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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내용을 입증할 수 있나

성서 내용을 입증할 수 있나

Search for the Sacred

예루살렘에서 텔아비브 방향으로 4km 정도 떨어진 추바 집단농장. 5백50명에 이르는 그곳 주민들 대다수는 “그냥 조용히 살기를 바란다”고 야엘 케렘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집단농장의 과수원·낙농업·방탄 유리공장과 별도로 운영되는 보조사업인 관광객 숙소의 마케팅을 담당하는 그녀는 그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난주 뉴스위크와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도 그녀의 휴대폰은 끊임없이 울렸다. 예루살렘의 수도사 단체, 터키의 관광객들, 미국과 유럽의 기자들 전화였다. 케렘은 올리브 숲을 가리키며 “관광버스 주차를 위해 이곳을 포장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은 역사는 풍부하지만 실제 땅은 좁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추바 집단농장의 올리브 숲 바로 아래는 인류 문명 초기의 거주지 담장과 저수지, 예수 생존 시대의 유목민들이 사용한 동굴들이 있다. 그 유목민들은 침례 요한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4세기 기록에 따르면 침례 요한은 이곳에서 3km 떨어진 곳에서 태어났다.

그런 사실은 지난주 이스라엘 고고학자 시몬 깁슨(45)의 새 책에 관한 소문이 퍼지기 전까지는 큰 이목을 끌지 못했다. 깁슨은 지난 3년간 추바 집단농장의 지하 동굴을 발굴해 왔다. 그는 그 동굴에 침례 요한이 (어쩌면 예수가 직접) 침례를 거행했을지 모르는 인공 웅덩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회의론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고 입증할 방도가 없지만 만약 그런 주장이 받아들여지면 추바 동굴은 기독교인들에게 지상에서 가장 성스런 장소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추바 동굴의 성역화는 이곳이 주차장이 아닌 올리브 숲으로 남아주기를 바라는 키부츠 사람들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축복이라고는 할 수 없다. 성지 팔레스타인에 묻혀 있는 역사는 영토와 물을 장악하려는 끝없는 분쟁만큼이나 논쟁의 대상이다. 중동에서는 도기나 양피지 조각이 무기가 될 수 있다. 1984년 작고한 이스라엘 고고학의 아버지 이가엘 야딘은 유대인의 이스라엘 영토 소유권이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함락시킨 3천2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애썼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이 살았었다는 성서 내용이 근거없다고 주장하지만 이스라엘인들은 그런 주장이 시온주의의 정당성을 훼손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양쪽 다 팔레스타인인 봉기에 직면해 싸움을 잠시 중단해야 했다. 지난 4년 동안 이스라엘내 학술 발굴은 약 45건에서 약 4건으로 줄었다. 애리조나대(투산) 명예교수이자 근동지역 고고학 분야의 미국 최고 권위자 중 한명인 윌리엄 데버는 이를 “위기”라고 불렀다.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은 물증이 거의 없는 성경 내용을 입증하기 위해 연구비를 지원하는 미국 기독교 단체들을 경계하는 동시에 환영한다. 예수의 말씀이 역사를 바꾸어 놓았지만 예수 역시 당시 3억명의 인구 중 한명일 뿐이었고, 그의 자취는 수세기에 걸쳐 쌓인 먼지에 덮여버렸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유물을 찾으려는 노력은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성 헬레나가 예수가 죽은 바로 그 성스런 십자가를 발견했다고 했을 때부터 2년 전 한 이스라엘 골동품 수집가가 예수의 형제 야고보의 유골을 담은 것임을 말해주는 글귀가 새겨진 유골함을 발견했다고 주장했을 때까지 계속되고 있다.

시대마다 그런 유물은 당시 가장 중요하게 간주되는 가치를 부여받았다. 성스런 십자가를 만지면 죽은 자도 살아난다고 믿었으며 ‘야고보 유골함’ 소유자는 그 가치를 2백만달러로 매겼다. 그러나 그런 신비한 가치는 검증되지 못했다. 지금은 둘 다 가짜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성 헬레나가 발견했다는 십자가의 조각(그녀는 그것이 그 유명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십자가 현판의 일부라고 주장했다)은 2년 전 과학자들에 의해 10∼12세기 것으로 확인됐다.

