채권단·정씨 일가 등으로부터 끊임없이 퇴진을 요구 받았다. 그러나 정몽헌 회장은 자신이 투신 자살할 때까지 이들을 감쌌다. “정몽헌은 人事를 모르는 회장” 이들과 함께 퇴진을 요구받은 사람은 노정익 현대상선 사장 등이다. 정몽헌 회장의 상중에 이사회를 열어 스톡옵션을 나눠가져 사회적 지탄을 받았기 때문이다. 현회장의 남편인 고 정몽헌 회장은 생전에 핵심 경영진 인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인사를 할 줄 모르는 회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정회장의 경우 어떻게든 한번 임명하면 자신의 의지로 이들을 갈아치우지 못했다는 게 현대그룹 인사 담당자들의 설명이다. 현대그룹 내부에서는 이를 두고 “정몽헌 회장의 심성이 너무 곱고 착해서 남을 자를 수 없었을 것”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정회장의 생전에 가장 큰 인사는 박세용 그룹 구조본부장을 경질한 일이다. 그러나 당시에도 내막을 들여다보면 정회장이 아니라 이익치 회장의 작품이었음이 드러나기도 했다. 특히나 이익치 회장은 정부·채권단의 ‘반강제적인 협박’에 의해 물러난 사람이다. 지난 2002년 물러난 김충식 현대상선 사장도 정회장이 ‘독한 마음’을 품고 경질한 게 아니다. 그는 강명구 회장 등 가신의 전횡에 반발해 돌연 사표를 냈었다. 현대그룹은 항상 인적 쇄신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인적 쇄신은 현대그룹의 아킬레스건이었다. 따라서 현대그룹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감초 같은 해결책은 ‘인적 쇄신’‘가신그룹 청산’이었다. 현회장이 정회장 타계로 현대그룹을 이어받은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현회장이 취임해 안팎에서 주문받은 첫번째 일이 바로 인적 쇄신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가신그룹(강명구 현대택배 회장·김재수 현대그룹 경영기획팀 사장·김윤규 현대아산 사장)과 모럴 헤저드 그룹(노정익 현대상선 사장 등)에 대한 청산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현회장은 취임 전후 한 달가량을 이 문제와 씨름했다.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당사자들과 대화도 했다. 친분이 있는 ‘비밀 조언 그룹 인사들’의 말도 들었다. 현회장은 이런 과정을 거친 뒤 내부적으로 우선 강명구 회장과 김재수 사장을 이날 퇴진시키기로 결론지었다. 대신 젊고 참신한 인물들을 몇명 발탁해 그룹을 쇄신하는 모양새를 보여주려고 했다. 부회장급 인사를 영입한다는 방침도 굳혔다. 이는 정상영 명예회장이 현대그룹 경영권 확보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공격의 빌미로 삼은 ‘현대그룹 인적 쇄신’에 대한 대응책이기도 했다. 그런데 김윤규 사장은 대북사업의 지속성으로, 노정익 현대상선 사장은 회계사라는 전문성을 평가해 외부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인적 쇄신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렇게 해서 이날 사장단 회의 날짜가 잡힌 것이다. 현회장은 대국민 감사문과 함께 현대그룹이 인적 쇄신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선언할 참이었다. 그런데 김윤규 사장이 예정에도 없이 당일 아침에 찾아와 현회장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결국 현회장은 김윤규 사장의 말을 받아들였다. 김윤규 사장이 내민 조간신문이 사장단 회의를 취소시키고 인적 쇄신을 지연시킨 셈이 됐다. 현회장 취임 이후 의욕을 보였던 첫 사장단 회의는 이렇게 해서 무산됐다. 현회장은 대신 이날 대국민 감사문만 발표했다. 당초 계획됐던 대국민 성명서의 ‘첫번째’만 그대로 발표되고 가장 중요한 두번째의 인적 쇄신 부분 등이 빠졌다. “그 밥에 그 나물” 현대그룹의 일부 쇄신파 경영진들은 크게 반발했다. 적전분열을 막으려다 적전분열을 불러온 꼴이 됐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로군. 그 밥에 그 나물이지.” ‘그 밥’은 정몽헌 전 회장을, ‘그 나물’은 현회장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정몽헌 회장 시절에도 이 같은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정몽헌 회장은 결재를 하고 난 뒤에도 가신들이 다시 들어가 몇마디 하면 뒤집어지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현대그룹 안팎에서 가신그룹이 빈축을 산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런데 현회장이 취임하고 결심한 첫 일이 정몽헌 회장 때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 뒤집혔던 것이다. 