야고보 유골함 명문(銘文)의 경우 “학계의 중론은 위조”라고 미국 듀크대의 유대학자 에릭 마이어스는 말했다. 이스라엘 경찰은 소유주가 2백달러에 구입했다는 그 유골함을 압수했다. 그러나 소수의 학자들은 그 유골함의 명문이 진짜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성서고고학 리뷰지의 편집장이자 ‘야고보 유골함’에 대한 책의 공동집필자 허셸 섕크스의 견해를 믿는다.

아무튼 주류 학자들은 교회나 골동품 가게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시대와 출처를 정확히 밝힐 수 없어 고고학적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야고보 유골함이 진짜라고 해도 새 정보는 없다”고 매캘레스터대 고전학과장 앤드루 오버먼은 말했다. 원리주의 단체들이 아무리 회유해도 고고학자들은 여간해서는 성경 내용 입증 작업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원리주의 단체에 돈은 많지만 그곳의 자금을 지원받으려는 학자가 없다”고 사우스 플로리다대(탬파)의 제임스 스트레인지는 말했다. 스트레인지는 갈릴리 남부 1세기의 도시 세포리스의 발굴팀을 이끌고 있다.

고고학의 가치는 성경 내용을 입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맥락을 부여하고 이따금씩 중요한 세부사항들을 밝히는 데 있다. 유일하게 십자가에 처형된 희생자의 유골이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진 한 유골함은 화가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오류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 희생자의 발뼈를 보면 처형당하는 사람의 두 발을 십자가 기둥 위에 겹쳐 놓은 뒤 앞에서 못을 박은 것이 아니라 기둥 양 측면에 발을 벌려놓고 옆에서 못을 박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드폴대 종교학 명예교수이며 예수 세미나의 공동의장을 역임한 존 도미니크 크로산은 에베소의 간단한 표지판을 보고도 많은 것을 추론해낼 수 있다. “그곳에는 바울이 통과했을 법한 시장으로 가는 문이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 꼭대기에는 ‘카이사르는 신의 아들’이라고 쓰여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대역죄였다.”

크로산은 1986년 갈릴리 호수에서 발견된 고기잡이배를 보고 더 많은 것을 유추했다. 용골과 돛대, 양옆에 노가 달린 그 튼튼한 배는 예수가 탔을 법한 바로 그런 배였다. 크로산은 나무를 거듭 덧대어 쓰다가 마지막으로 배를 버리기 전 재활용하기 위해 못을 다 뽑아낸 흔적을 보고 배 주인이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었다고 추정했다. 다른 학자들은 그의 주장을 반박하지만 크로산은 이것이 갈릴리 어부들에게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가 닥쳤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크로산은 이런 배경을 근거로 갈릴리 어부들이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는 성경 내용을 설명한다. “그들이 그냥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다른 인간적인 이유가 있었을 수 있다. 호수 주변의 경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 발굴된 성서 유적지 가운데 아마도 가장 많은 것을 시사하는 곳은 나사렛에서 8km 떨어진 세포리스일 것이다. 그곳은 1985년 이래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성서에 지명이 직접 거명되지는 않았지만 스트레인지는 그곳이 마태복음 5장 14절에서 예수가 언급한 ‘산 위에 있는 동네’라고 생각한다. 그곳은 예수의 탄생 즈음해 파괴됐다가 재건됐다. 따라서 예수가 재건 현장에서 일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곳에서 목수로 일한 예수의 연장 허리띠를 찾을 수 있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가 살았던 곳의 환경이다.

“예수는 부자에 대해 부정적인 말씀을 많이 하셨다”고 스트레인지는 지적했다. “부자와 대면할 수 있는 곳은 나사렛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었다.” 고고학자들은 안뜰이 있고, 벽에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로마 제국 어디서나 발견되는 사치품들이 들어 있는 세채의 저택을 발굴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유대인의 집이었다. 유대식 식사법을 지키고 침례를 받은 흔적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 시대의 사회적 정황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고 미국 텍사스대(오스틴) 종교학 교수 L. 마이클 화이트는 설명했다. “그것으로 예수는 오지 마을의 가난한 농부로만 지낸 것이 아니라 로마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다양한 언어를 사용한 대도시 가까이 살았던 인물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일부 신자들에게 이런 정보는 성서를 훨씬 실제적인 기록으로 보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다른 신자들은 갈릴리의 어부들이 처한 경제적 현실이 복음 전파의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들은 고고학을 통해 궁극적으로 성서의 진실성이 입증될 것으로 보기 때문에 고고학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이것은 좀더 복잡한 문제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유대인 묘 훼손을 죄악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미국인 학자 데버는 거기에 다른 저의가 있다고 의심한다. “유대인들은 조상들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 두려워 과학적 조사를 원치 않는다.” 현재의 주류 학자들이 구약성서 직해(直解)주의자들의 주장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본질적으로 아브라함을 비롯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이 존재했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리고 한 세기 이상에 걸친 파라오 시대 이집트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의 핵심 사건인 ‘출애굽’의 증거도 아주 미미하다.

이집트인들이 팔레스타인을 침략해 포로들을 데려온 데 대한 기록과 B. C. 12세기 초 두명이 이집트에서 시나이 반도로 탈출했다는 국경 경비대원의 보고서 정도가 있을 뿐이다. 데버는 지금까지 발견된 것에 따르면 “적어도 수십만명이 사막을 가로질러 기적적으로 탈출한 출애굽은 없었고,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도 없었다”고 말했다. 듀크대 성서학 교수 캐럴 마이어스는 “구약의 여호수아서에는 여리고에 대한 내용이 여러장에 걸쳐 나오지만 당시에는 여리고에 사람이 살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몇몇 기록은 실제로 성서의 내용과 부합한다. 이집트 유물인 메르넵타 비석은 B.C. 1200년께 이스라엘인에 대한 파라오 군대의 승리를 언급하고 있다. 그 시기는 보수학자들이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거주조차 부인하는 시대에 속한다. 예루살렘의 신약성서학자 클레어 판에 따르면 이 문제는 정치적으로 너무 많이 얽혀 있기 때문에 보수학자들은 반대파들이 시온주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증거를 날조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따라서 깁슨이 뛰어든 분야는 지질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위험한 곳이다. 깁슨은 영국에서 태어나 아홉살 때 어머니를 따라 이스라엘로 갔다. 그 뒤 그는 런던대학 고고학 연구소에서 공부했다. 그의 동료들은 그를 뛰어난 현장 고고학자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추바 동굴 발견을 과학지에 발표하기 전에 일반 도서로 홍보하기로 한 결정은 몇몇 학자들의 비난을 샀다. 이스라엘 문화재청의 신망 높은 고고학자인 로니 라이히는 “축하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는 않지만 난 이번 발견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깁슨의 책에 따르면, 1999년 그는 수년 전에 그곳을 발견한 추바 집단농장 거주자의 안내로 처음 동굴 내부로 기어들어갔다. 그는 벽에서 지팡이를 잡고 축복을 하는 것처럼 한팔을 높이 든 조잡한 봉선화(棒線畵: 머리 부분은 원, 사지와 체구는 직선으로 나타낸 인물 그림)가 새겨진 것을 발견했다. 그는 즉시 그것이 침례 요한의 성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두가지를 의미했다. 발굴가치가 있으며, 연줄만 있으면 발굴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텍사스주 출신의 고고학 열성자 조셉 피플스에게 연락했고 피플스가 부유한 뉴욕 은행가로 레이건 행정부 시절 국무부 부장관을 지낸 존 C. 화이트헤드를 끌어들였다. 화이트헤드는 깁슨과 함께 동굴을 방문했고 그림을 한번 본 뒤 친구이며 동료 금융가인 로저 C. 알트먼과 함께 발굴 자금을 대기로 했다. “그곳에서 거행됐을지 모르는 침례를 생각하면 마음이 설렐 수밖에 없었다”고 화이트헤드는 돌이켰다. 그들이 몰랐던 듯한 사실은 2002년 사망한 피플스가 두건의 사기죄로 징역형을 살았다는 것이었다(깁슨 자신도 몰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피플스와 깁슨의 관계에 악의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피플스는 또 노스캐롤라이나대(샬럿) 초기 기독교학 교수 제임스 테이버를 깁슨에게 소개했다. 테이버는 발굴 현장에 필요한 학생들을 제공하기로 했다. 2000년 3월 그런 학생 가운데 리 허치슨과 제프 포플린은 동굴내 오른쪽 기반암의 바닥까지 파내려 갔다. 수일 동안 발굴팀은 4∼5세기의 두터운 회색 도기 조각들을 발견했다. 깁슨은 벽에 그림을 새긴 비잔틴 수도사들이 동굴 속에 요한의 성지를 만들었을지 모른다고 이미 결론내린 상태였다. 허치슨과 포플린은 발 아래서 새로운 것도 발견했다. 섬세한 붉은 도기 파편이었다. 깁슨은 그것을 보고 첫눈에 “1세기 로마 시대 유물”이라고 단정했다.