현회장에게 이 같은 조치를 건의하고 조언했던 현대그룹 내 쇄신파 경영진들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정몽헌 회장 생전에 하던 가신그룹의 행태가 똑같이 재연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가신그룹의 행태란 무엇일까?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의 발언을 그대로 옮겨본다. “정몽헌 회장은 생각보다 악의가 없고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경영인이었습니다. 현대상선이 대북사업을 시작했다가 포기하는 과정에서 정몽헌 회장을 여러 차례 찾아갔습니다. 현대상선이 대북사업을 계속 하게 되면 다 함께 넘어진다고 설명드렸죠. 그런데 당시 가장 힘들었던 게 뭔지 아십니까? 가신그룹들의 방해공작이었습니다. 우선 김윤규 사장 말을 하죠. 정회장이 제 말을 다 듣고 대북사업 포기를 위한 절차를 밟을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회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쪼르르 들어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김윤규 사장이었습니다. 가신그룹이라고 비난받던 이익치 회장, 김재수 사장도 비슷한 일이 많았습니다. 결국 정회장이 ‘오전에 결재해 줬다가 오후에 뒤집어지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물론 정회장이 합리적인 생각은 많이 하셨지만 우유부단한 일면도 작용했죠. 그리고 정회장은 가신그룹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감싸고 돌았습니다. 나중에는 제가 가신들을 비난했죠. 그랬더니 그들이 나를 공격하면서 하는 말이 기가 막혔습니다. ‘김충식이는 저 혼자 살려고 한다’느니, ‘현대상선을 계열분리해서 오너 노릇을 하려고 한다’느니…. 기가 막혀서 말을 못하고 나왔습니다.” 현대그룹에 매우 비판적인 전직 임원의 설명도 비슷한 맥락이다. “엉터리 약사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감기 걸린 환자가 약방에 들어와 얘기를 했습니다. 머리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편도선도 섰고, 기침도 하고, 가래도 나오고…. 그런데 약사는 환자가 어디가 아프다고 하는 말의 횟수대로 약을 집어넣습니다. 어디가 아프다는 소리를 열번 하면 약이 열 가지, 백번 말하면 백 가지를 집어넣는 겁니다. 현대의 가신그룹은 정회장을 그런 식으로 호도했습니다. 가신그룹은 환자였고, 정회장은 엉터리 약사였죠. 2000년 형제간 경영권 다툼이 벌어졌던 왕자의 난 당시 현대그룹은 마치 ‘사오정’ 같았습니다. 정부·채권단·시장의 쏟아지는 경영 쇄신 요구와는 딴판으로 움직인 겁니다. 모두 이런 경영시스템 때문이었습니다. 재계 1위 그룹이었던 현대가 미니그룹으로 전락한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몽헌 회장의 의사결정 과정에 문제가 있었던 거지요.” 정회장 시절 현대그룹의 이런 악몽이 현정은 체제에서 다시 되살아났던 것이다. 새 바람이 불 것으로 크게 기대했던 일부 쇄신그룹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정상영 명예회장과 경영권 다툼도 가신그룹으로 인해 확대 재생산됐다는 비난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가신그룹들이 뒤에서 싸움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몽헌 회장이 가신그룹에 발목 잡혀 인적 쇄신을 하지 못한 딜레마를 현회장도 똑같이 겪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일부에서는 남편이 빠진 수렁에 똑같이 빠진 게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다. 결국 현회장은 김윤규 사장의 조언대로 적전분열을 막으려다 가신그룹과 쇄신그룹 간 내분에 휘말릴 처지에 놓였다. 특히 강명구 회장과 김재수 사장이 사표를 내겠다고 공언한 뒤 계속 버티는 것에 대해 그룹 내부에서조차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강명구 회장은 정몽헌 회장 투신자살 때 상가에서 ‘주군을 모신 사람’이라고 빗대면서 즉각 사퇴 의사를 내비쳤다. 강회장은 모든 뒷수습을 하고 정회장의 49재(齋) 때 물러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김재수 사장은 정회장과 함께 대북송금·비자금 문제로 검찰수사를 받을 때부터 “나는 이미 마음을 비웠다”고 밝혔다. 