그 발견으로 발굴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파내려갈수록 그런 파편들이 수없이 나왔다. 깁슨은 그 도기들이 의식에서처럼 의도적으로 파손된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또 그는 인간의 발 모양이 새겨진 바위 하나를 발견했다. 그 바위에 난 작은 수로가 작은 웅덩이로 이어져 있었다. 그에게는 그것이 발에 기름을 붓는 침례반(浸禮盤)처럼 보였다. 그런 고고학적 단서에다 침례 요한과 그 지역을 연결짓는 구전 및 기록을 바탕으로 깁슨은 요한이 직접 그 동굴에서 신자들에게 침례를 베풀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그의 일부 동료들은 그것을 놀랄 정도로 대담한 비약이라고 지적했다.

“고고학에서는 글로 쓰인 증거라고 해도 확실한 것은 없다”고 깁슨은 인정하면서도 이렇게 덧붙였다. “요한이 그 동굴을 사용했다는 증거는 고고학적 유물의 견지로 보면 더 이상 확실할 수 없다. 물론 ‘나, 침례 요한이 여기에 왔었고 내 제자들이 이곳을 의식을 거행하는 장소로 사용했다’는 글이 새겨져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대개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동료 가운데 그의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동굴을 직접 본 학자들조차 그렇다. 이스라엘 문화재청의 수석 고고학자로 자신을 깁슨의 친구라고 말한 데이비드 아미트는 이렇게 말했다. “깁슨과 집단농장측이 관광객들을 유치하려고 한 것 같다. 이건 순전히 소설이다. 고고학이 아니다.” 그 동굴이 1세기에 침례 목적으로 사용된 것이 틀림없다는 깁슨의 주장에 동의하는 테이버도 “요한 자신이 이곳에 왔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는 없다”고 인정했다.

요한이 요단강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 침례를 베풀었다는 내용이 성서에 없다는 주장도 있다. 또 깁슨의 책에 묘사된 다음의 시나리오는 억측에 가깝다. “요한은 자신의 초기 침례 장소에 예수를 의도적으로 보냈을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의 추바 동굴이 바로 그 장소다.”

아무튼 깁슨의 이론을 반박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추바 동굴은 앞으로 오랫동안 관광객들을 끌어들일 것이다. 2천년 전 예수와 침례 요한, 그 제자들은 우리의 운명을 영원히 바꿔놓고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이래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 계속 애쓰고 있다.

With DAN EPHRON and JOANNA CHEN in
Israel, EMILY FLYNN in London,
JULIE SCELFO, MARY CARMICHAEL and
CLAIRE SULM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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