그는 기자를 만나 “나는 요즘 괴로와서 ×도 안 선다. 회사를 그만둬야겠는데 뭐를 했으면 좋겠느냐? 인터넷 분야에서 뭐를 하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농담을 했다. 자신은 이미 현대그룹을 떠났으니 가신그룹이니 뭐니 하면서 괴롭히지 말아달라는 주문이었다. 김사장은 정회장 타계 이후에는 외부와 접촉을 끊고 공개적인 장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한 측근은 “자신이 정회장을 제대로 모시지 못해 자살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 무척 괴로워했다”며 “하루 빨리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2003년 9월 하순 정회장의 49재가 예정된 며칠 전. 김재수 사장은 강명구 회장을 찾았다. 김사장은 정회장의 49재에 맞춰 사표를 내는 문제를 상의하러 갔다. 그런데 강회장은 할 일이 남았으니 한달만 더 기다리자고 했다는 것이다. 강회장은 이후에도 또 다시 한달만 더 있다가 사표를 내자고 말을 자꾸 번복했다는 게 현대그룹 고위 관계자의 귀띔이다. 현정은 체제의 이 같은 자중지란 분위기는 한동안 계속됐다. 더구나 정상영 명예회장이 개인적으로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사모으면서 우호지분을 포함해 절반 가까이 확보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분위기는 더욱 침체됐다. 정상영 명예회장이 현회장과 현대그룹 경영진에게 ‘백기투항’을 하도록 직·간접적인 압력을 넣고 있었던 때다. 그런데 이 같은 경영진간의 혼란스런 내부 분위기가 확 바뀐 것은 지난해 11월17일이었다. 현회장은 현대그룹을 국민기업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현대엘리베이터는 1천만 국민주를 통한 유상증자를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사표 내겠다던 가신들 “한달만 더” 현대엘리베이터는 이날 이사회를 열고 유상증자를 통한 신주를 발행하되 정상영 명예회장 측은 사실상 참여를 제한하는 조치를 내렸다. 신주 1천만주를 발행하되 20%를 우리사주로 배정하고 나머지는 일반 공모방식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정상영 명예회장이 추가 지분을 매입하는 방법을 막아 지분을 뚝 떨어뜨려 1대 주주에서 끌어내리기 위한 방안이었다. 현대그룹은 이를 끝내 실현시키지 못했지만 분위기를 일신하는 데는 주효했다. 현대 내에서는 ‘가신그룹’ ‘쇄신그룹’ 할 것 없이 모두 박수를 쳤다. 현회장의 배포 큰 결단력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그동안 일부 분열 조짐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던 가신그룹이 국민기업화 선언을 계기로 자신감을 다시 얻어 ‘현회장 체제 지키기’에 적극 나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현회장은 다음날인 18일 계열사 임직원들을 대거 동행하고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선영을 찾을 정도로 자신감을 얻었다. 이후 한달 뒤인 지난해 12월18일. 현회장이 내건 국민기업화 추진은 무산됐다. 하지만 국면 돌파에 자신감을 얻어 경영진 퇴진 요구를 일부 스스로 수용하기도 했다. 현회장은 남편 때부터 아킬레스건이었던 ‘가신그룹 책임론’을 불식하고, 친정 체제를 굳히겠다는 계산이었다.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정명예회장 측은 ‘정몽헌 회장의 현대그룹을 위기로 몰아넣은 주범들이 책임은 지지 않고 자리에만 연연한다’ ‘경영 경험이 없는 현회장을 옹립, 수렴청정하려 한다’는 공격을 해왔다. 현회장은 마침내 핵심 사장단 8명의 사표를 일괄 제출받았다. 그런 뒤 마침내 강명구 회장과 김재수 사장을 경질했다. 그러나 이들은 고문이라는 직함으로 현회장의 지근거리에 남아 경영상 조언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혀 여운을 남겼다. 이제 현회장은 정몽헌 회장이 경영하던 현대그룹의 전권을 잡았다. 현회장은 경영권 다툼에서 승리한 뒤 자신감을 얻어 이제는 전문경영인 영입 없이 단독회장 체제로 갈 계획도 세웠다. 그의 향후 경영 행보는 남편인 고 정몽헌 회장 때와 비교되면서 계속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2004.04.09 00:00

9분 소요

많이 본 뉴스

많이 본 뉴스

MAGAZINE

MAGAZINE

1781호 (2025.4.7~13)

이코노북 커버 이미지

1781호

Klout

Klo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